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사회학 - 현대인은 왜 좀비가 되었는가
후지타 나오야 지음, 선정우 옮김 / 요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좀비사회학>을 읽으면서 생각이 난 사람이 있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였다. 아즈마 히로키는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자로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따라 이른바 서브컬처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쓰는 분이다. 그분이 생각나는 이유는 아즈마 히로키 교수가 강의하던 학교 중에 하나가 도쿄공업대학이었다. 공업대학에 철학교수가 있다는 점도 재미있지만, 적어도 그가 철학자로서 대부분 철학자들이 보고 있는 거시적인 세계 내지 정치적인 현황에 매몰된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와 다르게 보이는 세계에 관심을 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실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어느 사회적 흐름에 있어서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을 할 때 그 원인이 되는 토대가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마르크스가 붕괴했다고 믿는 분들은 많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붕괴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역사적 유물론적인 고찰에서 어떤 사회적 흐름과 동시에 정치적 흐름이 물질적 조건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질양전환의 변증법 관계에서 인류의 세계는 단순히 정치적인 조건에 의해 운동하는 게 아니라 그 정치적 조건을 달성하게 된 사회적 변화에 포커스를 두어야 하는 점이다. <좀비사회학>이란 도서 역시 그런 점을 역시 간파했다.

 

20세기 소비에트 붕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은 political, 즉 정치적인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인 조건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경영인적인 마인드가 지배하는 경제적인 구조에서 시작되는 변형된 자유주의 논리이다. 문제는 왜 이런 자유와 좀비가 뒤섞이는 것일까? 저자 후지타 나오야는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좀비는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아즈마 히로키가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프랑스 철학자가 저술한 도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본은 국경은 초월했다.”

 

이 말은 자본주의의 승리는 단순히 국가와 이념을 넘어 경계선 모두 허물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자본의 승리는 결국 자본이 침식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팝아트 예술가 중에 앤디 워홀이 제시한 작품 중 코카콜라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 있다. 코카콜라는 남녀노소 빈부와 관계없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제품이다. 자본주의란 결국 자본의 상품적 가치가 있다면 모두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도래는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의문을 던진 것이다.

 

너도 나도 구분 없이 모두가 어느 하나에 뭉칠 수 있으면 멋진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나오야는 지그문트 바우만이란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개념을 많이 빌려왔다. 문화의 비판적 관점에서 현대인의 수용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선 사회비평의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오야의 주관점은 좀비라는 존재는 자본주의와 관계성이다. 좀비의 개념이 시초로 된 것은 아프리카 부두교의 주술에서이다.

 

좀비는 지능도 없이 주술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 난폭하거나 사납지도 않으며 오히려 아무런 문제없이 노예처럼 일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좀비들이 20세기에 나날이 변화한다. 점차 무섭고 과격하며, 가공할 정도의 위력과 파괴력, 그리고 때로는 인간과 동일화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성이 올라간다. 좀비란 존재는 공격의 대상에서 어느 순간 연애와 동경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신카레아>라는 작품을 보면 남자주인공은 좀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학교의 어느 미소녀가 좀비가 되어 그에게 찾아온다.

 

그가 좀비에 대한 동경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나, 사회는 영구적 존재이다. 영구적 존재는 사회의 연속성만 아니라, 사회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일 수 있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정신적으로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이들이 많다. 남자주인공이 좀비에 대한 동경심을 품은 것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부재에서 시작했다. 불안정한 가족관계, 죽었으나 죽지 않은 좀비, 남자주인공이 보는 좀비영화는 잔인한 것들이나 막상 그가 접하는 좀비는 로맨스에 가깝다.

 

좀비가 슈팅게임 바이오 하저드에서 어느 순간 연애물로 변환된 것이다. 좀비가 두려운 존재가 된 계기를 나오야가 잘 설명하듯이 그것은 자본주의 관계가 깊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자면 전 자본주의 사회, 즉 농업경제가 활성화된 봉건사회에서 공업적 기술은 수공업 내지 메뉴팩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인간사회는 각자의 씨족, 부족, 마을단위의 커뮤니티를 가지며 각자 생활을 영위했다. 근대사회에 오면서 인간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을 지켜보면 불과 20세기 한국에서 마을산파가 아이를 받고, 마을에서 혼례를 치루며, 장례식은 마을주민에 의해 묘에 묻힌다.

 

21세기 넘어오면서 장례문화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변모되고, 장례의 주관은 마을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체계(병원 내지 전문장례식장)에 이해 움직이고, 장례절차가 커뮤니티적 관계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지정하고 거기에 따라 기업이 움직이는 자본의 형태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기존사회의 인간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시스템이란 사실이다. 인간의 존재가 주관적 능동적 존재에서 객관적 수동적 존재로 변화한 것이다. 좀비는 그런 과정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20세기 초반, 공장에서 많은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단으로 움직이고, 시계에 맞추어 일을 하고,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기계적 부속품이었다. 어느 누군가 사라지면 시계부속품처럼 누가 대신 톱니바퀴로 되어 돌아가고, 그렇게 공장 및 사회경제는 움직이고 있었다. 좀비는 일만 하는 노동자처럼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졌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발달되고, 자본주의적 소비형태는 계속 퍼져나가면서 인간의 욕망은 커져갔다. 자신과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행복을 찾기보단 사회적 흐름과 미디어에 의해 인간은 움직이고, 이미지가 매개가 되어 사회적 관계성을 이루는 스펙타클(spectacle)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스펙타클은 인간의 실질적 모습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이미지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이고, 이미지란 신문, 영화, 방송, 인터넷 등 각종 매체에 의해 쏟아져 나온다. 인간을 움직이는 이미지의 세계가 움직이는 세상이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논리가 숨은 자본주의적 형태이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이미지가 기호이고, 기호가 이미지란 말처럼, 이미지의 세계는 실질적 존재를 숨기고, 그것을 대체할 허구의 존재가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좀비란 허상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거기서 다시 실질세계로 돌아가는 이율배반적인 갈등에서 등장하는 현상이다.

 

한국 영화 중 <부산행>을 보면 좀비는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이나, 그 괴물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괴물이 되고, 다시 그 괴물에 의해 인간이 공격당해 괴물이 증식되는 것은 무한으로 뻗어져 나가는 좀비화의 모습이다. 좀비에 대한 개념은 일정한 틀이나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증식과 팽창에 의해 이어져가고, 그것은 새롭게 재생산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좀비의 문제는 인간이 동일성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동일성에 대한 거부감이 숨어 있다. 바우만이 말한 액체적인 모더니즘은 근대화란 이름은 인간에게 이성과 논리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동일성을 부여한 것이고, 근대의 계몽이란 함은 칸트가 원했던 알을 스스로 깨고 등장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주입(계몽)하는 이념적 폭력이 숨은 것이다.

 

20188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기대작 중에 하나인 <진격의 거인> 3기가 방영하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이 처음 나올 때 작품 내의 물질적, 환경적, 지리적 요건에서 거인의 존재는 인구조절을 위한 도구라 봤다. 작중에서 농지가 많지 않고, 성벽 밖은 사막이나 초원 같이 작품을 재배할 수 없는 불모지가 많이 펼쳐진 점이다. 3기에서 왕족과 귀족이 회의하는 장면에서 백성에게 식량을 하사하는데, 그때 1번의 배급으로 남은 비축식량은 60% 정도라고 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최하위층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그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전복으로 이어진다.

 

19172월 러시아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 그리고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러시아 국민들이 불만을 품으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국가권력세력이 피지배계급인 하층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가 붕괴되는 일은 프랑스대혁명 같은 일을 봐도 알 수 있다. 국가시스템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다른 것을 내세워야 한다. 거인을 제거하고 견제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조사병단이 거인에 대한 비밀을 풀어 가는데 오히려 국가권력가들은 불편해 하는 모습이 나온다.

 

거인이 원래 거인이 아니라 인간을 조작했다면 왜 같은 인간끼리 싸워야 하는 것인가? 영화 <배틀 로얄>을 보면 1반의 50명의 학우들을 서로 싸우고 죽인다.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국가적 시스템의 문제지만, 목숨을 건 싸움에서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삶에 대한 목적이다. 시스템의 오류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적으로 내몰아야 했으며, 적대적 인간관계는 개인적인 영역보다 사회적 요소에 따라 많이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최저임금제로 사회적 문제가 많다. 어느 부부가 최저임금을 받고 1달 동안 받을 수 있는 금액은 400만원이 되지 않는다.

 

생활비와 공납금, 만일 집을 사기 위한 대출 내지 월세로 들어가 산다면 그들은 절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올라 어느 한쪽의 노동으로 생계가 가능하지 않으면 2세 출산이 불가능하다. 2세 출산의 문제는 단순히 인구감소가 아니라 경제적 퇴보로 등장한다. 산업구조는 소비자에게 팔릴 수 있는 생산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재생산적 조건은 인구의 유지이다. 시장이 축소되면 기업은 사라지고, 기업이 사라지면 경제적 구조가 축소된다. 국가 내 기업 활동이 적어지면 세수가 적어지고, 공업 내지 기술이 퇴보되면서 국가는 점점 위축된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를 보는 시선이 그래 좋지 않은 점도 많다. 20세기 중반까지 농업사회에서 후반으로 가면서 공업사회로 되고, 21세기는 서비스산업으로 변했다. 서비스 산업은 소매점 내지 음식점 등과 같은 소상공인들이 많이 몰려있다. 그들의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임금을 제 가격에 주는 것조차 버거운 일들이 많다. 소상공인이나 비정규직 임금노동자들은 서로 힘든 처지에 있는 사회적 약자이나 서로 헐뜯고 싸워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좀비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적으로 여긴 존재가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에트의 붕괴는 자유경제진영과 공산진영의 이분화로 되어 있었고, 그 이전에는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 세력에 의한 2차 세계대전도 있었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왕조국가 내지 봉건사회가 존재했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화가 사무라이 문화이다. 사무라이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과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권좌를 잡기까지의 기간이다. 이때의 일본은 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어느 가문에 속하여 그 가문의 영광과 몰락까지 같이 이어간다. 군주가 죽으면 할복하는 경우도 많고, 영민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상대방 세력에게 흡수된다. 그 영주가문이 자신들의 이름이 되고, 함께 살아간다.

 

현대의 일본은 사무라이나 그들의 영주는 없고, 그들을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무라이는 일본 역사적인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문화산업 중에 하나로 변모되었다. 사무라이는 없지만, 사무라이의 국가 일본이란 말처럼 소속되지 않고, 오히려 분산된 그들이 매체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좀비화란 것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과거 어느 공동체에 소속되는 게 아니라 비정형화된 곳에 끼워 맞춰가는 것이라 본다. 현실의 세계는 자신이 있을 곳이 없기에 가상의 존재성에서 정체성을 획득하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과 가상의 간극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은 고립과 갈등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심을 찾기를 원하나, 이미 사회는 국가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결국 사회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되었다는 의미는 모든 것에 대한 분리와 같은 말이다. 현대사회가 복잡다양한 양상은 띄는 것은 맞지만, 어느 한 개인의 삶은 매우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삶이다. 우리의 삶은 과거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직장과 가정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게다가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식당이나 가게조차 정해진 운영시간이 있었다.

 

현재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24시간 물건을 소비할 수 있으며, 전국에 펼쳐진 24시간 편의점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 업무도 원격제어로 가능하고, 사무적 공간은 사무실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능해졌다. 자신의 삶이 구분할 수 없이 뒤섞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서로간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고, 그 모호성에서 자신을 드러나기 위해 어떤 사물이나 행위, 매체에 집착하게 된다. 좀비들의 특성을 보면 집착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집착이란 함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수단 중에 하나이고, 아이러니적으로 모두와 똑같이 튀고 싶지 않으나, 한편으로 모두에게 주목이나 선망을 받고 싶은 존재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형태도 드러낸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고 싶거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정투쟁은 보편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 그 개인 개인은 서로 다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서 어느 한 개인은 그저 군단 속에 1명의 병사에 불과하다. 때로는 단합된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고 싸워야 하는 배틀 로얄의 세계이다. 역설적으로 나(와 같은 많은 사람)란 존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배틀 로얄의 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좀비란 무한히 증식되어가는 인간의 군중심리이나, 한편으로 내부에서는 언제가 갈등이다. 좀비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화된 인간이 느끼는 단절감과 이질감의 심리적 상태를 잉여적으로 뿜어낼 수 있는 배출구이기 하다. 정신적 노마디즘, 육체는 제한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정신적 세계는 계속 유랑하고 있는 슬픈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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