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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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연을 믿나요?"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믿나요?” 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글쎄요..” 라며 뜸부터 들일 것 같다. 하지만 “인연을 믿나요?” 라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럼요” 라고 답변할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이라 했던가. 만남과 헤어짐. 나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관계는 인연이 닿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월이란 게 느껴질수록 그 연(緣)이라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요시다 슈이치, 그의 작품을 읽게 된 건 그러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인연 말이다.


2.

 『동경만경』은 나의 외로움을 털어놓게 했다. 마치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는 자기도 외롭다고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은”(p. 113). 위로라는 게 그저 내 마음을 아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되는 거라면, 나는 『동경만경』에서 충분히 위로를 받은 셈이다.
 

3.

  료스케가 어둠 속에서 미오에게 “놀랐어?”(p. 160)라고 물었을 때 그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을 만큼, 나는 료스케의 마음에 혹은 미오의 마음에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빠져들었다. ‘빠지다’라는 건 영혼의 문제라(p. 120) 하는데,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느낌처럼 빠져들게 한다. 그 강물 위로 반짝이는 햇살과 함께 한없이 걷고 또 걷게 만드는 어떤 그리움 같이. 
 

4.

  동경이라든가 린카이 선 개통이라든가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동경만경』 속 배경들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서울이라든가 지하철 2호선이라든가 하는 내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방향의 지하철을 타야할지 노선표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지 않고도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는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드디어 서울에서의 생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소거법(消去法)(p. 247). 몇 년 후쯤 서울 생활을 돌아보게 될 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누군가의 얼굴일까? 전철일까? 이기호의 단편 중에서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가 나온다. 나는 전철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5.

 “료스케와 헤어지는 게 아니라 료스케의 몸과 헤어질 뿐이라고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p. 263)
 

 그녀의 고민에 료스케는 아주 명료하게 답변을 건넨다. “그런데도 너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p. 273)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 몸을 좋아했든 그를 좋아했든 현재 함께 있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우리들은 종종 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고민으로 중요한 순간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6.


끝나지 않는 게 있을까? p. 270


 료스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 만큼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의 곁을 마음이 제멋대로 떠났다는 것. 영원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부재’ 관계가 성립할 때 가능하다. 요컨대, 영원한 헤어짐이 전제될 때 비로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할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영원한 사랑은 삶의 희망이니까. 미오의 동료가 “시작하는 게 두려워서 두 사람 다 눈을 질끈 감고 서로 안기만 하는 거 아냐”(p. 286)라는 말을 들려줬을 때, 아마 두 사람은 질끈 감은 그 눈 속에서 희망을 가져봤던 것은 아닐까?

 

 “내일도 만나.”라고 청년이 말한다. “…… 내일도, 모레도.”라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에도.”라고 모니카가 대답한다.
“그 다음에도”
“오늘밤도.”
“8시에 늘 만나는 곳에서.”
(...)
그러나 그날 밤, 두 사람은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의 라스트 신에는 단지 그 장소만이 비춰진다. 두 사람이 오기로 했던 그 곳.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이라고 불렀던 거리의 도로만이 연이어 다양한 각도로 비춰질 뿐이다. ‘늘 만나던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늘 만나던 곳’에 버스가 선다. 그 버스에서도 그들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장소만이 계속 비춰지면서 영화는 끝나고 만다. (p.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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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술기행 - 인간과 예술의 원형을 찾아서
편완식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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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리트(R. Magritte)의 1936년 작, <꿈의 열쇠>를 보자. 그림과 그 그림을 지시하는 문자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꿈의 열쇠>는 이처럼 제목과 상이 일치하지 않는 그림 셋과 일치하는 그림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말과 사물”의 관계를 묻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비단 <꿈의 열쇠>뿐만이 아니다. 지시 대상과 지시어의 일치가 더 이상 긴밀한 관계를 갖지 않을 때, 회화도 본질(일치하는 대상)을 그리던 과거로부터 탈각한다.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이 아프리카를 찾았던 이유는 뭘까? 말과 사물의 관계 혹은 언어와 대상이 관계가 자유롭게 유희했던 곳 아프리카. 문자조차 없었던 사하라 사막 이남 부족들의 그림(그림언어인 문양)이 현대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 저자의 말 만큼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것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가 명쾌하게 뒤집힌 결과이리라. 

  『아프리카 미술기행』은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가 언급했듯이 “인간의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다.(필자는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두 명의 한국 화가와 동행하면서 케냐부터 시작해 킬리만자로, 세렝게티, 짐바브웨, 남아공 등 아프리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체 컬러로 구성된 『아프리카 미술기행』은 시각적인 재미 만큼은 톡톡히 안겨준다. 나이로비의 석양을 찍은 사진(p. 18)에서부터 “잔지바르 좁은 골목길 안에서 만난 무명작가들의 작품”(p. 98~99), 불라와요 내셔널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작품들(p. 130~131), 세네갈을 대표하는 화가의 그림(p. 185) 등 아프리카 자연 풍광과 그 곳의 미술 작품들, 주민들의 모습과 더불어 그와 동행했던 화가들의 작품까지 어우러진 그림과 글은 240쪽이 넘도록 『아프리카 미술기행』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저자의 아프리카 미술 기행에 관한 서술이 끝나면, 함께 동행 했던 화가들의 짧은 글을 읽게 된다. 그들의 글 중에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열악한 먹을거리는 고통 그 자체 (...) 기대했던 열대과일과 채소도 흔치 않아 애를 먹었다”(p. 242~243)고 토로한 부분이 나온다. 필자는 이 부분이 <아프리카 미술기행>을 통틀어 가장 현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마사이 족을 비롯해 저자가 보여줬던 평온한 주민들의 일상은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인 것이다. 여전히 기아와 내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주민들 대부분의 삶이 배제된 “원형 찾기”는 애석하지만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저자의 바람(과거형)으로 그친 것 같다. “인간 원형”을 찾는 과정은 그 뿌리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사유와 체험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의 미술관을 다녀와서 대단히 실망했다고 전한다. 현대식 건물 속에 수용된(갇힌) 고흐의 열정을 그는 그 곳에서 찾을 수 없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고흐를 만나려면 오히려 남불의 뜨거운 태양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기행 서적들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상당히 상응한다. 그래서 왜 지금 아프리카 미술인가? 라는 질문도 반드시 던져봐야 한다. 『아프리카 미술기행』의 저자는 “작업 공동체로 묶인 팅가팅가 조직체”(p. 89)에 대해 상업화의 길을 택한 아프리카 미술의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찾아갔던 갤러리들은 이미 아프리카 미술의 상업화가 오래 전부터 이뤄져 왔음을 상징한다. 이를 테면, ‘갤러리’라는 단어에는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이 거미줄처럼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미술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지금 구매자들의 욕구를 자극시킬 미술은 어디에 있는가? 피카소와 마티스가 고갱과 자코메티가 그 밖의 수많은 예술가들이(저자는 실제로 다양한 예술가들을 마지막 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한 번쯤 열광했던 나라 아프리카, 그 아프리카 미술 만큼 유혹적인 상품도 없을 것이다.


  우연히 책의 붉은색 겉표지가 벗겨졌는데, 겉표지를 벗겨놔도 예쁜 책이었다. 책장 한켠에 예쁘게 자리잡고 있을 책, 한 번쯤 아프리카 미술 기행을 계획해 본다거나 “초원 위의 바람” 같은 아프리카 음악과 풍광을 관조하고 싶다면 『아프리카 미술기행』도 좋은 지침서가 될 듯하다. 허나 그 뿐이라는 것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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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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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강화를 읽고나면 소설이든 시든 편지든 일기든 잡글이든 뭐든 쓰고잡아질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뭐 하나 끄적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글 안 써!"라고 절필을 선언한 사람의 각오 정도는 된다고 하겠다. 어딜 내놔도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두루두루 어여뻐 주시는 책이니 '글쓰기'라는 난공불락에 하염없이 머리칼을 쥐뜯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발모제 대신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다만 한문 '울렁증'이 있는 이라면 쓰나미를 타고 서핑하는 기분이 들 터이나 1940년에 나온 단행본으로 언문일치를 고민하던 시기에 나온 책이라니 용서가 될 것이다. 참고로 한글 세대인 나는 언문일치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긴가 하여 그 말의 역사를 찾아봤다.
 

 "한국 최초의 국한문혼용체인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65) 서문(序文)에 언문일치 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나며, 그 후 이인직(李仁稙) 등의 신소설과 최남선(崔南善) ·이광수(李光洙) 등을 거쳐 김동인(金東仁)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이더라 ·하더라’를 ‘이다 ·한다 ·하였다’ 등으로 고치고, 소설에서 ‘he ·she’에 상당하는 3인칭 대명사 ‘그’ ‘그녀’를 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하도다 ·하외다’ 등의 문어(文語)에서 벗어나 ‘한다 ·합니다’ 등의 구어(口語)를 쓰는 문장으로의 변천과정이었으나, 한국어의 특성상 그 완전일치는 불가능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그러나 이 책의 삼분지 이를 차지할 법한 각종 예문들을 읽는 데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중고등 국어 교과서 비롯한 각종 문제집과 언어 영역에서 자주 보던 친숙한 이들의 글이니, 어즈버 학창 시절이 꿈이런가 하는 나에게는 특히나 졸업 이후 현대 문학만을 쫓은 나에게는 그 시절의 '노스땔지어'와 함께 반갑기 그지없는 예문들이었다. 동시에 예를 드는 문장들이 일반인들은 결코 넘볼 수 없는 경지가 그득하메 노파심에 혹여 그 예문들로 인해 좌절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가령, 제재 부분에서 제 아무리 작고 평범한 것이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글이 된다며 들어준 예는 이상의 <권태> 였고, 맛깔나는 문장은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하며 들어준 예문은 정지용 이나 최명익과 같은 당대 내로라 하는 문장가들의 글이었다. 

 
   한 가지 또 큰소득은 정지용 작가의 재발견이다. 중고등 시절 이후 한 번도 안 찾아봤던 작가인데, 이 책의 예문을 통해  한 마디로 그의 글에 뻑이 갔다. 책의 중후반쯤 가면 "글자 하나 토씨 하나 하부로 하지 않는 정지용"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체감했다고나 할까. 지용 횽아 최곱! 내꼬! 당장 장바구니에 담아주겠어! 


 이런 잡글이나마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게 바로 문장강화라고, 다시 한 번 '수미일관 어법'을 구사하며 글을 마치련다. 


 * 아참, 여기서 강화의 의미도 재발견 했다. 강화라곤 복부 강화 내지 삼별초 항쟁만 생각나는 내게 "강의하듯이 쉽게 풀어서 이야기함" 이라는 세계도 있다는 것을 저자가 몸소 강림하여 보여준다. 쉽게 쓴다는 건, 글쓰기의 제 1도리가 아니겠는가 저 혼자 뿌듯해 하며 자위하는 글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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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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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내가 읽는 책들이 주로 문학에 편중되어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왜 문학을 읽느냐 라고 물었을 때 내가 문학은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라고 그 사람에게 백날 설명해도 그는 수긍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000 작가책은 왜 읽느냐 라든가, 00 장르는 왜 읽느냐 라는 질문이 아닌 '문학' 자체를 언급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는 책은 읽되 '문학'은 안 읽거나 '문학'이란 것이 효용 가치가 없다고 보는 부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게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 근황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의 대처법을 갖기로 했다. 그 사람에게 책을 추천할 것, 그 사람의 상황을 대변하거나 일깨울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것. 아니면 지금 그에게 필요로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것. 물론 문학으로서.  이렇게 말하면 내가 대단한 독서가인양 오인될 수 있는데, 일단 나는 평균적인 독서량을 하는 사람이고(그것도 얼마 안 되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인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아무튼 <이런 사랑>은 여러 사람에게 두루두루 추천이 가능한 책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풍부한 책이고 그만큼 '보편성'을 획득한 책이라는 거다. 흔히 말하는 명작이나 고전의 첫째 덕목은 '보편성'이라 본다. '인간' '삶' 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책들은 시대나 세대 혹은 국경이나 인종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철학 서적들은 몇 천 년이 지나건 몇 만 년이 지나건 보편적인 서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서 철학 서적들이란 반드시 학술적인 의미의 서적만을 칭하지 않는다. 소설에도 수두룩 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말이다. 철학의 시작은 삶의 문제에서 비롯된 거니까.  아무리 초초초관념적인 문제를 철학이 고민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근원은 언제나 실체적인 삶에서 비롯된 거다. (암튼 번역 소설 중에 괜찮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죄다 한 철학 한다. 프랑스 소설이 그 중에 최고봉을 기록하는데, 상대적으로 프랑스나 독일 외 다른 외국 서적을 접하지 못한 내 탓도 크다. 어쨌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쉿쉿쉿)
 

2. 

 
  자아, 여기 날아가는 풍선 기구 안에 남자 아이가 타고 있다. 그대로 두면 아이가 추락해서 죽을 지도 모를 상황이다. 일찍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4가지의 실마리로 찾았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발동한다고 본다. 우리의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은 풍선을 잡고자 기구에 매달린 로프를 붙잡았다. 그러나 풍선은 로프를 잡고 있는 이들을 모두 공중에 띄워버렸고 이에 주인공은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로프에 매달리는 건 나의 의무고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그러나 측은지심은 거기까지. 상황이 더욱 급박해지자 누군가 손을 놓았고, 결국 그들은 풍선을 놓치고 말았다. 문제는 끝까지 로프를 놓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과 그가 결국 죽었다는 거다. 

 
   최근에(엥간하면 나는 특정 시기를 최근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찾아보면 죄다 최근에 본 거다!) 본 소설 중에 도입부 끝내주네 라고 생각이 든 게  <무중력 중후군>이나 <일요일 스키야끼 식당>이다. <이런 사랑>의 도입부도 만만치 않은 강도로 나를 사로 잡았다. 상황 좋고, 묘사 좋고, 주인공의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 좋고. 이언 매큐언 이라는 작가에 대한 사전적인 정보 (무슨 상 받았다는 둥, 대단한 작가라는 둥)가 없어도 충분히 '헉' 숨을 멈추게 할 작가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런 느낌은 중반에서 한 번 더 강렬하게 때렸다. (커튼 이야기 나올 때 말이다) 게다가 2장이 시작될 때 화자는 스스로 이야기 전개를 늦춰보자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런 사랑>이 만만치 않은 강도로 독자를 내몰겠구나를 느꼈다. 별 거 아닌 장치(?)지만 '나'라는 인물이 그 사건에서 비롯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암시해 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처법이 나 같이 듬성듬성 생각하며 사람에게는 진짜 골 때리는 일이긴 하지만, 읽는 재미로는 끝내준다고 본다. 기대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 만한 기대감을 들게 했을 경우지만.


3.

 암튼, 나는 반대로 간략하게 정리를 해야 할 입장이니 속도 좀 내려한다. 작중 화자인 '나'는 자신이 먼저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며 당시의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자기 위안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었고,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누군가의 죽임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부인인 클라리사와 함께 잘 견뎌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래가 주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결국 예정대로 파국은 시작된다. <이런 사랑>이 단순히 이런 나의 고민만으로 끝났다면, 흔해 빠진 실존 소설류로 분류될 수 있었겠으나 그 문제를 둘러싸고 저마다의 가치와 문제를 든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거다.

 

 "당신이 옳다는 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p. 302  풍선 기구의 로프에 줄줄이 매달렸던 사람들의 이미지가 알레고리로 연결이 된다는 거다 즉, 그 이미지가 하나의 은유가 되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는 거다.  풍선 기구 사건이 하나의 '사실'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실에 반응할 수 있는지 조와 패리, 클라리사, 로건의 부인, 형사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4.

  "하지만 그 외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당신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그 일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는지, 그 일 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봤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야"  p. 304  

 
자아, 작중 조인 나는 300쪽이 넘게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고민했고 독자인 나도 그의 경험과 판단을 믿고 따라갔다. 결국 조가 확신했던 문제도 보기 좋게 들어 맞았다. 그러나 부인인 클라리사는 똥줄 타게 읽으며 달려왔던 나에게 되려 저렇게 말한다는 거다. 다시 말해 300쪽이 넘는 이 책을 다 읽고나도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무슨 핫바지냔 말이다. 표면적으로 예정된 특정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을 해결한 듯 하지만,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던 거다. 로프에 매달렸던 그 상황처럼. 가장 철학적인 답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답은 없다. 철학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의문을 품는 학문이고 이에 칸트 아저씨는 일찍이 뽕빨나게 정리했다. 우리는 철학 그 자체를 배울 수 없는 것고, 다만 '철학하기'를 배울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답이 없다고 해서 '핫바지'나 진짜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끝으로 <이런 사랑>은 다양한 제목을 연상시킨다.  더 정확히 저런 사랑, 요런 사랑, 그런 사랑 등등의 관형사 붙은 제목들이 떠오른다는 말인데, <Enduring love> 원제를 보면 차라리 우리말 제목이 낫지 않나 싶다. 인내하는 사랑 내지 참는 사랑으로 달았다면 앞서 내가 말한 게 좀 헛소리 같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인내한다는 건 어떤 상황을 극복 내지 견디자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안 읽었지 않은가. <사랑을 견뎌내기>라는 영화 제목으로도 나와있던데 아렇게 안 본 거다. 견디긴 뭘 견뎌?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인내나 극복 후에 얻는 게 있다면 삶에 대한 통찰이라는 건데, (그래 그것 때문에 이게 철학적인 책이라 본 거다.) 나는 견뎌내기 라는 의미에 결론까지 함축해서 생각한 것 같다. 즉, 견디다가 해결된다로 직결되는. 그런데 기실 내 식으로 안 보면 계속 견뎌내는 상황이라는 건 맞는 말 아닌가. 뭐야 마무리가 안 이뤄질 것 같네. 오늘은 새벽부터 설쳐대느라 넘 피곤하네 그려. 이따가 다시 생각해 보련다. 우선 이런 독자도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

 

  * 흠, 새복에 다시 왔네그려.

간단한 거 아니었을까?  견디다 라는 말을 완결된 형태(완료 형태)로만 고집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구. 다시 말해 견디다 라는 의미를 결론까지 염두한, 고진감래 라든가 비온 뒤에 더 단단해진다 라든가 하는 식으로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던 거 아냐? <이런 사랑>의 견디기는 앞으로도 쭉 견디다 로 이해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이러면 넘 비관적인 거 아니냐구? 누가 글더라 인간은 고통에서도 행복을 느낀다고. 일종의 채념 내지 적응이 됐다는 말인데. 암튼 이런 독자가 읽은 <이런 사랑>의 핵심은 주인공이 뭔가를 이겨낸 듯 극복한 듯 해결한 듯 열심히 뭔가를 했지만 결국 변한 건 없다는 거야. 다시 기구로 돌아왔다는 거. 즉, 여전히 우리는  "하지만 그 외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당신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그 일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는지, 그 일 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봤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야"  를 고민한다는 거야. 사는 게 뭐 이래 해도 어쩔 수 없어. 우리는 끊임없이 돌을 지고 올라가야 하는 운명인가봐. 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이제 그의 다른 책을 보면 될 것 같아.  이언매큐언의 다른 책 좀 보자구. 과연 이런 식으로 골 때려주는 작가인지 확인해 보자구. 어쨌든 <이런 사랑> 원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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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 페르시아 고양이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2
구효서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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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고나면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멋지구리한 문장(겉만 번드드한 문장을 의미한 게 아니다)이 대부분인데, (<물 속 페르시아 고양이> 이하 <물>)에서는 화자가 학창시절에 기거했던 자취방 주인 아줌마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아니 한동안 혼자서 그 아줌마 톤이나 억양을 상상하며 그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고 하면, 당시 소설가 지망생인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주인 아줌마가 "소설가라면 마르께스가 최고지요" 라고 한 말 때문이다. 화자는 그 말이 "TV 라면 아남이 최고지요" 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자신의 기호를 일반화 한 것 같아 그녀의 안목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어쨌거나 이삿짐 옮길 때(특히 책) "그 책들 다 읽은거유"라고 말하는 아주머니들에 비하면 주인 아주마 쪽이 대화하기엔 낫지 않느냐 라고 화자도 나름 만족은 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놨는데, 나, 그 아주머니의 말에 완전 취미 붙였다. 가령 이런 거다. 벤야민의 선집 중에서 한 권을 읽었다. 그러면 "비평가라면 벤야민이 최고지요" 하는 식이다. 혹은 예약 주문한 <밤은 노래한다>가 도착하면 아마 나는 "소설가라면 김연수가 최고지요" 할 것 같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역시 마르께스가 발음상 재미는 있다. 마르께스가 마르케스가 를 연발하면서 제스처까지 취해주면 이런 재미가 또 없다. (실제로도 <백년의 고독>은 최고지 않나!)
 

 
2.


  <물>을 읽으면, 마르께스가 이렇게 따라온다.(후반부에 다른 책들도 많이 언급된다.) 책들은 연결된다는 말, 갈수록 확신이 든다는 말이다. 암튼 넘어가서, 이 책이 구효서 작가와의 첫 만남인 셈이다. 그런데 소설 이야기 보다 자꾸 딴 이야기(내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만약 구효서 작가와 대면하게 된다면 줄줄이 말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편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바디페인팅> 도 편하기 그지 없는데, 내 감성은 효서 씨와 맞나부다. 어쩌면 '소설' 이야기를 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자기 이야기.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글쓰기에 관한(내 직업이나 관심사) 이야기, 살아가면서 힘들었거나 억울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 (그건 <바디페인팅>도 마찬가지인데! 왜 자꾸 그 책을 걸고 넘어지나) 아무튼 <물> 중에서 '물 속 페르시아 고양이', '나무 남자의 아내', '영혼에 생선가시가 박혀'가 아주 좋더라. 이번에는 메스 좀 안 들이애 볼란다. 딱히 구성이 어떻고 문체나 메시지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두 눈을 희번뜩이며 판단하고 싶어지지 않아졌다. 아휴~효서 씨 글은 안 피곤하게 보고 싶다. 아항,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에서 딱 어울리는 말을 찾았다. "언어란 언제나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런 희미한 빛의 소중함을 모두 지워버린다" -103쪽 예전에 어떤 영화평론가가 에세이 비슷한 글에서 그러더라구. 영화를 보는 게 '직업'이 되어버려서 아쉽다고. 나야 관련 종사자는 아니지만, 꼭 그런 느낌이기도 한다. 좀 편하게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표지도 봐라. 얼마나 푸근하니. (어차피 에세이에 더 가까운 글이라 본다.)


3.

  끝으로 다시 우리의 마르께스 아주머니 이야기로 돌아가면, 화자는 소설이라는 말이 왜 그녀를 설레게 했는지 알 것 같다며 그녀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기다려온 건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특별한 외상 없이 마치 "심상치 않은 충격과 압박"에 의해 죽었으리라고 추측되는 고양이 시체와 함께 그녀의 사연을 떠올리는 '물 속 페르시아 고양이'. <물>의 단편들은 그렇게 사는 이야기 나온다. 정갈한 안주와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며 소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주고 있는 사람에게 니 말투가 어쩌고 의도거 뭐고 하는 식으로 따지고 싶어지지 않는 기분이랄까. 술이라면 역시 살짝 얼려진 얼음이 동동 뜬 동동주가 어울릴 글이다. 캬아! 비도 오는데 오늘은 부침개와 함께 동동주렷다!


추신 : '영혼에 생선가시가 박혀'는 아주 재미있는 우화다. 한국문단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단편인데, 그게 요즘 읽고 있는 <이문열과 김용옥>(인물과사상사) 때문에 더욱 흥미로웠다. 참, 강준만 씨의 저 책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 준만 씨 팬이 될 생각이다. 말로만 들어왔던 준만 횽아의 첫대면은 대박이었다. 횽아킹왕짱!  <이문열과 김용옥> 서평은 날밤을 새워줄 작정이다. 것도 상,하란다. 이틀밤을 새워야 겠어. (쉿쉿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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