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 임진왜란에 조국을 지킨 아홉 의병장 작품집 겨레고전문학선집 9
곽재우 외 8인 씀, 오희복 옮김 / 보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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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보수정권이 몰락하고, 다시 진보적 정권이 수립되었다. 물론 학문적으로 또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아직도 보수정권이나, 앞전의 10년은 수구정권 내지 더 나아가 관료주의 정권이라 말하여도 다름이 없다. 정권의 차이는 있지만, 제일 많은 차이점을 생각나게 만든 것은 바로 대북관계이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볼 것인가? 소비에트연방인 20세기 말 붕괴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찾아 사회주의국가로 세상을 호령하려던 중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진짜 세상을 호령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관점은 사회주의, 경제적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실 자본주의가 21세기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 같은 말은 국가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 위한 슬로건에 불과하다. 북유럽사회 특히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국가는 아직 왕가가 존재한다. 심지어 영국의 경우 여왕의 권력이 막강하다. 그러나 영국은 자유주의국가이고, 북유럽 다른 국가 역시 수정사회주의로 만들어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국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좌우논쟁이 한국에서 얼마나 학문적으로 낙후되었는지 다른 국가에 비해 얼마나 잘 적용되지 않았는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국가분단의 아픔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우리 세포에 각인된 공포심이라 말할 수 있다. 군사정권이 통치할 때 프랑스나 독일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은 정상적이었다. 학문의 영향에서 프랑스의 파리대학이나 사범대학, 독일의 수많은 대학교들이 그런 책들을 읽어도 무방했고, 오히려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발달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고, <공산당선언>을 읽는 것은 간첩죄로 바로 체포되어 남산 밑에 있는 건물지하에 끌려가 고문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북한이란 존재는 그만큼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 더 나아가 증오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도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보고 가야 하는 것인가? 최근 통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이 점차 옅어져 간다. 어릴 적 배운 동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곡이 있다. 꿈에서도 통일이라는 그 노래, 곡을 들어보면 참으로 아름다고 순수한 곡이다. 노래와 같은 통일이 되려면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되어야 가능하다. 만일 전쟁을 할 경우 국토의 대부분 모두 쓸모없는 토지로 변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국내산지에 나무가 없어서 심각한 지경이었다. 소나무를 열심히 식재하여 한국에서 소나무는 흔한 나무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산과 마을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축하공연으로 동요 <고향의 봄>을 어느 소년이 불렀다.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선율은 모든 사람들의 넋을 잃을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다. <고향의 봄>은 한국전쟁 이전, 한국인이 아직도 조선의 후예란 이름을 가질 때 나온 노래다. 물론 조선이라 국가적 통치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으나, 그래도 조선인이 있었다.

 

통일이 되려면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한쪽은 한국, 한쪽은 북조선,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고종이 지은 대한제국의 뿌리에서 시작되고, 북조선은 조선이란 한국 마지막 왕조국가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역사는 그저 흘러간 것이라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부지런히 하는 이유는 외교적 문제와 국제적 관계에서 역사의 정통성을 내세우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 한국역사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만일 독도가 일본 땅이란 말을 듣고 발끈하면 그것만큼 코미디가 없다.

 

처음부터 조선의 역사가 없었다면 독도의 역사도 없다. 지리적인 조건조차 역사의 기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것이 존재해도 그 존재성에 대한 인식론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인식조차 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 논리일지도 모르나, 독도란 실체를 우리 대부분 직접적으로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독도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지만, 영상과 지도에 의해 구분되어 진다. 영상이란 허구적 이미지 속에 우리는 진실성을 부여한다. 역사성이 없다면 독도 역시 한국의 땅이란 개념을 존재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역사의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현실을 볼 수 있고, 과거에 축척된 시간의 토대가 바로 현재라는 비가역적 속성을 만든 것이다. 역사가 있기에 북한이 우리의 적이고, 한편으로 우리의 겨레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전혀 모를 타인과 싸우는 것보다 형제와 싸울 경우 그 증오와 앙심이 심하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 싸울 경우 그 피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가끔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까운 친척조차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로 맺어진 일가는 천륜 그 자체이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을 오히려 물들여가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갈등은 역사적 흐름에서 시작하였기에 그 맥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이란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조선이란 이름은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조선을 찾기 위해 몸을 던진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부터 찾는다.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를 찾으면 그들이 원하던 것들을 알아갈 수 있다. 국조 단군을 연구한 학자들이 대부분 독립 운동가이고, 그들은 일제에 저항했다. 단군의 역사를 잃으면 조선의 혼을 모조리 잃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역사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신화의 존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신화적 존재가 진정한 역사적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중에서 단군의 존재는 사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조선과 조선의 후예, 우리 한국인은 늘 외세에 의해 침범당하고, 욕을 당한 존재이다. 최근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강제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성 착취 피해여성들의 피눈물은 역사가 아직 우리 곁에서 숨을 쉬기에 그들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잊으면 되풀이 된다.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나, 그런 일이 만일 과거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과의 전쟁은 특히 임진왜란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일제강점기도 있지만, 과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전쟁이 가장 컸다.

 

민속 문화적으로 민화나 속어 그리고 전해 내려온 구비전승문학조차 그런 점들이 숨어있다. 중국도 그렇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한중일 삼국간의 역사적 딜레마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막상 그 상황에 닥친 선조들은 어땠을까? 북한에서 제작한 도서를 국내에서 발간한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어보았다. 겨레고전문학선집 중 많은 사람들의 기록과 글이 있었고, 거기에 한국의 전래동화에도 나오는 <춘향전>이나 <흥부전> 같은 이야기도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서로 한 민족이었음을 알려주는 동기이다. 이산가족 상봉기사가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 부모형제자매 자식이 전쟁으로 서로 떨어져 70년 가까이 헤어지다 이제 만날 날이 다가오니 모두 백발의 머리와 주름이 깊게 페인 노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신세, 꿈에서라도 고향에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게 그나마 위안일까? 남북과의 교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족성과 역사성에 대한 우리의 숙제를 그나마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민족 가장 큰 위기 중에 하나인 임진왜란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우리도 그분의 업적을 크게 기리지만, 북한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 외, 곽재우 장군, 정문부, 고종후, 최경회, 고경명, 이정암 등 수많은 의병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와이프와 몇 달 전 같이 여행 겸 진주성을 방문했다. 진주박물관이 진주성 안에 있다. 진주성은 남강 옆에 있는 아름다운 성이나, 진주성의 전투로 수 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성민들이 모두 도살당했다. 이때의 참혹함이라 어떻게 말하랴?

 

의병들의 봉기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왜군에게 큰 방해거리였다. 이들이 벼슬을 바라거나 또는 공명심에 불타서도 아니다. 조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조선의 군왕을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안타까우면서도 뒤에 나온 해설자의 말처럼 조선은 조선민중의 국가가 아니라 군왕의 것이었다. 유학 특히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이 사대부의 가치란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보다 지배계급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이점만 내세운 것이다. 의병들은 그런 전형적인 사대부들의 감각을 보여주었다. 아니라면 곽재우처럼 다소 산신처럼 되고 싶다는 도교적 모습도 보여준다.

 

심지어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법력이 아주 높은 고승조차 그런 감정이 역력하다. 이정암의 경우 백성의 슬픔을 잘 드러난 것 같았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그의 활약을 선조실록에서 잘 다루어주지 않은 것 같다. 이정암의 기록을 보니, 한양수복 후 선조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이 다시 돌아오자, 다른 왕자의 집은 모조리 없어졌으나, 광해군의 집만 멀쩡했다고 한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다. 천심은 그러하다. 한양의 최고의 집인 왕궁이 모조리 불에 탔으나,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백성들에 대한 고통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인구는 약 416만이었으나, 전쟁 이후 인구가 약 152만으로 감소했다. 7년 동안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의 수를 생각하면 약 3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전화로 사라진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전쟁 당시의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죽음과 가까운 시간, 죽음을 넘어 전쟁 이후의 시간들까지 말이다. 아쉬운 일이나 대부분 자연도피나 전형적 성리학적 인간에 치중했다.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의병장으로 활약한 분들의 이야기인 점에서 양반중심사회의 조선인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이란 국가 더 나아가 민중이 왜적을 상대로 모두 합심하여 이겨낸 전쟁이다. 승리했지만, 그 피해는 막대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조차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호남의 입구인 진주성을 목숨 걸고 싸운 조선의 민중, 그리고 호남에서 왜적에 맞서 싸운 의병과 승병들, 사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크게 이긴 전투 중에 한산도대첩, 명량대첩을 생각할 것이다. 한산도대첩은 세계4대 해전에 들어가고, 명량대첩은 10척에 불과한 전선으로 수 십 배의 적을 물리친 승리이다.

 

명량대첩으로 패배하자 왜적들은 그 복수심을 품고 해남과 강진일대 민가를 습격하여 노략질을 했다. 마을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죽였다. 영광의 승첩 뒤에는 민간인들의 학살은 잊어지는 이야기뿐이다. <이충무공전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 조선민중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보았다. 의병장의 이야기에는 민중이 겪은 이야기가 부족해서 안타까웠다.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에서 본 조선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도 역시 그런 상황에서 지은 글이고,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그 힘든 상황을 이기기 위한 글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큰 위기는 사실 중국과 일본의 관계성에서도 보인다. 일본이 미국의 우방이고, 자본주의에 의한 자유주의 국가체계이므로 한국과 우방국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 개인보다 일본과 중국이란 큰 틀에서 보자면 일본이 더 싫다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쟁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세력은 조선인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다. 같이 저항하던 기록과 역사적 정신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다. 드라마 영화 <임진왜란 1592>을 보면서 한국과 중국이 합작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 중국이 어느 정도 임진왜란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유정이 고니시와 협상하여 시간을 벌 때, 난을 평정한 이여송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여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지로 무예가 뛰어난 그의 모습을 보여줬다. 평양성전투와 벽제관전투에서 이여송은 벽제관에 돌격하는 모습은 자못 영웅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 뒤 이여송이 진격하지 않고 더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깊이 슬퍼하는 모습을 매우 강조했다. 심지어 명나라황제가 이순신에게 준 9가지 보화를 일일이 화면으로 보여주는 모습도 있었다. 중국 명나라가 지원하여 나름 전략적으로 도와준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승리요인은 이순신 장군과 수군 그리고 의병장과 의병, 승병들이다. 조선의 민중이 있었기에 조선은 썩은 뿌리를 30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조선 조정에 서애 유성룡 선생 같은 분들이 모두 당상관 자리에 있었다면 희망이 있었지만, 현대 한국을 두고 특히 젊은 친구들이 헬-조선이라 부른다. Hell이란 지옥이 조선에 있다는 웃음이 나오는 슬픈 현실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 책의 의병장들은 그나마 났다. 이들은 고지식한 분들이지 적어도 꼰대는 아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 목숨조차 초개처럼 던졌으니 말이다. 어느 의병은 아버지가 왜적에게 죽자 목숨을 아까지 않고 싸웠고, 당상관까지 오르고 심지어 선조에게 술을 하사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나, 역시 전투 중에 순국했다.

 

옳은 행동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조선과 조선의 민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들이 고지식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내릴 수 없다. 일제에 대항하던 많은 조선의 민중들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활약이다. 항일투쟁정신에서 그들이 살던 1900년대 초에 그보다 300년이나 더 된 역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항일전쟁을 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같이 나누고 있었고, 그 마음이 아직도 이어져 간점에서 겨레라는 이름이 멀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위기의 순간, 아무리 미운 상대방이라도 합심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해도 합심의 순간, 서로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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