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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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시골에 쇄석기 공장이 들어선다. 돌을 깨서 돈을 버는 공장이 깨를 키워 깻잎을 따먹고 고추를 키워 고추를 따먹는 시골을 돌가루로 뒤덮어 버린다. 뚜르르르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쿵쿵 돌깨는 소리가 점령했다. 상식으로 안되는 일이가능한 것은 뒷거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마을에 철거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던 영희 철수 부부가 둥지를 튼다.

예고된 것처럼 주민은 ‘디모’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공장은 잘 돌아가고 시위 참가자들은 벌금형을 선고 받는다. 고난 끝에 낙이 오듯 치열한 투쟁 끝에 공장이 문을 닫을 것을 알면 읽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바램인가. 작가는 이미 실패를 인정한 상태다. 그래서 절망스러웠나하면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사람의 힘, 혹은 인간의 힘이다.

이 소설을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골 사람들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해와 득실로 사람을 재고 따지는 것은 시골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도시 사람들하고 다른 것이 분명한데 그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다.

나는 그것을 순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상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 이전의 몸이며 느낌이다. 감각이고 원형이다.

영희를 보고 ‘순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순한 사람의 의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말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그 순한 영희는 할머니를 대신해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요즘 말로 할머니들의 몸의 말을 설명하고 대변한다. 영희는 그 할머니들의 몸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내 일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게 했다. 그런 영희를 할머니들은 단박에 알아챈다.

<꽃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여인들, 할머니들은 자연 그대로다.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약자로서 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나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도리짓꼬땡을 하는 남편들의 투전판을 뒤집어 없고 당산나무를 자르겠다는 남편 혹은 새시대의 권력에 온몸으로 맞서며 끝내 당산나무를 지켜내는 여인들이다. 사람이 살 곳에 돌공장(자본)이 들어서면 안된다.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고 꽃이 피고 땅에서 난 것들을 ‘음석’으로 먹어야 한다. 돌공장이 들어서서 사람이 살 수 없다면 돌공장은 잘못들어선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그저 노래를 불러 달랠 뿐이다. 그녀들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러해야 하는 당연함 혹은 순리다. 그것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이지만 그녀들은 그런 세상을 거부한다. 바꾸지 못하고 거부할 뿐이다. 1인 시위를 묵묵히 해 내듯 한 사람 한 사람 온 몸으로 살아낼 뿐이다. 그러다 고구마 밭에 몸을 놔두고 혼만 빠져 나간다.

시골은 집이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집도 사람이 없으면 시나브로 꺼져간다. 혼이 빠져나가 끝내 몸이 바스러지듯이 집도 사람이 깃들지 않으면 혼이 깃들지 않으면 몸은 곧 주저앉는다. 도시 반대 쪽 농촌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점점 빈 집이 되어간다고 한다. 도시는 돈없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용산에서 벌어진 일은 돈 없어서 도시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인간이 인간의 조건일 수 있는 것들을 자본에게 넘겨준 대가를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이 되돌려 받는 것이다. 그래서 공평하지 못하다. 순리를 거스른 것이다.

할머니들은 영희 덕분에 꽃같은 시절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 자신들이 이미 꽃이다. 영희는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소리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똑똑이들이 많지만 그들이 할머니들을 위해 해준 일은 없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똑똑한 머리를 썼을 뿐이다. 대신 시골 할머니들은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이 당연하듯 영희를 받아들인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들은 ‘순한 사람’ 영희를 알아보았다. 그런 할머니들을 알아보는 영희도 이미 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흥미로운 시선은 죽은 혼, 무수굴떠기 김천복의 아내 김오목의 혼이다. 몸을 빠져나간 혼이 집을 내려다 보며 아쉬워 하는 모습도, 조금씩 이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고요해 지는 과정도, 향기도 서서히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벼워 지는 과정이 나는 아름다웠다. 물론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지만 나는 그동안 죽음 이후를 이렇게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 글을 본적이 없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될 만큼 이승과 저승의 공간이 아름답다. 그 또한 순리일듯 싶다. 가보지 못한 곳이라 누구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동안 사후세계는 폭력적이다 싶을 만큼 나는 이 소설 속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좋았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할 것 같다. 그러하다면 몸을 두고 혼이 돌아가는 저승은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 같다. 사는 일이 중요하다면 죽는 일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이승의 삶을 마감해야 한다. 자연의 삶에 녹아들어 그 일부가 된 할머니들과 영희와 해정은 그래서 꽃같이 이뻤다. 이런 순한 곳에 들어선 돌공장은 가히 폭력이라 할 만 한다.

작가의 시선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순하다. 철수, 이장, 김오목 여사의 큰아들, 철수의 처남, 해정의 남편, 옥화의 아들은 남자들이지만 검사나 판사, 혹은 돌 공장 사장과 다른 향기가 난다.

그들이 하는 말, 언어는 곧 그들이다. 할머니들을 알려면 그녀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영희를 알려면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되듯이 판사 말을 들으면 이 땅의 권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라도 방언을 이토록 실감나게 몸의 말로 길어 올린 것은 작가의 힘이다. 데모하지 말라는 딸의 말에 제 엄마가 아무대꾸가 없자 딸이 왜 말이 없냐고 하니 니까 ‘니가 말을 하는데 내가 어찌고 중간에 말을 허냐’고 되받는 공님의 말은 사람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웃으며 깨닫게 한다. 말이 없다고 생각까지 없지 않음을 말해야 무엇하리. 그저 공님을 비롯한 순양면 할머니들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독자마다 다른 것을 본다. 투쟁의 과정에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희와 할머니들이 서로 섞여드는 시간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산 사람 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좋았다. 나처럼 즉흥적이고 극단적인 사람에게 이들의 우정은 그야말로 이드거니 물들어가는(김영민) 삶이었다. 투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삶에서 이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승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영희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려고 혼엄마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승으로 돌아간 복주어매가 또 어떤 삶을 엮어갈지 독자의 상상에 맡겨졌다. 해정은 아직도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을까 궁금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시골이, 혹은 농촌이 더 이상 망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그곳이 사람 사는 공간을 넘어 원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임을 확인하고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농촌이다. 도시에서 안되는 이유는 절대 도시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돌공장이 너무도 많다. 더 이상 들어설 곳이 없어서 농촌까지 밀려가는 것이다. 아마 온몸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4대강으로 망가지는 자연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온 몸으로 먼저 아파하는 것은 내가 그 강의 일부라면 당연한 것이다. 아파해야 한다. 막아설 수는 없다하더라도 지금 아파하는 일 조차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연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 순리에서 많이 빗겨나 있는 것이다.

기운을 차린 영희가 좋아하는 꽃을 마음껏 보고 철수도 마음 잡고 농사를 짓고 이제는 영희가 읽는 시도 함께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뭔일을 하는 지 설명은 못해도 중요한 일인 것을 알아서 떼도 안부리고 잘 커주는 복주가 제 엄마를 닮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가슴을 울리며 돌아가는 돌공장 돌깨는 소리가 매캐한 돌가루먼지에 섞여 논밭을 뒤덮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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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 어울림으로 비평으로 숲으로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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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비밀(?)을 이제서야 하나 알아냈다. 글 속에 숱한 철학자들의 말과 글이 단 한 순간도 멈춤 없이 오르내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표절을 손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는 이미 축구 선수가 아니라는 말로 대신하는 그를 읽으면서 그의 말과 그의 말이 아닌 것을 분명히 가르는 것이다. 학인으로서(그는 학자라는 말 대신 학인이라는 말을 쓰는데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그의 모습을 본다.  

 알면서도 모른체 하기라든가 몸을 끄-을-고, 산책 혹은 몸이 좋은 동무라는 말의 속뜻을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 보다 어려운 부분이 더 많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잘 들으면 곧 알아 들을 수 있다. 그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잘 들여다'보고' 잘 '듣게'한다. 아마 내가 그의 글이 읽기가 힘들면서도 읽고 싶은 이유가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의 글에 나타난 그의 면면을 더듬어 보자면 그는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고 센 사람이다. 그것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가령 "우리의 산책은 오직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의 형식이며 그 형식에서 뺄 수 없는 부분이 곧 자본제적 도시다. 도시를 정화할 힘이 없으면 이미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 곳곳에 있다. "산책 하지 않는 자는 결국 인식의 고리나 내성적 자아의 반성에 머무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다.

공부와 삶이 어긋나지 않게 이드거니 어울리며 어리눅어 가기를 희망하는 것 또한 내 공부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카데미 좀비 조차 아닌 평범한 주부지만 주부라고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내 지적 능력으로는 그의 숲 언저리조차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허나 몸을 끄-을-고 나서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러고 나니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읽게 되었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직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의 책을 몰래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를 그는 뭐라고 할까. 여보쇼 어렵고 이해도 안되는 것 그만 내려놓고 차라리 아침 드라마나 보라고 면박을 줄까. 그렇게 몸을 끄-을-고 읽는 나를 동무로서 봐줄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것이 나의 실재고 나는 내 실재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읽을 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언젠가는 산책길에 나설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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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ph 2011-03-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부님. 존경합니다.^^ 저또한 철학에 대한 보잘것 없는 바탕지식을 가진 무식한(?) 독자이지만 열심히 밑줄그으며 읽고 있답니다. 김영민 선생님의 책이 철학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히려 부정적으로(저처럼)생각했던 독자에게 열심히 읽히고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내내 강조하시는 '수행성'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철학책'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실천에 주목하게 되는 '생활의 지혜'로 읽히는게 책을 잘 읽는것 같기도 하고요.

여울 2011-04-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게 되어 반갑습니다. ㅎㅎ
 
송승훈 선생의 꿈꾸는 국어 수업 - 고딩들의 저자 인터뷰 도전기
송승훈 엮고 씀 / 양철북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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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에서 이것 저것 책과 놀고 싶은 사람으로서 나의 한계를 느끼는 때가 있다. 내가 학교 안에 있지 않다는 것. 학교 안에서 정식으로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난다면 좀 더 다르게 국어수업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야말로 공권력(?!)이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 권한을 부여 받은 교사들이 모두 그 권한을제대로 쓰고 있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는 순간순간 아, 이 선생님이 학교에 있어서 다행이다. 학교니까 이런 학교 밖 사람들이 만나주지. 개인적으로 독서수업을 하는 학생이 저자를 만나겠다고 하면 그 바쁜 저자들이 만나 주겠는가. 그러니까 송 선생님과 독서 수업을 하는 학생들은 좋겠구나. 

수행평가라는 미끼가 있다해도 일단 겪어본 학생들은 그 후폭풍이 장난이 아님을 몸소 체험한다. 송선생님 말씀처럼 책만 읽고 마는 것과 그 책과 관련된 사람들의 육성을 듣는 것은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되는 합체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교육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고 책과 관련하여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거나, 저자를 직접 만나 궁금한 것을 인터뷰하는데 사실은 인터뷰도 어렵지만 그 전까지의 과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한 사람, 한 우주를 만나는 것인데 어설픈 준비는 부끄러움만 남긴채 얼룩지기 쉽다. 그런데 이 학생들이 너무나 용하게도 그 임무를 수행한다. 이 학생들이 훌륭한 기성세대를 만나서 희망을 갖고 꿈을 갖게 되는 과정이 참으로 흐믓하다. 높은 지적 수준도 놀랍고 그들이 읽은 책의 면면도 당차다.  

꿈은 꿈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되는 체험이 값지다. 학생들이 만난 저자 중에 박재동 화가가 있다. 그의 말이 인상적이다. "배우는 것은 학생의 특권이다. 학생이 배우겠다고 하면 온 우주가 도와줘야 한다." 정말 멋진 어른이다. 이런 어른들을, 기성 세대를 만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맛이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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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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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요근래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 강의를 보면서 하버드 대학생들의 깊이있는 질문과 교수의 폭넓은 대화 수업을 부럽게 보았다. 괜히 하버드 대학생이 아니구나 솔직히 부러웠다. 날것의 말을 철학의 언어로 정리해주는 강의실의 모습이 부러웠다.  

엄기호의 이 책을 통해 나는 이 시대 청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내가 부러워했던 하버드 대학생 못지 않은 청춘이었음을 알았다.  엄기호는 선생으로서 샌델 교수 못지 않았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책은 저자가 직접 수업을 진행했던 내용이 바탕이 되었다. 문화 인류학이라는 과목을 진행했는데 수업의 주제는 다분히 사회적이다. 살아있는 주제를 선정해서 집중적인 대화가 오고간다. 그 사이 학생들은 자신들의 삶이 학문적인 언어, 철학적인 사유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다. 잉여라는 마음 아픈 현실을 위로받는 것은 내 삶이 결코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확인하는 순간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춘들을 이해하는 말로 가득하다. 청춘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들은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눈에는 백수처럼 보일지라도. 문제는 오히려 학교밖의 사회며, 제도며, 기성 세대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실감나게 제시하기때문에 공감하기도 쉽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책이, 사유가 사람을 치유할 수있다는 것을 믿는다. 책 속에도 말하듯이 누군가 내 얘기를 귀담아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삶은 비루하지 않다. 학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선생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것도 고맙다.  

유한한 미래에 저당잡혀 오늘을 즐기지 못하는 삶을 조금만 다르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치열하게 살든, 잉여로 살든 삶은 가치있다.  누가 뭐래도 자기 삶에 가장 열심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걸 인정하면 너는 왜그렇게 사느냐고 한심해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부의 깊이는 눈에 보이는 얄팍한 현실을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는 인식의 힘, 사유의 힘을 생각하게 한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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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치타가 달려간다 - 2009 제3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0
박선희 지음 / 비룡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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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십대들이 등장한다. 엄마가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한 번도 어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강호와 여동생 강이, 명문대 입학이 최고 목표인 엄마를 둔 모범생 도윤이, 다양한 이유로 주유소 알바를 하는 아미, 효진, 건우, 학교의 이경, 영재, 학원의 수연 등은 이 시대 십대들이다. 그들을 유일하게 응원하고 도와주는 김세욱 선생.
왜 십대들 소설에 음악, 그것도 하드 음악들이 등장하는가 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해결이 되었다. 거친 음악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고스란히 대변해주는 장치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씀.
마음 잡을 데가 없는 이들이 음악을 통해 마음을 모으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헤쳐갈 무기로 삼는다. 파랑치타는 십대의 외연을 상징하는 폭주족 혹은 오토바이 이름이자 이들 밴드의 이름이다. 폭주와 밴드의 차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소음과 음악의 차이.
이 소설의 장점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폭행을 가하지도 않고 육체적인 폭행도 없다. 그동안의 청소년 소설에서 날것으로 등장하는 잔인한 폭행, 혹은 폭력이 이 소설에도 없지 않은데도 폭력이 없다고 느껴진다. 극단적으로 아픔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극단적이라는 것은 과장된 몸짓처럼 느껴진다. 과장하지 않고도 현실의 아픔이나 고통스러움은 표현될 수 있다.
주유소 알바를 하는 아미가 어른들에게 희롱당하는 장면을 현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강호가 대드는 장면도 대단히 폭력적이고 거칠게 느껴질 수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육탄전이나 육두문자가 닌자의 창처럼 날아가고 날아오고 피가 낭자하고 그렇게 표현될 수있는데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작가의 힘이다.
주인공을 입체적, 살아있는 인물로 만든 것이다.
도윤은 강호 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강호는 도윤 엄마에게 좋아하는 친구를 버려야 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그 상처를 해졀하는 방식으로 강호는 도윤을 무시했다. 도윤 엄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시만난 두 사람이 조금씩 화해를 하고 가까워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지나온 시간은 두 사람에게 의미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강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강해졌고 도윤도 자기 삶을 찾아가기로 마음 먹을 만큼 강해졌다.

조력자들도 살아있다. 김세욱 선생님도 이상만 쫓는 인물이 아니면서 아이들을 돕는다.

강호에겐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인 동생 강이가 있다. 엄마처럼 늘 오빠가 무사하고 나쁜 길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강이는 오빠처럼 집을 나가지도 않고 온 몸으로 집안에서 오빠를 지키고 집을 지킨다. 강호는 강이를 위해서라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한다. 집밖에서는 인간적인 효진 누나가 있고 건우 형이 있다. 보살펴주고 싶은 아미도 있다.

도윤에겐 형이 있다. 자신의 실패를 동생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은 형이다.


거대한 한 통속이기도 하지만 그 통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삶이다. 먼 데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그가 분명히 있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는 끈떨어진 연이 아니라 이 땅에 잘 엮이고섥혀 살아갈 수 있는 의미있는 조직원이 된다. 내가 끊어지면 이 조직도 끊어진다. 구멍이 생긴다. 누가 나를 의미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파랑치타 속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로 건강하게 이 삶을 살아낼 것 같다. 인류 대학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당연한 얘기를 우상처럼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 뿐이다. 최선을 다해서.


팁! 폭주족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 얘네들이 그냥 대고말고 막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소설 속대로라면 나름 규칙도 질서도 있다는 것을.
아홉 살 아들이 ‘써바’를 하는 것도, 연발을 하고 싶은 것도 그래서 이해를 해야하는데 시끄럽다는 이유로 못하게 한다.
교장선생님처럼 그것은 옳지 못함으로 하지 못하게 해야하는가,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므로 허락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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