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손상기 평전 - 39까지 칠한 사랑과 절망의 빛깔
박래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 08년에 쓴 리뷰다. 

1.

  내 근황을 멀리서 궁금해 하는 지인이 있는데, 그는 전화하면 딱 세 가지만 묻는다. 그 중 하나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소?" 아마 이번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되물을 것 같다. "너, 손상기라는 작가 들어봤어?" 최근 나는 손상기 평전을 읽게 된 거다. 올해(2008년)가 손상기 작고 20주기라고 한다. 현재 그의 삶의 회고하는 전시회도 열리고 있는데, 문득 평전을 그동안 너무 '취급'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었는데 그 목록에서 '평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읽었던 평전을 세어 보라고 한다면, 글쎄 너무 없네? 아무튼 '평전 읽기' 일환으로 손상기 작가의 평전을 읽었다기 보다는 당장은 필요에 의해 읽은 셈인데, 생각난 김에 앞으로 평전도 좀 읽어보자 라고 머릿속에 좀 새겨넣어 볼란다.
 

2.

  올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흐 전시회가 있었다.  전시회 마지막 날은 이미 컴컴한 밤이 되어버렸는데도 입구에 늘어선 줄이 속된 말로 죽음이었다! 시립미술관 입구 밖에까지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기억이 난다. 저 상황에서 전시장에 들어가면 작품보다 "움직이는 머리"만 보이게 되니까 말이다. 고흐가 한국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뭘까? 인상주의 화가라면 일단 먹어주니까?(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소장용이다!)   

 나 역시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됐다. 왜 고흐가 좋아? 그 열정이? 실은 고흐가 보여줬던 그 광기라는 것도 그 인생의 전부를 지배하지 않았다. 1888년 고갱과의 불화를 시작으로 1890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보여줬던 광기의 시간들. 어떤 이들은 정신분석학에서 연구한 결과 고흐 그림 속에 나타나는 동글동글한(특히 별이 빛나는 밤에) 형상들이 그의 정신 상태와는 무관하다고도 하는데,  뭐 이 말은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별이 빛나는 밤이 1889년 작이니 확실히 정신착란 증세 즉 발작이 자주 있었던 시기지 않았나. 그러니까 발작과 퇴원이 되풀이된 그 시기에 남겼던 작품들이 그의 "개화기(開花期)"였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쓰고보니 여전히 답은 되지 않는다.  

 암튼 아마 나는 그러한 삶이 있었기에 고흐에 그렇게 빠져든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는" 이라고 확신해도 될 듯하다. 마치 단순히 호감은 있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의 삶을 엿보게 된 순간 꿈결같이 빠져든 순간이라고 하면 전달이 되었으려나. 내가 언제 고흐의 그림을 처음 보게 됐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언제 그를 처음 만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에게 빠져들었던 순간은 확실히 기억난다. 그러니까 내가 고흐에 빠져들었던 순간은 그가 귀를 자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알았을 때다. 이상하게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공개된 사생활 부분도 잘 챙겨보아가며 살지는 않았다. 그 작가가 쓴 산문집에서나마 그의 이력을 알게 되는 셈인데. 아무튼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누군가의 삶을 추적해 보는 게 고흐가 최초였을 거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고흐의 그림에서 보이는 그의 삶을 좋아했던 것 같다. 마치 손상기 작가의 작가 노트에 나온 말처럼,  그릴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자기의 모습 같은 거 말이다. 

 
3.   

  손상기 작가가 일반 대중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지만, 83년도에 미술 평론가들이 뽑은 문제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꾸준히 그의 그림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이뤄진 것 같다. 이 책에 그의 그림이 몇 점 실려있는데, 아 또 다른 말 좀 하면 확실히 그림은 직접 보는 게 가장 좋다. 특히 빛의 흐름을 중시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인쇄된 상태로 보면, 죽은 그림이나 마친가지다. 손상기 작가는 청회색 계열에 어두운 색채를 많이 썼는데, 그런 느낌들은 인쇄된 그림에서는 담겨지지 않는다. 

손상기 작가의 삶 자체가 참 드라마틱하다 .불구의 몸이라는 신체적인 장애가 그의 삶을 굴곡지게 한 첫 번째 요인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에 "사랑"이 찾아오면서 더욱 애절하게 되었다. "사랑은 감미롭고도 위험한 향기"라는 제목으로 평전에서도 한 장(章)을 할애할 만큼 그에게 "사랑" 이야기는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불구라는 신체와 배다른 두 딸을 가졌던 삶 때문에 손상기 작가는 작품 외적으로도 많은 이들을 이목을 끌었던 작가였던 것 같다. 83년 문제의 작가로 선정되고 이듬해 샘터 화랑에서 매년 개인전을 열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때마다 언론은 끊임없이 그의 삶을 헤집어 놨는데, 그 탓에 첫 번째 부인의 이별이 더욱 힘들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4. 

 손상기 작가의 작품 중에 '귀가 행렬' 이라는 작품이 있다. (귀가나 달동네 등의 시리즈 속에서 보여주는 귀가 모습들) 당시 아현동에서 조그만 화실을 열고 생활을 했을 때, 외출 후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하나하나가 그의 심장과 폐와 다리 신경들을 짓눌렀을 거다. 귀가하는 모습은 그 자신일 수도 있고, 당시 삶의 무게를 그만큼 지고 올라가는 주위 사람일 수도 있는 거다. 손상기 작가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삶의 고통과 고뇌와 애환들. 손상기 작가의 작품이 내 심장을 누르는 건, 그의 그림 한 점 한 점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인 셈이다. 그의 그림보다 더 먼저 만나게 되는 건 그의 삶인 셈이다. 작가와 삶. 필연적으로 그리거나 쓸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 그러한 절박함.  

  내 생에 절박했던 순간들은 언제였을까? 하루하루가 절박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는 있는 걸까? 어차피 삶이라는 건, 이해받는 게 아닌 데 말이다. 어떻게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말에서 진의가 안 느껴진다. 적어도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어쩜 그의 그림 앞에서 서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그나마 그에게 내가 진심을 보여주는 '이해'인 듯하다. 

참, 박래부 씨가 쓴 평전이 확실히 객관적인 것 같다. 뭐, 다른 출판사의 책도 없지만. 그 전에 샘터 화랑과 기타 다른 기관의 자료를 통해 손상기 작가 관련 글을 읽었는데, 미화되거나 너무 감상적인 평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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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초콜릿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남자는 초콜릿이다 - 정박미경의 B급 연애 탈출기
정박미경 지음, 문홍진 그림 / 레드박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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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가는 여자가 상반신을 살짝 비틀어,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고혹적인 미소를 날린다면?

'잡히면 쥑인다'는 멘트가 절로 상기되는 코미디 영화 속의 광녀만 아니라면,
제대로 먹히는 "남자 후리는 1백만 가지 자태"중의 하나다.  - <남자 후리는 1백만 가지 자태> 중에서 1378쪽 인용

1.
  <<남자는 초콜릿이다>>(이하 <초콜릿>)은 "정박미경의 B급 연애 탈출기"라고 소개가 되는데, 그렇다고 내용도 B급일까? <초콜릿>은 관객과 비평가를 사로잡고, 재미와 감동은 물론 고예산으로 오랜 기간 동안 투자한 A급 영화와 같다. 물론 남성 관객들의 야유쯤은 흥행 성적에 누가 되지 않는다. 참고로, 필자는 B급 영화를 단순히 싸구려 저질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상영이란 게 영화사 속에 남아있는 21세기에, A와 B급으로 영화의 수준과 장르를 분류하는 잣대는 이미 허물어졌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도 B급이라는 용어를 잊지 않고 사용하고 싶은 건, "B급" 속에 남아 있는 원초적인 냄새 탓이다. 그렇다. 그 '아우라' 때문이리라. B급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저예산과 오직 몸뚱이(아이디어) 하나로 거대 자본 시장의 틈을 파고들었던 수많은 영웅들이 만들어 냈던 그 역사의 냄새!

아무튼 본글로 다시 들어가면, 내용도 B급일까? 라고 아까 물었던 이유는,  "정박미경의 B,급,연,애,탈,출,기" 라는 부제목 때문이다. <초콜릿>이 B급 연애 탈출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그 내용마저 B급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B급 연애 운운해 하며, 그저 호객 행위용으로 독자를 사로잡으려는 부제목이 아니라는 거다.  다시 말해 B급 연애에서 벗어나라 둥, 탈출하라는 등의 말만 늘어놓으며 B급 조언을 일삼는 책이 아니라는 거다.  (절대절대(=강한부정) 필자가 초반에 제목만 보고 편견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다.)


2.
   <초콜릿>에 나오는 7가지 유형 중에 이제 막 서른에 진입했거나 서른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김연수 횽아가 '서른 살'이라는 책을 내줬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한 번쯤 겪어 봤거나 겪고 있는 중이거나 겪을 가능성이 99.999999...% 라면 저 7가지 유형에 무척 동감할 것이다.

뭐, 이제 막 서른이나 서른 이후의 연애가 어찌 7가지 유형만으로 정리될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서점 안을 노닐다가 슬몃 <초콜릿>을 들춰보거나, 혹은 인터넷 서점의 검색창에 '연애'라는 글자를 한 번이라도(도리질? 그렇다면 마음만이라도!) 두드려본 이라면, 충분히 7가지 유형만으로도 설득당하고 만다.  (물론 선물로 받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도중에 혹은 00 이벤트 도서 목록에 혹해서 또는 그 밖의 수많은 우연과 축복으로 <초콜릿>을 읽게 될 독자들이라면, 장담은 못하겠다.)
 
그리고 필자처럼 정확하게 어떤 유형에 속하지 않고 조금씩 모든 유형에 걸쳐 있는 이도 있으리라.  읽는 내내 어쩜, 그래, 어머, 이런 머저리! 등의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었던 건, 7가지 유형에 모두 걸쳐있는 덕분이다. '7유형'을 종합한 이 제8의 유형은 피해야 할 남자 유형과 배워야 할 연애 기술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한숨을 포옥 내쉬리라. 물론,  2~3가지를 조합한 제9의 유형이나 제10의 유형도 있을 것이다. 자, 여기서 그 7가지 유형에 설득당할 수 있는 '마법'이 시작된 거다. 책소개에는 분명 "리얼 B급 연애 7종 세트"라고만 나왔는데, 그 유형의 가지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일 수 있으니, 무한 사은품을 받아낸 기분이 이러할까, 공짜도 이런 공짜도 없다!  막무가내로 기뻐하려다 정가를 본다. (이거 값을 올려받거나 수정한 거 아냐! 그렇다. 나는 늘 속고만 사는 1인다.)   

 

3.
  나에게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아주 단순하게 찾아본다면(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답변이지만) 밑줄을 쫙쫙 긋게 할 만큼 유려한 문장 그 자체를 비롯해, 미처 정리되지 못한 내 생각이나 생각하지도 못한 사유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순간이 아닐까.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는 읽어보지 못하고 오직 문학과 인문서적 독서 외길 인생을 살아왔던 필자가 그동안 너무 편식적인 독서를 하게 했구나도 알게 해 준 책(이런 말을 다시 써먹을 다른 책을 금세 또 만나긴 했다.)  아아, <초콜릿>에는 밑줄 그은 곳이 참 많다. ("참많다"에 3방향 입체 써라운드로 음향 효과를 넣어주시길!)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몫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든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든, 분명한 것은 사랑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내'가 보이고 '나'를 경험게 된다는 점이다. 호감, 좋은 감정, 혹은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 관계는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강력한 인간관계다. - 53면

이 과정에서 '나'라고 생각해 왔던 경계들이 드러나고 그 경계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변화하는 '경계 허물기'가 진행된다. '나라는 경계'를 허무는 과정은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다.  (...) 연애가 쾌감을 주든 상처를 주든 분명한 것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자신을 알아가는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 54면

자신에 대한 방어막 하나 없이 연인 관계가 주는 감정의 회오리 속으로 벌거벗은 채 걸어 들어간 것이다. - 40면

남자들이 '자기 여자'에게 기대하는 것이란,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자유분방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꺾을 수 있을 만큼만 고집스러워야 한다는 것,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지배하는 영역으로 기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 103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애는 소비를 먹고 산다. 커플 되기의 가장 쉬운 방법이자 문화를 향유한다는 자부심도 안겨주는 영화는 개봉일에 맞춰 봐줘야 하고, 만난 지 백 일쯤 되는 기념일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정도는 먹어줘야 한다. 생일이면 더욱 소비적인 이벤트가 덧붙여지고 몸 누일 곳이 없는 커플에게는 모텔비까지 더해진다.
연애는 곧 소비이고 소비를 통해 유지된다. - 111면

그것을 적극적인 자신의 선택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그 이후 변화하게 될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변화하는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에는 또 다른 결심이 필요하다. - 153면

그때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사랑하고 있는 스스로를 사랑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 자체가 좋았어요.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요. - 211면"


더 이상은 생략!   

1-1
  물론 그렇다고 <초콜릿>에 100% 공감되는 건 아니다. 연애 관련 실용서를 처음 읽은 탓인지 몰라도(그 흔한 여성잡지도 5시간에 걸친 헤어펌(염색+ 펌 +코팅) 을 수십 번 해대는 동안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다. 전화번호와 자웅을 겨룰 만큼 두꺼운 여성 잡지라도 5분만에 읽어버린다. '그림'만 보고 살았다.)  혹은 연애 관련 수다를 해본 게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 탓인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쓰다 순간 '자판질'을 멈췄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와 만나 옛추억을 나누면 그 시절은 그저 순수하고, 아름답고, 마냥 그립고 좋을 수밖에 없는 과거=추억이 된다. "왕년에 내가 말이지" 라고 할 때의 왕년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이 책 다 읽은 지 1주일 안 됐는데, 벌써 "추억"이 되다니! 그렇다.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기억이 안 난다. (이때 이모티콘을 써주고 싶다. 무릎꿇고 엎어진 상태서 흙흙) 밑줄 그은 부분은 죄다 공감이 되는 부분이니 말이다. 처음부터 다시 읽을까? (다시 이모티콘 효과)  


커피 마시고 왔다 
 
  가장 객관적인 답변은 철저하게 여성의 입장에 쓴 글이기 때문이리라. 즉, 7가지 유형을 분류할 때 들게 되는 사례를 보면, 이 세상에는 비겁하거나 나쁘거나 마초거나 후진 남자들로 득실 거리고, 그 남자들에게 당하기만 한(7가지 유형 중에서 1가지 유형의 여성만 유일하게 '나쁜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양다리의 고수지만, 그녀의 사연을 읽게 되면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여성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마주하게 될 때, 지난 500년 간 쌓아온 여성들의 분노 게이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콜릿>은 '내 편 만들기' 식으로, 여성 독자들끼리 함께 분노하고 남자들을 밟아주기 위한 노가리용이 아니었다. 그 여성들의 사례를 통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연애와 섹스, 그 욕망과 두려움과 설레임 속에서 자신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우리의 왕언니가 진한 삶의 경험과 통찰로 얻어낸 결과물을 가감없이 들려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분명 또 있다. 이 음습한 기분을 뭘까! 어쩌면, '연애'라는 그 세포, 야광충마냥 핏줄 속에서 온 몸을 돌며 그 반짝이는 더듬이와 돌기를 빛내고  있을 그 세포가 말살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찾아온 '낯설음' 탓은 아니었을까, 연애 그 이름만으로 필자에게는 이미 100% 공감하기가 어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오호 통재라!
개체수 보존을 위해서라도 지극한 정성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살폈어야 했는데!

문득 1월에, 최저 기온으로 치닫던 평일밤에 덜덜 떨며 심야영화로 본 <로드>가 생각난다. 그 세포를 만나게 되는 날이 <로드>의 마지막 장면처럼 눈물콧물 질질 흘리게 할 수 있을까, 그 끝없는 잿빛 하늘아래 끝없이 걸어갔던 남자와 아이의 처절한 사투, 인류 멸망 그 이후의 삶의 현장 속에서 가슴 속의 불을 나르던 마지막 사람들! 매카시 횽아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역작 <더 로드>! 책으로도 꼭 만나세요! (본 글은, <<남자는 초콜릿이다>>(정박미경, 레드박스) 리뷰입니다. 서평을 마지막 부분만 읽거나 건너뛰면서 읽는 분들을 위한 친절한 덧붙임.)

  몇 억만 년 전에 제대로 된 사랑 좀 해보겠다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을 때,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을, 그것도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절절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초콜릿>을 읽고나니, 그때는 관념적으로 느꼈구나를 생각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가 있다. 아무튼  <초콜릿>을 비롯한 연애 관련 실용서들을 접할 때(접하게 된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필자 역시 귀차니즘보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반발심이 더 컸다.  하지만 '기술'은 필요하다! 그렇다. 사랑에 관해서도 기술은 필요했던 것이다. 어떻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지,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를 위해 어떻게 서로를 이끌어야 하는지, 어떻게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지 등을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사랑의 마음은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 216면"

   아무튼 커피 마시고 온 이후의 생각을 정리하면, 여성의 시각으로 사랑과 연애를 다루면 역시 한 면만 보게 되는 위험은 있다. 그 상황을 여성의 시각만으로 단호하게 판단하고 해결책을 내리면, 남성이 아닌 같은 여성의 입장이라도 소외되는 결론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초콜릿>이 단순히 그 면만을 부각시키면서, 남녀 관계의 역학 구도를 되짚으며, 여성 동지들을 단결하게 만드는 글이 아니라는 거다. '비치'가 되라느니, 남자의 자원을 아낌없이 향유하라느니 하라는 조언들이 먼저가 아니라, 여성들이 '나'의 모습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 진정한 나와 관계맺는 연애를 하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연애(좁게는 연애지만 넓게 사회) 관계에서 늘 수동적이거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거나 진정한 나의 모습을 잃고 사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게 아닐까?  


4.
  우리는 늘 첫키스의 날카로운 추억과 함께 진정한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사랑 이후는? 그 순간의 번쩍임과 황홀감이 지나간 이후는? 여전히 그 순간의 사랑만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인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만을 탓하며 끊임없이 다른 이를 찾아 미끌어질 것인가? 물론 그,래,도,된,다! 하지만 이제 그것마저 지친 이들에게, 그리고  한 번쯤 각종 미디어와 로맨스 소설이 심어둔 판타지에 찌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필요할 때, 무엇보다 사랑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다 충만한 사랑과 즉 사랑 이후에 찾아오는 삶인 연애, 그 두 자를 파헤쳐보고 싶은 이들에게 <초콜릿>은 초콜릿이 된다!

드디어 이 글의 결론,
(샛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손가락에서 단내가 난다.)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이들이 있어, 같은 이야기를 또 하고 말만 바꿔 또 해도 이 책들은 불황 속에서도 꾸준히 팔린다. (아참, <초콜릿>은 에세이로 분류된다. 부랴부랴 마이리뷰란에 '에세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뒀는데, 필자는 실용서로 분류하고 싶다. - 실용서로 알고 읽었다가 리뷰 작성란에 '에세이'로 뜬 거 보고 알았다. 뭐 장미가 장미로 안 불려도 그 향기가 여전하다면, 에세이를 에세이라 안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근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그 심정은 또 다르지 않을까? 에잇! 하지만 필자는 <초콜릿>이 자기계발서 내지 실용서처럼 보인다.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메시지가 너무 강력하게 전달되니까.)  아무튼 서당집에서 1년만 더부살이하는 개도 읊을 수 있는 풍월이 있다. 앎에는 실천이 따라야 하는 법! 연애, 그 충만한 삶을 지금 당장 실천하기를!    

자, 그렇다면 <초콜릿>과 그 밖의 다른 연애 상담서들도 모두 섭렵하고, 100명의 남자와도 연애를 해봤다면, 이 사람은 이제 연애 고수 혹은 달인이 되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 분명 이 책을 수십 번 정독하고 안내서대로 실천하다고 해도, 여전히 나쁜 남자에 끌리고 후진 연애를 하고 삶을 허무하게 소모하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 코도 석자다!) 문제는 그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짱황'이라는 말씀. 단 한 번의 연애라도, 더이상 자신을 소모하는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뿌리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마치 뼈아픈 실수를 겪었다면,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지혜와도 같은 것이다. 이론과 실천, 이 둘만으로는 더 이상 삶에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이론과 실천에 성찰도 반드시 넣기를! 그 깨달음과 함께 실천을 누리기를! 성찰을 동반하는 사랑과 연애를 통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를! - 이건 서당집 개도 아직 못 찾은 진정한 앎의 의미다. (나만 몰랐다고는 죽어라 말 못해!) 나와 내 삶 그리고 연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까지 놓치지 않으며, 만국의 여성들이여 연애하라! 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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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중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스져춘 외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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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근대적인 삶과 근대적인 삶 또는 전통 문화와 근대 문명의 사이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있었고, 그들이 만들어 낸 가난과 모던보이 그리고 혁명이 1930년대 거리를 활보한다. 일제하에 이상과 박태원, 김유정, 정지용, 백석, 채만식 등의 문인들이 당시 조선의 거리를 재현했다면,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이하 <<저녁>>)을 통해 루쉰, 위따푸, 천충원, 빠진, 마오뚠, 스져춘, 리오셔, 띵링이 당시 중국의 거리를 옮겨온다. 신해혁명(1911년)과 신문화운동 그리고 이어지던 혁명과 변화 속에서 1930년대 중국 근대 문학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8명의 작가를 통해, 우리는  "근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된다. 1930년대에 온 몸으로 삶의 근거지가 뿌리채 흔들리는 그 충격과 낯섦을 받아냈던 이들, 그 예민한 감수성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포착했던 이들에게 '근대'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1.     

 <<저녁>>에서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된 루신의 <아Q정전>은 그 시대의 절망을 보여준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승리했다고 착각한 아Q의 '정신승리법'과 허울 뿐이었던 혁명하에 죽임을 당하는 아Q를 통해, 루쉰은 기만적인 혁명의 결과와 그 시대의 모순을 통찰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당시 중국의 현실은 샹하이사변(1932)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마오뚠의 <린 씨네 가게>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경제가 무너져가던 시기에, 소상인 린 씨는 밀려오는 일본제품과 고리대금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허덕이며, 제 살을 파먹는 대염가 세일을 단행하지만, 상인회의 횡포 속에 결국 도산하고 만다. 서구와 일본의 침략 속에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린 씨네 가게>와 같은 소상인으로 대변되는 하층민들의 삶은 결국 붕괴되는 것이다.

라오셔의 <초승달>은 산업자본의 논리 속에서 생계를 저당잡힌 또다른 하층민의 삶이 모녀의 비극으로 재현되고 있다.  여덟 살에 이미 전당포에 물건 잡히는 것을 배워온 <초승달>의 화자는 어머니와 같은 매춘부의 길을 걷게 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모녀가 입고 먹어야 하는) 돈을 벌수록 화자는 죽어간다. "돈은 무정하다"(270면) 돈이 지배되는 근대적인 삶 속에서,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난은 숙명과 같이 대물림이 되는 것이다.

2.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타락>의 화자에게 찾아왔던 성적 열망, 위따푸의 <타락>은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억눌릴 수밖에 없는 소년의 감성이 돋보인다. 끊임없이 조국의 부강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타락>의 화자는,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비관하고 그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타락>의 화자가 이처럼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을 때, 이미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의식을 받아들였던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띵링의 <밤>에는 스무 가구밖에 되지 않는 산골 마을에 28명의 공산당원이 모여살고 있다. <밤>의 주인공은 현재 공산당원의 지도원이 되었지만, 그의 아내와는 더욱 소원해졌고, 아이를 낳지 못한 아내를 '물적토대' 구실을 못한다고 마음 속으로 비난하며, 가부장적인 구시대적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그리고 그 스스로 혁명사업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농촌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이곳에는 혁명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어떤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글자도 모른다. 아들조차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향 지도위원이고, 내일 회의가 지닌 의의에 대해 보고를 해야 했다."(287면)
지도원이 된 이후로 돌보지 못한 그의 밭은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고, 그는 엄마소를 빼닮은 송아지가 즐겁게 뛰어노는 환상까지 보지만 그의 소는 다음 날이 밝도록 새끼를 낳지 못한다. 이들에게 진정으로 풍요로운 근대는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근대 즉, 모던(modern)이 피해갔던 혹은 모던을 거부했던 이들의 삶은 천충원의 <샤오샤오> 통해 그려진다. <샤오샤오>는 12살의 나이에 이제 젖을 땐 아이한테 시집가는 샤오샤오의 삶을 통해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마을을 지나다니던 "여학생"이라는 존재로, 근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가치관을 엿보게 된 샤오샤오는 마을 인부 중에 한 명인 "바둑이"이와 함께 도시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바둑이"가 홀로 떠나버린 후, 샤오샤오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시 관례대로 기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들에게 다가웠던 근대는 이처럼 한때 꿈꾸고 싶은 미래였지만(<샤오샤오>),  허울 뿐이었고(<아Q정전>), 삶의 터전이 붕괴되는 시기였으며(<린 씨네 가게>, <초승달>), 비극적인 역사 속에 여전히 구시대적 의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이자(<타락>), 어떻게 다음 날을 맞이해야 할지(<밤>) 모른 채 밤을 새하얗게 지새울 수밖에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3.  

  그러나 이 시기를 살아갔던 세대가 이 시대의 어둠과 혼란을 극복한다면, 이후의 세대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된다.  빠진의 <노예의 마음>에는 노예의 후손인 펑과 지주의 후손인 '나'가 나온다. 펑은 대물림되는 노예의 혈통을 끊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희생으로 맞바꾼 돈으로 학교를 다니지만, 훗날에 혁명당원이 되었고 결국 총살을 당하게 된다. "자기 행복을 모두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160면) '노예의 마음'을 펑은 처절하게 끊고 싶어했다. 펑의 죽음으로 그 노력은 좌절된 것이었을까? 필자는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주인(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노예의 마음"이라고 표현한 펑이, 끊임없이 그 "노예의 마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유인이 되었다고 본다. 
  헤겔(G. H. F. Hegel )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어떻게 전도되는지 보여준다. 끊임없이 자기의식을 발전시키는 노예와 노예에게 모든 삶을 의지하는 주인의 관계는 마치 부끄러움을 곧 잊어버리고 32명의 노예를 거느린 삶에 만족하는 '나'와 펑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즉, 펑의 죽음은 단순히 노예의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한 펑의 반항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 투쟁을 해온 수많은 젊은이들의 시련을 대변한 것이다. 그들의 시련과 희생으로 인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은 자유인이 된 게 아니었을까?  루쉰의 두 번째 단편 <고향>에도 역시 그러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20년 만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화자를 "나리"라 부르는 룬투로 인해 개혁되지 못한 의식의 벽을 절감한다. 그러나 화자는(루쉰은) 희망이란 "땅 위의 길과 같다"(75면)고 말한다. 우리와는 반드시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뒷세대들에 향해 던지는, 그의 전언이 깊이 와 닿는 단편이다.

 

4.
 
  지금의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이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던'은 결코 충격적이거나 낯설지 않다. 마천루가 즐비한 거리 아래, 날마다 신제품이 출시되고,  최신 유행의 패션과 상품이 펼쳐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근대"가 과연 "무거움"이 될 수 있을까? <<저녁>>에 실린 9편의 작품들은 그 최초의 혼란과 어둠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탄식과 절망이 담겨있다. (표제작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처럼 서정성이 깃든 모던 시대의 풍경도 있다.) 이들의 글을 필두로, 중국에서 '근대'가 어떤 의미였는지, 새로운 세상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갔는지 살펴보는 것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물론 1930년대 한국 문학과 비교해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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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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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을 때, 기술이 필요할까요?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E. Fromm)은 "사랑은 기술인가?" 라는 질문에 단호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연히 혹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즐거운 감정만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음악이나 그림 또는 의학이나 공학 기술 등을 배우려고 할 때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익히고 노력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려 저 역시 "책 읽는 것은 기술인가?" 라는 물음에 단호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속독법 같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단순히 의무감에 매여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즐거움과 더욱 알찬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책읽기를 위해, 스스로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그리고 그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하려는 굳센 의지를 갖게 하는 게 우리가 찾고 있는 '기술'이 아닐까요.

 자아, 이제부터 소개할 네 권의 책은 그러한 '기술'을 들려주고 있답니다.

  

책을 읽는 방법(히라노 게이치로, 문학동네, 2008)

 
  (속닥 : 뭐랄까, 제목이 정직하더군요. 교과서처럼 말입니다. 뭐, 속 빈 강정들(현란한 디자인과 띠지 문구, 남발된 추천사 등)보다야 교과서 같아도 제대로인 책이 최고지요. 게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들려주는 말이니 아니 또 솔깃했겠습니까.)


<<책을 읽는 방법>>(이하 <방법>)의 핵심은 "슬로 리딩"이었습니다. 천천히 즐기면서 읽는다는 것!

   
  한 권의 책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읽는 방법에 달려 있다 - 19면  
   


 
  과거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대량의 정보를 습득한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지적인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히라노 게이치로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요는 그들이 슬로 리더였고, 슬로 리스너였다는 것. 현대인들은 양적으로 풍부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질적으로도 풍요로워졌느냐는 것에 대답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령, 칸트나 헤겔이 평생 동안 독파한 책의 권수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의외로 적어도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깊은 사색을 보여 준다는 겁니다. (24면)   즉, "질과 양의 차"라는 겁니다. 단순히 몇 권 읽었다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자신만의 독서를 통해 일,면접,시험 그리고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에 도움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아주 매력적입니다. 일단, 독서가 앞서 말한 여러 사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사실이지만, 슬로 리딩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 방법으로 테크닉편과 실천편으로 나눠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책 읽는 방법을 제시했거든요. 특히 슬로 리딩의 테크닉 편에 나오는 창조적인 '오독'을 권장하는 부분은 문학 그 중에서도 소실을 즐겨 있는 저 같은 독자들에게는 아주 짜릿한 독서 방법이라고 보여집니다.

   
  "항상 '왜?' 라는 의문을 갖고 읽을 것. 이것이 깊이 있는 독서 체험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또한 독자가 책을 선택하듯 책 또한 독자를 선택한다.  대화 도중 영 들을 생각이 없어보이는 상대에 대해서는 '이 사람한테 이야기해봤자 소용없어'라고 외면하듯이, 책 역시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는 독자에게는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릴 것이다." - 67면
 
   


  참, 마지막 '실천편'에서 슬로 리딩을 '헉' 소리 나게 빡세게 실천하는 것을 보고 저는 언어 영역 시험을 보는 기분이 들더군요.(몇 만 년전에 본 언어 영역 시험을 말입니다!) 슬로리딩이 알고보니 엄청 빡셌던 거죠. 그러니까 애초에 히라노 게이치로가 주장한 슬로 리딩이 실천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치 목차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먹어야 되는 독서법이었다 해도 일반적인 독서를 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무리는 있어 보입니다. 물론 득이되면 득이 됐지 손해날 것 전혀 없는 ‘다잡아’ 독서법이지만, 이런 방법은 평소에도 어느 정도 책을 읽지만 읽는 재미를 놓친 그러니까 기존과는 다르게 깊이 있고 좀 더 다양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독서가 필요한 이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실천법이었다고나 할까요. 저요? 연필로 페이지마다 문장 아래를 죽죽 그어가며 읽는 저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죠. 하지만 그런 저도 매번 그렇게 읽기는 힘들지 싶습니다. 라면도 말입니다. 고춧가루 팍팍 뿌리고 파와 청량고추를 송송 썰어놓은 후 마지막에 계란 탁 풀어 넣고 먹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로지 물과 스프만으로 끓인 라면의 맛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나저러나 히라노 게이치로 식의 '책을 읽는 방법'은 그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물론 책 읽을 때 줄거리나 인물 등 한 가지만을 쫓아 읽어왔던 독자들에게는 분명 '보다 풍요로운 세계'로 인도해 줄 책인 것 같습니다.
 

소설처럼(다니엘 페나크, 문학과지성사, 2004)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 161면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법이 먹혀들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소설처럼>>은 사랑하거나 꿈을 꾸는 일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로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줄기차게 책 좀 읽어라, 너 이 자식 책 읽으라고 했잖아” 해도 효과는? 전혀 없다는 것! (15면) 중등 교사인 저자의 체험과 통찰이 매우 빛나는 책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왜 책읽기에서 멀어지게 됐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책읽기를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는지 제목 그대로 '소설처럼'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소설처럼>>을 통해 저는 그와 ‘환상적인 팀’을 이루고 말았죠. 저는 “번번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는 아이가 되어 그의 ‘진정한 독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요컨대 <<소설처럼>>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노이로제에 걸린 -그러면서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하여 책읽기의 즐거움을 놓쳐버린 어른들(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도 책읽기의 근본적인 깨달음(즐거움)을 안겨주었답니다.

   
  "단지 아이들은 책이 무엇이며,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 151면
 
   

 무엇보다 저에게 와 닿았던 이 책의 압권은 마지막 장인 <무엇을 어떻게 읽든......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부분이었습니다. “건너뛰거나 책을 끝까지 읽지 않거나 다시 읽고 아무 책이나 읽고 군데군데 골라 읽거나....,.”  스스로가 정한 규칙에 얼마나 얽매이고 살았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읽는 것 자체를 얼마나 즐기지 못하고 살았는지 자신에 대한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 구절이었고 그 만큼 매우 통쾌했습니다. 가령,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고 치부해도 어떤 책을 읽지 못했을 경우, 저 역시 패배감에 휩싸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에 저자는 말해주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 것. 다시 읽어보면서 왜 내가 그 책을 좋아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 즐거움을 찾을 것. "잘난 척하는 사서가 우리 귀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악을 써대도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넘길 수 있는 즐거움 또한 각별"하다고 말입니다. 

   
  "어머머머 어떻게 스탕달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물론 그럴 수 있다. - 206면
 
   

  흠흠, 여기까지 왔다면 한 발 더 나아가볼까요? 원하던 처방전은 받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느리게 읽든 빨리 읽든 꼼꼼하게 읽든 대충 읽든 왜 이렇게 ‘자유로운 책읽기’라는 구호가 여기저기 들려오는 걸까? 인문서를 읽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말입니다.이런 의문들에 한 발 앞서 고민하는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고 했던가요, 학문이 현실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있지만요.                

  "텍스트의 즐거움"(롤랑바르트, 동문선, 1997)

 

   
  저자가 발견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따라서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émêler)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échiffrer)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33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서도 언급이 됐던 비평가이자 후기구조주의 사상가인 바르트(R. Barthes)의 <<텍스트의 즐거움>>(이하 <텍스트>)은 '저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의 후기 사상들(이론적 배경들)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텍스트는 “주석, 번역, 서문 및 부록 따위에 대한 본문이나 원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데리다도 그렇듯 바르트도 자신이 창안하거나 고안한 용어를 많이 사용한답니다.(그래서 그의 사상이 난해할 수밖에 없다고도 하네요.) 과연 그가 말하는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1971년에 "미학"지에 발표된 "작품에서 텍스트로"라는 글에서 바르트는 그 자신의 정의한 텍스트가 무엇인지 7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는 계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텍스트는 (좋은) 문학에서 멈추지 않고, 텍스트는 체험되는 것이며...등등 이 길고긴 텍스트에 대한 정의에서 맛깔나게 정리한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무관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어떤 언술행위의 주체도 심판, 선생, 분석자, 고해 신부, 해독자의 입장에 두지 않는 사회적 공간”이기 때문에 텍스트론은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공간” 이다. (47면)

   
  만약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 혹은 이 말을 즐겁게 읽는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즐겁게 쓰는 일이 작가인 나에게 독자의 즐거움을 보장해 줄까? 전혀 아니다.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꼬셔야/유혹해야>「draguer」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인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 모든 것이 끝나지 않기를, 놀이가 저기 있기를. - 51~52면
 
   


  물론 몇 개의 명제로 그의 텍스트론을 구축할 수 없다고 저자 스스로도 말하지만 분명한 건 “무한한 의미 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서 텍스트는 고정된 의미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인 텍스트론은 ‘저자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진정한 독자의 탄생은 “합리적 자본주의 산물”인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저자의 자리에는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는 조작자, 또 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한다는 거죠.

 아아 더이상 길어지면 바르트의 사유 바다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마무리을 지어보면요. 바르트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그 자율성을 복원시키고 “삶과 유리되지 않은 문학으로서의 도덕성”인 <텍스트>를 말합니다. 이러한 텍스트는 글쓰기라는 실천과 함께 이뤄진다고 하죠. (바르트 자신도 그러한 글쓰기를 실천했다죠.) 요컨대, 바르트가 정의한 텍스트와 일반적인 '작품'이 어떻게 다른지, 저자의 죽음을 전제한 독자의 탄생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밖에 언어의 권력성과 그 권력이 이용할 수 없는 도덕성(소설적인 것)의 의미를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 바르트와 함께 텍스트의 세계로 빠져볼 준비가 되셨나요?

  드디어 본 글의 마무리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책은 한국 소설입니다.  책이나 소설 자체가 소재가 되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가령, 윤영수의 <<소설 쓰는 밤>> 표제작을 비롯해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단편 ‘나쁜 소설’ 이나 김영하의 <<아랑은 왜>>는 아예 그 소설의 창작 과정을 풀어내버렸죠. 그 중에서 매력적인 제목으로 08년에 등장한 소설집을 소개할까 합니다. 
                                                

"위험한 독서"(김경욱, 문학동네, 2008)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선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 16면
 
   

  08년 가을, 북데일리에서 주관한 모대학 낭독회 현장에서 만난 김경욱 작가가 그러더군요. 왜 제목이 위험한 독서냐라는 어떤 학생의 질문에 '안전한 독서'처럼 평이한 제목으로는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고 말입니다. 워낙 위트가 철철 넘치는 작가라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한 답변이었는데, 정작 그 답변은 <<위험한 독서>> '작가의 말'에 잘 나와있었습니다. => “가차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독서”  <<위험한 독서>>는 작가이기 전에 자신도 한 명의 독자로서 그 스스로에 던지는 역설적인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황금사과>>를 통해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하거나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에서 김승옥과 기형도의 작품을 차용한 그의 전작들 그리고 이번의 <<위험한 독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누군가의 작품들이 그의 글 속에 겹쳐지고 재생산되며 원본과 차이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떠올려진다면, 글쎄요, 과연 스스로 책이 되고 싶어한 그의 바람이 결국 이뤄지는 걸까요?  무한히 반복되고 차용되는 글 속에서 영원의 삶을 살아가던 책 속 인물처럼 말입니다.

   
  "초보적인 독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중에 하나는 책의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런 독서법의 폐해는 정답을 찾기 위해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생처럼 저자의 권위에 짓눌린 나머지 책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경험인가 저것은 작가의 상상인가 독서량이 그리 많지 않은 당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의식하느라 정작 자신을 읽어내지 못했다.
(..) 
저자의 의도나 실제 삶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책을 당신 것으로 만드세요
책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니 거울 속 당신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 22면
 
   


 그의 열 번째 행로를 궁금하게 만든 책 <<위험한 독서>>는 곳곳에서 등장하는 다른 책들을 알아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하답니다. 표제작에 나온 화자의 말을 빌리면, 상당한 수준의 독서가임을 자부한다면 말이죠. (김경욱 작가의 독서편력을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험한 독서>> 자체가 주는 재미는? 작가의 말마따나 일단 거울 속 자신을 먼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당신이 읽을 차례야. 나를 읽어봐.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책이 되는 위험을 무릎쓸 수도 있으니까.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위험해지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평안하고 또 평안한 수만 번의 아침저녁이여 안녕.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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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 이성복 산문집
이성복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컨대, 입을 틀어막아도 막을 수 없었던 울음을 흘렸던 한 시인의 오열이 담긴 산문집을 읽고 어쭙잖은 나의 언어로 그의 산문집에 대한 평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치열하게 시인과 시를 혹은 시인의 언어를 생각해보지 못한 나였기에 기껏해야 한두 시간 안에 쓰여질 나의 글은 그의 시를 욕되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는 쉽지 않은 책읽기였고, 책을 읽는 동안 머리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인의 언어들로 울컥이는 마음을 하염없이 달래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자 끝내 복 받쳐 흘렀던 이 뜨거움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여 이후의 글은 그의 산문집과 <<아, 입이 없는 것들>> 시집 속에서 인용한 글이라는 것을 밝힌다. 정체모를 이 먹먹함과 타오름을 한 자락이나마 그의 글에 빗대어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 덧붙임 : 이 리뷰는 1년 전에 쓴 글인데, 역시 다르게 수정을 하지 못하고 올린다. 여전히 나는 시와 시인의 언어를 모른다. 정제된 언어의 힘, 그 힘 앞에 나는 불순한 독자일 뿐이다.)
  

이해 가능한 청각 언어로 번역되지 못할 바알간 석류 꽃잎을 두고,
시인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가슴 속에 깊게 패인 못자국을 들여다본다.
시인의 숨결은 그 못자국을 헤집고 너덜거리는 생채기들을 잡아채면서 상처받은 것들에게 끊임없이 제사를 올린다.

제에 올려진 것은 도살장으로 향하는 트럭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암컷 뒤를 핥다가 가끔 겅중겅중 올라타는 수퇘지들이나, 먼지와 매연, 미세한 세균들을 덮어싸고 입 안으로 올라온 침이나 무수한 죽음의 얼굴을 한 채 모든 것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었던 그 눈이나 환(幻) 에 환(幻)을 보태고 언어에 의한 언어를 통한 언어의 자기 쓰기들.

맨날 와서 피 흘려 좋을 여기가 어디인가,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던가,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시인이 보는 곳은 살얼음낀 우물,
시인의 기억이 머문 곳은 당집 죽은 대나무 앞,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들여다보듯,
마른 잎새를 흔드는 죽은 대나무 아래서 시인은 자신의 환부를 들여다본다.

시인이 본 것은 진실, 살아내야 할 진실,
진실을 보지 못한 채 글쓰기를 하려는가, 시를 쓰려하는가?

시인은 그 진실을 부등켜 안고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려 한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 변증의 여름을 기억하면서,
시인을 배반하는, 시인의 의식을 부정하는 즐거운 일탈을 향해 나아간다.

시인에게 시는 헐벗고 버림받은 존재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존재의 긍정이며 성화였고,
시인에게 시는 가짜 아름다움 속의 추악함과 추악함 속의 진짜 아름다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상호 모순된 것들을 제 품에 아우르는 것이었다. 

아, 입이 없는 것들
애초부터 죽어 있었던 것들
죽었다는 생각들 이전부터 죽어 있었으며 죽었다는 생각들 이후에도 죽어 있을 것들.

누군가는 인생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숲에 들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순례하고,
누군가는 삶과 삶을 언어와 언어를 다시 삶과 삶을 향한 오열을 터뜨린다.

어느 날 문득 방문을 열다가 보아버리 듯, 그 오열 속에서 시인은 괄호 속에 묶인 애초의 형극을 위해 본래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시인은 흠뻑 빗물을 머금고 창유리에 달라붙은 그날의 석류 꽃잎 앞에 두 마음 없이 다가선다.
 

   
  문학은 일종의 삶의 형식화이다. 문학은 자기 위안도 구원의 수단도 아니다. 우리의 감정적 호오에 관계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여러 조건들의 단순화된 표현이다. (106면)

오늘날 시는 죽었는가, 죽었다면 누가 시를 죽였는가 등속의 질문이 잇따르는 것은 애초에 시를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 전제하는 데서 출발한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물음들은 특정 사회 속에서의 시의 위의, 문화의 여러 영역들 사이에서의 시의 위치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들이리라. 그러나 유독 그에게 그 질문들이 공소하게 들리는 것은 죽음이 곧 시의 본질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에서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여, 만약 시가 극진히 대접받고 숭배받는 시대가 있다면, 그 시대의 시는 루비와 사파이어로 장식한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모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와 시의 위의는 최초의 형극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116~117면)

글쓰기에 대한 의식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지양하는 지식만이 ‘즐거운 지식’일 수 있듯이, 글쓰기를 배반하는 글쓰기, 글쓰기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글쓰기만이 즐거운 글쓰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정도는 글쓰기의 낙원에 얼마나 접근했는가를 가리키는 구체적 지표가 될 것이다. (1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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