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일차
<良由取捨 /양유취사/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所以不如/소이불여/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虛心者福矣, 허심자는 복의라.
마음이 허함은 가난함이 아니요. 오히려 충만한 믿음의 밭이라.
믿음의 밭이 충만한 자, 하늘 복이 영글어 지리니
복이란, 물질적인 행운이 아닌, 영생(永生)을 얻음이라.
본래 도(道)는 나고 죽음도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라고 한다.
영생이란 것도 남이 없으니(不生) 죽을 것도 없음(不死)에 영생(永生)이라 한 것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
무흠무여(無欠無餘)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이를 믿고 따르는 자 즉 신심자(信心者)가 바로 허심자(虛心者)가 아닐까?
신심명과 마태 복음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取捨心), 골라서 선택하는 간택심(揀擇心), 구분하고 의심하는 분별심(分别心)등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구분 짓고, 단정하고, 의심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늘 우리는 분별하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별, 취사, 간택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생존 해왔을 수 있었을까?
원시시대부터 우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조그만 흔적에도 긴장하고 놀라며 투쟁해왔다.
그것으로 생존해 왔고 당연히 우리의 뇌구조를 비롯한 몸의 기능까지 진화해 온 셈이다.
그러나 마음 또한 그렇게 진화해 왔을까?
마음은 뇌하고는 또 다른 진화의 여정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은 본능이 아닌 또한 분명 이성도 아닌 영역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늘 여여한 그 자리가 마음의 본성이란 것을 마침내 알아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의 구속에서 벗어난 마음이란 또 다른 영역을 밝힌 자.
그 사람이 바로 붓다였다.
그리고 그가 밝힌 마음의 불은 꺼지지 않고 시대를 거듭하며 아주 소수의 믿는 자들에 의해 전등(傳燈)되어져 왔다.
승찬대사가 전하는 신심명 또한 그 꺼지지 않는 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본능과 본성이 엄연히 다르지만 그 또한 분별할 것인가?
본능(本能)과 본성(本性), 어느 것이 진화의 주역일까?
*여여(如如)한 마음 자리만 알 뿐이다.
주:良由: 어질 양, 말미 암을 유 : ~말미 암아
取捨: 취할 취, 버릴 사: 취하고 버림을 .
所以: 바 소, 써 이: ~ 까닭에 , 현대 중국어에서는 ‘그래서’ 라는 뜻으로 쓰인다.
不如:아닐 불, 같을 여: 같지 않다. 즉 여여(如如)하지 못하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만 못하다’ 라는 뜻으로 쓰인다.
*如如: 같을 여, 같을 여: 같고 같다는 한결 같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은 고정됨이 없이 변하는데 늘 한결 같다면 그것이 진리가 아닐까?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