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갈등과 불평등
최병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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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생각해보면우리는 기본적으로 환경에 대한 철학적인 혹은 사상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따라서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책을 잡았을 때 일반적인 환경공학 전공자 중에서 학사 내지 석사 급들은 도저히 이해가지 않을 서적이고그나마 박사과정 이상 되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봤다환경공학 전공자들은 기본적으로 화학생물학토목공학 등 다양한 이학과 공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운영된다환경공학이란 것은 단순히 환경 그 자체적으로 학문이 완성된 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문제는 그 방향적인 요소에서 공학은 철학과 사상을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다환경공학과를 입문하면 환경공학 개론 정도로 살펴보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인류 개체수의 대폭발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만 볼 것이다예전에 환경관련 교육을 받을 때 강사로 나온 분이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의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이후 고전경제학자인 리카도와 제임스 밀 그리고 영국의 천재적인 자유주의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까지 이어본다면 우리가 그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학문과 서적을 남겼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를 마르크스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구론저자 멜서스를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예언도 맞았지만멜서스의 예언도 맞았다인구의 급격한 폭발적 증가는 환경공학에서 제일 먼저 고민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환경을 바라보는데 왜 사상과 학문인가그것은 공학적으로 처리하고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경제학과 인류학이 필요하며더 나아가 법률과 윤리학까지 이어진다환경은 단순히 폐기된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것만은 아니다이제 환경은 후속처리가 아니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가치로 등급한 것이다.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도서가 나올 때 1990년 후반부였다지금은 2015년이고저자인 최병두 교수가 논문을 집약하여 정리했으니 시기적으로 약 30년 정도 차이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내용이 전혀 낡은 것이나 시기가 지난 것이라 볼 수 없었다그 이유는 아직도 그런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환경정의환경에서 보는 관점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는 인간이 모여 사는 장소에 따라 그 위해도 달라지고들어서는 환경혐오시설도 달라지는 점이다.


최근 밀양에 765KV 송전탑 때문에 말이 많다언론과 미디어는 정보를 통제하고그 지역의 주민들을 무시했다그런데 왜 이런 송전탑을 세우는가이유는 간단하고 복잡하다이런 송전탑들은 한국지역의 남측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위쪽인 서울경기지역으로 보내기 때문이다서울경기지역에는 발전소 중에 핵발전소 같은 시설이 없다부산 기장과 울산 그리고 전남 영광 등 한국에서 남측에 위치한 곳에 핵발전소가 위치해있다지정학적으로 북한과의 무력충돌 시 적의 미사일이 발전소를 강타할 때 문제점을 보면 바를 수도 있겠지만문제는 후속대책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핵의 에너지를 점차 줄여가는 게 세계추세이나 한국에서는 핵에너지 의존도가 증가한다계속되는 푸른 도시와 맑은 공기를 위해 핵발전소의 만능주의를 외치지만사실 핵폐기물 처리와 핵 사고는 치명적인 것을 넘어 국가존재조차 흔들게 만든다일본 후쿠시마발전소의 피해는 이미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그 주변에서 나온 음식을 먹은 사람은 암으로 걸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방사능의 폐해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방사능 오염도 문제거니와 해체적인 요소 그리고 원자력을 대신할 에너지도 필요하다그런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적 집단과 경제적인 조직의 이익이 합치되면 국가사업이 움직이는 일이 많다.


핵 발전에 들어가는 원자재나 또는 발전시설을 세우기 위해 일부 독점자본기업가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노릴 수 있다이런 결과는 바로 밀양아리랑이 서글프게 울려 퍼지는 할머니들의 비명처럼소수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공리주의적인 방식은 분명 사회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이나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환경갈등에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공리주의복지주의가 구분되어 있다한국은 이미 신자유주의국가이고그러면서도 복지국가 선언을 하나복지보단 정지에 가까운 수준이다공리주의에서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관점을 다르지만기본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는 전기 공급은 중요하다하지만 대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점을 문제다.


에너지를 오염시키지 않고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최근 대체 에너지가 급부상한다그러나 정보력 부족홍보부족기존 기득권의 이익이 작용되면서 난해한 부분이 되어간다과거 참여정부에서 자동차 연료를 석유에너지보단 하이브리드 기술을 발전을 추구할 때 기존 정유회사와 자동차업체 반대에 무산된 점이 있었다환경정책은 21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자본의 권력에 무참히 밟히게 된 현실이 있었다환경정의를 필요성은 환경의 대상은 어디에 존재하느냐이다환경이란 공간은 먼저 생태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사회적 환경도 포함된다사회적인 환경법과 제도 경제적 권력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가난한 사람일수록 집은 환경적으로 열악하다근대화산업이 빛을 보던 때 한국은 경제성장에 환호했지만대다수의 서민과 노동자들은 좁은 집에 환풍기능이 열악한 곳에서 살았으며수도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하수도 이용에서 불편을 겪었다집값에서 좋은 숲과 하천이 있는 곳보단 공장지대와 황무지 쪽에 위치하면서 나쁜 공기와 물을 접하게 되어 환경위생학적으로 불량한 상태가 되었다.


환경정의를 말하려면 우선 최병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존 롤즈의 철학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른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가난한 자들은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교육이 되지 않으면 국가경쟁력이 저하되고문화적 혜택이 되지 않으면 인성의 한계성이 온다이런 자들이 정치적 사회적 참여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보일 수 없으며정치적 합의에 따른 국가운영에서 시민들의 자질이 부족하게 된다물론 이 관점은 롤즈가 칸트주의자에서 시작한 것이고칸트를 넘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환경적인 불평등을 보고 있었다가난한 자들은 비위생적인 주거공간과 음식으로 병이 들고가혹한 육체노동으로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환경과 더불어 인류 불평등적 기점에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마르크스주의에서 도시기능이 인간을 소외하고 가난한 자들을 계속 외지로 내몰며주거환경정비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연결되는 점까지 말이다환경공학에서 이런 경제적인 정치적인 요소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하지만 사상철학으로 들어가면 환경은 결국 인간의 정의와 칸트가 요구하는 선(, goods)의 가치를 말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좋은 환경을 원한다자신의 집 주변에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반대를 한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환경을 파괴되는 것은 무관심하다심지어 공장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감하기 폐수와 오수를 무단방류하고대기오염물질과 악취를 여과 없이 내보낸다그 결과 주변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호흡기질환 및 안과질환에 시달리고폐수로 인해 하류에 사는 주민들은 상류에서 공급되는 상수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다특히 과거 낙동강페놀사건과 같은 환경오염은 페놀의 화학적 반응으로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낙태될 정도였다.


결국 환경적 처리비용을 두고 기업적 이윤추구는 환경적 공공재원을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환경보건적인 문제까지 확대시켰다환경정의가 왜 정립되어야 하는가그것은 단순히 법과 제도적인 영역을 지나 인간생명과 환경적 기능의 마비로 인한 생활의 위협까지 넘어간 것이다이런 시기에 환경이란 단어는 미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경제발전 앞에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세태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이미 21세기가 아니라 <환경갈등과 불평등>에서 언급된 내용이다경제민주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에서 모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투입과 회수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기 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생기면 그 자본의 출처와 투자의 범위 그리고 고용발생과 사후관리방안을 골몰히 생각하기보단 단지 눈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한다대도시에 대규모상점이 입주하면 그 지역의 상권과 문화적 발전이 일어나나기존 골목상권과 더불어 교통체증인구증가에 따른 폐기물증가차량증가에 따른 대기오염 및 소음진동 피해가 일어난다환경이란 것은 처음 경제적 이익에 치중하면 후폭풍으로 다가오는 함정과 같은 존재다눈앞에 신기루처럼 이익의 효과범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것을 감당해야할 지역주민이다.


지역주민이 기업과 정부 혹은 환경단체에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그 지역의 환경 분쟁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다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있다는 점이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다가 점차 지방자치단체에게 업무를 위임했으나업무적인 영역에서 위임했지 권한에 대한 결정권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다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기반이 되는 지역주민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주민들의 반대의사를 억지로 무마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노동의 투입이다노동력조차 이제는 인간보단 기계로 대체되고인간은 보조적으로 투입될 뿐이다하지만 노동력의 주요 동력이 인간이든 기계든 그 파괴되는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다자연에 대한 환경파괴는 여전히 공공재원으로서 가치를 저하시킨다공동의 재원을 일개 개인이나 업체가 점유하여 개발하는 것은 용이해도 그 이후에 일어난 환경문제에 방관하는 태도도 일부 보이기도 한다환경 분쟁에 대한 해결에서 지역의 빈부격차문화수준학력차이 등이 결국 많은 불평등적 요소를 야기한다그래서 롤즈의 철학에서 보듯이 최소수혜자의 대한 입장배려는 환경정의가 필요한 이유이고환경에 대한 추가적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 환경오염에 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리에 자동차의 매연이 보도블록 위의 행인에게 덮칠 때아파트 단지에서 떨어진 공단지역에서 악취가 나면 상당히 불쾌해한다심지어 수도관에서 녹슨 물이 나와도 생활에 많은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환경피해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평소 환경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망각한다자신의 편리함만 완성되면 남의 입장을 보지 않기에 환경정의는 매우 윤리적인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하지만 만약 윤리적 조건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면 아직까지 산업재해나 환경오염 피해자가 나올 리가 없다공장 안의 악취매연도 환경오염 중에 하나다환경이란 조건은 우리 인생 그 자체에 존재하고지구 안에 어디라도 존재한다신자유주의에 대한 환경적 정책에서 내가 놀란 점은 환경제국주의다.


기존에 자신들이 이미 다 사용하여 쓸모없는 환경발생 공정을 후진국에 넘겨 그 제조과정에서 나온 상품을 다시 받는 점이나환경오염을 정화하는 기술을 토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환경산업에 대한 지적이다이들은 교묘히 환경오염을 다른 나라에 떠넘겨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최근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제3국의 발전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그들은 19~20세기 산업화 때 오염물질을 이미 지구에 뿌려놓고 이제는 후진국의 발전을 환경오염원인자라 매도하고 있다환경에 대한 국제적인 분쟁은 여전하고우리도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나연안에 불법으로 투기되는 폐기물도 문제다.


환경은 단순히 수질대기토양만이 아니라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식량도 포함된다청정지역의 확보는 식량조달의 기본이다동해 권에서 일본서해 권에서 중국 어민과 마찰을 맺으면서 식량안보에서 환경문제가 기반 되는 것이다오염된 곳에서는 생물체가 살 수 없고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이 나올 수가 없다이런 실태에서 우리는 명분이란 것을 찾아야 하고명분을 위해서는 논리와 사유가 필요하다환경하는데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 환경은 인간에게 제외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온 점이다환경정의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상적인 망상이 아니다지금 우리 삶을 지탱해야할 가치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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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8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8 14:29   좋아요 0 | URL
허허허

2015-07-28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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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중 가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이다통일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군에를 복무한다군대복무가 문제인 이유는 사실 많은 젊은이를 2년 내외의 시간을 무상으로 보내게 하는 것과 더불어 그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야 하는 점이다나는 개인적으로 군대는 있어야 하고남성이 군에 가는 것은 인정한다단순히 남북한 휴전만이 아니라 군사력은 단순히 안보와 평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외교경제 등 다양한 영역으로 판단해야 한다단지 그것을 위해 많은 젊은 청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이 단지 안타깝다매년 군 안에서 훈련에 의한 사고로 사망 내지 부상당하는 군인이 발생되고구시대의 문물을 청산되지 못해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의문사 내지 자살그리고 극단적인 살인행위도 등장한다인간의 이율배반적인 게 군대는 필요한데 내 자식은 안 되라는 심정을 가진 부모는 많을 것이다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할 지 모른다.

 

남북의 긴장감이 군대 내에서 폭발하면 어찌 되는가예전에 북한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수많은 도발과 위기를 주었다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대응하는 것이 바른 것이며그 위기를 넘어서서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이 옳다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부터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있고결과가 있다면 성과도 있어야 한다계속 되는 긴장관계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영화 <연평해전개봉처럼분명 해군장병의 죽음은 숭고하고 안타까우나정작 중요한 일들은 다시는 그런 아픈 일들이 없어야 할 것이고그 원인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전투가 일어나면 국민 입장에서는 군인이 사망하나군인의 가족에겐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리게 된다그 일로 다들 해군과 해병대를 지원한다고 해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서 너울거리면 집에 계시는 부모님과 학교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군대서 내가 죽으면 그 본인은 거기서 끝이나 가족들은 영원한 고통과 분노를 안고 살아야만 한다군인도 사람이고군인 이전에 가족이 있는 한국인이다전쟁에 대한 억제는 단순히 연평해전과 서해교전만의 문제만이 아니다우리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고이런 불상사가 터지면 외국자본도 빠져나가 경제적으로 좋지 않다진짜 전반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냉전시대를 지나 이제 국제적으로 고립된 국가는 몇 개가 되지 않는다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했던 미국조차도 쿠바와 직항 항공노선을 개설했다게다가 쿠바와 사회주의 영향이 남은 국가조차도 한국과 수교를 맺어 많은 한국인이 그곳에 가서 관광과 경제활동을 한다. 21세기는 이념으로 대립되는 세상이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교역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그런 조건은 바로 평화와 소통이다.

 

북한은 외국처럼 우리가 영어일어중국어를 안 배워도 말이 통하는 국가다국가라고 헌법적으로 인정할 수 없겠지만이미 국제법이나 외교적으로 국가로서 활동하는 조직이다항상 북한의 도발과 이데올로기적인 정의노선은 우리 사회의 모태가 되었다반공노선이라 하여 북한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했지만막상 사회주의 관련 도서를 비교해도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니고공산당이 북한을 지배해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한국에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여 한국인 대부분이 자국의 헌법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게다가 자유주의철학까지 연구했다는 사람 역시 드물다한국 플라톤 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번역 저술한 <에우티프론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을 읽다보면 중우주의가 등장한다박종현 교수의 해설에서 중우주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물론 1970년대 교수로 있으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는 그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모순으로 가득하나그가 지적한 문제는 확실하다정보의 전달력에서 한국인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눈앞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판단하기 보다는 자기가 알고 싶어 하고그렇게 여기기 바라는 것만 본다내가 언론과 미디어를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몽타주의 대가들이기 때문이다영화와 범인수사에서 몽타주와 다르게 그들은 영상보다는 글자와 말소리로 왜곡한다일부 문장만 들고 와서 모든 것처럼 확대해석하여 그 내막을 전후관계로 보는 게 아니라 그런 것처럼 꾸민다예를 들어 그렇다고 보더라이렇게 말하더라.” 등등을 말이다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이데올로기 반공주의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에 사람들은 찾아보기보단 그저 눈앞의 영상만 바라보고 신문도 몽타주로 꾸며 진실은 은폐한다후에 문제의 몽타주가 거짓말로 들통 나면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나가지만이미 몽타주를 접하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자신의 어리석음 멍청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믿음을 밀고 간다인간의 정의는 이성의 논리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정체성이 기반 된다이성의 사고로 접하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신념에 복종한다아마 전에 대선과 총선에서 이게 가장 잘 먹힌 일이 있었다. NLL, 북한한계선에서 참여정부에서 넘겨주었는지 안 했는지가 관건이 된 적이 있었다.

 

일단 나는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정말 참여정부에서 한국의 영토 내지 영해를 주려고 했을까다음 생각으로 만일 사실이라면 왜 저것을 일반 국회의원이 말하는 것일까기본적으로 군대에 복무한 사람에게 군사보안은 제한되어 있다장교들도 2급 보안에만 겨우 통제적으로 접근하고, 1급 이상은 극히 극소수 사람에게만 열람이 가능하다군사보안 1급은 국가에 아주 치명적인 위기를 줄 수 있는 정보다치명적인 안보문제를 아무렇게나 떠벌리는 국회의원그리고 그것을 들은 후에 대선 직접 거리에서 연설하는 현재의 국회의원보안법 위반이다군사보안을 누설하는 자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다.

 

그런데 그 반역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사실 그 발언이 한국이 북한에게 NLL을 주려한 게 아니라 그 수역을 공동어로로 삼아 군사적인 관계에서 갈등을 이완하고어민의 이익을 증대하고 국가경제를 발전하자는 논의였다그 후에 그 발언을 한 현재의 국회의원은 찌라시를 봤다고 한다찌라시종이 쪼가리어디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종이라니 무슨 장난인가논객이 나와 토론을 하는데보수논객이 이겼다그런데 그가 제시한 근거가 사실 거짓말이고그 거짓말로 드러나자 자신의 논파를 부정하면 명예훼손이라 한 일화가 있었다그런데 그런 거짓말이 드러나도 아직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인간의 뇌가 이성적이란 사실보다 단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란 점이 강한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외교 갈등에서 왜 이런 요소가 중요한가북한에 대한 관점에서 통일은 다들 필요하다고 한다그러나 방법론적인 요소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북한의 내부붕괴로 인해 쿠데타 내지 혁명이 일어나면 그 일에 대한 감당을 누가 하는가한국정부와 한국 국민들이다세금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적인 대립이 일어난다일단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여 응징만 하면 정의실현이란 아주 단순히 만화책 내용을 주장하고 있으니 대안의 영역이 없는 게 유감이다통일이 되려면 방법은 북한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합을 하는 것이다전자의 문제는 전쟁과 쿠데타로 일어나야 하므로만약 전쟁이나 소요사태로 군사충돌이 일어나면 무슨 재앙이 생기냐는 것이다.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핵무기를 보유하려 한다핵이 터지면 적어도 반경 50~100는 초토화다핵이 내린 자리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다심지어 동식물 생태계와 수질 및 대기권과 같은 자연공간도 파괴된다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방사능공화국이 되고한국인은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이나 망명을 가야 한다핵이 떨어지면 핵만이 아니다지하에 매설된 기름보관소나 병원의 방사능기계 수많은 위험인자들이 파괴되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주유소 하나가 폭발하면 그 주변을 초토화하는데핵폭발은 광역적으로 반응이 일어난다북한의 외교가 단순히 통일문제만이 아니라 핵무기를 해제하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길가에서 북한의 핵문제를 두고 시위하고 분노해도 북한 독재자의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고쓸데없는 일이다.

 

그럴 것이라면 외교적으로 국가가 해결하여 비핵화를 도모하여 동북아시아 평화를 보장해야 하나막상 현실은 이상하게 돌아간다북한의 경제압박이 북한정권을 위기에 내몰 것이라 보나오히려 테러를 일으키거나 국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국가에 무기를 팔아먹고 있으니 더 역효과를 내고 있다외교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우리가 손해 보는 점은 분명 많다그런데 북한에서 계속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하고전쟁준비만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연평도 폭격사건에서 사람이 죽고마을주민이 불안에 치를 떨었다방아쇠만 걸면 수 초 안에 무기가 발사되어 우리 땅을 타격하는데그 곳에 사는 주민들은 매일 불안해 떨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화와 소통만이 해결인데지금의 모습은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여 국민들에게 불안을 유도하고그들을 적대하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면 그 갈등은 계속 지속된다전쟁의 고통과 분노 그로 인해 겪은 피해는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그것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겪은 자들 역시 피해자다하지만 그것에 얽매일 경우 우리는 그 시대의 고통을 뛰어넘지 못한다남북관계는 단순히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제다외교의 관점은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다자국의 이익과 관련하여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 문제게다가 중국과 대만의 영토문제는 우리나라에 불화의 씨를 주고 있다.

 

한국은 자국에서 자원이 생산되지 않고, 2차적 가공으로 원료를 상품으로 만들어야 교역이 가능하다문화적으로 우수성이 있지만그 문화개발과 보존이 취약하더라도 국제관광교류가 활발하다한국이 북한과의 외교문제로 갈등을 빚으면 우리에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경제적인 문제가 발생된다식량과 원자재를 수익에 의존하는 점과 특히 식량안보가 약한 한국에서 평화문제는 한국인들의 생존전략으로 이어진다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고일어난다고 해도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된다과거의 무기는 총칼로 이루어진 백병전이지만지금은 미사일과 핵으로 이루어진 첨단전이다무기의 위력이 강력해지면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인들의 학살이 대규모로 일어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북외교는 필수적이다그러나 현실에서 그 문제를 두고 정말 100% 있는 것만 보여준 게 아니라 왜곡 및 오류로서 전달된다면 심각한 상황이다. 2013년에 발간된 <노무현 김정일의 246>은 바로 그런 문제를 지적하여 나온 도서다주지 않았는데도 NLL를 준 것을 허위로 폭로하고 군사기밀을 들춘 인간들을 보고그것을 아직도 믿는 사람들을 볼 때 한국의 미래는 과연 청신호인가분명 말하지만최근에 일어난 폭격이나 해전에서는 비교적 근대적인 방법으로 전투가 발생되었다만약 최신현대무기로 전투가 일어나면 그 피해 범위를 예상조차 할 수 없다전쟁에서 이겨도 과연 승리한 게 될 것인가북한의 도발은 아무리 군사적으로 경계해도 계속 일어난다.

 

대안의 대화와 소통이나그 소통에서 어느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게 바르나현실은 손보단 서로 칼날 뒷면을 보여주고 있다앞면으로 바뀌는 순간피를 피로 씻는 아비규환만 볼 것이다. NLL와 관련된 진실공방에서 거짓으로 만든 게 사실이 되는 순간사실인 진실은 밝히기 어렵다거짓은 처음부터 거짓이므로 자신의 의견이 사살로 만들기 위해 그럴듯하게 꾸며댄다오해를 푸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그 이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게다가 논리성에서 계산적인 요소를 빼고 감정적으로 대한다면 현실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을 채 악화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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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좋군요. 이제는 ( 우리에게는 이적 단체이긴하지만) 한계를 인식하고 국가 대 국가`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뭐가 진척이 되든 하지.....

만화애니비평 2015-07-27 14:30   좋아요 0 | URL
같은 방법을 거의 60년 동안 써먹는데 답이 없다면, 방법을 바꾸어야죠.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동포들이라 하여 빈곤과 억압에 당한다고 하지만, 역으로 본다면

한국에서 예비군과 현역이 거의 전체인구의 1/4 정도 된다고 친다면
북한은 현역을 남녀구분 없이 예비군 나이도 우리보다 기니
전반적으로 군사국가죠. 주체와 대상이 분리로 보는 것이니 뭐
결론적으로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AgalmA 2015-07-2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권 유지하려고 도발을 부탁까지 하는 실상이니 더 한숨이 나죠... 국정원은 국내 정치간섭에 혈안이 돼있지 않나....
NLL 문서를 왜 흔드는지 보지 않고 그 내용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태도들도 많이 고쳐야 할 테고요.

만화애니비평 2015-07-27 20:00   좋아요 0 | URL
총풍을 보면 참 답이 없죠..

qualia 2015-07-2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한민족은 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한 한탄조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21세기 세계 역사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현재의 한국/한민족/한반도는 식민지 전락의 전철을 그대로 되밟아가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한국/한민족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나라/민족이 있을까요? 하나의 민족이 두 나라로 갈라져 서로 상대방을 제1의 주적으로 명시하고 극한대결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한 쪽은 전라부족과 경상부족으로 분열돼, 정권쟁탈전 때마다 부족전쟁에 준하는 지역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나라/민족이 망하지 않으면 지구의 역사가 진행을 멈출 것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9 08:51   좋아요 0 | URL
어느 당은 일본자본 유입에 결국 우리가 그쪽에 먹힐 때 다시 과거의 영광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건지.
분노와 증오를 유도하여 다른 문제점을 가리는 실태에서 그저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할 것 같은 한국인의 모습에 한숨이 나옵니다.
중국과 일본은 억지로 역사를 부풀리고 신화를 역사화하는데, 단군역사마저 허구라고 하는 주류사학이라니...답이 없네요
 

도시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들을 때 내가 생각난 것은 국내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 5집 앨범 <City Life Story>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나온 앨범으로 대표적인 곡은 <바람을 타고>란 곡이었다. 뮤직비디오가 막 떠오르던 시기, 많은 대중가수들은 자신의 곡을 인기곡을 포장하기 위해 뮤직비디오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 어느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저요? 낮에 일하죠. 가스배달해요. 저는 음식점에서 일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부럽지 않게요. 바람처럼 달리는 거죠.”

 

도시라는 공간은 과연 어떤 공간인가? 블랙홀 5집 그 '바람을 타고'를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된다. 길가에 보면 되도 않은 양아치들이 경적소리 내고, 억지로 머플러를 개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물론 나라도 달린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대신 차로서 달린다. 대신 내 차는 일반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오토매틱 기어가 아니라 수동 기어로 달린다. 달려도 내 손과 발이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차를 조작한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 어찌 보면 내가 감각적으로 공기의 저항을 맞으며 차가운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는 행위다. 단지 그 행위가 '바람을 타고'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는 유저다. 단지 그들은 멋진 차를 몰거나 좋은 옷을 입는 게 아니다. 음식점에서 배달가거나 가스통을 맺고 달리는 바이크족, 그들은 현실에서 보자면 소외된 계층이고, 그들 나름대로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달린다는 그 솔직한 말은 나는 살아있다 라고 말한다.

 

비단 '바람을 타고'만이 아니다. '앵벌이 합장' 같은 경우, 지하철에서 거주하는 거지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새벽의 DJ'는 어두운 밤과 새벽에 고독에 지친 인간이 기대는 것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DJ의 목소리다. 아마 소통이 없는 냉혹한 도시 공간에서 인간은 고독과 고립이란 감정에 좌절한다. 마지막 곡은 노래가 아니라 기타 반주곡 ‘비가 오는 도시 위에는 달의 강이 흐른다’로 마무리 된다. 블랙홀은 시나위와 부활하고 더불어 한국 전통메탈의 선구자다. 그들이 연주하는 앨범에서 항상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과 아픔을 기타와 목소리로 토해내었다. 나이가 먹어도 긴 생머리를 흔드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란 그들에게 여전히 아픔의 공간이다.

 

비아트 강의 3번째를 정리하면서 공간이란 시각적 정보를 블랙홀의 음악이란 청각적 정보를 대비한 이유는 인간의 감정은 시각보다 청각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노래한 4집 수록곡 ‘마지막 일기’는 지금도 들어도 애절하다. 한국이란 사회 그리고 그 한국에서 도시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비극은 치유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져간다. 인간의 기록인 역사 안에서 공간은 계속 그 곳에 존재하는 고정식이나, 사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는 존재다. 영원성과 이동성이 같이 공유하는 공간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블랙홀의 음악을 내가 화두로 던진 이유는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라는 공간은 언제나 세련되고 활기차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소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강의 3번째에서 제시한 주제, “예술과 장소 그리고 공간적 실천”과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완성은 자연의 파괴고, 노동의 착취의 결과다. 노동을 하고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그것의 주인으로서 행세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노동력만 제공한 것에서 끝나버린 사회적 소외자이다. 블랙홀 5집 ‘바람을 타고’에서 음식점에서 일하는 그들은 우리 도시에서 흔히 말하는 중국집의 철가방일 수 있고, 피자배달도 될 수 있다. 가스배달은 우리 가정에서 사용하는 프로판가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가 각종 변화가 일어난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뭐든지 말이다.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사회의 혼돈을 보겠지만, 그 혼돈조차 유지되려면 늘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하다. 겨울이라면 난방시설을 이용해야 하고, 계절을 넘어 하루에 식사를 꾸준히 해야 한다. 나라의 기능이 마비되거나 없어지거나 또는 사라져서 새로 탄생해도 사람들의 입속에 빵은 항상 들어가야 한다. 바로 그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여 살아가고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노동으로 돌아가는 공간, 그게 바로 도시다.

 

도시가 아닌 농촌과 어촌도 노동은 필요하나, 그 노동의 성과물은 그 나라 정치체제가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닌 경우 그 노동을 실행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노동자와 노동의 산물이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는 점이다. 농경산업과 그리고 농경산업 이전의 수렵채취산업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이 곧 실행자에게 부여된다. 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도시의 노동은 자기가 하는 만큼 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임금의 형태로 돌아온다. 강의주제에서 노동과 임금체계를 말하려던 것은 아니나, 결국 도시라는 공간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노동이 가진 의미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그 사회의 종속적 존재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구조적인 요소다.

 

강의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었다. 농경산업에서 농부들은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찾아낸다. 비가 오면 집에서 쉬고, 날이 밝으면 논에 나가 어두워지면 집에 와서 잠을 잔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자연이란 공간에서 시작된다. 자연의 변화가 곧 인간의 삶으로 연결되었기에 인간은 자연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자연적 인간이란 숲 속의 동물처럼 미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그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도시의 발전과 농촌의 파괴 그리고 시간의 개념,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조건이었다. 도시의 이야기에서 강의자가 나누어준 자료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와 앙리 르페브르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문화비평가로서 길을 걸으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학문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보는 관점은 인간의 노동이 집중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가둘 수 있는 주거가 필요했고,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인간은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 역시 공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대상이 아니라 물적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변모된 점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시간이란 개념이다.

 

도시는 시간이란 개념으로 움직이고, 그것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은 자연적 흐름에 의해 계산되는 게 아니라, 시계의 초침과 분침으로 구분되게 된 점이다. 도시는 시간이 곧 재산이고 법칙이다. 시간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측정하게 되는 척도가 된다. 도시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노동은 시간으로 측정된다. 시간의 흐름에서 일정시간에서 생산된 것은 곧 자신의 임금으로 가겠지만, 그 임금 이상으로 고용주에게 큰 이익이 돌아간다.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란 도시에서 곧 자본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에 대한 재생산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의상과 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 취미생활과 문화생활이 생긴다. 인간의 시간은 그 누구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지겠지만, 인간은 영원불멸로 24시간을 사용할 수 없다. 일정 수명이 되면 사망하고, 사망한 자를 대신하여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도시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유지는 인간의 재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생산되는 것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것은 계속 도시의 팽창으로 이어지고, 그 팽창은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다.

 

강의하는 분과 강의 자료를 보면 도시에 대한 언급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루소가 생각났다. 루소의 <에밀>을 읽으면 농촌생활이 인간의 심신에 좋고, 도시는 온갖 죄와 병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공간인 점을 묘사한다. 인간이 태어난 이상 공동체 이상으로 사회라는 큰 조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인 점을 감안하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여 도시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가치관을 제시했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사상을 공부하면 루소는 도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루소가 가장 잘 지적한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우니 그럴지도 모르나, 가장 인간에게 필요한 게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가장 저렴했다라고 말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소모성이 강하며, 밀과 치즈처럼 일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소모되어야 하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은 비참한 수레바퀴에 영원히 맴도는 비극에 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가 바라보던 도시는 매우 비참했다.

 

“산업이나 기술이 보급되고 번영됨에 따라 남의 멸시를 받으며 사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세를 짊어지게 되고, 더구나 노동과 기아사이에서 일생을 보내게끔 되어 있는 농민은 논밭을 버리고, 본디 그가 그곳에 가지고 가야 할 빵을 구하러 도회지로 간다. 도회지가 백성의 우둔한 눈을 경탄케 하면 할수록 논밭은 버림을 받고, 토지는 황폐해지며 한길에는 불행한 시민들이 우글대는 모습을 보고 한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은 거지나 도둑으로 변하여 언젠가는 수레로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산업 활동에 의한 산물이다. 그게 바로 가난한 자들의 고통으로 이룩한 신기루 같은 현실이다. 참고로 루소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탄생 200주년(1912년)에 루소가 칸트와의 관계성을 놓고 봤지만, 250주년(1962년)에는 루소를 마르크스와 놓고 연구했다. 루소와 마르크스의 관계를 놓고 보면 관계성이 의아할 줄 모르겠지만,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는 루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로베스피에르의 아버지라고 한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와 흐름을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설명에서 마르크스의 시점은 헤겔 좌파라고 하나, 막상 마르크스는 리카도학파 좌파와 더불어 자코뱅파 좌파로부터 이어진 것이고, 자코뱅파에서 대부분 인물들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지만, 그 안에서 최고인 자는 루소다. 루소의 사상을 토대로 엥겔스 편을 보면,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엥겔스는 영국 신흥 공업도시인 맨체스터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정리할 때 이미 루소의 사상을 상당히 인용한 점이다. 도시라는 공간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장소는 물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면서 한편으로 이념이란 시스템이 우리의 무의식마저 지배한다.

 

게다가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관념에 의해 존재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공간이란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착오라는 단어와 더불어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공간착오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짜증나는 것은 거리에 나부기는 깃발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깃발이 넘실거리는데, 이미 그 당시 새마을운동은 도시화를 위해 기존 낙후된 마을을 산업화의 영향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이다. 대도시를 비롯한 많은 국토가 이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져 있고, 마천루의 도시는 바벨탑처럼 솟아올라 인간의 욕망은 이미 신을 초월했을지 모른다.

 

그런 도시에서 새마을운동 깃발이 매우 넓은 대로 양쪽 깃발꽂이에 몇 ㎞나 계속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착오라는 개념이 바로 저런 것을 알 수 있다. 대도시화된 현실에서 더 이상 1970년대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아직도 살아가기 바라는 점이다. 지금은 산업화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여 건강한 자연생태조건이 도시와 어울리는 것이 도시계획의 목표다. 그런 현대적인 도시계획과 다르게 전혀 다른 가치와 구시대적 산물이 여전히 도시를 아우르는 점이다. 문제는 그런 가치들은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단 계몽주의가 아닌 계몽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점이다.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도시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법칙이 아니라 도시가 그래던 것처럼 그 사회의 관습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는 당연히 이래야 해라는 가치관마저 도시의 이념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는 많은 인간들이 상주하고 있고, 도시는 사회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눈에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은 약속에 얽매인다. 공간은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무의식에도 작용한다. 가령 부산이란 도시는 1950년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내려와 만들어진 도시다. 그 이전인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수탈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는 경부선, 부산항과 영도대교 역시 일본이 경제수탈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공간적 재현이 바로 그들의 이익에 연결되었다. 그러나 경부선을 한국에서 가장 이용이 많은 철도구간이고, 부산항은 많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며, 영도대교는 많은 관광객들이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온다. 친일적인 사고에서 일본이 만들어낸 근대화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이룬 성과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자수탈로 이어졌고, 이익을 본 자는 극히 일부였고, 그들은 일제의 억압에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올라가면 서울이란 대도시는 조선개국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여 한강과 넓은 평지를 도시적 기능을 살려 왕조로 이어갔다. 서울에 남아있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현대적인 요소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기능과 지명에 의해 남아진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식이라도 그 형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연속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그 기능은 강연에서 말하듯 공간적 재현일 수 있고, 혹은 재현적 공간일 수 있다.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 공간이 존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도 있다. 부산이란 도시는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도시로 발전하고, 유명한 국제시장 역시 피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모여든 곳이 그런 명소로 된 것이다.

 

루소가 바라본 파리라는 도시는 처음에 화려한 궁전과 귀족들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지만, 그가 본 것은 가난한 거지들이 모여 빈민촌이 생겼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인 창녀촌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원하지 않은 현재의 삶을 살았고, 그것이 공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재현적 공간은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이 활동하여 그들은 자연이란 공간을 보존했다. 도시의 팽창은 공유지를 없애고 사유지로 전환되며, 가난한 자들은 계속 멀리 도시 안에서 외부로 내쫓고, 외부의 공간마저 도시가 점유하기 시작한다.

 

16세기 양모 산업이 영국에서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농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 빈민촌을 형성하고, 빈민들은 거지가 되어 구걸하다 국가에 의해 처벌을 받고, 심지어는 사형을 당했다. 도시에서 바로 자본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 조금 가진 자,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말이다. 블랙홀 5집의 ‘바람을 타고’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란 물질적인 자본이 아니라 단지 차가운 밤하늘을 가르는 바람이었다. ‘바람을 타고’는 유일하게 그들이 도시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다.

 

삶에 대한 애착에서 유일한 해방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공간에서 공기의 저항이란 자연적 조건이다. 도시는 인간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에서 보여준 사진이 인상이 깊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작가는 자신의 아내가 국경 없는 의사회 일원이었고, 아내의 해외봉사를 가면서 그도 따라간다. 그곳에 본 가난한 도시빈민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컬러사진 아닌 빛과 조명을 왜곡시킨 흑백사진에서 비참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환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미지의 인간처럼 보였다. 그 중에 인상 깊은 사진 2매가 있다. 광산에서 채굴하는 노동자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것, 고층건물을 짓기 위해 안전장치 없이 골조비계를 타고 올라가는 나이 어린 노동자의 모습이다.

 

그들의 삶에는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들의 입장을 너무 비참하더라도 불쌍하게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삶의 기억과 경험은 많은 것을 잡아 댕긴다. 건축은 도시의 승리를 상징하는 물질이다. 건축의 존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어진 사실은 은폐한다. 회사 다닐 때 옆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의 아버지가 어느 대단지 고급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그 동료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지키고 있을 때 나 역시 조문하러 갔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치고, 복귀하여 그 사고를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런 현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식으로 대답했다. 도시의 승리는 과연 위대했다. 인간의 목숨을 잃어도 그런 비극은 어디서나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현실이 틀려도 인간들은 문제의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나와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도시의 인간은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각자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소개된 사진 중에 마치 기숙사처럼 보이는 건물에 많은 노동자들이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원래 시골에 올라온 사람들이고, 시골에 가면 저녁에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한 방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눈다.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지만, 아무도 자신의 옆에 있지 않았다. 단절에 의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립되어 고독한 도시를 느끼는 것이다. 아파트 주거환경에서 아파트는 과거 부의 상징이었으나, 아파트는 인간을 분리된 존재로 만들고, 숫자로 매겨버린다. 아파트는 그 사람의 생활수준과 봉급 그리고 계급까지 구분한다. 이런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이 되어 그 자체가 당연성이 되었다. 참고적으로 앙리 르페브르는 프랑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그룹과 상당히 친밀했다. 그 중에 라울 바네겜이란 <일상생활의 혁명>의 저자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동기가 바로 앙리 르페브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골목, 거기서는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커피와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터전이었다. 도시계획의 목적은 도시정비와 발전이나, 또 한편으로 가난한 자들을 멀리 내쫓는 것이다. 현대의 인클로저 현상이 도시계획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정비를 하게 되면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여 좋겠지만, 막상 그 보상금으로 다른 곳에 집을 얻으려도 부족하고,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간 집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도시의 확장은 계속 빈민을 몰아내는 것이다. 빈민들이 모인 골목에는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고 그들의 자리를 없애는 대신 백화점이 들어선다. 골목상권을 지키자 그리고 합리적 소비생활을 하자고 슬로건을 외치는 현실이나, 막상 그런 게 불가능한 것은 도시의 형태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간의 배치에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교통의 흐름을 이용하여 직장과 학교,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그 공간을 누가 배치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활환경은 크게 변한다. 예술의 역할은 바로 그 공간성을 어떻게 보고 설정할 것인가이다. 예술은 시각적 정보로서 많이 드러낸다. 음악은 재생장치가 없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각적인 정보는 그 자리를 메우는 공간이 된다. 인간 개인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란 어렵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이룰 수 없더라도 그 가치조차 가질 수 없다면 그 세상은 매우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다. 지루한 세상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 권태만 존재한다. 물론 그 권태로움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인간들은 영원한 방관자 spectator가 되어 수동적인 인생을 살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로서 충실하나 그 충실함이 여실할수록 권태의 지배만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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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5-07-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전 제가 청각보다는 시각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공감각적인 거였네요. 내용이 제겐 좀 어려워 범접하기 힘들지만 생각을 해볼 단초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__)

만화애니비평 2015-07-20 10: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음에 이햐가 쉽도록 작성해야겠네요

sslmo 2015-07-20 10:14   좋아요 0 | URL
아뇨~,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잘 써주신 좋은 글인데, 다만 제가 그동안 이쪽으로 생각이 고착되어 있어 어렵게 느껴졌나 봅니다. 몸과 마음뿐 아니라 생각도 유연하게 해야겠다 다짐을 해봅니다, 불끈~!

AgalmA 2015-07-20 0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문 중 말씀하신 사진 작가는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추정됩니다. 말씀하신 사진은 <workers>에 수록되어 있을 거고요. 살가도가 난민과 빈민들 사진 찍다가 문명에 대해 낙담하고 실의에 빠져서 사진 찍기를 포기했었죠. 그리고 다시 재기하여 환경 운동과 함께 그런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뜻을 전달하고 있죠.

만화애니비평 2015-07-20 08:51   좋아요 1 | URL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맞네요. 검색하니 그 작가입니다. 환경운동가를 하는 것조차도 강의에서 들었습니다.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참 부끄러워지는군요.

마립간 2015-07-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만화애니비평 님의 댓글을 인용했습니다. 맥락상 왜곡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5 10:00   좋아요 0 | URL
특별히 문제없어요. 저 생각은 저나 신해철씨나 많은 분들이 여기는 부분이니깐요
 


 

위 사진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희생자를 초모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작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만화작가가 하나의 일러스트를 그린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런 점에서 위의 그림이 만화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면 예술로서 보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 것인가? 2014년 7월 23일에서 29일까지 안산시 단원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비아트에서 2번째 강연을 개최했다. 1번째와 다르게 2번째는 유입물 대신 영사기를 하얀 벽면에 비추어 전시된 작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주제는 만남이란 것이다. 만남 그것은 어떻게 보는 것이 맞을까?

 

우선 예술에 대해 내가 공부하기론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는 예술을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삶 자체가 예술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예술로서의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삶에 들어있는 인간의 미적 가치를 끓어 올려 주어 그것이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에게 전달하여 그들에게 미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서 그런 예술적인 요소로 본다면 무엇이 부족한가? 예술에 대한 정의는 다분하지만, 전에 강의에서도 그러하듯이 우선 예술은 대중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 글을 적는 필자의 경우 서브컬처에 의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서브컬처 향유자 겸 아마추어 비평가로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해 바라본다. 인간의 시각에서 자신이 속하여 있는 사회나 조직에서 그 안에 갇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그 주변이나 변두리에 존재하는 인간이야말로 대다수의 인간이 속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을 관찰하는 이와 비판하는 이는 항상 소수의 입장이거나 격리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대다수가 속한 세계의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떤 점에서 바를지도 혹은 무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듯이 예술은 또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이런 역설적 관계가 놓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을 같이 즐기기란 이런 난해한 역설적 관계에서 줄 달리기를 하는 점이다. 그런데 우선 저번 강의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왜 대중에게 예술이 전달이 어려운가라는 점이다.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이른바 서브컬처로서 대중문화 아래에 존재하는 문화를 향유하나, 그 문화는 대중들의 입장에서 천박하고 유치하고 이상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무시당하거나 천대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고급문화와 더불어 서브컬처로 들여다보면 입장이 다르다.

 

서브컬처 안에는 인간이 겉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 근원에 대한 요소를 보여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고 했다. 예술에서 말해주는 것이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점에서 전후맥락 관계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전후맥락을 생략한 채 예술가들이 입장만 강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난감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에게 특히 현대예술이란 영역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공감이나 교감이다.

 

대중은 무지할 수 있다. 이른바 중의주의적인 요소와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일반 대중하고 분리되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부족한 것은 대중에 대한 현실적 상황판단이다. 20세기에 도래하면서 영상매체 발달은 정보의 과잉으로 인해 대중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정보를 찾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받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형이 되었다. 비아트 1번째 강연에서 전성욱 교수가 나누어진 유입물을 자세히 봐야 할 이유는 바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대중들이 왜 예술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가? 강연에서 <인터스텔라>를 본 관객들이 그 영화에서 나온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점, 그리고 그 작품이 아니더라도 흥행한 작품이나 또는 여러 가지 매체에 등장한 예술이나 오브제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면 영화에서 기념이 되는 장소에 체험하는 것은 좋지만, 그 자체로 자신을 거기에 가두는 현실이 된 셈이다. 가령 영화 <변호인>에서 작중의 김영애씨가 순애연기를 할 때 아들인 진우를 찾다가 지쳐 골목에 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송변호사가 골목계단에 앉아 있는데, 그 배경이 부산 영도구 영선동 일대의 주택지역이다. 그곳에 가면 <변호인> 촬영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국제시장> 흥행 후 실제 부산 중구 부평동 일대가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물론 작품을 흥행에 따라 부산지역 관광객 유치에 좋을지 모르나, 실제로 거기가 촬영지라도 하여도 영화와의 관계성이 적다. 인증으로 온 관광객들이 넘치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째보면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의 경우 영화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적 공간에서 중요하다. 프랑스대혁명이 바스티유감옥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바스티유광장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키요틴의 칼날 아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역사적 공간에서 그 역사적 감동과 현실적 공간에서 많은 생각을 전달해준다. 물론 단순히 프랑스에서 비싼 요리만 먹고 향수만 구매하려는 분들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공간에 가서 경험하는 것이란 새로운 전율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단순히 미디어에 흥행한 이유로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보단 자신들의 주변에 나온 이야기를 찾는 열렬한 수동적인 인간만 양성한다. 따라서 예술이란 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점에서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술이 대중에게 어렵다는 점과 강연하신 분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텍스트를 인용하듯이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학력과 지식수준에 따라 소요시간이 다른 점이다.

 

예술이 너무 어려운 점에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금방 나오나, 억지로 거짓말로 자신이 본 시간보다 더 늘린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지성을 갖춘 자들은 그 시간을 굳이 거짓말 할 이유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예전에 계층과 계급, 지식수준이 이제 문화자본의 구분까지 나눈 것이다. 가령 우리가 아는 플라톤, 호메로스, 칸트 등과 같은 위대한 저자들의 책을 아는 자들이 많지도 않고, 그들의 서적을 읽은 자들은 더 작으며, 그들의 사상을 논하는 자들은 더욱 적다. 예술에서 문학과 철학의 연계성이 결국 하나의 모티브로 전동되나, 대중에게 철학자와 문학자들의 이야기란 낯설고 거부스러운 존재다.

 

하지만 대중들은 결코 자신들을 무지하려 보이지 않는다. 억지스럽게 미술관에 가서 돈만 쓰고 나오는 형태는 미술예술가들의 권력을 드높게 하는 문제도 있다. 현대미술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기존 모더니즘에서 아방가르드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해체에 따라 없어졌다.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로 이루어진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한계성은 이야기가 없다. 관객들 중에 어느 정도 예술적 지식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하고자 하나 대중은 그렇지 못하다. 이야기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2번째 강연 주제가 만남이라면 만남은 소통의 시작이다. 소통이 시작되기 전에 만남에서 낯선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강의 후 토론시간에 나 같은 경우 그런 현실적 괴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아니라면 서브컬처에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덧붙이자면 그 당시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소재는 이때까지 서구사회에 의해 억눌린 동양과 제3세계다. 그들의 문화는 생동감이 있고, 야생적이며, 독특한 미학이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원주민들의 장식구를 수집하면서 그것은 원주민의 생활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 혹은 주술적 요소를 반영된 기구다. 하지만 인류학자에게 그것은 새로운 문화의 결정체고, 예술적인 작품이라 보던 것이다.

 

한국에서 그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어느 작가가 유명한지 나 같은 일반인도 아닌 서브컬처 향유자는 알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현대미술이 일반인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나는 뒤풀이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국내에서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대구지역에 피카소 전시회가 열려 많은 이들이 보러 간다. 피카소는 프랑스 미술가로 프랑스의 자랑이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다. 한국에서도 중고교 미술교육시간에 피카소란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마르크스주의자고 프랑스 공산당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정치적 입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랑코 독재정치에 반대하고, 게다가 1937년 스페인 내전에서 활동한 레지스탕스들의 비참한 죽음과 프랑코의 학살에 분노하여 만든 ‘게로니카’는 분명 중요한 가치가 숨어있다. 피카소의 작품은 그림에서 이해하기 힘든 큐비즘이라 해도 그 안에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무 힘 없는 약자들이 학살당하는 점이다. 1953년 한국전쟁에서 민간인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 우리는 그림이 이상하게 보이나, 그 내용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다. 피카소의 예술은 사상적으로 어렵지 않다. 오히려 간단명료하고 리얼리즘을 배제한 인상적인 요소를 남긴다.

 

지금의 예술인들이 만드는 작품이 왜 피카소와 같이 공감이 없을까 라는 점에서 그들은 아마 대중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강연 중 사진들을 보면 이해하기 힘든(실제 보지 못했고, 그 작가를 모르며, 옆에 다른 분들은 이미 그 작가를 알고 있는 분이 많았기에) 점이 많으나, 어느 공동체 마을에서 계단손잡이에 쟁반을 옆에 붙여 거기에 막걸리나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계단이 의자로 활용한 작품이 있었다. 예술이 곧 삶이란 공간에 녹아있는 것이다. 목연포차를 보면 마트 생활오브제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동원한 재미난 도구들이 대중의 삶으로 흘러가는 게 현대예술가들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은 안다. 내가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 현대미술보단 차라리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가 예술적 기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쉽고 용이하다 했다. 가령 국내 최고 만화작가인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 <아기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장면을 해학적으로 또는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0℃>의 경우 2014년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최규석 작가 전시에도 올라온 작품으로 1987년 6월 항쟁을 그려낸 작품이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저런 공감대가 필요한 이야기다. 만화가 지닌 강점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만화는 누구나 만들고 그리고 즐길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남긴 말로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라고 한다. 물론 모든 작가가 만화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작품들도 나름 그 특성이 있어야지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로 이어지는 모티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예술을 논하려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적인 영역에서 예술은 지식인들에게 통하는 것이지만, 그러지 않은 이상 감정코드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가 세월호 추모전시회로 보자.

 

내가 세월호 전시회에서 인상적으로 본 작품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을 재각색한 작품이다. 누구에 따라 광주 사태,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하겠지만, 나라면 광주민간인학살사건이라고 부르고 싶다. 군인은 헌법에 의해 대한민국을 지키고, 그 이유는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나, 오히려 국민들을 총칼로 살해한 것은 군인의 본분을 어긴 것이다. 군인은 오로지 계급에 의해 상부의 지시에 따르므로, 세월호 사건에서 해결되지 않은 진실규명은 결국 권력자들의 압력이 가해진 점이다. 만화가와 웹툰작가, 그밖에 작가가 모여 만든 전시회가 예술로서 그리고 대중에게 접근이 가능한 것은 그런 공감능력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도래하면서 예술은 대중을 지배해야할 대상 혹은 계몽대상이 아니라 같이 느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대중의 이성적 논리를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적 가치를 선행되지 않으면 논리로서 가치가 없다고 한다. 단지 기계적 논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줄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얼마나 편할 조건만 찾는 것인지에 관심을 둘 뿐이다. 내 옆에 어느 작가분이 자신의 전시회를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다니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 그 길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생각난 것이 기 드보르의 <나체의 파리>라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도시는 구역정비와 도로의 일괄적 분류로 가난한 자들로부터 도시에서 추방하고, 감시가 용이하고 통제가 유리한 구역으로 만들었다. 골목길이 많고 어지러운 건물 배치는 가난한 이들이 뭉치고, 예술인과 문학가들이 모인다. 알베르 카뮈나 장 폴 사르트르가 파리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거리에 거주한 이유 도로가 정비된 곳은 부동산이 비싸 살기가 어렵고, 복잡한 가난한 마을은 다양한 무리들을 와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기 드보르의 <나체의 파리>는 그런 도시계획이 정비된 길이 아닌 골목이나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 서로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바로 삶의 주인공인 일반 대중으로 보는 것이고, 도시화에 따른 공간은 결국 가난한 약자들에게 가혹한 곳으로 변한다. 자본주의 문제점은 돈의 차이로 인권과 자유까지 차이난다. 헌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것처럼 말하나, 그것은 말의 요식이 지나지 않는다. 최근 영화 <연평해전>에서 정치적 문제가 드러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연평해전>에서 사망한 수많은 병사들은 의무복무로 해군에 지원한 것이고,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그 대상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일반 대중 혹은 서민들의 죽음이다. 또한 같은 시기에 개봉한 <소수의견>에서 철거민 아들과 의경복무자 역시 알고 보면 우리 주변의 소시민이다.

 

소시민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기 보다는 편을 가르고 싸워야 하는 시기에 예술적 기능은 바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윤리적인 입장에서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최근 한 의원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을 이야기하고,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대한민국 헌번 제1조 제2항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그 자신이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개인의 주체자로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개인은 수동적 자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는 열렬한 스펙테이터(spectator)가 되었다. 예술이 대중과 따로 논다는 것에서 예술조차 스펙테이터의 열렬한 행위로 수동적으로 변해간다.

 

기 드보르가 보여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행동에서 대표적인 게 영화다. 그 중에서 <사드를 위한 절규>는 1시간 정도의 필름에서 단 4차례의 대화만 잠시 등장하고 검정 화면만 나왔다. 관객들은 분노하고 환불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즉 SI(시튀)들은 모두 만족하면서 성공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극장에서 관객들은 아방가르드라는 작품을 보길 기대했으나, 실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관객의 예술을 무참하게 박살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강연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예술가들은 대중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강연자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보다 토론자의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 그것을 보고 내가 판단하여 정리한 내용이지만, 조금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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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신화편 세트 - 전3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과 함께>는 만화작가 주호민의 작품이다작품을 보면 현대인의 관점에서 과거에서 지금까지 내려온 신화를 그려놓은 것이다물론 스토리텔링은 현대적이나그 신화에서 배경과 인물들은 과거의 산물이다한국의 신화를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한국인의 감정에서 한()이란 비극적 정신이 숨어 있다그 비극이 우리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그것은 처음 <신과 함께신화편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인간의 문명은 문명 이전이던 야생의 자연보다 못하며오로지 배신과 시기질투로 가득하다.

 

<대별왕과 소별왕>의 이야기처럼 옥황상제의 두 아들은 서로 인격과 재능을 토대로 승부를 겨루나 마지막에 소별왕의 계략으로 대별왕은 패배한다그래서 옥황상제는 하늘동생 소별왕은 이승그리고 형인 대별왕은 저승의 왕으로 추대된다왕이라고 하나 그들은 엄연히 신이다올바른 판결이 아닌 부정한 방법으로 왕 자리가 바뀌었으니 세상은 이미 부정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기본적으로 <신과 함께>를 읽어보면 무속신화가 베이스다민간신앙의 토대로 우리 일상생활에 깊게 내려온 우리의 재산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경시하고 천대하였다조선사대부 시대에도 그렇게 했지만그런다고 조선왕조가 모든 것을 빼앗지 않았다서구사회가 도래하고 나서 합리화란 이름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자신들만의 이념으로 우리의 사상을 짓밟았다현대사회에서 서구화라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우리가 한국인이란 점을 피할 수 없다한국 땅에서 태어나든지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다른 나라에 있든지 어느 소속에 있든지 그 하나로만으로 한국인이란 혼을 버릴 수가 없다.

 

물론 한국인이 최고의 가치고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다단지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가는 것을 알아가기 위해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 <신과 함께>라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우선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속신화가 토대다하지만 무속신화 이전에 있던 창세신화가 뿌리라고 볼 수 있다창세신화 중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륵과 석가는 한국의 대표적 신화다미륵이 본래 탁월하고 인격적으로 고매하나석가는 이에 반해 질투와 시기그리고 속임수로 가득한 인물이다.

 

두 신이 세상을 놓고 대결할 때 석가의 속임수로 미륵은 패배하고미륵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인물 두 사람마저 돌과 소나무로 만들고석가의 무리는 수 천 명을 데리고 온다인간세상을 석가가 지배하면서 미륵은 석가와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그리고 음식도 생식이 아니라 화식으로 되면서곧 불의 이용은 문명세계를 말하고인간의 문명은 죄로 가득한 수라 길로 변한 것이다. ‘대별왕과 소별왕’ 이야기 역시 미륵과 석가’ 신화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그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란 어느 존재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점이다.

 

대부분 이야기에서 신으로 되는 인간들은 분명 이승에서 바르게 살았지만이승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인물들이다그들이 신이 된 이유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에 이끌리거나 세속의 흐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원칙을 지켰다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권력과 이속의 논리가 반영된 제도와 도덕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였다대별왕이 염라대왕을 임명하고염라대왕은 다시 저승사자인 차사를 임명한다차사로 임명된 사람 역시 누군가를 괴롭히고 해코질하려 하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사려 했지만 세상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신들이 되는 인간들은 바로 우리와 같이 억압받거나 또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부류다이승은 공명하지 못하나저승은 공명정대하다아마 민중의 의식에서 억압에 의한 해방의식이 무속신화에서 뿌리깊이 내려박혔다따라서 무속신화는 우리가 잘 아는 건국신화와 조금 다르며건국신화에서 보이는 형태가 다르다원래 건국신화로 유명한 단군신화에서 인간의 문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의 신화에서 단군신화가 가장 오래된 기록문헌으로 남은 신화다그 신화에서 단군이 주장한 세계란 인간이 귀한 것이란 인본주의적인 가치다생각해보면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사상가이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조에 조선후기의 모습은 단군의 시대보다 못하다고 했다세월이 지나 학문적 수준이 높아지고 기술적 발명도 탁월해지는 시점에서 오히려 백성의 삶을 피폐하고 굶주림에 가득했다무속신화는 건국신화처럼 기록이 아니라 입으로 내려오는 구비전승이기에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모된다.

 

<신과 함께>에서 대별왕과 소별왕의 형태를 보자면 신선이 존재하는 선교(仙敎)적 관점이 강하고하얀 삵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의복관제를 보면 조선시대에 가깝다그리고 사라도령과 할락궁이가 등장하는 이공본풀이에서 꽃 감관을 되는 사랑도령이 서천에 간다는 설정은 서유기에서 말하는 서축 즉 인도를 가리키고그것은 불교문화를 말한다민간신앙은 한국 마지막 왕조인 조선에서 유교의 성리학에 선교와 불교 그리고 무속신앙이 결합하여 특이한 형태의 무속신화가 탄생했다.

 

대부분 무속신화가 이승이 배경보단 저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저승에 가지만그 인간 모두가 신으로 되는 점신이라도 좋은 신도 있지만평생 죄를 뉘우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악신도 등장한다그러면서 사라도령은 아들 할락궁이에게 꽃 감관직을 물려주고 자신의 아내와 이승에서 부부의 연을 이어가는 점은 신이 다시 인간이 된다는 속성도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오고지상에서 단군은 산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서구사회에서 대표적인 신화는 고대그리스에서 내려온 그리스신화다올림포스 신인 제우스를 필두로 많은 신인간수많은 이형적 존재가 등장한다인간이 죽으면 그들 모두 하데스의 신전으로 인도받고그들의 죽음이란 death가 아니라 thanatos(타나토스)라고 한다타나토스는 정신분석에서 삶의 욕망인 eros의 반대말인 죽음의 욕망이다인간은 삶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이다그러나 하데스의 신전에 간 인간은 돌아올 수 없지만한국에서 죽음은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매장문화에서 지금은 국토의 협소와 간단한 장례절차로 매장보단 화장을 선호한다.

 

한국의 선조들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그들의 집터는 거의 대부분 산자락에 있는 양지바른 곳에 묻는다산으로 가는 인간은 하늘로 되돌아가고하늘에서 온 환웅처럼 하늘과 땅의 신과 인간은 서로 왕복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무속신화는 그런 점에서 다소 인간세상에 대한 절망이 숨어있다이승은 고통만 존재하여 저승의 세계가 오히려 공명정대한 사실에서 현실의 민중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그런 점에서 한국 대표적 문화재인 미륵석상들은 미래의 세계에 좋은 세상이길 바라는 민중의 욕망이 담겨있다.

 

신화란 바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풍자와 해학이 숨어 있다우리 선조들의 가치는 현실의 고통을 그렇게 이야기 식으로 전해오다 이제는 그 명맥이 끊기는 비운에 놓여있다다행히 그 이야기의 출처를 기록하여 구전문학이나 전래동화로 다시 세상에 내놓으나 신화는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계속 새롭게 변화하고 만들어진다신화는 지금과 앞선 시대가 다른 형태로 등장하지 내부적인 가치는 변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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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1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속과 근대를 잘 섞은 다음 웹툰 <귀신>도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11 15:40   좋아요 0 | URL
무속신화보다는 무속에서 말하는 민담에 가깝다고 봅니다. 논문의 주제와 조금 다르지만, 분명 추천할 만한 작품은 분명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