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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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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한창훈이 섬을 떠난다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의 소설을 다 읽은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런 걱정부터 되더라. 내가 느낀, 그가 말하는 섬은, 그에게 단순히 사는 장소 이상의 것이었다. 지금, 소설가로 살아가는 그의 삶에 많은 부분 바탕이 된 곳이며 그가 오롯이 숨 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삶의 자취를 같이 밝아가는 동안 이어지곤 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답해줄 것처럼 제목에서부터 말하고 있지만, 굳이 그 답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삶이 녹아든 시간과 경험이 그의 모든 글에 그대로 녹아있었을 것을 저절로 알게 되기에 말이다.

 

바다와 바람 외에는 모든 결핍의 장소. 이별과 쓸쓸함만큼은 풍족한 곳. 사람도 섬을 닮아버린다. 각자 독립된 고립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된 채 달이 가고 해가 바뀐다. 섬을 고독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다. (80페이지)

 

'글을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원고료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아, 이 얼마나 솔직하고 직선적인 대답이란 말인가. 당연하지. 돈이 되는 글쓰기를 하며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건 전업 작가의 가장 우선시되는 조건이 아닐까. 본인의 삶도 영위해야 하지만 딸의 아빠 노릇도 해야 하니까. 그는 소설가 한창훈이기에 앞서, 아버지이고 가장이었던 거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우선순위가 정해질 것 같다. 그의 글쓰기의 이유는 이렇게 원고료와 함께 남을 누르고 올라서는 종자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이기도 하다. 주변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 사실 이유야 세다 보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를 감당하는 숫자가 중요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건 이 산문에서 그가 말하는 그 섬 이야기를 들을수록 분명해진다.

 

이상하게도, 소설을 읽으면 작가는 '소설가'로 보인다. 그런데 소설가가 쓴 산문을 읽으면 '그냥 한창훈'으로 보인다. 섬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에서 섬마을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의 글에서 종종 등장하는 섬사람들의 일상과 사연은 그의 글의 배경이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항구를 기점으로 떠나는 사람들과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 삶의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 그가 태어난 줄기로 이어진 친척들의 생과 사를 들을 때면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건가 싶어 애틋하고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가 글로 교류하며 인연 맺어온 문인들과의 에피소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로웠는데, 그들에서 문학을 갈망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이야기.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지금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이 문학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말하는 듯한 여운이 듣기 좋다. 떠나고 기다리고 돌아오는 것들을 무심히 바라볼 수도 있는 시선을 갖게 하는 건, 그가 발 디디고 있는 그 섬에서 피부에 닿아 몸이 되어버린 것들이었음을 느낀다. 그의 글쓰기의 원천은 바로 이런 것들일 거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거문도, 여수, 부산 등 바닷냄새 나는 곳들, 그와 함께 고생과 술잔을 같이 기울인 사람들, 글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문인들과의 추억이 지금 그의 글과 함께하고 있다. 그 시간을 함께한 많은 사람이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면서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존재들이다. 치열한 삶을 같이 부대끼며 걸어온 그들이 그의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래서 그가 계속 그 섬에 머물 것 같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멈출 것 같지도 않다. 늘 그 자리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목수가 십수 년 동안의 망치질 총량을 어느 날 문득 헤아려보고는 몸서리를 치는 행위와 소설쓰기는 비슷하다. 책 속에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서 다시 망치를 잡듯 그다음 소설을 쓴다. (105페이지)

 

이 책에 대해 혹시나 글쓰기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내가 느낀 이 책은 그의 일상이 쌓여간 시간을 적은 책이지, 그의 글쓰기 노하우를 전하는 책은 아니다. 글쓰기의 기교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연속으로 글쓰기가 이어지는 거였다. 사람의 마음을 보고, 바닥을 공감하며, 눈물 나는 버팀을 아는 이가 본 세상.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그에게 글이 동반한다. 바다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제야 그의 소설을 제대로 만날 마음이 생긴다. 그 배경의 고백을 들었으니, 과감히 그의 소설을 펼쳐 들어도 좋겠다. 정식으로 문학을 배운 적 없는 그가 이렇게 써야만 했던 이유를 그의 소설에서 더 듣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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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가
최수영 지음 / 새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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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짠하다. 짠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암튼 그렇다. 최선이라고 선택한 길이 인생 막장으로 데려가는 고속열차였으니 어쩜 좋을까나.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잘못 탄 줄 알았을 때 바로 다른 열차로 올라타는 것. 그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하여가』의 등장인물들에게 그런 갈아타기를 본 것 같아 흥분된다. 이 아그들을 어쩌면 좋을까 싶어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이미 내 입은 웃고 있다. 계획도 없이 즉흥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이들의 인생이 휩쓸려 가는 게 안쓰러워 웃음이 난다. 안쓰러운데 웃음이 나는 게 맞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뭔가 도와주고 싶고 밧줄 하나 던져주고 싶을 만큼 간절함이 묻어나는데도 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불안함마저 폭소다. 이거 이거, 조폭 맞아? 군인 맞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어떤 인간들이 이들을 잉여라 불렀다. 하지만 이들이 잉여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잉여의 자리를 차지한 꼴통들이 따로 있음을, 잉여라 불리는 이들은 잉여가 아님을 안다. 이들이 청춘이니까, 실컷 패고 두들겨 맞으면서 아픔을 느끼는 거다. 그게 가능한 나이여서, 배짱이어서 듬직하다. 군발아, 내 다리 몽댕이 하나 부러뜨려줘라! 깍뚝아, 내 머리통 좀 빠개주라니까!

 

주먹이 운다는 건 괜한 속담이나 영화 제목이 아니다. 과학이다. 꼭지까지 올라간 혈압을 어쩌지 못하고 참다 보면 주먹 안에서 땀이 난다. 그게 불쌍한 내 주먹이 흘리는 눈물 아니고 뭔가. (172페이지)

 

이십 대의 두 남자가 도로 한복판에서 하나로 엉켜 뒹굴고 있다. 한 명은 탈영병, 한 명은 조폭 똘마니. 도로를 사이에 두고 눈빛으로 싸우다가 보행자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들어 물어뜯는 녀석들. 그래도 죽기는 싫었는가보다. 교통 신호는 참 잘도 지키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뭐가 부딪치게 하였는지,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뒹굴게 했는지, 이 싸움의 끝장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찌질하고 스펙도 없고, 가진 게 없어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군대로 들어간 김 일병. 자신의 실연 이야기를 듣고 더 갈구는 곽 병장을 이해할 수 없던 어느 날, 귀신에게 홀린 듯 탈영한다. 그냥? 아니. 선임들을 거침없이 까는 유진만을 흠씬 두들겨 패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정신을 놓았을 때, 곽 병장의 탈영에 동행한 거다. 왜? 몰라... 주먹맛은 더 세지고 거칠 게 없어 보이는 대책 없음 하나만 믿고 달려보는 거다.

무게 좀 잡아보겠다고 범단(조폭)에 들어갔는데, 이건 뭐 계속 따까리만 하고 있으니 별 볼일도 없고 인간대접도 못 받고... 원래 그런 거 알고 있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이젠 하다 하다 회장(두목) 실수까지 묻으러 가라고 하니 이걸 해, 말어?

 

폭발한 거다. 이게 아닌 걸 알았을 때도, 상대의 신발 앞 코를 보며 고개 숙이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던 마음을 그때 제대로 알아챈 거다. 정신 차린 거지. '이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죽기 살기 이판사판. 누구 하나 걸리기만을 바랐던 것처럼 벼르고 별렀던 순간 딱 맞춰 상대가 눈에 띈 거다. 군바리와 깍두기. 자, 덤벼!

 

최소한의 인간다움. 두 청년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너무나 인간다운, 감정이 폭발하여 폭음이 들릴 거로 생각했던 순간에 보여준 이성이었다. 반듯한 삶의 자세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아닌 걸 알면서 계속 가느니, 찌질하게 인생 막장으로 사느니, 걷어차 버리련다. 이제야 만난 삶의 전환점이다. 그마저도 코믹하여 깔깔대게 하지만 사는 게 다 웃긴 거지 뭐. 카페 <옛날 소품> 주인장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날 패기 있게 전단 날리고 다니던 열정은 언제 다 사라진 건지도 모르게 살아왔다. 죽지 못해 살고, 숨 쉬고 있으니까 사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두 청년의 혈투로 한심하게 보인다. 인생 뭐 있어?! '싸움 끝났으면 맥주 줄게, 들어와서 시원하게 한잔 해.'

 

뜬금없이, 어젯밤 장인 영감이 나를 몰아붙이며 욕을 하듯 던졌던 질문이 생각나면서, ‘쟤들은 지금 몇 번일까, 야전병원의 1, 2, 3번 중 몇 번일까….’ 싶어졌다. 전쟁터 야전병원에선 의사들이 환자를 세 부류로 나눈다나. 치료를 받든 받지 않든 어쨌든 살아날 사람 1번, 치료를 받아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2번,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사람 3번, 이렇게.

“넌 지금 그 1, 2, 3번 중에 어느 쪽 같으냐?” (245페이지)

 

각자 화자가 되어 두 사람, 탈영병과 조폭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들려오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두 사람이 조우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바로 그 장면, 차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우연히 마주친 눈빛이 시작이다. 눈깔아 안 깔아? 그래, 해보자.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드는 두 사람의 전투력은 말 그대로 사생결단이었다. 끝장을 보자는 의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달려들고 죽자고 덤비는 게 평범한 모습은 아니잖아? 그런데 내 눈이 이상한 마법에 걸린 듯하다. 미친 듯 전투력 상승하는 둘의 모습이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니 어쩌란 말이냐. 이 장면은 두 사람이 꼭 한번 그렇게 만나야 할 것만 같은, 그게 정답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게 옳은 게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누가 나에게 확신을 줬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누가 나 좀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줘, 라고 간절하게 바랄 때 상대가 나타났다. 탈영병에게는 조폭이, 조폭에게는 탈영병이. 그 둘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카페 주인까지. 모두에게 필요한 딱 그 순간이 찾아온 거다.

 

이런 막장이 어디 있어? 라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막장이 아니라 끝장이었다. 팔팔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다. 뭔가 터지는 시점이 어디쯤일까 싶은 마음으로 한 페이지씩 넘겼다. 영화 같은 장면에서 ‘아하~! 이 녀석들답구나’ 싶었다. 그래, 그 정도는 보여줘야 잉여를 밟아버릴 배짱이 있는 거지. 작가가 되겠다고 전공을 살리다가 아나운서로 진로 전향하는 설희가 현실이다. (설희는 군바리의 찬 전 여친) K대는 일류가 아니라 S대 못 간 애들이 가는 대학이라며, 자신보다 스펙 좋은 남자를 선택한 여친의 결혼식에 가서 난동을 부리고 말았던 곽 병장은 엿 같은 세상의 진실이다. 두목보다 위에 있는 사람, 두목 싸모가 진짜 두목이라는 건 조직에서도 적용되는 피라미드 생존방식이다. 두목 싸모가 대놓고 똘마니를 강간해도 할 말 없는 게 약자가 강자를 바라보는 본능 같은 것.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반칙에 반칙을 더 해서라도 세상과, 불평등 부조리와, 지리멸렬한 삶과 화해가 아니라 들이밀고 보는 거야. 반칙 좀 하면 어때서!

인생이란 뭐냐.

이 철학적 질문은 누군가에게 된통 두들겨 맞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울 때면 꼭 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느 댄 그게 질문 자체, 인생보다 더 궁금하다. ‘된통’에다 억울하게까지 맞았을 땐 질문이 한층 깊어진다.

도대체 이놈의 인생이란 뭐란 말이냐, 썅! (214페이지)

 

이게 뭔가 싶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유쾌했다. 물론 이들의 앞날이 평탄할 거란 생각은 안 한다. 이렇게 흘러가도, 저렇게 굴러가도 앞으로 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그것마저도 알 수 없다. 내가 탈영병도 아니고 민간인으로 귀화한 조폭 똘마니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건 그렇게 살아가면 언제 어느 때 불쑥 찾아올 이성,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머리를 두드릴 때 다시 또 전투력 상승하여 혈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한 번씩 부딪치면서 앞으로든 옆으로든 또 굴러가고 흘러갈 테니까 말이다.

 

문장 곳곳에 녹아 있는 재치가 이 책을 즐겁게 읽게 한다. 사투리와 비속어, 유행처럼 번지던 은유의 말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세상 풍자극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청춘소설이라 불리지만 우울한 게 아닌 웃음 나면서 통쾌하기까지 하니 개운하게 뛰고 땀 한 바가지 흘린 기분이다. 이야기의 재미가 뭔지 그대로 느끼게 해 준 소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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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이 블로그를 한다면 블랙 로맨스 클럽
멜리사 젠슨 지음, 진희경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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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윌리엄)! 이 누나가 (이모라고 해야 맞을 듯하지만, 인정하긴 싫다. ㅠㅠ) 너에게 홀딱 빠져서 콜린 퍼스 아저씨를 버릴 지경이야. (아주 잠깐 그랬어) 그래도, 혹시나, 아직은, 다아시는, 영국 남자 이미지는 콜린 퍼스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를 보니 이게 언제 또 바뀔지 모를, 갈대 같은 마음인지 모르겠다. 퍼시벌 가의 후손인 네가, 어쩌면 니콜라스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을까 싶지만, 뭐, 아무렴 어때. 명백한 결론은 이거 하나잖아. 너와 내가, 슬프지만, 아무리 봐도 너는 나랑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니, 캣에게 (쿨하지 못하게) 양보할게. 영국 항공을 타고 곧 도착할 캣을, 잘, 아주 잘 (근데 막 울어...) 마중해줘. 흑.

 

아무래도 말이지, 이런 감정은 분명, 콜린 퍼스 때문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우산을 휘둘러도 멋져 보이니 어쩜 좋아) 제인 오스틴의 원작 『오만과 편견』보다, 다양한 버전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접했던 <오만과 편견>이 더 뇌리에 남는다. 시각효과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자꾸 언급되는 '영국 남자'라는 것도 한몫을 한다. 그 안에 콜린 퍼스가 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고 내가 뒤통수를 맞았던 건, 휴 그랜트보다 콜린 퍼스가 더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 특유의 이미지 때문이다. 아, 어느 순간 '영국 남자'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거야. (요즘엔 데이비드 컴버배치도 자꾸 눈에 들어와서 걱정이야) 특히 로맨틱한 분위기로 말이지. 그중에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 이미지는 누가 뭐래도 로맨틱의 대표주자 아닐 텐가. 괜히 퉁퉁거리다가, 무시하는 듯하다가, 아닌 척하다가, 알고 보니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반전(뻔한 반전인 거, 알지?)에 심장이 쫄깃~ 콩닥거림을 폭발하게 한다는 거, 이미 알고 있잖아. 아마 앞으로도, 또 다른 버전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와도 마찬가지일 걸? (아니라고? 아니 아니, 아마 맞을걸!) 그래서 윌과 니콜라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 소설의 원제목이 ‘영국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Falling in Love with English Boys)’일 정도니까, 알만하지.

 

"중요한 건 그대가 그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거라오. 다른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그대 자신에게서 진정 어떤 모습을 보고 싶은지 결정해야 해요, 캐서린. 그러면 그대는 정말 화려하게 빛나게 될 거요. 그때까지 지저귀는 건 잠시 멈추시오. 정말 매력 없으니까." (203페이지)

(아... 이 하오체를 어쩌면 좋아...)

 

멜리사 젠슨의 소설 『제인 오스틴이 블로그를 한다면』은 오만과 편견의 오마주 같은 작품이면서도, 전혀 다른 구성으로 독자를 웃음 짓게 한다. 21세기를 사는 열여섯 살의 캐서린(이하 캣)은 연구 때문에 영국에 머무는 엄마에게 간다. 엄마의 연구 대상은 19세기에 살았던 인물 열여덟 살의 캐서린 퍼시빌(이하 캐서린)인데, 엄마는 캣에게 캐서린의 일기를 읽게 한다. 뭐, 딸이 연구에 심적으로 동참해주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할 테고, 19세기를 접할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고, 영국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 기억에 남게 해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과 감정을 적었을 캐서린의 일기를 읽으며, 캣은 19세기 영국의 모습과 여자의 삶, 그리고 사랑을 본다. 그에 동행한 인물이 있으니, 캐서린의 후손 윌(윌리엄)이다. 물론 본의 아니게 그 사랑의 작대기를 뻗어놓은 건 엄마지만, 윌에게 빠지지 않고서는 영국을 벗어난다는 건 어마무시하게 슬픈 일일 것임! 퍼시벌가의 후손인 윌과 캣은, 캐서린이 살았던 시대의 장소들을 함께 방문하면서 시간을 쌓는다. 캐서린의 일기장에서 뽑아낸 방문지 10곳과 윌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만들어줄 게 뭘지 궁금하지? (에이~ 알면서~) 콩닥콩닥, 두근두근. (아우~ 심장 떨려)

 

영국에서 지내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윌과 같이 있을 시간 역시(!) 정해져 있는 것이니, 어떻게 해?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하지? 망설이다가 놓치긴 싫은데, 대놓고 말할 용기는 없고, 상대의 마음을 모르겠으니 선뜻 던져놓고 민망해질까 봐 걱정되고, 그냥 물러나자니 서운하고. 아, 어떡해?!

 

이름이 같은 두 소녀 캐서린의 시대를 넘나드는 사랑 쟁취기와 성장기가 발랄하게 들린다. 캐서린의 일기, 캣의 블로그를 엿보는 재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사적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쓰는 게 일기라면, 캐서린의 일기는 그녀가 참석하는 파티, 시 나부랭이로 마음을 흔드는 토마스에게 빠진 마음, 짜증이 나게 간섭하고 나타나는 니콜라스를 향한 반감 같은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기로 푸는 수다라고 해야 할까. 19세가 영국 사회의 분위기도 볼 수 있다. 가문의 네임벨류에 따른 계급 만들기 같은,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결혼, 전쟁으로 아픔을 간직했던 시간. 니콜라스가 왜 참전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얘기할 때는 정말, 진심이 묻어났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발발한 전쟁이, 그 이익과 관련이 없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있으니, 오늘날에도 보이는 이 전쟁의 의미를 살펴봐야 할 일이다. 캣의 블로그 역시 마찬가지. 십 대 소녀의 유쾌하고 솔직한 수다로 친구들과 소통하는 장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그 나이 또래의 미국 소녀의 삶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남자친구 이야기, 대학입시를 앞둔 준비들, 시시콜콜한 일상을 절친들과 공유하는 것들이 그 나이 또래의 생기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시대를 거슬러도 두 캐서린의 공통점은 이거지. 남자! 사랑! 연애! 바로, 심쿵~하게 만드는 감정들! (아이고 귀여워라~)

 

"제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두실 수 있겠죠, 친절한 퍼시벌 양? 그리고 제가 돌아오거든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저와 그 이야기를 같이 나누실 수 있을까요?" (169페이지)

(19세기의 작업 멘트는 이랬다오. 나쁜 토마스. 오랫동안 이야기 나눈 후 뭐하려고? 흥~!)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캣의 블로그와 캐서린의 일기장이 교차로 등장하면서 엘리자베스 베넷이 될 수 없었던 십 대 소녀의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블로그와 일기를 통한 끊이지 않는 수다가 유쾌하면서도 각 시대, 나라에 따라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십 대 후반의 소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의 캐서린은 열여덟의 나이에 파티와 남자, 결혼이 주된 관심이었다. 21세기의 열여섯 캣은 곧 대학생이 될 미래와 성인의 삶이 공존한다. 영국식 영어를 언급하면서 언어문화의 차이를 보여줬고, 타국에서 접하는 유럽의 역사를 통해 배움의 장을 열어가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열여섯, 열여덟 여학생의 삶은 어떠한가? 피곤이 덕지덕지, 새벽별 보고 등교하고, 매달 모의고사에,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수능시험 대비하느라 무 다리도 불사하고 스트레스 풀기 위해 먹어대기도 하잖아. 고전을 찾아 떠나는 탐방(윌과 캣이 함께한 것을 탐방이라고 봐도 좋다면)은 웬 말이며, 파티는 어느 나라 단어인고? 그런데도, 닮았다. 캣과 캐서린이 사랑을 앞에 둔 모양새가 너무 닮아서 '그렇지.' 하는 공감의 끄덕임이 절로 나온다. (우리나라 이 연령대의 아이들도 할 건 다 하잖아. 안 그래?) 하긴, 사랑을 앞에 둔 이런 모습이 어디 캣과 캐서린뿐이겠냐 마는. 아마도 내가 부러운 건, 그 나이에 미처 다 누리지 못했던 발랄함인 것 같다. (나 돌아갈래~) 정말 잠시만 타임슬립하면 안 될까? 19세기 영국의 퍼시벌 가의 저택으로 나도 탐방 비스무리한 거 하러 떠나고 싶다고! (니콜라스, 기다려. 내가 간다! (그럼 윌은 어쩌지? ㅡ.ㅡ;;))

 

소설을 소설로 읽어야 하는데, 왜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면서, 가서 엿보고 싶고 참견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두 명의 캐서린이 삽질할 때마다 방향을 알려주고 싶고(삽의 끄트머리를 여기에 찍어!), 니콜라스와 윌리엄이 속으로 밀당(난 그게 밀당한 거라고 생각해!)하고 있을 때는 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고. (아, 이럼 안 되는데) 윌이 손으로 금발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 세 개의 가르마가 생기는 그 자태를 멋들어지게 봐주고만 싶은데, 왜 자꾸 미적거리는 거야. 일단 던져, 던지라고! 점잖은 척하지 말란 말이야~ 19세기든 21세기든 너희는 청춘이거든? 당기기 말고 일단 밀기만 좀 열심히 해주지 않으련?

 

이미 짐작했겠지만, 뻔한 결말을 예상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풀어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아마도 그 나이에 가진 발랄함을 많이 발견해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때론 민망할지라도, 때론 무모할지라도 덤비고 보는 그 용기가 (슬쩍) 부러워서 질투하면서 읽게 된다. 그래서 괜히 심통 나기도 하는? 가서 방해도 하고 싶은? ㅎㅎ 어떤 식으로든 두 캐서린의 변화하는 마음이 보여서 좋았다. 누군가의 아픔을 읽고 공감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에 응원을 보내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이, 예쁘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정석. 역시 남자의 진심은 좀 가려졌다가 발견해야 멋있는 것임? 니콜라스와 윌의 매력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폭발해주길~!

 

이른 더위도 잠깐 물러나게 할 만큼 유쾌상콤발랄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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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여자
카트린 아를레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당신이 남긴 건, 잿더미뿐... 『지푸라기 여자』

 

 

제목이 이렇게 서글플 수가 없다. 아무 힘도 없이 바람에 휙휙 날아가기 일쑤면서, 불이 붙어도 쉽게 타오를 수밖에 없으면서 또 금방 사르르 꺼져버리는, 겨우 잿더미 살짝 남기는 정도만 허락되는 물체. 상당히 나약하고 절망적인 여자가 바로 연상된다. 읽어보니 ‘딱’이다. 이 소설을 그대로 표현하는 제목이다. 반면에 질릴 정도의 교훈을 선사하며 몰입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아, 역시,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건 없어... ㅠㅠ

 

서른네 살의 힐데가르트. 전쟁의 폐허로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부모도, 돈도 없다. 간신히 번역일로 하루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현재도 미래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 나아질 것이 없어서 의미 없는 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그녀가 기대하는 건 신문의 구혼 모집공고다. 돈 많은 남자가 구혼 공고를 내기만 기다린다. 주저할 것 없다. 바로 편지를 보낼 것이다. 아직은 얼굴도 예쁘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자신의 매력에 빠져들 거다. 이런 허무맹랑한 기대감이라니. 하지만 삶에 반전도 찾아온다. 정말 신문에 구인공고가 났다. 누군가 여자를 구하고 있다. 감이 왔다. 이거야. 힐데가르트는 바로 편지를 보내고 칸까지 날아가 면접에 응한다. 뭔가 잘 될 것 같다. 억만장자의 비서라는 60대로 보이는 남자 안톤 코르프가 그녀가 필요한 모든 것에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고용주인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욕심 많고 괴팍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안톤은 칼에게 힐데가르트가 접근할 수 있는 계획을 털어놓는다. 모든 게 잘되고 있다. 쉽지 않아 보였던 힐데가르트와 칼의 결혼이 성사된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절반쯤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전개다. 식상하지만, 욕하면서 끝까지 보게 되는 막장 드라마처럼 저절로 읽게 된다. 가진 것 없는 여자가 살날이 많지 않은 억만장자를 만나 결혼하고, 그 후에는?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거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게 아니기에 그 시도에 대한 어떤 반감 같은 게 그녀에게 다가와 남은 생을 훼방 놓을 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살면서 이런 행운(?) 한 번쯤 찾아와줄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니겠나 싶은 공감에 그녀의 성공을 기원해줄 수도 있겠지. 그럼 힐데가르트의 운명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건 끝까지 읽어봐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때론 계획한 대로 쭉쭉 흘러가는 인생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그 당연함 때문에 불시에 침범할 불행의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눈을 가리게 하는 건 인간의 욕망이라는 건 불문율처럼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무엇이든 가능하게 필사적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도 인간의 욕망이다. 누군가 독백처럼 읊어대는 고백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험 쉽게 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그 욕망의 실체는 보는 순간, 무릎을 쳤다. 아, 이 정도의 치밀함이라면, 그 정도의 준비성이라면, 당신 욕망이 행한 모든 것을 인정하겠어. You win!

 

여러 동화가 버무려진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지만 가독성 있다. 게다가 다 읽고 나니 정말 잔인한 교훈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무슨 일을 하려거든 치밀한 계획과 준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끈기 있게 기다려야 이룰 수 있다는 것.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범죄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해피엔딩 인생일 테니까.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세상엔 나를 향해 덤벼드는 공짜도 없고, 그냥 얻어지는 행운 따위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 혹시라도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아, 역시, 현실은 이런 거야...

 

“그건 유치한 낭만주의요. 억만장자가 그런 신문 공고를 통해 여자를 구할 것 같소? 아무나 은막의 대스타가 되고, 아무나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고, 아무나 세상을 뒤흔드는 살인사건을 저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억만장자와 결혼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234페이지)

 

이런 교훈, 간만에 쫄깃하다. 기존 출간본의 디자인이 참 손이 안 가게 느껴져서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싶었는데, 엄청난 기대를 한 것에 비하면 재미는 좀 덜하다. (아무래도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이다.) 하지만 60여 년의 시간을 건너왔음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음에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누구나 눈치챌만한 뻔한 전개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데, 결말까지 맘에 든다. 괜한 기대감이나 ‘그래도~’ 싶은 결말을 만드는, 드라마적인 냄새 폴폴 풍기게 하면서 마무리되었다면 난 실망했을 거야. (물론 이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결말은 다르게 그려졌다고 하지만 말이다) 추리소설이라고 하는데, 장르 구분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니 편하게 손에 들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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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여섯 달이 지나갔다는 말...

나름 성실하게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시작했는데, 마무리까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신간평가단 에세이 마지막 추천 도서.

 

 

 

소설가 손홍규의 칼럼을 묶은 글.

사실 그의 소설이 더 읽고 싶었지만 자꾸 미루게 되고 보니

이렇게 나온 에세이를 먼저 읽어도 좋을 듯하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이 한권에 다 담겨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생기고,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어떤 희망 같은 것도 기대해 본다.

직설적인 문장도 환영.

 

 

 

 

 

 

 

 

저자의 전작을 읽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취재 형식의 연인들의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이번 도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하고 싶은 말,

가슴이 품은 말,

삶의 변화들을 글과 사진으로 엮었다.

 

펼쳐보고 싶다.

 

 

 

 

 

시골 생활 만만하게 본 거 아녀?

 

왠지 웃음이 나게 하는 일상의 에피소드가 막 펼쳐질 것 같은 느낌.

사실 우리의 일상이 좀 이럴 것 같지 않아?

다 아는 것 같지만, 다 좋을 것 같지만,

아닌 것 투성이.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튀어나와 웃음짓게 하는 것.

(그게 항상 좋지는 않지만...)

공감해보고 싶은 글이다.

 

 

 

 

 

 

유인경과 문정희가 여자의 몸을 주제로 나눈 대화라는데...

몸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것보다는 여자로 사는 삶에 대해 더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역사 속 여자에서부터 오늘의 여자까지...

유쾌한 수다가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 같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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