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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아극장>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유모아 극장
엔도 슈사쿠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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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웰컴투, 유모아 극장! 유모아 극장에 오신 관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 유모아 극장』은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부르르 떨리는 그 이름, 소설 좀 읽어봤다 할라치면 반드시 읽고 넘어야 할 작가 중의 작가, 킹중의 킹,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일관되게 고민해왔던,  20세기 일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그 이름도 찬란한 그는 바로, '엔도 슈우사쿠우'! 그가 우리에게 '유모아' 정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엔도 슈우사쿠우'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일본 내에서 1955년에 등단과 거의 동시에 아쿠타가와상( 「하얀 사람」)을 거머쥔 것으로 시작해서, 1958년에 신초샤문학상과 마이니치출판문화상을 동시 수상(『바다와 독약 』)하고, 1966년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침묵』)을, 1979년에는 요미우리문학상을(『 그리스도의 탄생』), 어따 숨 좀 돌리고, 1980년에는 노마문예상을(『 무상』), 1994년에는 마이니치예술상(『 깊은 강』) 등으로, 작가 활동 기간 내내 일본에서 주요 문학상을 휩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훈장과 각종 상을 휩쓸어버리고 온, 노벨 문학상의 강력한 후보자였던, 일본 독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총아寵兒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뇌하는 작가로, 늘 세상과 인생 문제를 똥눌 때조차 잊지 않고 고민하고 있을 거라는 이미지에 고정되는 게 싫어했던 그는 안선생보다 더 푸근한 옆집 아저씨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웃음'을 주러 돌아왔던 것입니다. 『 유모아 극장』은 그의 이런 소박한 바람이 가득 들어있는 '동네 극장'인 셈입지요.  


   60년대 당시에는 무척 기발했을 소재들이 『 유모아 극장』에서 쏟아집니다. 영화 속 장면처럼 평소에 흠모하는 여인의 몸 속에 들어가보게 되는 상황('마이크로결사대'),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발명품들('우리들은 에디슨'), 침팬지에게 격렬한 애정공세를 당하는 주인공('아르바이트 학생'), 자신과 꼭 닮았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남자('나와 쏙 빼닮은 남자가...'), 견생犬生의 무게를 느껴보는 주인공('동물들') 등.  

하지만 아무리 어깨 힘을 쫙쫙 빼고 돌아와도, 여전히 그의 유머 속에는 뼈가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꼭꼭 씹어 먹게 만드는 삶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인간과 삶에 대한 날키로운 '엔도 슈우사쿠우' 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냉소보다는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그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단편들은 물론 특히 인간의 허영이나 허례의식을 들춰보는 단편들('여자들의 결'투, '가루이자와')과 함께 삶의 따뜻한 향기가 느껴지는 단편들('하지 말지어다', '우리 아버지') 등을 통해, 우리는 마지막 장까지도 이러한 엔도 슈사쿠만의 '유머'를 실망하지 않고 확인할 수 있습지요.

아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집 나간 남편 때문에 울고 있는 아줌마, 짝사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옆집 총각, 취업이 안 돼 괴로워하는 아랫집 처자, x알 친구한테 배신당한 아저씨 등등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에게 우리의 엔도 슈우사쿠우는 "나처럼 찌질한 인간이 어디있어" 라고 멋쩍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내면을 웃음과 함께 비틀어주시는 할배의 마음이 느껴지는 『 유모아 극장』!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단돈 9000원으로, '엔도 슈우사쿠우'만의 유머를 만나보시기를, 물론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그 누구라도 만화책 좀 빌려달라고 덤벼들 수 있는, 킹왕짱 B급스런 표지가 주는 즐거움은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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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개청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위풍당당 개청춘 -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
유재인 지음 / 이순(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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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항상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나였더랜다. 00 왕자와 행복하게 결혼을 했다라고만 끝맺는 동화들, 7전 8기로 000 대학에 입학하거니 00 시험에 합격한 이들의 수기들, 로또 1등에 당첨된 이들의 삶과 00으로 주식이든 사업에서든 대박난 이들 삶,
그 이후 삶은 어땠을까? 그들은 그 이후로,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1.
  <<위풍당당 개청춘>>(이하 청춘)은 낙타가 드디어 바늘 구멍에 들어가사, 어렵게 취업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꿈나무가 되지 못하고 '청춘'을 저당잡힌 이십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저자는 그렇게 소망하던 '직장인'이 됐으니, '동화 공식'에 따르면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그녀는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있었을까?

청춘이란 게,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는 글이 생각난다. 돌도 씹어먹을 수 있는 육체적 나이를 말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마따나 청춘이란 게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뜻한다면, 껍데기 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 생활 속에서(73면), '첫 문장 들여쓰기 3칸'에 상상력을 수장시켜야만 하고(125면), 강인한 의지는 월급날에 맞춰 꺽일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이십대들(그나마 취업에 성공한)은 언제 청춘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형상을 한 적(敵)이 사라진 시대(168면)를 살아가는 이십대들에게, 저자는 통쾌하게 외친다.
"우리가 무슨 봉입니까"(170면)


<<청춘>>이 갖고 있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잠깐! 다음 내용을 이어가기 전에 단점부터 말하련다. 

2.
  일단 <<청춘>>은 재미있다. 이게 무슨 단점이 되는냐라고 반문한다면, 이게 꼭 이십대가 아니어도 직장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재미있다는 거다. 더더욱 이게 무슨 단점이 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청춘>>이 '책'이라는 데 있다. 그러니까 <<청춘>>은 한줌의 냉소와 두줌의 재치가 저자의 통찰과 입담으로 잘 버무려져 좌충우돌 '행정직 직딩 초년사'를 유쾌하게 풀어냈으나, '개인사'를 담아냈다는 한계가 느껴진다는 거다. 요컨대, 블러그나 싸이질을 통해서 쏟아질 수 있는 이야기를, 책으로 묶었다는 말이다. <<청춘>>은 그 부제까지도 철저하게 20대 독자층을 겨냥해서, 편집과 구성면에서도 언제어디서든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졌고, 그에 걸맞는 저자를 발굴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치더라도, 딱 그 정도의 유쾌함과 메시지를 느끼고자 한다면 아쉬울 게 없으나, 한 권의 책으로서 그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을 갖고 메시지를 던져주는 힘을 느끼고 싶어했던 독자라면, 너무나 실망스럽지 않을까 한다. (하긴 책표지나 구성을 보면서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발간 의도를 넘어선 것 같지만) 아무튼 또 그렇다치더라도 오프더레코드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왜 여기에 굳이 있을까" 라는 강한 의문을 들게 만든다. 엄마에게 메신저를 가르쳐 드리고, 예의있는 신랑을 만들기와 저자의 아이팟 나노 구입에 관한 주변의 반응 등이  "위풍당당 개청춘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잔혹사" 라는 원제와 부제목을 무척 낯설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혼녀가 '너무 가진 자' 같다며, 이 책의 컨셉에 맞춰 남편을 남친으로 바꿨다고 말하는 저자의 고백이 하등 배반스럽지 않으나, 한 권의 책으로서 갖는 완성도에서는 아쉬움을 크게 느끼는 구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과 같은 목소리(굳이 책의 형태가 아니더라도)가 나온다는 건, 희망적이다. 


 3.
'이십대, 까도 우리가 까자는 것(164면),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 

 포식자가 지배하는 생태계 구조와 닮은 이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잊어버리지 말자는 결의와 다짐으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그녀, 삶의 비밀이란 게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요하임 바우저의 말을 인용하며 타인의 삶을 보려는 그녀, 자신이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꿔가며 살아보려고 했다는 보네커트 옹의 말을 좋아한 그녀,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녀를 통해 이 사회에 저당잡힌 '청춘'을 돌려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느껴진다.

수많은 청춘들이 '기쁜 삶'을 누리지 못한다.  "이력서를 백번쯤 쓰고 천신만고 끝에" 취업에 성공한 이들이나 "서른이 다 되도록 아르바이트"만 하는 이들이나, "88만원 세대"라는 숫자로 정의되고 이 시대 속에서 그들은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절망과 좌절을 안겨주시는 사회, 이 사회에 그대로 수긍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잃지 않고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꿔가며, 내가 주체가 되고,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간다면, 우리들은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십대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잃어버린 시간, 그 '청춘'을 이제 돌려받기를 원한다. 내 청춘을 돌려받자는 것! 내가 주체가 되고, 사회가 만들어낸 '루저'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진정한 나의 삶을 느끼고 살아가자는 것.  모두가 '빛나는 청춘'을 돌려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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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망, 너무 사양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마망 너무 사양해 - 행복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꼬마 파리지앵의 마법 같은 한마디
이화열이 쓰고 현비와 함께 그리다 / 궁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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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길, 하나의 삶, 하나의 성공,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그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당시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고, 그 때문에 그 아름답던 시절을 참 우울하게 보냈더란다. 물론 나름대로 저항도 하고 거부도 하면서 또래 친구들에 비하면 자유롭게 살았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언제나 그들보다 뒤처진 사회적인 지위라든가 경제력이라든가로 환산되었다. 당시에는 그게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들이대는 대차대조표에서 나는 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혹여 그때의 나처럼 성공이나 행복이 그 한 가지밖에 없다고 믿으며 빛나는 청춘을 여전히 저당잡히고 사는 건 아닐까.

  <<마망 너무 사랑해>>(이하 마망)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내가 혹은 나처럼 살아왔을 누군가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단순히 문화적인 차이를 겪으면서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그냥 책장을 덮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이유로, 내가 멀지 않은 미래에 결혼하게 되어 그 나라로 날아가지 않는 이상, 흥미가 당기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타국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자녀는 커녕 결혼조차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마망 >>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생각되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개개인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을 수 있는 공간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건, 단순히 문화적 차이를 그린 에세이를 보는 것과는 달랐다. 앞서 말했던 내 지난 삶이 <<마망>>을 읽는 내내 겹쳐졌으니까. 그리고  이 땅에서 자라나고 있는  또다른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똘레랑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내 세대까지도 그런 사회가 되지 못했다면, 다음 세대들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부터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후세대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이 땅에 태어난 내게 주어진 의무가 아닐까 하는 것.

   
  [마시멜로 이야기]가 불편했던 이유는 '성공'이라는 잣대로 자제력이라는 인간의 한 특성을 추출해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 성공은 행복의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자유를 가진 개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다. 평범하고 잔잔한 행복을 추구할 선택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68면  
   


프랑스 교육 이야기도 나오는데, 나 역시 "관계"에 얽매이고 사는 삶에서 결국은 완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행위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니라 관계의 의해 결정된다는 것.

   
  "프랑스 교육의 핵심은 '자기생각'을 고민하게 만들고 '자기생각'을 표현하는 훈려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 이라는 프랑스 꼬마를 보면서 '자기 자신'보다는 '관계'에 얽히고  살았던 내가 때때로 뒤통수를 살짝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낄 때가 있다. " - 150면  
   


최근에 '둘째'가 결혼했는데, 둘째와 새언니가 결혼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결혼이 완전히 '관계'들이 얽매이는 순간이구나, 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언니는 이제 무얼해도 시부모와 시동생 등 시가쪽 가족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챙기고 배려하고 있었으니까.

결혼과 같이 작게는 가족 관계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적 관계 속에 우리는 얼마나 얽매이고 살고 있나. 지금의 나는 비록 이렇게 관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비명을 질러도, 적어도 다음 세대들에게는 <<마망>>의 아이들처럼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줘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   

 끝으로, 만약 <<마망>>을 안 읽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또 언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당장 관심있는 분야의 책이나 필요한 책만 읽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든 거다. (현재는 필요한 책만 겨우 읽고 살고 있고 나지만.) 철학이란 게 정말 '철학서'에만 들어있는 게 아니니까. 다시 한 번 내 삶을 돌아보게 하거나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게 하는 글들, 그 글들이야말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정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어떤 분야의 책을 한 번쯤 집어서 읽어보는 것도 참 신날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안 읽은 분야의 책으로, 무엇이 있을까?  읽어야 할 책이 참 많다.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도 행복할 수 있어. 행복이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어. 하늘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거나, 구남 냄새를 맡고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엄마가 비주를 해주거나, 이런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행복이라고 할 수도 있어.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자신도 행복감을 느끼기도 해. 행복은 사람에 따라 모양과 색깔이 다르지. 하지만 그 크기와 질을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야." - 2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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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 - 세쌍둥이와 함께 보낸 설피밭 17년
이하영 지음 / 효형출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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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꽉 막힌 도로와 차들, 환승역에서 차갑게 스치는 수많은 익명의 군중, 통장에 찍힌 잔고와 다음 달에 이메일로 날아들어올 카드명세서. 24시간 운영되는 대형 마트에서 피곤에 찌든 직원들의 옆얼굴을 스쳐지나가며 카트 안에 더 넣을 물건과 빼야 할 물건을 결국 계산대 앞에서 망설여보기도 하고, 마트에 가지 못한 날은 편의점으로 달려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물건을 구입하기도 하며, 도시의 불야성 그 불빛을 바라볼 때, 꿈을 꿉니다. '곰배령 꽃비가 내리는 세상'을.

봄이면 피는 꽃들을, 여름이면 녹음에 둘러쌓이고, 가을이면 지는 낙엽들과 겨울이면 눈밭에 쌓여, 그 계절의 변화를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접하는 게 아니라 직접 온 몸으로 느끼며, 몇 가구 안 되는 이웃 주민들과 나무는 물론 숲속의 동물들과도 그 계절을 준비하는 세상을. 직접 담근 메주로 만든 된장을 멸치 넣고 팔팔 끓인 뚝배기 안에 풀고, 내가 심은 모종에서 무럭무럭 자란 청양고추와 호박과 감자와 양파를 댕강댕강 썰어, 해감시켜놓은 바지락과 함께 퐁당 집어넣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국을 내놓는 밥상을.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를 읽었을 때, 이루지 못할 꿈의 한자락을 보는 것 같아, 저는 보는 내내 울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삶,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겨져 있는 이 곳의 삶, 짬짬이 각종 공연과 미술관에 들리면서 대신 풍요로운 문화 생활이 이 곳에 있지 않느냐 위안을 삼아보아도, 채워질 수 없는 삶의 그리움, 본시 고향이 갯벌 내음 나는 바닷가 부근이었던 저에게 도시의 삶은 언제나 채워질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바다로 흩어졌던 연어들이 떼를 지어 강으로 돌아오듯, 회귀[回歸] 그 귀소본능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저는 오늘도 통장에 찍힌 숫자를 들여다 보며 내일의 삶을 꾸려가야 합니다. 오늘이 아닌 미래를 잔고에 따라 먼저 계획하며 살고있는 도시의 삶 속에서,  세쌍둥이와 함께 곰배령 그 "풀꽃세상"에 터를 잡은 그녀의 모습은 여행지에서 얻은 엽서 한 장이 되어, 꿈처럼 그리움처럼 다가옵니다.

   
  "필녀를 통해 나는 낟알 하나의 의미를 익혔으며, 한솥밭을 먹는 사람들이 바로 식구라는 사실을, 그리고 밥솥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 (...)필녀에게 받은 밥솥의 뜻은 내 가슴에 싱싱하게 살아있어 오늘도 내게 밥을 짓게 하고 있다. 그러니 햇살이 좋으면 햇살이 닿는 대로, 꽃이 피면 꽃빛이 비치는 대로 눈 내리고 비오는 창가에서 소록소록 밥이 끓고 있는 우리 집 부엌을 필녀가 보면 참 좋아하겠다." -58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고향이지만은, 그러나 저는 이 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녀처럼 필녀와 같은 이를 만나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준 이 곳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꿈과 저의 꿈이 만나 하고 싶은 일이자 해야 할 일이 된 그 꿈을 이루게 되는 그날, 저는 그제서야 짐을 덜고 연어처럼 고향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쉰이라는 나이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지는 때. 나도 어머니처럼, 곰배령의 꽃들처럼 언젠가는 저물어갈 터다. 아아, 사랑하고 살기도 짧은 세월 속에 무엇을 더 두리번거릴 텐가. 하산 길,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진다. 나 사는 세상으로 돌아가 더욱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가야지. 곰배령의 꽃들처럼 찬란하게, 내 어머니들 사신 것처럼 지극하게" - 228면  
   


  책조차 필요한 책만 겨우 읽고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단비와 같이 만난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 가끔 이 삶이 너무 지쳐 쉬고 싶을 때, 곰배령 그 설피밭으로도 달려가보렵니다. '곰배령의 꽃들처럼 찬란하게, 당신의 어머니들이 사신 것처럼 지극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만나고 나면, 오늘도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는 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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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2010-03-0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의 꽃님,
하고 싶은 일들을 가슴에 품고 해야 할 일들 앞에 서 있는 그 기분,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시험을 앞에 두고 소설책이 읽고 싶다거나
외출약속을 잡아놓고 갑자기 옷장정리를 하고 싶다거나, 글이 쓰고 싶다거나,
등등 ,

저의 일상은
거의가 must와 wish 사이의 줄다리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었지요.
옛날엔 must 가 우세했는데 요즘은 점점 wish가 힘을 얻고 있는 듯해요.
아마도 당위(must)의 항목이 많이 줄어들은 듯...
한동안 의무를 권리로 말을 바꿔 사용해 보았습니다.
청소할 의무를 청소할 권리로
밥 할 의무를 밥 할 권리로,
눈 치울 의무를 눈 치울 권리로
지불할 의무를 지불할 권리로^^
숱을 쳐낸 머리카락 처럼 일상이 다소 가볍게 느껴졌답니다.^^
그런데
바람의 꽃님의 '그 사람들의 꿈과 저의 꿈이 만나 하고 싶은 일이자 해야 할 일이 된 그 꿈을 이루게 되는 그날,'
을 읽으며 must와 wish가 함께 하는 꿈을 만나봅니다.
짜장면과 짬뽕사이에서 습관적으로 고민하다가 처음 짬짜면을 만날을 때의 그 참신하던 기분과 흡사합니다,^^
환하고 멋지게 여겨집니다.
좋아 보이면 꼭 따라하게 되는 습성이 있는 저는
'must와 wish'를 소명과 소망이라 부르는 꿈의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적극 따라하기를 선택합니다.
기왕에 하는 일이라면 소명이자 소망이라 생각을 전환하면
훨씬 신나고도 재밌게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흔들리는 것은 마음' 에 적극 한표^^

책 읽어주심, 리뷰 올려주심 , 고맙습니다.
그리고 올려주신 리뷰'곰배령의 꽃들처럼 찬란하게 '를
저희 세쌍둥이네 풀꽃세상 홈피 (www.jindong.net)풀꽃사는 이야기방에
옮겨두었음을 신고합니다.
그럼, 바람의 꽃님 즐거운 봄날 맞이하시기를 고대합니다.
지금, 눈 펑펑 쏟아지는 진동리에서...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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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봄비가 내리던 2월의 어느 오후, 그 빗소리가 왜 이렇게 가슴을 파고 드는지, 왜 이렇게 먹먹한 심정이 되어 내리던 비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립고 반가운 님을 만나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 사람이 모퉁이 돌아 보이지 않은 그 순간까지도 손을 흔들고 있을 때, 문득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 이와 같을까.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  "생의 어느 한 부분을 안다는 것으로 서로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끼리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는다는 말, 그런 소설이 되기를 바랐다는 말, 그 문구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아, 이 사람이라면 내가 왜 우는지 알겠구나, 이 사람의 글이라면 그리움이 뭔지, 삶이 뭔지, 겨울의 끝자락에 내리는 비의 의미가 뭔지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정말 그러했다.

가슴이 참 따뜻해지는 소설을 만났다. 참 아픈 생을 살아오셨는데 손녀에게 그 시절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며 주름진 얼굴로 웃음을 만들어주셨던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소주 한 잔 들이키면서 웃어주던 누군가의 얼굴처럼, 다가왔던 소설이었다.

심사평 중에 공지영 작가의 말이 참 와 닿는다.

   
  처음에는 그렇고 그런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흥미를 끄는 독특한 문장도 구성도 등장인물도  없었으니까. (...) 그리고 책장을 다 덮은 후에 나는 알았다. 오직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그 역할, 오직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그 질문, 뿌연 안개 낀 저녁 거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이 소설은 줄곧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230면  
   


누군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왜 한국 소설을 읽느냐고. 소통을 거부한 글, 재미없는 글, 빈곤한 소재의 글, 그 쳇바퀴 같이 도는 한국 소설에 질린 이들에게 그래도 나는 소통을 거부하지 않는 글, 재미있는 글, 눈이 번쩍뜨이는 소재로 감칠맛나게 쓴 글이있다고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덧붙이면서 나는 한국 소설을 읽으면 삶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모국어는 힘이 세다. '대문'이라는 단어 그 하나만으로도 삶이 배겨나온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함께 숨바꼭질하며 칠이 반쯤 벗겨진 대문집을 여러 번 드나들기도 했고, 누군가의 집, 그 대문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성거리기도 했고, 한겨울 어느 날, 열쇠를 잃어버려 빈집의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을 때 윗집에서 기르던 백구와 함께 눈을 맞기도 했던 나.

외국 소설은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어도 애초에 그들이 그려낸 삶과 역사가 다르니 모국어가 주는 그리움이 남겨있지 않다. 물론 한국 소설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 힘이 있는 건 아니다. 공지영 작가의 말처럼 오직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그 질문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작가의 글, 그러한 글만이 그리움이 될 수 있지 않을런지.

   
  빛은
조금이었어.

아주
조금이었지.

그래도 그게
빛이었거든.

- 2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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