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란 영화를 보면서 주변 관객의 반응을 느껴보았다. 아마 이 영화가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하는 작품 중에 Summer special란 이벤트 상영회인 점도 있고, 이 영화가 청소년관람불가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프랑스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국영화의 문제점으로 제작 시작부터 검열이 심한 반면, 프랑스는 그런 점이 자유롭다는 점이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점에 모호하게 위치한 영화작품들이 프랑스영화는 많다. 물론 이 영화에선 다소 정사씬과 노출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에밀리를 맡은 여배우 이실드 르 베스코의 경우 상부 가슴은 기본이고, 성기 부분까지 드러난다. 물론 흥분될 수 있기도 하지만, 야하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는다. 영상 시각으로 보이는 무의식적인 감각과 이성으로 텍스트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전후맥락을 잘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마친 후 많은 분들이 옆에서 별로라거나 혹은 내용이 기대 이하란 반응에서 <사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시기가 프랑스대혁명 이후란 점, 그리고 테르미도르반동 전후라는 점이다.

 

17897월 프랑스 바스티유 관장은 총격 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인류 최초 민중이 스스로 앞서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에서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은 부패와 무능으로 권력에서 밀려나고, 루이16세는 신민이었던 자들이 이제는 시민이 되어 그를 왕족이 아닌 일개 인간으로 만들었다. 루이16세가 프랑스혁명 이후 바로 죽지 않았고, 해외도피가 발각되면서 목이 잘리게 되었다. 루이16세의 죽음은 자코뱅당의 독재화로 이어지고, 자코뱅의 판결아래 단두대에서 매일 수백 내지 수천의 인간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었다.

 

영화 <사드>는 자코뱅당의 독주가 제일 심하던 1794년이고,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를 비롯한 자코뱅 극단세력은 처음에는 왕족과 귀족의 목을 베더니, 이제는 자코뱅당의 반대 세력인 지롱드파와 자코뱅당 내의 온건세력까지 목을 벤다. 그래서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동지이며 유명한 혁명가 당통을 단두대 앞으로 보냈고, 이 사건을 토대로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이란 연극을 만들고, 안제이 바이다 감독은 <당통>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사드가 수도원으로 옮겨질 당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가장 무서운 시기였다.

 

그 수도원은 언제 죽을지 모를 귀족들이 운 좋게 뇌물을 주어 피신해 온 곳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 무서운 공포정치와 피 냄새나는 거리에서 도망친 그들에게 수도원은 유일한 은신처이었다. 사드가 여기에 올 때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사드는 인류가 만든 문학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도발적이며, 정신분석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를 만들었다. 흔히 우리는 SM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여기서 사디즘이 나온 것은 사드의 이름에서 나왔다.

 

그의 유명한 문제저작 <소돔의 120일>

을 보면 상상을 초월한다. 프랑스 파리 대부호와 권력가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17(119)동안 산장에서 그들만의 향연을 펼친다. 이야기꾼 네 명을 부르고, 각자의 사연을 토대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를 되새긴다. 처음에는 성폭행 수준으로 끝나다가, 남색, 분뇨먹이기, 손가락 및 신체 절단까지 이어진다. 사드의 소설에서 이미 그는 프랑스혁명 전부터 감금상태였고, 그는 젊을 때부터 많은 여성들과 섹스스캔들을 일으켰다. 아내의 자매가 수녀로 있었는데도 서로 관계를 맺어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서 청장년을 보낸 시기는 루이14세였고, 루이14세는 짐은 곧 국가라는 왕권신수설을 펼쳤다.

 

왕이란 신에게서 받은 권력이며, 왕이 행하는 모든 게 신의 섭리로 이루어지기에 신을 부정한 사드는 곧 왕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사드는 신을 믿지 않았고, 무신론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자연관을 추구했다. 그의 자연관은 지금이 중요하다는 점이고, 내세는 없으며 언젠가 모든 건 소멸해도 세상을 존재한다는 점이다. 죽음의 두려움에 무서워하기보단 지금이라도 조금 더 즐기기 원하는 실존주의적 인생관을 보여준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이며 이데올로그인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사드의 철학은 많은 차이점은 보여주나, 근원은 같다. 바로 자연성이란 점이다. 루소는 자연적 인간상에서 이미 인간은 사회로 인해 부패하여 더 이상 미개인으로 갈 수 없으나 자신만의 판단력을 살려 미덕적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래서 루소의 사상은 이성보단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감성은 이성 이전에 그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에 반해 사드의 자연성이란 인간 존재 자체에서 동물적 감각을 추구한다. 성적행위는 인간 종족 유지만이 아니라 쾌락과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여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모두 수도원에 와서 우울하고 불안한 반명 사드는 뭔가 재미있고 흥미로우면 다른 이들까지 즐거움을 준다. 로베스피에르가 찾아와서 행사를 열려고 했을 때 많은 귀족들은 자신의 목이 달라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도 사드는 당당했다. 에밀리는 이런 사드에게 빠지게 되면서 영화는 포르노그래피 영상에서도 하나의 철학을 제시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에밀리가 처음 성행위를 하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드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 대한 흥미, 그가 저술한 책을 읽은 후 불쾌감과 동시에 호기심이다.

 

남성은 성적욕구가 들끓는 존재이나, 여성 역시 성적욕구가 없을 리가 없다. 지겨운 수도원 생활, 억압된 분위기, 공포정치의 극단성에서 그녀는 자신이 갇힌 세계에 절망하기보단 뭔가 새로운 문을 필요했다. 사드라는 문에서 사드는 정원사 청년과 에밀리에게 성행위를 하길 바란다. 청년은 건장하고 착실한 사람이고, 에밀리는 매우 똑똑하고 사리가 밝은 소녀였다. 하지만 에밀리의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로베스피에르가 오자말자 많은 인간이 단두대 아래 사라져갔고, 에밀리 부모조차 그럴 운명에 처했다.

 

에밀리가 살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임산부는 사형에 처해지지 않은 점이다. 사드는 그녀에게 새로운 쾌락과 세상을 알기 위한 방법이라면 그녀의 부모입장에서 생존의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프랑스대혁명 이전 프랑스는 계급사회였고, 정원사는 처음 보면 알 수 있듯이 노예라는 단어로 칭해졌고, 에밀리는 귀족의 영애이다. 에밀리가 아버지의 바람 피는 장면을 본 후 실망할 때 정원사가 준 꽃 한송이를 처음에 받다가 건물 내로 들어오자 바로 버린다. 처음 그녀는 계급신분제라는 틀에 메여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드에 의해 그 생각이 달라졌으며, 정원사와의 섹스행위는 단순히 성적욕구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행위를 하는 남녀 사이에 계급이란 칭호는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사드는 자유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성적인 관념에서 계급사회에서 하위계급과 지배계급은 서로 다른 식으로 성관계를 유지하고, 남성지배계급이 하녀나 평민을 첩으로 두기는 하나, 정부인으로 두지 않는다. 자유라는 단어에서 성적인 해방 역시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으며, 평등한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에밀리와 성행위를 고민하는 정원사에게 사드는 정원사에게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라고 한다. 왜 그럴까? 사드는 계급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 만약 귀족과 노예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노예는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의 시각은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려면 프랑스대혁명, 장 자크 루소, 소돔의 120일이란 연계성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에서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처럼 공포도 아니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아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보면 잘 재현해내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때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전 먼저 권총자살을 하려 한다. 하지만 권총자살은 실패하고 턱이 입에서 떨어져 나가 붕대로 감싼다. 마지막에 턱에 감긴 붕대를 풀자 그는 통증을 느끼고, 그의 목 위로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온다. 사드의 정부를 데리고 살던 남자 역시 자코뱅당 일원으로 단두대로 사라진다. 영화는 자코뱅당의 몰락 후 귀족들이 다시 자신의 집에 가면서 끝이 난다.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피지배계급의 경제적 빈곤으로 발발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경제적으로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돈을 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에 국가와 종교로부터 외면을 받고, 프랑스대혁명 때는 국가와 도덕이란 이름 앞에서 외면 받은 사드지만, 그가 생각한 자유와 평등은 오늘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로베스피에르는 루소는 매우 존경했고, 루소가 죽기 전 그를 방문했으며, 잠을 잘 때 <사회계약론>을 자신의 머리 옆에 둘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루소가 한 가르침에서 제일 첫 구절을 망각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쇠사슬에 묶여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심각한 쇠살에 묶여 있다라고 말이다.

 




사드에겐 그런 쇠사슬이 없었다. 물론 너무 성적인 욕망에 집착한 사드이기에 문제적 인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적 인간이 없다면 우리는 새로운 경험과 사고를 발견할 수 없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또 다른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여주인공인 이실드 르 베스코의 연기에 많은 인상을 받았다. <사드>2000년에 상영되었지만, 제작은 1999년에 이루어졌다. 1982년생인 그녀가 영화출연 시 나이는 이제 18세 소녀였다. 카메라 앞에 나체로 연기하고, 자신의 음부에 사드 역을 맡은 남주인공의 손을 접촉된다.

 

그래도 그 연기에 충실하게 소화한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보면 한국의 여자배우처럼 그렇게 미인이 아니란 점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파란 두 눈을 보는 순간 마치 나는 아주 맑은 호수가 거기에 있다고 느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두 눈빛에서 모든 것을 투영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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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영화를 어떻게든 구해 봐야 겠습니다. 사드 소설은 본 적이 없지만, 영화는 관심이 가네요..오래전 영화라서 구하기 힘들 듯하지만 그래도 구해 봐야 겠어요.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ㅎ

만화애니비평 2016-08-22 13:48   좋아요 0 | URL
오~ 야무님이 이토록 관심을..ㅎㅎㅎ
부산에서 운좋게 상영하더군요..ㅎㅎ

루쉰P 2016-08-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드와 루소의 공통점이 자연이라니....엄밀히 말하면 계급제 등 당시 숨막히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랄까? 그런 공통점이 있다니...깜놀
만화애니비평님의 식견에 놀랐어요 ㅋ 사실 사드는 밥맛이어서 ㅋㅋㅋ 지나친 성욕주의자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런 면이 있다는 건 새롭네요
아....저는 만화애니비평님 정도의 식견을 언제 가질 수 있을까염
글 진짜 잘 쓰신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8-23 09:21   좋아요 0 | URL
루소와 사드는 둘 다 인간 안의 자연성을 추구했는데
루소는 감정이란 인간애
사드는 무의식 속의 성욕이죠

감정과 무의식에서 인간의 구별이 없이 모두 대할 수 있죠,,,
원초적인 것인지 원천적인 것인지의 차이겠지만요
 
경제학 마스터 - 위기에 더욱 빛나는 경제학 고전 16권
존 메이나드 케인.헨리 조지즈 외 지음, 서경호.정명진 외 옮김 / 부글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책제목을 조금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책제목은 <경제학 마스터>, 사실 책을 읽으면 경제학자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인문사회 철학자까지 등장한다. 그들의 이름과 책들, 그리고 사상까지 소개한 것 까지는 좋겠지만, 책을 읽으면 책속의 내용은 엮은이가 직접 그 책을 토대로 판단하고 요약 정리한 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책들을 골라잡아 그 속에 있는 어느 주요 부분만 선택하여 그대로 실어 넣었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 마스터>란 책제목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상가들의 책 내용을 소개하고 알려준 것은 좋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정치경제학 연구 분야로 존 스튜어트 밀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제시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넘어가면서 등장한 경제학의 기린아인 하이에크와 케인즈가 주요 경제학 흐름 골자다.

 

여기에 리카도나 슘페터, 멜서스 같은 정치경제학자들까지 가세하면 나름 정리된 경제학 이론도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라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란 단순히 돈만 벌고 도는 것보단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원과 자원 그리고 노동력 등을 연구하여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란, 그들의 호주머니 속의 지갑에 많은 지폐가 들어가기만을 원한다.

 

경제학적으로 그 부분도 놓칠 수 없는 점이지만, 그 점은 단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 거대한 물결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는 그 거대한 물결을 가지고 책을 논한다. 문제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은 경제학 도서가 아니라 정치사회학 도서에 가깝다. 따라서 이 책이 <경제학 마스터>라고 보기에 어려운 것은 경제가 정치사회적인 요소와 맞물려 돌아가는 게 사실이나, 단순히 경제라는 단어에 치중했다면 몰라도, 책은 경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페인의 <인권의 정의>같은 경우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논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무엇으로 보는 게 정답인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경제성과 자유성에서 인간의 빈곤이 해결되지 않은 진정한 자유는 없다. 경제라는 것을 돈이나 자본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나 사회적 합의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 마스터>란 책제목이 전혀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경제라는 용어는 어느 사회가 어디에 있든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인간이 살면서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농사를 통해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식량을 보유하지 않으면 노동력과 생산력조차 없어진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그 요소가 경제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나 간활한 군주의 정치공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라는 체계는 국민이란 인간들로 구성된 커다란 사회체계이다.

 

사회체계 내 살아가는 인간은 재원과 자원을 필요로 한다. 경제성은 그런 말이기도 하나, 그 경제학이란 학문적 가치에서 인간의 오만과 고정관념이 오용될 가능성이 높다. 환경생태학적으로 인간의 합리성에 의해 우리는 문명의 편리를 누리는 대신 목이 마르면 안심하고 하천의 물을 마실 수 없다. 아스팔트 차로에 빠르게 달려가는 차 안에서 다른 차의 매연과 다른 운전자의 흡연으로 인해 창문을 열고 다닐 수가 없다. 에어컨 바람은 잠시 상쾌하겠지만, 탁한 공기는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법이다.

 

인간의 욕심은 타인의 재산을 노리고, 자신의 재산을 신성시 여긴다. 책 안에서 부모님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자신이 빼앗긴 재물은 잊어지기 어렵다는 홉스의 말에서 소름이 끼친다.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정작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잡아먹는 동굴 속의 외눈박이 괴물인가? 경제학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화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출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책 자체가 여러 저자의 내용을 고스란히 옮겼기에 처음 접하는 분에게 이게 경제학 입문서 내지 정독서로 추천 드리고 싶지 않다. 단지 경제학을 알려면 어느 사람을 찾아보면 좋을 지에서 나름 추천 드릴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1/3 가량이 경제학 서적이 아니다.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 정치, 문화, 역사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지 경제학 도서가 아닌 것까지 경제학 도서로 포함한 게 아쉬울 뿐이다. 차라리 <정치경제학 입문 마스터>로 만든 게 훨씬 좋다고 여긴다. 아래 목차를 제시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1장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2장 이반 블로흐의 전쟁의 미래

3장 에드워드 벨러미의 과거를 돌아보며

4장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5장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6장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7장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강의

8장 토머스 로버트 맬더스의 인구론

9장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10장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11장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12장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13장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14장 몽테스키위의 법의 정신

15장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16장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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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경제입문론 정도...마스터는 한권으로 마스터가 될수 없었나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20 13:50   좋아요 1 | URL
입문정도도 어렵습니다. 걍 소개~ 정도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요즘 상종가를 치십니다그려.. ㅎㅎㅎ 가을 되면 한 잔 아시죠 ?

만화애니비평 2016-08-20 14:21   좋아요 0 | URL
서울 유진식당이 목표지점인겁니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4:24   좋아요 0 | URL
다음에는 만애비 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하죠... 야외 식당 좋은 곳 있으시면 추천하십시오.

yamoo 2016-08-20 21:38   좋아요 0 | URL
에이, 곰발 님만하겠습니까?! 연일 상한가를 치셔서 `제한폭`을 실시해야 할 듯한데욤^^ㅎㅎ

yamoo 2016-08-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차를 보니, 정치경제학 입문론 쯤 되는 거 같습니다.

제가 공부한 바로는 하이에크의 경우 주류 경제학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보통 경제학에서 주로 언급하는 학자를 보면, 케네, 애덤 스미스, 멜서스, 리카도, 밀, 프리드리히 리스트, (구스타프 슈몰러, 베르너 좀바르트,) 칼 마르크스, 베를런, 칼 멩거, 왈라스, 마셜, 피구, 케인즈, 슘페터, 로빈슨, 돕 등을 많이 꼽습니다. 뭐, 다수설 쯤 된다고 봅니다.

하이에크는 정치경제학자로 분류되어 주류 경제학에서 많이 언급되지는 않는 듯합니다.(교과서 차원에서..)

현대경제학으로 분류된 학자들을 보면, 새뮤엘슨, 프리드먼, 갤브레이스, 뮈르달, 스라파 등을 언급합니다. 물론 교과서적이죠.

하이에크와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학파로 분류되어 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거 같습니다.

물론 위의 책에 대한 만애비 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책 자체가 경제학 마스터라는 타이틀을 달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어, 그 부분을 언급하시고자 했겠지요.

제가 한 때 미제스와 하이에크를 읽으면서, 이 학자들은 왜 교과서에 잘 언급이 안 되는지 의아해서 교과서를 많이 찾아 봤는데, 이들을 다루는 교과서를 본 적이 별로 없는지라...그 부분 때문에 주저리 많이 쓰게 됐네욤^^;;

개인적으로 경제학은 `희소성의 원리`를 구현하고자 성립된 학문 같아요. 아미티아 센같은 학자는 경제학에서의 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경제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할려면 교과서 자체에 `소비자`를 대체하는 학술어가 빨리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제학 어떤 교과서를 봐도, `소비자`만 있지 `인간`은 없는지라..

만화애니비평 2016-08-20 23:54   좋아요 0 | URL
야무님 말씀이 거의 맞습니다.
오스트리아파로 하이에크 미제스 이름은 밀의 정치경제학에서 봤는데, 신자유주의 노선에선 하이에크 이론을 가져와도 그것이 교과서로 되지 않은 점은 조금 의아하네요.

소비자란 용어에서 소비자가 우선인지 소비자는 바보인지 의문되는 현실인지라 어째보면 경제학에 철학이 가장 필요한 것 같습니다.

루쉰P 2016-08-20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읽을 때마다 재미지네요 마치 제 관심사를 꿰뚫고 있으신 듯 해요 전 지금 고향에 내려와 친구와 술 한잔하고 집에 가고 있어요 전 파스칼의 팡세 리뷰 쓸거에요 만화애니비평님이 감탄할 정도로 쓸겁니다 이얍

만화애니비평 2016-08-20 23:52   좋아요 0 | URL
술을 맛나게 드시는 겁니다,. 니빠앙~ㅁ
 

http://archive.is/EMwe2


왠만하면 저 위의 링크된 글을 들어가서 보는 것에 대해 말리고 싶지만,


도서모임에서 전에 내가 메갈리아 사이트에 대해 비판적으로 작성한 글에 대하여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참석한 자리에서 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4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분들은 여성이었고, 그 중 2분은 집에 자녀를 둔 기혼여성 분이었다. 그 중 한 분은 나의 글을 읽은 후 이번 넥슨 사태와 관련된 내용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그리고 판정은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 메갈리아 사태와 페미니즘 논쟁 사이에서 그들을 도저히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없다.

 

우선 세상 인간들 중에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다. 문제는 세상의 반이라는 여성들에게 그곳에서 또 구분되어 있는 것이 있다. 여성의 일부는 미혼이고, 여성의 일부는 기혼이다. 그리고 그 여성 미혼 안에서도 미성년자와 어린 아이들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채 노년을 맞이하는 분들도 있다. 내가 메갈리아의 문제점을 뽑자면 바로 그들 대부분 인원구성에 20~30대 미혼 여성이다. 그렇다면 기혼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한겨레나 경향신문 자칭 진보성향 신문들이 메갈리아의 편을 들어 사설을 쓰는 것을 보았다. 물론 쓰는 것은 자유이고, 그 쓰는 것에 대한 원칙적인 내용과 논리적인 평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었다. 서울 성공회대학교 신부님이나 많은 신문기자들이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보여준 1910년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 이야기를 끌고 온 것이다. 이 영화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의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란 자선을 토대로 만든 이야기이다. 신문기사에서 엄청난 오류는 페미니스트 역사에서 영국여성운동하고 지금 메갈리아하고 상당히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인간 중 반이 여성이라면 그 여성의 반이 기혼여성이란 사실이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드는 공장노동자이면서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이다. 그녀가 처음 영화에서 공장노동자라는 열악한 환경, 그 공장노동자에서도 여성이란 약점, 또한 아이 때부터 착취당해야 하던 문제를 말한다. 즉 노동문제, 여성문제, 아동문제까지 이어진 것이다. 모드가 처음에 여성이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에서 분노했다면 모르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이혼을 하거나 가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여성에게 아이에 대한 양육권이나 친권을 소유할 수 없었다.

 

남편의 일방적인 행위에 따라 아이를 만날 수도 없고, 어머니로서 행위를 할 수 없었다. 영화 서프러제트> 마지막에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는 날짜가 새기지는 것도 있지만, 영화감독은 어머니도 자녀에 대한 친권행세를 할 수 있게 된 날짜도 집어넣는다. 그렇다면 영화 <서프러제트>와 메갈리아 운동을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는 여성에게 사회적 쇠사슬로부터 해방되면 남성 역시 더 좋은 세상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부분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 밀의 주장과 일치한다. 게다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도 존 스튜어트 밀이란 이름이 거론된다. 가끔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왜 남성이 페미니즘 사상과 관련된 것에 반발하는 사람을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페미니즘이 여성 그 자체를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사상과 결합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여성운동가가 등장하여 19세기부터 영국을 시작하여 20세기는 전 세계로 뻗은 것이다.

 

문화인류학 도서를 보면 인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페미니즘 관련 내용들이 참 많다.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유방의 역사>는 서양에서 원시시대부터 중세, 근현대까지 망라하기에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메갈리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인가? 페미니즘 이론과 관련하여 남성을 배제한 사상이 얼마나 있는지 까지 모르겠다. 단지 해러웨이 박사처럼 사이보그 페미니즘이라고 하여 인간이 생물학적인 조건이 아니라 기계적인 요건이라면 필요 없을 것이다. 만약 인간의 신체구조와 판단기관인 뇌조차 기계로 되면 인간은 굳이 동물적 존재로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고, 만약 된다고 해도 그것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와 지구환경시스템 전반적이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공상세계가 아닌 이상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게 정답이다. 펭크허스트 여사는 자신에게 인간이란 존재가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조건아래 인격을 존중받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원했다. 여자라서 우대하고, 남자라서 존대 받는 게 아니다. 다시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드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자신의 자녀가 아들이었고, 아들을 볼 수 없던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녀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여성에 대한 탄압, 열악한 노동환경, 그리고 자녀에 대한 친권행위이다. 그런데 메갈리아에서 한국의 남성을 부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발언을 한다. 만약 그 발언자체가 성인남성이라면 모르나, 아이들까지 연계되고, 한국남성과 결혼한 한국여성까지 비난하는 것이다. 아주 비속한 언어 중에 명예자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자신을 비판하는 여성 혹은 유부녀와 남성과 교제하는 여성이란 뜻이다. 결국 메갈리아는 한국의 남성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욕을 하고, 남자친구와 연애하는 여성까지 욕하는 부류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여권신장은 기본이겠지만, 아동인권에 대해서는 더욱 생각해 볼 점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 역시 가난한 여성에게 태어난 2세에 대한 걱정을 심하게 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병이나 굶주림으로 대부분 죽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다시 비참한 일을 해야 하는 재생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말 한국남성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시위나 저항을 하지 마란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시위행위에서 그녀들은 모든 한국남자는 배제하고, 그들의 옆에 사는 여성도 포함하여 앞으로 그들 남성과 여성 사이에 태어날 아이조차도 부정한다. 나는 이들이 페미니즘이라는 포장으로 한국사회에 들이대는 게 너무 걱정된다. 누군가는 이들로 통해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이 된다고 하나, 막상 그들이 말하는 범주에서 윤리적 가치관이 통용되는가?

 

폭력으로 대응하여 그들에게 말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그 원심적 논리와 가치관이 어느 정도 윤리적 정당성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 권력과 흐름에서 정착된 도덕적 관념이 아니라 과거든 현재든 먼 미래가 되든지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한다.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그들이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관심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들 자체가 하나의 페미니즘이란 사실을 된다면 엄청난 모순이 될 것이다. 링크된 글을 보면 나와있다. 메갈리아에서 다시 나온 메갈리아4, 그들이 말하는 주장이란 무엇인가?

 

한국남성에 대해 한남충 같은 단어 같은 것은 그냥 넘어간다. 여성이 여성으로 목소리는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희 목표는 성재기 조롱과 오뎅드립으로 클리떨리게 웃고 마는 것이였나요? 씹치남 번식탈락이 목표가 아니였나요?”에서 나는 이들이 과연 인간이라 생각이라 여기는 것이 너무 어렵다. 성재기 씨가 일부 여성에게 불편한 감정을 준 것 같은 사실이나(고인에 대한 조롱하는 인간성에서 의문이 들지만),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조롱에서 오뎅드립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분명 말한다. 남자 말 잘 듣는 좋은 페미니스트만이 페미니즘 운동가가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 역시 그렇다고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담론 이전에 인간이 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이것도 메갈리아4 운영진이란 인간이 적은 글이고, 그 밑에 덧글은 안 보는 편이 좋다. 씹치남 번식탈락에서 왜 한국에 사는지 묻고 싶다. 한국남자가 싫으면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이유는 여성운동 이전에 먼저 자신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자신의 얼굴에 흉악한 가면을 쓰고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 가면이 자신의 얼굴로 되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신문기자들, 진짜 영화<서프러제트>만 말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다 읽어보았나?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가 언제 세상의 모든 남자를 번식탈락이라든지 혹은 죽이야 한다든지 필요 없다는 말 한 마디가 있던가? 신문기자들도 나름 고인에 대한 모욕을 하고 있다. 메갈리아 논리로 보자면 영화 <서프러제트> 모드는 자신의 아들을 씹치남이고 한남충의 후예이기에 사라져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모드가 과연 그런 대사를 하던가? 비 오는 날 창문 너머로 아이를 보기 위해 서서 기다린 모드. 아이의 생일일 때 집에 찾아가니 강제 입양되는 모습에서 오열하는 모드를 볼 수 있다.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기혼여성이었고, 집에 아이를 둔 어머니이었다. 그녀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운 것이지 자신들의 오만을 위해 싸운 게 아니다. 참 당황스럽다. 어째 저런 인간들을 서프러제트 운동가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되먹지 못한 남자들을 보고 쌍욕하고 화를 내는 건 당연하나, 그런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가지고 장난치는 인간들을 두고 뭐라 해야 할까? 아동인권(어린아이와 그 어린아이의 어머니)을 존중하지 않은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아동인권을 존중하지 않은 인간(남녀 모두)들은 자유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냥 쓰레기다.



2016.8.19 업그레이드한 사진입니다. 메갈이나 메갈의 후예 워마드 논리에 따라가든 말든은 자유나, 이런 것을 두고도 비판하지 않으면 그 운동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전태일 열사가 노동착취를 당한 어린 여공을 위해 분신자살까지 선택했는데, 그분의 여동생은 지금도 오빠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데 과연 이게 인간의 얼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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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8-17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히 그렇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면 그리고 근접원인과 궁극원인을 살펴본다면 서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 해결점을 제시한다면 ...

이런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이상적인 것 아닐까요.

알라디너들도, 저도 편견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6:20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말하여 한국 기존 사회 문제점에서 남성중심이란 점은 충분히 압니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에 대한 미러링에서 방법론에서 공격대상과 목적의식의 전도는 인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기가 잘못되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우리도 잘못되었다면 수긍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남성에 대한 혐오발언 정도는 웃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폭력으로 정치적인 운동노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다치고, 아동이 학대당하는 시점,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을 두고 마치 잘한다고 옹호해주는 광기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부터 봐야하는게 정상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편견은 누구나 있죠. 생각이 조금 달라도 친한 사람도 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글에서 지적대상들은 이미 그 한도를 지나쳐 온게 아닌가 싶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제트는 대부분이 기혼 여성이고 어머니였기에 가치 있는 운동이다 ??!
이건 좀 상당히 오버 아닐까요 ? 그러한 사고는
전형적인 여자는 어머니일 때 위대하다는 남성 중심적 시각과 일치합니다.
만애비 님의 논리라면 미혼 보다는 기혼 여성에 높은 점수를
미혼보다는 어머니이기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은 역으로
미혼과 기혼 여성을 이중 잣대로 평가하는 게 아닐까요 ?
왜 여자는 어머니여야지만 더 완벽한 가치를 부여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만애비 님이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결혼을 하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만애비님의 미혼을 들어 평가 절하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제가 보기엔 지나친 논리 모순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남성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많은 것을 착취한 나라입니다...

문제 제기만 하고 갑니다.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6:54   좋아요 2 | URL
반드시 기혼여성이고 어머니이었기에 가치가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단지 기혼여성들이 주류가 된 이유는 아이에 대한 미래였고, 그런 부분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계속 언급됩니다. 펭크허스트 여사는 늘 인간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여 따님 3분도 같이 운동에 참여하죠.

물론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관점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환경공학자고, 생물학을 배웟기에 생물학적으로 근골계 제외하면 여성이 더 진화된 존재라고 여깁니다(물론 옆 자리에 있는 생물학과 출신자가 정확히 여성이 진화된 생명이라 말해줍니다). 이런 관점은 닉 테일러의 <히즈 스토리>에서 나옵니다. 상당히 그 책 이론에 공감되고요.

곰발님이 지적한 이중잣대에서 한국만 아니라 세계 어디든 어머니를 많이 착취했죠. 그건 <여성의 종속>에서도 나옵니다. 왜 어머니이어야 가치는 부여받는가에서 노동의 재생산이라고 봅니다. 전에 대화하면서 노동결정권론적인 요소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가 이렇게 하루 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노동력이 있기에 가능하죠.

제 관점은 <4천원 인생>입니다. 한국이 이만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시간당 4~5천원을 받는 수백만의 식당이모가 있기에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요? 고의든 타의든 결혼이 있겠죠.

곰발님 말씀대로 왜 여성 중에 기혼여성(미혼모 포함)에게 더 높은 가치를 받는가에서(메갈리아는 기혼여성을 깎은 점에서 가장 큰 문제지만), 전 이래 봅니다. 만약 제가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차를 타고 정비소에 갈 때, 저는 제 생활에 대한 편익을 보장받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이제는 저와 비슷하거나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할 때 옛날에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간호사로 있었지만, 지금은 저보다 젊습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중요한 건 우리의 일상의 타인의 노동력에 의해 존재됩니다. 그런 노동력이란 사회성을 존재해주는 것은 출산이고, 당연히 어머니란 존재는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이런 논리가 남성중심적이겠죠). 하지만 반대로 묻다면 이런 제 논리, 즉 사회적 노동력에서 우리가 이용하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에서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결국 이용하죠.

저하고 유진식당에 가면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을 수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넥슨사에 시위하는 분들도 지하철을 타고, 버스도 타겠죠. 그런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는 점에서 단순히 한국남성의 문제의식을 말하는 것과 한국남자는 모두 절멸해야 하는 점에서 모순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생각을 가지는 건 좋으나 현실적인 대안을 토대로 남에게 말하는 것은 무리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에서 논의하는 것은 사회적인 공적인 영역이지, 곰발님의 질의하신 결혼내용은 사적인 논의입니다. 기분이 나쁘다 아니다보단 이 글의 요지와 다른 방향이 아닌가 합니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아이를 뺏기는 일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도덕적 가치이고, 제가 결혼하지 못한 일은 단지 제가 사회적으로 경제력이 부족한 겁니다. 사회적인문제라 해도 모순의 지적이 조금 벗어난 것 같습니다.

물론 답변으로 저보고 결혼의 문제를 묻자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제가 부족해서 그런가봅니다 라고 말이죠.

경제성 부분에서 대학강의 때 여성학 수업이 생각납니다. 여자교수님이 과도한 남성노동(가난함) 역시 페미니즘이 풀어야 할 문제라고요. 남편이 일찍 집에 오게 만들어주는 것도 페미니즘입니다. 아이에게 어머니만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죠. 저라면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프레임으로 보기보단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하였으면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지스트는 평화적 온건 페미니즘을 주장했고
서프러제트는 폭력적 과격 페미니즘을 주장했습니다.
두 무리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단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만애비 님은 메갈을 2,30대 미혼 여성, 그러니까 미혼이어서 어머니가 아닌 여자를 비판하는데
이 비판은 매우 위험한 비판입니다. 적어도 만애비 님이 페미니즘에 동조한다면
2,30대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새누리가 여자는 애를 낳아야 여자가 된다는 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 말은 비판의 핵심이 잘못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숭고하지만
여성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덜 숭고하다는 것은
지극히 남성적 시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프러제트는 메갈에 비해 기혼 여성이며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은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7:09   좋아요 1 | URL
저는 20~30대가 결혼하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한 게 아니라
그녀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까지 조롱하는 것에서 문제를 삼는 겁니다.
한국사회에서 기혼남성이나 여성은 여자나 남자로 보지 않는 그런 요소로 본겁니다.

물론 결혼한 여성의 행동만이 전부 옳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메갈리아에서 좃린이 사건에 대한 일들을 보고 있자면....

여성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덜 숭고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여성운동 자체에 무슨 미래의 가치가 있냐는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8:29   좋아요 1 | URL
제가 보기엔 이 댓글은 변명처럼 들립니다만.
분명 윗 글의 논지에서 메갈 비판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를 조롱하는 것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는 서프러제트와 자신의 미래만을 위해 싸우는 메갈.. 이라는 이분법으로 접근하신 겁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4   좋아요 1 | URL
아 그렇게 보였나요? 제가 글적을 때 그 부분의 맥락을 잘못 연결했나 봅니다.

저는 자신만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만의 오만라고 했습니다. 미래와 오만은 다르다고 봅니다. 분명 이분법은 맞습니다. 서프러제트와 메갈리아 운동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6-08-17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제트 책을 저도 읽었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웠다는 것에 대해서도 고개 끄덕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오만을 위해 싸운 건 아니다?? 이건 아니네요. 일단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것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성`이라서 정치에 참여하지`못`했다고요.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니 아이들이나 빈민을 위한 정책이 잘못된 걸 봐도 고칠 수가 없는 등의 문제점들이 눈에 보인것은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운동입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아먄 온당한가요? 여성이 자신들의, `여성이라는` 성별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메갈리아가 `미러링` 사이트라는 건 아실텐데요, 실질적으로 그곳의 발언들은 일상적으로 남성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현실에서 했던 것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메갈에서 그런 글을 쓴 여성들이 현실에서 남성에게 데이트 폭력을 하고, 염산을 뿌리고, 불을 지르고, 손가락을 자르고, 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보거나 들으신 적이 있나요? 단순히 남성들이 했던 말을 옮긴 것만으로 지금 분노하시는 건 아닙니까?


페미니즘은 반드시 조용하고 교양있어야 하고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까? 왜죠? 정치도 철학도 여러종류로 나뉘고, 그 안에서 문제점들이 생기는데, 페미니즘은 그러면 안됩니까? 페미니스트들도 사람입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며 그 안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보일 수도 있고 또 그걸 고쳐나갈 수도 있습니다. 페미니스트가 완벽하다는 것과 동일한 단어는 아닙니다.

서프러제트에서 여성들이 창문을 깨는 등의 폭력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이 왜 그런다고 하던가요. 아무리 말을 해봤자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죠. 창문을 깼을 때야 남성들이 돌아봅니다.
링크하신 글을 보면 메갈리아가 생기고 또 지금까지 되는 과정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걸 볼 수 있는데요, 일베나 소라넷이 자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나 했습니까? 지금 만화애니비평님이 서프러제트를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메갈리아가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은 아닌지요?


명예자지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계신데요, 기혼 여성을 명예자지라 칭하는 게 아닙니다. 남성의 눈이 그러한것처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여성에게 개념녀라 되라고 말하는, 그 시선 때문에 명예자지라 칭하는 겁니다. 비혼 여성도 명예자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님,
저도 메갈입니다.
제가 바로 서프러제트와 비교하면 안되는 `그런 인간` 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7:05   좋아요 1 | URL
간단히 답을 드리죠.

1. 참정권을 알고 있습니다. 참정권이 없으니깐 바꿀 수 없으니 미래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죠.

2. 마인드C 작가사건 아시나요? 그분이 메갈리아 때문에 허위유포로 고생했습니다. 단순히 하나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닙니다. 왜 그분을 말할까요? 저하고 같은 만화연대소속이고, 그 주변인물이 제 주변인물하고 겹치는 겁니다.

3. 제가 참고로 여자가 그랬다고 분노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전부터 일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강압적인 꼰대사회도 비판했습니다. 마치 여자만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4. 그리고 제 글을 보면 착한 페미니스트만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페미니즘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겁니다. 제가 영국인들이 유리창 깬 것 가지고 나쁘다 했습니까? 전에 글을 보면 부동액이나 피임약 먹인 음독기도 때문에 비판합니다. 잘 골라서 말해주세요. 그냥 단순히 재미로 홧김에 진짜 먹이든 아니면 가상이라도 할 말(행동)과 하지 않아야 말(행동)이 있습니다.

5. 참고로 저 노무현재단 후원회원입니다. 봉하마을에서 자원봉사도 했던 사람입니다. 일베가 하는 행동에서 노무현 대통령비하나 518왜곡에 무척 기분나뻐하는 사람입니다. 일베에 대해 몰라리가 있겠습니까?

6, 단편적인 글만 보고 이렇게 비판하는 게 다락방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ps 만약 메갈리아에서 순수하게 그런 분노만 했다면 좋은 곳일 겁니다. 만일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한 청년의 죽음을 조롱하거나 세월호 유족에개 조롱을 하는 점에서 무엇이 과연 옳고 그런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생각해보세요. 정말 잘 못된 게 있다면 사회적으로 지적하는 게 바르지만, 전혀 무관한 자들까지 조롱하는 것에서 옳다고 여기고, 그것이 서프러제트의 유리창 깨기라면 대화는 누가 먼저 포기할 것일까요?



올드비 2016-08-17 17:4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다락방님에게 다는 댓글입니다. 저는 오래된 페미니스트고 메갈리아의 초창기 활동부터 관심을 두고 봤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전복적이고 사이다 같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 모습을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저는 차라리 절망감을 느껴요. 페미니스트가 늘어난게 아니라 꼴통마쵸들만 늘어난거 같아서요. 옹호론도 많이 읽어봤지만, 전반적인 상황과 웹 게시판의 역사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 대다수입니다. 모두가 일베와 싸울 때, 일베를 닮았던 사람들이 메갈리아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여자고, 남자들이 여자를 일반화 하는 걸 그렇게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말하고 싶어요. 남자를 일반화하지 마세요. 그래서는 진보가 없어요. 집단주의에 속하기 전에 개별적이고 서로 다른 인격으로서 인간을인정해야 합니다. 다락방님의 글을 많이 읽고 하는 말입니다.

소조 2016-08-17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소중하게 읽었습니다.

요즘 알라딘에 오면 남들에게 아부하는(좋아요 많이 받고 싶어하는.) 글이 많아서 좀 답답했는데 이런 글을 보니 반갑네요.

당장은 서로 다른 의견일지라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해야죠.
이게 진짜죠.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곰곰발님의 토론처럼 이런 의견이 분명 와야지 대화가 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충돌이 오면 바로 좋은 말부터 오고갈리 없습니다.

이갈리아 2016-08-17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가 봐도 이 글은 미혼 여성에 대한 모독이죠. 김무성이 말한 것과 뭐가 다르죠? 새누리를그렇게 쥐잡듯이 하시더니 애 낳지 않은 미혼 여성은 멍청하다. 메갈은 미혼여성이자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에 용서할 수없다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노무현지지 철회하세요. 부끄럽게 노무현 거들먹거리지 말고요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0   좋아요 1 | URL
님 지금 글 제대로 보신건가요?>

김무성이나 새누리나, 젊은 층보고 너네 알아서 낳아라 식인데
제가 봐도 현실은 경제적 어려움, 부동산에 의한 거품경제ㅡ 비정규직 등이 문제라 도저히 연애할 자신 없는 88만원 청춘에 대해 공감하는데, 무슨 망발인가요?

님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20~30 미혼 여성을 무시한 게 아니라, 메갈리아가 먼저 기혼여성을 가지고 ˝명예자지˝라고 펌훼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문제로 이 글을 적었는데, 전후맥락 고민 없이 제가 뭘 사과하죠?

먼저 메갈리아에서 기혼여성과 그녀와 같이 사는 가족 모두에게 사과하면 미혼여성 모두 사과하겠습니다.

치사하게 아이디 가리지 말고, 님 블로그 대고 오세요.
익명성으로 적는 글에서 님 그렇게 본인 주장에 자신없나요?

만화비평님 2016-08-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화비평님 누가 봐도 이 글은 미혼 여성과 애 없는 여성에 대한 조롱처럼 들려요. 사과하시죠.

만화애니비평 2016-08-17 19:01   좋아요 1 | URL
참 누군지 몰라도 비겁하신 분이군요. 그렇게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없습니까?
비겁하게 만화비평이 뭡니까? 그렇데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면 떳떳하게 하세요.
대학 때부터 교양수업과 여성학 강의를 하시던 그 모든 교수님은 당당하고 멋진 분이었습니다. 미혼여성 무시한다는 발상이 웃기군요. 메갈 비판 모두 일베와 같다는 그런 방식의 사고자같습니다. 변론하려면 정식으로 아이디 들고 오시죠. 치사하게 뒤에 숨어있지 말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20:22   좋아요 0 | URL
제가 봐도 이갈리아와 만화비평, 소조처럼 껄끄러운 입장 표명하는 게 그래서 익명으로 다는 것들은 한심한 거죠...

다락방 님은 듣기 좋은 소리 들을려고 여기에 댓글 달았겠냐 ? 문제를 제기하려면 자기 이름 가지고 당당하게 욕먹을 생각을 해야지 뒷구멍에 숨어서 이게 뭐하는 짓인데... 병신새끼들... 특히 저 소조 쌔끼. 항상 익명으로만 달아요. 시발놈...

여자 블라우스 속 젖꼭지 색깔 운운하던 새끼가 이런 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yamoo 2016-08-1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서프러전트? 운동에 별 관심이 없고, 관련 책과 영화도 본 적이 없어 만애비 님이 쓰신 글과 이후 이어진 댓글에 뭐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

근데, 다락방 님의 저리 긴 댓글은 좀처럼 보기 드문 케이스라 좀 신선합니다^^

곰발 님 댓글을 보니, 소조라는 분이 좀 거시기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ㅎㅎ

전, 암 것두 모르고, 댓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걍 눈팅만 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18 08:54   좋아요 0 | URL
저는 다락방님이 메갈리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의 링크를 보면, 메갈리아 운영자라는 사람이 ˝한국 모든 남자(비속어로 씹치남이든 한남충이든)를 박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다락방님이 아동에 대해 인류의 미래라고 인정하는 순간, 메갈리아 이념과 다른 겁니다.

영국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질 때나 우체통에 폭발물 설치할 때 기본적으로 사람이 없을 때 누군가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면

자칭 한국의 서프러제트인 메갈리아는 단지 주변 남자가 싫어서 누가 맞든 말든 던지는 부류입니다. 그냥 제 글과 덧글, 답글보단 맨 위의 링크를 먼저 본 후 판단하면 좋겠다는 제 바람입니다.

yamoo 2016-08-18 11:27   좋아요 0 | URL
만애비 님, 이 글을 읽어봤는데요, 만애비 님이 주장하시는 부분이 명확하지 않고,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을킬 수 있는 논거가 꽤 있는 듯합니다. 만애비 님이 비판하시고자 하는 부분이 뭔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긴 합니다만, 표현상 문제로 이게 잘 전달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곰발 님이 지적하신 부분은 만애비 님의 글에 분명히 보이는 모순점이구요..더군다나 `메갈리아들이 자신들의오만을 위해 싸운다`는 부분은 상당히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 같습니다. `자신들의 오만`은 뭘 가리키는 건가요? 논증이 필요한 부분이 논증 없이 넘어가다 보니, 만애비 님의 주장과 그 논거가 보는 사람으로하여금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거 같습니다. 비문도 잡고, 논지를 좀 잘 정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08-18 11:46   좋아요 1 | URL
오우~! 야무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을 환영합니다.
제 잘못은 이 글을 적은 시점이 사무실서 일하다가 링크된 글을 보고 빡치 나머지 탈고나 검토없이 바로 올린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소 명확하지 못한 점과 연계성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점에서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글을 적으면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요소에서 남녀 대립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남자라는 대상이 단순히 성인인지 아동인지 아니면 장애인인지도 포함되겠죠.

메갈리의 오만은 미러링이란 수단에서 기존 남성중심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압제로 대한 저항이라면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가부장과 무관하게 남성 존재 그 자체를 두고 ˝번식탈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남성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겁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기존 남성중심사회의 문제점과 폭력성을 비판해도, 남성 그 자체를 모두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과연 이것을 두고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라 할 수 있냐는 겁니다.

결혼하신 주변 기혼여성에게 제가 한 이야기를 해주고, 그분들도 그런 기사들을 찾으면서 하시는 말씀에서 메갈리아 생각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히 ˝좃린이 사건˝같이 아동 성추행에 대해 대상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자체가 나쁜 것이죠. 한남충이란 표현까지 할 수 있으나, 한남충의 유충(아들)이란 표현에서 글쎄요. 아직 아무 것도 시작조차 하지 않은 아이들까지 공격하는 그분들을 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만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호응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아무튼 야무님의 좋은 말씀은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루쉰P 2016-08-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이 말하시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에 대해 공감해요 ^^ 어떤 사회이건 차별이 존재하며 그것을 깨 부수기 위한 집단은 존재해요. 그리고 강한 권력 집단들과 싸우기 위해 강한 발언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구요.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철저히 지키지 않으며 싸운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운동이건 옹호 받지를 못한다고 보여져요.

전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인간으로써 지켜야할 도리` 즉 남녀를 모두 아우르는 인간이라는 대지 위에 서서 그 대지는 뭉개고 파괴하지 말고 서로 논의하고 토론하며 차별점을 없애자라고 읽혀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8-19 11:48   좋아요 1 | URL
저는 여성학 수업에서 여권신장을 두고 여성이 억압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억압에서 배제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으로 분류되기보단 아동, 노인, 외국인까지 전부 배려하는 게 페미니즘이라 배웠습니다.

기본 마인드에서 타인의 인권이 없는 그 어떤 운동은 위선인 겁니다. 과격한 운동이 되더라도, 뭔가 전후맥락과 이념적 당위성이 있어야 봅니다.

제가 메갈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여러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또 분노하게 만든 글을 보았습니다. 전태일 열사 아시죠?

그분이 1960~70년대 노동운동을 했고, 공장 내 여중을 갓 졸업한 어린 소녀들이 가혹한 노동에 혹사되는 것을 보고 괴로워했고, 나중에 분신자살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영원히 잊을 수 없죠. 그분의 여동생은 현재 살아있으며, 오빠의 죽음에 많은 아픔과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메갈과 워마드에서 한 소리가 전태일 죽음을 두고 분신자살했으니 앞으로 남자들은 재기하라가 아니라 태일하란 말을 하고, 그것에 동조하는 모습에 이것들이 인간인가 싶었습니다. 이건 남자만의 문제일까요? 전태일 여동생은 살아있는데 그분은 여성이 아닌가요? 여성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게 과연 저런 것일까 합니다.

사진은 추가해드릴게요

루쉰P 2016-08-19 12:35   좋아요 0 | URL
어유 진짜 저건 아니죠...뭐 이건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요....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전태일 열사를 쓴 조정래 변호사의 책을 읽고 정말 저런 분이 나오지 않을 세상이 되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동법 공부를 위해 뛰어 들었어요.

그리고 저 역시 대학 수업 때 여성학 강의를 맨 앞자리에 항상 앉아, 전공이 컴퓨터과 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거기서 하는 여성해방 연극에도 참여해서,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의 친구 역을 맡았습니다. 물론 여장하구요.

여성들은 심한 차별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서 해방을 위해서라도 마틴 루터 킹처럼 흑인과 백인의 화합을 목적으로 싸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와 상반되는 사람이 말컴X죠. 그는 흑인만의 독립을 철저히 외쳤고, 백인은 죽어도 괜찮은 놈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종자들의 전투력(?)이랄까요? 그런 것은 말컴X쪽이 월등히 높았죠.

그러나 결국 흑인들의 인권을 향상 시킨 것은 마틴 루터 킹의 방식이었습니다. 인간이라는 대지 그 발판을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저 역시 여성 인권을 위해서 언제나 싸울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2016년 여름 한국영화는 다소 이색적인 형태를 보였다. 여름에 주로 등장하는 공포 내지 스릴러 장르에서 기존 스크린을 장악했던 것은 외국 영화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한국영화가 주요 공포영화로 등장했다. 곽도원 씨가 주연을 맡은 <곡성>을 늦은 봄에 시작하여 늦은 여름에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르가 아니다. 흔히 B급 정서라고 불리는 다소 서브컬쳐 요소가 강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몬스터 내지 좀비가 직접적으로 한국 영화에서 등장할 사례들은 많이 없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B급영화라고 해도 그 시장의 규모가 형성된 반면, 한국영화 시장은 일반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그 외 영화들은 인디 내지 예술영화로 상영되어 예술전용 소극장이나 혹은 대형극장 내에서 아트 시네마 홀에서 상영되기도 하나, 그 좌석규모는 매우 적다. 대중이 이용하는 영화관 내 예술전용 상영관 좌석규모는 80석 내외 정도다. 게다가 상영 회수가 매우 제한적이며, 상영기간도 길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큰 무리가 있다. 대중영화를 찾는 것보다 소소하게 볼 수 있는 예술영화의 맛은 기존 영화의 법칙이나 패턴에서 우회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서사나 소재 역시 우리가 직시하지 않은 부분도 많이 드러내며,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형식도 많기에 사회적 문제에 대한 쟁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곡성>이나 <부산행>같은 B급 성격을 가진 영화는 예술영화는 아니나, 인디 내지 예술영화 쪽에서 다소 맥락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해오던 작품들이 B급 정서의 영화보단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인디 내지 예술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옴니부스 애니메이션 <셀마의 단백질 커피>에서 내 사랑 단백질부분이었다.

 

가난한 자취생 3친구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통닭을 주문했는데, 팔 한 쪽이 없는 돼지가 와서 통닭을 건네준다. 그 통닭은 돼지 옆에 통닭가게의 주인의 아이였던 것이다. 닭의 아이이니 병아리고, 병아리는 하늘을 날 수 없지만,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꿈 많은 아이였다. 배고픔 속의 자취생,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닭과 돼지의 모습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서민의 블랙코미디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돼지의 왕>은 매우 충격적인 애니메이션이며, 영상미학적으로 반() 리얼리즘인 애니메이션이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의미는 매우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으로 <>은 군대 내 신임병장과 막 입영한 이등병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병영생활과 구타, 그리고 군대라는 공간에서 보이는 이질적 세계관을 고발한다. 연상호 감독이 보여준 작품은 언제나 불편하고 날카로우며, 때로는 매우 잔혹했다. 언제 학술 세미나에서 연상호 감독 작품세계에 대한 강연을 들을 때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대중사회의 폭력성과 ()연대성, 그것을 만들게 하는 비인간적 사회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고 한다. 연상호 감독 작품 세계는 결국 우리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가 말하려는 현실이란 모순과 부조리, 폭력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면 화질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투자규모가 적고, 시장형성에서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돼지의 왕>이나 <>, <사이비>를 보아도 화질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이용하여 현실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왕 GV>에서 그가 관객과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래서일까? 이번 <부산행>이란 영화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소극장 강당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실사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으며, 단지 실사영화보단 애니메이션영상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다양하기에 앞으로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더 많이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한국영화나 외국영화를 봐도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은 들어가고, 미니어처 세트에서 장면을 다른 화면과 연계할 때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처리를 많이 한다. <부산행> 역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처리한 부분은 역시 많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산행>은 실사영상이 메인이 되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감독 연상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디 애니메이터로서 대중영화에 첫걸음 한 그로써는 영화 <부산행>은 엄청난 성공과 새로운 도전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 팬 중에서 오랫동안 영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비판, 그리고 연구를 하던 사람에게 <부산행>은 다소 실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 스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고, 뻔한 패턴과 흐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B급 정서 영화는 대부분 황당하게 전개되거나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으며, 마니아적인 요소를 가지기에 엽기 혹은 안 봐도 비디오로 갈 요소가 많다. 그러나 기존 연상호 감독이 인디 애니메이션 세계에 있다가 메인 주류 문화시장인 대중영화에 올라와 성공한 점은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여태까지 도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대신 <부산행> 이후 <서울역>에서는 실사영상이 아닌 애니메이션영상이기에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의문이다. 한국에서 한국애니메이션을 외면하고 미국 애니메이션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충실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제작해오던 작품들과 방향성, 그리고 이번에 보여준 <부산행>, 그 연속적인 관계성에서 보자면 왠지 낯선 풍경이 아닐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실사영상은 전혀 다른 영상미를 가지고 있으며, 배우와 배경을 바라보는 카메라 앵글 속의 풍경도 다르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좀비가 서울역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퍼져 국가적 기능에 큰 타격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만든다. 우연히 부산에 있는 아내에게 가기 위해 딸 수안과 함께 KTX에 탑승한 석우는 기차 안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어떤 여성 승객이 발작 후 사망하자, 그 승객 옆에 상황을 보고하던 KTX 여승무원을 공격한다. 그리고 여승무원은 오한과 발작을 일으킨 후 사망하더니 어느덧 다시 일어나 승객들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기차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좀비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달리는 기차 안에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멈출 수는 없고, 오로지 괴물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전개되어진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란 틀을 가진다. <부산행>은 사실 발단 그 자체가 위기였고, 절정까지도 위기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어느 일정한 시간을 기준으로 위기의 해소가 있고, 그 해소 안에서 긴장감을 잠시 풀기도 하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그 조차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잠시 숨만 돌렸을 뿐이지 앞으로 계속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보통 인간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런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수 없으면 인간은 과연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 <부산행>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인간, 남을 위해 도와주는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가 결국 선동에 의해 집단이기주의화 되는 인간들, 인간 군중에 대해 연상호 감독은 다소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인간이 위기에 빠지면 소수에게 구원을 손길을 줄 수 있어도 오히려 외면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기존 시각만을 보여주지 않았다.

 

<부산행>을 보면 열차승객(일단 승무원은 배제)의 분포현황을 보면 대부분 성인이다. 일부 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도 탑승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오직 수안만 있었고, 임신기간이 거의 다 된 성경만이 유일하게 다른 부류였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최후의 생존자는 누구라는 것이다. 분명 임신부인 성경과 그리고 석우의 딸 수안이란 점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가임 중인 여성과 어린 아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 중에 약자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부산행>은 좀비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기차 안에서 생존투쟁을 그린 영화다.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을 무시하는 인간들의 냉혹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관객이 느끼기엔 인간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그런 처지에 높인다면 자신이 그런 인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래도 영화는 이기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마지막 희망은 있다고 말해주려 한다. 석우는 서울 유명 펀드매니저 회사의 직원이고, 그는 돈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인 삶을 택한다.

 

석우의 유일한 핏줄인 수안의 행동에 그는 이때까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닌텐도 게임기가 있었는데, 다시 또 사온 것을 보면서). 딸을 이끌고 부산에 갈 때 그는 현실세계의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번뇌한다. 그리고 상황이 터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뜬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아버지란 집안의 가장으로 군림하는 게 아니라(그러나 그는 늙은 홀어머니를 모신 점에서 완벽한 의미로 가장은 아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녀에게 미래라는 시간을 넘겨주는 것이다.

 

석우와 상화, 그리고 영국 일행이 좀비의 벽을 넘어 수안, 성경, 진희에게 목숨을 걸고 찾아간 것은 인간이 마지막 순간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딸, 남편(아버지)와 아내(), 친구와 친구로 말이다. 마지막에 용석의 배신으로 영국과 진희는 같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석우와 상화는 자신의 죽어도 수안과 성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받고, 그것을 영화의 장면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물론 가족과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라고 말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과거가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서 <부산행>은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영화 중간에 볼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사회를 두고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뉴스에서 좀비로 난리 났는데, 그것을 반국가적 세력이 꾸민 짓이고, 군경이 투입하여 해결 중이라 한다. 실제로 일어난 현실과 미디어의 정보는 분명 다르다.

 

정치권에서 올바른 정보로 해결방안을 주기보단 그저 이 상황을 넘어가려는 오묘함만 보여준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나타나 위기에 봉착한 것은 맞으나 위기가 터진 이유, 그리고 그 문제가 발생해도 대처가 되지 않고 오히려 치명적으로(대전역사의 탈출 장면처럼) 작용된 점이다. 시스템이 붕괴한 시점에서 현실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는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다. 좀비의 탄생은 그저 단순히 우발적으로 생성된 존재는 아니다. 개봉예정인 <서울역>에서 풀어줄 것처럼, 그것은 시스템 오류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면 기본적으로 그 오류의 근본을 고치기보단 임시방편적으로 누군가를 항상 희생시켜 오류의 발생 그 자체를 은폐시킨다. 처음 좀비의 탄생이 석우가 맡고 있던 생물연구기관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에서 정치, 경제, 권력, 언론 등의 이해관계에 부조리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물론 현실의 세계에 나는 좀비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나, 단지 좀비 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은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도 <부산행> 결말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점에서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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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좀비가 산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통도 없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어, 경쟁도 없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 .......

만화애니비평 2016-08-16 11:08   좋아요 0 | URL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좀비가 되면 덕질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덕에겐 잔혹한 일인 겁니다!! 오오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2:31   좋아요 0 | URL
아 !
 
루소 - 시공 로고스 총서 31 시공 로고스 총서 31
로버트 워클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읽었다. 랑시에르의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대중을 수동화 시키는 점이다. 수동적인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서식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프레임이 갇혀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그 틀 안에서 열렬하게 돌고 도는 인생을 만끽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도덕이란 가치가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회적 합의는 그 시대의 풍미와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전한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도덕은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은 행복의 미소로 가득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고 미워하며, 조금이라도 작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난 이리처럼 으르렁거릴 것이다.

 

인간이 진정 행복한 시대란 도대체 언제라는 것일까? 사소한 일에 인간들은 수지가 틀리면 친구에서 적이 되고, 돈 앞에서 우애 좋았던 형제자매마저 법적 소송까지 벌인다. 심지어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관계가 비틀린 모습도 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으로 망가지는가? 마르크스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으니 자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전이라면 루소는 개인의 이기심이라 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대하고 있으나,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읽은 후 루소의 서적을 읽으면 상당한 유사한 요소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친구인 엥겔스 같은 경우 루소의 서적을 세심하게 읽었고, 노동자에 대한 현실의 비극은 루소가 보던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 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로의 아버지라고 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전에 존재하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찾아간다.

 

그 원류는 애덤 스미스의 제자인 데이비드 리카도 좌파와 또 하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약하던 자코뱅 좌파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의 발전과정이고, 마르크스의 정치학은 계몽주의 운동가의 발전과정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자본>에게 이론적인 요소를 전달했지만, <자본>이 가진 정신적 가치까지는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 메뉴펙처라는 분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그의 제자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자본>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생산력은 발전시켰으나, 분업은 인간은 도구화시켰고, 임금의 질을 하락시켰다. 분업이 만약 노동자들이 하나의 합동체계로 만든 회사면 모르나, 분업은 자본가 하나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다. 노동자가 기계부품처럼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임금이 생계수단의 한계점으로 이어지고, 가혹한 노동환경은 직업병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루소는 조금 다르게 보았다. 인간이 분업이 되면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기에 메여진 것들만 가능하다.

 

인간의 직업이 시인, 벽돌공, 수리공, 교사, 의사 등으로 세분화되면 인간의 인생은 매우 한정적이고, 지나친 전문화는 인간에게 부조리한 권력한 명예 그리고 허영을 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밀>에서 언급된다. 위에서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루소의 주장에서 시작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스펙타클화 된 인정투쟁은 인간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낸다.

 

루소의 직업에 대한 고찰은 후에 가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진다. 사회적 분업은 비단 노동자의 임금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마저 분리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의 손에, 교육은 교사의 손에, 결혼도 예식매니저, 죽음도 상조전문가에게 맡긴다. 인간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어지게 된 세상이다. 인간 스스로가 노동자, 교사, 시인,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루소의 경계는 바로 현대사회에서 드러난다. 영국 정치사상학자 로버트 워클러의 <루소>는 근대민주주의 꽃을 피우던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존재했던 루소에 대하여 연구한 도서이다. 그의 말대로 18세기를 가장 과격하여 비판한 사상가이고,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았던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루소의 철학을 보면 관념적으로 칸트로 넘어가고, 유물론적인 요소는 마르크스로 넘어간다. 그러나 루소가 보던 시기는 언제나 스파르타의 절제된 간소함이고, 로마의 민주정이었다. 과거를 바라보던 루소는 플라톤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으나, 오히려 전도시켜버린 광기의 천재였다.

 

루소의 사상이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은 철학의 시작이나 인문학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감대로 이어지는 것에서 다소 벽이 느껴진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오면서 루소가 주장한 내용이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의 입으로 나온다. 루소 이전의 사회는 종교가 정치와 결부된 사회다. 종교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삶의 가치를 강요했고, 인간의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의 삶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 움직이고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라도 루소는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일반적 계몽주의자처럼 지식인 엘리트들이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여 이끌어간다는 것과 다르게 루소는 오히려 민중의 선한 감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처럼 기계화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불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있는 농촌인간들의 순박하고 정직함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의 도서는 당대 엘리트에게 많은 공격을 당하고, 지금도 그의 사상을 두고 말이 많다. 죽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은 사상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루소가 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자아성찰과 자아반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루소의 <에밀>처럼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면 타락한다고 보았다. 아이의 비위를 너무 맞추면 그 아이는 버릇이 없어진다. 루소는 직접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적은 없으나, 루소가 말하는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세계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빼앗겨버렸다. 주입식 교육으로 수동적인 인간이 되었고, 주변 사물에 대한 판단은 누군가의 경험으로만 대체되었다. 선험적인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성의 영역은 모조리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 머리부에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나온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의 눈을 빼앗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루소는 그 이유는 부패한 사회와 문명이라고 했다. 그 문명의 교육이 다시 아이에게 이어지고, 다시 재생산되어 인간 본연의 세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를 읽는 것은 18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우리가 보는 세계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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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8-0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애니 비평님 글은 만화 애니가 아닌 사회 문화 비평글일때 더 재미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5   좋아요 0 | URL
아니고, 오타쿠가 실천해야할 본연의 임무가 이렇게 되다니요..ㅎㅎ

루쉰P 2016-08-0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쓰시는지 원...감탄을 하고 갑니다 ㅋ 루소 정말 정말 매력적이네요 ㅋㅋㅋ 읽고 싶은데 왜이리 저는 읽을 게 많은지 ㅋㅋㅋ

역시나 재미난 글 잘 보고 갑니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지금도 루소가 적은 도서를 다시 읽는 중입니당..ㅎㅎ

루쉰P 2016-08-08 10:16   좋아요 0 | URL
항상 독서를 하면서 느끼지만요 ㅋ 한 명의 사상가를 온건히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더라구요 ㅋ 전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킹, 루쉰 이렇게만 파고 들고 있거든요 ㅋ 어찌나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정말 루소의 전문가이신게 대단하신 것이라 느껴집니다. ㅋ

2016-08-07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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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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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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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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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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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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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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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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