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차: 이누야샤, 사유의 여정을 마치며
20대 후반,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시작했다.
매일 힘들게 일을 마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할 일 없이 멍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의 지인이 CD에 저장된 만화를 보내주었다.
그 시절 나의 무료함을 달래 줬던 만화가 바로 다카하시 루미코 작가의 <이누야샤>였다.
<이누야샤> 이전에 루미코 여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만화는 <란마 1/2> 이었다.
일본의 해적판 만화가 유행했던 80년대 후반, 나는 <란마 1/2> 을 처음 접했었다. 물을 부으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란마를 비롯한 서브 주인공들과의 우당탕탕한 격투극은 내게는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줬다.
란마가 소화전 호수로 물을 쏘아대면 상대가 물 위를 수영하며 나아가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더구나 대사는 코미디가 따로 없을 정도로 너무나 웃긴 만화였다.
당시엔 <란마 1/2> 이 한국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90년대 중반이 되서야 일본 만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중에 제대로 알게 된 작가 루미코 여사의 작품 <이누야샤>는 나의 20대 후반 타국의 힘겨운 직장에서 하루을 견뎌 냈다는 일종의 보상 같은 역할을 했다.
직장에서 하루를 버티고 숙소에 돌아와 이누야샤 일행의 나락과 사혼의 구슬을 쫓는 모습에 빠지게 되면 나의 고단했던 하루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최근 들어 유튜브에서 <이누야샤>의 주제 음악 ‘시대를 초월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예전에 봤던 <이누야사> 의 장면들이 하나둘 소환되었다. 세월이 흘러 잊혀졌다고 생각한 만화를 다시 돌아보니, 이 작품은 얼마나 촘촘한 관계의 서사로 엮여 있었는지, 그리고 그 당시 내가 그 안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었는지를 25년이 지난 후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사회 초년생의 멍한 눈으로 봤던 <이누야샤>가 사회를 통과한 사유의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누야샤> 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이 이누야샤의 아버지 투아왕이다.
그가 죽으면서 장남 셋쇼마루에게는 살생환을, 반요인 아들 이누야샤에게는 철쇄아를 남긴다.
살생환은 죽은 자를 베어 살리는 칼, 철쇄아는 천 마리 요괴를 한 칼에 베어버리는 살육의 칼이다. 겉으로 보기에 강한 힘이 필요한 건 장남 셋쇼마루 쪽이다. 하지만 투아왕은 일부러 그 반대로 유산을 나눠 준다.
철쇄아를 쥔 이는 반요 이누야샤, 살생환을 쥔 이는 냉혈한 장남 셋쇼마루이다.
셋쇼마루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상처이자 화두였다.
“왜 아버지는 동생에게 철쇄아를 물려 주고 내게는 쓸데없는 살생환을 남겨 줬는가? 아버지는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았지?”
그러나 아버지의 깊은 뜻에는 두 아들,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음을 나중에야 드러난다.
철쇄아가 완성되는 길에는 셋쇼마루가 반드시 필요했고, 살생환을 품은 셋쇼마루는 결국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폭쇄아라는 자기만의 칼을 뽑아 올린다.
셋쇼마루는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과하며 얻게 되는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칼, 폭쇄아를 얻게 된다.
이때 셋쇼마루는 비로소 아버지를 뛰어넘는 대요괴로 완성된다.
투아왕은 아무런 설명도, 뜻도 남겨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 공백 속에서 형제는 미워하고, 오해하고, 싸우고, 그리고 조금씩 자라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우리 삶 속 “말이 없는 아버지들”이 겹쳐 보인다.
차라리 길게 설명해 주지, 왜 늘 이렇게 묵묵부답으로 남겨 두고 떠나버리는가.
어쩌면 <이누야샤>가 보여 준 건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라, 말없이 밀어 넣는 성장의 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누야샤의 연인은 둘이다.
과거에는 무녀 금강(키쿄오), 현재에는 현대에서 온 소녀 가영(가고메)이다.
금강은 이누야샤를 믿지 못했고, 나락의 계략에 속아 그를 봉인한 뒤, 사혼의 구슬과 함께 장렬하게 죽는다. 그리고 다시 흙에서 되살아나지만, 부활한 금강의 몸은 불완전하다.
혼은 늘 흔들리고, 살아 있음 자체가 고통에 가깝다.
반면 가영은 밝다. 현대의 여학생이고, 가족에게 사랑받고, 길을 잃으면 울면서도 금세 자기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가영은 사혼의 구슬을 품고 태어났고, 금강의 환생이다. 한 사람은 “상처 난 과거의 나”, 다른 한 사람은 “지금 여기의 나” 처럼 보인다.
이누야샤는 둘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팡질팡한다.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자신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영은 결국 이누야샤와 함께 과거에 남아 살아가기로 선택하지만, 금강을 끝까지 존중해 준다.
어쩌면 금강의 상징은 내 과거의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안의 금강과 싸우는 꼴이다.
하지만 <이누야샤>에서 보면 과거의 나락을, 상처를, 잘못된 선택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의 사랑과 지금의 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아도,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산고와 코하쿠의 이야기는 참 잔인하다.
나락의 조종으로 코하쿠는 가족을 죽이며, 산고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끝없는 죄책감과 분노를 짊어지고 산다.
산고에게 동생 코하쿠는, “살려야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찢어놓는 존재”다. 그래서 그를 향한 감정은 늘 이중적이다.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지키고 싶지만,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 같은 절망. 그 옆에서 미륵은 늘 흔들리면서도 서 있다.
수행자임에도 끊임없이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반쪽짜리 수행자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자기 몸을 내던지는 남자이다.
산고–코하쿠–미륵의 서사를 보면, 우리가 가족과 타인을 향해 쥐고 있는 감정의 복잡함이 그대로 비친다.
완전히 용서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끊어내지도 못하는 채, 그냥 같이 가는 것.
그게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선택하는 최선의 사랑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누야샤>에는 사연 없는 인물이 거의 없다.
늑대요괴 족장 코우가는 가영을 향한 직진형 사랑을 보여준다. 이누야샤와는 끝없는 견제와 경쟁을 반복하지만, 그 저돌적인 사랑의 구애는 웃음을 자아낸다. 여우 요괴 싯포는 늘 투덜대고 도망치지만, 실제로 가장 먼저 동료들 곁으로 뛰어드는 존재다.
그는 이 여정의 “아이”이자, 우리 안에 있는 겁 많은 어린 자아를 상징하는 것 같다.
바람의 요괴 카구라는 나락의 부하이면서, 동시에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나락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에게 묶여 있는 자신의 운명을 끝까지 끊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죽음 직전에 맞는 한 줄기 바람은 어쩌면 그녀가 평생 원했던 진짜 자유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나도 내 얘기가 있다”고 말하듯 자기 서사를 품고 스쳐 간다.
이 작품에는 최소한 열두 겹의 서사 층이 겹쳐져 있다.
가족과 혈통, 사랑과 질투, 복수와 용서, 시간(과거–현재), 인간과 요괴의 경계, 몸과 상처, 욕망과 구원, 그리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로 돌아가는 정체성의 질문까지. 그래서 <이누야샤>를 다시 읽으면, 어디를 보아도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인물을 집어도 삶의 단면이 잡힌다.
아마 그게, 세월이 흘러도 이 작품이 낡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중국이라는 타지에서 반요 같은 존재로 살아온 셈이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면서, 어딘가 두 세계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삶이었다.
그때 매일 밤, 반요 이누야샤의 불안, 셋쇼마루의 고독함 뒤에 숨겨진 따뜻함, 가영이의 내면의 갈등, 산고와 코하쿠의 저릿한 죄책감, 남자라면 이해가 가는 미륵의 행동, 그리고 내 안의 귀엽지만 겁 많은 싯포를 보았다.
아마 나는 그들을 통해 내 안의 감정들을 본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완전히 용서하지 못해도 함께할 수 있고, 과거의 나를 지우지 않고도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끝까지 자기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만화는 그 전부를 보여 줬다.
그래서 내게 <이누야샤>는 철학 텍스트이기 전에, 버티게 해 준 한 편의 이야기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만화가 언젠가 “나락, 테세우스의 배, AI, 에덴 동산, 신과 인간”으로 사유의 여정으로까지 확장되리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서툴고 무모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무리의 등장인물들이었다.
이제 나도 내 삶에서 이누야샤처럼, 셋쇼마루처럼, 산고와 미륵처럼, 그리고 나락과 수많은 조연들처럼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리도 결국, 각자 한 편의 <이누야샤>를 쓰고 있는 주인공이다.
이 글은 결국, 25년 전 사회 초년생이 지금의 다카하시 루미코 여사께 바치는 늦은 한 장의 헌정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미코 여사가 만들어 준 세계에 대한 작고 늦은 인사이기도 하다.
ありがとう、高橋留美子先生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