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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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을 때, 기술이 필요할까요?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E. Fromm)은 "사랑은 기술인가?" 라는 질문에 단호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연히 혹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즐거운 감정만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음악이나 그림 또는 의학이나 공학 기술 등을 배우려고 할 때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익히고 노력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려 저 역시 "책 읽는 것은 기술인가?" 라는 물음에 단호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속독법 같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단순히 의무감에 매여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즐거움과 더욱 알찬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책읽기를 위해, 스스로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그리고 그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하려는 굳센 의지를 갖게 하는 게 우리가 찾고 있는 '기술'이 아닐까요.

 자아, 이제부터 소개할 네 권의 책은 그러한 '기술'을 들려주고 있답니다.

  

책을 읽는 방법(히라노 게이치로, 문학동네, 2008)

 
  (속닥 : 뭐랄까, 제목이 정직하더군요. 교과서처럼 말입니다. 뭐, 속 빈 강정들(현란한 디자인과 띠지 문구, 남발된 추천사 등)보다야 교과서 같아도 제대로인 책이 최고지요. 게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들려주는 말이니 아니 또 솔깃했겠습니까.)


<<책을 읽는 방법>>(이하 <방법>)의 핵심은 "슬로 리딩"이었습니다. 천천히 즐기면서 읽는다는 것!

   
  한 권의 책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읽는 방법에 달려 있다 - 19면  
   


 
  과거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대량의 정보를 습득한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지적인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히라노 게이치로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요는 그들이 슬로 리더였고, 슬로 리스너였다는 것. 현대인들은 양적으로 풍부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질적으로도 풍요로워졌느냐는 것에 대답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령, 칸트나 헤겔이 평생 동안 독파한 책의 권수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의외로 적어도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깊은 사색을 보여 준다는 겁니다. (24면)   즉, "질과 양의 차"라는 겁니다. 단순히 몇 권 읽었다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자신만의 독서를 통해 일,면접,시험 그리고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에 도움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아주 매력적입니다. 일단, 독서가 앞서 말한 여러 사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사실이지만, 슬로 리딩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 방법으로 테크닉편과 실천편으로 나눠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책 읽는 방법을 제시했거든요. 특히 슬로 리딩의 테크닉 편에 나오는 창조적인 '오독'을 권장하는 부분은 문학 그 중에서도 소실을 즐겨 있는 저 같은 독자들에게는 아주 짜릿한 독서 방법이라고 보여집니다.

   
  "항상 '왜?' 라는 의문을 갖고 읽을 것. 이것이 깊이 있는 독서 체험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또한 독자가 책을 선택하듯 책 또한 독자를 선택한다.  대화 도중 영 들을 생각이 없어보이는 상대에 대해서는 '이 사람한테 이야기해봤자 소용없어'라고 외면하듯이, 책 역시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는 독자에게는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릴 것이다." - 67면
 
   


  참, 마지막 '실천편'에서 슬로 리딩을 '헉' 소리 나게 빡세게 실천하는 것을 보고 저는 언어 영역 시험을 보는 기분이 들더군요.(몇 만 년전에 본 언어 영역 시험을 말입니다!) 슬로리딩이 알고보니 엄청 빡셌던 거죠. 그러니까 애초에 히라노 게이치로가 주장한 슬로 리딩이 실천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치 목차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먹어야 되는 독서법이었다 해도 일반적인 독서를 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무리는 있어 보입니다. 물론 득이되면 득이 됐지 손해날 것 전혀 없는 ‘다잡아’ 독서법이지만, 이런 방법은 평소에도 어느 정도 책을 읽지만 읽는 재미를 놓친 그러니까 기존과는 다르게 깊이 있고 좀 더 다양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독서가 필요한 이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실천법이었다고나 할까요. 저요? 연필로 페이지마다 문장 아래를 죽죽 그어가며 읽는 저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죠. 하지만 그런 저도 매번 그렇게 읽기는 힘들지 싶습니다. 라면도 말입니다. 고춧가루 팍팍 뿌리고 파와 청량고추를 송송 썰어놓은 후 마지막에 계란 탁 풀어 넣고 먹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로지 물과 스프만으로 끓인 라면의 맛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나저러나 히라노 게이치로 식의 '책을 읽는 방법'은 그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물론 책 읽을 때 줄거리나 인물 등 한 가지만을 쫓아 읽어왔던 독자들에게는 분명 '보다 풍요로운 세계'로 인도해 줄 책인 것 같습니다.
 

소설처럼(다니엘 페나크, 문학과지성사, 2004)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 161면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법이 먹혀들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소설처럼>>은 사랑하거나 꿈을 꾸는 일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로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줄기차게 책 좀 읽어라, 너 이 자식 책 읽으라고 했잖아” 해도 효과는? 전혀 없다는 것! (15면) 중등 교사인 저자의 체험과 통찰이 매우 빛나는 책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왜 책읽기에서 멀어지게 됐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책읽기를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는지 제목 그대로 '소설처럼'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소설처럼>>을 통해 저는 그와 ‘환상적인 팀’을 이루고 말았죠. 저는 “번번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는 아이가 되어 그의 ‘진정한 독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요컨대 <<소설처럼>>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노이로제에 걸린 -그러면서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하여 책읽기의 즐거움을 놓쳐버린 어른들(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도 책읽기의 근본적인 깨달음(즐거움)을 안겨주었답니다.

   
  "단지 아이들은 책이 무엇이며,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 151면
 
   

 무엇보다 저에게 와 닿았던 이 책의 압권은 마지막 장인 <무엇을 어떻게 읽든......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부분이었습니다. “건너뛰거나 책을 끝까지 읽지 않거나 다시 읽고 아무 책이나 읽고 군데군데 골라 읽거나....,.”  스스로가 정한 규칙에 얼마나 얽매이고 살았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읽는 것 자체를 얼마나 즐기지 못하고 살았는지 자신에 대한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 구절이었고 그 만큼 매우 통쾌했습니다. 가령,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고 치부해도 어떤 책을 읽지 못했을 경우, 저 역시 패배감에 휩싸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에 저자는 말해주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 것. 다시 읽어보면서 왜 내가 그 책을 좋아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 즐거움을 찾을 것. "잘난 척하는 사서가 우리 귀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악을 써대도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넘길 수 있는 즐거움 또한 각별"하다고 말입니다. 

   
  "어머머머 어떻게 스탕달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물론 그럴 수 있다. - 206면
 
   

  흠흠, 여기까지 왔다면 한 발 더 나아가볼까요? 원하던 처방전은 받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느리게 읽든 빨리 읽든 꼼꼼하게 읽든 대충 읽든 왜 이렇게 ‘자유로운 책읽기’라는 구호가 여기저기 들려오는 걸까? 인문서를 읽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말입니다.이런 의문들에 한 발 앞서 고민하는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고 했던가요, 학문이 현실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있지만요.                

  "텍스트의 즐거움"(롤랑바르트, 동문선, 1997)

 

   
  저자가 발견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따라서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émêler)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échiffrer)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33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서도 언급이 됐던 비평가이자 후기구조주의 사상가인 바르트(R. Barthes)의 <<텍스트의 즐거움>>(이하 <텍스트>)은 '저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의 후기 사상들(이론적 배경들)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텍스트는 “주석, 번역, 서문 및 부록 따위에 대한 본문이나 원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데리다도 그렇듯 바르트도 자신이 창안하거나 고안한 용어를 많이 사용한답니다.(그래서 그의 사상이 난해할 수밖에 없다고도 하네요.) 과연 그가 말하는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1971년에 "미학"지에 발표된 "작품에서 텍스트로"라는 글에서 바르트는 그 자신의 정의한 텍스트가 무엇인지 7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는 계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텍스트는 (좋은) 문학에서 멈추지 않고, 텍스트는 체험되는 것이며...등등 이 길고긴 텍스트에 대한 정의에서 맛깔나게 정리한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무관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어떤 언술행위의 주체도 심판, 선생, 분석자, 고해 신부, 해독자의 입장에 두지 않는 사회적 공간”이기 때문에 텍스트론은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공간” 이다. (47면)

   
  만약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 혹은 이 말을 즐겁게 읽는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즐겁게 쓰는 일이 작가인 나에게 독자의 즐거움을 보장해 줄까? 전혀 아니다.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꼬셔야/유혹해야>「draguer」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인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 모든 것이 끝나지 않기를, 놀이가 저기 있기를. - 51~52면
 
   


  물론 몇 개의 명제로 그의 텍스트론을 구축할 수 없다고 저자 스스로도 말하지만 분명한 건 “무한한 의미 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서 텍스트는 고정된 의미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인 텍스트론은 ‘저자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진정한 독자의 탄생은 “합리적 자본주의 산물”인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저자의 자리에는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는 조작자, 또 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한다는 거죠.

 아아 더이상 길어지면 바르트의 사유 바다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마무리을 지어보면요. 바르트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그 자율성을 복원시키고 “삶과 유리되지 않은 문학으로서의 도덕성”인 <텍스트>를 말합니다. 이러한 텍스트는 글쓰기라는 실천과 함께 이뤄진다고 하죠. (바르트 자신도 그러한 글쓰기를 실천했다죠.) 요컨대, 바르트가 정의한 텍스트와 일반적인 '작품'이 어떻게 다른지, 저자의 죽음을 전제한 독자의 탄생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밖에 언어의 권력성과 그 권력이 이용할 수 없는 도덕성(소설적인 것)의 의미를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 바르트와 함께 텍스트의 세계로 빠져볼 준비가 되셨나요?

  드디어 본 글의 마무리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책은 한국 소설입니다.  책이나 소설 자체가 소재가 되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가령, 윤영수의 <<소설 쓰는 밤>> 표제작을 비롯해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단편 ‘나쁜 소설’ 이나 김영하의 <<아랑은 왜>>는 아예 그 소설의 창작 과정을 풀어내버렸죠. 그 중에서 매력적인 제목으로 08년에 등장한 소설집을 소개할까 합니다. 
                                                

"위험한 독서"(김경욱, 문학동네, 2008)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선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 16면
 
   

  08년 가을, 북데일리에서 주관한 모대학 낭독회 현장에서 만난 김경욱 작가가 그러더군요. 왜 제목이 위험한 독서냐라는 어떤 학생의 질문에 '안전한 독서'처럼 평이한 제목으로는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고 말입니다. 워낙 위트가 철철 넘치는 작가라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한 답변이었는데, 정작 그 답변은 <<위험한 독서>> '작가의 말'에 잘 나와있었습니다. => “가차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독서”  <<위험한 독서>>는 작가이기 전에 자신도 한 명의 독자로서 그 스스로에 던지는 역설적인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황금사과>>를 통해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하거나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에서 김승옥과 기형도의 작품을 차용한 그의 전작들 그리고 이번의 <<위험한 독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누군가의 작품들이 그의 글 속에 겹쳐지고 재생산되며 원본과 차이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떠올려진다면, 글쎄요, 과연 스스로 책이 되고 싶어한 그의 바람이 결국 이뤄지는 걸까요?  무한히 반복되고 차용되는 글 속에서 영원의 삶을 살아가던 책 속 인물처럼 말입니다.

   
  "초보적인 독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중에 하나는 책의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런 독서법의 폐해는 정답을 찾기 위해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생처럼 저자의 권위에 짓눌린 나머지 책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경험인가 저것은 작가의 상상인가 독서량이 그리 많지 않은 당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의식하느라 정작 자신을 읽어내지 못했다.
(..) 
저자의 의도나 실제 삶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책을 당신 것으로 만드세요
책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니 거울 속 당신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 22면
 
   


 그의 열 번째 행로를 궁금하게 만든 책 <<위험한 독서>>는 곳곳에서 등장하는 다른 책들을 알아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하답니다. 표제작에 나온 화자의 말을 빌리면, 상당한 수준의 독서가임을 자부한다면 말이죠. (김경욱 작가의 독서편력을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험한 독서>> 자체가 주는 재미는? 작가의 말마따나 일단 거울 속 자신을 먼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당신이 읽을 차례야. 나를 읽어봐.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책이 되는 위험을 무릎쓸 수도 있으니까.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위험해지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평안하고 또 평안한 수만 번의 아침저녁이여 안녕.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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