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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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른 시간 내 읽을 책이 필요했다. 저 책은 술술 읽힐 것 같지만 분량이 많아서 제외, 얇지만 검증 안 된(여기서 검증은 내가 기존에 접해본 작가냐 아니냐는 것) 책도 제외, 얇지만 분명 골 때릴 것 같은 책도 제외... 이런 식으로 제외하다가 낙찰된 책이 바로 <예지몽>!

  결론부터 말하면, 빨리 읽을 수는 있었지만 평소 게이고에 관한 기대치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진다는 거! 하긴 여기서 말하는  게이고에 대한 기대치는 <용의자 헌신 X > 에 근거한 것이니, 왠만한 작품은 눈에 안 들어올 수밖에.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당시에) 백야행이나 방황하는 칼날 먼저 보는건데 말이다. 슬슬 <용의자 헌신 X > 에서 보여줬던 그 치밀한 구성과 반전, 그 속에 녹아있는 사물이나 현상을 통찰하는 그 능력이 그리워지니.)

  아무튼 <예지몽> 이나 그 전에 읽었던 <탐정 갈릴레오> 는 <용의자 헌신 X > 과 같은 급으로 놓을 수 있는 시리즈 라기 보다는 <용의자 헌신 X > 을 탄생시키기 위한 여러 사건과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습작 같은 거라고 본다. - 이 말은 써놓고 보니 뻘쭘스럽긴 하다. 출판사 책소개에도 이미 그렇게 나와있거든! -  <예지몽>은 제목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오컬트적인 현상들이 보여지는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고 <탐정 갈릴레오> 역시 '과학 미스터리'로 불려질 수 있는 현상들이 등장하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렇게 보니 오컬트와 과학 미스터리가 따로 구분된 듯 말했지만, 둘 다 영어라는 거! 뭐, 같은 범주라고 본다. 아무튼 둘 다 초자연적은 현상을 보여주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여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거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모든 현상들이 결국 '과학적 원리'에서 설명되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가와에 의해 설명되어지는 그 모든 기이한 사건들은 결국 '모든 현상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라는 게 증명되는 거다.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게 뉴턴의 제3법칙인가, 어떤 물체에 힘을 가하면 그 물체도 반대방향으로 똑같은 크기의 힘을 가한다는 것. 크기는 같으나 방향은 반대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 아무리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힘(과학적인 현상)을 찾는 과정은 확실히 흥미가 유발된다.  

 유가와가 간간이 보여줬던 간단한 실험이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보여주는 과학적인 원리들은 원체 과학이나 물리학 방면에 문외한인지라 일단 호기심 충족면에서는 먹고 들어갔다. 그러니까 <예지몽> 이나 <갈릴레오> (그러고 보니 이 둘이 계속 세트로 붙네) 는 어떤 추리 소설을 본다는 느낌보다는 '호기심 천국'을 보는 기분이었고, 그만큼 구성은 떨어지는 단편들이었다. 뭐, 이 책을 읽게된 동기로만 보자면, 아주 잘 찾은 셈이지만.

  <갈릴레오> 에서도 괜찮은 단편이 있었는데, <예지몽>도 그렇다. '그녀의 알리바이'에서 <용의자 헌신 X > 삘이 났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또 말하면 <용의자 헌신 X > 삘이 나서 좋다는 게 아니라 <용의자 헌신 X >에서 보여줬던 허를 찌르는 지점이 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알리바이'가 확실히 <용의자 헌신 X >의 전신처럼 보이긴 하구나! - 역시 새삼스런 말이다. - 여튼 그녀의 알리바이에 초첨을 맞춘다면 더욱) 히가시노에게 '통찰력'이 있다는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이런 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용의자 헌신 X >에 나왔던 말처럼,  "기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함수 문제"라는 것. 관점만 달리 보면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 그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

 추리 소설이라고는 홈즈 시리즈와 애거서 크리스의 책 몇 권만 보았던 내게 단순히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트릭만으로 이뤄진 추리 소설이 아닌 삶의 이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이고 식 추리 소설을 만나게 된 건 확실히 행운인 셈이다. 이런 책들을 만나면 특정 장르만 최고라는 식의 편협한 생각은 안 가지게 될 수 있으니까. 실제로 <용의자 헌신 X >이나 오쿠다 히데오의 책을 만나보기 전에는 이들의 열풍이 '가벼운 글'에 환호하는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던 거다. 따지고 보면 일본 소설이라도 가와바스 야스나리, 나쓰메 소세키 같은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책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류와 같이 검증 받은 책만 읽겠다는 독자였으니까. 여기서 '가벼운 글' 이 무엇이냐 라는 정의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과거 나의 정의는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이렇다. 표피적인 재미만 추구한 채,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 글. 그러나 지금은 좀 더 다양하게 책을 고르거나 읽는 기준이 생겼다. 표피적인 재미만 있어도 되고, 메시지만 던져줘도 된다. 구성만 뛰어나도 되고, 묘사만 탁월해도 된다. 그런데 경험상 "최고다" 라고 외치는 책들은 어느 한 가지만 갖추지 않았다. 재미와 감동, 구성과 메시지, 뛰어난 묘사력 그 모든 게 다 들어간 책이 있다는 것. 어떤 책이냐고? 이럴 땐 사악한 미소 한 번 지어주며, 배가 좀 고픈데 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게이고의 다른 책 리뷰에서도 <예지몽> 이야기는 빠지지 않을 테니, 오늘은 여기서 접을란다. 정말 배가 고파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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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자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4
마르시아스 심(심상대)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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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가가 진실로 아름다움을 성취할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 감각에 맞도록 하는 상징물 자체에는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게 된다. 그의 정신은 이미 상징물이 아닌 실체 자체를 즐기게 되는 법이니까.
- 나사니엘 호손,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여기 그 아름다움에 대해 곰곰이 고민한 이가 있다. 그가 말하기를 미(美)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그 본능으로 빚어지는 욕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종국에 그것은 모호함이라는 벽을 짚어보고서야 그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301쪽) <심미주의자>에서 작가는 그러한 '모호한 가치'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고백하고 있는 것만 같다. 다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모호함'을 향해 그는 왜 달려갔던 것일까?


  사티로스의 하나인 마르시아스는 아폴론과의 연주 시합 끝에 지게 되자, 거꾸로 매달려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게 된다. 마르시아스는 "그런 참혹한 형벌을 아름다움 자체로 받아들이고" (73쪽), 참다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자 그러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73~74쪽)  이렇듯 아름다운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하기 위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오만(hybirs)이 필요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욕정을 보여주고 지독한 시기와 질투에도 휩쌓인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러한 신들의 자리를 탐할 수 없다. 즉,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불멸의 세계가 신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신들의 분노는 '죽음'을 부른다. 요컨대 인간은 '죽음'으로써 유한한 인간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르시아스는 예술을 통해 불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고, 그러한 오만의 대가는 오직 예술가만이 맛볼 수 있는 고난이었던 것이다. 
 

<심미주의자>에는 붉은 피와 꽃 그리고 죽음과 쾌락이 흘러넘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의 공존을 허용하고 말해질 수 없는 본능에 당당하게 답한다. 다시 말해 <심미주의자>에는 "동백 꽃잎과 같은 붉은 핏덩이"가 만발하고, 탱탱한 알갱이와 같은 욕정이 터지고, 관능의 불꽃이 낼름거린다. 그러나 읽는 이에게 원초적인 희열과 광기를 시종일관 관음케 하지는 못한다. 시차를 두고 쓴 단편들을 모아둔 탓일 수도 있고, 여전히 고민 중이었던 그의 치기어린 정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탄생은 축복이 아닐까. 종국에는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그 길을 그가 오만하게 계속 걸어갈 수 있기를, 오직 진정한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형극의 고통이 그와 영원히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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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세계시인선 3
랭보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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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심코 혹은 우연히 잃어버렸던 시간들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한 잔의 홍차와 마들렌이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게 하듯, 그 시간들은 나의 '무의지적인 기억'들을 이끌어낸다. 하여 그 기억 속의 언어에 빠져들 때, 나는 "랭보가 좋아" 라고 곧잘 말하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한때 그토록 사로잡혔던 목소리를 통해, 나는 "태양과 섞인 바다"를 갈망하며 죽어간 한 소년의 뜨거운 심장을 움켜쥐게 되었다.



  랭보(A. Rimbaud)는 그의 시를 읽는 이들을 끊임없이 달려가게 만든다. 어디로?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16쪽)로?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르는 침묵”(18쪽) 속으로?  어쩌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20쪽)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역질 나는 손수건으로 랭보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던 세계 속에서 그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자유였다. 자본과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도 자유다. 그럼, "바람구두"를 신고 자연 속으로 달려갔던 랭보를 통해 자유를 마셔보자. 랭보와 자유를 위하여 건배!
  
 누군가는 인간의 역사가 자유를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했던 자유에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전제되었지만, 랭보에게 있어 자유는 1870년 보불전쟁 이후 부패와 악취가 들끓는 세계 속에서 프랑스인들이 잃어버렸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랭보는 우리에게도 잃어버렸던 그 목소리를 들려준다. 악덕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그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굶주림과 취한 꿈 그리고 삼키는 순간 내장이 타들어가는 지독한 독을 통해 되돌려준다. 랭보는 우리에게 묻는다. 언어가 없는 세계의 꿈을 꾸게 되었는가? 고갱이 찾아들어 갔던 타히티의 자유를 볼 수 있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영광의 오솔길"을 향해 앞으로 갓!
 
  랭보의 전기가 담긴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삐에르 쁘띠피스(P. Petitfils)는 17살 랭보의 혁명적인 선언을 들려준다. 푀비우스 아폴로의 신비로운 신탁의 결정판인 ‘운명’이 랭보에게 시인이 되라고 했다는 것. 랭보에게 시인이 된다는 것은 “나무가 바이올린으로 깨어나고, 구리가 나팔로 깨어나”듯, 타인의 육체 속에서 깨어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후 시인이 된 그가 재발견 한 것은 영원이었다. 그 영원 속에서 랭보는 "고독한 밤과 불타는 낮에 개의치"(106쪽) 않고 감금당한 광기에 취한다. 
 
 이제 우리는 랭보를 따라 영원의 세계로 달려간다. “재발견 되었다. 무엇이? 영원이.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이다.” (106쪽) 너무 낡아 관념적이게 된 외투에 손을 집어넣은 채, 앞으로만 달려갔던 랭보가 보았던 영원의 세계로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달려간다. 하여,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뜨거운 기억 속에서 랭보와 함께 자유와 영원의 춤을 추어보자. “굶주림, 목마름, 외침, 춤, 춤, 춤, 춤!” (44쪽)

 

 감각 전문 p. 10

<감각>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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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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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내심 기대했던 책이라는 것부터 밝힌다. 어떤 책을 구입하느냐, 그 경로는 사람마다 다양할진대 일단 이게 법칙 내지 공식처럼 봐도 되는건지 아니면 필연적인 귀결로 생각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특정 분야의 책을 읽게 되면 반드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줄줄이 감자가 캐어져 나오듯 책들이 연결되어 있는 거다.  마치 바벨 도선관의 나선형의 계단처럼, 이 방과 저 방을 연결해 주는 무수한 계단들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발밑에 놓여있다. 가령 기형도 전집을 읽다보면 김현과 김승옥, 장정일이라는 작가들로 향하는 계단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하여 뿅뿅뿅 그네들의 책들을 구입하게 되는데, 참고로 김현 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나면 근 몇달은 굶을 각오로 책을 구입해야 할 일이다. 
 

  <생의 이면>(이하 <생>)은 한창 중고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연결된 책이다. 끝내 중고로는 구입하지 못했지만, 아마 내가 내놓으면 누군가는 구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중고로 구입하지 못함을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말이다. 일단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큰 탓이라는 것도 밝힌다. 그러나 평점은 별 4개를 쾌척한다! 이유는 차차 나온다. 사실 나는 엥간하면 평점은 안 짜다. 그리고 이번 서평은 꽤 길다! 따지고 보면 별 내용도 없는 서평이지만, 이거 쓰느라 -안 그래도 뭘 쓰는 게 늦는 인간인지라 - 밤 샜다! 하긴 새벽에 뭐 하나 쓰면 밤 새는 거야 뭐. 참고로 내 서평은 읽은 시기와 현재 공개되는 시기가 맞지 않다. 이거 언제 읽었지?


2.

 <생>은 5부작으로 연결된 장편 소설인데,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 '연보를 완성하기 위하여 1'까지는 아주 좋았다는 것도 밝힌다. 대체 누구에게 밝히는 건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밝힌다. <생>은 '작가탐구' 기획의 일환으로 박부길 이라는 작가의 연보를 즉, 책에 따르면 "박부길 씨가 살아온 삶의 이력을 그의 소설들과 관련지어 추적해 보라는 편집자의 주문"을 받은 '내'가 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일단 '그를 이해하기 위해' 화자는 박부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데, 구성이 참 절묘했다. 소설가였던 박부길의 글(책이든 문예지에 실린 글이든)과 함께 실제 박부길의 삶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빠이 이상>의 구성 방식이 떠올랐고 그 책이 주었던 동급의 재미를 기대했던 거다. 어쩌면 더 노련한 재미를.(연수보다 연식이 더 나가는 작가니까) 책 속의 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런 걸 액자식 구성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모르겠으만 암튼 독자는 제 아무리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 아니라 한다 할지라도 작가의 글을 작가의 삶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근거해 화자인 나는 박부길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를 이해하기 위한 글을 서술하고 있다.  
 

  으레 예상되듯 박부길의 유년 시절은 결코 무난하지 않았다. 초등 4학년이 헤르만 헤세와 앙드레 지드와 <삼국지>를 읽고 이후에도 '소나 양들이 풀을 뜯어 먹듯' 집안의 책을 죄다 읽어버렸다는 설정, 뒤주에 갇히듯 뒤채에 갇혀버린 남자의 죽음, 집안에서 쫓겨나 강직한 경찰 공무원과 결혼해 버린 어머니, 부길에 대한 큰아버지의 기대와 같은 특별한 가정사, 결국 초극해야 할 현실을 위해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르고 떠난 "치욕의 시간들" 기실, 아버지 살해 욕구나 박부길의 보여주는 방화 사건은 거창하게 해석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부친 살해 욕망은 일단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먹어주시고 대서사나 대문자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며 권위나 기타 아버지가 상징하는 무수한 기의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재 자체가 신선한 책은 아니었다. 92년에 초판이 발행된 책이니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해야 할 터이지만, 아무리 92년을 떠올려봐도 막막한 나 같은 독자에게는 역시  진부한 소재다. 다만, 탄탄한 문장력과 구성 그리고 치열한 고뇌가 보이는 문장들로 인해 숨을 훅 들이마쉬게 했다. 적어도 중반까지는. 문제는 '지상의 양식'부터인데, '지상의 양식'은 박부길의 첫 소설이자 동시에 미완성왼 소설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다. 박부길이 돌연 신학대학을 가게 된 이유가 밝혀지는 부분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갑자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거기서도 어린 시절과 첫사랑이야기가 공식인양 수순처럼 나오긴 한데 왜 갑자기 삼미가 생각나지? 분위기도 완전 다르고 무엇보다 <생>은 삼미 같은 재미는 없는 책이란 말이다. 일단 그렇게 등장되는 순서가 같다는 것과 그런 공식 자체는 너무 빤하다는 것으로 넘어가자)

 
3.


 아무튼 문제는 여기서부터 낯익은 결말까지는 완전 식상의 아우토반을 달려주신다는 거다. 한국 소설이라면 진저리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첫째 재미 없음, 둘째 어려움, 셋째 진부함 이 셋을 골고루 비벼주신다. 그리고 어렵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열라 고민하고 있다거나 많이 아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부류들이 있는데, 솔직히 나도 지난날 어렵게 말하려고 얼마나 목에 힘을 주며 살아보려 했던가. 그러나 <생>은 아는 척을 하려는 책은 아니다.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치열한 고뇌. <생>이 빛났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튼 흔히들 "너 말 되게 어렵게 한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의  문장이 있어 거슬리는 부분은 많다. 가령 그녀에 대해 꿈에서 상상을 한 부분 . 


 "어둠은 깊어서 나의 부끄러운 의식을 적당히 가려 주었다. 반투명의 세계 속에 꿈으로 위장된 욕망의 발현." 168쪽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좋아하는 문장들이다. (이런 식의 글을 좋아하는 부류가 있다.) 게다가 박부길이 고민하는 것들을 만만치 않은 강도의 무게로 보여주는 것도 내 취향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상황 자체는 식상해서 어느 쪽에 맞장구를 쳐줄까 하다 결국 식상함에 표를 던진다. 왜냐면 '그래도 좋다'로 갈까 하다가 '낯익은 결말'에서는 정말 낯이 익다 못해 푹푹 쪄버렸기 때문이다. 낯익은 결말은 결국 파국을 맞이한 결말이다. 그런데 그 파국이란 게 일단 예정된 것이라는 점을 차치해도 전혀 이입이 안 된 상황이라는 거다. 그동안 상황이 식상하니 어쩌니 해도 박부길 이라는 작자의 삶에 나도 한창 신나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낯익은 결말에서 보여주는 파국은 뒷수습도 제대로 안 된 결말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4.

 그녀와 주인공이 사이를 오가며 보여주는 사랑의 확인이랄까 하는 상황들이 80년대 통속극을 보고 있다손 치더라도 둘이 맞이하는 파국의 시초에서 나는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게다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주인공 캐릭터를 죽 써서 개 준 꼴도 아니고, 아니 그와 같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의 변환점을 준 첫사랑에 대한 태도하며 결국 선택한 결말하며! 그렇게 버릴 캐릭터였나 하는 게 무쟈하게 안타까웠다. 게다가 그렇게 산 인간을 왜 탐구 하려고 했는지 초반의 설정조차 석연치 않다.  그의 삶을 추적하는 나(화자)조차 처음엔 박부길의 책을 몇 권 안 읽었을 뿐더러 유명한 작가도 아니라는 말은 한다. 그런데 들춰보니 역시 별 볼일 없네 하는 결말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책 속의 책과 같은 구성 역시 다른 변화 없이 시종 일관 진행되니까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박부길의 증언(그의 글들) 외에 다른 자료들도 적극 끌어와서 그의 마지막 결말을 추적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거다. 좀 더 극적으로, 좀 더 긴박하게 좀 더 퐌타스틱엘레강스펙터클킹왕짱 말이다. 이건 편하게 앉아서 결말을 보려는 심보 같았다. 

 
5.


 장편의 결말은 극적이어야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흐름을 확 잡아챌 수 있을 만큼! 이 대단원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유치한 장난으로는 씨도 안 먹히는 거다. 차라리 부길아 그녀가 다니는 교회당에 불을 싸지르지 그랬니!  <수상한 식모>는 그점에서 여러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괜찮게 남은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하여 낯익은 결말 읽기가 가장 힘들었다. 보통 책의 3분의 2를 읽고나면 가속도라도 붙는지 상대적으로 빨리 읽히는 것 같던데, 그 단편이 이 책에서 가장 늦게 읽은 부분일 게다. 

 덧붙여,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말이 되지 않았느냐는 말도 맞다고 본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결말. 그러나 박부길에게는 이력이 있다. 유년 시절의 방화 사건. 나는 그 이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후반부에서도 마찬가지의 강도로 자신의 삶에 뎀벼야 되었다고 본 거다. 그러니까 실망했던 건, 후반부에서는 너무 소극적으로 혹은 소박하게 해결한 게 아니냐는 거다. 처음부터 그런 인생이었으면 그러려니 하지만, 박부길은 온 생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을 담은 문장들 또한 매혹적이지 않은가.(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런 문장을 좋아하는 부류가 있다.)

  나의 이런 심정을 예견이라도 하듯 작가의 말에서 이미 그 변이 나와 있긴 하다. "후반부에서 문장의 긴장도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긴장이 완전 집 나갔는데요. 라고 울먹이며 말하고 싶다. 그만큼 전반부가 좋았던 탓인지라 실망이 컸지만, 화자가 박부길을 이해하듯 나도 작가를 이해하련다. 작가가 밝히듯 자신의 숨결과 혼이 가장 진지하게 배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은 김영하의 <호출>을 읽었을 때와 비슷했다. <호출>도 그런 엇비슷한 작가의 말을 남겨둔 거 같은데, 이승우 작가의 이런 시절 또한 어찌 아니 이해할 수 있겠는가.(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하여 이 책은 실은 헌책방에 내놓을 생각이 애초에도 없었고, 그의 다음 책으로 <검은 나무>도 사뒀음을 솔직히 밝힌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에게 밝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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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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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광고의 문구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는 “쇼”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아우라(Aura)를 상실한 시대에 요구되는 비판적 사고능력은 더 이상 원본의 의미를 되찾을 수 없는 무수한 복제품의 시대 속에서 그들의 '복제쇼'를 통해 유쾌하게 퍼진다. 복제품들은 진실과 그 진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권력과 감시를 조롱하면서 그들의 쇼를 시작하는 것이다. 김언수는 독자들에게 그 쇼를 보여줄 것임을 초장부터 천연덕스럽게 깔아놓았다. 화산재에 묻혀 마지막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사라져간 상피에르의 주민들 속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그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루저 실바리스가 되어!
 

  “돌로 변한 도시에 다시 도로가 나고, 그 위로 우유를 가득 실은 마차가 지나가는” (p.22) 상피에르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 이야기는 무엇일까?   「바벨의 시계」에서 우주는 “내가 각자의 특이성에 맞춰 시게를 줬는데 왜 아무도 그걸 사용하지”(p.200) 않느냐고 묻는다. 이 시대의 우리들은 “개별성이 아니라 대표성”(p.56)의 잣대로 사람을 대하고 살아간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p.57)이 사라진 시대에 김언수는 "성공한 은유로"(p.366) 우리가 잃어버렸던 삶의 한 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토머(symptomer)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나 해외 토픽용으로 등장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였던 것이다.


 이젠 천적조차 없이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는 그의 피라미드에서 먹이사슬의 순환을 막는 이들을 가차 없이 도태시킨다. 여기에 김언수는 이 정의를 무수히 복제 변형시킨다. 그들은 도태되어 제거되어야 할 인간들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우리라고. <캐비닛>에 등장하는 다양한 심토머들  - 기계의 부품이 되어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만을 조이던 자신만이 살아남은 샴쌍둥이(p.257), 자본주의가 선물한 최고의 유산이 불안이라 했던 토포러(p.72), 물건과 인간이 서로 닮아 있는 미래 사회를 암시하는 피노키오(p. 108), 인간에게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고양이가 되고 싶어했던 남자(p.130), 탄약과 수류탄보다 아니 문서 캐비닛보다도 구출 순위에 밀려난 화자의 군대시절(p. 222), 자신을 도시가 쏟아낸 배설물같다고 여기던 중년의 여성(p.287) - 불행이 부비트랩처럼 터지는 이 사회 속에서 김언수가 그려낸 심토머들은 적당히 직장생활을 즐기고 적당히 거짓 웃음을 지어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의 심토머들은 오로지 숭고한 목표인 돈을 위해 웃음을 그려내는 이 시대의 자화상들이 아닌 자본주의 폭력적인 이분법에 의해 분류된 사회 부적응자 혹은 덤핑된 가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김언수는 우리의 삶 속에 ‘우리’라고 지칭한 울타리 자체가 얼마나 협소한 공간으로 그어졌는지 은유로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IMF시절 자살한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에 대한 뉴스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무감한 눈길로 고개를 저을 때, 김언수는 그 현장 속에서 토포러나 타임스키퍼가 되어 이 사회에서 퇴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우리가 없었다. 적당히 이 사회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잃어버린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 할인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고, 수없이 복제되는 나는 죽지만 정작 이 사회 속에 갇힌 나를 죽일 수 없는 이 시, 대, 에 갇힌 우리의 모습이.

   

  김언수는 분명 성공한 쇼 단장이다. 독자들이 침대 밑을 살펴보도록 만든 김언수는 무엇이 진실과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읽는 이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물론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심토머들의 이야기로 진행상의 긴장감이 느려지거나, 권박사를 둘러싼 갈등구조들이 전체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다소 동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언수의 <캐비닛>은 생동감 있는 큰 흡인력을 보여줬고, 그의 “성공한 은유”는 충분히 갈채를 받을 만하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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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가 되면 모든 인간은 물건을 닮아 있을 겁니다.
아니라면 모든 물건이 인간을 닮아 있겠지요.   -p.119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나처럼 살지도 못하고 당신처럼 살지도 못하죠.
나처럼도 아니고 당신처럼도 아닌.
그토록 아무것도 아니게.
그토록 어쩡쩡하게.
나는 그렇게 살고 있어요.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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