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읽다.

마음이 휑해지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느 계절의 잔잔한 수영장의 표면같은 베들리런.

한차례 전염병이 휩쓸고 간 듯한 끈적하고 불쾌한 공기가 가득 채워진 밀림 속의 웅덩이 표면같은 인도네시아의 병영.

이렇게 상이한 느낌의 두 공간이 예고도 없이 불쑥 교차되는 시점을 지날 때는 알것 같기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고 만다.

두 공간은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크나큰 간극이 있으나,

얇아서 뒷장이 훤히 비치는 매끈한 종이 한장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삶의 표면을 스르륵 미끄러지듯 살아온 프랭클린 하타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반까지도 갈팡질팡했다.

완벽한 일등 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모습인가,

전쟁의 한 가운데 반인륜적인 범죄를 눈 질끈 감고 외면한 목격자인가,

역사의 광풍 속에 이리저리 휩쓸린 나약한 인간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타적이지 못했던 나약한 놈. 겨우 죽음에 이르는 경험 끝에 삶을 되돌아 보는 마치 크리스마스캐롤같은 캐릭터에 진절머리가 났다가,

그 어쩔 수 없음, 무기력함, 그럼에도 완벽하게 악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가엾은 피조물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결국 하타를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나는 분명 프랭클린 하타, 구로하타 지로의 인생을 백분 이해한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너는 끝까지 망쳐진 적이 없다.’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순 없었다.


문장 하나에도 배수구에 빨려들어가는 물처럼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잔잔하고 격렬한 글이다.


2017. oct.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7-10-0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으셨군요. 저는 좀처럼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없는데 hellas 님 덕분에 이 책은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hellas 2017-10-06 07:43   좋아요 0 | URL
저도 특별한 계기가 있다거나 해야 다시 읽게되요. 아주 좋아하는 책이거나 :):) 다시 읽으니 좀더 섬세하게 결을 느낄수 있어서 좋네요.
 
메갈리아의 반란
유민석 지음 / 봄알람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포스팅 한지 꽤 지났는데 가끔 댓글이 올라오는데.

책을 읽어본 자와 대충 짐작만한 자의 의견은 그냥 저냥 뭐 그럴수도 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메갈리아라는 단어 검색만 해보고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쓰는 자도 있는 모양이다.

남의 의견에 구지 참견하고자 한다면 예의는 갖추길.

아이디고 뭐고 지우기도 귀찮다.

ㅡ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의 소음을 읽고 나니 왠지 음악가들의 이야기가 더 읽고 싶어졌다.

책은 정말 오래 묵혀둔 책.

언제 마음이 동하면 읽어야지 했는데 그게 지금이었나보다.

솔직히 오자와 세이지를 잘 모른다. 그저 흔치 않은 그 시절의 동양인 거장 정도?

하루키와 음반들을 들으며 회고하는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대단한 시절에 대단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음악을 했구나 싶다.

카라얀이나 번스타인은 특히 친밀한 관계여서 그들의 성격도 알수 있음.

마니아들을 위한 책은 아니었으면 한다는 지휘자의 바람은 반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난해한 부분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초심자들은 애초에 이해하는데 넘어야 할 문턱이 있는 장르니까.

그리고 하루키의 음악편력이랄까 이런건 대충 알고 있었는데, 그 깊이가 상당하다는데 조금 놀랐다.

같은 말을 오자와 씨가 지휘하는 학생 전원의 오케스트라에 관해서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 구심력을 습득해갔다. 그러더니 어느 시점을 경계로 갑자기, 그때까지 발동이 잘 안 걸리던 엔진이 점화된 양 하나의 공동체로서 자율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신종 동물 하나가 무명의 세계에 탄생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 팔다리를 움직이고 어떤 식으로 꼬리를 움직이며 어떤 식으로 귀와 눈, 의식을 움직이면 좋을지, 나날이 구체적으로 체득했다. 처음에는 당황하기도 했지만, 움직임은 하루하루 자연스러워지고, 우아해지고, 그리고 효율적이 되어갔다. 동물은 오자와 씨가 어떤 소리를 염두에 두고 어떤 리듬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듯했다. 그것은 조련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공감‘을 구하기 위한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 314

하루키가 동행한 오자와 세이지 스위스 국제음악아카데미의 한 장면인데, 애니메이션 처럼 이미지가 눈에 보이는 묘사랄까. 조금 인상깊어 남겨 본다.

2017. 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손으로, 치앙마이 -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의 카메라 없는 핸드메이드 여행일기 내 손으로 시리즈
이다 지음 / 시공사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리즈 중에서는 교토가 가장 좋았는데,

아마도 치앙마이를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더라면 이 또한 좋았을 것이다.

살짝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재미있는 모험? 담이다.

태국에 관한 중요할지도 모르는 잡다한 지식은 정말 재밌게 읽음.

친구 두명과 같이 떠났지만, 서로의 취향이 존중되는 관계도 좋았다.

두달간 연고없는 외국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낭만적이고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다의 핸드메이드 여행일기는 쭉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책 많이 팔리길.:)

2017. 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이 시대의 야만, 시대의 소음에 대처하는 예술가의 방법이라면.

그저 참고, 두려워 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가 시대의 야만. 물리칠수 없는 거대한 소음이었을까.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정치적 각도에서 바라본 픽션.

지나간 과거의 타국의 정치에 큰 관심이 없어서 인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이전 시대에도 그랬듯 다 대의명분이 있었다. 그는 그따위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남들이 그런 것을 놓고 떠들든 말든,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루하루를 마치는 것이었다. 그는 생존의 기술자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생존을 위한 기술자들. - 12

최근 들어 그가 자기 안에서 젊음의 파괴할 수 없는 불멸성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그뿐만 아니라 - 젊음의 타락하지 않는 결백성도. 그리고 그 너머에서, 그 밑에서, 그가 지닌 어떤 재능이든, 그가 만든 어떤 음악이든 그것들의 올바름과 진실함에 대한 확신도. 그 모든 것이 약해지는 게 아니었다. 이제 그냥 전혀 무관해졌다. - 75

그는 앞으로는 당의 지시를 따라 인민을 위한 듣기 좋은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약속했다. 장황한 공식 발표문을 읽어 내려가던 중에, 그는 읽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홀을 둘러보고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진심으로 작곡을 한다면, 제가 참된 감정을 느낀다면, 제 음악이 인민에 ‘반하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며, 뭐라 해도 저 자신은...... 조금이나마 어떤 식으로는...... 인민의 ...... 대표라고 생각합니다.˝ - 115

일프와 페트로프는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권력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이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 - 131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 135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 181

2017. 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