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들을 때 내가 생각난 것은 국내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 5집 앨범 <City Life Story>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나온 앨범으로 대표적인 곡은 <바람을 타고>란 곡이었다. 뮤직비디오가 막 떠오르던 시기, 많은 대중가수들은 자신의 곡을 인기곡을 포장하기 위해 뮤직비디오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 어느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저요? 낮에 일하죠. 가스배달해요. 저는 음식점에서 일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부럽지 않게요. 바람처럼 달리는 거죠.”

 

도시라는 공간은 과연 어떤 공간인가? 블랙홀 5집 그 '바람을 타고'를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된다. 길가에 보면 되도 않은 양아치들이 경적소리 내고, 억지로 머플러를 개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물론 나라도 달린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대신 차로서 달린다. 대신 내 차는 일반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오토매틱 기어가 아니라 수동 기어로 달린다. 달려도 내 손과 발이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차를 조작한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 어찌 보면 내가 감각적으로 공기의 저항을 맞으며 차가운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는 행위다. 단지 그 행위가 '바람을 타고'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는 유저다. 단지 그들은 멋진 차를 몰거나 좋은 옷을 입는 게 아니다. 음식점에서 배달가거나 가스통을 맺고 달리는 바이크족, 그들은 현실에서 보자면 소외된 계층이고, 그들 나름대로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달린다는 그 솔직한 말은 나는 살아있다 라고 말한다.

 

비단 '바람을 타고'만이 아니다. '앵벌이 합장' 같은 경우, 지하철에서 거주하는 거지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새벽의 DJ'는 어두운 밤과 새벽에 고독에 지친 인간이 기대는 것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DJ의 목소리다. 아마 소통이 없는 냉혹한 도시 공간에서 인간은 고독과 고립이란 감정에 좌절한다. 마지막 곡은 노래가 아니라 기타 반주곡 ‘비가 오는 도시 위에는 달의 강이 흐른다’로 마무리 된다. 블랙홀은 시나위와 부활하고 더불어 한국 전통메탈의 선구자다. 그들이 연주하는 앨범에서 항상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과 아픔을 기타와 목소리로 토해내었다. 나이가 먹어도 긴 생머리를 흔드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란 그들에게 여전히 아픔의 공간이다.

 

비아트 강의 3번째를 정리하면서 공간이란 시각적 정보를 블랙홀의 음악이란 청각적 정보를 대비한 이유는 인간의 감정은 시각보다 청각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노래한 4집 수록곡 ‘마지막 일기’는 지금도 들어도 애절하다. 한국이란 사회 그리고 그 한국에서 도시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비극은 치유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져간다. 인간의 기록인 역사 안에서 공간은 계속 그 곳에 존재하는 고정식이나, 사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는 존재다. 영원성과 이동성이 같이 공유하는 공간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블랙홀의 음악을 내가 화두로 던진 이유는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라는 공간은 언제나 세련되고 활기차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소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강의 3번째에서 제시한 주제, “예술과 장소 그리고 공간적 실천”과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완성은 자연의 파괴고, 노동의 착취의 결과다. 노동을 하고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그것의 주인으로서 행세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노동력만 제공한 것에서 끝나버린 사회적 소외자이다. 블랙홀 5집 ‘바람을 타고’에서 음식점에서 일하는 그들은 우리 도시에서 흔히 말하는 중국집의 철가방일 수 있고, 피자배달도 될 수 있다. 가스배달은 우리 가정에서 사용하는 프로판가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가 각종 변화가 일어난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뭐든지 말이다.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사회의 혼돈을 보겠지만, 그 혼돈조차 유지되려면 늘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하다. 겨울이라면 난방시설을 이용해야 하고, 계절을 넘어 하루에 식사를 꾸준히 해야 한다. 나라의 기능이 마비되거나 없어지거나 또는 사라져서 새로 탄생해도 사람들의 입속에 빵은 항상 들어가야 한다. 바로 그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여 살아가고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노동으로 돌아가는 공간, 그게 바로 도시다.

 

도시가 아닌 농촌과 어촌도 노동은 필요하나, 그 노동의 성과물은 그 나라 정치체제가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닌 경우 그 노동을 실행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노동자와 노동의 산물이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는 점이다. 농경산업과 그리고 농경산업 이전의 수렵채취산업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이 곧 실행자에게 부여된다. 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도시의 노동은 자기가 하는 만큼 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임금의 형태로 돌아온다. 강의주제에서 노동과 임금체계를 말하려던 것은 아니나, 결국 도시라는 공간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노동이 가진 의미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그 사회의 종속적 존재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구조적인 요소다.

 

강의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었다. 농경산업에서 농부들은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찾아낸다. 비가 오면 집에서 쉬고, 날이 밝으면 논에 나가 어두워지면 집에 와서 잠을 잔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자연이란 공간에서 시작된다. 자연의 변화가 곧 인간의 삶으로 연결되었기에 인간은 자연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자연적 인간이란 숲 속의 동물처럼 미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그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도시의 발전과 농촌의 파괴 그리고 시간의 개념,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조건이었다. 도시의 이야기에서 강의자가 나누어준 자료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와 앙리 르페브르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문화비평가로서 길을 걸으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학문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보는 관점은 인간의 노동이 집중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가둘 수 있는 주거가 필요했고,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인간은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 역시 공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대상이 아니라 물적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변모된 점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시간이란 개념이다.

 

도시는 시간이란 개념으로 움직이고, 그것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은 자연적 흐름에 의해 계산되는 게 아니라, 시계의 초침과 분침으로 구분되게 된 점이다. 도시는 시간이 곧 재산이고 법칙이다. 시간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측정하게 되는 척도가 된다. 도시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노동은 시간으로 측정된다. 시간의 흐름에서 일정시간에서 생산된 것은 곧 자신의 임금으로 가겠지만, 그 임금 이상으로 고용주에게 큰 이익이 돌아간다.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란 도시에서 곧 자본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에 대한 재생산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의상과 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 취미생활과 문화생활이 생긴다. 인간의 시간은 그 누구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지겠지만, 인간은 영원불멸로 24시간을 사용할 수 없다. 일정 수명이 되면 사망하고, 사망한 자를 대신하여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도시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유지는 인간의 재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생산되는 것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것은 계속 도시의 팽창으로 이어지고, 그 팽창은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다.

 

강의하는 분과 강의 자료를 보면 도시에 대한 언급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루소가 생각났다. 루소의 <에밀>을 읽으면 농촌생활이 인간의 심신에 좋고, 도시는 온갖 죄와 병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공간인 점을 묘사한다. 인간이 태어난 이상 공동체 이상으로 사회라는 큰 조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인 점을 감안하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여 도시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가치관을 제시했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사상을 공부하면 루소는 도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루소가 가장 잘 지적한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우니 그럴지도 모르나, 가장 인간에게 필요한 게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가장 저렴했다라고 말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소모성이 강하며, 밀과 치즈처럼 일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소모되어야 하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은 비참한 수레바퀴에 영원히 맴도는 비극에 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가 바라보던 도시는 매우 비참했다.

 

“산업이나 기술이 보급되고 번영됨에 따라 남의 멸시를 받으며 사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세를 짊어지게 되고, 더구나 노동과 기아사이에서 일생을 보내게끔 되어 있는 농민은 논밭을 버리고, 본디 그가 그곳에 가지고 가야 할 빵을 구하러 도회지로 간다. 도회지가 백성의 우둔한 눈을 경탄케 하면 할수록 논밭은 버림을 받고, 토지는 황폐해지며 한길에는 불행한 시민들이 우글대는 모습을 보고 한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은 거지나 도둑으로 변하여 언젠가는 수레로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산업 활동에 의한 산물이다. 그게 바로 가난한 자들의 고통으로 이룩한 신기루 같은 현실이다. 참고로 루소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탄생 200주년(1912년)에 루소가 칸트와의 관계성을 놓고 봤지만, 250주년(1962년)에는 루소를 마르크스와 놓고 연구했다. 루소와 마르크스의 관계를 놓고 보면 관계성이 의아할 줄 모르겠지만,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는 루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로베스피에르의 아버지라고 한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와 흐름을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설명에서 마르크스의 시점은 헤겔 좌파라고 하나, 막상 마르크스는 리카도학파 좌파와 더불어 자코뱅파 좌파로부터 이어진 것이고, 자코뱅파에서 대부분 인물들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지만, 그 안에서 최고인 자는 루소다. 루소의 사상을 토대로 엥겔스 편을 보면,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엥겔스는 영국 신흥 공업도시인 맨체스터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정리할 때 이미 루소의 사상을 상당히 인용한 점이다. 도시라는 공간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장소는 물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면서 한편으로 이념이란 시스템이 우리의 무의식마저 지배한다.

 

게다가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관념에 의해 존재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공간이란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착오라는 단어와 더불어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공간착오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짜증나는 것은 거리에 나부기는 깃발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깃발이 넘실거리는데, 이미 그 당시 새마을운동은 도시화를 위해 기존 낙후된 마을을 산업화의 영향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이다. 대도시를 비롯한 많은 국토가 이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져 있고, 마천루의 도시는 바벨탑처럼 솟아올라 인간의 욕망은 이미 신을 초월했을지 모른다.

 

그런 도시에서 새마을운동 깃발이 매우 넓은 대로 양쪽 깃발꽂이에 몇 ㎞나 계속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착오라는 개념이 바로 저런 것을 알 수 있다. 대도시화된 현실에서 더 이상 1970년대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아직도 살아가기 바라는 점이다. 지금은 산업화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여 건강한 자연생태조건이 도시와 어울리는 것이 도시계획의 목표다. 그런 현대적인 도시계획과 다르게 전혀 다른 가치와 구시대적 산물이 여전히 도시를 아우르는 점이다. 문제는 그런 가치들은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단 계몽주의가 아닌 계몽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점이다.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도시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법칙이 아니라 도시가 그래던 것처럼 그 사회의 관습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는 당연히 이래야 해라는 가치관마저 도시의 이념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는 많은 인간들이 상주하고 있고, 도시는 사회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눈에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은 약속에 얽매인다. 공간은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무의식에도 작용한다. 가령 부산이란 도시는 1950년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내려와 만들어진 도시다. 그 이전인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수탈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는 경부선, 부산항과 영도대교 역시 일본이 경제수탈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공간적 재현이 바로 그들의 이익에 연결되었다. 그러나 경부선을 한국에서 가장 이용이 많은 철도구간이고, 부산항은 많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며, 영도대교는 많은 관광객들이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온다. 친일적인 사고에서 일본이 만들어낸 근대화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이룬 성과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자수탈로 이어졌고, 이익을 본 자는 극히 일부였고, 그들은 일제의 억압에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올라가면 서울이란 대도시는 조선개국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여 한강과 넓은 평지를 도시적 기능을 살려 왕조로 이어갔다. 서울에 남아있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현대적인 요소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기능과 지명에 의해 남아진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식이라도 그 형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연속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그 기능은 강연에서 말하듯 공간적 재현일 수 있고, 혹은 재현적 공간일 수 있다.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 공간이 존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도 있다. 부산이란 도시는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도시로 발전하고, 유명한 국제시장 역시 피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모여든 곳이 그런 명소로 된 것이다.

 

루소가 바라본 파리라는 도시는 처음에 화려한 궁전과 귀족들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지만, 그가 본 것은 가난한 거지들이 모여 빈민촌이 생겼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인 창녀촌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원하지 않은 현재의 삶을 살았고, 그것이 공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재현적 공간은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이 활동하여 그들은 자연이란 공간을 보존했다. 도시의 팽창은 공유지를 없애고 사유지로 전환되며, 가난한 자들은 계속 멀리 도시 안에서 외부로 내쫓고, 외부의 공간마저 도시가 점유하기 시작한다.

 

16세기 양모 산업이 영국에서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농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 빈민촌을 형성하고, 빈민들은 거지가 되어 구걸하다 국가에 의해 처벌을 받고, 심지어는 사형을 당했다. 도시에서 바로 자본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 조금 가진 자,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말이다. 블랙홀 5집의 ‘바람을 타고’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란 물질적인 자본이 아니라 단지 차가운 밤하늘을 가르는 바람이었다. ‘바람을 타고’는 유일하게 그들이 도시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다.

 

삶에 대한 애착에서 유일한 해방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공간에서 공기의 저항이란 자연적 조건이다. 도시는 인간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에서 보여준 사진이 인상이 깊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작가는 자신의 아내가 국경 없는 의사회 일원이었고, 아내의 해외봉사를 가면서 그도 따라간다. 그곳에 본 가난한 도시빈민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컬러사진 아닌 빛과 조명을 왜곡시킨 흑백사진에서 비참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환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미지의 인간처럼 보였다. 그 중에 인상 깊은 사진 2매가 있다. 광산에서 채굴하는 노동자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것, 고층건물을 짓기 위해 안전장치 없이 골조비계를 타고 올라가는 나이 어린 노동자의 모습이다.

 

그들의 삶에는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들의 입장을 너무 비참하더라도 불쌍하게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삶의 기억과 경험은 많은 것을 잡아 댕긴다. 건축은 도시의 승리를 상징하는 물질이다. 건축의 존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어진 사실은 은폐한다. 회사 다닐 때 옆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의 아버지가 어느 대단지 고급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그 동료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지키고 있을 때 나 역시 조문하러 갔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치고, 복귀하여 그 사고를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런 현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식으로 대답했다. 도시의 승리는 과연 위대했다. 인간의 목숨을 잃어도 그런 비극은 어디서나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현실이 틀려도 인간들은 문제의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나와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도시의 인간은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각자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소개된 사진 중에 마치 기숙사처럼 보이는 건물에 많은 노동자들이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원래 시골에 올라온 사람들이고, 시골에 가면 저녁에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한 방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눈다.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지만, 아무도 자신의 옆에 있지 않았다. 단절에 의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립되어 고독한 도시를 느끼는 것이다. 아파트 주거환경에서 아파트는 과거 부의 상징이었으나, 아파트는 인간을 분리된 존재로 만들고, 숫자로 매겨버린다. 아파트는 그 사람의 생활수준과 봉급 그리고 계급까지 구분한다. 이런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이 되어 그 자체가 당연성이 되었다. 참고적으로 앙리 르페브르는 프랑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그룹과 상당히 친밀했다. 그 중에 라울 바네겜이란 <일상생활의 혁명>의 저자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동기가 바로 앙리 르페브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골목, 거기서는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커피와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터전이었다. 도시계획의 목적은 도시정비와 발전이나, 또 한편으로 가난한 자들을 멀리 내쫓는 것이다. 현대의 인클로저 현상이 도시계획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정비를 하게 되면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여 좋겠지만, 막상 그 보상금으로 다른 곳에 집을 얻으려도 부족하고,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간 집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도시의 확장은 계속 빈민을 몰아내는 것이다. 빈민들이 모인 골목에는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고 그들의 자리를 없애는 대신 백화점이 들어선다. 골목상권을 지키자 그리고 합리적 소비생활을 하자고 슬로건을 외치는 현실이나, 막상 그런 게 불가능한 것은 도시의 형태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간의 배치에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교통의 흐름을 이용하여 직장과 학교,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그 공간을 누가 배치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활환경은 크게 변한다. 예술의 역할은 바로 그 공간성을 어떻게 보고 설정할 것인가이다. 예술은 시각적 정보로서 많이 드러낸다. 음악은 재생장치가 없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각적인 정보는 그 자리를 메우는 공간이 된다. 인간 개인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란 어렵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이룰 수 없더라도 그 가치조차 가질 수 없다면 그 세상은 매우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다. 지루한 세상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 권태만 존재한다. 물론 그 권태로움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인간들은 영원한 방관자 spectator가 되어 수동적인 인생을 살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로서 충실하나 그 충실함이 여실할수록 권태의 지배만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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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7-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전 제가 청각보다는 시각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공감각적인 거였네요. 내용이 제겐 좀 어려워 범접하기 힘들지만 생각을 해볼 단초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__)

만화애니비평 2015-07-20 10: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음에 이햐가 쉽도록 작성해야겠네요

양철나무꾼 2015-07-20 10:14   좋아요 0 | URL
아뇨~,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잘 써주신 좋은 글인데, 다만 제가 그동안 이쪽으로 생각이 고착되어 있어 어렵게 느껴졌나 봅니다. 몸과 마음뿐 아니라 생각도 유연하게 해야겠다 다짐을 해봅니다, 불끈~!

AgalmA 2015-07-20 0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문 중 말씀하신 사진 작가는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추정됩니다. 말씀하신 사진은 <workers>에 수록되어 있을 거고요. 살가도가 난민과 빈민들 사진 찍다가 문명에 대해 낙담하고 실의에 빠져서 사진 찍기를 포기했었죠. 그리고 다시 재기하여 환경 운동과 함께 그런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뜻을 전달하고 있죠.

만화애니비평 2015-07-20 08:51   좋아요 1 | URL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맞네요. 검색하니 그 작가입니다. 환경운동가를 하는 것조차도 강의에서 들었습니다.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참 부끄러워지는군요.

마립간 2015-07-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만화애니비평 님의 댓글을 인용했습니다. 맥락상 왜곡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5 10:00   좋아요 0 | URL
특별히 문제없어요. 저 생각은 저나 신해철씨나 많은 분들이 여기는 부분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