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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갈등과 불평등
최병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9월
평점 :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환경에 대한 철학적인 혹은 사상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책을 잡았을 때 일반적인 환경공학 전공자 중에서 학사 내지 석사 급들은 도저히 이해가지 않을 서적이고, 그나마 박사과정 이상 되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봤다. 환경공학 전공자들은 기본적으로 화학, 생물학, 토목공학 등 다양한 이학과 공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운영된다. 환경공학이란 것은 단순히 환경 그 자체적으로 학문이 완성된 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문제는 그 방향적인 요소에서 공학은 철학과 사상을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다. 환경공학과를 입문하면 환경공학 개론 정도로 살펴보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인류 개체수의 대폭발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만 볼 것이다. 예전에 환경관련 교육을 받을 때 강사로 나온 분이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의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이후 고전경제학자인 리카도와 제임스 밀 그리고 영국의 천재적인 자유주의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까지 이어본다면 우리가 그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학문과 서적을 남겼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를 마르크스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구론> 저자 멜서스를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예언도 맞았지만, 멜서스의 예언도 맞았다. 인구의 급격한 폭발적 증가는 환경공학에서 제일 먼저 고민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환경을 바라보는데 왜 사상과 학문인가? 그것은 공학적으로 처리하고, 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 경제학과 인류학이 필요하며, 더 나아가 법률과 윤리학까지 이어진다. 환경은 단순히 폐기된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제 환경은 후속처리가 아니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가치로 등급한 것이다.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도서가 나올 때 1990년 후반부였다. 지금은 2015년이고, 저자인 최병두 교수가 논문을 집약하여 정리했으니 시기적으로 약 30년 정도 차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내용이 전혀 낡은 것이나 시기가 지난 것이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런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환경정의”다. 환경에서 보는 관점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는 인간이 모여 사는 장소에 따라 그 위해도 달라지고, 들어서는 환경혐오시설도 달라지는 점이다.
최근 밀양에 765KV 송전탑 때문에 말이 많다. 언론과 미디어는 정보를 통제하고, 그 지역의 주민들을 무시했다. 그런데 왜 이런 송전탑을 세우는가? 이유는 간단하고 복잡하다. 이런 송전탑들은 한국지역의 남측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위쪽인 서울경기지역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서울경기지역에는 발전소 중에 핵발전소 같은 시설이 없다. 부산 기장과 울산 그리고 전남 영광 등 한국에서 남측에 위치한 곳에 핵발전소가 위치해있다. 지정학적으로 북한과의 무력충돌 시 적의 미사일이 발전소를 강타할 때 문제점을 보면 바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후속대책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핵의 에너지를 점차 줄여가는 게 세계추세이나 한국에서는 핵에너지 의존도가 증가한다. 계속되는 푸른 도시와 맑은 공기를 위해 핵발전소의 만능주의를 외치지만, 사실 핵폐기물 처리와 핵 사고는 치명적인 것을 넘어 국가존재조차 흔들게 만든다. 일본 후쿠시마발전소의 피해는 이미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그 주변에서 나온 음식을 먹은 사람은 암으로 걸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방사능의 폐해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방사능 오염도 문제거니와 해체적인 요소 그리고 원자력을 대신할 에너지도 필요하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적 집단과 경제적인 조직의 이익이 합치되면 국가사업이 움직이는 일이 많다.
핵 발전에 들어가는 원자재나 또는 발전시설을 세우기 위해 일부 독점자본기업가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노릴 수 있다. 이런 결과는 바로 밀양아리랑이 서글프게 울려 퍼지는 할머니들의 비명처럼, 소수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 공리주의적인 방식은 분명 사회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이나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 환경갈등에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공리주의, 복지주의가 구분되어 있다. 한국은 이미 신자유주의국가이고, 그러면서도 복지국가 선언을 하나, 복지보단 정지에 가까운 수준이다. 공리주의에서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관점을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는 전기 공급은 중요하다. 하지만 대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점을 문제다.
에너지를 오염시키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최근 대체 에너지가 급부상한다. 그러나 정보력 부족, 홍보부족, 기존 기득권의 이익이 작용되면서 난해한 부분이 되어간다. 과거 참여정부에서 자동차 연료를 석유에너지보단 하이브리드 기술을 발전을 추구할 때 기존 정유회사와 자동차업체 반대에 무산된 점이 있었다. 환경정책은 21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 자본의 권력에 무참히 밟히게 된 현실이 있었다. 환경정의를 필요성은 환경의 대상은 어디에 존재하느냐이다. 환경이란 공간은 먼저 생태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사회적 환경도 포함된다. 사회적인 환경, 법과 제도 경제적 권력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집은 환경적으로 열악하다. 근대화산업이 빛을 보던 때 한국은 경제성장에 환호했지만, 대다수의 서민과 노동자들은 좁은 집에 환풍기능이 열악한 곳에서 살았으며, 수도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하수도 이용에서 불편을 겪었다. 집값에서 좋은 숲과 하천이 있는 곳보단 공장지대와 황무지 쪽에 위치하면서 나쁜 공기와 물을 접하게 되어 환경위생학적으로 불량한 상태가 되었다.
환경정의를 말하려면 우선 최병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존 롤즈의 철학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른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자들은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교육이 되지 않으면 국가경쟁력이 저하되고, 문화적 혜택이 되지 않으면 인성의 한계성이 온다. 이런 자들이 정치적 사회적 참여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보일 수 없으며, 정치적 합의에 따른 국가운영에서 시민들의 자질이 부족하게 된다. 물론 이 관점은 롤즈가 칸트주의자에서 시작한 것이고, 칸트를 넘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환경적인 불평등을 보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은 비위생적인 주거공간과 음식으로 병이 들고, 가혹한 육체노동으로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환경과 더불어 인류 불평등적 기점에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도시기능이 인간을 소외하고 가난한 자들을 계속 외지로 내몰며, 주거환경정비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연결되는 점까지 말이다. 환경공학에서 이런 경제적인 정치적인 요소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사상철학으로 들어가면 환경은 결국 인간의 정의와 칸트가 요구하는 선(善, goods)의 가치를 말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좋은 환경을 원한다. 자신의 집 주변에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반대를 한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환경을 파괴되는 것은 무관심하다. 심지어 공장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감하기 폐수와 오수를 무단방류하고, 대기오염물질과 악취를 여과 없이 내보낸다. 그 결과 주변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호흡기질환 및 안과질환에 시달리고, 폐수로 인해 하류에 사는 주민들은 상류에서 공급되는 상수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다. 특히 과거 낙동강페놀사건과 같은 환경오염은 페놀의 화학적 반응으로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낙태될 정도였다.
결국 환경적 처리비용을 두고 기업적 이윤추구는 환경적 공공재원을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환경보건적인 문제까지 확대시켰다. 환경정의가 왜 정립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법과 제도적인 영역을 지나 인간생명과 환경적 기능의 마비로 인한 생활의 위협까지 넘어간 것이다. 이런 시기에 환경이란 단어는 미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경제발전 앞에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세태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이미 21세기가 아니라 <환경갈등과 불평등>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경제민주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에서 모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투입과 회수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기 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생기면 그 자본의 출처와 투자의 범위 그리고 고용발생과 사후관리방안을 골몰히 생각하기보단 단지 눈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한다. 대도시에 대규모상점이 입주하면 그 지역의 상권과 문화적 발전이 일어나나, 기존 골목상권과 더불어 교통체증, 인구증가에 따른 폐기물증가, 차량증가에 따른 대기오염 및 소음진동 피해가 일어난다. 환경이란 것은 처음 경제적 이익에 치중하면 후폭풍으로 다가오는 함정과 같은 존재다. 눈앞에 신기루처럼 이익의 효과범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것을 감당해야할 지역주민이다.
지역주민이 기업과 정부 혹은 환경단체에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그 지역의 환경 분쟁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다가 점차 지방자치단체에게 업무를 위임했으나, 업무적인 영역에서 위임했지 권한에 대한 결정권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다. 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기반이 되는 지역주민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주민들의 반대의사를 억지로 무마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노동의 투입이다. 노동력조차 이제는 인간보단 기계로 대체되고, 인간은 보조적으로 투입될 뿐이다. 하지만 노동력의 주요 동력이 인간이든 기계든 그 파괴되는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다. 자연에 대한 환경파괴는 여전히 공공재원으로서 가치를 저하시킨다. 공동의 재원을 일개 개인이나 업체가 점유하여 개발하는 것은 용이해도 그 이후에 일어난 환경문제에 방관하는 태도도 일부 보이기도 한다. 환경 분쟁에 대한 해결에서 지역의 빈부격차, 문화수준, 학력차이 등이 결국 많은 불평등적 요소를 야기한다. 그래서 롤즈의 철학에서 보듯이 최소수혜자의 대한 입장배려는 환경정의가 필요한 이유이고, 환경에 대한 추가적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 환경오염에 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리에 자동차의 매연이 보도블록 위의 행인에게 덮칠 때, 아파트 단지에서 떨어진 공단지역에서 악취가 나면 상당히 불쾌해한다. 심지어 수도관에서 녹슨 물이 나와도 생활에 많은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 환경피해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평소 환경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망각한다. 자신의 편리함만 완성되면 남의 입장을 보지 않기에 환경정의는 매우 윤리적인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만약 윤리적 조건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면 아직까지 산업재해나 환경오염 피해자가 나올 리가 없다. 공장 안의 악취, 매연도 환경오염 중에 하나다. 환경이란 조건은 우리 인생 그 자체에 존재하고, 지구 안에 어디라도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경적 정책에서 내가 놀란 점은 환경제국주의다.
기존에 자신들이 이미 다 사용하여 쓸모없는 환경발생 공정을 후진국에 넘겨 그 제조과정에서 나온 상품을 다시 받는 점이나, 환경오염을 정화하는 기술을 토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환경산업에 대한 지적이다. 이들은 교묘히 환경오염을 다른 나라에 떠넘겨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최근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제3국의 발전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그들은 19~20세기 산업화 때 오염물질을 이미 지구에 뿌려놓고 이제는 후진국의 발전을 환경오염원인자라 매도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국제적인 분쟁은 여전하고, 우리도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나, 연안에 불법으로 투기되는 폐기물도 문제다.
환경은 단순히 수질, 대기, 토양만이 아니라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식량도 포함된다. 청정지역의 확보는 식량조달의 기본이다. 동해 권에서 일본, 서해 권에서 중국 어민과 마찰을 맺으면서 식량안보에서 환경문제가 기반 되는 것이다. 오염된 곳에서는 생물체가 살 수 없고, 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이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실태에서 우리는 명분이란 것을 찾아야 하고, 명분을 위해서는 논리와 사유가 필요하다. 환경하는데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 환경은 인간에게 제외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온 점이다. 환경정의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상적인 망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삶을 지탱해야할 가치와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