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 10주년 기념 수정 증보판
곽승지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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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초판이 10년 전에 나왔으며 그를 기념하여 내용이 수정, 증보되었습니다. 조선족은 현재 우리 나라 어디서도 쉽게 만날 수 있고, 10년 전에도 그러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더더욱 경제적,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기반을 다진 이들이 많습니다. 누구누구가 조선족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고 싫고를 떠나 이는 엄연한 한국의 현실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먼저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중국현대사에서 무시못할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족의 지난 족적, 북한과의 미묘한 관계 등을 주로 짚고 마지막에 한국 사회 내에서의 그들이 어떤 동향을 보이는지 분석하고 내다봅니다. 이제는 선거 때 지지성향, 경제활동 참여 등 엄연한 상수로 작용하는 집단이기에 더 냉철하고 정확한 파악이 요구되며, 이 책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1930년대 초에 무서운 침략 성향과 기존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교란 의도를 드러내어 만주를 짓치고 들어왔습니다. 국제 사회도 일본 제국의 이런 침략 성향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했으나 제국은 아랑곳없었습니다. 조선족은 당시 만주 일대에 거주했었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일정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의 종주국은 소련이었고 스탈린이 대전 발발 전부터 내내 국민당 정권에 우호적이었음은 (아이러니컬하지만)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책에서는 이미 일본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고 종전이 된 후인 1945년 9월 중순부터 소련 당국의 태도가 중국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음(p54)을 지적합니다. 

사실 만주(이 책에서는 중국 당국의 공식 입장을 따라 "동북 지방"이라 일관되게 칭합니다)는 1930년대부터 중국이 통제권을 잃었고 19세기말부터 러시아가 일정 부분 이권도 유지하던 땅인데다 대전말 불가침 조약을 깨고 이들이 진주했을 때 아예 자국 영토로 편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이 책 p59 같은 곳을 보면 소련군 일시 철수 후 국민당 세력이 대거 밀고들어와 공산당을 후퇴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책을 잘 읽어 보면 공산당 입장에서 "토비"로 인식되었던 현지의 잡다한 세력 토벌에 제법 큰 수고를 들이는 과정이 서술되어 재미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들이 인민공화국 수립에 적잖은 공을 세웠음은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바입니다. 

p136 같은 곳을 보면 미국이나 소련이나 똑같이 장개석 국민당을 대륙의 맹주로 보고 처음에 지지했던 사실이 나와 쓴웃음을 짓게 합니다. 미국은 또 미국이라 쳐도, 소련은 같은 공산당이었으면서도 정세를 그처럼이나 크게 오판했던 것입니다. 장개석은 무려 미소 양대 초강국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고도 대륙의 패권을 놓쳤으니...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서, 쑹메이링 영부인(마담 창)의 1943년 미국 방문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그 어느 외국도 이를 돕지 못하는... 

p102 같은 곳을 보면 이미 1930년대부터 동북지역 거주 조선인들과 중국 공산당이 매우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음이 나옵니다. 우리는 보통, 한국내 조선족이 돈은 한국에서 벌면서 소속감이나 충성심은 중국에 바치는 태도를 크게 비판하는데 그 당부를 떠나 그들의 그런 의식 세계가 형성되는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을 필요만큼은 뚜렷합니다. 그러한 인식의 정확한 바탕 위에 우리는 우리 나름의 전략을 짜야 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FDR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미국 내에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 앨저 히스 같은 간첩의 농간으로 2차 대전 당시 소련 측에 과도한 양보를 했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여튼 그를 승계한 해리 S 트루먼은 1947년 따로 독트린(p135)을 내어 소련을 적국으로 분명히 규정했습니다. 이 와중에 팔로군, 또 동북항일연군(p142) 등은 목숨 바쳐 가며(p144) 중국 공산당을 지지합니다. 재미있는 건 1949년, 아니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조선족 동포(이 말이 지금과는 달리, 저때에는 매우 자연스럽게 들립니다)들은 북한을 조국으로 받아들였다는 분석(p215)입니다. 

마침 요즘이 중국 양회 시즌입니다. p235를 보면 1949년 9월의 정협에서 소수민족의 지위에 대해 공동강령이 채택된 일이 서술됩니다. 묘(먀오)족은 중국 내에서 매우 큰 규모(조선족과는 비교도 안 되는)의 소수민족인데 한자 표기도 이무렵 猫(비하 뉘앙스)에서 苗로 바뀌었다는 정말 흥미로운 정보도 나옵니다. 이 책도 마오의 대표적 실책인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비판적인데 조선족뿐 아니라 한족 주류도 이를 십년(대)동란으로 부르는 등(p258) 태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덩샤오핑의 장남 등복방은 항구적인 장애인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 일각에서 이에 대해서까지 숭배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건 그야말로 코미디입니다. 

곽승지 박사님, 전 연합뉴스 기자님이 쓴 이 책은 재미도 있거니와 동아시아 현대사의 흥미로운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 정리하였기에 정말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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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통치성을 넘어서 : 정책적 측면 다층적 통치성 총서 6
이동수 엮음 / 인간사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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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개념에 근거한 통치성의 근대적 측면을 집중 탐구하는 다층적 통치성 총서 제 6권입니다. 이 책에서는 근대적 통치성의 발전적 극복을 모색하며 주로 정책적 측면에서의 고찰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지방자치입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본체적 제도로도 평가되는 지방자치는 중앙정부의 전횡을 막고 민주적 통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필수로 꼽힙니다. p31을 보면 주민자치회의 운영 모델을 크게 세 가지로 꼽는데, 현재 한국에서 운영되는 주민자치회는 통합형에 가까우며 이는 지방자치의 이상적인 구현보다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에 가깝다"는 게 김태영 교수의 견해입니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이 개인개인의 이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자치(self-governing)에 가깝다면, 지방자치의 단위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으며, 이를 위해서는 주민조직형 자치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총서 앞 권들에서도 나왔지만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보통 여섯 요소(p14, 또 p38 이하 등)로 구성된다고들 합니다. 첫째 통치의 총체성(ensemble), 둘째 통치의 주체(relationship of the self ro self. 이 구절 자체가 푸코 고유의 체계에서만 등장합니다), 셋째 통치의 방식(manifestation of the truth), 넷째 통치의 구현(surface of contact), 다섯째 통치의 도구(reason, knowledge) 여섯째 다층성(multilayered) 등입니다. 김태영 교수의 논문은 이 다섯 개를 기준으로 삼고 한국 지방자치의 현실을 진단합니다. 

어떤 형태의 행정 작용, 통치라고 해도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은 예산(budget)입니다. p59에서는 근대 예산의 중요 원칙들을 드는데 의회에 의한 사전의결(prior authorization), 행정부에 의한 예산 편성(executive budgeting), 예산의 단일성 및 포괄성(unity and comprehensivenesss), 연도별 예산(fiscal year), 결산 및 감사(settlement of accounts and audit) 등인데, 이들 원칙의 목적은 "공공재정의 조성 및 납세자에 의한 재정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합니다. 김정부 교수의 이 논문은 지방자치에 있어서도 각종 주민 복리의 실현을 위한 핵심 제도가 바로 예산과 재무이며 어떤 방안을 통해야 풀뿌리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시행될지를 논합니다.  

조석주 교수는 푸코의 1979년 강의를 인용하여 통치성 개념을 검토하며, 또 근대적 통치성 개념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인 자유주의에 대해 잠시 조명합니다. 사실 "자유"라는 말이 대단히 모호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라는 개념도 때로는 좌파적으로, 때로는 우파적으로 구성, 해석되곤 합니다. 푸코는 저 강의에서 18세기 중엽에 출현한 통치성 내부의 자유주의는 차라리 자연주의(naturalism)로 부를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 근거는 "개인의 자유를 그 자체로 존중한다기보다, 통치되는 인구 집단의 자연(발생)적 메커니즘"에 주목해서라는 것입니다(확실히 푸코스러운 깐깐함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실천, 근대적 통치성 실천의 핵심에 자유가 기능하므로 여전히 자유주의란 개념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데 읽으면서 탁견이다 싶었습니다. 

시장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론 본질이란, 어떤 단일한 요소로 이뤄지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대상을 파악할 때 무엇이 그 실존, 혹은 작용의 핵심을 이루는가, 혹은 이해와 파악의 주체 쪽에서 무엇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느냐는 얼마든지 따져 볼 수 있습니다. 푸코는 19세기말을 분기점으로 시장의 본질은 더 이상 "교환"이 아니라 "경쟁"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시즘 진영에서 19세기 유럽 경제를 독점자본주의 단계 진입으로 보고 자본주의는 더 이상 경쟁이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컬하지만, 그만큼 어느 진영에서도 "경쟁"이 논의의 초점이었음이 재확인되는 셈이기도 합니다. 

제5장 채진원 교수의 논문에서는 남북 문제에의 접근 도구로써 푸코의 구성주의 시각을 활용한다는 게 독특합니다. p168를 보면 이상과 현실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 없고, 가장 비탈협적이고 교조적인 구조를 갖기 쉬운 종교조차도 때로는 국가공동체의 통합요청에 응해 현실적합적으로 변용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 예로 든 신라 원효대사의 전거는 아마 세속오계를 제정한 원광법사의 오기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세계사는 끝없는 분리와 통합 사이의 투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시사 받아 개항과 근대화를 시도한 개화파의 움직임은 "청(淸)으로부터의 분리독립"으로 볼 수 있고, 일제에 대항한 투사들의 행보 역시도 해양 세력으로부터의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2016년의 브렉시트는 유럽 대륙으로부터 잉글랜드가 보인 독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 중심의 통합을 도모하는 움직임이라 볼 수 있겠네요. 

유길준, 부들러 등도 19세기말 조선의 중립을 국제법상으로 보장되게끔 여러 방안을 제시했지만 반향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탁상공론이라며 비판받았습니다. 중립은 타국의 보장과 존중에 의해 성립, 유지되는 게 아니라 중립을 내세우려는 당사국의 강력한 의지와 실력이 받춰 주어야만 가능합니다. 책에 나오듯 히틀러도 유대 자본과 인사들을 대놓고 비호하는 스위스에 대한 군사 침공을 고려했었으나 스위스의 방어 태세를 보고 지레 포기하여 이후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북구 스웨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반면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의 "스위스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군대"라는 말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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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전쟁
최진우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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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7년에 나왔습니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째 지속되는 지금 읽어 볼 때 더 시사하는 바가 많은 듯합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완전히 폐허가 되고 아무도 승자로 남지 못한채 자칫하면 전 유럽이 공산화되기 직전이었던 유럽 여러 나라. 미국의 마셜 플랜이 아니었다면 벌써 빈국 신세로들 떨어졌을지 모릅니다. 희한하게도 전후 복구부터 해서 20세기 후반 재생의 시동을 걸어 준 곳도 전범이자 패전국이었던 독일이라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자 비로소 냉혹한 현실에 눈을 떴는지 전임자와 정반대 노선을 틀며 나라를 추스르려 애쓰지만 이미 실기(失機)한 게 아닐까 싶기만 한 게 독일연방공화국의 지금 모습입니다. 프랑스는 방금 들리는 뉴스로 하원을 해산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20년 전 토니 블레어처럼 제3의 길 비슷한 걸 표방하며 국민의 환심을 사는 듯했으나 과연 정체가 뭔지 의심스러운 게 저 마크롱 선생입니다. 

대체로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 전에서 유럽 주류는 좌우 할 것 없이 미국과 대립했습니다. 특히 저 시기 프랑스에서는 미테랑 때 파리 시장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이었는데, 미국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했습니다. 트럼프 때도 마크롱은 미국과 싸웠는데(바이든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외로 프랑스의 국익이 미국과 부딪히는 지점이 많아서이며, 그렇다고 마크롱이 종종 립서비스 하듯 친중(親中)은 전혀 아니니 속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 p54에서 논문필자 임종헌 교수는 심지어 그때도 유럽은 그 연합외교안보정책의 오랜 걸림돌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애초에 EU는 경제정책과 일부 행정에서만 공통정부를 작동시킬 뿐이며, 외교는 당초에 따로 놀고, 국방은 나토 가입국의 경우 완전히 다른 시스템에 의존합니다. 당시 집행위원회에서 발간한 한 보고서는 유럽을 두고 "국제사회 주요 행위자(임 교수의 번역이며, 원어는 Europe as a world partner입니다)"로서의 위상을 부여하려 애썼으나, 현실은 그때는 물론 지금도 과연 하나의 유럽이란 게 허상이 아닌지 의구심을 부릅니다. 

이건 마치, 미국이, 1861~65년 남북 전쟁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United States가 단수(singular) 취급을 받았다고도 하듯 말입니다. EU도 진정한 합중국(合衆國)이 되려면 내전이든 외부와의 일전이든(러시아하고라든가) 한 판 전쟁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독자로서 개인적인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공동외교안보정책과 내부사법에서 유럽의회의 공식적 권한이, 모두 의견을 제시함에 한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p100)"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며, 시스템의 획기적 개편 전까지는 유럽이 내내 겪어야 할 딜레마입니다. 김종법 교수는 p125에서 이른바 나토의 이중결정(double track decision)을 언급하는데, 각주에도 나오듯 저게 꼭 나토로 표현되는 (사실상) 미국에 한정된 건 아니고 소련 측도 냉전이 열전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무지 애를 썼고, 한편으로 강경책, 한편으로 데탕트(Detente)를 내세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 모순을 충분히 교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19세기 정통 마르크시즘 노선(이른바 썩은 문짝 이론)이 무색하게, 반대편 체제를 동경하던 젊은이들의 행동에 의해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은 동쪽에서부터 무너졌습니다(p126 하단 참조).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고 모럴 해저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일부 금융인들 잘못으로(과연?) 미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고 그 여파가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토마 피케티라는 이가 불평등의 극대화로 인한 체제의 위기를 본격 분석한 이론을 꺼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영국의 입장이야말로 유럽과 미국 사이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타기 신세였으며, p162에서 윤기석 교수는 저 묘한 처지를 Europeanism과 Atlanticism(미국 중심축) 사이의 딜레마라고 요약합니다. 

난민 문제는 10년 전부터 북아프리카 정세의 불안함 때문에 비로소 촉발된 게 아니고 거의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제7장에서 김남국 고대 교수는 유럽연합의 인권정책을 다루며 특히 p245 이하에서 난민 정책을 깊이 분석합니다. p258의 표를 보면 여태 유럽연합이 난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들여 시스템적인 노력을 했는지 일별할 수 있습니다. p191에서 정병기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미국이 내내 취해온 일방주의(unilateralism)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이 취해온 행보를 요약하는데, 다른 필자들의 앞 논문들에서도 "나토의 다자주의" 운운이 무슨 뜻인지는 이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본래 나토는 말만 나토이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체제라서, 이 점에서는 미국 중심이 곧 대서양중심노선(Atlanticism)이지만, 반대로 나토 안에서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곤 하는 프랑스, 독일에 주목한다면 이는 나토 내에서의 다자주의 노선인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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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톨랑의 유령
이우연 지음 / 문예연구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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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실>. 누구라도, 뭐 하나를 서투르게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경멸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들 그 하나를 잘하거나 즐겨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그 모임에서 서투른 실력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앨리스는 바둑을 잘 둬서가 아니라 바둑판에 돌이 떨어지는 그 경쾌한 느낌이 좋아서 가입했는데(공감합니다), 그 남학생이 보기에(혹은 누가 보더라도) 실력이 나쁩니다. 그러니 그 남학생한테 경멸의 시선을 받습니다(혹은, 자격지심 때문에 그리 느낍니다). 저는 이 아주 짧은 소설을 읽고, 이리저리 무작위로 바둑을 두고 "그 판 위에 펼쳐지는 불가해한 모양(p40)"의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앨리스의 고백이, 사실은 남자애들(바둑을 다들 잘 두는)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아무렇게나 다뤄지는 자신의 비참함을 즐긴다는 뜻이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말이 되냐고요? 그럼, 이기지도 못하면서 바둑판에 놓이는 (컬러도 아닌) 흑백의 돌 배열이 신기해서 바둑이 좋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사람의 기호, 취향 등도 다 말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Taste cannot be taught." 

"생은 우주보다 깊은 환각이다.(p42)" 사실 이건 화자의 단정이 아니고, 그 이상의 진술이 뒤에 따르지만 어느 정도 우리의 동의를 구하는 어투에서 알 수 있듯 유보부 진술입니다. 생은 (그 자체로는) 평면인데, 다만 사방으로 증폭되고 복제되는 종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2차원 종이에 갇혔지만, 머리로만은 3차원 4차원을 끝없이 꿈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증폭 복제를 다른 계로부터나마 불완전하게라도 관측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주는 분명 유한한데도 무한처럼 광대(p44)하며, 그 와중에 유리수는 무리수가 될 수 없고 허수는 영원히 실수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소설 원문에는 실수가 아니라 자연수라고 되어 있으나 독자인 제가 임의로 고쳤습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입니다. 화자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여기서 화자는 "그"의 환각과 꿈을 놓고 특정 방향성을 탓하는 중이지만, 사실 그의 우주뿐 아니라 무슨 우주라도, 우주는 대체 너무 비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왜 좀 밀도를 갖추지 않고 그리 비어 있을까요? 이 질문부터 답이 이뤄져야 합니다. 

구약의 요나뿐 아니라 피노키오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합니다. 물론 구약의 요나는 제발로 걸어들어간 게 아니고 구하는 것도 결국 본인(의 소명)입니다만. 그런데 p48 이하의 <고래의 뱃속>에서는 반대로 피노키오가 먼저 고래에게 먹히고 어디쯤 구하러 올 제페토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원작 소설과는 달리 여기서의 피노키오는 무척 차분한 성격이며, 제페토 할아버지의 본을 받았는지 예술가답기까지 합니다. 피노키오는 고래 뱃속에서 세상과 자신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오롯이 예술에만 몰입할 수 있고 거짓말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금을 무척 사랑하는 듯합니다. 걱정되는 건 밖으로 구해지지 못할까가 아니라 혹시나 제페토 할아버지가 오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정도입니다. 거짓말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피노키오는 시끄럽고 편견에 가득하고 지들이 더 거짓말쟁이면서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안 보이니 세상 좋은 느낌인 듯 보입니다. 사실 19세기 말 콜로디의 원작에서는 고래는 다른 (착한) 역할이고, 상어 뱃속이 맞습니다. 

p91 이하의 <교무실>에서 앨리스라는 주인공이 또 나오는데, 아까는 초등학교였고 지금은 유치원입니다. 그럼 얘와 아까 걔는 다른 애일까요? 뭐 잠시 유치원 시절을 회상하는 중일 수도 있으니. 그건 그렇고 요즘은 유치원에도 무려 교무실이 있는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여기서도 또 앨리스는 학대를 당하는데 이번엔 애들로부터가 아니라 선생입니다. 아이한테 차마 못할 말을 하면서 못살게 구는데 그렇다고 독자가 너무 분개할 필요는 없습니다(놀랄 수는 있죠). 어쩐지 이 앨리스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게 못되는 것 같습니다. 하긴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아까 <동아리실>에서 앨리스는 지극히 현실적인 어투였는데 지금 <교무실>에서는 뭔가 환각에 빠진 듯합니다. 하지만, 애가 학대를 즐기는 건 아까와 같습니다. 이것은 "가장 열정적이고 불온한 반항"이니 말입니다. 욕 먹을 만하네요.ㅋㅋ 

앨리스는 아까 그저 바둑을 못 둬서 경멸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알고보니 그녀는 반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p153. <교실>) 정말 가지가지한다 싶었는데, 그래도 지금 독자인 제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같은 소설집에 실렸을 뿐 이 작품들이 연작 관계이거나 한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물론, 예상을 뒤집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지만, 여기서 "더 못생긴 뉴페" B(대체 왜 이름은 밑도끝도없는 B일까요?)가 앨리스의 이름을 서투르게 불러 주고 나서 앨리스는 존재의 다른 국면으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앨리스 인생 처음으로 어떤 관계라는 게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 제의를, 불쌍한 병아리를 믹서에 갈아넣는 걸로 채웁니다. 이제 둘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B가 트럭에 깔려 죽기까지는 말입니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B는 사실 애초부터 없던 애였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시시하게, 앨리스의 A 다음 문자 B일 뿐이지 않습니까. 여튼 앨리스와 B는 이제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단편 소설집인데도 1장과 2장이 따로 있고 2장의 소설들에서는 김현경이 대부분 주인공이며 이름이 명시적으로 안 나온 작품에서도 그냥 김현경을 주인공으로 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심지어 요제프[p188]도 성별만 남자일 뿐 앨리스, 김현경과 마구 교차됩니다. 제겐 그랬습니다 . 어쩌면 김현경은 앨리스가 커서 변태(變態)한 인물일 수도 있는데, 여전히 환각 망상을 즐기며 모욕을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앞에서 고래 뱃속의 피노키오까지도 다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기까지 합니다. 하긴 한 명의 김현경이 피노키오, 앨리스, 피터팬, 요제프, B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유년시절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감 투사했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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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B는 없다 -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전념해서 인생의 성취를 이루는 법
맷 히긴스 지음, 방진이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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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전념해서 인생의 성취를 이루는 법." 보통 우리는 누구나 플랜B라는 걸 예비해 두고, 프라이머리 플랜이 좌절하고 난 후의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식의 충고를 듣습니다. 전쟁에서 적국에 상륙해도, 그 공략이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퇴각, 귀환을 위한 배를 항구에, 해변에, 잘 묶어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맷 히긴스는 그런 우리의 온건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을 합니다. "모든 배를 불태워라!" 전쟁의 신 한신이 정형에서 배수의 진을 칠 때에도 아마 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사실 애초부터 부실한 플랜A를 만들어 놓고서는, 면피성으로 혹은 합리화를 위해, 플랜B, 플랜C를 거창하게 정교하게 내건들, 목표(무엇이든 간에)가 달성될 리 없습니다. 계획의 완결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처음에 목표로 내걸었는지를 기억하고, 그를 달성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타당한 게, 애초에 플랜A가 완벽하면 플랜B가 왜 필요하겠으며, 멋있게 질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모양새가 좀 빠지더라도 이길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인 목표가 뻐그러지면, 부대 타겟이 적중되어도 이미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는, 무엇을 이루려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따로 있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제 한심한 잇속만 챙기려 들고, 조직을 위한 진짜 기여는 내심 신경도 안 쓰는 분자가 따로 있습니다. 남 눈에 안 띄는 일은 무엇이든 대충대충입니다. 누가 조직에 기여를 하면 그 사람의 창의성이나 재능, 노력은 평가하지 않고, "쟤는 원래 일하기를 좋아하나 보지." 정도로 깎아내립니다. 이런 말을 하는 심리는, 큰 노력을 기울이려 들지 않아서 성과가 이 정도일 뿐 마음만 먹으면 자신도 저렇게 못할 바 없다는 허풍이 깔린 건데, 전혀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은, 어리석고 미숙한 정신을 오히려 자체 폭로하는 꼴입니다. 고작 몰두한다는 게 게임인데, 게임에 그렇게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지만 심지어 게임 실력, 레벨조차 변변치 못합니다. 어디 가서 게임한다 소릴 떠들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비방꾼(p60), 훼방쟁이 등은 조직에 암적인 존재인데, 안타깝게도 제법 큰 규모의 기업에도 꼭 이런 분자가 한둘은 끼어들어 물을 흐리기도 합니다. CEO와 관리자는 이런 아무 쓸모없는 직원을 내몰아야 합니다. 이런 자가 혹 서투르지 않게 다루는 분야가 있다 해도, 십 수 년 동안 반복되어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는 극 루틴, 먼데인 워크(mundane work)일 뿐입니다. 본인이 쿠사리먹어가며 고생스럽게 익혔던 과정은 생각도 않고, 이제 알량한 감투 하나 썼다고 신참들한테 야비한 소릴 해 가며 닦달하는 꼴이란 가관도 아닙니다. 저자는 이런 쓸모없는, 어디가 고장난(p61) 직원들에 대해서도, 세상에 이런 인간들이 설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거꾸로 이런 자들을 데이터삼아 자신의 프로젝트를 더 치밀하게 밀어붙일 의지를 다지라고 충고합니다.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인 NFL의 로고는 우리들도 알듯, 또 이 책 p118에 나오듯, 방패 모양입니다. 이 로고가 진짜 그런 뜻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아니라, 저자는 이미 잘나가는 부유한 리그의 타성, 관성을 비판하기 위해, 이 조직이 자체 관습, 관행에 대해 과도하게 보호(방패를 뜻하는 shield가 원어이겠습니다. 우리도 시쳇말로 "실드친다"는 표현을 간혹 쓰죠)하려 든다고 풍자합니다. 아무리 현재 잘 풀리는 사업이나 회사라고 해도 혁신이 없으면 결국은 뒷걸음질치게 되어 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경영자가 있었기에 세계 정상에 올랐었으나, 그가 쓰러진 후 10년 동안 혁신을 게을리하여 지금 위기설이 도는 모 대기업을 보십시오. 그가 살아있었을 때는 대만의 TSMC 같은 것은 존재감조차 미미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플랜B가 없는 삶은, 경영은,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저자도 그 점을 모르고서 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최고의 경영자들이야말로 확신과 망상의 경계선상(p140)을 아슬아슬하게 걷는다며 그들만의 고충을 대변합니다.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아첨꾼, 기회주의자, 요령꾼들과, 이런 고독하면서도 단호한 CEO의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경우 자신의 비전이 한순간에 환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인지하고, 위태위태한 현실의 곡예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플랜B라는 도피구에 유보할 자원이 있다면, 그 정력과 관심을 오롯이 플랜A에 쏟아 처음의 목표를 전심전력으로 맹수처럼 나꿔채야 맞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유리한가? 유명한 몬티 홀 프라블럼도, 결국 특정 조건 하에서는 늘어난 선택지가 내게 더 확률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p190 이하에 소개되는 배리 슈워츠의 실험은 우리에게 의외의 결론을 일깨우는데,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으면 소비자는 오히려 "마비"된다는 것입니다. 하버드의 프란체스카 지노 교수의 실험 결과는 더 놀라운데, 콜센터 직원 A그룹(여기 아니라도 갈 데 있음)과 B그룹(여기서 실직하면 갈 데가 없음) 중 오히려 후자의 단기 성과가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하긴 이래서 대기업 일부 부서에서도 기본 바탕이 부실한 자가 더 오래 버티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간혹 벌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p276을 보면 저자는 선구자, 촉매자와 집행자의 기능과 자질을 구분합니다. 선구자는 큰 스케일에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시나리오 작가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촉매자는 나무를 위해 숲을 보는 사람인데, 조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이른바 "차분한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집행자는 거꾸로, 나무를 위해 숲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각 구성원을 적시 적소에 배치하여 단번에 플랜A의 목표로 점프할 수 있는 조직이라야 이 험한 경쟁에서 최후의 생존자가 될 수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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