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자매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굉장히 친한 사이인 두 여자의 이야기일까. 나의 예상은 이 정도였다. 제목에서 풍기는 이름이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소설을 펼치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어느 정도는.


노라와 모라는 7년을 같이 살았다.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돌배나무의 뜻을 가진 이름, 노라.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삶이 팍팍한 이유가 노라 때문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어느 날 엄마가 만든 자리에 따라간 노라 앞에는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모라와 그녀의 아빠가 앉아 있었다. 사실 모라의 엄마는 오래전 집을 나갔고, 아빠는 먼 친척에게 맡겨둔 모라를 가끔 보러 올 뿐이었다. 그런 모라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아빠는 노라의 엄마와 재혼했다. 그렇게 노라와 모라는 7년을 자매로 같이 살고, 이 부부가 다시 이혼함으로써 남남이 된다. 한때 가족이었다가 남이 된 사이, 하지만 두 사람이 가족이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은 고백처럼 읊조리는 노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기 이름의 뜻을 말하는 삼십 대 여자의 일상이 평범하다 못해 무료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가끔 들리는 엄마의 근황과 과거, 그녀가 기억하는 어느 순간의 이야기와 모라. 무엇보다 노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참 담백하다. 아니, 이건 건조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혹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일상의 모든 것이 무심하다. 타인의 감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럴까 싶은 궁금증이 생길 무렵, 어쩌면 노라의 그런 성격은 엄마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라의 엄마는 노라가 자기 딸이 맞는가 싶게 냉정하게 대했다. 엄마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로 수도 없이 상처받았던 노라. 하도 찔리기만 해서 그 부분이 단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도 노라의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노라의 지금 모습이,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 받지않는 모습이 엄마 때문에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노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는 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인데, 소설의 앞부분이 노라의 이야기였다면 후반부는 모라의 이야기다. 마치 그동안의 세월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라는 노라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면서 장례에 와달라는 말을 꺼내는 모라. 문득 노라가 되어 모라의 전화를 받는 나를 상상했다. 한때 자매였지만 이제는 남이 된 사이에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나는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모라 아버지의 장례에 내가 참석해야 할 의무나 이유가 있을까? 이제 나에게 없는 존재들에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 걸까. 수많은 물음표로 이들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쓰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아직 이들의 마음과 의도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같은 상황과 사건을 두고 경험한 시간 속 기억에서 상대와 내가 전혀 다른 이미지를 꺼내고 있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남는다. 그러니까 이런 거 말이다.


노라에게 엄마는 자기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개념을 새롭게 쓴 존재 같지만, 모라가 바라본 노라의 엄마는 그냥 엄마다. 똑같은 딸로 대하지만, 노라의 엄마는 모라보다 노라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곤 했다. 모라가 어린 나이에도 생존의 법칙을 알게 된 건 이런 소소한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아빠가 결혼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에게 미움 받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몸이 먼저 배웠다. 이들에게 잘못보이면 또 아빠가 맡겨놓은 시골의 먼 친척 할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모여 사는 게 지금도 앞으로도 좋을 거라는 어린 마음의 계산 같은 게 모라를 휘어 감고 있었을 테지. 엄마에게 상처만 받았다고 기억되는 시간의 노라와 그런 엄마마저도 부러웠을 모라의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들려오는 게 참 아프기만 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바쁘고 그들만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과 생각 따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순간들이 이기적인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부모의 정서적 학대와 방치로 유년기를 보냈던 두 소녀의 만남은 세월이 흘러서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로 가슴에 묻고 산다. 헤어진 후로 서로 잊고 산 듯하지만, 사실은 문득 한 번씩 찾아왔던 사람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노라와 모라는 서로를 보면서 자기에게 비어 있는 것들을 찾는다. 노라가 보는 모라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물론이다. 모라의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노라는 부러워했다. 자기에게 없는 성격이 저 아이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고 믿었을까. 사실 모라는 타인의 시선에 반응하고 맞춰주며 사는 것을 배워야 했던 건데. 모라에게 노라는 새침한 아이였다, 정작 노라 자신은 상처받았다고 여기며 외톨이처럼,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하루를 지낸다고 생각했을 텐데.


울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은 없다. 그 마음이 뭔지는 나도 잘 몰랐으니까. 다만 입술을 깨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뻣뻣해지면 덩달아 목이 아파져서 울고 싶어진다는 걸 알 뿐이었다. (68페이지)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모라의 시선과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심하게 살아가는 노라의 시선이 겹쳐지고 얽히면서, 이제는 다른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만든다. 다시 만난 노라의 무심하지만 담담한 말들로 모라는 이제 자기 자신으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고,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가기보다는 이제는 스스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다짐 같은 거. 노라 역시 타인에게 무심해지는 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시간을 뒤로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이 두 여성의 미래가 희미하게나마 그려지기 시작한다.


왜? 왜요?

나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묻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마음이 있듯이,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나는 모르고 그들은 아는 마음과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마음. 그 사이에 우리가 있다. 이유를 묻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마음들. 그건 아주 오래되고 사적인, 비밀들이고 그 비밀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덧붙이고, 이어갈 거다. 내가 묻고, 또 묻는 이유다. (186페이지)


아마 각자의 시선대로 느끼면서 생각하고 살아왔을 그녀들일 것이다. ‘나 때문에, 나만 아니면’이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며 생존의 순간을 버텨왔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이였을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하면 아프기만 하다. 가족이기에 감당해야 했던 감정과 상처가 더는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다. 결국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들의 삶은 다시 시작되는 셈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존재하는 많은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같은 기억으로 남은 어느 날 밤. 태풍이 지나가던 그 밤의 기억은 두 사람에게 비슷하게 남았다. 모라가 노라의 이불 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던 그 밤, 혼자가 아니라는 고요하고 따뜻함을 실감했던, 혼자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떠올렸던 그날의 기억.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을 그 순간이 그대로 전해진다. 힘들었을 모든 순간에, 나만 아픈 건 아니었을 거라는 위안이 되는 단 한 장면이 새겨진다. 어쩔 수 없이, 언제나, 우리는 모두 혼자인 시간을 살아갈 테지만, 그때마다 ‘함께’였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


노라와모라,김선재,다산북스,다산책방,소설,성장,치유,위로,위안,책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요?"

"잘 팔리는 집이요."

일 년 전,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 주변에서도 부동산에서도 똑같이 말했다. 잘 팔리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집을 팔고 나갈 때를 먼저 생각하고 하는 말이 우습기도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진지하게 새겨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손으로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닌 때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안다고 해도 눈 뜨고 코 베이는 시대이니 무섭기만 했다. 한참을 더 보러 다니면서는 귀찮고 힘들기까지 했다. 집값을 예상했음에도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심란하던 때였다. 이사할 때 필요한 이런저런 비용까지 생각하면 집값을 매매 가격 그대로만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큰돈이 오고가야 했으니, 결정도 신중해야 했다. 먼저 예산을 정하고 가고 싶은 동네를 몇 군데 추렸다. 그 동네의 거의 모든 집(아파트)을 보러 다닌 것 같다. 석 달의 주말을 집을 보러 다니면서 보냈다. 집을 보러 다닌 지 석 달 만에 겨우 집을 계약하고, 계약 후 거의 넉 달 만에 이사를 했다. 나에게는 첫 이사였다.


나는 한 존재를, 한 시절을 잃고 이 집에 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슬픔과 상실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그조차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될 것이다. (181페이지)


사실 집에 관해서라면,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사하기 전 엄마와 살던 집이 내가 살던 집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이사를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 집에서, 나는 나왔고 엄마는 아직 살고 계신다. 작고 오래된 집이다. 여기를 고치고 저기를 조금씩 넓히면서 여덟 식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던 엄마의 공간이자 지금 엄마에게 남은 전부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니, 이제 더는 손댈 수 없는 낡은 집이 되었다. 길게는 1년이라는 시간을 잡고 이제는 엄마가 이사할 집을 생각하는 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다. 울컥해지는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듣기만 했던 엄마의 시간을 상상했다. 나는 기억도 못 하던 시절, 엄마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이사 다녔다고 했다. 어떤 날을 한밤중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옮긴 적도 있단다. 내 기억에 없는 엄마의 그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가끔 생기는 큰일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해야 하는 생활이지만, 지금은 쫓기듯 이사하는 상황을 모면했으니 다행인 건가.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부자인 걸까.


대구 북성로의 첫 집은 저자의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곳이다. 조부모와 부모, 부모의 형제들, 저자의 자매까지. 지금은 드문 구성의 가족이 그 집에 살았다. 오래전 우리가 익숙하게 생활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남편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이었고, 아내는 아이와 시부모를 돌보는 게 역할이라고 여겼던 시절. 시어머니는 아들 가진 존재로, 여자가 아닌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자매는 한 방을 나누어 썼으며, 삼촌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게 저자의 부모였다. 아버지에게는 서재가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집안의 어느 곳도 엄마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엄마의 방을 묻던 딸에게 집안 모든 곳이 엄마의 방이라고 말하는 표정이 저절로 읽혔다고 말하면 내가 오버일까.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틈틈이 책을 읽던 저자 엄마의 시간 어디에도 엄마의 방은 없었다. 역할을 구분하고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읽히는 문장 앞에서 수시로 울컥했다. 엄마, 아내라는 이름으로 감당했을 상처의 무게가 보여서다. 어쩌면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공간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할의 구분은 물론이고 방공호도 있던 집이라고, 중국 요릿집 회전판이 놓인 식탁이 있는 북성로의 집은 그들이 곧 이사하게 되는 수성구의 명문 빌라와 대조적이었다.


수성구의 명문 빌라는 갑자기 시대가 확 바뀐 느낌이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 학군 따지면서 "어디에 살아?" 하는 물음에 우쭐하며 대답할 수 있던 시절의 저자가 본의 아니게 세상을 한번 배운 때였다. 그전까지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들 모여 살면서 부대끼고 같이 먹고 잠자는 곳이 전부였다고 생각했다면, 명문빌라에서의 시간은 집의 개념을 새로 배운 곳이 아니었을까. 집의 브랜드로 경제력을 따져가면서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게 슬픈 건지 현명한 건지 모르겠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보던 내용인 것도 같다. 민간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사이에 둔 학교의 아이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차단벽, 옆 아파트의 놀이터 출입금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또다시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보냈던 20대의 저자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던 여러 방과 원룸, 다세대주택을 거친다. 그때 봤던 가난의 흔적들, 상대적 시선의 부와 가난 그 경계를 서성이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을 쓰고 14인치 TV로 세상을 읽으며 자발적 감금 상태였던 시간은 불안의 나날이었고, 누군가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내가 그 피해자가 되지 않은 순간에 안도하는 나날이었다. 어쩌면 가난은 불안과 동의어로 다가왔던 시절인지도, 저자가 바랐던 품위 있는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던 거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58~59페이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04페이지)


여러 방을 거치며 동생과 함께 살던 집을 뒤로 하고, 다시 혼자임을 맞이하며 구했던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집에서의 시간은 가장 의미 있어 보였다. 읽는 나에게도 뭉클한 순간이었다. 비로소 독립적인 존재로 바로 서는 어느 공간의 입구에 있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순간이 만든 건,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거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집을 고치는 일이 왜 필요했을까. 다시 혼자인 공간을 만들면서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러니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삶을 시도했는지도 모르지. 그전까지의 시간이, 몇 년 동안 여러 방(집)을 거치면서 보여주고 싶은 시절이었다면, 행신동의 집은 부끄러운 기억을 묻어두고 성장하듯 발을 디딘 곳이라고 보인다. 요가와 수영을 배우고, 유럽을 여행하고 유기견을 임시 보호했다. 그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일상을 이곳에서 채웠다. 보호하던 유기견은 반려견이 되었고, 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인연은 애인이, 남편이 되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짝사랑의 고백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저자는 자기만의 삶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듣다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사실은 꽤 어려운 시도였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 해외여행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친 적이 여러 번이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쉽지도 않은 일이 되고야 마는 걸까. 몸의 불편함을 느껴서 요가나 수영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선뜻 등록하지 못하고 학원 앞에서까지 망설이게 되는 서성임.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일이 이렇게 가벼운 발걸음일 수 있을까? 무심코 드는 의문에 답을 주는 건 저자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자산이라고 여기는 집의 의미를 다르게 겪어온 저자의 경험이 삶의 다른 방향을 열어준 거라고 말이다. 내가 집을 구하면서 들은 조언처럼 잘 팔리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채워가는 시간이 준 것은 거대했다. 수많은 이사로 만들어진 집에 대한 생각이 현재 저자가 머무는 집을 채우고 있다.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조금만 걸으면 숲길이 보이는(이른바 숲세권? ^^) 곳에 터를 잡고, 일상을 보낸다. 저자가 경험한 집들이 곧 저자의 역사가 된다. 그 집들을 거치며 성장한 한 사람의 내면에 무언가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을 생각하니, 당시에는 힘들다고 여겼을 순간들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거쳐 온 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의 힘을 말하고 있다는 게 저절로 느껴진다. 세월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그 공간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다 알지 못할 지금의 다짐이나 생각 같은 거.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배경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집 자체보다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때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오랜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이, 아빠, 엄마, 모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주방이나 거실처럼 공동의 공간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혼자 존재하고 싶을 때 거침없이 문을 열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곳, 쏟아지는 눈물을 펑펑 쏟아낼 수 있는 곳. 그런 공간을 가진 집을 생각하면 또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좋은, 좀 더 넓은 집을 꿈꾸며 그 집에 존재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지니까. 그런데도 저자의 이야기에 소박한 공간을 더 떠올리게 되는 건, 물리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비좁은 곳에서 부대끼며 걸어온 시간이 만들어준 '나'라는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많아서 단 한 번도 나만의 방을 가져보지 못한 나였는데, 언젠가 나만의 공간을 꿈꾸던 그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비로소 나만의 공간이 생겼는데도 그리워지는 어떤 것들 때문에. 그러니 '나만의 방'의 문제는 물리적인 '방' 자체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두 가지 감정에 힘들었다. 그 오래되고 낡은 집에 엄마를 버려두고 온 것 같은 죄책감과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은 그 집에서 나온 홀가분함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먼저 생각나는 집이었다. 나의 몇십 년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사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자의 명문빌라 시절의 대조적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마을, 오밀조밀 모여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정겹게 느낄 수만은 없었던 시선을 먼저 배웠다. 그 집에서 우리 형제자매는 울고 웃으며, 부대끼고 싸우면서 자랐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하나둘 집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떠났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엄마만이 그 공간에 남았다. 자랄 때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 커서는 잠시 머물고자 했던 선택으로 물리적인 공간이었던 집은 이제 우리에게 무엇일까.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198페이지)


저자의 문장 곳곳에서 마주했던 가족, 여자, 엄마의 공간을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 집은, 내가 새로 꾸린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내일을 고민하는 곳이고, 엄마에게 새로 만들어줄 공간을 그리고 상상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당연하게 나에게 내어준 방 한 칸을 채우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아직은 달랑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 구석구석에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에게 또 무엇을 채워줄지 궁금하다. 여전히 게으르고 미흡한 것투성이지만,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볼 나를 그리는 일은 즐겁다. 동시에 단 한 번도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 없던 엄마의 공간을 같이 만들어가고 싶은 욕심을 맘껏 부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시간은 기다림과 간절함, 설렘으로 채워지겠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을 상상하는 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그렇게 만들어갈 엄마와 나의 또 다른 역사를 기대한다. 엄마와 나 각자의, 엄마와 나 우리 모녀의 삶을 만들어줄 집, 방, 공간, 자리를. 너무 늦게 독립한 나의 미안함을 고백하면서, 나의 성장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엄마의 고생에 보답하기 위한 기다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0-1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다 한 번 이상 울 거 같은 예감이 드네요~ 벌써 찡...ㅠㅠ

구단씨 2020-12-21 21:33   좋아요 2 | URL
어떻게 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싶었어요.
순간순간 뭉클해지고, 가슴이 서걱거렸네요.
추천합니다. ^^

scott 2020-1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구단님,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이구절은 나한테 하는말 마음을 들킨것 같네요 집이라는공간 가족 그리고 시절 ,,,뭉클해지는 이야기

구단씨 2020-12-25 00:50   좋아요 1 | URL
문장이 너무 좋죠? ^^
진짜 뭉클한 부분이 많았어요.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0-12-10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구단씨 2020-12-17 14:4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내년에도 좋은 (수세미)작품과 좋은 일상 이야기 계속 들려주세요. ^^

scott 2020-12-2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서재 달인 축하 축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V 내일은 메리 크리스마스ᒄ₍⁽ˆ⁰ˆ⁾₎ᒃ♪♬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지금?'이라는 부정의 물음을 하고 싶은 일. 살면서 그런 순간 참 자주 맞이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절망과 좌절을 무기 삼아 핑계를 찾는다. 이래서 그랬던 거야, 하면서 말이다. 무너지고 힘들어지는 지금이 너무 당연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나 이렇게 힘들어하는 중이니까 좀 봐줄래?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리는 넘어지고 절망하고 괴로울 때마다 내가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어야 할까. 어쨌든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숙제가 남았는데, 그 숙제를 다시 하기까지 얼마나 더 스스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느냔 말이다.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빨리 그 바닥을 치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뿐 만은 아닐 터. 근데 참 웃기다. 막상 그 불행의 순간을 내가 감당하고 있을 때는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요즘 며칠이 그랬는데, 이 책을 몇 페이지 넘기면서 마주한 시 한 편이 그 불행을 감당하고 바닥을 짚게 하는 듯하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에 대하여, 55페이지)


'아무리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생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저자의 말에 이상하게 공감된다. 그래, 바닥을 짚어야만 하는 순간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넘어지고 싶었던 적 없고, 고통을 마주 하고 싶었던 적 없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언제나 자기 맘대로 왔다가 나한테 부딪히고야 말았던 게 바닥을 보게 하는 일들이 아니었나. 알면서도 애써 공감하려고 하지 않았던 적도 있겠지.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만 이렇게 매정한 거야,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시련이 마치 나에게만 이러는 것 같아서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용기도 내고 싶은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 불행의 끝과 바닥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바닥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그 바닥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언제나 마주치는 그 바닥은 그냥 딛고 일어서야 하는 거라고. 어찌 보면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일의 정답이 아닐까. 그 바닥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까?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술 한잔, 183페이지)


이 시의 첫 구절을 읽고 웃음이 나더라. 인생과 나 사이가 무엇이라고 술 한잔 운운할까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듣고 나니 웃음과 진지함이 동시에 표정에 그려진다. 인생을 객관화해서 보다 보니 내가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인생과 나의 관계에서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았을까?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너도 나에게 줘야지 하는 심정이었을까? 그러네, 세상사 뭐든 주고받기가 기본인 것 같은데, 내가 인생에 닿은 것만큼 인생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나 보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과 내가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였다고,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뭐든 가능한 거라고. 준 것과 받은 것을 계산하는 사이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을 주고받는, 그 사랑이 일방적일지라도 괜찮은 거. '인생에는 형식이 없고, 인생에 형식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바로 그거'(187페이지)라고 말하는 그의 깨우침이 인생의 연륜 같았다. 계속 겪고, 걸어오고, 부딪혀온 사람만이 배우는 삶의 자세 말이다.


내가 아는 저자의 시는 많지 않다. 그의 시보다는 산문을 접한 기회가 더 많았다.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는데, 그의 시가 노랫말이 된 게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다. 역시 좋은 글은 누구나 알아보기 마련인가 보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또 다른 영상으로 연결되어 그 감동을 이어간다. 이동원이 부른 <이별 노래>는 이 책에서 처음 보고 검색해서 들어봤다. 어떻게 이 가사에 이런 멜로디가 잘 어울리게 불렀을까 싶을 정도다. 듣다 보니 귀에 익숙했다. 정호승의 시와 연결해 생각하지 못하고 귓가에 흘리듯 들어왔던 것 같다. 그가 쓴 60여 편의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생각들이 함께 들려오니 시의 해설을 듣는 기분이다. 행간의 숨은 의미까지 들어가면서, 혹은 감정의 숨은 말들까지 엿본 느낌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이 자신의 문학을 이루는 한 몸이라고 생각한 저자가 이런 책을 바라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시를 쓰던 그 순간의 생각들을 그대로 읽히게 하고, 간직해온 추억과 경험들이 구절과 구절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반세기 동안 시를 노래하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시선이 애틋하다. 총 4부로 나눈 구성이 그의 인생 4편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시인, 문학가인 스승들,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가 걸어온 시간 동안 마주한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는 시 <산산조각>부터 시작해서, 법정 스님과의 인연, 시인 정채봉을 생각하는 마음, 거리를 두지 않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까지. 그의 경험과 배움과 성장은 경계와 구분 없이 자라났던 듯하다. 시와 산문에서 그의 생각과 고민,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담아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도 그 풍경에 같이 빠져든다.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닿아있던 인생과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우연히 키우게 된 강아지 한 마리에게 마음을 붙이는 과정이 흐뭇하고, 지인들과 함께했던 기억에 그리워하고, 부모님의 시간을 다시 새기는 모습이,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그 모든 감정을 글로 표현한 것일 뿐, 우리와 같은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인간미가 넘쳤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가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 533페이지)


특히 4부에서 많이 들려온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유대감이 없던 나도 울컥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관 속에 시를 넣어드리는 마음이 뭘까. 언젠가 겪을 나의 시간에 무슨 준비를 할까 잠깐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가이기에 앞서 인간 정호승을 더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작가가 부모님을 얘기하니 나의 부모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계산해보니 내 나이가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 훌쩍 넘겼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나를 낳고, 많은 자식을 키우던 엄마의 시간과 노력을 다 알지 못한다.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고생하던 엄마를 떠올릴 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엄마가 되어봐야 엄마의 심정을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오랜 세월 어지럼증으로 고생하시면서 고통의 순간을 버티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만이 엄마의 보살핌을 받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다짐과 후회가 생긴다.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여동생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돌아가시면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좀 힘들지만 무리해서라도 엄마가 필요한 것들 해드리고 싶다고. 지금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강밖에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까. 저자가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떤 추억과 후회를 같이 떠올리는 걸 보면, 어떻게 해도 후회는 따라올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덜 외롭고 덜 우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면 되는 걸까...


늦은 밤, 오래된 친구와 술 한잔 나누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시간 비슷한 경험을 쌓으며 걸어온 누군가와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시와 산문에 오랜 세월을 안주 삼아서. 책 제목처럼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외로움이 더 큰 것 같다. 아직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74페이지)


글쎄, 버티는 삶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근데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참 모순이기도 하겠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틈틈이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절망의 근원을 찾아내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원망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질까. 갈팡질팡, 힘들다가 괜찮다가 하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로워지는 건 싫고. 그러니까. 신경질이나 짜증, 찡그린 얼굴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게 싫은데, 그게 쉽게 변할 수도 없는 방식 같아서 화가 나는 일 반복된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다. 책으로 출간한 몇 권, 그 안에서도 몇 문장을 읽으며 방송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말투가 그대로 옮겨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책을 보고 드는 생각.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또 어려운데, 글의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다. 그 변화가 싫거나 이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어떤 순간을 건너온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게 보여서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게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항상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절대 그의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이고, 그걸 부정하려면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던 시간. 이미 다 알겠지만, 그는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힘들다는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건강해졌다. 어느 날 방송에서 다시 본 그는 변해있었다. 그와 결벽증은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한 톨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자세가 너무 익숙했는데, 그는 이제 조금 흐트러진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말투도 그대로고 문장도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변했다는 건 그냥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걷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차분하게 말한다. 간절하고 친근하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109페이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웃음이 나고 용기가 되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말하고, 미칠 것 같다고 머리카락 쥐어뜯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처럼 망했다는 말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래,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었다. 첫 장은 그의 투병 경험을 말하고 이후 달라진 그의 시선을 들려준다. 나는 그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방송에서 그런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잘못했다고 해도 말로 싸우면 그를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방식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혼자였던 시간을 후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기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시간과 그 방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이에게 말한다. 절망에 빠지거나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쓰는 그의 마음이 문장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달라진 그의 시선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과 절망을 들을 때마다 그가 찾은 해법을 들려준다. 불행을 인정하는 것. 삶에 언제나 공생하는 불행이란 녀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절망과 고통을 무너뜨리는 것일 테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버티고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희망도 있다고, 우리 삶이 언젠가 빛을 낼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원하며 살아가는 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다는 농담, 54페이지)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 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60페이지)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그동안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영화나 책, 시사적인 뉴스들을 가져와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미를 전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강조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불행을 탓하는 일이 얼마나 인생을 안타깝게 만들고야 마는지 보여준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를 몰락시킨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처럼 불행과 피해의식은 우리 삶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비단 이렇게 영화 주인공이나 과거의 인물들에 빗대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 원망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또 다른 후회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처럼, 우리가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반복되는 절망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불행을 원망하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내 불행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 불행의 화살을 쏘기만 하면서 살 텐가. 불행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객관성을 키우는 게 불행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바닥에서 올라와 역작을 남긴 니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면 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조언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기 객관화로 불행을 다스린다면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과거의 불행을 발판 삼아 현재의 건강한 삶이 유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가는 인생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행이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무게 따위 느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각자의 불행은 너무 다양하고, 그 불행을 해결할 방법은 본인만 안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버티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살고 싶다는 농담, 217페이지)


오늘도 버티는 삶인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그의 위로가 담백하다. 섣부른 오지랖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 불행을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살기로 한 이들이 충분히 닮아도 좋을 삶의 자세가 그의 문장 안에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따뜻함이 더 빛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