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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

오늘의정진: 是以禪門了却心학시이선문료각심 / 그러므로 선문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 100일 정진, 6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다섯번 째 구절은

<損法財滅功德 손법재멸공덕 / 법의 재물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막불유사심의식 /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였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고 서는 법의 재물이나 공덕을 가지고 있다 해도 유한하다. 

아직도 상()이 남이 있는 탓이다.

무아(無我)’, 라는 상이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


오늘은 예순 여섯번 째 구절

是以禪門了却心/ (바를 시, 써 이, 고요할 선, 문 문, 요달할 료, 물리칠 각, 마음 심)

시이선문료각심 / 그러므로 선문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頓入無生知見力/ ( 조아릴 돈, 들어갈 입, 없을 무, 날 생, 알 지, 볼 견, 힘 력 )

돈입무생지견력 / 태어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 가도다.


어제 심의식을 다루면서 마음은 모두 8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했었다.

성철 스님은 마지막 제8야뢰야식을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풀이하셨다. 깨달음의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업식(業識)에 의한 뿌리 깊은 분별을 뽑아내야 된다는 의미이다. ()물리치다는 뜻으로 해석하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마음 심()을 제8야뢰야식, 무명업식으로 봐도 맞지만 우리의 근본 마음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각()은 현대 중국어에서 쓰는 (que) 오히려'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히려 마음을 요달해야’, 즉 마음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마음을 물리치고' '마음을 요달하고' 라는 뜻은 분명이 겉으로 볼 때는 완전히 상반된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모두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수행의 목적은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오직 마음만 지켜볼 뿐이다.

마음 이외에는 모두가 신기루 같이 사라지는 것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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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8

오늘의정진: 損法財滅功德 손법재멸공덕 / 법의 재물 덜고, 공덕을 없앰은


- 100일 정진, 6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네 번째 구절은

<學人不了用修行학인불료용수행 / 배우는 사람은 마치질 못해서 수행을 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진성인적장위자 / 참으로 도둑의 아들이 됨을 인정하는 꼴이다.> 였다.


산 골짜기에 있는 물이 바다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곡절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하게 될 까?

우리의 수행도 그와 같아서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헤메야 하는 것일까?

파도는 바다를 떠나지 않듯이, 우리의 중생심은 부처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수행은 비록 도둑의 아들에서 시작했지만 마침내 부처의 아들로 여정을 마칠 것이다.


오늘은 예순 다섯 번째 구절

損法財滅功德 / (덜 손, 법 법, 재물 재, 멸할 멸, 공 공, 큰 덕)

손법재멸공덕 / 법의 재물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 ( 없을 막, 아닐 불, 말미암을 유, 이 사, 마음 심, 뜻 의, 알 식 )

막불유사심의식 /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부처의 아들이 되었다면 당연히 부모인 부처로 부터 상속을 받는 재물이 생긴다.

부처에게 물려 받는 유산인 셈이다. 부처에게 받는 유산이란 법의 재물과 공덕이다. 법은 다르마(Dharma) 라 부르고, 즉 진리를 뜻한다. 공덕(功德)은 선()을 쌓음으로 생기는 결과물이다. 이러한 유산은 물질적으로 물려 받는 세속적인 유산과는 전혀 다르다. 법의 재물과 공덕은 무위세계에서 상속되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심의식은 쉽게 말하면 마음을 통칭하는데 심(), (), () 각각 모두 마음을 뜻한다.

불교에서 모든 것을 마음 하나로 퉁 치지만 사실은 깊이에 따라 달리 구분한다. 그렇게 인간의 의식을 8개로 나누었는데 가장 마지막이 제 8식이다. 이를 '아뢰야식' 이라고 부르는데 현대 심리학에서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심은 바로 이 근본 마음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의는 8식중 7식에 해당하는 '말라식'으로 우리의 마음중에서 항상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에 해당한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자의식' 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식은 8식중에 6식에 해당하며, 육식은 눈, , , , , 뜻을 지닌 의식을 말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접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영역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부르는 그냥 '의식'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심의식이라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부처의 유산인 법재와 공덕을 까먹게 된다는 뜻이 된다.

   ()의 깨달음은 부처의 유산을 받아 법의 재물을 얻고 공덕을 쌓는 것을 넘어선다. 궁극의 깨달음은 바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완전한 열반에 이른 경지를 적멸(寂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절학(絶學) 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적멸이라는 불교의 용어를 도교식의 용어인 절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붙여진 이름과 용어는 달라도 그 뜻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일일 소견>

보이는 재물이나 보이지 않는 재물도 결국 유한하다.  유한함은 무상(無常)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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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7

오늘의정진: 學人不了用修 학인불료용수행 /배우는 사람은 마치질 못해서 수행을 하나니


- 100일 정진, 6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세번 째 구절은

<捨妄心取眞理사망심취진리 /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취사지심성교위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였다.


취사(取捨) , 버리고 취함은 수행자가 조심해야 할 선택 행위이다.

처음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신참자라면 수행과 관련하여 버리고 취할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다면 자신의 공부를 이끌었던 취사심(取捨心) 마저 놓아 버려야 한다.

강을 건넜다면 뗏목을 다시 들고 다닐 필요가 없듯이, 취사심도 가질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잊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가야 할 뿐이다.


오늘은 예순 네 번 째 구절

學人不了用修行/(배울 학, 사람 인, 아닐 불, 마칠 료, 쓸 용, 닦을 수, 행할 행)

학인불료용수행 / 배우는 사람은 마치질 못해서 수행을 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 (참 진, 이룰 성, 인정할 인, 도둑 적, 장수 장, 할 위, 아들 자  )

진성인적장위자 / 참으로 도둑의 아들이 됨을 인정하는 꼴이다.


절학(絶學)의 경지, 즉 배움이 끊어진 경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닦아야 하는가?

아직 배움을 마치지 못 한 사람은 수행 이랍시고 뭔 가를 더 배워야 한다고 부산을 떤다.

도둑의 아들이란, 아직 덜닦인 수행자를 뜻한다.

다 닦이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도둑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다.

듣는 어감이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수행을 마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모두 도둑의 아들들이다.

어쩌면 나는 한평생 마음공부를 하더라도 도둑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수행의 완성, 배움이 끊어진 절학의 경지는 너무나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은 계속 되어 져야 한다.

우리의 업식(業識)은 수많은 생을 거쳐오면서 쌓여 왔으므로 그걸 모두 닦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 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결국엔 깨달음의 바다에 이를 것이다.

도둑의 아들에서 부처의 아들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도둑의 아들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본래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래 가진 불성을 밝히는 것,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일일 소견>

누가 도둑의 아들이라 불러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부처의 아들이다' 라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이제 심지(心地)가 굳어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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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6

오늘의정진: 捨妄心取眞理 사망심취진리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100일 정진, 6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예순 두번 째 구절은 

<棄有着空病亦然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還如避溺而投火 환여피익이투화 /마치 물을 피하려다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있음()을 버리고 없음()만을 가질 수는 없다.  

마음공부는 양변을 모두 가질 수도버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 쪽만 취해서는 더욱 안된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공부의 길에서 내 앞에  갑자기 경계(境界)가 닥치면 어찌 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럴 때 일수록 중도(中道가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저것 이다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중도를 이해하면 안된다.

중도는 가운데 길을 가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 위를 걷지만 땅에 발을 딛지 않는다

허공을 걷지만 허공에 발을 딛지 않는다

중도는 허공 중에 메달아 놓고 걷는 줄타기가 아니지만 줄타기 보다도 어렵다.

 

오늘은 예순 세번 째 구절

捨妄心取眞理(버릴 사망령 망마음 심취할 취참 진다스릴 리 )

사망심취진리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할 취버릴 사갈 지마음 심이룰 성공교로울 교거짓 위  )

취사지심성교위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有嫌揀擇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꺼리면 된다이 떠오른다.

가리고 택하는 마음은 분별심(分別心)이다.

분별심만 갖지 않는다면 바로 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증도가(證道歌)에서는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진리를 취하는 것 조차도 분별심이라고 규정한다.

망상(妄想)은 버려야 할 것이고 진리는 취해야 한다면 그 또한 아주 교묘한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미 마음에서 망상과 진리라는 분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이든 진리든 둘로 보지 않아야 한다.

본래 망상과 진리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도는 둘이 아니 도리를 여실히 깨닫는 것이다.

망상이든 진리든 모두 본래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분별하기 그 이전즉 본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일일 소견>

분별하는 마음은 수행을 한다고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는 그 마음 자체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분별이든 아니든 다시 본래 마음만 지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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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5

오늘의정진: 棄有着空病亦然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 100일 정진, 6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한번 째 구절은

<豁達空撥因果활달공발인과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고 한다면

茫茫蕩蕩招殃禍망망탕탕초앙화 /아득하고 끊없이 재앙을 부르리다> 였다.


()’은 그저 단지 이름일 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상태라고 하지만 이름에 얽메여서는 진정 공을 알 수가 없다.

공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우리는 공()의 작용에서 살고 있다.

수행을 통해 공의 실체를 깨달아 업식이 공했다는 도리를 알았다 해도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대답 한 번 잘못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벗어날 수 없었던  화두는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공한 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동안 지었던 업의 과보는 여전히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순 두 번 째 구절

棄有着空病亦然/(버릴 기, 있을 유, 붙을 착, 빌 공, 병 병, 또 역, 그러할 연 )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還如避溺而投火/ (돌아올 환, 같을 여, 피할 피, 빠질 익, 말미암을 이,던질 투, 불 화 )

환여피익이투화 /마치 물을 피할다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서로 함께 공존하고 있다.

만약 무위법이 좋다고 하여 무위법만 추구한다면 그 또한 무()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은 분별을 낳는다.

분별로 인해 모든 조화는 깨어지고 만다.

분별은 모든 병의 근원이 된다.

병이 생기면 아프다.

아프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과 같고 뜨거운 불 속의 고통에 몸부림 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결국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만 한다.

아프지 않으려면? 괴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는 것을 피상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반대되는 면도 함께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보는 견() 보다는 관()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現象)을 깊이 관해서 둘로 보지 않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수행의 길이 아닌가 싶다.


<일일 소견>

일주일 간 한국에서 머물렀다. 이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가고 옴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이번 가고 옴은 특별했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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