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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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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아, 사랑을 무어라 생각하시나요?  사랑이 뭐죠?
아아 그 교과서 같은 답 말고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대체 뭐죠?

 
아 저요? 저는 불 같이 빠져드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죠.
한 마디로 상대방에 미쳐버리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항상 저만 미쳐서 정말 xxx 취급 받았습죠.
함께 미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더라면, 로미오나 줄리엣 같은 커플은 명함조차 못 디밀었을 겁니다.
하긴 내가 명문가의 자손이 아니라는 점이 열세긴 하네요. 아니지 갸네들이 가문의 반대가 없었으면

그렇게 단 시간 내 열광적으로 빠져들었겠습니까. 제가 가정한 경우는 에 그러니까 미친다는 건 그런 부차적인 도움 없이

말 그대로 첫눈에도 뿅 가는 상황이습죠. 로마의 휴일인가요? 단 하루만에 생판 모르는 공주와 기자가 사랑에 빠지는 거 있죠?
그것도 좋네요. 아하 롯데와 우리의 베르테르도 있습죠.
아니아니 더 쉬운 예로 하이틴 로맨스물 설정들이 다 그런 식 아닙니까.

뭐 횡설수설 같아도 정리하면 사랑은 미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
그럼, 질문을 달리해 보죠.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가요?
아아 그 기술 말구요. 예를 들어 의시가 되려면 의학적인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거잖아요.
사랑에도 그런 이론과 실천 그리고 기술 습득에 이은 기술 숙달이 필요하다고 보나요?

이에 프롬 씨는 단호하게 사랑에도 그러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프롬 씨의 말을 옮기면,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의 조치는 우리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17쪽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자아 얼른 필기도구 꺼내세요. 지금 프롬 씨 강의가 진행 중인데 함께 열공 모드로 들어가보자구요.
참, 아까 대답하신 분 있죠? 사랑이란, 미치는 거라고 하신 분. 

프롬 씨는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한 거 뿐이라고 합디다. 그것도 올바른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자 프롬 씨 강의가 얼마 안 남았으니, 더 자세한 건 안에서 들어보죠. 얼른 들어가보세요.

 

(** 다음의 글은 <사랑의 기술>에서 요약 발췌한 내용으로 구성한 것임)

 

*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입니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다시 말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준다는 것을 뭔가를 포기하거나 빼앗기거나 희생하는 걸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는 거죠. 헌신적인 건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말한 준다는 행위 자체에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 고양된 생명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큰 환희를 느끼는 겁니다. 즉, 주는 것은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즉, 물질적인 뭔가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겁니다. 나의 기쁨, 나의 관심, 나의 지식, 나의 유머, 나의 슬픔.. 이렇듯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상대방을 풍요롭게 한다는 거지요. 나의 생동감은 물론이요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는 말입니다. 이런 게 주는 거라면 그 자체가 행복하지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존경이 따르는 겁니다. 존경의 어원은(respicere=바라보다)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입니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죠. 다른 이야기 좀 해 볼까요? 누군가에게 환상을 품은 적 있죠? 소위 말하는 콩깍지가 씌워진 상황말입니다.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으로 상대방을 보는 사람이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나 자산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은 비단 철학에만 적용되는 명제가 아니지요. 이 말도 모든 심리학의 주요 동기가 된답니다. 

 자아 환상의 문제를 이젠 성애(性愛)하고 연결지어 봅시다.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경험을 뜻합니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을 갈망하는 것인데 성애야 말로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겁니다. 왜 그러냐면 앞서말한 장벽이 이젠 없다는 건데, 이건 정복욕을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처음에야 강렬하고 유쾌한 관계지만 차츰 새로운 정복과 새로운 사랑을 갈망하게 되는 겁니다. 즉 이전의 사랑과 새로운 사랑이 다르다는 환상을 품는다는 거죠. 즉즉, 도취적이고 일시적인 합일이기에 환상이 사라지면 두 사람의 격리감은 더욱 뚜렷하게 난다는 겁니다.  즉즉즉 분리에 대한 불안감으로 합일을 갈망하지만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나 수녀처럼 살아야 되느냐? 아니죠. 성애에는 형제애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성애는 기본적으로 독점욕이 있거든요. 애착으로 표현되는데 그건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즉, 성애적인 사랑만을 원하는 이들은 서로를 동일시해서 고독을 극복하지만 그들 외 다른 사람과는 여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척해서 배타적이라는 겁니다. 자아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이 아닙니다.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지요. 여기에는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 등이 나타나는데 이런 걸 저는 형제애라고 분류합니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아의 사랑입니다. 

 
 그럼 다시 사랑이란 주는 것이다 라는 말로 돌아가봅시다. 저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 사랑은 내가 살아있는 기쁨, 생명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다음 시간에는 신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애, 모성애와 같이 다른 유형의 사랑을 더 살펴보고, 현대사회에서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고, 많이 소비하고,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이 가능한 사람들이 사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사랑의 의미를 강의하려고 합니다. 그런 후 실천적인 문제를 다뤄야겠지요. 이번 시간에는 사랑의 이론적인 측면을 알아봤으니 그 이론들을 실천하기 위한 훈련 내지 숙달 방법도 논의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

 


*

프롬 씨 강의는 딱딱하지 않아서 좋더라구요. 재미도 있고 특히 어렵지가 않아요.
다음 달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강의가 진행된다고 하니, 미리미리 예약해 놓자구요.


그럼,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 하나 던져보고 싶네요.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하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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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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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20세기를 가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예술
- 부제 : 오빠가 돌아왔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에 읽어도 눈의 침침함을 피할 수 없는 깨알 같은 크기의 활자체 대신 그림판만으로도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투박한 표지 디자인 대신 산뜻한 디자인과 활자체로, 오빠가 돌아왔다! -


  반 고흐(V. van Gogh)의 1886년 작, <한 켤레의 구두>를 보자. 이 낡고 닳아빠진 한 켤레의 구두를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지적처럼 "대지의 말 없는 부름, 익어가는 곡식의 조용한 선물,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 과 같은 존재의 폭로를 목도할 수 있고, 재현의 대상과 그 대상이 주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의(M. Duchamp)의 1917년 작, <샘>를 보자. 이 작품에서 우리는 존재의 현시나 창조된 아름다움 혹은 이념의 현현이나 기존의 예술 작품에서 보여줬던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19세기와 20세기를 가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예술을 논할 때, 우리는 "아우라(Aura)의 붕괴"와 대면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을 통해, 1900년 전후 예술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지각 변동을 예고한 벤야민(W. Benjamin)은 가장 완벽한 복제품에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성이 빠진 기술복제 시대의 작품들은 원작이 주는 진품성인 아우라가 없다는 것이다. 복제품들은 대량생산에 의해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으며(복제품의 현재화),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전통)를 청산한다.(47쪽) 비단 복제된 작품들은 전통성을 뒤흔들어 놓는 문제뿐만 아니라 원작의 의도를 확대ㆍ축소 하고, 영화에 의한 시공간의 조작까지 가능하게 되면서 예술작품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의식에 기대어 살아온 예술 작품들의 기생적 삶에 대한 방식을 벗어나게 한다.(52쪽)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통찰한 것에 있고. 여기서 벤야민은 자율성을 획득한 예술의 긍정적인 사회 전복 가능성(정치성)을 본 것이다.

  매체 미학의 선구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독일 최고의 문예비평가였던 벤야민의 대표적인 논문이 실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길), 이하 기술』)이 여전히 번역상의 문제가 지적되더라도 환영할 수밖에 없는 건, 전10권의 선집 구성 중에 한 권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그 스스로 기술복제 논문의 ‘원판’이라 칭한 제2판본이 제3판본과 나란히 실렸다는 것이다. 제2판본의 중요성은 기존의 제3판본에 없었던 기술의 분류 작업에 있다. 벤야민은 기술적 진보에 따른 아우라의 붕괴를 애도하지만 동시에 긍정의 의미를 예견하는 데, 이때 자연과 인류의 어울림을 지향하는 제2기술을 통해(57쪽) “기술의 불행한 수용”에 상응하는 예술을 경계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기술복제시대 예술의 해방적인 증후들을 사진과 영화 그리고 다다이스트를 필두로 한 현대미술에서 찾는다. 요컨대기술』은 두 판본의 기술복제 논문 이외 문예지나 주립극장 회보, 사회연구지에 발표된 벤야민의 평론을 실어 새로운 생산양식이 가져오는 변화된 삶을 사진과 영화, 현대미술을 통해 통찰한다.

  기술 진보의 시대 속에서 다시 말해  더 이상 ‘예술인 척’ 할 필요없는 대중 예술 속에서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아도르노(Th. W. Adorno)에게 대중은 치밀하게 계산된 자본주의의 효용성에 지배되어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관객이다. 이와 달리 벤야민이 작품 감상할 때 정신이 분산되는 관객으로서 대중들의 변화된 삶(아우라의 상실)을 긍정했던 것은,  전통적 가치보다는 아우라 상실에 따른 대중들의 비판적 기능이 그 시대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진보한 현대에도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상의 이미지와 욕망이 들끓는 현대에도 파시즘을 예고하는 권력 장치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러한 권력 장치에는 벤야민이 긍정했던 대중의 '판단 능력'이 절실하다. 아렌트(H.Arendt)에 따르면 악이라는 것은 어떤 제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멈춘 바로 그 자리에서 생겨난다. 이미지들의 자가 증식, 복제에 복제가 이뤄지는 가상의 세계에서 사고하기를 멈추고 비판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일차원적 인간’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기술』에서 벤야민은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잃은 수동적인 관객이 될 것인가, "정치의 예술화"에 맞설 수 있는 비판적인 관객이 될 것인가 그 선택과 전략은 각자의 몫이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제의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 53면

제1의 기술은 실제로 자연의 지배를 추구했다. 제2의 기술은 그보다는 자연과 인류의 어울림[협동, 상호작용, Zusammenspiel]을 지향한다. 오늘날의 예술이 갖는 사회적으로 결정적인 기능은 자연과 인간의 이런한 어울림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57면


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은 통찰력을 쓸데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  -62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점이다. 80~81면

 
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관조적 침잠의 대상으로서의 작품의 무가치성을 보다 더 중시하였다. ~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 속에서 침잠(Versenkung)이  반(反) 사회적 행동의 한 양태로서의 정신분산[오락, Ablenkung]이다. - 88면 

아우라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 사물을 자신에게, 아니 대중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하는 것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일회적인 것이든 그것을 복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성향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의 열정적인 성향이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 속에서, 아니 복제물 속에서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184면


예술사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과거의 위대한 예술작품들 속에 들어있는, 그 예술사가 시대에 해당하는 예언들을 해독하는 일이다. -218면


"하나의 예술이고자 하는 사진의 요구는 바로 사진을 가지고 장사를 했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프로인트, 49쪽). 달리 말해 하나의 예술이고자 하는 사진의 요구는 사진이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286면

 
   


 
※ 50여년 전, 전쟁통에 먹었던 '산딸기 오믈레트'의 맛을 잊을 수 없어 해가 갈수록 침울해져간 한 왕이 있었다. 왕은 오랫동안 훌륭한 요리로 왕의 식탁을 가득 채웠던 궁정요리사에게 그 맛을 느끼게 해줄 산딸기 오믈레트를 요구했지만, 궁정요리사는 죽을 각오로 산딸기 오믈레트에 쓰인 당시의 재료를 마련할 수 없다고 왕에게 말한다.  궁정요리사는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와 같은 이 모든 당시의 분위기 즉 아우라(Aura)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벤야민의 에세이 '산딸기오믈레트' 중에서 부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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