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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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소년의 이야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실한 결론 때문에  독자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도대체 이 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17년 동안 육체적 나이인 80년 이상을 살아버리는 삶의 속도에서 주인공은 늙는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이미 제 몸은 늙었는데 본질은 17세인 소년의 황당함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소설을 통해 나는 육체의 나이가 정신의 나이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17년의 시간이 80년 시간에 비해 터무니 없이 짧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예견된 죽음을 주인공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마음은 거기에 모아져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너무 이른 죽음이 그렇듯이 죽기에는 아까울 만큼 아름답다. 모든 자식이 그렇듯이 아름이 부모에게도 아름이는 선물같은 존재다.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아름이 부모는 최선을 다해 부모가 된다. 아름이는 최선을 다해 자식이 된다. 부모보다 일찍 늙고 먼저 죽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아름이네 가족은 누가 뭐라하든 부모 자식의 관계를 지키는데 그 과정이 내게는 무척 아름다웠고 눈물겨웠다. 철없는 열일곱살 짜리들이 그들 사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일찍 어른 사회로 들어온다. 사회적으로 아름이 부모 또한 조로를 경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좌충우돌 어렵고 고단하지만 아름이 부모는 조로증 걸린 아들을 통해 누구 못지 않게 어엿한 부모로 성장한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자못 유쾌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진지한 삶의 속살을 갖고 있다.  

태아의 시선 혹은 느낌으로 엄마 뱃속에서 느끼던 바깥 세상, 태어나던 순간의 모습들, 엄마가 된 미라의 심리묘사나 아기가 있는 방의 기운들을 묘사한 장면들은 특히 내가 아끼는 부분들이 되었다.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한 지인은 작가가 글을 참 잘 쓴다고 했는데, 나 역시 작가의 시선이 시인의 시선과 같다고 느꼈다. 소설 곳곳에 시의 흔적들이 많다. 이 때 시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유 혹은 인식의 깊이가 문장 문장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tv프로그램에 나간 뒤 '서하'와 주고 받는 인터넷 편지는 결국 반전이 있기는 해도 주인공에게는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부모를 위해 쓴 글을 유언처럼 남긴 주인공이 엄마가 읽어주는 자신의 글을 들으며 묻는다.   "어디예요?" 어디까지 읽었느냐라는 질문인데, 그건 마치 지금 내 목숨 혹은 내 삶이 어디까지 왔느냐라는 질문처럼 서럽게 들린다. 이제 곧 생의 시간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 그 생의 어느 순간까지 왔느냐는 말에 나는 울어버렸다. 좀 더 오래 여기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 마음 같아서, 그러면서도 부모도 없이 혼자서 그 길을 가야하는 어린 주인공의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어미된 자가 되어 내 아이를 그렇게 혼자 보내야하는 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 모든 과정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소설에 이토록 흠뻑 빠져본 것이 오랫만이다.  

독자가 되는 것은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괴롭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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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함정 - 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금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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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확신의 함정>에는 정말 많은 소설이 등장한다. 애초에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젊은 변호사가 현장에서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가해서다. 물론 검사 시절 경험한 일들이 등장한다. 내가 착각을 했거나 책 광고를 오해한 것 같다. 어쨌든 그 많은 소설들은 소설로만 떠돌지 않는다.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현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신의 함정>을 읽는 내내 문학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만큼 현실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기 위해 금 변호사는 소설을 도구로 삼았다.  

그런데 소설이 시대 정신을 담고 있고 시대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 책이 문학 에세이인지, 법조계에 종사하는 변호사로서의 치밀한 고민의 흔적인지 조금 헛갈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문학은 시대를 대표하고 상황을 형상화하기는 하지만(현실성이 있지만) 작가의 상상이고 창작이라는 점이다. 한 편의 소설은 충분히 문제적일 수 있다. 현실의 문제를 현실이 아닌 문학 작품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모순을 찾고 법과 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 불편했나 보다. 즉 문학 작품(소설)이 매개가 된다기 보다는 문학 작품에서 원인과 해결을 찾고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짧게 마무리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으로서 작가가 신의 위치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법과 정의 문제를 문학에 기대지 않고 치열하게 다루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쉬웠나보다.   

법의 문제를 다루고 조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이 책 덕분이다. 판사의 판결은 개인적 감정에 의해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지만 책 속에서도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판사가 어떤 성향인지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진다면 법 위에 판사가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한심한 생각도 해보았다. 즉 판사의 판단에 따라 누구는 죽을 수도 있고 누구는 살 수도 있는. 그런데 만약 그런 절대 힘을 가진 판사의 생각이 오류가 있거나 편협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면?  

어쩌면 법은 완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정해진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실은 그 법이 문제 투성이라는 것은 쉽게 경험 할 수 있다.  

<확신의 함정>은 법이 옳다는 확신에 그렇지 않다는 함정이 숨어 있는 것으로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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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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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모자람을 자책하며 책을 읽는다. 저자의 생각에 닿지 못해 같은 줄을 서너번 되돌아 읽기도 한다. 더러는 내게 오기도 하고 더러는 읽는 속도로 잊혀진다. 행간을 읽지 못한채 '대체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는가' 후회만 가득한 때가 많다. 대체 어디에 써먹자고 이책을 읽고 있는가.  

<불온한 인문학>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진경의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에서는 읽기를 그만둘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슬그머니 짜증도 약간(?) 났다.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횡단은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과 통합하여 단일한 체계를 부여하려는 발상을 가로지르는 것이고, 이런 저런 지식들을 근거짓는 것과 근거지워지는 것,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일차적인 것과 이차적인 것의 위계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발상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며,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과 반대로 거기서 이탈하여 엉뚱한 만남의 장소를 창안하는 것이다.  ... 횡단은 이러한 분할의 경계를 횡단하며 그것은 부수고 전복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고 

하나의 단어, 담론이라고 해야하나, 횡단이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뜻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이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들만이 경험하고 체득한 주름들이 켜켜이 녹아 있어서 순수 독자인 내가 그 속을 들여다 보기에는 벅차다. 이 책의 저자 대부분은 수유+너머 에서 함께 공부하고 실험하며 그 결과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없는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면 똑똑하지 못한 독자의 징징거림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불온한인문학>의 모든 내용이 내게 무용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 문화센터 인문학 강좌를 대표로 정말 인문학의 위기가 맞는가 싶을 만큼 여기 저기 널린 인문학 강좌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소위 교양있는 시민을 만드는 것이 사실은 다루기 쉬운 시민을 육성하려는 모종의 계책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어쩌면 이런 상황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이 치유나 위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인문학이어야 한다는 말도 불온하지만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머리로 가슴으로 읽히지 않는 책들을 읽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면서 꾸역꾸역 책을 읽는 것은 대체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책을 읽고 소통하는 일이 막힌 상태에서 나는 어쩌면 혼자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거둔 가장 큰 소득은 혹은 깨달음은 그것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전혀 느껴지지도 않고 눈치 채지도 못하지만 나는 변해갈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그들이 공부하는 현장에 함께 있지 못한다고 해서 소외받았다고 억울해 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왜 일인 공부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은 오랫동안 일인 공부를 해오고 있다. 다만 읽고 생각하기를 게을리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쩌면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한 개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남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부러워하는 일도 여전히 하겠지만 그 때도 나는 그들의 작업 결과를 부지런히 내 생활로 옮겨올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어쨌든 내가 왜, 뭐하러 책을 읽고 있는가 의심하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고 할 것이다. 뭐 어떤가. 내가 누구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사는 것은 나 아닌가. 꺾이지말고 오랫동안 이 생각을 유지해 가길 바란다.  

<불온한 인문학>은 그렇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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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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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하고 명상하고 사유 바깥으로 횡단하는 인문학자들이 모여사는 행복한 공동체가 있다.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난다. 도대체 나는 정체가 무엇인가. 아줌마면 아줌마 답게 아이 잘 키우고 살림 잘하고 살면 될 일이지 어쩌자고 자꾸 마음이 이리 저리 넘나들기만 하는가. 고통스러울 정도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상위 1%의 삶은 확실히 나와 분간이 가는데 대체 이런 사람들의 삶은 분리가 안된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공부에 대한 열망때문인지, 이즈음 거의 확신하는 공동체 삶에 대한 희망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책 속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만큼이나 내 현재와 미래의 삶을 기획해보다 말다 했다.  내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질투를 겸한 절망으로 책을 접는것은 오로지 내 탓이다. 행동하지 않은 자의 구구한 변명이다.  

"각각은 모두 하나의 '코뮌'이 되어 또 다른 인접계열들과 접속을 시도해 갈 것이다. 중심은 많을수록 좋다. 별이 많을수록 밤하늘이 찬란한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크고 작은 코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를! 길이 길을 만들고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삶이 온통 길이 되기를!  사람들이 한 곳에서 다른 낯선 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   

공동의 삶이 기획되고 유지되고 진화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크든 작든 함께 하는 삶의 방향을 알 수 있었다. 화폐가 없어도 최소한의 화폐와  각자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함을증명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쓰라렸다. 공동체 삶을 꿈꾸는 나는 화폐를 대신해 무엇을 나눌 수있을까? 화폐를 대신할만한 무엇이 나에게 있을까? 그야말로 나란 사람은 안락한 가정주부로 남편이 노동한 대가에 얹혀 사는 사람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칠때는 정말 부끄러웠다. 거의 자학의 수준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결 속에 어디쯤 속해 있을까. 내가 정작 괴로운 것은 자꾸 몸에 맞지않는 옷을 어떻게든 입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 꼴이라니. 수유+너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우가 못먹은 신포도 같기도 하고 '강남좌파' 같기도 하고, 상위 1% 같기도 하다. 절대 비아냥이 아니라 부럽다 못해 이런식으로 비겁하게 질투를 하는 것이다. 진심은 그들 모두를 존경한다. 그들의 노동으로 얻어낸 글과 책들을 내가 이렇게 잘 받아먹고 있다. 문제는 내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서 거의 망상에 가까운 사유나 하면서 몸만 비대해지는 나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때가 되어야 나는 길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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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망고 - 제4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36
추정경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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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은 시간이 많지만 나는 올해 망고와 쩜백이, 쏙천을 만나서 기쁘다. 이방인이 되어서도 가진자의 힘을 갖고 있는 망고네와 쩜빠네 관계가 한숨을 자아내게 하지만 끝내 당당하게 친구를 만들어가는 쩜빠가 고맙고 감사하다. 우리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생로병사를 비롯해 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은 이 지구상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해서 그 아이들이 욕망조차 가질 수 없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쩜빠가 압사라 춤을 추고 싶어하는 욕망 혹은 희망은 한국의 아이들이 최고 대학을 가기 위해 서너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쩜빠에게 있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있을까. 망고와 티격태격하면서도 망고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 망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쩜빠였다. 물론 망고의 충격적 사고를 쩜빠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망고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산하지 않고 순리대로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쩜빠의 마음은 어쩌면 인간 본연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은 한국 관광객이 쩜빠를 '튀기'라고 할 때 망고가 자기 소개를 마친 후 '튀기'가 아니라 '혼혈'이라고 콕 찝어 고쳐주는 장면이다.  

수아, 망고는 그간  내가 본 청소년 소설 인물 중에서 가장 성숙한 사람이다. 물론 쩜빠도! 어른 같다거나 어른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십대 답고 , 십대 답지 않다는 의미다. 기억을 잃을 만큼 충격적인 사고를 겪기도 하지만 화날 때 화내고, 말 할때 말하고, 참을 때 참고, 나눌 때 나눌 줄 아는 수아와 쩜빠가 좋다. 50달러와 500달러의 가치가 서로 같은 것처럼 둘은 다르면서도 닮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매력은 앙코르와트를 비롯해 캄보디아 여행 4박 5일을 함께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행의 매력은 낯선 사람들이 만나 가까워지는 과정일 것이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런 약속을 할 만큼 가까워진 다음에 우리는 여행을 마친다. 여행지에서 가이드는 그곳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다. 그래서 헤어질때는 피붙이와 헤어지는 것 처럼 마음이 짠하다. 언제 다시 만나랴 싶기도 하고.  

티격태격하는 수아와 쩜빠,  삼콜할배의 싫지 않은 간섭, 미경아줌마의 씩씩함, 쏙천의 순수함, 마지막 남은 힘으로 딸을 위해 버티고 있는 엄마가 모두 사랑스럽다.  

그리고 수아가 입었던 체육복이 캄보디아로 날아와 그것도 쏙천이 입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인 것 처럼 우리는 어떤 무엇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다. 결코 소외받지 않고 낙오하지 않고 혹은 잊혀지거나  추락하거나 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끝내 이끌고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데 캄보디아에서 돌아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니 온통 가시투성이이고 이렇게 폭력적인 사회가 있을까 싶어 다시 떠나고 싶다.  

언젠가 캄보디아 여행길에서 가이드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단다. 그래서 남이 보기에는 가난하고 게으를 수 밖에 없다고 업신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지 재산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1달러를 벌기 위해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는 아이, 학원 때문에 단 30분 밖에 놀 시간이 없다고 하는 아이, 내 눈에는 두 아이 모두 안쓰럽다. 

망고처럼 지금의 내가 좋아지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뭔가를 지나온 사람, 혹은 '극뽁'한 사람에게 열매처럼 주어지는 것이 바로 '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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