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7일차 


세상 사람들은 나를 여후(呂后)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나를 두고 독한 여자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악랄하다고 한다. 그래서 나, 여후는 악녀로 알려졌다.

내가 남긴 피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마지막 얼굴일 뿐이다.

얼굴이 만들어지기까지 내가 어떤 시간을 건너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 여치(呂雉) 본래 여씨 집안의 부잣집 딸이었다.

아버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나를 패현의 한 사내에게 시집 보냈다.

사내의 이름은 유계였다.

처음 그를 마주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건들거리며 묘하게 웃는 사내는 사수의 정장 노릇을 한다고 했지만, 옷차림은 번듯하지도 않고, 말과 행동은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눈에는 유망한 관리라기보다 술과 장난에 빠져 사는 사내로 밖에 보였다.

이런 남자에게 내가 시집와야 하는지, 당시에 어렸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했다.

“저 사람은 그릇이 크다. 네가 아직 모른다.”

믿지 않았다.

눈에는 그저 집에 붙어 있지도 않고, 패거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어딘가 미덥지 못한 사내였으니까.

 

시집온 내가 먼저 배운 것은 남편의 사랑이 아니라 집안의 살림이었다.

시부모를 모셔야 했고, 형님 식구들까지 챙겨야 했으며, 집안의 빈 구석은 늘 내 손으로 메워야 했다.

남편은 동생이라 부르는, 어설픈 패거리들을 데리고 마을 곳곳에 참견하고 다녔다.

그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드나들었고, 나는 술상을 차리고 밥을 내고 뒤를 치웠다.

그들은 나를 형수라 불렀고, 나는 겉으로는 웃으며 그 소리를 들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이 많았다.

부잣집 규수로 자라던 내가 어느새 시골 아낙이 되어 있었다.

옷소매를 걷고 밥을 짓고, 아이를 안고, 집안을 지키고, 술 취한 사내들 뒷자리를 치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훗날 나를 얼마나 질기게 버틸수 있게 만들었는지.

 

유계는 이상한 사내였다. 미덥지도 못했고, 집안을 잘 돌보는 남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와 술을 마시고 떠들던 패거리들은 그를 얕보면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허풍치고, 때로는 한심해 보일 만큼 느슨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나는 여러 생각했다.

사내는 대체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가.

처음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나라의 명령으로 죄인을 호송하게 되었다.

걱정도 되었지만 무사히 빨리 돌아오기를 빌었다.

유계가 호송하던 죄인들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제 남편은 더 이상 패현으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사수의 정장에서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삶도 같이 바뀌었다.

남편이 도망자가 집안이 어찌 평안할 있겠는가.

이때부터 내게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이제 오히려 예전 사수의 정장 시기가 그리웠다.

유계는 산으로 숨었고, 패현은 들 끓었다.

 

마침, 진은 무너지며 천하는 흔들렸으며, 어제의 관리가 오늘의 도적이 되고, 오늘의 도적이 내일의 장수가 되는 세상이 왔다.

유계는 패공이 되어 돌아왔다.

패현에서 마시며 건들 거리던 사내가, 이제는 사람들이 칼을 맡기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랐다.

그러나 놀랄 틈도 없이 세상은 우리를 시대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다.

 

패공의 아내가 되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겠는가.

짓는 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고, 불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과 근심은 커져만 갔다.

패공의 아내라는 말은 좋은 옷감이 아니라, 더 큰 근심으로 짠 옷 같았다.

유계가 진을 멸하러 나서고, 다시 서쪽으로 가고, 다시 항우와 맞서게 되는 동안 내 삶도 함께 전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천하 사람들은 초한쟁패를 유방과 항우의 싸움으로 기억하겠지만, 내게 그저 그 시간은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유계가 패현을 떠난 뒤의 일곱 동안, 내게는 하루하루가 칼날 위에 선 것 같았다.

잡혀 죽을까 두려웠고, 버려질까 두려웠고, 내 아들과 딸이 변을 당할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항우라는 이름이 공포에 몰아 넣었다.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 재앙 같았다.

항우가 이겼다는 말이 들리면 가슴이 내려앉았고, 유계가 또 살아남았다는 말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항우에게 사로잡혀 있던 시간은 지금도 몸이 먼저 기억한다.

나는 포로였다. 목숨이 내 것이 아닌 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언제 모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가장 잊을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시아버지께서 기름이 끓는 앞에서 죽음에 내몰리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역시 시아버지와 함께 기름 솥에 빠지게 두려워 몹시 떨었다.

무서운 항우의 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달렸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나는 몸으로 알았다.

세상은 도리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힘이 없으면 효도도, 명분도, 눈물도 다 소용없다는 것을.

 

유계가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기어이 항우와 맞서는 동안 나도 억척같이 살아남았다

동시에 나의 마음은 점점 변해져 갔다.

순진하게도 남을 의지하거나, 언젠가 편안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들은 아무 소용도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버텨야 했다.

유계가 끝내 천하를 얻어 황제가 되면, 이 지옥 같은 세월도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패현의 형수로 세월도, 포로로 떨며 견딘 세월도, 자식의 목숨을 품에 안고 버틴 날들도, 언젠가는 다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마침내 믿을 없는 일이 발생했다. 항우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유계는 황제가 되고 한나라가 세워졌다.

천하는 모두 그의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유계의 세상이 되었다고 했지만 내게는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다른 두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우는 분명 죽었지만, 항우에 대한 공포는 죽지 않았다.

 

황제가 남편 곁에 있는 거대한 이름들, 한신, 팽월, 영포를 볼 때마다 나는 늘 예전의 항우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세상은 이미 유씨의 천하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천하는 완전히 남편의 손에 들어온 것 같지 않았다.

 

한신은 남편을 보는 같았고, 팽월은 음흉했으며, 영포는 너무 사나웠다.

그들을 경계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불안한 두려움은 분노로 변했다.

분노는 쌓여서 독한 마음으로 굳어졌다.

나는 그때 부터 그들을 남편 대신에 먼저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바깥의 적이 사라졌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무서운 싸움은, 우리가 쌓아온 것을 지키는 싸움이었다.

 

패현의 형수 노릇만 하고 있어서는 더는 궁중에서 살아남을 없었다.

술상을 차리는 손만으로는 궁궐 적들의 칼을 막을 없다.

이때 나에 남겨진 것은 하나였다.

죽음을 오가는 끝에 끝내 남은 것은 독함 뿐이었다.

독함은 생존이라는 체에 거르고 걸러진 생의 하나 남은 결정체였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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