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 임진왜란에 조국을 지킨 아홉 의병장 작품집 겨레고전문학선집 9
곽재우 외 8인 씀, 오희복 옮김 / 보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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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보수정권이 몰락하고, 다시 진보적 정권이 수립되었다. 물론 학문적으로 또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아직도 보수정권이나, 앞전의 10년은 수구정권 내지 더 나아가 관료주의 정권이라 말하여도 다름이 없다. 정권의 차이는 있지만, 제일 많은 차이점을 생각나게 만든 것은 바로 대북관계이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볼 것인가? 소비에트연방인 20세기 말 붕괴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찾아 사회주의국가로 세상을 호령하려던 중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진짜 세상을 호령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관점은 사회주의, 경제적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실 자본주의가 21세기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 같은 말은 국가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 위한 슬로건에 불과하다. 북유럽사회 특히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국가는 아직 왕가가 존재한다. 심지어 영국의 경우 여왕의 권력이 막강하다. 그러나 영국은 자유주의국가이고, 북유럽 다른 국가 역시 수정사회주의로 만들어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국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좌우논쟁이 한국에서 얼마나 학문적으로 낙후되었는지 다른 국가에 비해 얼마나 잘 적용되지 않았는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국가분단의 아픔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우리 세포에 각인된 공포심이라 말할 수 있다. 군사정권이 통치할 때 프랑스나 독일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은 정상적이었다. 학문의 영향에서 프랑스의 파리대학이나 사범대학, 독일의 수많은 대학교들이 그런 책들을 읽어도 무방했고, 오히려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발달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고, <공산당선언>을 읽는 것은 간첩죄로 바로 체포되어 남산 밑에 있는 건물지하에 끌려가 고문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북한이란 존재는 그만큼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 더 나아가 증오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도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보고 가야 하는 것인가? 최근 통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이 점차 옅어져 간다. 어릴 적 배운 동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곡이 있다. 꿈에서도 통일이라는 그 노래, 곡을 들어보면 참으로 아름다고 순수한 곡이다. 노래와 같은 통일이 되려면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되어야 가능하다. 만일 전쟁을 할 경우 국토의 대부분 모두 쓸모없는 토지로 변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국내산지에 나무가 없어서 심각한 지경이었다. 소나무를 열심히 식재하여 한국에서 소나무는 흔한 나무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산과 마을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축하공연으로 동요 <고향의 봄>을 어느 소년이 불렀다.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선율은 모든 사람들의 넋을 잃을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다. <고향의 봄>은 한국전쟁 이전, 한국인이 아직도 조선의 후예란 이름을 가질 때 나온 노래다. 물론 조선이라 국가적 통치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으나, 그래도 조선인이 있었다.

 

통일이 되려면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한쪽은 한국, 한쪽은 북조선,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고종이 지은 대한제국의 뿌리에서 시작되고, 북조선은 조선이란 한국 마지막 왕조국가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역사는 그저 흘러간 것이라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부지런히 하는 이유는 외교적 문제와 국제적 관계에서 역사의 정통성을 내세우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 한국역사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만일 독도가 일본 땅이란 말을 듣고 발끈하면 그것만큼 코미디가 없다.

 

처음부터 조선의 역사가 없었다면 독도의 역사도 없다. 지리적인 조건조차 역사의 기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것이 존재해도 그 존재성에 대한 인식론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인식조차 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 논리일지도 모르나, 독도란 실체를 우리 대부분 직접적으로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독도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지만, 영상과 지도에 의해 구분되어 진다. 영상이란 허구적 이미지 속에 우리는 진실성을 부여한다. 역사성이 없다면 독도 역시 한국의 땅이란 개념을 존재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역사의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현실을 볼 수 있고, 과거에 축척된 시간의 토대가 바로 현재라는 비가역적 속성을 만든 것이다. 역사가 있기에 북한이 우리의 적이고, 한편으로 우리의 겨레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전혀 모를 타인과 싸우는 것보다 형제와 싸울 경우 그 증오와 앙심이 심하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 싸울 경우 그 피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가끔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까운 친척조차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로 맺어진 일가는 천륜 그 자체이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을 오히려 물들여가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갈등은 역사적 흐름에서 시작하였기에 그 맥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이란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조선이란 이름은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조선을 찾기 위해 몸을 던진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부터 찾는다.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를 찾으면 그들이 원하던 것들을 알아갈 수 있다. 국조 단군을 연구한 학자들이 대부분 독립 운동가이고, 그들은 일제에 저항했다. 단군의 역사를 잃으면 조선의 혼을 모조리 잃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역사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신화의 존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신화적 존재가 진정한 역사적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중에서 단군의 존재는 사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조선과 조선의 후예, 우리 한국인은 늘 외세에 의해 침범당하고, 욕을 당한 존재이다. 최근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강제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성 착취 피해여성들의 피눈물은 역사가 아직 우리 곁에서 숨을 쉬기에 그들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잊으면 되풀이 된다.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나, 그런 일이 만일 과거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과의 전쟁은 특히 임진왜란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일제강점기도 있지만, 과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전쟁이 가장 컸다.

 

민속 문화적으로 민화나 속어 그리고 전해 내려온 구비전승문학조차 그런 점들이 숨어있다. 중국도 그렇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한중일 삼국간의 역사적 딜레마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막상 그 상황에 닥친 선조들은 어땠을까? 북한에서 제작한 도서를 국내에서 발간한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어보았다. 겨레고전문학선집 중 많은 사람들의 기록과 글이 있었고, 거기에 한국의 전래동화에도 나오는 <춘향전>이나 <흥부전> 같은 이야기도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서로 한 민족이었음을 알려주는 동기이다. 이산가족 상봉기사가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 부모형제자매 자식이 전쟁으로 서로 떨어져 70년 가까이 헤어지다 이제 만날 날이 다가오니 모두 백발의 머리와 주름이 깊게 페인 노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신세, 꿈에서라도 고향에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게 그나마 위안일까? 남북과의 교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족성과 역사성에 대한 우리의 숙제를 그나마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민족 가장 큰 위기 중에 하나인 임진왜란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우리도 그분의 업적을 크게 기리지만, 북한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 외, 곽재우 장군, 정문부, 고종후, 최경회, 고경명, 이정암 등 수많은 의병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와이프와 몇 달 전 같이 여행 겸 진주성을 방문했다. 진주박물관이 진주성 안에 있다. 진주성은 남강 옆에 있는 아름다운 성이나, 진주성의 전투로 수 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성민들이 모두 도살당했다. 이때의 참혹함이라 어떻게 말하랴?

 

의병들의 봉기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왜군에게 큰 방해거리였다. 이들이 벼슬을 바라거나 또는 공명심에 불타서도 아니다. 조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조선의 군왕을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안타까우면서도 뒤에 나온 해설자의 말처럼 조선은 조선민중의 국가가 아니라 군왕의 것이었다. 유학 특히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이 사대부의 가치란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보다 지배계급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이점만 내세운 것이다. 의병들은 그런 전형적인 사대부들의 감각을 보여주었다. 아니라면 곽재우처럼 다소 산신처럼 되고 싶다는 도교적 모습도 보여준다.

 

심지어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법력이 아주 높은 고승조차 그런 감정이 역력하다. 이정암의 경우 백성의 슬픔을 잘 드러난 것 같았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그의 활약을 선조실록에서 잘 다루어주지 않은 것 같다. 이정암의 기록을 보니, 한양수복 후 선조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이 다시 돌아오자, 다른 왕자의 집은 모조리 없어졌으나, 광해군의 집만 멀쩡했다고 한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다. 천심은 그러하다. 한양의 최고의 집인 왕궁이 모조리 불에 탔으나,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백성들에 대한 고통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인구는 약 416만이었으나, 전쟁 이후 인구가 약 152만으로 감소했다. 7년 동안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의 수를 생각하면 약 3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전화로 사라진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전쟁 당시의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죽음과 가까운 시간, 죽음을 넘어 전쟁 이후의 시간들까지 말이다. 아쉬운 일이나 대부분 자연도피나 전형적 성리학적 인간에 치중했다.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의병장으로 활약한 분들의 이야기인 점에서 양반중심사회의 조선인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이란 국가 더 나아가 민중이 왜적을 상대로 모두 합심하여 이겨낸 전쟁이다. 승리했지만, 그 피해는 막대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조차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호남의 입구인 진주성을 목숨 걸고 싸운 조선의 민중, 그리고 호남에서 왜적에 맞서 싸운 의병과 승병들, 사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크게 이긴 전투 중에 한산도대첩, 명량대첩을 생각할 것이다. 한산도대첩은 세계4대 해전에 들어가고, 명량대첩은 10척에 불과한 전선으로 수 십 배의 적을 물리친 승리이다.

 

명량대첩으로 패배하자 왜적들은 그 복수심을 품고 해남과 강진일대 민가를 습격하여 노략질을 했다. 마을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죽였다. 영광의 승첩 뒤에는 민간인들의 학살은 잊어지는 이야기뿐이다. <이충무공전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 조선민중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보았다. 의병장의 이야기에는 민중이 겪은 이야기가 부족해서 안타까웠다.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에서 본 조선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도 역시 그런 상황에서 지은 글이고,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그 힘든 상황을 이기기 위한 글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큰 위기는 사실 중국과 일본의 관계성에서도 보인다. 일본이 미국의 우방이고, 자본주의에 의한 자유주의 국가체계이므로 한국과 우방국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 개인보다 일본과 중국이란 큰 틀에서 보자면 일본이 더 싫다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쟁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세력은 조선인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다. 같이 저항하던 기록과 역사적 정신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다. 드라마 영화 <임진왜란 1592>을 보면서 한국과 중국이 합작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 중국이 어느 정도 임진왜란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유정이 고니시와 협상하여 시간을 벌 때, 난을 평정한 이여송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여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지로 무예가 뛰어난 그의 모습을 보여줬다. 평양성전투와 벽제관전투에서 이여송은 벽제관에 돌격하는 모습은 자못 영웅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 뒤 이여송이 진격하지 않고 더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깊이 슬퍼하는 모습을 매우 강조했다. 심지어 명나라황제가 이순신에게 준 9가지 보화를 일일이 화면으로 보여주는 모습도 있었다. 중국 명나라가 지원하여 나름 전략적으로 도와준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승리요인은 이순신 장군과 수군 그리고 의병장과 의병, 승병들이다. 조선의 민중이 있었기에 조선은 썩은 뿌리를 30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조선 조정에 서애 유성룡 선생 같은 분들이 모두 당상관 자리에 있었다면 희망이 있었지만, 현대 한국을 두고 특히 젊은 친구들이 헬-조선이라 부른다. Hell이란 지옥이 조선에 있다는 웃음이 나오는 슬픈 현실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 책의 의병장들은 그나마 났다. 이들은 고지식한 분들이지 적어도 꼰대는 아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 목숨조차 초개처럼 던졌으니 말이다. 어느 의병은 아버지가 왜적에게 죽자 목숨을 아까지 않고 싸웠고, 당상관까지 오르고 심지어 선조에게 술을 하사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나, 역시 전투 중에 순국했다.

 

옳은 행동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조선과 조선의 민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들이 고지식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내릴 수 없다. 일제에 대항하던 많은 조선의 민중들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활약이다. 항일투쟁정신에서 그들이 살던 1900년대 초에 그보다 300년이나 더 된 역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항일전쟁을 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같이 나누고 있었고, 그 마음이 아직도 이어져 간점에서 겨레라는 이름이 멀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위기의 순간, 아무리 미운 상대방이라도 합심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해도 합심의 순간, 서로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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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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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부터 나는 계속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해 비판적으로 글을 적어왔고, 게다가 박가분 씨의 책을 읽으면서 서평을 작성하여 그들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런 나에게 좋지 않은 덧글들이 달려왔으며, 그 중에 작성리뷰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덧글을 작성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대한 반론적 덧글이 논리적이지 못했다. 문맥과 어울리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이분법적 시선을 가졌다. 예스24에서 박가분씨의 <포비아 페미니즘>을 서평을 작성할 때 현대한국의 페미니즘 논리는 빈곤하거나 진실로 어려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 내지 거기에 매몰된 자 중에서 일부만 혜택이 있을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일부 페미니즘 단체에서 권력과 지위가 있는 여성이 독신보단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과 그들의 남편의 지위 역시 높다. 결국 권력자들의 이권으로 이어지고, 그들은 자신의 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지 세력을 모우는 방안으로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라 적었다. 그것에 대한 반론 덧글을 작성한 사람이 있었다. 본문과 전혀 전후맥락이 맞지 않은 논리로 들이대는 것도 문제지만, 제일 웃긴 사실은 나보고 엘리트여성에 대한 열등감이 있냐는 식으로 적은 것이다. 최근 어느 정도 변화할 것처럼 보이나, 남성이 지위와 재력이 있으면 여성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가정을 이루지만, 역으로 여성이 지위와 재력이 있으면 보통남성과 가정을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은 점이다.

 

이를 두고 열등감이란 표현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이런 논조를 말하는 본인은 가장 큰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내가 적은 글대로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은 남성과 상대할 때 남성의 권력과 지위를 제일 중요시하고, 그것이 없는 남성을 하대하는 점을 말이다. 결국 사람의 판단기준을 그렇게 인정했다면, 역으로 현재의 남성의 권력에 의지하는 여성의 심리가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열등감은 누구나 있을 수도 있고, 느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내가 문제점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페미니즘 진영논리의 이중성을 드러났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권력과 지위가 높으면,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악적인 존재고, 반대로 남성이 지위가 미천하고 가난하며, 멸시와 조롱으로 무시당해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결국 강자에 대해 자신들은 약자이니 거기에 대항한다고 하고, 반대로 약자인 경우 상당히 깔보는 것이다. 이중적 잣대논리는 바로 오늘날의 현실에서 사회적 문제에도 드러난다. 몰래카메라를 촬영해서 안 되고, 어떤 개인적 의도를 가진 고의적으로 보는 것도 안 된다. 이번 몰래카메라와 관련된 이슈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물품과 방법으로 몰래카메라를 촬영한 사실을 말이다. 그런다고 내가 몰래카메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고 범죄에 가담하고 공모했거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화장실에 용변을 보는 장면을 몰래 촬영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며, 게다가 그런 위생적이지 못한 장면을 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엽기이다. 성폭행범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여기며, 특히나 아동과 청소년 상대로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도 싸다고 여길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런 문제를 알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좋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러면 법적인 방법으로 그런 사람들을 처벌하고 단속하고, 시스템적으로 예방하는 게 맞다. 거기에 대한 대응이 당장 되지 않아 범죄와 무관한 사람을 몰래 촬영하여 피해를 줄 자격은 그 누구도 없다. 여성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 당사자도 아니고, 그런 잔재가 남으면 조금씩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피해의식이 남아있다고 여기는 부류가 많다. 물론 잘못된 인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은 그 피해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평생 고통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제3자가 나서서 거기에 대한 복수이란 명제로 남을 피해줄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지금 페미니즘의 문제는 바로 이런 이중적 요소이다. 진짜 살인을 하려거나 의도를 가지려면 여성을 폭행하거나 또는 성범죄를 저지른 특수한 사례가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전혀 무관한 길가의 행인이나 버스의 승객, 하다못해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 피해의 범주에 들어가면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은 다르다. 20188, 여성우월주의 집단사이트 워마드의 운영자가 경찰의 체포영장에 의해 출두해야 하는데, 정작 5월에 경찰쪽에서 알아볼 게 있어서 출두요구를 무시하고 해외로 갔고, 이제 범죄적 수사망으로 좁혀오자 자신은 피해자란 글을 남겼다.

 

법적인 투쟁을 위해 변호사 모금비까지 구하는 이 마당에 만일 이때까지 그들이 행하던 일을 본다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용납이 될까? 일베의 유일한 대항한 세력이라 했는데, 일베는 여성만 아니라 노인, 어린아이, 외국인, 지역적 차별과 온갖 패륜을 일삼았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악의적 루머와 조롱은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세월호 유가족이 단식투쟁하고 있을 때 그 앞에서 폭식투쟁을 했다. 일베는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조작된 여론세력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면 일베의 유일한 대항자라면 그런 국가권력을 대해 저항하는 것이 올바르고, 거기에 피해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답이다.

 

전혀 그런 것들은 없었고, 오히려 죄가 있든 없든 남자면 뭐든지 욕을 했다. 개인적으로 제일 나쁘다고 여긴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후 파면 당하자, 여자라서 대통령에서 쫓겨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박근혜가 갓근혜고, 최순실은 여사님이다. 탄핵정국에 청와대로 전화하여 박근혜에게 힘을 내라는 응원성 발언을 한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이 일베의 유일한 대항자일까? 2가지는 이미 이룬 셈이다. 일베와 유일하게 가장 패륜적인 행위를 한 점, 일베랑 같이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모두 그럴 것이라 여기지 않으나, 그것을 말리거나 정지하지 않았다. 계엄령을 내려 특수부대와 장갑차, 탱크를 내세워 군인들로 하여금 시민에게 총격을 하려고 했던 군부 쿠데타계획을 세우던 인간들이 박근혜의 주변인물이다.

 

그런 자가 대통령이란 사실이 끔찍한데,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하여 활동하는 사상이라 하는데, YH무역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시위할 때 살인적 진압으로 한 여성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억지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여공들의 피와 눈물을 뽑아 이속을 채운 한국의 권력자들이 계속 그런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부독재의 지원적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터부시되는 것은 박근혜와 연결이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노동자의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당사자에 대한 비판하지 않은 점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 논리와 무관하게 여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뭐든지 그들의 입장을 봐야 하지만, 현실은 약자가 약자일 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혹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많은 여성들이 핍박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민중 안의 피지배계층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욕만 채우려는 양반에 의해 목숨도 잃고, 종이 되며, 수탈은 일상이었다. 군역은 60까지고, 군납을 내지 못하면 집이 무너졌다. 군역에 복무하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환경이 좋지 않아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군역과 관련한 지금 매년 수백명의 군인들이 자살, 사고, 의문사로 생명을 잃는다. 이런 생명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 전사들은 매우 좋아한다. 공장과 공사장에서 산업재해로 죽는 남성, 구의역 지하철역에서 사고로 죽은 젊은 청년의 죽음은 슬픔과 애도의 대상이지 조롱거리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베나 워마드는 그들을 조롱했다. 내가 열 받는 것은 그들의 비정상적 행위도 있지만, 그보다 심한 것은 지식인 내지 엘리트, 진보인사들이 워마드의 행위를 두고 억지로 쉴드를 치는 행위다. 한남패치나 강남패치나 아무 죄 없는 남녀들이 신상정보가 까발려졌을 때, 그리고 그 행위를 한 인간이 워마드인데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남성을 공격한다는 부류가 여성도 공격한다. 이른바 흉자, 또는 명예자지는 여성이 여성의 편이 아닌 남성을 지지한 이유로 공격당하는 것이다. 진보 엘리트 내지 진영에서는 이런 일에 모른척하거나 아니면 여자가 했으니 먼저 검거를 당했다는 점이다. 최근 경찰청 발표에서 실제 범죄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검거비율을 보니 남성이 월등히 높았다. 물론 남성이 저지르고 있는 문제들이 많지만, 그런다고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수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당했다는 심리만 표출했다.

 

진보지식인들의 발언에서 가장 한심한 것은 어느 교수가 일베가 전국에 600만명이라 한 것이다. 대한민국 인구 5천만에서 남자가 2500만이고, 이중 인터넷이 가능한 인구는 1500만이다. 그런 인터넷 남성인구의 40%라면, 총선과 대선에서 어떻게 진보인사가 선출되겠는가?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보수세력은 거의 망했다고 볼 정도로 참패했다. 그러면 일베가 600만명이라고 한다면 자유한국당 외 모든 진보계열을 가진 정당을 빨갱이로 보는 사람들인데, 그 발언이 논리가 있다고 본인조차 의심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참 걱정이 되었다.

 

페미니즘 진영은 진보세력과 결탁되어 있는데, 진보세력이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발언에 취중하고, 어느 정확한 근거와 사실성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데, 이상한 논리나 집계가 정규화되지 않은 통계, 사실을 통해 자신의 논리가 먹히지 않으면 그저 감정적으로 잘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는 말을 한다. 여자니깐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잘해줘야 한다는 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이다. 사회성에서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사회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원인과 대안을 제시해야할 명문대 교수는 어느새 가부장제 타파보단 가부장적 제도의 잔재를 이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런 교수들은 최근에 페미니즘 도서를 계속 내며 수익원을 내거나 인지도를 올린다. 하지만 그들의 발언을 보면 논리성이 없다. 단순 편집성의 말만 아니라 전후맥락으로 봐도 맞지 않는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고칠 것은 고칠 것이다. 2010년 전후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고 공부할 때 내가 보던 책은 지금의 페미니즘과 전혀 달랐다. 미국 저명한 여성학자 메릴린 옐롬의 서적을 읽어보면서 그분은 남여간의 적대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로 이어진 역사적 사회적 검토하여 새로운 길을 찾자는 것이다. 결혼하여 자녀도 서너명 정도 가진 한 사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원저가 된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읽어도 남성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자이고, 서로 대등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 남자아이를 유린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애초에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여자주인공이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자신의 어린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어린아이를 두고 한남유충이란 표현과 어린아이 성기를 노출하는 사진을 올리고 조롱하고, 심지어 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계획하려는 인간이 정상인인가? 그런데도 현실의 진보엘리트들은 자신이 머문 이데올로기의 틀에 파묻혀 있다.

 

이런 시기에 오세라비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는 상당한 반항성을 주는 책이다. 알라딘에서 이 책이 나올 때 반응이 참으로 우스웠다. 오세라비 작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덧글이 있었다. 안티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이란 단체가 있는데, 나도 그들의 글을 보면 나름 논조가 있다고 봤지만, 뒤에 가서 점차 보수의 논리를 내세운 부분이 있었고, 오세라비 작가의 본명인 이영희 선생은 그런 부류와 다른 길을 걸었고, 전혀 상관도 없다. 그런데 읽지 않았는데, 안티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이란 글을 적은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블로그 글을 보니 여성향 BL에 대한 글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고 적어내린 것이다. 그밖에 깎아내린 글이 있었다. 어느 분은 이분이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의 구분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미 시몬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고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적은 내용도 있다. 어려운 책이라 나도 읽지 못했는데, 그 책을 그런 글을 적은 분이 적었을까? 그렇다면 <2의 성>에 대한 소견을 말하고 지적했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이 사람이 뭐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 사람 역시 책을 읽지 않았다. 사회연대노동포럼에서 활동하던 이영희 선생은 민주노총과 관련된 인물이었다.

 

민주노총, 진보세력과 노동운동을 하던 쪽이 아닌가? 이영희 선생은 여성운동과 관련하여 열린우리당 창시 당시 여성운동 관련 강의도 했고, 노동운동도 관련하여 활동했다. 사회연대노동포럼과 관련하여 사회주의자 사이트(http://socialist.kr/)에서 종종 소개된다. 그러면 이분이 진보성향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여성의 날 행사에 여성단체와 민주노총 같은 노동운동단체도 행사했을 때, 그분은 민주노총 쪽으로 참석했다. 그때 여성단체의 주요인사는 여성정치인 내지 거물급 인사였다.

 

보통의 여성이 아니라 권력자인 여성이었다. 비정규직이나 힘든 여건에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을 가진 여성단체가 여성의 발언이라고 말한다. 여성신문의 관련인사 중에 박근혜정부 당시 권력을 누린 자도 있고, 위안부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돈 100억에 넘기려 했던 사람도 있다. 여성단체가 과연 여성을 위한 존재인지 아닌지 의문이 간다. 오세라비 작가는 이런 문제도 지적했고, 내가 가장 절실히 마음을 느낀 것은 빈곤여성과 노인여성 그리고 미혼모였다. 미혼모들은 어려운 선택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모자라고 홀로 외롭게 아이를 위해 살아간다.

 

미혼모센터는 너무 열악하고, 제원을 한정적이며, 노숙인 여성들은 질병과 범죄에 노출되어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빈곤여성은 주로 노인들이며, 이들은 질병과 외로움 속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왜 이들에 대한 애민을 없는 것일까? 내가 처음 페미니즘 도서를 접할 때와 우연히 학부시절 여성학을 들었을 때, 내가 아는 여성학은 여성만이 아니라 빈곤과 어려움을 가진 가난한 사람, 노인, 어린이, 외국인, 장애인 등 사회적으로 어려운 모든 이들을 돌봐야 한다. 그런 사람 중에 50대 남성도 있다. 고독사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 중에 50대 남성이 제일 많다. 혼자 외롭게 차가운 방에서 절망아래 운명을 달리하는 그들은 얼마나 슬픈가?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세 모녀의 죽음은 우리사회에 얼마나 많은 아픔을 보여줬는가?

 

만일 여성이 더 많은 어려움 겪는다면 국가적으로 혹은 사회구성원 입장에서 그들을 위한 정책이나 방향을 옳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사람을 외면한 채 이분법적 시선으로 피해자는 뭐든지 불만을 말하고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언더 도그마적인 가치관은 우리가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진정한 사회적 약자마저 거론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어느 글을 남긴 사람은 이래 말했다.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구분하냐고 말이다. 이영희 선생은 자기 자시을 두고 페미니즘이 아니라 하지만, 다소 사회주의 내지 마르크스주의와 연계성이 강하다.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그렇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하면 남성들은 임금을 더 받을지 모르지만, 과중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산업재해를 당할 확률이 높고, 매년 산업재해 피해가 95% 이상이 남성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위험요소는 적으나 임금이 적고, 비정규직 처우가 매우 부당하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성적인 불평등도 당한다. 특히 마트나 식당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하는 그분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기반인 점에서 안타깝다. <4천원인생>이란 책에서 식당 이모의 삶을 보며,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을 존중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여겼다. 이들이 식당에서 일하는 이유는 여성이란 이유보단 경제적 상황이다. 경제적으로 상황이 되지 않았기에 일을 한다. 재벌의 가문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구의역의 청년노동자의 죽음이나 쇳물에 영혼조차 태워져버린 젊은 노동자의 죽음 역시 그렇다. 사회를 볼 때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을 두고 봐야지 연대를 이르며 진정한 불평등을 이길 수 있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불평등에 남성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중소기업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남성을 200충이라며 조롱한다. 이영희 선생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 대해 정확하게 거론하다.

 

여성운동 : 여성들의 즉각적인 필요와 관련된 실질적인 여성의 관심사에 중점을 둔다. 기존의 젠더관계에 반발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운동 : 여성의 종속문제에 반발, 여성해방, 양성평등과 관련한 전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가, 국가제도를 가부장적으로 분석하며,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캠페인을 주력한다.

 

가부장제도와 관련하여 남성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세상은 거의 끝나가고, 그것이 가능한 남성은 소수 10% 이내도 안 된다. 대부분의 남성은 혼자 가정을 책임을 질 수 없고, 아내와 같이 의논한다. 집안의 살림과 운영방침도 아내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지금의 페미니즘 진영 논리 아니 메갈리아 워마드의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남충이란 불리는 남성이 여성의 적이면, 처음부터 결혼을 할 이유가 없고, 결혼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결혼생활 전반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결혼하여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자신들이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동력을 얻어 가는가? 나는 워마드에 불만보단 진보지식인에 대한 불만이 높다. 이들은 겉으로 사회는 진보하고, 여성도 사회의 진보에 따라 권위를 상승해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면 모두 똑같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남성도 모두 다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더운 여름 일사병으로 쓰러질 정도인데도 힘겹게 일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비하하는 말로 암내충 냄져라고 한다. 내가 이런 말하는 부류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은 에어콘이 나오는 시원한 방에 차가운 물을 마실 것이다. 만일 전기와 수도가 터지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자는 건설노동자이다.

 

암내나는 냄져 아저씨들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Girls can do anything"이라면 더운 날 옥상에서 수도관을 고치는 일은 왜 하지 않은가? 진보지식인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최근 기사에선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운동도 있는데, 여성들이 1일 비소비보단 남성 1일 비노동이 더 위험하다. 하지만 안타깝게 그 비노동의 대상은 노동자들이고 각종 산업재해에 노출되고, 작업환경이 매우 최악이다. 냄져라고 불리며 멸시당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메갈리아 워마드 편들기가 진보운동이라 말하는 부류, 더 나아가 저명한 학자들의 생각은 이미 민중의 삶을 2번 짓밟는 것과 같다.

 

이영희 선생은 페미니스트 이전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성 이전에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이어야지 여성과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인간임을 포기하면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 그저 승냥이 같은 짐승일 뿐이다. 1990년대 말 페미니즘과 관련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페미니즘 연구가들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부정하는 것도 안티페미니즘이라 지칭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 부정하는 게 메갈리아적인 페미니즘이 되었다. 예전부터 메갈리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했지만, 당시 페미니즘과 관련된 알라딘 블로거들은 그걸 부정했다. 나보고 오히려 자신이 메갈리아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어린 남자아이의 성기가 필터링 없이 인터넷에 오르고, 방에서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에 칼을 대며 죽이고 말하는 부류가 옳은가? 그런 말을 한 분은 자신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잘 때 칼을 직접 찌르면 죽이고 싶다는 사진을 올리면 좋겠다. 그래야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어느 남성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분이 자신의 발언의 반성보단 오히려 누군가에게 욕을 했던 글을 캡쳐 후 거기에 대한 푸념하자, 편들어주는 식의 덧글보단 더 실천적이지 않은가 싶다.

 

여성이 사회적 불평등한 일을 겪어서도 안 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 어느 날, 나는 저녁 후 와이프하고 같이 식탁에서 술을 마시며, 결혼생활은 평등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신 대등해야 하고, 공평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것은 1/n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과 상황 그리고 조건에 따라 맞추어 가는 것이 바르다고 했다. 내가 10쌀 봉지를 들었으니 와이프에게 10의 쌀 봉지를 들라고 하는 게 맞지 않다. 대신 다른 것으로 서로 보완해가는 것이 부부생활의 시작이라 했다. 결혼생활 4개월째, 모든 것이 서로 맞지는 않으나, 내 생각이 내 자신만 아니라 상대방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같을 수가 없고, 부족하고 어려운 것도 있다. 연대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것들을 채워가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그게 사라졌다. 여자면 뭐든지 그래야 한다는 것은 너무 편향적이고 일방적이다. 신문기사에서 <이등병의 엄마>라는 연극을 한다는 내용을 봤다. 자신의 아들이 군에 간 후 얼마 뒤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자신들이 아들을 낳은 죄인이라 했다. 이들의 고통 속에 그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부류는 이들을 어떻게 여기는가? 이들은 여성이 아닌가? 어떤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진보라는 것은 사회적 문제를 두고 약자를 위해 계속 변혁해가는 운동이다. 이번 페미니즘 운동이라 말하는 워마드 사건과 관련하여 홍대몰카 사건에 대해 이들이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희생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홍대몰카 피해자의 사진을 올려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사생대회도 열었다. 그리고 유포자가 잡혀가자 여성이라 잡혔다고 말한다. 그래서 만일 여성이라 잡혀가서 부당하다고 여길 때, 그러면 몰래카메라로 충격 받고 상처 입은 그 누드모델의 입장은 뭐가 되는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아래 어느 개인이 받은 상처와 피해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라고 말하면 이미 논리를 틀어졌다. 그래서 오세라비 작가의 서적 말처럼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어긋난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진보지식인과 진영의 생각은 민중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녹색당 정치인이 워마드의 농성에 동조하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은 부당하다 했다. 그러면 이때까지 죄 없이 조롱당해야 했던 사람의 입장, 그리고 그 사람의 가족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의 논리로 진보진영에서 상당히 많은 입지를 굳히려 했지만, 이때까지의 사건과 그리고 노회찬 위원의 죽음으로 진보진영의 판세는 크게 바뀔 것이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진보진영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받을 것이고, 여성운동을 오랫동안 한 분들의 노력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으로 권인숙 교수님이 임명되었다. 그분은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위해 투신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으로 불리는 그 피해자로, 당시 독재와 싸우고, 노동자를 위해 그리고 여성인권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런 분들까지 피해보는 게 아쉽다. 어느 여성운동가 분이 나에게 덧글을 남기기를 그동안 원로여성운동가들의 노고가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으로 모두 무너질까 걱정된다고 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노동운동과 관계있고, 독재에 저항했다. 대표적 여성정치인으로 한명숙 전 총리와 심상정 위원이 있다. 여성이란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으로 노동자의 죽음을 비웃고 조롱하는 세력에 동조하는 것은 그들이 쌓아올린 탑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워마드 운영자가 경찰에 의해 조서를 꾸미고, 법적 대응을 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입장을 공지로 올렸다고 하는데, 그동안 아카이브 된 기록이 이미 인터넷 도처에 널려있기에 과연 그들의 논리가 법정에서 우세할까? 그들의 말처럼 법관이 여성이면 좋겠다. 판사가 여성이고, 그 판사가 판결을 내려야 납득할까? 윤리의식을 버리고 도덕적 선을 넘은 그들에게 무슨 비전이 있을까?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 흘러가면 진정 피해를 입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물론 이 책을 그들이 제대로 읽을 것이라 여기지 않으며, 내 글을 보며 생각을 고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세상은 별개로 돌아간다. 그때는 누가 과연 도태될 것인가? 아무도 모르나, 세상물정과 민중의 세상사는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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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2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8-22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세라비님 저랑 페친이고, 사민주의자죠.

만화애니비평 2018-08-22 21:00   좋아요 2 | URL
히히 저도 페친했다죵
 

<인랑>을 보시고 많은 분들이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망하는 부류를 보면 1번째 먼저 오시이 마모루의 <인랑>을 먼저 본 사람이다. 2번째 영화배우 캐스팅의 문제이다. 한효주씨의 동생이 군부대에서 저지른 문제를 두고, 그 대처방안이 잘못된 것, 강동원씨의 조부가 친일파 관련된 문제, 정우성씨가 이슬람난민과의 문제에 봉착한 점이다. 그리고 3번째는 조금 더 다른 부류인데, 한효주씨가 연기를 너무 못한 점이다. 1번째에 대한 생각은 다소 난해한 점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감독 작품들을 본 입장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달리한다. 우선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일본에서 상당 진보적 성향에 속한다.

 

원작 <인랑>은 전공투시대의 실패를 두고 만든 이야기다. 일본 1960년대 말, 좌파운동의 마지막이며, 이른바 야스다강당 사건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일본 유명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보면 초반에 학생운동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일본 산업이 활성화된 시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적 요소가 대학가를 돌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 민중의 혁명이 실패하면서 다소 현실도피적, 유미주의적, 쾌락적 성향이 작품(영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속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냉소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일본 옴 진리교 사건의 주동자 몇 명이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실 옴 진리교가 일으킨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이미 실행되기 몇 년 전에 일어날 것이라 예언할 것 같은 작품이 있었다.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가 그렇다. 영화 아키라를 보면 테츠오는 길거리에 흔하게 널린 불량청소년 중에 하나이다. 그가 우연히 실험대상이 되어 몸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를 목격한 사이비교주가 테츠오를 마치 구세주인 아키라라 부르며, 뒤에 따르는 광신도들이 열광하기 시작한다.

 

테츠오는 세상의 혼돈에서 구할 구세주도 아니고, 그런 생각도 없고, 아무 의미 없이 그저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만 가진 청소년이다. 힘에 대한 갈구가 스스로를 파괴하여 구원의 길은 이미 사라졌다. 테츠오를 보고 아키라라고 따르던 사이비교주와 광신도들은 일련의 사건으로 몰살한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고, 전공투 세대가의 몰락은 일본 내에서 자본주의의 실패와 사회주의의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자본주의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때 당시의 기억을 지우지는 못한 채 마음 속 깊이 함구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이름의 권력 앞에 인간은 그저 한 개인으로 남을 뿐이고, 개인의 선택에 큰 의미는 없으며, 국가라는 권력 앞에 반기를 드는 순간 애니메이션 <인랑>은 무차별적인 기관총의 사격으로 이어진다. 자기 앞에서 사람이 죽고, 혹은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향하여 무차별적 사격을 가하는 인랑의 모습에서 인간은 자기 안이 감정을 가지는가? 가지지 않은가? 감정은 원래 있는데, 있는 것이 어느 순간 없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은폐되는 것인지 주인공은 스스로에 대한 고민에 빠지나, 막상 그는 감정이 우선이 아닌 국가라는 권력에 속하게 된다. 인간은 권력과 감정에서 어디에 치중하는가? 권력을 자기 손에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이란 이름 앞에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SF 애니메이션 <인랑>은 인간이란 존재가 국가라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다시금 보여주며,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는 그저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망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인랑>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단지 원작과 이번 작품의 공통적 조건은 국가가 상당히 위기상황에 놓여있고, 그 원인은 전쟁의 여파이다. 애니메이션은 전후 복구중인 일본사회이고, 후자는 남북통일 이후 경제적 위기에 놓인 한국의 상황이다. 전자의 테러리스트나 후자의 테러리스트의 모두 경제적 조건, 사회적 모순에 의해 국가에 반항하나, 전자는 순수한 국가의 적대세력이라면, 후자는 공안세력과 특기대세력 간의 권력다툼으로 만들어진 프락치적인 테러리스트이다.

 

시나리오에서 <인랑>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관점은 특기대가 국가에 저항하는 세력 섹트와의 전쟁이 아니다. 그 전쟁에서 인간은 사랑(인간)을 택하는가? 아니면 권력(감시와 처벌)을 택하는가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에서 당연히 비극적 전개를 선택한다. 시나리오 흐름에서 세력적 구도에서 정부와 섹트는 애니메이션은 작품 내 설정으로 작용하지 인물의 흐름에 큰 간섭을 하지 않는다. 이미 그 간접은 작품이 시작하면서부터 부여하였기에 그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영화의 경우 섹트를 차출하려 했지만, 섹트 그 자체가 공안부서와 일반경찰 권력세력의 연합에 의해 가공된 세력이다.

 

영화 <인랑>은 섹트라는 조직을 섬멸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섹트를 통해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의 첩보전쟁이 주가 되었다. 여기서 강동원씨가 맡은 특기대원은 여고생 집단사살사건으로 심리적으로 불안한 점, 그리고 섹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린 소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자폭한 모습을 본 점이다. 공안에서 어린 소녀의 유품을 강동원씨에게 주며, 그녀의 언니에게 건네 달라고 한다. 겉으로는 모른 척하고 있으나, 이미 특기대는 모두 알고 있었다. 한효주씨가 겉으로는 연애적 감각으로 접근하였으나 이내 공안세력과 결합된 프락치였다.

 

프락치를 죽일지 말지, 아니면 살려 보내야 할지 말지에 강동원씨의 고민이 시작한다. 강동원씨가 선택한 것은 인간이다. 단지 그 뿐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시라니오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나, 제일 중요한 사실은 강동원씨가 늑대와 인간의 사이에서 방황할 때 그는 인간을 택했다. 특기대의 가면은 인간이란 사실을 감추기 위한 도구라고 하나, 사실 인랑부대는 인간이 늑대의 탈을 쓴 게 아니라 늑대가 인간이 탈을 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인간이냐 늑대냐의 이분적인 갈림길보다 감독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마지막 뒷부분에 강동원씨와 정우성씨가 서로 특기대 무장을 하면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몸을 날리는 난투극에서 두 사람은 갑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투구는 착용하지 않았다. 몸은 늑대지만, 머리는 인간이었던 점이다. 정우성씨는 부하는 소중하게 다루지만, 그 소중함이란 인간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비싼 자동차나 비싼 물건을 가진 것처럼 다룬다. 도구라는 관점이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다. 하지만 비싼 물건은 다시 사는 것도 어렵고, 잃어버리면 다시 복구하기도 어렵다.

 

정우성씨는 늑대 인랑부대에서 늑대와 왕이다. 그는 늑대들의 우두머리이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통제하는 이다. 그는 인랑이 늑대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본인조차 늑대였다. 늑대가 키우는 것은 늑대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우성씨와 강동원씨의 주먹싸움은 결국 인간인가? 아니면 늑대인가에서 인간을 선택했다. 늑대와 인간의 중간 상태였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싸웠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강동원이 느낀 인간의 감정을 보며, 그동안 숨긴 자신의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영화 <인랑>을 보면서 나쁜 평을 날리지 않았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다소 날카로운 성향을 가졌기에 그가 보기에 영화의 전반적인 다소 미끄럽지 못한 흐름,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연기부족의 한효주씨, 성장을 했지만 주연급으로 다소 부족한 강동원씨에 대한 아쉬움은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 <인랑>을 저급하게 취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명작은 사실 <인랑>보단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쪽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작품이고, 대중적으로 다가가면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쪽이나 혹은 <시끌별 녀석들>이 나을지도 모른다.

 


실사영화화 된 작품 중에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가 미국 영화시장에서 나오고, 스칼렛 요한슨씨가 주연을 맡았다. 화려한 그래픽과 액션은 볼거리지만, 시나리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너무 뻔한 결과였다. 일본에서 좋아하는 여학생과 남학생이 있으면 우산을 칠판에 우산을 그려놓을 후 우산대 양쪽으로 서로의 이름을 적는 장난이 있다. 그런 요소를 하나의 실마리로 넣고,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이 납치당한 소녀이며, 사이보그화된 그녀의 눈빛이 살아생전 눈빛과 같다는 너무 식상한 방식이 더 진부적인 요소로 봤다.

 

영화 <인랑>은 신경은 많이 썼지만, 부자연스러움이 문제였다. 그런다고 시나리오 세계관에서 남북통일 이후 사회적 시스템 변화에 대한 주목성에서 정우성씨가 예전에 출연한 <강철비>보다는 못하다. 결국 프락치로 등장한 한효주씨가 얼마나 강동원씨를 잘 농락할 수 있는지, 강동원씨는 거기에 얼마나 일부러 넘어가주는 방향성의 문제였다. 남산타워의 아름다운 전경과 서울의 야경은 아름답게 집어넣었다. 서울의 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강동원씨와 한효주씨의 로맨스적 요소를 무리하게 넣었다는 점이다. 첫 만남은 라이트하게 거기서 끝내고, 몇 차례 만나면서 더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하나하나 영상촬영 기법과 하다못해 미쟝센적인 요소에서 화면 앵글만 아니라 소품조차 매우 신경 쓴 점이 보인다강동원씨의 자리를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체 게바라 평전>이 놓여있다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위선과 가면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문학적으로 보여준 러시아 대문호이다.체 게바라는 혁명의 상징남미혁명가이다그는 의대생으로 엘리트 코스를 살아갈 수 있지만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물론 볼리비아에서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그의 이상은 거기서 무너졌다체 게바라를 두고 후대의 평가는 많으나적어도 그가 원한 세상은 빈곤에 허덕이지 않고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원했다.

 

강동원씨의 관물함에 도스프예프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체 게바라 평전>이 놓여있는 것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특히 체 게바라의 인생은 능동적이고 타인과 교감적인 삶이나, 인랑부대의 특기대부원은 그런 삶과 전혀 연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한효주씨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서울타워서 강동원씨를 만날 때 그녀는 공안부대의 덫으로 나간다. 이때 그녀가 가지고 간 서적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다. <타인의 고통>을 읽으면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고통은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 피사체로서 객관적인 이미지로 불과하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보다는 하나의 미디어로서 소비하는 것이라고 평한다.

 

최근 논란이 되는 빈곤포르노라는 단어가 있다. 포르노가 적나라하고 인간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성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만을 나타내는 단어만은 아니다. 빈곤포르노는 가난을 인간성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구경거리로 변모시킨다. 스펙타클화 되버린 인간의 삶에서 타인이 겪어야 할 부조리와 고통은 어느새 하나의 구경거리 내지 이미지화 되어버린 소비에 불과한 것이다. 한효주씨는 어린 남동생의 병원비, 그리고 공안의 협박에 의해 움직이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 죄 없는 강동원씨를 테러리스트 협력자로 만들고, 특기대세력 자체를 숙청하는데 협조하고 있다.

 

프락치로 활동하던 한효주씨의 과거친구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한효주씨에 대해 비난한다. 타인을 이용하고 버린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아냐고 말이다. 영화는 겉과 속이 서로 다른 남녀, 그리고 그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안부서가 특기대에게 역습을 당해 무너지고, 그 과정에서 강동원씨가 보여준 액션은 볼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국가권력과 감시에서 조율당한 인간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에 대한 모습보다 그저 영화흐름에 편중하는 게 편할 것이다.

 

강동원씨는 한효주씨가 프락치란 사실을 알고 접근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어난 인간의 감정이 옳고 그런 것인지를 정우성씨와 대결에서 말한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다. 인간적 요소도 중요하다. 강동원씨는 자폭으로 죽은 소녀, 5년 전 집단발포로 학살당한 여고생, 그리고 한효주씨의 현재 상황이 정당하냐고 묻는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존재로서 생명과 인권을 중시하는 요소이고, 이에 반하는 정우성씨는 테러리스트라면 모조리 죽여도 된다는 식이다. 도덕이란 값어치는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성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권력자의 논리와 시대적 흐름에서 생긴 이데올로기가 도덕이며, 도덕을 초월한 윤리는 엉뚱한 생각이 되는 것이다.

 

강동원씨가 <인랑>을 촬영하기 전에 출현한 영화로 <1987>이 있다. 1987년의 30년 뒤인 2017, 아직도 군사독재의 그늘과, 일제잔재와 한국전쟁의 비극은 우리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았다. 고문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박처장은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가족이 돌보던 하인에 의해 모든 가족들이 몰살당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억압받은 민중들은 친일파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지주에 대한 증오도 같이 품고 있었다. 기질이란 단순히 발현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기나 상황이 어떤 트리거에 의해 발동되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양이 일정순간 도달하면 질적으로 변질된다. 그런 점에서 <1987>에서 이한열 민주열사 배역을 맡은 강동원씨의 조부 논란은 의미 없다고 여긴다. 친일파의 문제는 청산하는 게 맞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옳다. 문제는 당시 친일세력의 후손들이 아직도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점이다. 외도의 주인은 대표적인 친일파의 후손이고, 친일파세력들은 호위호식하며 지난 선조의 잘못을 두고 반성하기보단 오히려 독립군 후손들을 비웃는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문제이지, 지난 과거로 통해 후예가 아무런 이유 없이 비난받는 것은 문제다.

 

<인랑>이란 영화는 어찌보면 영화 그 자체로서 평가받는 것보다 영화 외적인 요소에 더 많은 개입이 있는지 모른다. 임중경 역할을 강동원씨보단 차라리 정우성씨가 맡는 편이 좋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정우성씨가 맡은 훈련소장의 역할 역시 훌륭했다. 영화는 전에 만든 <밀정>보단 못했다. <밀정>에서 공유의 연기력이 그래 뛰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송강호씨가 주요배역이었기에 잘 정리되었고, 특별출현 이병헌씨의 연기 역시 빛을 발했다. <밀정>의 시나리오는 잘 흘러가는 물처럼 보였지만, <인랑><밀정>에 비해 시나리오 전개가 너무 서툴렀다.

 

영상미나 미쟝센, 카메라 앵글로 보이는 인물간의 관계성과 상황은 잘 잡아내더라도 영상서사는 결국 영상으로 서사를 보여주는 매체이다. 서사 자체가 부자연스러웠기에 제대로 조립되지 않았다. 무장드론을 이용한 공격에서 SF요소에서 많은 공을 들인 것은 보인다. 결국 영화는 샷과 샷, 그리고 작은 롱 테이크들이 조합된 편집영상이다. 연기력의 부족과 시나리오 흐름에서 부족하면 분명 영화로는 부족한 요소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족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다(대신 한효주씨의 연기력은 너무 부족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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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05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영화 리뷰에서는 마지막 난투극에서 얼굴이 드러나도록 연출한 것은 배우 강동원과 정우성의 외모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영화 리뷰보다 더 깊이있는 만화애니비평님의 영화 해석에 감사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8-06 08:53   좋아요 2 | URL
두분이 잘생기고 멋진 배우란 사실은 알지만, 사실 영화 120분 넘게 계속 강동원씨와 정우성씨의 멋진 모습은 잘 봤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을 보인 게 외모라는 리뷰어의 생각에 그저 웃음만 나오네요.

늑대의 왕은 정우성씨고, 늑대의 무리 즉 조직의 무리에서 배신자는 죽음만 기달립니다. 늑대의 왕인 정우성씨가 강동원씨를 스나이퍼를 이용하여 제거할 수 있었으나. 정우성씨 나름대로 늑대의 왕으로서 그동안 늑대들을 도구를 떠나 소중한 부하이기에 그 부하에 대한 모습이 늑대와 인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갈등하는 모습이 결투라고 봅니다.

정우성씨는 한효주씨나 강동원씨 모두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한효주씨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이 아닌 동생의 안위가 중요했고, 동생을 위해 프락치를 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한국전쟁 당시 먹기위해 인민군 내지 국군의 세력에 들어간 민중이 생각났습니다. 그 민중을 두고 늑대는 국가는 잡아먹고, 인간인 강동원씨는 놓아주길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생각보다 늑대가 괜찮은 늑대입니다. 한효주씨의 친구가 특기대에 협력하자 2억을 송금한 모습에서 적어도 약속을 잘 지키니깐요.

레삭매냐 2018-08-06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비평이었습니다.

원작도 신작도 못 봤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감독이 디테일에까지 신경을 썼지만, 시나리오 전개
상의 문제점과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커버할 순 없었나
보네요.

그나저나 영화 손익분기점이 600만 명이라고 하는데,
관객수 조회를 해보니 89만 명이네요. 완성도로 보나
산업상으로 보나 폭망으로 흘러 가는군요.

다시 한 번 원작 애니를 리메이크 하면 망한다는 속설
이 입증되는게 아닌가 싶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8-06 1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들 작품의 세계관보단 외적인 요소에 치중하는게 맹점이지 않았나 합니다.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없지만, 해외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 팬이라면 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18-08-06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시이 마모루의 인랑만을 보았습니다. 그 작품도 어둡고, 불친절하며 대중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강동원씨를 주인공으로 엄청난 예산을 들여 영화화 된다고 했을때 어떻게 상업화될지 궁금하였는데 결국은 ‘상업적‘이지는 못한 모양이네요. 하도 혹평 일색이라 보기 무서웠는데 그래도 이 리뷰를 읽으며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8-06 17:45   좋아요 2 | URL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 <공각기동대>를 보면서 그렇게 시간과 돈이 아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결론이 전형적인 일본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세로 마무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적인 관계성을 내파하는 본작과는 다른 전혀 다른 방향과 결말 의미까지 망가졌습니다.
이번 영화 인랑은 부족한 게 많지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앵글과 기법 그리고 강동원이란 인물로 보는 인간과 늑대에 대한 관계성에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느낀 그런 디스토피아에서 어떻게 새로운 길로 가는가인데, 한효주씨의 연기만 빼면 나름 좋았다고 봅니다..
 
좀비 사회학 - 현대인은 왜 좀비가 되었는가
후지타 나오야 지음, 선정우 옮김 / 요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좀비사회학>을 읽으면서 생각이 난 사람이 있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였다. 아즈마 히로키는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자로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따라 이른바 서브컬처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쓰는 분이다. 그분이 생각나는 이유는 아즈마 히로키 교수가 강의하던 학교 중에 하나가 도쿄공업대학이었다. 공업대학에 철학교수가 있다는 점도 재미있지만, 적어도 그가 철학자로서 대부분 철학자들이 보고 있는 거시적인 세계 내지 정치적인 현황에 매몰된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와 다르게 보이는 세계에 관심을 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실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어느 사회적 흐름에 있어서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을 할 때 그 원인이 되는 토대가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마르크스가 붕괴했다고 믿는 분들은 많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붕괴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역사적 유물론적인 고찰에서 어떤 사회적 흐름과 동시에 정치적 흐름이 물질적 조건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질양전환의 변증법 관계에서 인류의 세계는 단순히 정치적인 조건에 의해 운동하는 게 아니라 그 정치적 조건을 달성하게 된 사회적 변화에 포커스를 두어야 하는 점이다. <좀비사회학>이란 도서 역시 그런 점을 역시 간파했다.

 

20세기 소비에트 붕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은 political, 즉 정치적인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인 조건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경영인적인 마인드가 지배하는 경제적인 구조에서 시작되는 변형된 자유주의 논리이다. 문제는 왜 이런 자유와 좀비가 뒤섞이는 것일까? 저자 후지타 나오야는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좀비는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아즈마 히로키가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프랑스 철학자가 저술한 도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본은 국경은 초월했다.”

 

이 말은 자본주의의 승리는 단순히 국가와 이념을 넘어 경계선 모두 허물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자본의 승리는 결국 자본이 침식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팝아트 예술가 중에 앤디 워홀이 제시한 작품 중 코카콜라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 있다. 코카콜라는 남녀노소 빈부와 관계없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제품이다. 자본주의란 결국 자본의 상품적 가치가 있다면 모두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도래는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의문을 던진 것이다.

 

너도 나도 구분 없이 모두가 어느 하나에 뭉칠 수 있으면 멋진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나오야는 지그문트 바우만이란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개념을 많이 빌려왔다. 문화의 비판적 관점에서 현대인의 수용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선 사회비평의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오야의 주관점은 좀비라는 존재는 자본주의와 관계성이다. 좀비의 개념이 시초로 된 것은 아프리카 부두교의 주술에서이다.

 

좀비는 지능도 없이 주술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 난폭하거나 사납지도 않으며 오히려 아무런 문제없이 노예처럼 일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좀비들이 20세기에 나날이 변화한다. 점차 무섭고 과격하며, 가공할 정도의 위력과 파괴력, 그리고 때로는 인간과 동일화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성이 올라간다. 좀비란 존재는 공격의 대상에서 어느 순간 연애와 동경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신카레아>라는 작품을 보면 남자주인공은 좀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학교의 어느 미소녀가 좀비가 되어 그에게 찾아온다.

 

그가 좀비에 대한 동경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나, 사회는 영구적 존재이다. 영구적 존재는 사회의 연속성만 아니라, 사회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일 수 있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정신적으로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이들이 많다. 남자주인공이 좀비에 대한 동경심을 품은 것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부재에서 시작했다. 불안정한 가족관계, 죽었으나 죽지 않은 좀비, 남자주인공이 보는 좀비영화는 잔인한 것들이나 막상 그가 접하는 좀비는 로맨스에 가깝다.

 

좀비가 슈팅게임 바이오 하저드에서 어느 순간 연애물로 변환된 것이다. 좀비가 두려운 존재가 된 계기를 나오야가 잘 설명하듯이 그것은 자본주의 관계가 깊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자면 전 자본주의 사회, 즉 농업경제가 활성화된 봉건사회에서 공업적 기술은 수공업 내지 메뉴팩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인간사회는 각자의 씨족, 부족, 마을단위의 커뮤니티를 가지며 각자 생활을 영위했다. 근대사회에 오면서 인간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을 지켜보면 불과 20세기 한국에서 마을산파가 아이를 받고, 마을에서 혼례를 치루며, 장례식은 마을주민에 의해 묘에 묻힌다.

 

21세기 넘어오면서 장례문화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변모되고, 장례의 주관은 마을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체계(병원 내지 전문장례식장)에 이해 움직이고, 장례절차가 커뮤니티적 관계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지정하고 거기에 따라 기업이 움직이는 자본의 형태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기존사회의 인간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시스템이란 사실이다. 인간의 존재가 주관적 능동적 존재에서 객관적 수동적 존재로 변화한 것이다. 좀비는 그런 과정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20세기 초반, 공장에서 많은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단으로 움직이고, 시계에 맞추어 일을 하고,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기계적 부속품이었다. 어느 누군가 사라지면 시계부속품처럼 누가 대신 톱니바퀴로 되어 돌아가고, 그렇게 공장 및 사회경제는 움직이고 있었다. 좀비는 일만 하는 노동자처럼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졌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발달되고, 자본주의적 소비형태는 계속 퍼져나가면서 인간의 욕망은 커져갔다. 자신과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행복을 찾기보단 사회적 흐름과 미디어에 의해 인간은 움직이고, 이미지가 매개가 되어 사회적 관계성을 이루는 스펙타클(spectacle)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스펙타클은 인간의 실질적 모습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이미지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이고, 이미지란 신문, 영화, 방송, 인터넷 등 각종 매체에 의해 쏟아져 나온다. 인간을 움직이는 이미지의 세계가 움직이는 세상이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논리가 숨은 자본주의적 형태이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이미지가 기호이고, 기호가 이미지란 말처럼, 이미지의 세계는 실질적 존재를 숨기고, 그것을 대체할 허구의 존재가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좀비란 허상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거기서 다시 실질세계로 돌아가는 이율배반적인 갈등에서 등장하는 현상이다.

 

한국 영화 중 <부산행>을 보면 좀비는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이나, 그 괴물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괴물이 되고, 다시 그 괴물에 의해 인간이 공격당해 괴물이 증식되는 것은 무한으로 뻗어져 나가는 좀비화의 모습이다. 좀비에 대한 개념은 일정한 틀이나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증식과 팽창에 의해 이어져가고, 그것은 새롭게 재생산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좀비의 문제는 인간이 동일성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동일성에 대한 거부감이 숨어 있다. 바우만이 말한 액체적인 모더니즘은 근대화란 이름은 인간에게 이성과 논리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동일성을 부여한 것이고, 근대의 계몽이란 함은 칸트가 원했던 알을 스스로 깨고 등장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주입(계몽)하는 이념적 폭력이 숨은 것이다.

 

20188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기대작 중에 하나인 <진격의 거인> 3기가 방영하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이 처음 나올 때 작품 내의 물질적, 환경적, 지리적 요건에서 거인의 존재는 인구조절을 위한 도구라 봤다. 작중에서 농지가 많지 않고, 성벽 밖은 사막이나 초원 같이 작품을 재배할 수 없는 불모지가 많이 펼쳐진 점이다. 3기에서 왕족과 귀족이 회의하는 장면에서 백성에게 식량을 하사하는데, 그때 1번의 배급으로 남은 비축식량은 60% 정도라고 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최하위층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그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전복으로 이어진다.

 

19172월 러시아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 그리고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러시아 국민들이 불만을 품으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국가권력세력이 피지배계급인 하층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가 붕괴되는 일은 프랑스대혁명 같은 일을 봐도 알 수 있다. 국가시스템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다른 것을 내세워야 한다. 거인을 제거하고 견제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조사병단이 거인에 대한 비밀을 풀어 가는데 오히려 국가권력가들은 불편해 하는 모습이 나온다.

 

거인이 원래 거인이 아니라 인간을 조작했다면 왜 같은 인간끼리 싸워야 하는 것인가? 영화 <배틀 로얄>을 보면 1반의 50명의 학우들을 서로 싸우고 죽인다.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국가적 시스템의 문제지만, 목숨을 건 싸움에서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삶에 대한 목적이다. 시스템의 오류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적으로 내몰아야 했으며, 적대적 인간관계는 개인적인 영역보다 사회적 요소에 따라 많이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최저임금제로 사회적 문제가 많다. 어느 부부가 최저임금을 받고 1달 동안 받을 수 있는 금액은 400만원이 되지 않는다.

 

생활비와 공납금, 만일 집을 사기 위한 대출 내지 월세로 들어가 산다면 그들은 절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올라 어느 한쪽의 노동으로 생계가 가능하지 않으면 2세 출산이 불가능하다. 2세 출산의 문제는 단순히 인구감소가 아니라 경제적 퇴보로 등장한다. 산업구조는 소비자에게 팔릴 수 있는 생산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재생산적 조건은 인구의 유지이다. 시장이 축소되면 기업은 사라지고, 기업이 사라지면 경제적 구조가 축소된다. 국가 내 기업 활동이 적어지면 세수가 적어지고, 공업 내지 기술이 퇴보되면서 국가는 점점 위축된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를 보는 시선이 그래 좋지 않은 점도 많다. 20세기 중반까지 농업사회에서 후반으로 가면서 공업사회로 되고, 21세기는 서비스산업으로 변했다. 서비스 산업은 소매점 내지 음식점 등과 같은 소상공인들이 많이 몰려있다. 그들의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임금을 제 가격에 주는 것조차 버거운 일들이 많다. 소상공인이나 비정규직 임금노동자들은 서로 힘든 처지에 있는 사회적 약자이나 서로 헐뜯고 싸워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좀비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적으로 여긴 존재가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에트의 붕괴는 자유경제진영과 공산진영의 이분화로 되어 있었고, 그 이전에는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 세력에 의한 2차 세계대전도 있었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왕조국가 내지 봉건사회가 존재했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화가 사무라이 문화이다. 사무라이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과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권좌를 잡기까지의 기간이다. 이때의 일본은 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어느 가문에 속하여 그 가문의 영광과 몰락까지 같이 이어간다. 군주가 죽으면 할복하는 경우도 많고, 영민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상대방 세력에게 흡수된다. 그 영주가문이 자신들의 이름이 되고, 함께 살아간다.

 

현대의 일본은 사무라이나 그들의 영주는 없고, 그들을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무라이는 일본 역사적인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문화산업 중에 하나로 변모되었다. 사무라이는 없지만, 사무라이의 국가 일본이란 말처럼 소속되지 않고, 오히려 분산된 그들이 매체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좀비화란 것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과거 어느 공동체에 소속되는 게 아니라 비정형화된 곳에 끼워 맞춰가는 것이라 본다. 현실의 세계는 자신이 있을 곳이 없기에 가상의 존재성에서 정체성을 획득하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과 가상의 간극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은 고립과 갈등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심을 찾기를 원하나, 이미 사회는 국가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결국 사회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되었다는 의미는 모든 것에 대한 분리와 같은 말이다. 현대사회가 복잡다양한 양상은 띄는 것은 맞지만, 어느 한 개인의 삶은 매우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삶이다. 우리의 삶은 과거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직장과 가정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게다가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식당이나 가게조차 정해진 운영시간이 있었다.

 

현재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24시간 물건을 소비할 수 있으며, 전국에 펼쳐진 24시간 편의점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 업무도 원격제어로 가능하고, 사무적 공간은 사무실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능해졌다. 자신의 삶이 구분할 수 없이 뒤섞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서로간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고, 그 모호성에서 자신을 드러나기 위해 어떤 사물이나 행위, 매체에 집착하게 된다. 좀비들의 특성을 보면 집착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집착이란 함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수단 중에 하나이고, 아이러니적으로 모두와 똑같이 튀고 싶지 않으나, 한편으로 모두에게 주목이나 선망을 받고 싶은 존재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형태도 드러낸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고 싶거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정투쟁은 보편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 그 개인 개인은 서로 다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어느 한 개인은 그저 군단 속에 1명의 병사에 불과하다. 때로는 단합된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고 싸워야 하는 배틀 로얄의 세계이다. 역설적으로 나(와 같은 많은 사람)란 존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배틀 로얄의 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좀비란 무한히 증식되어가는 인간의 군중심리이나, 한편으로 내부에서는 언제가 갈등이다. 좀비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화된 인간이 느끼는 단절감과 이질감의 심리적 상태를 잉여적으로 뿜어낼 수 있는 배출구이기 하다. 정신적 노마디즘, 육체는 제한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정신적 세계는 계속 유랑하고 있는 슬픈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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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진보세력 내지 지식인, 정치인들이 걸러먹은 이유를 다시금 확인헸다.

삼계탕집에 몸을 보신하기 위해 점심 때 삼계을 먹으러 왔다.

옆에 회사 다른 직원의 생각은 알 수 없다

까데기! 흔히 부산사투리로 맥주나 소주병을 담은 상자를 들고 옮기는 일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50대 아저씨가 더우 날에 그 까데기 일을 하고 있었다.

들어올때 3박스 나갈 때 4박스

단지 새병과 다 마신 병의 차이다. 그분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37도가 오르는 날에 더운 낮여름에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자신이 아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모습들을...

사회적 시스템이란 바로 이런 것인데, 이런 분들을 조롱하고 우습게 보는

인간들을 쉴드치는 모습에 그저 답답하다


더운 여름 나의 할아버지의 100주년 탄생이라는 작은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2018년 6월(음력), 그때가 할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난지100년째라고

전 1918년 조선의 민중이 일제에 억압받는 그 치욕

나의 큰할할버지는 일제에 의한 노동징용에 끌려가 1946년 광복절 다음해

돌아가시고, 그해 11월(음력 10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났다,

어느 순간 모르나 약 10년 넘게 나의 할아버지만 아니라더라도

징용에 끌려간 할아버지의 형님에게도 나는 술잔을 올리며 절을 올린다.


518묘역을 가니 광주의 정신은 이미 오래전 315 혁명만이 아니라 동학혁명을 계승했다.

동학혁명은 농민이 직접 몸으로 느낀 부조리에 대한 투쟁이다. 그때 제대로 현실을 알게 해준

것이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라고 한다. 우리집안 대대로 아니 문중 대대로 

정약용 선생과 벗어날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운명에서 지난 과거가 단순 과거가 아니란 사실에

그저 한탄만 외칠뿐이다. 윤한봉 선생도 민중의 삶을 알아갈 때 다산의 정신을 두고

다시 마음에 새겼다 한다. 


늦은 진짜 아는 분의 SNS에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올라왔다.

노의원님이 7월 23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5월 23일에 하직했다.

나는 23일이 슬픈 날이 될 것 같다 했다. 그때 그분이 답이 많이 사람들이 그렇게

여긴다고 했다. 그 답글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왜 세상은 좋은 사람은 먼저 데리고 갈까? 그건 뒤따라갈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을

뇌리 속 깊게 남겨주기 위해 그런 게 아닐까? 많은 할일이 있는데 먼 가 버린 

노씨 성을 가진 그들이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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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7-25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노회찬 분향소 다녀왔습니다. 쓸쓸하네요. 서울 오시면 술 한 잔 합시다..

만화애니비평 2018-07-25 11:32   좋아요 0 | URL
으크크...서울 언제 갈지 고민입니다....메인 몸이니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가더라도 날 좀 풀리고 생각해봅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