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유모아극장>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유모아 극장
엔도 슈사쿠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웰컴투, 유모아 극장! 유모아 극장에 오신 관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 유모아 극장』은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부르르 떨리는 그 이름, 소설 좀 읽어봤다 할라치면 반드시 읽고 넘어야 할 작가 중의 작가, 킹중의 킹,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일관되게 고민해왔던,  20세기 일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그 이름도 찬란한 그는 바로, '엔도 슈우사쿠우'! 그가 우리에게 '유모아' 정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엔도 슈우사쿠우'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일본 내에서 1955년에 등단과 거의 동시에 아쿠타가와상( 「하얀 사람」)을 거머쥔 것으로 시작해서, 1958년에 신초샤문학상과 마이니치출판문화상을 동시 수상(『바다와 독약 』)하고, 1966년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침묵』)을, 1979년에는 요미우리문학상을(『 그리스도의 탄생』), 어따 숨 좀 돌리고, 1980년에는 노마문예상을(『 무상』), 1994년에는 마이니치예술상(『 깊은 강』) 등으로, 작가 활동 기간 내내 일본에서 주요 문학상을 휩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훈장과 각종 상을 휩쓸어버리고 온, 노벨 문학상의 강력한 후보자였던, 일본 독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총아寵兒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뇌하는 작가로, 늘 세상과 인생 문제를 똥눌 때조차 잊지 않고 고민하고 있을 거라는 이미지에 고정되는 게 싫어했던 그는 안선생보다 더 푸근한 옆집 아저씨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웃음'을 주러 돌아왔던 것입니다. 『 유모아 극장』은 그의 이런 소박한 바람이 가득 들어있는 '동네 극장'인 셈입지요.  


   60년대 당시에는 무척 기발했을 소재들이 『 유모아 극장』에서 쏟아집니다. 영화 속 장면처럼 평소에 흠모하는 여인의 몸 속에 들어가보게 되는 상황('마이크로결사대'),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발명품들('우리들은 에디슨'), 침팬지에게 격렬한 애정공세를 당하는 주인공('아르바이트 학생'), 자신과 꼭 닮았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남자('나와 쏙 빼닮은 남자가...'), 견생犬生의 무게를 느껴보는 주인공('동물들') 등.  

하지만 아무리 어깨 힘을 쫙쫙 빼고 돌아와도, 여전히 그의 유머 속에는 뼈가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꼭꼭 씹어 먹게 만드는 삶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인간과 삶에 대한 날키로운 '엔도 슈우사쿠우' 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냉소보다는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그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단편들은 물론 특히 인간의 허영이나 허례의식을 들춰보는 단편들('여자들의 결'투, '가루이자와')과 함께 삶의 따뜻한 향기가 느껴지는 단편들('하지 말지어다', '우리 아버지') 등을 통해, 우리는 마지막 장까지도 이러한 엔도 슈사쿠만의 '유머'를 실망하지 않고 확인할 수 있습지요.

아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집 나간 남편 때문에 울고 있는 아줌마, 짝사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옆집 총각, 취업이 안 돼 괴로워하는 아랫집 처자, x알 친구한테 배신당한 아저씨 등등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에게 우리의 엔도 슈우사쿠우는 "나처럼 찌질한 인간이 어디있어" 라고 멋쩍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내면을 웃음과 함께 비틀어주시는 할배의 마음이 느껴지는 『 유모아 극장』!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단돈 9000원으로, '엔도 슈우사쿠우'만의 유머를 만나보시기를, 물론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그 누구라도 만화책 좀 빌려달라고 덤벼들 수 있는, 킹왕짱 B급스런 표지가 주는 즐거움은 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중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스져춘 외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근대적인 삶과 근대적인 삶 또는 전통 문화와 근대 문명의 사이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있었고, 그들이 만들어 낸 가난과 모던보이 그리고 혁명이 1930년대 거리를 활보한다. 일제하에 이상과 박태원, 김유정, 정지용, 백석, 채만식 등의 문인들이 당시 조선의 거리를 재현했다면,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이하 <<저녁>>)을 통해 루쉰, 위따푸, 천충원, 빠진, 마오뚠, 스져춘, 리오셔, 띵링이 당시 중국의 거리를 옮겨온다. 신해혁명(1911년)과 신문화운동 그리고 이어지던 혁명과 변화 속에서 1930년대 중국 근대 문학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8명의 작가를 통해, 우리는  "근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된다. 1930년대에 온 몸으로 삶의 근거지가 뿌리채 흔들리는 그 충격과 낯섦을 받아냈던 이들, 그 예민한 감수성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포착했던 이들에게 '근대'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1.     

 <<저녁>>에서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된 루신의 <아Q정전>은 그 시대의 절망을 보여준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승리했다고 착각한 아Q의 '정신승리법'과 허울 뿐이었던 혁명하에 죽임을 당하는 아Q를 통해, 루쉰은 기만적인 혁명의 결과와 그 시대의 모순을 통찰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당시 중국의 현실은 샹하이사변(1932)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마오뚠의 <린 씨네 가게>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경제가 무너져가던 시기에, 소상인 린 씨는 밀려오는 일본제품과 고리대금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허덕이며, 제 살을 파먹는 대염가 세일을 단행하지만, 상인회의 횡포 속에 결국 도산하고 만다. 서구와 일본의 침략 속에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린 씨네 가게>와 같은 소상인으로 대변되는 하층민들의 삶은 결국 붕괴되는 것이다.

라오셔의 <초승달>은 산업자본의 논리 속에서 생계를 저당잡힌 또다른 하층민의 삶이 모녀의 비극으로 재현되고 있다.  여덟 살에 이미 전당포에 물건 잡히는 것을 배워온 <초승달>의 화자는 어머니와 같은 매춘부의 길을 걷게 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모녀가 입고 먹어야 하는) 돈을 벌수록 화자는 죽어간다. "돈은 무정하다"(270면) 돈이 지배되는 근대적인 삶 속에서,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난은 숙명과 같이 대물림이 되는 것이다.

2.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타락>의 화자에게 찾아왔던 성적 열망, 위따푸의 <타락>은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억눌릴 수밖에 없는 소년의 감성이 돋보인다. 끊임없이 조국의 부강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타락>의 화자는,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비관하고 그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타락>의 화자가 이처럼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을 때, 이미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의식을 받아들였던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띵링의 <밤>에는 스무 가구밖에 되지 않는 산골 마을에 28명의 공산당원이 모여살고 있다. <밤>의 주인공은 현재 공산당원의 지도원이 되었지만, 그의 아내와는 더욱 소원해졌고, 아이를 낳지 못한 아내를 '물적토대' 구실을 못한다고 마음 속으로 비난하며, 가부장적인 구시대적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그리고 그 스스로 혁명사업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농촌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이곳에는 혁명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어떤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글자도 모른다. 아들조차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향 지도위원이고, 내일 회의가 지닌 의의에 대해 보고를 해야 했다."(287면)
지도원이 된 이후로 돌보지 못한 그의 밭은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고, 그는 엄마소를 빼닮은 송아지가 즐겁게 뛰어노는 환상까지 보지만 그의 소는 다음 날이 밝도록 새끼를 낳지 못한다. 이들에게 진정으로 풍요로운 근대는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근대 즉, 모던(modern)이 피해갔던 혹은 모던을 거부했던 이들의 삶은 천충원의 <샤오샤오> 통해 그려진다. <샤오샤오>는 12살의 나이에 이제 젖을 땐 아이한테 시집가는 샤오샤오의 삶을 통해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마을을 지나다니던 "여학생"이라는 존재로, 근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가치관을 엿보게 된 샤오샤오는 마을 인부 중에 한 명인 "바둑이"이와 함께 도시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바둑이"가 홀로 떠나버린 후, 샤오샤오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시 관례대로 기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들에게 다가웠던 근대는 이처럼 한때 꿈꾸고 싶은 미래였지만(<샤오샤오>),  허울 뿐이었고(<아Q정전>), 삶의 터전이 붕괴되는 시기였으며(<린 씨네 가게>, <초승달>), 비극적인 역사 속에 여전히 구시대적 의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이자(<타락>), 어떻게 다음 날을 맞이해야 할지(<밤>) 모른 채 밤을 새하얗게 지새울 수밖에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3.  

  그러나 이 시기를 살아갔던 세대가 이 시대의 어둠과 혼란을 극복한다면, 이후의 세대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된다.  빠진의 <노예의 마음>에는 노예의 후손인 펑과 지주의 후손인 '나'가 나온다. 펑은 대물림되는 노예의 혈통을 끊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희생으로 맞바꾼 돈으로 학교를 다니지만, 훗날에 혁명당원이 되었고 결국 총살을 당하게 된다. "자기 행복을 모두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160면) '노예의 마음'을 펑은 처절하게 끊고 싶어했다. 펑의 죽음으로 그 노력은 좌절된 것이었을까? 필자는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주인(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노예의 마음"이라고 표현한 펑이, 끊임없이 그 "노예의 마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유인이 되었다고 본다. 
  헤겔(G. H. F. Hegel )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어떻게 전도되는지 보여준다. 끊임없이 자기의식을 발전시키는 노예와 노예에게 모든 삶을 의지하는 주인의 관계는 마치 부끄러움을 곧 잊어버리고 32명의 노예를 거느린 삶에 만족하는 '나'와 펑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즉, 펑의 죽음은 단순히 노예의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한 펑의 반항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 투쟁을 해온 수많은 젊은이들의 시련을 대변한 것이다. 그들의 시련과 희생으로 인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은 자유인이 된 게 아니었을까?  루쉰의 두 번째 단편 <고향>에도 역시 그러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20년 만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화자를 "나리"라 부르는 룬투로 인해 개혁되지 못한 의식의 벽을 절감한다. 그러나 화자는(루쉰은) 희망이란 "땅 위의 길과 같다"(75면)고 말한다. 우리와는 반드시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뒷세대들에 향해 던지는, 그의 전언이 깊이 와 닿는 단편이다.

 

4.
 
  지금의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이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던'은 결코 충격적이거나 낯설지 않다. 마천루가 즐비한 거리 아래, 날마다 신제품이 출시되고,  최신 유행의 패션과 상품이 펼쳐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근대"가 과연 "무거움"이 될 수 있을까? <<저녁>>에 실린 9편의 작품들은 그 최초의 혼란과 어둠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탄식과 절망이 담겨있다. (표제작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처럼 서정성이 깃든 모던 시대의 풍경도 있다.) 이들의 글을 필두로, 중국에서 '근대'가 어떤 의미였는지, 새로운 세상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갔는지 살펴보는 것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물론 1930년대 한국 문학과 비교해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멜리 노통브와 만나는 첫책이다. 다작을 한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될 때 어떤 책으로 만나느냐, 역시 서로의 운이라고 생각하는데, 노통브의 여러 책 중에서 <<적의 화장법>>(이하, <적>)을 만난 건, 확실히 독자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운 좋은 첫 만남'이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는 속도감 있는 상황 전개가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읽는 재미가 죽여준다.(몰입도 맛이 끝내준다는 말이다.) 보통 350쪽 내외의 책을 읽게 될 때, 나는 책에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유형이다. 간혹 100쪽이 넘어가도 집중이 안 될 때도 있는데(100쪽을 글자만 읽은 셈이다!) <적>은 나처럼 산만한 독자를 단 한 장만으로 집중시켜버린다. 게임 오버!

  <적>이 갖고 있는 반전 구조는 새롭지 않다. 나는 <적>의 반전 구조를 서너 번 이상 영화에서 이미 접해본 독자였으니까. 오히려 식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즐겨 볼 수 있는 스릴러나 심리 드라마 영화에서 빈번하게 다뤄진 반전이 <적>에 있었다는 말이다. <적>의 훌륭함은 그러한 반전이 주는 구조의 힘이 아니라, '내 안의 적'을 섬뜩하게 잘 그려낸 것에 있다고 본다. 나처럼 뒤늦게 <적>을 읽은 독자라면 특히!  '나와 타자와의 관계'라는 주제에서 이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기실 <적>은 그 의미보다는 '내 안의 타자성'을 들춰보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춰진 내 안의 타자 모습, 부정하거나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무마시키"(141면)는 내 안의 타자 모습. 그러한 타자의 모습은 "하느님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30면)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되는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 안의 타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적> 에 읽혀지는 타자의 의미만을 국한해서 생각해 보면, 간단히 말해 '폭력성'이 아닐까, 한다. 죄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 살인도 서슴치 않을 수 있는 "폭군의 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은혜로운 독재자 덕에 산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의 뱃속에 웅크린 적의에 찬 폭군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32면  
   

그러니까 <적>은 매우 다양한 시리즈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내 안의 타자성"은 '폭력성' 뿐만이 아니니까. 내 안에 감춰진 어둠, 언제나 부정되어 온 심연, 그 심연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자성을 잠재워두고 있는가! "은혜로운 독재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그리고 우리는 "적의에 찬 폭군"을 망각하고 은폐한다.  화장(化粧)할 것!   

   
  중요한 건 첫 죽음뿐입니다. 살인의 경우 죄의식의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그거지요. 죄의식은 누적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 백 명을 죽이는 것이 단 한 명을 죽이는 것보다 결코 더 심각하게 여겨지진 않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일단 누군가 한 명을 죽이고 나면 왜 백 명을 죽여서는 안되는지가 모호해지는 겁니다. - 26면  
   

생각되어지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또다른 나,  첫 죽음과의 대면 앞에 내 안의 타자성을 부정한 나, 그러나 '화장법'에 실패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폭군"과 함께 공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가 역시 연착되지만 않는다면!
 

사족 1, <적>을 보면서 느낀 건 확실히 프랑스나 독일쪽 소설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글이 많다는 거다. 단순히 <적>에 장세니즘이니 팡세니 파스칼이니 하는 자기 동네 친구들이 인용되어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던져주는 주제나 상황들이 머리 좀 복잡하게 만든다는 거다. 현학적인 문구로 일반 독자를 기만하지 않고 이렇듯 일상에 녹여 삶과 연결시켜주는 재미와 함께 말이다.

사족 2, 제롬 앙귀스트나 텍스토르 텍셀이나 이들의 이름이 보여주는 어원적인 의미들도 재밌게 봤다. 제롬이 결국 짜여진 시나리오(= 텍스트 짜는 사람)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불안과 고통을 안고 있는 자라 해도 혹은 또 다르게 의미를 추측할 수 있어도, 단순히 내용 전개에 필요한 설정이었다는 점 외에,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는 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빠른 시간 내 읽을 책이 필요했다. 저 책은 술술 읽힐 것 같지만 분량이 많아서 제외, 얇지만 검증 안 된(여기서 검증은 내가 기존에 접해본 작가냐 아니냐는 것) 책도 제외, 얇지만 분명 골 때릴 것 같은 책도 제외... 이런 식으로 제외하다가 낙찰된 책이 바로 <예지몽>!

  결론부터 말하면, 빨리 읽을 수는 있었지만 평소 게이고에 관한 기대치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진다는 거! 하긴 여기서 말하는  게이고에 대한 기대치는 <용의자 헌신 X > 에 근거한 것이니, 왠만한 작품은 눈에 안 들어올 수밖에.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당시에) 백야행이나 방황하는 칼날 먼저 보는건데 말이다. 슬슬 <용의자 헌신 X > 에서 보여줬던 그 치밀한 구성과 반전, 그 속에 녹아있는 사물이나 현상을 통찰하는 그 능력이 그리워지니.)

  아무튼 <예지몽> 이나 그 전에 읽었던 <탐정 갈릴레오> 는 <용의자 헌신 X > 과 같은 급으로 놓을 수 있는 시리즈 라기 보다는 <용의자 헌신 X > 을 탄생시키기 위한 여러 사건과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습작 같은 거라고 본다. - 이 말은 써놓고 보니 뻘쭘스럽긴 하다. 출판사 책소개에도 이미 그렇게 나와있거든! -  <예지몽>은 제목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오컬트적인 현상들이 보여지는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고 <탐정 갈릴레오> 역시 '과학 미스터리'로 불려질 수 있는 현상들이 등장하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렇게 보니 오컬트와 과학 미스터리가 따로 구분된 듯 말했지만, 둘 다 영어라는 거! 뭐, 같은 범주라고 본다. 아무튼 둘 다 초자연적은 현상을 보여주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여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거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모든 현상들이 결국 '과학적 원리'에서 설명되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가와에 의해 설명되어지는 그 모든 기이한 사건들은 결국 '모든 현상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라는 게 증명되는 거다.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게 뉴턴의 제3법칙인가, 어떤 물체에 힘을 가하면 그 물체도 반대방향으로 똑같은 크기의 힘을 가한다는 것. 크기는 같으나 방향은 반대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 아무리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힘(과학적인 현상)을 찾는 과정은 확실히 흥미가 유발된다.  

 유가와가 간간이 보여줬던 간단한 실험이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보여주는 과학적인 원리들은 원체 과학이나 물리학 방면에 문외한인지라 일단 호기심 충족면에서는 먹고 들어갔다. 그러니까 <예지몽> 이나 <갈릴레오> (그러고 보니 이 둘이 계속 세트로 붙네) 는 어떤 추리 소설을 본다는 느낌보다는 '호기심 천국'을 보는 기분이었고, 그만큼 구성은 떨어지는 단편들이었다. 뭐, 이 책을 읽게된 동기로만 보자면, 아주 잘 찾은 셈이지만.

  <갈릴레오> 에서도 괜찮은 단편이 있었는데, <예지몽>도 그렇다. '그녀의 알리바이'에서 <용의자 헌신 X > 삘이 났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또 말하면 <용의자 헌신 X > 삘이 나서 좋다는 게 아니라 <용의자 헌신 X >에서 보여줬던 허를 찌르는 지점이 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알리바이'가 확실히 <용의자 헌신 X >의 전신처럼 보이긴 하구나! - 역시 새삼스런 말이다. - 여튼 그녀의 알리바이에 초첨을 맞춘다면 더욱) 히가시노에게 '통찰력'이 있다는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이런 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용의자 헌신 X >에 나왔던 말처럼,  "기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함수 문제"라는 것. 관점만 달리 보면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 그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

 추리 소설이라고는 홈즈 시리즈와 애거서 크리스의 책 몇 권만 보았던 내게 단순히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트릭만으로 이뤄진 추리 소설이 아닌 삶의 이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이고 식 추리 소설을 만나게 된 건 확실히 행운인 셈이다. 이런 책들을 만나면 특정 장르만 최고라는 식의 편협한 생각은 안 가지게 될 수 있으니까. 실제로 <용의자 헌신 X >이나 오쿠다 히데오의 책을 만나보기 전에는 이들의 열풍이 '가벼운 글'에 환호하는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던 거다. 따지고 보면 일본 소설이라도 가와바스 야스나리, 나쓰메 소세키 같은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책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류와 같이 검증 받은 책만 읽겠다는 독자였으니까. 여기서 '가벼운 글' 이 무엇이냐 라는 정의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과거 나의 정의는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이렇다. 표피적인 재미만 추구한 채,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 글. 그러나 지금은 좀 더 다양하게 책을 고르거나 읽는 기준이 생겼다. 표피적인 재미만 있어도 되고, 메시지만 던져줘도 된다. 구성만 뛰어나도 되고, 묘사만 탁월해도 된다. 그런데 경험상 "최고다" 라고 외치는 책들은 어느 한 가지만 갖추지 않았다. 재미와 감동, 구성과 메시지, 뛰어난 묘사력 그 모든 게 다 들어간 책이 있다는 것. 어떤 책이냐고? 이럴 땐 사악한 미소 한 번 지어주며, 배가 좀 고픈데 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게이고의 다른 책 리뷰에서도 <예지몽> 이야기는 빠지지 않을 테니, 오늘은 여기서 접을란다. 정말 배가 고파졌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1.

"인연을 믿나요?"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믿나요?” 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글쎄요..” 라며 뜸부터 들일 것 같다. 하지만 “인연을 믿나요?” 라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럼요” 라고 답변할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이라 했던가. 만남과 헤어짐. 나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관계는 인연이 닿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월이란 게 느껴질수록 그 연(緣)이라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요시다 슈이치, 그의 작품을 읽게 된 건 그러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인연 말이다.


2.

 『동경만경』은 나의 외로움을 털어놓게 했다. 마치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는 자기도 외롭다고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은”(p. 113). 위로라는 게 그저 내 마음을 아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되는 거라면, 나는 『동경만경』에서 충분히 위로를 받은 셈이다.
 

3.

  료스케가 어둠 속에서 미오에게 “놀랐어?”(p. 160)라고 물었을 때 그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을 만큼, 나는 료스케의 마음에 혹은 미오의 마음에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빠져들었다. ‘빠지다’라는 건 영혼의 문제라(p. 120) 하는데,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느낌처럼 빠져들게 한다. 그 강물 위로 반짝이는 햇살과 함께 한없이 걷고 또 걷게 만드는 어떤 그리움 같이. 
 

4.

  동경이라든가 린카이 선 개통이라든가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동경만경』 속 배경들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서울이라든가 지하철 2호선이라든가 하는 내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방향의 지하철을 타야할지 노선표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지 않고도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는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드디어 서울에서의 생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소거법(消去法)(p. 247). 몇 년 후쯤 서울 생활을 돌아보게 될 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누군가의 얼굴일까? 전철일까? 이기호의 단편 중에서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가 나온다. 나는 전철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5.

 “료스케와 헤어지는 게 아니라 료스케의 몸과 헤어질 뿐이라고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p. 263)
 

 그녀의 고민에 료스케는 아주 명료하게 답변을 건넨다. “그런데도 너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p. 273)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 몸을 좋아했든 그를 좋아했든 현재 함께 있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우리들은 종종 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고민으로 중요한 순간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6.


끝나지 않는 게 있을까? p. 270


 료스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 만큼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의 곁을 마음이 제멋대로 떠났다는 것. 영원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부재’ 관계가 성립할 때 가능하다. 요컨대, 영원한 헤어짐이 전제될 때 비로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할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영원한 사랑은 삶의 희망이니까. 미오의 동료가 “시작하는 게 두려워서 두 사람 다 눈을 질끈 감고 서로 안기만 하는 거 아냐”(p. 286)라는 말을 들려줬을 때, 아마 두 사람은 질끈 감은 그 눈 속에서 희망을 가져봤던 것은 아닐까?

 

 “내일도 만나.”라고 청년이 말한다. “…… 내일도, 모레도.”라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에도.”라고 모니카가 대답한다.
“그 다음에도”
“오늘밤도.”
“8시에 늘 만나는 곳에서.”
(...)
그러나 그날 밤, 두 사람은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의 라스트 신에는 단지 그 장소만이 비춰진다. 두 사람이 오기로 했던 그 곳.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이라고 불렀던 거리의 도로만이 연이어 다양한 각도로 비춰질 뿐이다. ‘늘 만나던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늘 만나던 곳’에 버스가 선다. 그 버스에서도 그들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장소만이 계속 비춰지면서 영화는 끝나고 만다. (p. 291~2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