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희생자를 초모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작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만화작가가 하나의 일러스트를 그린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런 점에서 위의 그림이 만화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면 예술로서 보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 것인가? 2014년 7월 23일에서 29일까지 안산시 단원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비아트에서 2번째 강연을 개최했다. 1번째와 다르게 2번째는 유입물 대신 영사기를 하얀 벽면에 비추어 전시된 작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주제는 만남이란 것이다. 만남 그것은 어떻게 보는 것이 맞을까?

 

우선 예술에 대해 내가 공부하기론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는 예술을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삶 자체가 예술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예술로서의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삶에 들어있는 인간의 미적 가치를 끓어 올려 주어 그것이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에게 전달하여 그들에게 미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서 그런 예술적인 요소로 본다면 무엇이 부족한가? 예술에 대한 정의는 다분하지만, 전에 강의에서도 그러하듯이 우선 예술은 대중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 글을 적는 필자의 경우 서브컬처에 의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서브컬처 향유자 겸 아마추어 비평가로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해 바라본다. 인간의 시각에서 자신이 속하여 있는 사회나 조직에서 그 안에 갇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그 주변이나 변두리에 존재하는 인간이야말로 대다수의 인간이 속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을 관찰하는 이와 비판하는 이는 항상 소수의 입장이거나 격리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대다수가 속한 세계의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떤 점에서 바를지도 혹은 무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듯이 예술은 또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이런 역설적 관계가 놓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을 같이 즐기기란 이런 난해한 역설적 관계에서 줄 달리기를 하는 점이다. 그런데 우선 저번 강의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왜 대중에게 예술이 전달이 어려운가라는 점이다.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이른바 서브컬처로서 대중문화 아래에 존재하는 문화를 향유하나, 그 문화는 대중들의 입장에서 천박하고 유치하고 이상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무시당하거나 천대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고급문화와 더불어 서브컬처로 들여다보면 입장이 다르다.

 

서브컬처 안에는 인간이 겉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 근원에 대한 요소를 보여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고 했다. 예술에서 말해주는 것이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점에서 전후맥락 관계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전후맥락을 생략한 채 예술가들이 입장만 강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난감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에게 특히 현대예술이란 영역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공감이나 교감이다.

 

대중은 무지할 수 있다. 이른바 중의주의적인 요소와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일반 대중하고 분리되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부족한 것은 대중에 대한 현실적 상황판단이다. 20세기에 도래하면서 영상매체 발달은 정보의 과잉으로 인해 대중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정보를 찾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받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형이 되었다. 비아트 1번째 강연에서 전성욱 교수가 나누어진 유입물을 자세히 봐야 할 이유는 바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대중들이 왜 예술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가? 강연에서 <인터스텔라>를 본 관객들이 그 영화에서 나온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점, 그리고 그 작품이 아니더라도 흥행한 작품이나 또는 여러 가지 매체에 등장한 예술이나 오브제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면 영화에서 기념이 되는 장소에 체험하는 것은 좋지만, 그 자체로 자신을 거기에 가두는 현실이 된 셈이다. 가령 영화 <변호인>에서 작중의 김영애씨가 순애연기를 할 때 아들인 진우를 찾다가 지쳐 골목에 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송변호사가 골목계단에 앉아 있는데, 그 배경이 부산 영도구 영선동 일대의 주택지역이다. 그곳에 가면 <변호인> 촬영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국제시장> 흥행 후 실제 부산 중구 부평동 일대가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물론 작품을 흥행에 따라 부산지역 관광객 유치에 좋을지 모르나, 실제로 거기가 촬영지라도 하여도 영화와의 관계성이 적다. 인증으로 온 관광객들이 넘치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째보면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의 경우 영화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적 공간에서 중요하다. 프랑스대혁명이 바스티유감옥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바스티유광장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키요틴의 칼날 아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역사적 공간에서 그 역사적 감동과 현실적 공간에서 많은 생각을 전달해준다. 물론 단순히 프랑스에서 비싼 요리만 먹고 향수만 구매하려는 분들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공간에 가서 경험하는 것이란 새로운 전율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단순히 미디어에 흥행한 이유로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보단 자신들의 주변에 나온 이야기를 찾는 열렬한 수동적인 인간만 양성한다. 따라서 예술이란 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점에서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술이 대중에게 어렵다는 점과 강연하신 분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텍스트를 인용하듯이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학력과 지식수준에 따라 소요시간이 다른 점이다.

 

예술이 너무 어려운 점에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금방 나오나, 억지로 거짓말로 자신이 본 시간보다 더 늘린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지성을 갖춘 자들은 그 시간을 굳이 거짓말 할 이유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예전에 계층과 계급, 지식수준이 이제 문화자본의 구분까지 나눈 것이다. 가령 우리가 아는 플라톤, 호메로스, 칸트 등과 같은 위대한 저자들의 책을 아는 자들이 많지도 않고, 그들의 서적을 읽은 자들은 더 작으며, 그들의 사상을 논하는 자들은 더욱 적다. 예술에서 문학과 철학의 연계성이 결국 하나의 모티브로 전동되나, 대중에게 철학자와 문학자들의 이야기란 낯설고 거부스러운 존재다.

 

하지만 대중들은 결코 자신들을 무지하려 보이지 않는다. 억지스럽게 미술관에 가서 돈만 쓰고 나오는 형태는 미술예술가들의 권력을 드높게 하는 문제도 있다. 현대미술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기존 모더니즘에서 아방가르드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해체에 따라 없어졌다.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로 이루어진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한계성은 이야기가 없다. 관객들 중에 어느 정도 예술적 지식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하고자 하나 대중은 그렇지 못하다. 이야기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2번째 강연 주제가 만남이라면 만남은 소통의 시작이다. 소통이 시작되기 전에 만남에서 낯선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강의 후 토론시간에 나 같은 경우 그런 현실적 괴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아니라면 서브컬처에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덧붙이자면 그 당시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소재는 이때까지 서구사회에 의해 억눌린 동양과 제3세계다. 그들의 문화는 생동감이 있고, 야생적이며, 독특한 미학이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원주민들의 장식구를 수집하면서 그것은 원주민의 생활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 혹은 주술적 요소를 반영된 기구다. 하지만 인류학자에게 그것은 새로운 문화의 결정체고, 예술적인 작품이라 보던 것이다.

 

한국에서 그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어느 작가가 유명한지 나 같은 일반인도 아닌 서브컬처 향유자는 알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현대미술이 일반인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나는 뒤풀이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국내에서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대구지역에 피카소 전시회가 열려 많은 이들이 보러 간다. 피카소는 프랑스 미술가로 프랑스의 자랑이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다. 한국에서도 중고교 미술교육시간에 피카소란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마르크스주의자고 프랑스 공산당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정치적 입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랑코 독재정치에 반대하고, 게다가 1937년 스페인 내전에서 활동한 레지스탕스들의 비참한 죽음과 프랑코의 학살에 분노하여 만든 ‘게로니카’는 분명 중요한 가치가 숨어있다. 피카소의 작품은 그림에서 이해하기 힘든 큐비즘이라 해도 그 안에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무 힘 없는 약자들이 학살당하는 점이다. 1953년 한국전쟁에서 민간인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 우리는 그림이 이상하게 보이나, 그 내용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다. 피카소의 예술은 사상적으로 어렵지 않다. 오히려 간단명료하고 리얼리즘을 배제한 인상적인 요소를 남긴다.

 

지금의 예술인들이 만드는 작품이 왜 피카소와 같이 공감이 없을까 라는 점에서 그들은 아마 대중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강연 중 사진들을 보면 이해하기 힘든(실제 보지 못했고, 그 작가를 모르며, 옆에 다른 분들은 이미 그 작가를 알고 있는 분이 많았기에) 점이 많으나, 어느 공동체 마을에서 계단손잡이에 쟁반을 옆에 붙여 거기에 막걸리나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계단이 의자로 활용한 작품이 있었다. 예술이 곧 삶이란 공간에 녹아있는 것이다. 목연포차를 보면 마트 생활오브제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동원한 재미난 도구들이 대중의 삶으로 흘러가는 게 현대예술가들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은 안다. 내가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 현대미술보단 차라리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가 예술적 기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쉽고 용이하다 했다. 가령 국내 최고 만화작가인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 <아기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장면을 해학적으로 또는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0℃>의 경우 2014년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최규석 작가 전시에도 올라온 작품으로 1987년 6월 항쟁을 그려낸 작품이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저런 공감대가 필요한 이야기다. 만화가 지닌 강점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만화는 누구나 만들고 그리고 즐길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남긴 말로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라고 한다. 물론 모든 작가가 만화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작품들도 나름 그 특성이 있어야지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로 이어지는 모티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예술을 논하려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적인 영역에서 예술은 지식인들에게 통하는 것이지만, 그러지 않은 이상 감정코드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가 세월호 추모전시회로 보자.

 

내가 세월호 전시회에서 인상적으로 본 작품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을 재각색한 작품이다. 누구에 따라 광주 사태,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하겠지만, 나라면 광주민간인학살사건이라고 부르고 싶다. 군인은 헌법에 의해 대한민국을 지키고, 그 이유는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나, 오히려 국민들을 총칼로 살해한 것은 군인의 본분을 어긴 것이다. 군인은 오로지 계급에 의해 상부의 지시에 따르므로, 세월호 사건에서 해결되지 않은 진실규명은 결국 권력자들의 압력이 가해진 점이다. 만화가와 웹툰작가, 그밖에 작가가 모여 만든 전시회가 예술로서 그리고 대중에게 접근이 가능한 것은 그런 공감능력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도래하면서 예술은 대중을 지배해야할 대상 혹은 계몽대상이 아니라 같이 느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대중의 이성적 논리를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적 가치를 선행되지 않으면 논리로서 가치가 없다고 한다. 단지 기계적 논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줄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얼마나 편할 조건만 찾는 것인지에 관심을 둘 뿐이다. 내 옆에 어느 작가분이 자신의 전시회를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다니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 그 길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생각난 것이 기 드보르의 <나체의 파리>라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도시는 구역정비와 도로의 일괄적 분류로 가난한 자들로부터 도시에서 추방하고, 감시가 용이하고 통제가 유리한 구역으로 만들었다. 골목길이 많고 어지러운 건물 배치는 가난한 이들이 뭉치고, 예술인과 문학가들이 모인다. 알베르 카뮈나 장 폴 사르트르가 파리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거리에 거주한 이유 도로가 정비된 곳은 부동산이 비싸 살기가 어렵고, 복잡한 가난한 마을은 다양한 무리들을 와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기 드보르의 <나체의 파리>는 그런 도시계획이 정비된 길이 아닌 골목이나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 서로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바로 삶의 주인공인 일반 대중으로 보는 것이고, 도시화에 따른 공간은 결국 가난한 약자들에게 가혹한 곳으로 변한다. 자본주의 문제점은 돈의 차이로 인권과 자유까지 차이난다. 헌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것처럼 말하나, 그것은 말의 요식이 지나지 않는다. 최근 영화 <연평해전>에서 정치적 문제가 드러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연평해전>에서 사망한 수많은 병사들은 의무복무로 해군에 지원한 것이고,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그 대상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일반 대중 혹은 서민들의 죽음이다. 또한 같은 시기에 개봉한 <소수의견>에서 철거민 아들과 의경복무자 역시 알고 보면 우리 주변의 소시민이다.

 

소시민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기 보다는 편을 가르고 싸워야 하는 시기에 예술적 기능은 바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윤리적인 입장에서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최근 한 의원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을 이야기하고,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대한민국 헌번 제1조 제2항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그 자신이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개인의 주체자로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개인은 수동적 자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는 열렬한 스펙테이터(spectator)가 되었다. 예술이 대중과 따로 논다는 것에서 예술조차 스펙테이터의 열렬한 행위로 수동적으로 변해간다.

 

기 드보르가 보여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행동에서 대표적인 게 영화다. 그 중에서 <사드를 위한 절규>는 1시간 정도의 필름에서 단 4차례의 대화만 잠시 등장하고 검정 화면만 나왔다. 관객들은 분노하고 환불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즉 SI(시튀)들은 모두 만족하면서 성공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극장에서 관객들은 아방가르드라는 작품을 보길 기대했으나, 실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관객의 예술을 무참하게 박살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강연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예술가들은 대중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강연자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보다 토론자의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 그것을 보고 내가 판단하여 정리한 내용이지만, 조금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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