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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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등으로 영화를 탄생시킨 후, 영화는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다양한 논쟁거리를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범주적 논의에서부터 예술 영화와 상업 영화를 가르는 다양한 기준들의 편차까지. (- 영화와 관련된 논쟁거리는 그 시대의 다양한 담론들과 맥을 나란히 할 만큼 풍부하다.)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언제나 ‘힘’을 부른다. 필자는 영화가 단순히 대중을 위한 소비적 취미의 영역을 넘어서 예술이 가지는 비판적인 힘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이미 벤야민(W. Benjamin)이 아우라(Aura)의 상실 속에서 예견한 ‘혁명적인 힘’이었다.) 그 비판적 힘을 선두에서 보여주는 - 마치 아방가르드(전사)처럼- 이로, 감독뿐만 아니라 평론가(비평가)도 빠질 수 없다. 요컨대, 평론가들은 ‘설(說)’을 이용해 또 다른 권력 구조를 생산하는 이가 아니라, 기존의 권력 구조를 파헤치고 해부하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고비마다 자기 피”를 팔아 연맹하는 허삼관 이야기가 담긴 책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평론가 매혈기』의 저자는, 전사로서의 이미지 보다는 영화를 사랑하고 그 영화에 대해 따뜻한 미소를 짓는 이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 훗날 자신에게 몇 권의 책과 영화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서두에서 밝힌 (p. 38) 저자의 바람처럼. (기본적으로 ‘영화’에 질문을 던지는 자들은 - 아무리 소박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전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좀 더 비판적으로 전진해 있어야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평론가 매혈기』라는 제목 때문에 필자처럼 내심 피로 쓴 글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다소 실망감이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에 입문했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영화 평론가가 되기까지의 저자 이야기가 가감 없이 서술된 『평론가 매혈기』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분명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이다.

   『평론가 매혈기』의 삼분의 일은 외국 문화원 막내 세대로서 저자의 청춘을 사로잡았던 영화와 감독들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됐다. 그 과정에서 평론가 역시 글을 쓰는 직업이기 때문에 영화 이야기 외에 “명료한 문장”이 주는 매력이 어떤 의미인지 헤밍웨이 소설을 예로 들어 보여주거나(p. 41~47), 평론가로서의 각오을 미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 빗대어 들려주기도 한다.(p. 50) 이렇게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면, 박찬욱부터 장 뤽 고다르까지 감독별로 저자의 평을 한 땀 한 땀 나열하고 있다. 

   감독별로 평이 나열되는 책의 중후반부터는 사실 읽는 재미가 반반이 되어 버렸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영화를 보지 않는 이상 저자가 평하고 있는 감독이나 영화들에 대해 동의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는 미적지근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의 재미'는 특정 감독 혹은 영화에 관한 저자의 평과 필자의 생각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가령, 이명세 감독에 관한 그의 평을 들여다보자.

    저자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가 “극단적인 양식미”(p. 133)와 "과잉 미학", "공간을 통해 시간을 되새기"(p. 134)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를 “반미치광이 예술가”라고까지 평한다. 저자가 이 글을 썼을 때는 <M>이 개봉되기 전이었는데, 저자는 <M>을 봤어도 이명세가 “아드레날린이 왕성하게 분비되어 자기 주관을 과도하게 밀어붙인”(p. 136) 감독이라는 평을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80% 이상의 세트 작업을 통해 완벽한 형식미를 선사한 <M>을 향해 그는 이명세 감독이  과연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지켜봤을 것 같다.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청각적인 공간과 반어와 은유의 미학. “고작 이런 이야기 하려고”라는 비판은 이명세 감독에게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이명세 감독에게 더 이상 서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기덕이나 홍상수 등의 감독과 함께 이런 감독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화에서도 ‘다양성’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저자의 말따마나 박찬욱 감독은 ‘시장’이 “예술가로서의 생명력을 쉽게 갉아먹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역 같은 감독이긴 하다. 그가 보여주는 ‘시장’에 대한 대처법은 김기덕 감독보다 확실히 유들유들하다.)

   『평론가 매혈기』의 고다르 편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영화를 보러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고다르의 영화 속에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소격효과’(브레히트가 주장한 ‘거리두기 효과’ p. 303)를 언급한다.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거리두기’ 효과는 대중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경계하는 시도다. 필자는 백남준 작가가 “예술은 사기”라고 소리쳤을 때, 문득 영화가 생각났다. 언제나 대중과 함께 하면서 - 비록 전국적으로 5천 명의 관객도 동원하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고 할지라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과 함께하는 장르다 -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할 수 있는 영화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토요명화세대’와 문화원 세대 그리고  “집단 최면의 감흥”(p.17)을 잃어버린 DVD 플레이어 세대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대한 정의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다양성 만큼 넘쳐날 것이다. 그러니 고다르를 통하지 않아도 좋다. 한 번쯤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합리적인 비판을 보여줄 수 있는 관객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 휩쓸리지 않는 길은 이처럼 '소박한 의문'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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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술기행 - 인간과 예술의 원형을 찾아서
편완식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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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리트(R. Magritte)의 1936년 작, <꿈의 열쇠>를 보자. 그림과 그 그림을 지시하는 문자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꿈의 열쇠>는 이처럼 제목과 상이 일치하지 않는 그림 셋과 일치하는 그림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말과 사물”의 관계를 묻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비단 <꿈의 열쇠>뿐만이 아니다. 지시 대상과 지시어의 일치가 더 이상 긴밀한 관계를 갖지 않을 때, 회화도 본질(일치하는 대상)을 그리던 과거로부터 탈각한다.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이 아프리카를 찾았던 이유는 뭘까? 말과 사물의 관계 혹은 언어와 대상이 관계가 자유롭게 유희했던 곳 아프리카. 문자조차 없었던 사하라 사막 이남 부족들의 그림(그림언어인 문양)이 현대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 저자의 말 만큼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것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가 명쾌하게 뒤집힌 결과이리라. 

  『아프리카 미술기행』은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가 언급했듯이 “인간의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다.(필자는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두 명의 한국 화가와 동행하면서 케냐부터 시작해 킬리만자로, 세렝게티, 짐바브웨, 남아공 등 아프리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체 컬러로 구성된 『아프리카 미술기행』은 시각적인 재미 만큼은 톡톡히 안겨준다. 나이로비의 석양을 찍은 사진(p. 18)에서부터 “잔지바르 좁은 골목길 안에서 만난 무명작가들의 작품”(p. 98~99), 불라와요 내셔널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작품들(p. 130~131), 세네갈을 대표하는 화가의 그림(p. 185) 등 아프리카 자연 풍광과 그 곳의 미술 작품들, 주민들의 모습과 더불어 그와 동행했던 화가들의 작품까지 어우러진 그림과 글은 240쪽이 넘도록 『아프리카 미술기행』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저자의 아프리카 미술 기행에 관한 서술이 끝나면, 함께 동행 했던 화가들의 짧은 글을 읽게 된다. 그들의 글 중에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열악한 먹을거리는 고통 그 자체 (...) 기대했던 열대과일과 채소도 흔치 않아 애를 먹었다”(p. 242~243)고 토로한 부분이 나온다. 필자는 이 부분이 <아프리카 미술기행>을 통틀어 가장 현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마사이 족을 비롯해 저자가 보여줬던 평온한 주민들의 일상은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인 것이다. 여전히 기아와 내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주민들 대부분의 삶이 배제된 “원형 찾기”는 애석하지만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저자의 바람(과거형)으로 그친 것 같다. “인간 원형”을 찾는 과정은 그 뿌리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사유와 체험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의 미술관을 다녀와서 대단히 실망했다고 전한다. 현대식 건물 속에 수용된(갇힌) 고흐의 열정을 그는 그 곳에서 찾을 수 없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고흐를 만나려면 오히려 남불의 뜨거운 태양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기행 서적들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상당히 상응한다. 그래서 왜 지금 아프리카 미술인가? 라는 질문도 반드시 던져봐야 한다. 『아프리카 미술기행』의 저자는 “작업 공동체로 묶인 팅가팅가 조직체”(p. 89)에 대해 상업화의 길을 택한 아프리카 미술의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찾아갔던 갤러리들은 이미 아프리카 미술의 상업화가 오래 전부터 이뤄져 왔음을 상징한다. 이를 테면, ‘갤러리’라는 단어에는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이 거미줄처럼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미술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지금 구매자들의 욕구를 자극시킬 미술은 어디에 있는가? 피카소와 마티스가 고갱과 자코메티가 그 밖의 수많은 예술가들이(저자는 실제로 다양한 예술가들을 마지막 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한 번쯤 열광했던 나라 아프리카, 그 아프리카 미술 만큼 유혹적인 상품도 없을 것이다.


  우연히 책의 붉은색 겉표지가 벗겨졌는데, 겉표지를 벗겨놔도 예쁜 책이었다. 책장 한켠에 예쁘게 자리잡고 있을 책, 한 번쯤 아프리카 미술 기행을 계획해 본다거나 “초원 위의 바람” 같은 아프리카 음악과 풍광을 관조하고 싶다면 『아프리카 미술기행』도 좋은 지침서가 될 듯하다. 허나 그 뿐이라는 것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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