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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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지금?'이라는 부정의 물음을 하고 싶은 일. 살면서 그런 순간 참 자주 맞이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절망과 좌절을 무기 삼아 핑계를 찾는다. 이래서 그랬던 거야, 하면서 말이다. 무너지고 힘들어지는 지금이 너무 당연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나 이렇게 힘들어하는 중이니까 좀 봐줄래?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리는 넘어지고 절망하고 괴로울 때마다 내가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어야 할까. 어쨌든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숙제가 남았는데, 그 숙제를 다시 하기까지 얼마나 더 스스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느냔 말이다.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빨리 그 바닥을 치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뿐 만은 아닐 터. 근데 참 웃기다. 막상 그 불행의 순간을 내가 감당하고 있을 때는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요즘 며칠이 그랬는데, 이 책을 몇 페이지 넘기면서 마주한 시 한 편이 그 불행을 감당하고 바닥을 짚게 하는 듯하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에 대하여, 55페이지)


'아무리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생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저자의 말에 이상하게 공감된다. 그래, 바닥을 짚어야만 하는 순간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넘어지고 싶었던 적 없고, 고통을 마주 하고 싶었던 적 없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언제나 자기 맘대로 왔다가 나한테 부딪히고야 말았던 게 바닥을 보게 하는 일들이 아니었나. 알면서도 애써 공감하려고 하지 않았던 적도 있겠지.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만 이렇게 매정한 거야,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시련이 마치 나에게만 이러는 것 같아서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용기도 내고 싶은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 불행의 끝과 바닥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바닥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그 바닥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언제나 마주치는 그 바닥은 그냥 딛고 일어서야 하는 거라고. 어찌 보면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일의 정답이 아닐까. 그 바닥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까?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술 한잔, 183페이지)


이 시의 첫 구절을 읽고 웃음이 나더라. 인생과 나 사이가 무엇이라고 술 한잔 운운할까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듣고 나니 웃음과 진지함이 동시에 표정에 그려진다. 인생을 객관화해서 보다 보니 내가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인생과 나의 관계에서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았을까?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너도 나에게 줘야지 하는 심정이었을까? 그러네, 세상사 뭐든 주고받기가 기본인 것 같은데, 내가 인생에 닿은 것만큼 인생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나 보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과 내가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였다고,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뭐든 가능한 거라고. 준 것과 받은 것을 계산하는 사이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을 주고받는, 그 사랑이 일방적일지라도 괜찮은 거. '인생에는 형식이 없고, 인생에 형식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바로 그거'(187페이지)라고 말하는 그의 깨우침이 인생의 연륜 같았다. 계속 겪고, 걸어오고, 부딪혀온 사람만이 배우는 삶의 자세 말이다.


내가 아는 저자의 시는 많지 않다. 그의 시보다는 산문을 접한 기회가 더 많았다.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는데, 그의 시가 노랫말이 된 게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다. 역시 좋은 글은 누구나 알아보기 마련인가 보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또 다른 영상으로 연결되어 그 감동을 이어간다. 이동원이 부른 <이별 노래>는 이 책에서 처음 보고 검색해서 들어봤다. 어떻게 이 가사에 이런 멜로디가 잘 어울리게 불렀을까 싶을 정도다. 듣다 보니 귀에 익숙했다. 정호승의 시와 연결해 생각하지 못하고 귓가에 흘리듯 들어왔던 것 같다. 그가 쓴 60여 편의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생각들이 함께 들려오니 시의 해설을 듣는 기분이다. 행간의 숨은 의미까지 들어가면서, 혹은 감정의 숨은 말들까지 엿본 느낌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이 자신의 문학을 이루는 한 몸이라고 생각한 저자가 이런 책을 바라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시를 쓰던 그 순간의 생각들을 그대로 읽히게 하고, 간직해온 추억과 경험들이 구절과 구절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반세기 동안 시를 노래하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시선이 애틋하다. 총 4부로 나눈 구성이 그의 인생 4편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시인, 문학가인 스승들,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가 걸어온 시간 동안 마주한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는 시 <산산조각>부터 시작해서, 법정 스님과의 인연, 시인 정채봉을 생각하는 마음, 거리를 두지 않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까지. 그의 경험과 배움과 성장은 경계와 구분 없이 자라났던 듯하다. 시와 산문에서 그의 생각과 고민,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담아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도 그 풍경에 같이 빠져든다.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닿아있던 인생과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우연히 키우게 된 강아지 한 마리에게 마음을 붙이는 과정이 흐뭇하고, 지인들과 함께했던 기억에 그리워하고, 부모님의 시간을 다시 새기는 모습이,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그 모든 감정을 글로 표현한 것일 뿐, 우리와 같은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인간미가 넘쳤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가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 533페이지)


특히 4부에서 많이 들려온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유대감이 없던 나도 울컥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관 속에 시를 넣어드리는 마음이 뭘까. 언젠가 겪을 나의 시간에 무슨 준비를 할까 잠깐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가이기에 앞서 인간 정호승을 더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작가가 부모님을 얘기하니 나의 부모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계산해보니 내 나이가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 훌쩍 넘겼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나를 낳고, 많은 자식을 키우던 엄마의 시간과 노력을 다 알지 못한다.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고생하던 엄마를 떠올릴 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엄마가 되어봐야 엄마의 심정을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오랜 세월 어지럼증으로 고생하시면서 고통의 순간을 버티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만이 엄마의 보살핌을 받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다짐과 후회가 생긴다.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여동생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돌아가시면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좀 힘들지만 무리해서라도 엄마가 필요한 것들 해드리고 싶다고. 지금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강밖에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까. 저자가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떤 추억과 후회를 같이 떠올리는 걸 보면, 어떻게 해도 후회는 따라올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덜 외롭고 덜 우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면 되는 걸까...


늦은 밤, 오래된 친구와 술 한잔 나누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시간 비슷한 경험을 쌓으며 걸어온 누군가와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시와 산문에 오랜 세월을 안주 삼아서. 책 제목처럼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외로움이 더 큰 것 같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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