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
최수영 지음 / 새움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아이고, 짠하다. 짠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암튼 그렇다. 최선이라고 선택한 길이 인생 막장으로 데려가는 고속열차였으니 어쩜 좋을까나.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잘못 탄 줄 알았을 때 바로 다른 열차로 올라타는 것. 그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하여가』의 등장인물들에게 그런 갈아타기를 본 것 같아 흥분된다. 이 아그들을 어쩌면 좋을까 싶어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이미 내 입은 웃고 있다. 계획도 없이 즉흥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이들의 인생이 휩쓸려 가는 게 안쓰러워 웃음이 난다. 안쓰러운데 웃음이 나는 게 맞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뭔가 도와주고 싶고 밧줄 하나 던져주고 싶을 만큼 간절함이 묻어나는데도 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불안함마저 폭소다. 이거 이거, 조폭 맞아? 군인 맞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어떤 인간들이 이들을 잉여라 불렀다. 하지만 이들이 잉여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잉여의 자리를 차지한 꼴통들이 따로 있음을, 잉여라 불리는 이들은 잉여가 아님을 안다. 이들이 청춘이니까, 실컷 패고 두들겨 맞으면서 아픔을 느끼는 거다. 그게 가능한 나이여서, 배짱이어서 듬직하다. 군발아, 내 다리 몽댕이 하나 부러뜨려줘라! 깍뚝아, 내 머리통 좀 빠개주라니까!

 

주먹이 운다는 건 괜한 속담이나 영화 제목이 아니다. 과학이다. 꼭지까지 올라간 혈압을 어쩌지 못하고 참다 보면 주먹 안에서 땀이 난다. 그게 불쌍한 내 주먹이 흘리는 눈물 아니고 뭔가. (172페이지)

 

이십 대의 두 남자가 도로 한복판에서 하나로 엉켜 뒹굴고 있다. 한 명은 탈영병, 한 명은 조폭 똘마니. 도로를 사이에 두고 눈빛으로 싸우다가 보행자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들어 물어뜯는 녀석들. 그래도 죽기는 싫었는가보다. 교통 신호는 참 잘도 지키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뭐가 부딪치게 하였는지,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뒹굴게 했는지, 이 싸움의 끝장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찌질하고 스펙도 없고, 가진 게 없어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군대로 들어간 김 일병. 자신의 실연 이야기를 듣고 더 갈구는 곽 병장을 이해할 수 없던 어느 날, 귀신에게 홀린 듯 탈영한다. 그냥? 아니. 선임들을 거침없이 까는 유진만을 흠씬 두들겨 패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정신을 놓았을 때, 곽 병장의 탈영에 동행한 거다. 왜? 몰라... 주먹맛은 더 세지고 거칠 게 없어 보이는 대책 없음 하나만 믿고 달려보는 거다.

무게 좀 잡아보겠다고 범단(조폭)에 들어갔는데, 이건 뭐 계속 따까리만 하고 있으니 별 볼일도 없고 인간대접도 못 받고... 원래 그런 거 알고 있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이젠 하다 하다 회장(두목) 실수까지 묻으러 가라고 하니 이걸 해, 말어?

 

폭발한 거다. 이게 아닌 걸 알았을 때도, 상대의 신발 앞 코를 보며 고개 숙이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던 마음을 그때 제대로 알아챈 거다. 정신 차린 거지. '이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죽기 살기 이판사판. 누구 하나 걸리기만을 바랐던 것처럼 벼르고 별렀던 순간 딱 맞춰 상대가 눈에 띈 거다. 군바리와 깍두기. 자, 덤벼!

 

최소한의 인간다움. 두 청년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너무나 인간다운, 감정이 폭발하여 폭음이 들릴 거로 생각했던 순간에 보여준 이성이었다. 반듯한 삶의 자세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아닌 걸 알면서 계속 가느니, 찌질하게 인생 막장으로 사느니, 걷어차 버리련다. 이제야 만난 삶의 전환점이다. 그마저도 코믹하여 깔깔대게 하지만 사는 게 다 웃긴 거지 뭐. 카페 <옛날 소품> 주인장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날 패기 있게 전단 날리고 다니던 열정은 언제 다 사라진 건지도 모르게 살아왔다. 죽지 못해 살고, 숨 쉬고 있으니까 사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두 청년의 혈투로 한심하게 보인다. 인생 뭐 있어?! '싸움 끝났으면 맥주 줄게, 들어와서 시원하게 한잔 해.'

 

뜬금없이, 어젯밤 장인 영감이 나를 몰아붙이며 욕을 하듯 던졌던 질문이 생각나면서, ‘쟤들은 지금 몇 번일까, 야전병원의 1, 2, 3번 중 몇 번일까….’ 싶어졌다. 전쟁터 야전병원에선 의사들이 환자를 세 부류로 나눈다나. 치료를 받든 받지 않든 어쨌든 살아날 사람 1번, 치료를 받아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2번,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사람 3번, 이렇게.

“넌 지금 그 1, 2, 3번 중에 어느 쪽 같으냐?” (245페이지)

 

각자 화자가 되어 두 사람, 탈영병과 조폭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들려오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두 사람이 조우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바로 그 장면, 차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우연히 마주친 눈빛이 시작이다. 눈깔아 안 깔아? 그래, 해보자.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드는 두 사람의 전투력은 말 그대로 사생결단이었다. 끝장을 보자는 의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달려들고 죽자고 덤비는 게 평범한 모습은 아니잖아? 그런데 내 눈이 이상한 마법에 걸린 듯하다. 미친 듯 전투력 상승하는 둘의 모습이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니 어쩌란 말이냐. 이 장면은 두 사람이 꼭 한번 그렇게 만나야 할 것만 같은, 그게 정답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게 옳은 게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누가 나에게 확신을 줬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누가 나 좀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줘, 라고 간절하게 바랄 때 상대가 나타났다. 탈영병에게는 조폭이, 조폭에게는 탈영병이. 그 둘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카페 주인까지. 모두에게 필요한 딱 그 순간이 찾아온 거다.

 

이런 막장이 어디 있어? 라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막장이 아니라 끝장이었다. 팔팔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다. 뭔가 터지는 시점이 어디쯤일까 싶은 마음으로 한 페이지씩 넘겼다. 영화 같은 장면에서 ‘아하~! 이 녀석들답구나’ 싶었다. 그래, 그 정도는 보여줘야 잉여를 밟아버릴 배짱이 있는 거지. 작가가 되겠다고 전공을 살리다가 아나운서로 진로 전향하는 설희가 현실이다. (설희는 군바리의 찬 전 여친) K대는 일류가 아니라 S대 못 간 애들이 가는 대학이라며, 자신보다 스펙 좋은 남자를 선택한 여친의 결혼식에 가서 난동을 부리고 말았던 곽 병장은 엿 같은 세상의 진실이다. 두목보다 위에 있는 사람, 두목 싸모가 진짜 두목이라는 건 조직에서도 적용되는 피라미드 생존방식이다. 두목 싸모가 대놓고 똘마니를 강간해도 할 말 없는 게 약자가 강자를 바라보는 본능 같은 것.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반칙에 반칙을 더 해서라도 세상과, 불평등 부조리와, 지리멸렬한 삶과 화해가 아니라 들이밀고 보는 거야. 반칙 좀 하면 어때서!

인생이란 뭐냐.

이 철학적 질문은 누군가에게 된통 두들겨 맞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울 때면 꼭 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느 댄 그게 질문 자체, 인생보다 더 궁금하다. ‘된통’에다 억울하게까지 맞았을 땐 질문이 한층 깊어진다.

도대체 이놈의 인생이란 뭐란 말이냐, 썅! (214페이지)

 

이게 뭔가 싶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유쾌했다. 물론 이들의 앞날이 평탄할 거란 생각은 안 한다. 이렇게 흘러가도, 저렇게 굴러가도 앞으로 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그것마저도 알 수 없다. 내가 탈영병도 아니고 민간인으로 귀화한 조폭 똘마니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건 그렇게 살아가면 언제 어느 때 불쑥 찾아올 이성,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머리를 두드릴 때 다시 또 전투력 상승하여 혈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한 번씩 부딪치면서 앞으로든 옆으로든 또 굴러가고 흘러갈 테니까 말이다.

 

문장 곳곳에 녹아 있는 재치가 이 책을 즐겁게 읽게 한다. 사투리와 비속어, 유행처럼 번지던 은유의 말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세상 풍자극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청춘소설이라 불리지만 우울한 게 아닌 웃음 나면서 통쾌하기까지 하니 개운하게 뛰고 땀 한 바가지 흘린 기분이다. 이야기의 재미가 뭔지 그대로 느끼게 해 준 소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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