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식상한데 계속 보게 된다. 알면서도 궁금해진다. 왜 그래야했는데? 언제쯤 어떻게 밝혀질 거여?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이제 4회 남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박보검 때문에 몇 번 봤는데, 한 번 안 보니까 계속 안 보게 된다. 이미 그 흐름을 눈치 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못 봐도 내용 다 알아서 기대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오직 화초도령의 미모 때문에 보기 시작했던 거니까. 사실 보다 보니, 그 시간에 하는 다른 방송을 더 챙겨보느라고 그랬다. 월요일에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다가, 화요일에는 엄마가 <집밥 백선생>을 본다고 해서... 그럼 다시보기나 재방송을 보면 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본방송이 아니면 집중이 잘 안 되더라. 재미도 떨어지는 것 같고. 뭐, 어디까지나 그렇게 느껴진다는 느낌적인 느낌.
아, 이걸 얘기하려고 시작한 건데 말이 삼천포로 가네. 어쨌든, <구르미 그린 달빛>도 남장여자 소재다. 이런 소재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새롭지는 않은데, 뻔히 알면서도 보게 되는 이유는 그 신분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는 게 궁금해서다. 여자 주인공의 남장이 드러나는 계기가 좀 자연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보게 된다. 과하지 않게, 억지스럽지 않게. 그런데 그 전에, 꼭 이런 감정이 따라온다. '너는 남자인데, 너에게서 여인의 모습이 보여... 나는 남자인데 왜 남자인 너를 자꾸 신경 쓰게 되는 거지? 네가 다른 남자 직원(내관)들과 함께 웃는 것도 싫어! 왜 자꾸 내 눈에 거슬리는 거야? 나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게 하지 마란 말이야!'
아이고 귀여워라. 나는 이영을 보면서 그동안 봤던 남장여자 소재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성균관 스캔들>의 이선준(박유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결(공유), <미남이시네요>의 황태경(장근석) 등등. 뭐, 더 많겠지만 제대로 본 것이 이것뿐이라 기억도 여기가 한계다. <성균관 스캔들>과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드라마를 보기 전에 이미 소설로 다 읽어버려서 그 긴장감이 덜 했다. 그런데도 참 설레면서 봤더랬다. 어떡하지? 언제쯤 밝혀지려고 저러나? 큰일 나겠어. 아니지. 오히려 쟤(여주인공) 정체가 드러나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다 드러내놓고 그냥 사랑하면 되잖아. 문제될 게 없네? 됐어, 이제. 이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고민할 게 뭐 있다고. 이제 4회 남은 <구르미 그린 달빛>도 그렇게 흘러가면 되지 뭐, 암. 이후로 안 봤다고 뭐 크게 아쉬울 건 없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딱 그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틈을 비집고 들어온 건 클로에 크뤼쇼데의 『여장 남자와 살인자』였다. (이 책을 읽고 좀 실망스러웠던 건 주인공의 여장 모습이었다. 나는 정말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를 상상했던 거다. 이건 이따가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주인공 폴은 사랑하는 여자 루이즈와 결혼한다. 하지만 곧 전쟁에 참전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자기 눈앞에서 죽어가는 병사를 본 끔찍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를 괴롭힌다. 아, 정말 그렇겠구나. 그 끔찍한 장면을 바로 코앞에서 직접 봤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보고 싶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벗어나고 싶었을 거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공포였겠지.
도저히 그 상황에서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야전병원에 입원한다. 일부러 손가락을 낫지 않게 하면서 오랫동안 입원 상태로 있는데, 그것도 끝이 있는 법. 그는 곧 전쟁터로 소환된다. 하지만 폴은 다시 그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탈영한다. 헉. 탈영이라니. 그렇게 힘들었던 거구나. (그나저나 여장 남자는 언제 나오는 거지?)
탈영한 그는 자유로웠을까? 아니다. 탈영 후 그는 수배자가 되고 또 다른 감옥에서 생활한다. 파리에서 아내 루이즈를 만나지만 그는 호텔 방에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되고, 부부는 점점 경제적으로 궁핍해진다. 루이즈의 수입만으로는 생활할 수가 없던 거다. 어느 날 폴은 술 한 병이 간절했는데,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아내의 옷을 입고 여자 차림으로 술을 사가지고 온다. '아싸~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았어! 이거 별거 아니구만~'
그때부터 폴은 감옥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게 된다. 바로 여장을 하고 살아가는 것! 아내의 도움을 받아 제모를 하고 화장을 하고 여자 옷을 입는다. 여자가 하는 행동을 따라하고 점점 완벽한 여자로 살아간다. 아내와 같은 직장에 취직했는데도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완벽해, 라고 생각할 즈음. 그는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 낮에는 직장의 여직원들과 어울리며 웃음을 흘리고, 밤에는 숲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성적 쾌락을 즐긴다. (이거 이거 정신 못 차렸구만. 어쩌려고 저러나? 아내가 버는 돈으로 굶어죽을 것 같아서 취직했다며? 그것도 여장을 한 채로? 근데 이렇게 흥청망청 해도 돼?)
시간은 흐르고 전쟁도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십여 년이 지난 후 폴의 수배령도 풀린다. 아, 이젠 정말 자유롭겠군. 더 이상 여장하면서 답답하게 보내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폴의 표정을 상상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터져 나왔다. 이건 내가 그동안 이런 소재의 드라마를 보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거였는데, 폴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폴은 전쟁의 공포가 여전했고, 눈앞에서 죽어간 동료의 잔인한 모습을 잊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여장으로 살아온 시간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그의 변한 모습을 보면서 정신 못 차리고 흥청망청 하는 걸 나무랐던 순간이 다시 보인다. 물론 그의 그런 행동이 잘 한 건 아니겠지만, 그가 앓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까지 보지 못했던 거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닐 텐데.
이때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결의 대사가 내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최한결은 고은찬(윤은혜)을 향한 감정이 혼란스러워 멀리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자기감정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러면서 고은찬에게 입을 맞추며 고백한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너 좋아해. 니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젠 상관 안 해. 정리하는 거 힘들어서 못해먹겠으니까 갈 때까지 가보자. 한 번 가보자."
뭐 대충 이런 대사였는데, 문득 이 대사에서 그가 고민했을 수많은 시간이 보이는 거다. 자기 성정체성을 의심하면서 수도 없이 생각했을 거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나? 아닌데? 나는 여자를 좋아했는데? 왜 이러지?'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이영도, <미남이시네요>의 황태경도 그랬을 거다. 남자인 내가 왜 자꾸 남자에게 끌리지? 뭐 이런 고민을 계속 했겠지. 여자 주인공은 각자의 사정이 있기에 남장을 했겠지만, 그게 누군가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큰 고민을 선사했을 거란 생각을 못하게 된다. 『여장 남자와 살인자』의 폴은 그 반대의 경우이기도 하지만, 그가 다른 상대를 좋아해서 하는 고민은 아니다. 그가 겪은 전쟁의 참혹한 상황과 눈앞에서 목도한 죽음, 거기에 그가 살고자 선택했던 여장의 모습이 더해져 계속 그를 괴롭히는 거다. 전쟁이 끝나고 그가 다시 남자로 돌아왔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하게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위 드라마의 남자들과 다른 고민을 한다. 그 상황을 끝내는 법을 찾는 거다. 그리고, 찾았다.
내가 여자로, 남자로 태어나 살아가는 모습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른 것들이 보인다. 내가 가진 사고와 다르게 가는 마음이 나타났을 때 오는 혼란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지만, 정말 힘들겠구나 싶은 이해를 가지고 싶어졌다. 그동안은 그냥 웃으면서 보는 드라마와 소설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게 외치면서 보게 되겠지. '여자 주인공 너! 남장 하지 마. 쟤(남자 주인공)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알아? 모르지? 하긴 알면서도 그러면 너 정말 나쁜 애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순간을 버틸 수 있는 게 남장 밖에 없다고 해도, 다시 생각해. 남장만 빼고 하란 말이야~!'
4회밖에 안 남은 <구르미 그린 달빛>은 아무래도 화초도령 때문에 봐줘야겠다.
너무 재미있지는 않지만, 뭐, 세자 저하와 라온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의 완결을 봐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응?
(근데 원작 소설에서 결말은 어찌되나? 소설에서는 이영과 라온이 연결 되나? 원작을 안 봐서 비교를 할 수가 없네. 참고로 말하자면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드라마가 더 좋았고, <성균관 스캔들>은 원작도 드라마도 좋았음.)
(사진출처 : 여장 남자와 살인자 도서 상세페이지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522322)
『여장 남자와 살인자』에 한마디 더 보태자면, 이 이야기는 실화라고 한다. 도서 상세페이지와 책 뒷 표지에 그 주인공 폴의 실제 사진이 있는데, 음... 내가 상상했던 여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냥 체격 좋은 마담? 남자 아닐까 하면서 얼굴을 봤는데, 아마 그건 내가 이 내용을 다 알고 사진을 봤기에 그럴 지도 모르겠다. 저 모습 그대로 '나, 여자예요.' 라고 말한다면, 그냥 음, 이런 외모의 여자구나, 하는 끄덕임도 보낼 수 있겠다. 그가 여장한 외모는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의 고뇌를 듣고 보니 그런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을 듯...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