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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여자
카트린 아를레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당신이 남긴 건, 잿더미뿐... 『지푸라기 여자』
제목이 이렇게 서글플 수가 없다. 아무 힘도 없이 바람에 휙휙 날아가기 일쑤면서, 불이 붙어도 쉽게 타오를 수밖에 없으면서 또 금방 사르르 꺼져버리는, 겨우 잿더미 살짝 남기는 정도만 허락되는 물체. 상당히 나약하고 절망적인 여자가 바로 연상된다. 읽어보니 ‘딱’이다. 이 소설을 그대로 표현하는 제목이다. 반면에 질릴 정도의 교훈을 선사하며 몰입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아, 역시,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건 없어... ㅠㅠ
서른네 살의 힐데가르트. 전쟁의 폐허로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부모도, 돈도 없다. 간신히 번역일로 하루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현재도 미래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 나아질 것이 없어서 의미 없는 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그녀가 기대하는 건 신문의 구혼 모집공고다. 돈 많은 남자가 구혼 공고를 내기만 기다린다. 주저할 것 없다. 바로 편지를 보낼 것이다. 아직은 얼굴도 예쁘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자신의 매력에 빠져들 거다. 이런 허무맹랑한 기대감이라니. 하지만 삶에 반전도 찾아온다. 정말 신문에 구인공고가 났다. 누군가 여자를 구하고 있다. 감이 왔다. 이거야. 힐데가르트는 바로 편지를 보내고 칸까지 날아가 면접에 응한다. 뭔가 잘 될 것 같다. 억만장자의 비서라는 60대로 보이는 남자 안톤 코르프가 그녀가 필요한 모든 것에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고용주인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욕심 많고 괴팍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안톤은 칼에게 힐데가르트가 접근할 수 있는 계획을 털어놓는다. 모든 게 잘되고 있다. 쉽지 않아 보였던 힐데가르트와 칼의 결혼이 성사된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절반쯤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전개다. 식상하지만, 욕하면서 끝까지 보게 되는 막장 드라마처럼 저절로 읽게 된다. 가진 것 없는 여자가 살날이 많지 않은 억만장자를 만나 결혼하고, 그 후에는?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거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게 아니기에 그 시도에 대한 어떤 반감 같은 게 그녀에게 다가와 남은 생을 훼방 놓을 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살면서 이런 행운(?) 한 번쯤 찾아와줄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니겠나 싶은 공감에 그녀의 성공을 기원해줄 수도 있겠지. 그럼 힐데가르트의 운명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건 끝까지 읽어봐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때론 계획한 대로 쭉쭉 흘러가는 인생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그 당연함 때문에 불시에 침범할 불행의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눈을 가리게 하는 건 인간의 욕망이라는 건 불문율처럼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무엇이든 가능하게 필사적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도 인간의 욕망이다. 누군가 독백처럼 읊어대는 고백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험 쉽게 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그 욕망의 실체는 보는 순간, 무릎을 쳤다. 아, 이 정도의 치밀함이라면, 그 정도의 준비성이라면, 당신 욕망이 행한 모든 것을 인정하겠어. You win!
여러 동화가 버무려진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지만 가독성 있다. 게다가 다 읽고 나니 정말 잔인한 교훈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무슨 일을 하려거든 치밀한 계획과 준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끈기 있게 기다려야 이룰 수 있다는 것.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범죄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해피엔딩 인생일 테니까.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세상엔 나를 향해 덤벼드는 공짜도 없고, 그냥 얻어지는 행운 따위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 혹시라도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아, 역시, 현실은 이런 거야...
“그건 유치한 낭만주의요. 억만장자가 그런 신문 공고를 통해 여자를 구할 것 같소? 아무나 은막의 대스타가 되고, 아무나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고, 아무나 세상을 뒤흔드는 살인사건을 저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억만장자와 결혼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234페이지)
이런 교훈, 간만에 쫄깃하다. 기존 출간본의 디자인이 참 손이 안 가게 느껴져서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싶었는데, 엄청난 기대를 한 것에 비하면 재미는 좀 덜하다. (아무래도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이다.) 하지만 60여 년의 시간을 건너왔음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음에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누구나 눈치챌만한 뻔한 전개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데, 결말까지 맘에 든다. 괜한 기대감이나 ‘그래도~’ 싶은 결말을 만드는, 드라마적인 냄새 폴폴 풍기게 하면서 마무리되었다면 난 실망했을 거야. (물론 이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결말은 다르게 그려졌다고 하지만 말이다) 추리소설이라고 하는데, 장르 구분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니 편하게 손에 들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