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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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멜리 노통브와 만나는 첫책이다. 다작을 한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될 때 어떤 책으로 만나느냐, 역시 서로의 운이라고 생각하는데, 노통브의 여러 책 중에서 <<적의 화장법>>(이하, <적>)을 만난 건, 확실히 독자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운 좋은 첫 만남'이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는 속도감 있는 상황 전개가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읽는 재미가 죽여준다.(몰입도 맛이 끝내준다는 말이다.) 보통 350쪽 내외의 책을 읽게 될 때, 나는 책에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유형이다. 간혹 100쪽이 넘어가도 집중이 안 될 때도 있는데(100쪽을 글자만 읽은 셈이다!) <적>은 나처럼 산만한 독자를 단 한 장만으로 집중시켜버린다. 게임 오버!

  <적>이 갖고 있는 반전 구조는 새롭지 않다. 나는 <적>의 반전 구조를 서너 번 이상 영화에서 이미 접해본 독자였으니까. 오히려 식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즐겨 볼 수 있는 스릴러나 심리 드라마 영화에서 빈번하게 다뤄진 반전이 <적>에 있었다는 말이다. <적>의 훌륭함은 그러한 반전이 주는 구조의 힘이 아니라, '내 안의 적'을 섬뜩하게 잘 그려낸 것에 있다고 본다. 나처럼 뒤늦게 <적>을 읽은 독자라면 특히!  '나와 타자와의 관계'라는 주제에서 이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기실 <적>은 그 의미보다는 '내 안의 타자성'을 들춰보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춰진 내 안의 타자 모습, 부정하거나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무마시키"(141면)는 내 안의 타자 모습. 그러한 타자의 모습은 "하느님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30면)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되는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 안의 타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적> 에 읽혀지는 타자의 의미만을 국한해서 생각해 보면, 간단히 말해 '폭력성'이 아닐까, 한다. 죄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 살인도 서슴치 않을 수 있는 "폭군의 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은혜로운 독재자 덕에 산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의 뱃속에 웅크린 적의에 찬 폭군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32면  
   

그러니까 <적>은 매우 다양한 시리즈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내 안의 타자성"은 '폭력성' 뿐만이 아니니까. 내 안에 감춰진 어둠, 언제나 부정되어 온 심연, 그 심연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자성을 잠재워두고 있는가! "은혜로운 독재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그리고 우리는 "적의에 찬 폭군"을 망각하고 은폐한다.  화장(化粧)할 것!   

   
  중요한 건 첫 죽음뿐입니다. 살인의 경우 죄의식의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그거지요. 죄의식은 누적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 백 명을 죽이는 것이 단 한 명을 죽이는 것보다 결코 더 심각하게 여겨지진 않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일단 누군가 한 명을 죽이고 나면 왜 백 명을 죽여서는 안되는지가 모호해지는 겁니다. - 26면  
   

생각되어지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또다른 나,  첫 죽음과의 대면 앞에 내 안의 타자성을 부정한 나, 그러나 '화장법'에 실패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폭군"과 함께 공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가 역시 연착되지만 않는다면!
 

사족 1, <적>을 보면서 느낀 건 확실히 프랑스나 독일쪽 소설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글이 많다는 거다. 단순히 <적>에 장세니즘이니 팡세니 파스칼이니 하는 자기 동네 친구들이 인용되어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던져주는 주제나 상황들이 머리 좀 복잡하게 만든다는 거다. 현학적인 문구로 일반 독자를 기만하지 않고 이렇듯 일상에 녹여 삶과 연결시켜주는 재미와 함께 말이다.

사족 2, 제롬 앙귀스트나 텍스토르 텍셀이나 이들의 이름이 보여주는 어원적인 의미들도 재밌게 봤다. 제롬이 결국 짜여진 시나리오(= 텍스트 짜는 사람)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불안과 고통을 안고 있는 자라 해도 혹은 또 다르게 의미를 추측할 수 있어도, 단순히 내용 전개에 필요한 설정이었다는 점 외에,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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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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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늘어진 시계가 나뭇가지나 정체모를 생명체에 걸려있다,
시간의 흐름은 멈춰지고, 기억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무의식의 나를 깨운다!

 

 1. 

  이승우 작가의 <<한낮의 시선>>(이하 <시선>)을 다 읽은 순간의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잖아, 라고 생각했다. <시선>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상황이 전형적으로 등장한다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0분이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너무 'FM'적이었다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0분 1초가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화자인 '나'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종종 꾸는 꿈의 이미지들이 몹시 익숙했다는 말이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역시 아버지의 묘비명이 등장하는 '나'의 꿈이다. 벌판 앞에서 오줌싸는 그를 향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천둥소리와 같은 아버지의 금령이 울려퍼지면서, 역시 아는 얼굴에 의해 거세를 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꿈으로 꾼 '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남근기의 아이는 아버지의 금령을 받아들이면서, 부친과의 '동일시'를 이루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그러나 남근기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던 29살의 '나'는 무의식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고,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정체 모를 남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은 상황 속에서도 '나'를 버린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 대가를 치룬다. '나'는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청년 같아 보이는가 하면 노인 같아 보이기도" 한 남자와 빛 속에서 조우하면서, 서른 살 생일을 맞이했던 것이다.  

 연극의 무대처럼 배치된 상황들, 작위적인 냄새, 감정이입이 배제된 차갑고 명료한 나의 시선과 분석. 소설이다, 이건 소설이야! 를 외치게 하고, 읽는 이와 화자를 무섭게 분리해 놓고, 진저리 나게 무겁고 재미없게 쓴 소설이었다, 라고 그 책을 다 읽은 지 11분이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2. 

   그렇지만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무의식의 심연을 걷는 듯한 이 모호한 기분은 뭐지? 2009년 11월 25에 초판이 인쇄된 <시선>에서 보여주는 것은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모성애에 관한 '나'의 분석과 심리학 전공이었던 노교수의 등장, 아버지를 찾아가는 나. A5 판형에 작가의 말까지 포함해 160쪽을 채운 얇은 책인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뭉글뭉글한 기분을 남기게 하는 걸까? 사람들이 죽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다는 말테 수기의 첫 문장으로 시작해서 성경, 신화, 꿈, 로맹가리나 오르한파묵, 밀란 쿤데라, 아아 카프카까지 이어졌던, 한 낮의 시선!  

어쩌면 '시선'이 갖고 있는 기본 뼈대(plot)만을 따라갈 수 없게 만든 '웅덩이'가 곳곳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말테의 수기로 문장이 시작됐을 때, 마법은 시작된 거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어봤던 독자라면 혹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콩쿠르 상을 한 번 더 받은 그 작가의 이력과 그의 또다른 글을 읽은 독자라면,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남겨줬던 경이로운 이면의 세계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카프카의 글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독자라면, 그 함정 같은 웅덩이에 몇 번이나 안 안 구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원본이 사라진 자리, 수많은 이미지들이 차용되고 독자는 그 이미지들에 의해 겹겹이 둘러쌓인다.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나는 그 문을 열 수 있는 것일까, 그 성에는 갈 수 있는 것일까, 천둥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아버지의 금령, '나'의 꿈처럼 내 방을 찾아 수없이 문을 연다, 문을 닫는다, 문을 연다, 문을 닫는다, 독자인 나는 '그만'을 외친다! 눈을 질끈 감는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의도했든 독자는 자기가 느낀 만큼, 본 만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라 부재...폐병...어둠...빛...구원...오직 하나의 사랑! 

  <시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의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전작들이 종교적 구원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관념으로 승화된 나의 이야기라면? 그렇다. '그의 전작들'이 나에게 중요한 단서가 된 거다. 왜 이제서야 생각났을까? 왜 이제서야 첨탑에 걸린 십자가와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그 앞에 흘리고 있겠다던 어떤 시인의 시가 생각났을까? 심리학 전공이었던 노교수의 등장으로 너무 쉽게 함정에 빠진 탓일까?  하루에 한 줄씩 글을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마지막 장에 남겨져 있다. 하루에 한 줄씩의 글과 하루에 몇 페이지의 글.  결국 하루의 한 줄씩의 글이 되지 못해 잃어버린 작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거지? 독자는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있기는 있는 걸까?  

"쓰여지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으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156면) 

그러나 '나=작가'는 썼고 피를 토한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좀 더 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서 찾은 이 구원의 이미지에 대한 '정화'를 느끼기에는 '나'의 고뇌가 더 필요했다. 작가는 더 친절했어야 했다. 잃어버린 작가의 목소리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상상되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결국 전율로 폭발되지 않고,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랬었군" 이라고, <시선>을 다 읽은 지 26시간 20분 35초가 지난 순간의 나는, 생각했다.  

 3.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의 실존을 3단계로 구분한다. 욕구와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미적 단계, 당위와 보편을 추구하는 인간은 윤리적 단계 그리고 이성에 의한 구원이 아닌 신(무한)에 의해 온전한 자아를 만나게 되는 인간은 종교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고, 이 종교적 단계야 말로 인간을 가장 성숙하게 만드는 최종적인 단계인 것이다. '한명재'가 아버지를 만나는 길은 '나바호족의 쌍둥이 전사'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과 겹쳐치며, 마침내 아버지를 찾음(만남)으로써 온전한 자아를 토해낸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 밭과 끓는 사막, 그 죽음의 길을 헤쳐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왜 나를 찾아왔느냐?"(132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wi elwi lamma' sabacqani, 마태복음 27장 46절) 

아버지 곧 '신'을 찾아 온전한 나를 완성하는 단계, 29살의 결핵 환자이자 대학원생인 내가 "휴전선에서 가까운 인구 3만의 작은 도시"를 거쳐 "나그네 여인숙"을 지나 "영화농장"에 이르러서 서른을 맞아 완성하는 단계. 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지, 왜 아버지의 금령에도 아버지를 찾아야 했는지, 왜 그의 '찾아가기'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한명재는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빛 속에서  "청년 같아 보이는가 하면 노인 같아 보이기도" 한 남자를 만나 비로소 성숙한 나를 만든 것이다. 

  독자인 나는 평생 욕망이나 욕구를 추구하고, 도덕적인 의무감도 결핍되어 있고, 삶의 통일성과 의미를 모르고 사는 원초적이고 현실적인 '미적단계' 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니,
몸서리 처지게 재미없더라도 한 번쯤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종교적 단계'에 이르는 '나'를 따라가보는 것도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메인 요리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는 심정이 된다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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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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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을 위한 DVD가 있다. (더 정확히, 혼자 밥을 먹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DVD라고 말하고 싶다.) 내용은 간단하다. 그저 화면 저편에서 같이 밥을 먹는 것. 와글와글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사람, 묵묵히 밥을 먹는 사람 등 직업, 나이, 성별, 성격이 모두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DVD로 재생시킬 수 있다. '홀로임'을 견딜 수 없거나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이들에게 외로움은 질병이라며, 이 병에 대한 처방전을 내려줬던 이도 있다.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원초적 고독에 대한 그의 처방은 '아모르파티'(Amor fati : 운명애). 하지만 고도의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고독이 일상이 되어버린 채, 인간의 삶 속 깊이 뿌리박힌 이 병을 은희경 작가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이하『나를』, 인용문구는 쪽수로 표시)는 좀 더 냉소적으로, 좀 더 은밀하게 삶에 대한 혹은 고독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요컨대, 『나를』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소통이 단절된 이 시대 속에서 고독을 발견한 은희경 작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리 고백하자면, 은희경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 말, 한 가지 실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호의적이 않던 삶을 살았다. 돌이켜 보건대 만 가지 말, 만 가지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필자는『나를』를 통해 은희경 작가의 전작들을 모두 읽고 싶어졌다.『나를』은 그녀가 고독을 발견하게 된 그 과정을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마음 편한"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은 K가 구석진 찻집에 앉아있다. k는 짐 모리슨의 'People are strage'를  들으며 잠들다 자신을 부르는 몽환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고독의 발견」, p. 42) 눈을 뜬 K에 다가온 남자는 K가 하숙집 아주머니의 신뢰를 받았으며, 하숙생들은 모두 K를 좋아했다며(p. 46) K에게 몸을 가볍게 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은희경 작가는 「고독의 발견」 서두에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 이야기. 그녀는 그 이야기에서 거짓말 할 때 코가 아닌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아이의 이야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묻는다.(p. 40) 이후, K는 어떻게 되었을까?

 K는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한 경계선에서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져버린 중심”인 W시 찾아가고, 그곳에서 난쟁이 여자 젤소미나를 만난다.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p.59)있다고 말하는 젤소미나에게 K는 하숙생들은 모두 나를 싫어했고, 그들은 악의적인 장난으로 자신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p.71)   K는 그곳에서 젤소미나를 통해 허공에 떠오르는 자신을 본 것이다. '내 삶'의 진실 혹은 심연과 조우한 나. K. 

  은희경 작가는 고독을 발견한 인간을 부유하듯 형상화한다. 텅빔, 단절된 시간, 결핍, 삶의 부재들이 무수한 파편이 되어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관통한다.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젤소미나와 허공에 떠오르는 K,(「고독의 발견」), “자기 몸 안이 텅 비어가는 느낌에 사로잡혀 우주 미아처럼 돌아올 주소를 영원히 잃어버린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진(「의심을 찬양함」), 다이어트를 하는 나(「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몽상을 하는 소녀(「날씨와 생활」), 자신의 좌표를 잃어버린 P(「지도중독」),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고 말하는 출판사 사장이 잃어버린 청춘(「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낯선 한순간 자신의 존재와 부재 사이의 좁은 틈”(「의심을 찬양함」, p. 27)을 발견하는 과정은 대부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그려진다. 단절되거나 잃어버린 그 시간들. 어린 시절 뚱뚱한 자신을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항상 슬픈 나(「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p.80)는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 부친의 위독을 통보받는다. 나는 과거와 다른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이어트에 매달린다. 여기서 은희경 작가는 다이어트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 혹을 고독을 말한다. 다이어트가 어려운 것은 몸속에 장착된 수백만 년이나 된 생존본능 씨스템과 싸우는 일(p.96)이라는 것. 인간의 몸은 철저히 지방을 모아 저장하는 돌도끼시대의 시스템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기에 현대인은 빙하기 인간과 다를 게 없는 동물적 존재(p. 97)라는 것. 배고픔을 기억하는 몸은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을 상징한다.  그 원초적인 결핍과 고독에 끈질기게 버텨왔던 나는 아버지의 빈소(또 다른 부재, 결핍, 고독)에서 국밥을 먹는다. 기름진 국물 속의 뽀얀 밥알이 든 국밥을 나는 두 그릇째 달게 비우고 만다. 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처음 본 날을 잊지 못하는(p.78), 아버지에게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지닌 나는 그 원초적인 결핍을 상징하는 몸의 기억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다.  

 

  「지도 중독」에서 P는 1조 8천만 년 전에는 곰과 인간이 같은 개체였다고 말한다. 그는 현화식물, 곤충, 인간이 모두 하나의 개체에서 네 차례 반복된 간빙기가 거쳐 탄생한 인간은 1만 년이 된 유전자를 지닌 거라고 한다.(p. 220)  『나를』은 이렇게 곳곳에서 과거를 탐닉한다. 어린 시절에서부터 1조 8천만 년 전까지.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나와 그 과거를 잃어버린 채 현재를 살아가고 내가 마주선 순간이다. 내 몸 깊숙이 박힌 고독. 그 절대적 고독과 마주선 나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허공에 매달려야 할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나, 젊은 날의 나, 지금의 나가 보일 때까지.    

  오직 앞만을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인간 소외. 통장 잔고가 내 삶의 지표가 되어야 되는 이 시대 속에서 은희경 작가는 "내 몸 깊숙히 박힌 고독"을 돌아보게 한다. 내 안의 고독을 응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고독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원초적 결핍"을 간직한 우리들의 몸을 돌아보는 순간, 1만 년이 된 유전자를 우리가 함께 돌아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와 너를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절망 앞에 선 인간만이 다시 '삶'을 희망할 수 있다면,  내 '심연의 어둠'을 응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너'를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높은 바위에 걸터앉은 여자가 두 발을 번갈아 흔드는 모습을 보며 K는 S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와 가족들과 세상 모두에게. K가 자신은 물에 빠졌고, 남의 신분증을 가진 채로 절 옆의 민박집에서 몸을 말렸다고 말하자 여자는 다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때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고 그 순간 내 몸도 함께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붉은 먼지로 감싸인 채 멀리 강이 보였으며 배에 가득 찬 손님들, 검은 외투의 남자, 그리고 흰 입김을 날리며 뭔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강을 내려다보는 젊은날 k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연구가 드디어 완성되었어.”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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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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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등으로 영화를 탄생시킨 후, 영화는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다양한 논쟁거리를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범주적 논의에서부터 예술 영화와 상업 영화를 가르는 다양한 기준들의 편차까지. (- 영화와 관련된 논쟁거리는 그 시대의 다양한 담론들과 맥을 나란히 할 만큼 풍부하다.)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언제나 ‘힘’을 부른다. 필자는 영화가 단순히 대중을 위한 소비적 취미의 영역을 넘어서 예술이 가지는 비판적인 힘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이미 벤야민(W. Benjamin)이 아우라(Aura)의 상실 속에서 예견한 ‘혁명적인 힘’이었다.) 그 비판적 힘을 선두에서 보여주는 - 마치 아방가르드(전사)처럼- 이로, 감독뿐만 아니라 평론가(비평가)도 빠질 수 없다. 요컨대, 평론가들은 ‘설(說)’을 이용해 또 다른 권력 구조를 생산하는 이가 아니라, 기존의 권력 구조를 파헤치고 해부하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고비마다 자기 피”를 팔아 연맹하는 허삼관 이야기가 담긴 책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평론가 매혈기』의 저자는, 전사로서의 이미지 보다는 영화를 사랑하고 그 영화에 대해 따뜻한 미소를 짓는 이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 훗날 자신에게 몇 권의 책과 영화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서두에서 밝힌 (p. 38) 저자의 바람처럼. (기본적으로 ‘영화’에 질문을 던지는 자들은 - 아무리 소박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전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좀 더 비판적으로 전진해 있어야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평론가 매혈기』라는 제목 때문에 필자처럼 내심 피로 쓴 글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다소 실망감이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에 입문했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영화 평론가가 되기까지의 저자 이야기가 가감 없이 서술된 『평론가 매혈기』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분명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이다.

   『평론가 매혈기』의 삼분의 일은 외국 문화원 막내 세대로서 저자의 청춘을 사로잡았던 영화와 감독들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됐다. 그 과정에서 평론가 역시 글을 쓰는 직업이기 때문에 영화 이야기 외에 “명료한 문장”이 주는 매력이 어떤 의미인지 헤밍웨이 소설을 예로 들어 보여주거나(p. 41~47), 평론가로서의 각오을 미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 빗대어 들려주기도 한다.(p. 50) 이렇게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면, 박찬욱부터 장 뤽 고다르까지 감독별로 저자의 평을 한 땀 한 땀 나열하고 있다. 

   감독별로 평이 나열되는 책의 중후반부터는 사실 읽는 재미가 반반이 되어 버렸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영화를 보지 않는 이상 저자가 평하고 있는 감독이나 영화들에 대해 동의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는 미적지근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의 재미'는 특정 감독 혹은 영화에 관한 저자의 평과 필자의 생각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가령, 이명세 감독에 관한 그의 평을 들여다보자.

    저자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가 “극단적인 양식미”(p. 133)와 "과잉 미학", "공간을 통해 시간을 되새기"(p. 134)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를 “반미치광이 예술가”라고까지 평한다. 저자가 이 글을 썼을 때는 <M>이 개봉되기 전이었는데, 저자는 <M>을 봤어도 이명세가 “아드레날린이 왕성하게 분비되어 자기 주관을 과도하게 밀어붙인”(p. 136) 감독이라는 평을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80% 이상의 세트 작업을 통해 완벽한 형식미를 선사한 <M>을 향해 그는 이명세 감독이  과연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지켜봤을 것 같다.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청각적인 공간과 반어와 은유의 미학. “고작 이런 이야기 하려고”라는 비판은 이명세 감독에게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이명세 감독에게 더 이상 서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기덕이나 홍상수 등의 감독과 함께 이런 감독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화에서도 ‘다양성’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저자의 말따마나 박찬욱 감독은 ‘시장’이 “예술가로서의 생명력을 쉽게 갉아먹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역 같은 감독이긴 하다. 그가 보여주는 ‘시장’에 대한 대처법은 김기덕 감독보다 확실히 유들유들하다.)

   『평론가 매혈기』의 고다르 편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영화를 보러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고다르의 영화 속에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소격효과’(브레히트가 주장한 ‘거리두기 효과’ p. 303)를 언급한다.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거리두기’ 효과는 대중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경계하는 시도다. 필자는 백남준 작가가 “예술은 사기”라고 소리쳤을 때, 문득 영화가 생각났다. 언제나 대중과 함께 하면서 - 비록 전국적으로 5천 명의 관객도 동원하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고 할지라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과 함께하는 장르다 -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할 수 있는 영화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토요명화세대’와 문화원 세대 그리고  “집단 최면의 감흥”(p.17)을 잃어버린 DVD 플레이어 세대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대한 정의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다양성 만큼 넘쳐날 것이다. 그러니 고다르를 통하지 않아도 좋다. 한 번쯤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합리적인 비판을 보여줄 수 있는 관객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 휩쓸리지 않는 길은 이처럼 '소박한 의문'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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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거기서 뭘 하고 있니? 무엇을 보고 있니? 해가 지고 있어요. 개천물이 흐르고 오리들이 놀고 있어요. 바람이 나무에 사무치구요, 해는 둥글고요, 산은 높고 나무들이 있지요. 새들이 날아다녀요. 선생님은 회색옷을 입었구요. 키가 크고요. 땅은 땅빛이구요." p. 140

 
 『새』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슬그머니 왔다 가버리는 ‘삶’에게 언제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하지만 어느덧 짧게나마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내게도 있게 되자, 끝내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던 ‘삶’ 이라는 게 두려워 장롱 속에 숨어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삶’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을 읽게 되면, 조금씩 그 장롱 문을 열 수 있을 것만 같다.


2.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니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p. 74


 추레한 차림의 깡마른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온다. 곧장 주류가 들어 있는 냉장고로 가더니 소주 한 병을 꺼내 와서 값을 치르고는 편의점 밖으로 나간다. 그는 문 밖에 서서 병뚜껑을 돌려 단숨에 소주를 마셔버린다. 한낮에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병을 마셨던 그 사람의 모습이 깨끗하게 비워진 빈병과 무척 닮아 있다.
 

3.

“인생살이가 소꿉놀이 같아. 한바탕 살림 늘어놓고 재미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어오지. 그러면 제각각 놀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제집으로 가버리는 거야. 사람 한평생이 꼭 그래” - p. 94

 
  제집으로 가버리는 사람 한평생을 아이는 언제쯤 알게 되는 걸까? 내일도 모레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설명 앞에 조그만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는 죽은 이의 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무덤 위의 풀이 두세 번쯤 색이 바뀌게 될 때까지도 그 사람을 기다린다. 일찍 제집으로 가버린 아이의 삶이 담긴 『새』

 
4. 

"누나. 엄마가 왜 그랬을까. 우릴 발가벗겨 내쫓았었지. 엄마는 늘 울었어. 엄마가 잠자는 동안 엄마 얼굴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나간 혼이 찾아오지 못한 거야. 누가 엄마 얼굴에 그림을 그렸지?" p. 141

 
 삶의 불가역성. 삶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죽음 앞에 마주서게 될 때다. 그가 살았던 집을 떠나 그가 입었던 옷가지를 불태우고 사진을 불태워도 어느 날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식을 찾게 되고, 그 사람이 흘렸던 눈물만큼 흘리고 있다. 니 핏줄이 그렇다. 나는 나를 보는 게 무서워졌다. 

 
5.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p. 75

 
 불콰해진 얼굴로, “내 인생 풀어보면 책 10권은 더 낼 수 있을 끼다. 어찌나 한 많은 인생인지 저걸로도 다 풀어놓지 못할 걸? 암, 모지르지.” 그 한 많은 인생 풀어놓기도 전에 늘 취기에 먼저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 그 한 많은 인생 말로라도 다 못 풀고 떠난 이들의 이야기, 절실했던 삶의 순간들,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삶의 순간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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