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 기도할 때
고바야시 유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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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겠지. 내 자식이 예쁘고 귀하다. 마냥 품에 안고 키울 수 없으니, 내 아이가 집 밖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걱정한다. 그저 아이를 잘 돌보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을 바라던 시절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부모는 내 아이가 또래와 잘 어울리는 것이 큰 바람이 됐다. 학교에서 별일은 없는지, 아이들끼리 무리 지어 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닌지, 무엇보다 내 아이가 왕따나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한다. 공부를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걱정이, 바로 학교 폭력이나 왕따에 시달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 되었다.


사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일은 너무 자주 들려오는 뉴스다. 피해자는 얼마나 괴로웠으면 스스로 그 고통을 끝내고야 말았을까 싶고, 가해자는 왜 자기 잘못도 반성하지 못하고 폭력을 반복하는지 화가 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피해자의 부모가 있다. 내 아이가 왜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기도 전에 눈앞에서 아이가 사라진 고통을 감당하는 부모. 당사자가 아니어서 명확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아이를 보내줘야만 했다. 아이가 떠나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이상한 퍼즐 조각들. 평소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알아가는 과정 역시 고통스러웠다. 시게아키의 아버지 역시 아들과 아내를 잃고서 진실에 근접하게 된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가족을 모두 잃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키타는 아버지의 반대를 비웃으며 공립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불량배의 타깃이 된 후로 괴롭힘을 당한다. 계속된 갈취와 폭력에 시달리던 도키타는 이제 포기했다. 차라리 죽이라며, 험한 발길질에도 웃을 수 있었다. 그날도 공원에서 류지 일당에게 맞고 있던 도키타 앞에 피에로가 나타나 도와준다. 류지 일당은 일단 후퇴하고 도키타는 살았지만, 이 평온이 오래가지 않을 것은 안다. 피에로는 도키타에게 제안한다. 류지 일당을 벌해주고 싶은 시나리오와 계획을 짜라고, 자기가 그 애를 죽여주겠다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것도 잠시, 도키타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고 완전범죄로 만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가능할까? 마음으로는 당연하게 나쁜 놈들을 벌해주고 싶지만, 더는 괴롭히지 못하게 속 시원히 죽여주고 싶지만, 그게 완전범죄로 가능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차피 살인한다는 건 살인 이후의 책임에 대해서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일 텐데, 도키타는 살인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는 것 역시 두려웠다.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매일 맞고 갈취를 당하느니 자기가 죽는 게 쉽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피에로의 제안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 건, 어차피 나쁜 놈들을 죽이는 거고, 그 살인에 죄책감은 필요 없다는 당위성이 생기기도 해서다. 역사적인 그날, 학교 폭력으로 자살이 계속된 매년 116일을 저주의 날로 만들기 위한 디데이를 설정한다. 더는 류지 일당이 이 폭력을 이어가지 않도록 이 살인을 기어코 완성하리라. 도키타 역시 그들에게 계속 당하고 있지 않으려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정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실행해야 했다. 피에로의 도움으로 이 계획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폭력의 중심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가 있다. 아이들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동시에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돈을 뺏고 의기양양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일. 같은 방식이 반복되면서 가해자는 더 쉽게 돈을 갈취하고, 폭력의 강도는 심해진다. 피해자는 처음에 반격하지만, 점점 힘을 잃는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며 포기하고, 그저 맞고 있는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때 기적처럼 그 고통을 같이 해결해주겠다는 이가 나타난다면 손을 잡지 않겠는가? 피해자가 눈앞에 있어도 다른 이들은 모두 방관자가 되어 힘 앞에 무릎 꿇고 마는 상황에서, 믿을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아무도 학교 폭력에 대해 바로 보지 않았다.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두려움에 빠져 피해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게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건 아닐까. 마치 주변의 두려운 시선을 즐기는 듯, 가해자의 폭력은 날로 심해지고 뻔뻔해졌으니 말이다.


작가는 단순히 학교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만 비추지 않았다. 피해자의 시선으로 서술하면서 독자에게 그 피해의 정도와 절망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닿게 하면서도, 가해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묻는다. 가해자들에게 쌓인 가정 폭력의 시간이 아이들을 어떻게 성장하게 했는지 확인시킨다. 피해자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의 두려움과 외면을 담는다. 폭력 앞에서 다양한 위치에 서 있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 묻는다. 지금 이 피해자를 계속 외면할 것인가? 당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성공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피해자의 고통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폭력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대물림하듯 이어지는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법이 가해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흘러갈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억울함, 부모를 존경할 수 없는 슬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괴롭힘의 원동력이 되었구나. 그 사소한 시작에서 중대한 학교 폭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181페이지)


력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미성년자이고, 가해자가 촉법소년이라는 것은 절망적이다. 갱생을 목적으로 반성하고 다시 살아갈 기회를 준다는 의미겠지만, 그 갱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이건 누가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단 말인가.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고통의 감정을 피에로 페니가 나서주었지만, 그 역시 완전한 정의는 아니리라. 그런데도 우리는 읽으면서 페니의 등장에 안도하게 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감히 시도하기까지 어려울 그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은 줄어들지도 모르니까. 가해자가 감당해야 할 죄의 무게와 피해자가 이루려는 복수의 가치를 동시에 보여준다. 무조건 악인이고 무조건 선인이 아닌 게 인간이기에, 이 폭력의 기저에 놓인 한 개인의 성장을 보면서 누구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린다.


나를 심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 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유족뿐입니다. (261페이지)


언제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폭력의 중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소설이다. 너무 잘 읽히기에 더 무거워진 이 소설이, 학교 폭력을 걱정하고 학교 폭력의 중심에 있는 모든 이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죄인이기도할때 #고바야시유카 #소미미디어 #추리소설 #소설

#학교폭력 #자살 #복수 #살인 #피해자가해자 #방관자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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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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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자기가 앉은 자리에 따른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당연하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을 것이고, 또 그 자리 아래의 사람들까지 통솔하고 맡은 일을 수행하는데 책임이 따른다는 건 진리다. 그 자리 앉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힘 때문이다. 이 소설 속 소장, 반장, 관공서와 공사 관계자들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인부들은 반장의 지시 아래 일하고 그에게 소속된 사람들이다. 반장의 팀에 합류해 공사 현장을 같이 다닌다. 여러 명의 반장 역시 공사 현장 소장의 지시를 따른다. 소장이라고 자기 맘대로만 할까. 그 역시 시행사와 공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와 절차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한다. 피라미드 같은 구조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이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그 힘을 확인하고 즐기기도 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책임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국도 옆에 파 놓은 터에 관을 메우는 공사 현장은 인부들의 바쁜 몸짓이 한창이다. 그사이에 다른 인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한 남자 선길이 있다. 반장은 그가 신경 쓰이지만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현장 소장은 선길을 멧돼지 보초병으로 세운다. 공사 현장과 멧돼지가 무슨 연관인가 싶을 테지만, 우습지도 않은 그 일의 배경에는 소장의 비리가 있다. 소장은 늘어나는 공기(공사 기간) 때문에 발생한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부족한 돈을 인부의 식사를 위한 현장식당 예산에서 챙긴다. 부실한 식사가 불만인 인부들의 항의에 소장은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멧돼지가 식당 부자재를 위한 비닐하우스 채소를 망가뜨려 놓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에 작업 현장에 끼지 못하고 어색한 선길을 밤의 비닐하우스 보초병으로 세운 것이다. 어쨌든 소장은 일 못 하는 사람을 자르지 않고 임무를 주어 하루 일당을 챙겨주고 있다는 생색을 낸다. 아무도 소장의 말에 대꾸 못 하고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우리 인생과 닮은 공사 현장의 모습에 많은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없는 현장에 무언가를 채우고 올려세워 눈앞에 보여 주는 것. 어느 날은 땅을 파고 있던데, 며칠 지나서 보니 바닥이 단단하게 메워져 있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보니 건물 1층이 올라와 있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뭔가 세워지고 만들어지는 게 신기해서 바라보기만 했지, 그 현장의 논리 속에 우리 인생이 걸렸다고 여긴 적은 없다. 하지만 닮았다. 우리 삶 역시 자꾸 배우고 노력하고 올라가면서 채워지는 거 아니겠나. 규정대로 공정하게만 오른다면 문제 될 게 없겠지만, 현실의 전쟁터는 공정하지 않았다. 은폐와 카르텔로 얼룩진 불의의 현장 그대로였다. 도덕과 윤리가 사라진, 비리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곳이었다.


관리가 아니라 힘으로 움직이는 곳이 된 공사 현장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모자라, 피해자를 성실하지 않은 노동자로 왜곡시킨다. 마치 그러니까 죽었지, 그래도 싸다라는 비난을 받아도 충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피해자의 가족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해 죄송한 마음으로 사죄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입힌 사람의 가족이 되었다는, 배우자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가야 한다. 관리자들이 관리를 잘한 덕분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46페이지)


처음 알았다. 관리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내가 아는 책임과 너무 달라서 말이다. 책임을 지는 게 아니고 지우는 거라는 말이 이렇게 섬뜩하게 들릴 줄이야. 책임져야 할 일을 만든 시작이 누구인지, 어디인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상황을 너무 쉽게 바꿔놓는 소장의 발 빠른 처리가 너무 무서웠다. 피를 흘리며 죽은 현장 근로자가 내 앞에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혹시 이거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사실인지 내 기억을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한 부조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피해와 결말을 만들어내는지 적나라해서 이게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로 여겨도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얼마나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지 확인한다. 동시에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선택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것인지를.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악당이 세상 악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주변에 얼마나 평범한 악당이 많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어쩔 수 없이 힘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다. 때로는 그 힘에 주눅 들고 타협하며,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일을 대신 떠안으며 대가를 챙기기도 한다. 힘에 기생하는 작은 인간이기도 하니까. 현실 논리와 상황 논리가 언제나 일치하지 않은 괴리감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소설 속 비극은 선을 넘는 일이었고, 불의를 보고 넘길 수 없게 했다. 슬프게도 이런 이야기는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극인데 흔하다니, 반복해서 일어나기에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게 절망적이다.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너무 익숙한 비극이 되어 이제는 그 슬픔과 불의조차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게 될까 봐. 그래서 마지막에 현경이 굴착기의 시동을 켰을 때 흥분했던가 보다. 아직 우리가 인간이기는 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이 불의를 그대로 묻어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 같아서.



#관리자들 #이혁진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 #한국소설

##책추천 #소설 #문학 #불의 #악당 #카르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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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웃는 장례식 별숲 동화 마을 33
홍민정 지음, 오윤화 그림 / 별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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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만큼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일도 많아졌다. 정확하게는 나의 죽음 이후의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윤서 할머니 말씀처럼, ‘죽은 뒤에 몰려와서 울고불고한들무슨 소용이겠는가. 살아 있을 때 한 번 더 보는 게 낫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요즘이다. 아마 그 중심에는 점점 노쇠해가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겠지. 지난 6, 조금 늦은 엄마 생신을 챙기면서 가족이 모였다. 코로나 특수 상황에 우리의 모임은 참 오랜만이었다. 각자 살기 바쁘고, 거리 두기가 필수가 된 시대를 살아가는 게 어떤 모습인지 실감하던 때였다. 별것 없는 조촐한 상차림이었다. 포장 음식 몇 가지와 미리 주문한 케이크 하나, 엄마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전부인 생신에 엄마는 울고 말았다. 이렇게 얼굴 보고 같이 밥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면서.


나 죽은 뒤에 우르르 몰려와서 울고불고한들 무슨 소용이야. 살아 있을 때, 누가 누군지 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때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안 그래?” (31페이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서로를 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유한한 시간을 살면서도, 그 시간의 유한함을 자주 잊고 산다. 언젠가는 죽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생각한다. 혹시 나의 죽음을 정할 수 있다면,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예고된 죽음이면 좋겠다고. 내 삶을 정리하고 갈 시간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보고 싶은 사람 한 번 더 보고 싶은 바람이 아닐까 싶다. 윤서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이 가지는 의미는 그래서 와 닿는다. 내가 떠나기 전에 눈에 담고 싶은 장면일 거다. 사랑하는, 보고 싶은 사람들 한 번이라도 더 새기고 가겠다는 간절함.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동화였다.


윤서 할머니가 암에 걸렸다. 치료의 시기가 지나버려 이제는 암을 낫기 위함이 아닌, 조금 덜 힘들게 지내시다가 가시는 것만이 남았다. 자꾸만 악화하는 몸의 상태를 할머니는 더 기다릴 수 없다. 자기 생전에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며 윤서 아빠에게 말한다.


사실 이 가족은 대가족이면서도 소가족이다. 집에는 할머니와 윤서, 윤서 아빠가 산다. 근처에 사는 이혼한 고모가 자주 드나들면서 윤서네 주방을 책임진다. 윤서 엄마는 중국으로 파견 근무하러 갔다. 윤서 생각에, 어쩌면 엄마는 아빠와 이혼할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은 윤서에게도 충격이었지만, 할머니의 소원이니 들어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도 경험이 없는 이 행사를 어떻게 치를 수 있을까 걱정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잊지 않으면 될 것 같다. 할머니가 보고 싶은 사람, 할머니를 보고 싶은 사람이 기억하면 되는 거다. 갑작스러운 일에 온 식구가 혼란스럽다. 윤서는 여름방학에 엄마를 만나러 상하이에 가겠다는 것을 취소했다. 고모는 재혼하겠다고 예비고모부를 데리고 왔다. 아빠는 사이가 안 좋은 형제들에게 할머니 소식을 전하면서 자주 싸웠다. 할머니가 바라는, 생일날 치르는 생전 장례식은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죽음을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질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장례식은 익히 그런 양상이었다. 죽은 이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한다. 이미 차려진 식사를 하고 아는 얼굴들과 이야기 몇 마디 나누다가 일어선다. 장례식의 주최자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죽음은 잠깐 스치듯 인사하고 나오는 자리가 된다. 그 정도만으로도 우리는 고인과 유가족에게 예를 다했다고 여긴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예의를 표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의문이 들었다. 떠나고 없는 이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보고 손을 잡고, 따스하게 나누는 안부가 더 깊게 새겨지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윤서와 친구들이 준비한 영상은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이자 생신날의 최고 선물이 되었다. 할머니 삶의 터전이었던 시장, 오랫동안 교류했던 시장 상인들의 인사를 담았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질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곧 떠날 할머니의 장례식을 이렇게 치러도 되나 싶은 걱정은 다 사라지고, 할머니가 바랐던 일을 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 중의 하나는 후회일 텐데, 소중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후회만 남게 될까 봐 걱정이 가득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죽음을 앞둔 윤서 할머니가 자기 삶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감동적인지. 활자를 읽고 있는데,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활자가 자꾸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읽으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엄마 집 TV 옆에는 작은 액자가 하나 놓여있는데,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갔던 때 찍었던 사진이다. 엄마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농담처럼 저 사진을 엄마 영정사진으로 써야겠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엄마는 또 그러라고 대답한다. 이제 우리는 언제가 감당해야 할 엄마의 죽음을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윤서 할머니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엄마의 죽음 후가 아닌 지금을 더 많이 생각한다. 더 자주 보도록 노력하자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고, 덜 미워하면서 살도록 애써보자고.


누구나 태어나고, 누구나 죽는다. 각자의 삶을 다르겠지만, 죽음의 운명은 똑같다. 인생의 끝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을 테니까. 할머니의 뜻대로 마련된 생전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눈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미워하면서 지냈던 순간도 잊은 채로,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유대감을 싹틔운다. 마치 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 선물처럼.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장례식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게 아쉬울 정도로, 감동이 한가득 남은 이야기다. 아직 죽음을 생각하는 게 서툰 우리가 배워도 좋을,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하면 슬플 장례식을, 실컷 울고 웃으면서 읽었다. 눈물은 슬프지 않았고, 웃음도 가볍지 않았다. 감동적이다.



#모두웃는장례식 #홍민정 #별숲 #어린이책 #동화

#죽음 #장례씩 #가족 #보고싶은사람들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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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는 아이들 - 어린이를 위한 경제 교육 동화 한경 아이들 시리즈
옥효진 지음, 김미연 그림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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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이런 책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경제 관념을 배우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었더라면.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만드는 책이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게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 받아서 생활하고, 자라서는 돈을 벌고 혹은 대출로 빌리기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이뤄가는 게 일상의 똑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람마다 모으는 돈이 다르고 이뤄가는 속도가 다르다는 건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다른 걸 모르겠더라.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닫는다. 경제 관념,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배우고 받아들이며 사는 게 무엇인지 덩달아 알게 된 책이다.


옥효진 선생님의 이야기는 온라인에서 먼저 알게 됐다. 처음 봤을 때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위한,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선생님으로 기억되기 위한 선생님만의 생존전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학급 생활을 보면, 이건 선생님을 위한 게 아닌, 더 자라고 성인이 되어 살아갈 아이들을 위한 가장 실감 나는 교육이라는 것을 알겠다.


13살 시우의 6학년은 활명수 나라로 시작되었다. 새 학기 첫날, 담임선생님은 시우의 학급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자고 했고, 아이들 각자에게 역할을 임명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고 책임감 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각 부서의 활동이 주어졌다. 평소 용돈을 받으면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면서, 돈이 부족하면 엄마에게 더 달라고 하면서 생활했던 시우는 새 학급의 시스템이 낯설었다. 하지만 아이들 모두 자기가 선택한 일을 열심히 수행했고, 그 역할에 따른 월급을 받으면서 시우도 활명수 나라의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나라의 화폐 미소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시우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평소 습관대로 활명수 나라에서 살아가려고 한 것. 가장 많은 월급을 준다는 청소부를 선택하고 정해진 대로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정해진 대로 월급을 받은 것 같은데 금액이 적었다. 나라에서 월급의 소득세를 떼어가다니, 이런 경우가 있나? 시우가 몰랐던 사실 하나, 우리가 일정 금액의 월급을 받으면 저절로 떼어가는 소득세와 건강보험료, 연금보험 등을 계산하지 않았던 거다. 그동안 몰랐겠지. 우리가 얻는 소득에는 소득세가 있다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엄마에게 받는 용돈으로 편하게 계산하지 않고 있는 만큼 써버렸으니. 나라에서 소득세를 떼어갔다는 것에 흥분한 것도 잠시, 시우는 과거의 습관을 못 버리고 그 월급을 가장 먼저 탕진했다. ^^ 월급으로 받은 화폐 미소로 그렇게 쓰기 싫었던 일기 면제권을 사고 급식우선권도 샀다. 일기도 안 쓰고 참 좋구먼. 급식 먹을 때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먼저 밥을 먹으니 편해서 즐거웠다.


탕진 재미도 잠시, 시우는 사라져가는 월급에 불안을 느낀다. 당연하지. 돈을 계획 없이 쓰니 불안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 책의 목적이자 옥효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 배운 경제 지식과 올바른 경제 관념으로 우리가 어른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돈을 적절히 활용하고 저축과 투자로 돈을 버는 일을 가르쳐 주는 것. 우리가 일하고 돈을 버는 건 당연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 돈을 활용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가상화폐나 주식투자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는 주변 사람들을 봐도, 부럽기만 하고 막상 그 투자에 뛰어들려고 하니 불안하다. 항상 모자라는 돈,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확실하게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 책으로 기본 공부를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돈을 잘 벌고 잘 쓰는 법을 기본으로 해서, 우리가 벌고 사용하는 돈의 흐름에 어떤 경제가 숨어 있는지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는 책이다. 급여명세서의 실수령액이 왜 그 금액인지, 나라에서는 왜 소득세를 떼는지, 가장 쉬운 은행 예금은 적금과 예금, 정기예금 등의 구분이 어떻게 나뉘는지 배운다. (사실, 아직도 이 차이를 모르는 사람 생각보다 많다) 안심하고 돈을 모을 수 있지만 이자는 적은 예금상품과 위험이 따르지만 높은 수익률도 있는 투자의 차이를 배우면서, 어떤 순간에 어떤 방법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지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새롭게 생기는지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시사한다. 월급을 많이 준다기에 청소 업무를 맡은 시우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절망한다. 이제 학교에서 외부 업체에 청소를 맡긴다고 하니, 시우는 백수가 됐다. 그나마 모자라는 월급으로 우울했던 시우는 이제 실업자까지 됐으니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사라지는 직업이 있다면 또 생겨나는 직업이 있는 법. 시우는 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 또 실업이라는 위기 상황에 대비해 고용보험도 가입한다. 단순히 월급 받는 거 말고도 사업자등록을 하고 장사를 하는 법도 배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돈을 모아야 하는지도 배운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배운 건 아니다. 아시다시피, 시우는 돈이 있으면 바라는 것을 당장에 해치우며 탕진 재미를 먼저 실천한 아이니까. 어떻게 돈이 다 사라졌는지, 장사가 잘되었는데 왜 적자인지, 어떤 아이템을 구상해야 돈이 보이는지,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배웠다. 몸으로 부딪친, 실전을 통한 배움이니 얼마나 뼈에 새겨질까 싶을 정도다. ^^ 시우만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시우의 친구들, 돈을 저축하며 모으기만 하던 하진이, 다른 사람들 따라 하면서 돈 쓰는 재미와 쓴맛을 동시에 본 원희, 태어날 때부터 경제 박사였나 싶게 똑똑한 경제 지식인 재완이 등 아이들 각자의 성향에 맞게 돈을 벌고 사용하면서 경제를 알아가게 한다.


사실 돈이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아플 때 치료받을 때도, 돈은 필요하다. 우리 일상의 모든 곳이 돈과 연관되어 있지만, 어린아이가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것처럼 교육받았다. 시쳇말로, ‘어린놈이 벌써 돈을 밝히냐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니 돈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고, 제대로 설명해주는 어른이 드물었다. 그런 돈에 관한 것을 이렇게 초등학교에서 알려주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효과가 좋은 배움이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금액의 월급을 받아도 어떻게 사용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모이는 액수가 다를 것이다. 더 많이 모으고 싶고, 더 잘 사용하고 싶은 게 돈이다. 그 개념과 활용을 일찍 배우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이 책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 어릴 때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옥효진 선생님의 반 아이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너무 중요하고 기초적인 경제 지식을 초등학생 동화에서 배우다니.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면서, 적성을 찾아내고 직업으로 받는 월급으로 소득을 올리고, 우리가 버는 모든 돈에 부과되는 세금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깊게 들어가면 이보다 더한 경제 이야기가 있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몸으로 체험하는 경제 개념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가르쳐줄 수는 없을 듯하다. 자연스럽게 경제 개념과 이해를 돕고, 돈의 흐름을 읽는 사고를 기를 수 있다는 것에 한 표. 아이들의 시선으로 배우는 취업과 세금, 사업이나 실업, 저축과 투자, 다양한 보험으로 우리가 위기를 대비하는 방식까지. 어른 세계에서가 아니라 어린이 세계에서 미리 배워야만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이 책 한 권 마련해서 나이 상관없이 온 가족의 경제 기초 도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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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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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뭉쳐야 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알았지?” (13페이지)


동생을 사랑했다. 글쎄, 가족으로의 끈끈함이었던 걸까, 아니면 동생에 맹목적으로 되어버린 이상한 마음인 걸까. 오프가르 집안의 첫째 로위는 동생 칼에게 그런 존재였다. 약간 부족한 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서 더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쉬운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형을 의지했던 동생 칼에게 로위는 조건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언제나 동생을 보호해줄 보호자, 동생이 무슨 짓을 했어도 동생 편에 설 수 있는 지지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서라도 동생의 옆에 머물 희생자. 로위의 삶에서 언제나 1순위였던 칼을 빼면 그의 인생 어떻게 흘러갔을까, 이제 와서 궁금해지기도 한다. 마냥 평범하게, 어느 시골의 작은 집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칼이 바라보는 형은 어떤 사람일까. 오프가르 집안의 둘째 칼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당했다. 어린 형제는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너무 강했고,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했던 집안의 분위기만 봐도 겁이 난다. 형보다 어린 동생에게 아버지는 더욱 커다란 존재였을 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동생의 두려움을 알아챈 형의 도움으로 칼은 학대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무난하고 무료한 날을 더 좋아했던 형과 달리, 칼은 영리한 머리로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한다. 공부하겠다며 떠난 동생에게 학비를 보내던 형에게 가끔 소식을 전하면서 형제의 우애는 지속한다. 그리고 어느 날, 칼은 형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자랐던 곳, 그 시골 마을 오스를 변화시킬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사실 칼이 고향에 돌아온 건 호텔 사업을 위해서였고, 사업을 위해서 고향 사람들의 투자가 필요했다. 그는 빈털터리였으니까. 이번에도 칼은 형의 도움이 필요했다. 거대한 규모의 사업을 구상하는 칼에게 로위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협조한다. 칼은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오르막길의 거의 끝에 있는 오프가르 형제의 집. 부모는 사고로 동시에 사망했고, 사고 흔적이 어디 있는지 알지만 찾지 못한다. 오직 형제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형 로위는 고향에서 머물고 동생 칼은 유학 끝에 집에 돌아온다. 그의 아내 섀넌과 함께. 혼자였다가 갑자기 셋이 된 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지낸다. 형과 동생, 동생의 아내. 너무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떨어질 수 없는 형제애라고 읽혔다. 타인은 모르는 그 집안만의 불행이 있었고, 그 불행의 끝에 살아남은 형제는 이제 세상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 두 사람만이 남은 상황에서 더 똘똘 뭉치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리고 이 형제의 역사에는 살인이 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일에 살인이 일어난다. 이들이 죽였을까? 글쎄. 그건 둘만이 아는 진실이겠지. 명확한 사실은, 둘은 형제이고,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언제까지나 한결같을지, 나는 이런 마음이 언제나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로위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한 기분이 든다. 로위에게 칼은 언제나 지켜줘야 할 동생이었고, 동생의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줘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형은 시골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삶이었고, 동생은 타국의 도시에서 그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든 동생이 원하는 것이라면, 이뤄지도록 돕는 게 형의 의무이자 일상이었다. 이번에 돌아온다는 동생에게 형은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갑자기 왜 돌아오는지 궁금하면서도 동생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어쩌랴. 동생인데, 상처를 안고 자란 녀석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아마도 로위는 이런 마음이 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전과 같은 건 아닐 것 같다. 세월이 흘렀고, 로위는 지금의 고요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나타나 칼과 섀넌이 아니라면, 이 생활 그대로 유지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을 텐데.


가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가족과 얽힌 문제일 때가 많다. 누가 봐도 저건 허무맹랑하고 이상한 일인데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가족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는 그런 일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를 내고 나무랄 것인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정말 이성이라는 걸 장착한 사람이 분명하게 이 혼란을 정돈시켜줘야 하는데, 이 형제에게는 그 중립을 지키며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다. 아니, 섀넌이 있었나? 칼의 아내 섀넌은 칼과 같은 마음일까? 두 사람의 등장은 로위의 일상을 흔들고, 오랜 세월 이 가족에게 감춰졌던 비밀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비밀은 비밀로 남아 있을 때 힘이 되는 법인데, 로위에게 힘이 되었던 그 비밀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 형제의 운명도 변화를 일으킨다. 형제의 아버지가 이뤄냈던 그 왕국, 오프가르 집안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은 아버지를 이어 로위에게도 운명처럼 어깨에 내려앉은 듯하다. 가문의 수치,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로위가 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 동생 칼도 보호해야 하고, 비밀이 비밀로 남도록 만드는 일도 해야 한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느냔 말이다. 가족이 무엇이기에, 형제가 어때야 하기에, 고통을 이기려고 했던 그 일들이 모두 가려진 채로 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가족관계, 피를 끊어낼 수 없는 혼란을 그대로 표현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 안에는 분명 사랑도 가족의 애정도 존재하지만, 때로는 끊어낼 수 있는 냉정함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며 가족을 끌어안는다. 하지만 범죄라면? 어느 날 뉴스에서나 보던 사건을 작가의 입으로 듣는다. 대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된다고, 가족의 강한 유대와 의리가 도덕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라고 말한다. 가족이니까 가능한 일들, 가족이니까 해서는 안 되는 일들. 이 형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품고 산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듯 자리 잡은 믿음은 이 형제에게 끔찍한 진실을 가린 채로 살게 한다. 로위가 견뎌야 했던 일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된다. 아마도 그곳은 지옥이 아니었을까. 로위는 그 지옥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거다. 후켄 계곡에 쌓여가는 시체와 망가진 자동차를 보면서, 누구도 그 진실을 찾아내지 못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 아버지가 세운 왕국을 지키면서, 마치 그는 지옥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그곳에 머문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전부 사막의 신기루야. 하지만 형이랑 나는 하나야. 우리는 형제니까. 사막의 두 형제. 한 명이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져.”

그래.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는다.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짐승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우리 모두가, 살인할 수 있는 심장을 지닌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그 지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686페이지)


눈에 뻔히 보이는 살인, 용의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왜 이들을 가만히 둘 수밖에 없는지 지켜보는 독자는 답답할지도 모른다. 법으로 그들을 심판하려면 찾아야 할 그것, 증거. 심증 말고 물증.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것 말고 눈앞에서 찾아낸 무언가로 살인자를 증명해야 한다. 의심하고 추측하지만, 아무도 이들 형제에게 죄를 묻지 못한다. 그렇게 범죄의 증거는 누구도 함부로 내려갈 수 없는 절벽, 후켄에 쌓여가고 형제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사랑으로. 혹시 지금 내가 보는 게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로위가 풀어가는 이 이야기는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마음이 자꾸 갈등을 일으킨다. 설마 하는 순간 사실이 되고, 의심하는 순간 사건은 벌어진다. 그들의 감정을 읽어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사랑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질투인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에게 이제 남은 건 무엇인가.


요 네스뵈의 작품을 좋아하고(이렇게 말하지만, 열정 독자는 아니었던 듯), 언제나 신간 출간 소식이 반가웠지만(언제나 신작 소식은 즐거움),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 쉽게 빠져들 수 없었던 건 그를 기억하게 하는 해리 홀레 시리즈를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가 빠지듯이 읽어온 그 작품들은 언젠가 완독해야 할 목표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해리 홀레 시리즈라면 신작이라도 섣불리 덤비지 못하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다. 그 와중에 만난 <킹덤>은 반갑고 또 반갑다. 새로운 독립적인 이야기인 데다가, 이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본성(?)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족 이야기이면서, 형제 이야기이기도 하고,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섬뜩함까지 마주하는 일이 내 앞에 펼쳐진다.


혹시나 나처럼, 요 네스뵈의 작품을 미친 듯이 읽고 싶지만, 그 시리즈의 두려움에 망설이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얼른 펼치라고 말하고 싶다. 단박에 빠져들고야 말 테니. 그러고 나면 이 빠진 것처럼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완독도 멀지 않았다는 기대감에 빠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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