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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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20세기를 가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예술
- 부제 : 오빠가 돌아왔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에 읽어도 눈의 침침함을 피할 수 없는 깨알 같은 크기의 활자체 대신 그림판만으로도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투박한 표지 디자인 대신 산뜻한 디자인과 활자체로, 오빠가 돌아왔다! -


  반 고흐(V. van Gogh)의 1886년 작, <한 켤레의 구두>를 보자. 이 낡고 닳아빠진 한 켤레의 구두를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지적처럼 "대지의 말 없는 부름, 익어가는 곡식의 조용한 선물,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 과 같은 존재의 폭로를 목도할 수 있고, 재현의 대상과 그 대상이 주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의(M. Duchamp)의 1917년 작, <샘>를 보자. 이 작품에서 우리는 존재의 현시나 창조된 아름다움 혹은 이념의 현현이나 기존의 예술 작품에서 보여줬던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19세기와 20세기를 가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예술을 논할 때, 우리는 "아우라(Aura)의 붕괴"와 대면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을 통해, 1900년 전후 예술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지각 변동을 예고한 벤야민(W. Benjamin)은 가장 완벽한 복제품에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성이 빠진 기술복제 시대의 작품들은 원작이 주는 진품성인 아우라가 없다는 것이다. 복제품들은 대량생산에 의해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으며(복제품의 현재화),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전통)를 청산한다.(47쪽) 비단 복제된 작품들은 전통성을 뒤흔들어 놓는 문제뿐만 아니라 원작의 의도를 확대ㆍ축소 하고, 영화에 의한 시공간의 조작까지 가능하게 되면서 예술작품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의식에 기대어 살아온 예술 작품들의 기생적 삶에 대한 방식을 벗어나게 한다.(52쪽)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통찰한 것에 있고. 여기서 벤야민은 자율성을 획득한 예술의 긍정적인 사회 전복 가능성(정치성)을 본 것이다.

  매체 미학의 선구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독일 최고의 문예비평가였던 벤야민의 대표적인 논문이 실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길), 이하 기술』)이 여전히 번역상의 문제가 지적되더라도 환영할 수밖에 없는 건, 전10권의 선집 구성 중에 한 권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그 스스로 기술복제 논문의 ‘원판’이라 칭한 제2판본이 제3판본과 나란히 실렸다는 것이다. 제2판본의 중요성은 기존의 제3판본에 없었던 기술의 분류 작업에 있다. 벤야민은 기술적 진보에 따른 아우라의 붕괴를 애도하지만 동시에 긍정의 의미를 예견하는 데, 이때 자연과 인류의 어울림을 지향하는 제2기술을 통해(57쪽) “기술의 불행한 수용”에 상응하는 예술을 경계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기술복제시대 예술의 해방적인 증후들을 사진과 영화 그리고 다다이스트를 필두로 한 현대미술에서 찾는다. 요컨대기술』은 두 판본의 기술복제 논문 이외 문예지나 주립극장 회보, 사회연구지에 발표된 벤야민의 평론을 실어 새로운 생산양식이 가져오는 변화된 삶을 사진과 영화, 현대미술을 통해 통찰한다.

  기술 진보의 시대 속에서 다시 말해  더 이상 ‘예술인 척’ 할 필요없는 대중 예술 속에서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아도르노(Th. W. Adorno)에게 대중은 치밀하게 계산된 자본주의의 효용성에 지배되어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관객이다. 이와 달리 벤야민이 작품 감상할 때 정신이 분산되는 관객으로서 대중들의 변화된 삶(아우라의 상실)을 긍정했던 것은,  전통적 가치보다는 아우라 상실에 따른 대중들의 비판적 기능이 그 시대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진보한 현대에도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상의 이미지와 욕망이 들끓는 현대에도 파시즘을 예고하는 권력 장치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러한 권력 장치에는 벤야민이 긍정했던 대중의 '판단 능력'이 절실하다. 아렌트(H.Arendt)에 따르면 악이라는 것은 어떤 제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멈춘 바로 그 자리에서 생겨난다. 이미지들의 자가 증식, 복제에 복제가 이뤄지는 가상의 세계에서 사고하기를 멈추고 비판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일차원적 인간’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기술』에서 벤야민은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잃은 수동적인 관객이 될 것인가, "정치의 예술화"에 맞설 수 있는 비판적인 관객이 될 것인가 그 선택과 전략은 각자의 몫이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제의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 53면

제1의 기술은 실제로 자연의 지배를 추구했다. 제2의 기술은 그보다는 자연과 인류의 어울림[협동, 상호작용, Zusammenspiel]을 지향한다. 오늘날의 예술이 갖는 사회적으로 결정적인 기능은 자연과 인간의 이런한 어울림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57면


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은 통찰력을 쓸데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  -62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점이다. 80~81면

 
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관조적 침잠의 대상으로서의 작품의 무가치성을 보다 더 중시하였다. ~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 속에서 침잠(Versenkung)이  반(反) 사회적 행동의 한 양태로서의 정신분산[오락, Ablenkung]이다. - 88면 

아우라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 사물을 자신에게, 아니 대중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하는 것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일회적인 것이든 그것을 복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성향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의 열정적인 성향이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 속에서, 아니 복제물 속에서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184면


예술사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과거의 위대한 예술작품들 속에 들어있는, 그 예술사가 시대에 해당하는 예언들을 해독하는 일이다. -218면


"하나의 예술이고자 하는 사진의 요구는 바로 사진을 가지고 장사를 했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프로인트, 49쪽). 달리 말해 하나의 예술이고자 하는 사진의 요구는 사진이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286면

 
   


 
※ 50여년 전, 전쟁통에 먹었던 '산딸기 오믈레트'의 맛을 잊을 수 없어 해가 갈수록 침울해져간 한 왕이 있었다. 왕은 오랫동안 훌륭한 요리로 왕의 식탁을 가득 채웠던 궁정요리사에게 그 맛을 느끼게 해줄 산딸기 오믈레트를 요구했지만, 궁정요리사는 죽을 각오로 산딸기 오믈레트에 쓰인 당시의 재료를 마련할 수 없다고 왕에게 말한다.  궁정요리사는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와 같은 이 모든 당시의 분위기 즉 아우라(Aura)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벤야민의 에세이 '산딸기오믈레트' 중에서 부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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