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을 보시고 많은 분들이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망하는 부류를 보면 1번째 먼저 오시이 마모루의 <인랑>을 먼저 본 사람이다. 2번째 영화배우 캐스팅의 문제이다. 한효주씨의 동생이 군부대에서 저지른 문제를 두고, 그 대처방안이 잘못된 것, 강동원씨의 조부가 친일파 관련된 문제, 정우성씨가 이슬람난민과의 문제에 봉착한 점이다. 그리고 3번째는 조금 더 다른 부류인데, 한효주씨가 연기를 너무 못한 점이다. 1번째에 대한 생각은 다소 난해한 점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감독 작품들을 본 입장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달리한다. 우선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일본에서 상당 진보적 성향에 속한다.
원작 <인랑>은 전공투시대의 실패를 두고 만든 이야기다. 일본 1960년대 말, 좌파운동의 마지막이며, 이른바 야스다강당 사건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일본 유명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보면 초반에 학생운동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일본 산업이 활성화된 시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적 요소가 대학가를 돌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 민중의 혁명이 실패하면서 다소 현실도피적, 유미주의적, 쾌락적 성향이 작품(영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속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냉소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일본 옴 진리교 사건의 주동자 몇 명이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실 옴 진리교가 일으킨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이미 실행되기 몇 년 전에 일어날 것이라 예언할 것 같은 작품이 있었다.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가 그렇다. 영화 아키라를 보면 테츠오는 길거리에 흔하게 널린 불량청소년 중에 하나이다. 그가 우연히 실험대상이 되어 몸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를 목격한 사이비교주가 테츠오를 마치 구세주인 ‘아키라’라 부르며, 뒤에 따르는 광신도들이 열광하기 시작한다.
테츠오는 세상의 혼돈에서 구할 구세주도 아니고, 그런 생각도 없고, 아무 의미 없이 그저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만 가진 청소년이다. 힘에 대한 갈구가 스스로를 파괴하여 구원의 길은 이미 사라졌다. 테츠오를 보고 ‘아키라’라고 따르던 사이비교주와 광신도들은 일련의 사건으로 몰살한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고, 전공투 세대가의 몰락은 일본 내에서 자본주의의 실패와 사회주의의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자본주의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때 당시의 기억을 지우지는 못한 채 마음 속 깊이 함구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이름의 권력 앞에 인간은 그저 한 개인으로 남을 뿐이고, 개인의 선택에 큰 의미는 없으며, 국가라는 권력 앞에 반기를 드는 순간 애니메이션 <인랑>은 무차별적인 기관총의 사격으로 이어진다. 자기 앞에서 사람이 죽고, 혹은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향하여 무차별적 사격을 가하는 ‘인랑’의 모습에서 인간은 자기 안이 감정을 가지는가? 가지지 않은가? 감정은 원래 있는데, 있는 것이 어느 순간 없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은폐되는 것인지 주인공은 스스로에 대한 고민에 빠지나, 막상 그는 감정이 우선이 아닌 국가라는 권력에 속하게 된다. 인간은 권력과 감정에서 어디에 치중하는가? 권력을 자기 손에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이란 이름 앞에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SF 애니메이션 <인랑>은 인간이란 존재가 국가라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다시금 보여주며,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는 그저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망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인랑>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단지 원작과 이번 작품의 공통적 조건은 국가가 상당히 위기상황에 놓여있고, 그 원인은 전쟁의 여파이다. 애니메이션은 전후 복구중인 일본사회이고, 후자는 남북통일 이후 경제적 위기에 놓인 한국의 상황이다. 전자의 테러리스트나 후자의 테러리스트의 모두 경제적 조건, 사회적 모순에 의해 국가에 반항하나, 전자는 순수한 국가의 적대세력이라면, 후자는 공안세력과 특기대세력 간의 권력다툼으로 만들어진 프락치적인 테러리스트이다.
시나리오에서 <인랑>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관점은 특기대가 국가에 저항하는 세력 섹트와의 전쟁이 아니다. 그 전쟁에서 인간은 사랑(인간)을 택하는가? 아니면 권력(감시와 처벌)을 택하는가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에서 당연히 비극적 전개를 선택한다. 시나리오 흐름에서 세력적 구도에서 정부와 섹트는 애니메이션은 작품 내 설정으로 작용하지 인물의 흐름에 큰 간섭을 하지 않는다. 이미 그 간접은 작품이 시작하면서부터 부여하였기에 그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영화의 경우 섹트를 차출하려 했지만, 섹트 그 자체가 공안부서와 일반경찰 권력세력의 연합에 의해 가공된 세력이다.
영화 <인랑>은 섹트라는 조직을 섬멸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섹트를 통해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의 첩보전쟁이 주가 되었다. 여기서 강동원씨가 맡은 특기대원은 여고생 집단사살사건으로 심리적으로 불안한 점, 그리고 섹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린 소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자폭한 모습을 본 점이다. 공안에서 어린 소녀의 유품을 강동원씨에게 주며, 그녀의 언니에게 건네 달라고 한다. 겉으로는 모른 척하고 있으나, 이미 특기대는 모두 알고 있었다. 한효주씨가 겉으로는 연애적 감각으로 접근하였으나 이내 공안세력과 결합된 프락치였다.
프락치를 죽일지 말지, 아니면 살려 보내야 할지 말지에 강동원씨의 고민이 시작한다. 강동원씨가 선택한 것은 인간이다. 단지 그 뿐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시라니오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나, 제일 중요한 사실은 강동원씨가 늑대와 인간의 사이에서 방황할 때 그는 인간을 택했다. 특기대의 가면은 인간이란 사실을 감추기 위한 도구라고 하나, 사실 인랑부대는 인간이 늑대의 탈을 쓴 게 아니라 늑대가 인간이 탈을 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인간이냐 늑대냐의 이분적인 갈림길보다 감독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마지막 뒷부분에 강동원씨와 정우성씨가 서로 특기대 무장을 하면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몸을 날리는 난투극에서 두 사람은 갑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투구는 착용하지 않았다. 몸은 늑대지만, 머리는 인간이었던 점이다. 정우성씨는 부하는 소중하게 다루지만, 그 소중함이란 인간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비싼 자동차나 비싼 물건을 가진 것처럼 다룬다. 도구라는 관점이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다. 하지만 비싼 물건은 다시 사는 것도 어렵고, 잃어버리면 다시 복구하기도 어렵다.
정우성씨는 늑대 인랑부대에서 늑대와 왕이다. 그는 늑대들의 우두머리이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통제하는 이다. 그는 인랑이 늑대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본인조차 늑대였다. 늑대가 키우는 것은 늑대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우성씨와 강동원씨의 주먹싸움은 결국 인간인가? 아니면 늑대인가에서 인간을 선택했다. 늑대와 인간의 중간 상태였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싸웠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강동원이 느낀 인간의 감정을 보며, 그동안 숨긴 자신의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영화 <인랑>을 보면서 나쁜 평을 날리지 않았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다소 날카로운 성향을 가졌기에 그가 보기에 영화의 전반적인 다소 미끄럽지 못한 흐름,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연기부족의 한효주씨, 성장을 했지만 주연급으로 다소 부족한 강동원씨에 대한 아쉬움은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 <인랑>을 저급하게 취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명작은 사실 <인랑>보단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쪽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작품이고, 대중적으로 다가가면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쪽이나 혹은 <시끌별 녀석들>이 나을지도 모른다.
실사영화화 된 작품 중에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가 미국 영화시장에서 나오고, 스칼렛 요한슨씨가 주연을 맡았다. 화려한 그래픽과 액션은 볼거리지만, 시나리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너무 뻔한 결과였다. 일본에서 좋아하는 여학생과 남학생이 있으면 우산을 칠판에 우산을 그려놓을 후 우산대 양쪽으로 서로의 이름을 적는 장난이 있다. 그런 요소를 하나의 실마리로 넣고,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이 납치당한 소녀이며, 사이보그화된 그녀의 눈빛이 살아생전 눈빛과 같다는 너무 식상한 방식이 더 진부적인 요소로 봤다.
영화 <인랑>은 신경은 많이 썼지만, 부자연스러움이 문제였다. 그런다고 시나리오 세계관에서 남북통일 이후 사회적 시스템 변화에 대한 주목성에서 정우성씨가 예전에 출연한 <강철비>보다는 못하다. 결국 프락치로 등장한 한효주씨가 얼마나 강동원씨를 잘 농락할 수 있는지, 강동원씨는 거기에 얼마나 일부러 넘어가주는 방향성의 문제였다. 남산타워의 아름다운 전경과 서울의 야경은 아름답게 집어넣었다. 서울의 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강동원씨와 한효주씨의 로맨스적 요소를 무리하게 넣었다는 점이다. 첫 만남은 라이트하게 거기서 끝내고, 몇 차례 만나면서 더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하나하나 영상촬영 기법과 하다못해 미쟝센적인 요소에서 화면 앵글만 아니라 소품조차 매우 신경 쓴 점이 보인다. 강동원씨의 자리를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체 게바라 평전>이 놓여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위선과 가면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문학적으로 보여준 러시아 대문호이다.체 게바라는 혁명의 상징, 남미혁명가이다. 그는 의대생으로 엘리트 코스를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물론 볼리비아에서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이상은 거기서 무너졌다. 체 게바라를 두고 후대의 평가는 많으나, 적어도 그가 원한 세상은 빈곤에 허덕이지 않고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원했다.
강동원씨의 관물함에 도스프예프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체 게바라 평전>이 놓여있는 것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특히 체 게바라의 인생은 능동적이고 타인과 교감적인 삶이나, 인랑부대의 특기대부원은 그런 삶과 전혀 연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한효주씨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서울타워서 강동원씨를 만날 때 그녀는 공안부대의 덫으로 나간다. 이때 그녀가 가지고 간 서적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다. <타인의 고통>을 읽으면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고통은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 피사체로서 객관적인 이미지로 불과하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보다는 하나의 미디어로서 소비하는 것이라고 평한다.
최근 논란이 되는 빈곤포르노라는 단어가 있다. 포르노가 적나라하고 인간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성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만을 나타내는 단어만은 아니다. 빈곤포르노는 가난을 인간성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구경거리로 변모시킨다. 스펙타클화 되버린 인간의 삶에서 타인이 겪어야 할 부조리와 고통은 어느새 하나의 구경거리 내지 이미지화 되어버린 소비에 불과한 것이다. 한효주씨는 어린 남동생의 병원비, 그리고 공안의 협박에 의해 움직이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 죄 없는 강동원씨를 테러리스트 협력자로 만들고, 특기대세력 자체를 숙청하는데 협조하고 있다.
프락치로 활동하던 한효주씨의 과거친구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한효주씨에 대해 비난한다. 타인을 이용하고 버린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아냐고 말이다. 영화는 겉과 속이 서로 다른 남녀, 그리고 그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안부서가 특기대에게 역습을 당해 무너지고, 그 과정에서 강동원씨가 보여준 액션은 볼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국가권력과 감시에서 조율당한 인간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에 대한 모습보다 그저 영화흐름에 편중하는 게 편할 것이다.
강동원씨는 한효주씨가 프락치란 사실을 알고 접근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어난 인간의 감정이 옳고 그런 것인지를 정우성씨와 대결에서 말한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다. 인간적 요소도 중요하다. 강동원씨는 자폭으로 죽은 소녀, 5년 전 집단발포로 학살당한 여고생, 그리고 한효주씨의 현재 상황이 정당하냐고 묻는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존재로서 생명과 인권을 중시하는 요소이고, 이에 반하는 정우성씨는 테러리스트라면 모조리 죽여도 된다는 식이다. 도덕이란 값어치는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성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권력자의 논리와 시대적 흐름에서 생긴 이데올로기가 도덕이며, 도덕을 초월한 윤리는 엉뚱한 생각이 되는 것이다.
강동원씨가 <인랑>을 촬영하기 전에 출현한 영화로 <1987>이 있다. 1987년의 30년 뒤인 2017년, 아직도 군사독재의 그늘과, 일제잔재와 한국전쟁의 비극은 우리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았다. 고문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박처장은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가족이 돌보던 하인에 의해 모든 가족들이 몰살당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억압받은 민중들은 친일파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지주에 대한 증오도 같이 품고 있었다. 기질이란 단순히 발현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기나 상황이 어떤 트리거에 의해 발동되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양이 일정순간 도달하면 질적으로 변질된다. 그런 점에서 <1987>에서 이한열 민주열사 배역을 맡은 강동원씨의 조부 논란은 의미 없다고 여긴다. 친일파의 문제는 청산하는 게 맞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옳다. 문제는 당시 친일세력의 후손들이 아직도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점이다. 외도의 주인은 대표적인 친일파의 후손이고, 친일파세력들은 호위호식하며 지난 선조의 잘못을 두고 반성하기보단 오히려 독립군 후손들을 비웃는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문제이지, 지난 과거로 통해 후예가 아무런 이유 없이 비난받는 것은 문제다.
<인랑>이란 영화는 어찌보면 영화 그 자체로서 평가받는 것보다 영화 외적인 요소에 더 많은 개입이 있는지 모른다. 임중경 역할을 강동원씨보단 차라리 정우성씨가 맡는 편이 좋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정우성씨가 맡은 훈련소장의 역할 역시 훌륭했다. 영화는 전에 만든 <밀정>보단 못했다. <밀정>에서 공유의 연기력이 그래 뛰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송강호씨가 주요배역이었기에 잘 정리되었고, 특별출현 이병헌씨의 연기 역시 빛을 발했다. <밀정>의 시나리오는 잘 흘러가는 물처럼 보였지만, <인랑>은 <밀정>에 비해 시나리오 전개가 너무 서툴렀다.
영상미나 미쟝센, 카메라 앵글로 보이는 인물간의 관계성과 상황은 잘 잡아내더라도 영상서사는 결국 영상으로 서사를 보여주는 매체이다. 서사 자체가 부자연스러웠기에 제대로 조립되지 않았다. 무장드론을 이용한 공격에서 SF요소에서 많은 공을 들인 것은 보인다. 결국 영화는 샷과 샷, 그리고 작은 롱 테이크들이 조합된 편집영상이다. 연기력의 부족과 시나리오 흐름에서 부족하면 분명 영화로는 부족한 요소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족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다(대신 한효주씨의 연기력은 너무 부족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