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티밋 바 북 - 홈텐딩과 바텐딩을 위한 1000가지 칵테일의 모든 것
미티 헬미히 지음, 양희진 옮김 / 미래지식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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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베버리지, 혹은 약한 도수의 주류를 풍취와 함께 즐기고 싶을 때 꼭 바(bar)에 찾아가는 게 아니라 집에서도 분위기를 내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자리한 풍습이고, 한국에서도 바텐더 테이블을 차려 놓고 멋지게 믹싱하며 손님 접대를 하는 걸 보면 그저 구경만 해도 흐뭇해지고 절로 흥이 나는 듯합니다. 그런 풍습이 생겨난 본국보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더 까다롭게 격식을 따진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습니다만, 이게 회사 접대 차원에서 갖출 걸 다 갖추고 세팅을 해야 하기도 하니 격식을 다 차리는 게 비판 받을 일이야 하나도 없습니다. 말이 앞이 다르고 뒤가 다른 게 문제면 문제겠지 말입니다. 

이 책은 일단 편집이 세련되고, 격식에 맞게 정확한 레시피, 부대 메뉴가 설명되었다는 점이 제게는 유익했습니다(화보가 좀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누가 마련한 절차가 번잡하고 그럴싸해 보이며 돈이 많이 들었음직한데, 엉뚱한 경우의 예식을 끌어왔다면 그것도 민망한 결과이겠으며, 그간 착각하고 있었던 걸 바로잡아 주기도 하는 유익한 정보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p48을 보십시오. "프리미엄급 술은 단일 종류의 스피릿이 적어도 90%는 되어야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여기서 스피릿이라 함은, 칵테일 믹싱 원료 중 주류만을 따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통은 spirits라고 복수형으로 씁니다(원래는 "정신"이라고 할 때 그 스피릿입니다). 뭐 복수는 언어 관행상 그리 쓰는 것이지 꼭 여러 종류의 술을 섞는다는 뜻이 아님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 나온 대로, 단일로 90% 이상이 정석이며, 그 이상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독특하게, 맥주는 이상할 만큼 순정으로 고집스럽게 즐깁니다. 물론 룸살롱 같은 데서 폭탄주 마실 때는 제외입니다만 폭탄주는 풍미나 흥취가 아니라 비즈니스 쇼부(?)를 위한 용도이니 여기서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p92를 보면 맥주 칵테일 제조법이 나오는데 책의 설명도 그러합니다만 이렇게 맥주 기반 칵테일 믹싱도 수 세기의 역사를 지닌, 독자적 평가를 받아 충분한 레시피임이 맞습니다. 이 페이지에 보면 한국 사람들이 식겁할 만한 아이템이 있는데, 바로 비어 버스터입니다. 이름값을 한다고 무려 맥주에 보드카를 섞는 방식입니다. 요즘은 한국에도 러시아, 중앙아시아계 외국인(주로 노동자)들이 유입되어서인지 심지어 편의점에도 보드카 코너가 따로 생긴지 오래입니다(싸구려긴 해도). 보드카가 싸게 들어오니 이렇게 (약하게라도) 칵테일 해 먹고 싶은 이들에게는 좋은 환경입니다. 

p125를 보면 브랜디 코블러라는 게 나옵니다. 브랜디는 한국인들이 착각을 하는데 이게 포도주이긴 하나 고급 술은 전혀 아닙니다. 브랜디 코블러도 그 어원을 알고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이게 약식으로 부담없이, 아는 이들끼리 즉석에서 만들어 먹기 좋은 그런 메뉴죠. 책에도 나오듯이 클럽소다, 혹은 마땅한 게 없으면 어디서 칠성사이다나 트레비 같은 거 사 와서 조심스럽게 붓고 살짝 저으면 되겠습니다. 책에 나오듯 스터링(stirring)이 핵심입니다. 

책이 책이다 보니 리큐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철자는 liqueur이며 이 프랑스어를 직통으로 들여온 영국에서 이걸 리큐어라고 읽습니다. 인터넷 어디에 보면 이걸 미국식으로는 리쿼라고 읽어서 주류인 liquor하고 발음상으로는 구분이 안 간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어디라고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엉터리같은 소릴... liquor는 [리커]이며, liqueur는 미국식으로만 [리쿼]라고 읽습니다. 프랑스식으로 리퀘(르)로 읽어 주는 게 정석이겠지만 우리는 영국식, 미국식을 많이 따라들 하니 그걸 또 대세로 봐야 하겠지요. 이 책에서도 그런 취지로 저 표기를 유지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p225를 보면 creme과 cream을 구분하는데, 앞의 creme은 원래 불어로서 앞 음절의 e에 그라브가 찍힌 형태입니다. 저렇게만 보면 불어와 영어의 차이일 뿐 둘이 뜻이 원래는 똑같아요. 불어는 저걸 그라브 때문에라도 [크렘]이라 읽고, 영어도 간혹 크렘이라고 발음합니다만 그냥 똑같이 크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레시피에서는, 책의 설명대로 creme은 에멀전(emulsion)이며(여성들은 이게 뭔지 대강 짐작이 될 겁니다), cream은 미숙성 브랜디를 인퓨징하는 걸 가리켜서 서로 구별됩니다. 이 책처럼 꼭 주류가 아니라, 두루 다른 음식 조제 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p272에 보면 피나 콜라다가 나옵니다. 책에 피나라고 되었습니다만 "피냐"가 표준 발음이고 미국인 히스패닉 할 것 없이 다들 그렇게 소리냅니다. 경구개 비음(硬口蓋 鼻音. palatal nasal)은, n 위에 비르구릴라, 혹은 틸드를 찍어서 표시하곤 하죠(책 해당 페이지의 원어 중 찍힌 기호도 참조). 아무튼 휴양지 해변에서(뭐 꼭 카리브해가 아니라도) 마시면 제격인 피냐 콜라다! 캬~ 바로 밑에 나오는 피냐 콜라다 누에보는 처음 들어 보는데 세상에는 제가 들어 보지도 못한 고급 아이템이 많다는 점 다시 실감합니다!ㅋ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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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사치
김영희 지음 / 작가와비평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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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께서는 p99에서 디지털 리터러시를 거론하십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한글만 읽고 쓸 수 있다고 문해자(文解者)가 아니며, 내가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고 얼마나 찾을 수 있으며 잘 활용하는지가 또한 중요하다는 뜻에서입니다. 책에서는 잭 안드라카라는 소년의 예를 듭니다. 우리도 불과 몇 년 전에 췌장암으로 타계한 어느 유명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췌장암이라는 게 그만큼 자각증상도 늦게 오며 일단 뭐가 느껴졌다면 돌이킬 방법도 없어서입니다. 이 소년은 친지분의 죽음을 계기로, 오로지 인터넷에서만 정보를 수집하여 췌장암 진단키트를 만들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난다긴다 하는 제약 바이오회사들은 어린 소년이 그런 큰 일을 하는 동안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경제와 산업을 이끌어간다고 하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 사례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인터넷에는 그만큼 정보가 거의 무료로, 지천으로 깔렸다는 점입니다. 사실 시니어나 중년은 살아온 이력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안목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같은 걸 봐도 남다른 걸 떠올리기가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에이, 별게 있겠어?" 같은 관성과 지레짐작에 이어지는 포기, 또 비생산적인 정보 탐색과 컨텐츠 소비에 시간과 정력이 낭비된다는 점입니다. 

어린이, 젊은이들은 혹 남에게 거친 말을 하거나 매너를 어겨도 어느 정도까지는 양해가 됩니다. 뭘 잘 몰라서 그러겠거니 하는 사회의 포용심이 작동해서입니다. 그러나 중년에게는 그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이와 경험에 따른 책임감과 타인으로부터의 기대 수준이 높아서입니다. 그래서 중년의 언행은 지극히 신중해야 하며, 그 결과에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p116에서 저자는 스페인 속담 하나를 소개하시는데, "화살은 마음을 관통하지만 거친 말은 영혼을 꿰뚫는다."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남들에게 가능하면 따뜻하고 격려가 되는 말, 나도 다른 이에게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을 좀 해 주라는 충고를 독자에게 건넵니다. 

말로써 모든 오해를 풀고, 서로의 마음도 보듬는다면 말을 건네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윈-윈이 아니겠습니까. p117에서 저자는 범죄자 신창원의 예를 드는데, 그의 모교 어느 교사가 그렇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던들 그렇게까지 사람의 인생이 나락일로를 걸었겠냐는 지적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성장기에 행여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게 각별한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어른들의 책임이 왜 중요한지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p147에는 피카소의 명언이 나옵니다. "온세상이 예술 아닌 게 없다." 과연 빼어난 감각과 창의력을 가진 천재의 말 답습니다. 일수사견이요 불안돈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천재라야 사물과 세상이 나름답게 보이는 건 아니고, 내 마음에서 삿된 것을 다 떨쳐 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들도 마음과 안목만큼은 고흐, 피카소, 미켈란젤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보통 인간의 아름다움은 청춘에서 찾는다고 하지만, 인간의 원숙미, 인격에서 배어나오는 여유와 품격은 중년을 청년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중년의 보람과 기쁨에 대해서는 예술가들이 그 핵심을 일찍부터 꿰뚫어본 바 있습니다. 예술과 삶에 있어서 아무것도 빠진 게 없다." 역시 피카소가 중년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피카소가 그 정도로 중년 예찬론자였던 줄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저자는 또한 예술에서 중요한 건 그 완성도가 아니라 진정성이라고도 하십니다.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려는 중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p202에는 미국 가정살림 전문가, 홈메이킹의 레전드 사업가인 마사 스튜어트의 행적에 대해 소개합니다. 올해('24) 이분의 나이 82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령에는 노령에 어울리는 섹시함과 품격, 우아함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걸 몸소 보여 주고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볼때 중년 남녀들은 그저 아직도 한창 나이인 청년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대체 중년이 위축되고 침체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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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노랑나비
한정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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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5월 중순)에 이시형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썼었습니다. 그 책에도 보면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삼촌이 지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세상이 갑자기 바뀌었다 싶을 때 그간 쌓아온 설움을 한번에 다 쏟아내겠다는 듯 못된 짓을 해 대는 패악 분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이팽이라는 놈(p37)이 그렇습니다. 원래 인간 못된 것은 제놈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악으로 갚는, 이른바 은반위수의 패륜 짓거리를 하는 게 공통인데, 오갈데없는 것을 거두어 사람 대접을 해줬더니 벌인다는 짓이 저렇습니다. 어렸을 때 충명하고 남의 선망을 한몸에 받던 귀한 인생은, 저렇게 비천한 자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기도 하니 주의할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라는 게 있습니다. 할머니도 지금은 몸이 아프셔서 요양보호사 이모(p43, 98)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대소변을 가리기 힘들어 방에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지금 고은이하고 똑닮은(p145) 소녀였습니다. 선예(김선예, 즉 고은이 할머니), 화자, 순덕이(옛날 분들이라서 이름이 다 저렇습니다) 등과 동네를 뛰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십니다. 그때는 다들 피부도 곱고 천진난만한 소녀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어린 시절, 젊고 잘생기고 총명했던 삼촌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걸 보고, 사람을 대체 어떻게 때리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냐며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우리들은 몸에 부드러운 곡선이 생겨 제법 처녀 티가 나고 있었다(p30)." 할머니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체 왜 싸울까? 미움과 증오는 어디서 비롯하는걸까?" 어린 고은이의 질문(p76, p158)입니다. 고은이는 너무 어려서 한국전 당시 삼촌이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도 그저 들어서 알 뿐입니다. 다만 고은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뉴스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엄청난 양의 포탄이 도시에 떨어져 중요 시설들이 못쓰게 망가집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상대 쪽의 잘못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고은이를 불러다놓고 다시 할머니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동해안 작은 어촌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셨습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야 쓸데없이 남을 질시하지 않고 심성이 곱게 자라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전쟁 배경은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일수 오빠는 LST가 미군이 본격적으로 인천상륙을 준비하기 위해 저렇게 기동 중이라고 전하고 아버지도 그 비슷하게 예측하시지만 사실은 그게 아님이 드러납니다. p110을 보면 미군이 구룡포로 물자와 인력을 철수하기 위해 이 함정을 운용했다고 나오는데, landing ships, tanks의 약자입니다. 채고은의 친구 은미는 공부 잘하는 친구, 잘생긴 친구 등 부러운 애들이 세상에는 많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남 신경쓰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애들만도 못한 심성으로, 제 스스로도 무슨 소린줄 모를 미친 증오의 외침을 짐승처럼 떠들고 다니는 열등감에 쩐 불쌍한 인간도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외할머니가 수 놓은 것은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기도였다." 얼마나 가슴 뭉클해지는 말입니까. 세상에는 이처럼 남도 잘되고 나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선한 인생이 많지만, 얄팍한 이기심과 출세욕, 나면서부터 거짓을 즐기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불쌍한, 저주받은 인생도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에는 노랑나비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나비에는 죽은 자의 영혼들이 들어가서 저렇게 가냘픈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채고은이 쓴, 학교 제출용 보고서로 마무리되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는 전쟁과, 70여년 전 한국에서 벌어진 6.25를 서로 등치시킵니다. 우리 모두 이 어린 학생이 간절히 바라는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며, 호국 영령이 산화해 간 6월을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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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임택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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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사랑은 보통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미련없이 모든 걸 불태워야 한다고도 하지만, 정작 한창 버닝하는 당사자도 그렇게 하기 힘든가 봅니다. 내가 이런 동기로 그에게 끌려도, 상대도 나를 좋아해도, 서로에게 다른 걸 기대하고 만난 두 사람이 상대를 속속들이 알기 힘들고, 결국 그렇기에 한때 뜨거웠던 사랑도 식고, 이 감정의 앙상한 잔재가 서로에게 남긴 바가 무엇인지 깊이 회의하고, 환멸에 빠지고... 그 누구도 사랑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게 이 때문입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네요. 

박혜람이 파리에서 돌아온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동기뿐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뭐가? 김섬을 다시 찾은 게 말입니다. 우리는 멜로물에서 다시 돌아온 누군가를 놓고, 왜 니가 다시 와서 잘 살아가는 나를 들쑤시냐고 원망하는 장면을 곧잘 보곤 합니다. 김섬은 이미 아슬아슬해하던 독자들이 보기에는 그나마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통지표(p123), 아니 홍지표가 이미 그녀 곁에 제법 오래 있어줬기 때문인데, 그래도 (약간 스포를 하자면) 홍과 김의 관계를 박이 괜히 끼어들어 파탄낸 것까지는 아닙니다. 홍은 그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박이 아니었다 해도 결국 김과 오래 이어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박이 얄미운 게, 여튼 김-홍 관계의 파탄에 대해 미필적 고의를 갖고 밀고 들어온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p29를 보면 프랑스어 동사 faisander에 대한 준오의 설명이 나옵니다. 준오의 말대로 이 단어는 꿩이나 그 고기를 가리키는 faisan(퍼장)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어가 본래 그렇지만 라틴어를 거쳐 받아들인 단어입니다.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이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예를 들어 p26 같은 곳에서 이슬람의 어원이 평화냐 아니면 복종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핏대를 올리며 싸울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슬람의 어원이 복종이라고 해도, 먼 옛날 복종이라는 단어가, 특히 중동인들에게는그리 부정적이지 않았을 겁니다. 유교 문화권에 오래 살던 우리 조상들이(지금 우리들과는 크게 달리) 충(忠)이라는 단어를 보고 마음에 뜨거운 것이 밀려왔듯 말입니다. 

준오, 장은주, 송강, 현수호, 샤를리, 제롬, 앙리, 건우, 엘렌, 정우 말고도 이 소설에는 길거나 짧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p75의 어느 노부인은 처음 보는 박혜람에게 "프랑스를 좋아하세요?"라고, 그것도 사무적으로 묻습니다. 마치, 20년 전에 죽은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제목이라도 읊듯 말입니다. 예전에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별로가 된 것들은 보통의 우리에게도 한 트럭씩은 다들 있습니다. 지적인 캐릭터들이라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혜람이 날치기범을 향해(테러범 아닙니다ㅋ) 그놈이라고 부르는 대목(p58), 어느 영국식 영어 사용자의 get the f*** out of here 어쩌구라며 불평하는 말(p42), 김섬 아빠 후배 동호 아저씨(경상도 사람)가 불량배한테 이 새* 어쩌구 하며 쫓아버리는 장면(p140) 등 극히 적습니다. 

재혼 상대로 예전에 알던 누군가를 찍어 놓았건만 공교롭게도 그 자녀들끼리 이미 감정이 생겼더라, 이런 이야기는 한국식 막장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있었던 희비극입니다(저 한참 뒤에 보면 김섬 엄마하고 동호 아저씨하고도 뭔 일이 생깁니다. 내 딸 어쩌구 하던 게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죠). p63에 나오는 샤를리와 제롬이 그렇습니다. 프랑스는 말만 대혁명의 나라이지 은근 차별이 심하죠. p50을 보면 톨레랑스도 간데없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 이슈는 샤를리뿐 아니라 저 뒤에 밝혀지는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p230에 보면 김섬은 사춘기 때 성당(원래는 다녔던)에도 나가지 않고 독립적으로 지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짧은 구절이 그녀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김섬한테조차, 어렸을 때 고생했다는 그 누구(스포)는 간접으로나마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거죠. 결국 둘은 길게 이어지기 힘들었겠고, 사실 김섬부터가 일시 도피처로 oo에게 어떤 환상을 품지 않았었나 저는 생각합니다. 뭐가 어떻게되었든 간에, 박혜람이 이기적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희한하게 오체투지 관행이 있는데, 박혜람이 이 쇼를 하는 장소는 법당(p177)입니다. 

苦樂汝自當 邪正由汝已. p176에서 혜람이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인용합니다. 이 말의 묘미는 고락, 사정 모두 부정적인 개념이 앞에 온다는 점, 부정적인 감정과 체험에 더 방점을 두며 모든 게 당사자인 네가하기 나름이라는 뉘앙스를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앞구절에 當이라는 술어로 종결지어 영어의 deserve라는 느낌을 주고 종결부에는 어조사 已를 두어 박력을 더합니다. "부활은 화려한 듯해도 상처를 그대로 안고..." 그런데 그래서 부활이 위대한 것 아닌가요? 상처가 (보다시피) 이렇지만 난 살아났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소설의 김섬은 기실 부활이 내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처가 가슴아팠던 나머지, 그 이전 무구하던 시절만 바라던 나머지, 그냥 아픈 대로 자신의 고치에 그대로 머물고만 싶은.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칼을 들게 하더라고(p160)." 이 말도 저는 허세 같았습니다. 

이 점을 박혜람은 알았던 듯하고 그래서 저는 라미 누나(p46)가 밉네요. 등장인물들의 연배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배경으로 등장하는 음악들입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바르쿠 네그루)>라든가. 음악이 소설 장면장면과 잘 어울려서 마치 음성지원이 되는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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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캘거리에서 1년 살기 - 아이와 함께 떠난 워킹맘의 해외살이 도전기
채선미 지음 / nobook(노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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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미국처럼 치열하고 비인간적인 경쟁이 벌어지지도 않고 살인적인 물가가 판친다거나 치안이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경제는 경제대로 풍요로우니 외국인 이민자들이 선호할 만하며, 이미 1980년대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대안 이민지로 인기 있었고, 1990년대에는 어학 연수지로도 선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막연한 과거 캐나다의 이미지만 갖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건 위험합니다. 저자는 20대 시절 어학 연수로 캐나다를 다녀온 적이 있고, 그때의 좋은 인상이 남아 1년의 육아 휴직을 다시 캐나다로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p18을 보면 현지인들의 발음에 너무 강한 지방색이 배어나지 않을 것을 여러 기준 중 하나로 삼았다고 하는데, 목적이 아이 교육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다 장점만은 아니고 단점도 있다고 합니다. p33을 보면 3베드(bed) 기준 300만원 임차료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물론 월 기준입니다. 부대비용을 감안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듭니다. 좀 의외이지만 관공서의 갖가지 행정 처리가 너무 늦다는 점도 고려하라고 합니다. 다녀온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주차비용도 상당한데 무법 주차가 일상인 한국인으로서는 이 점도 아마 불편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1년을 살고 돌아온 분당맘 저자로서는 초2 아이에게 캘거리야말로 1년 살고 오는 교육 지역으로서 최고라고 권합니다. p39에 아이 사진도 함께 나오네요. 

1년 살고 오면 그곳에서의 수학기간이 국내에서 학력으로 인정되는가? 저는 이 점이, 한국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p41에도 나오듯 아이의 사정보다는 부모의 조건, 즉 부모가 유학, 워킹비자, 주재원으로 체류시에만 인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저자분 아이의 경우 귀국을 하면 경기도 교육청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친 후 나이에 맞는 학년에 편입될 수 있었다고 하네요(지역 교육청마다 사정이 다 다릅니다). 어디까지나 애가 시험을 합격해서 이게 가능했던 것이지 자동 인정이 아니라는 점 유념해야겠습니다. 여튼 저자분 아이 말로는 시험이 아주 쉬웠다고는 합니다. 

도시락이 필수라고 합니다. 엄마 입장에서 도시락 싸기가 어려운 분이라면 이 점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간편 외식이라고 해도 맛이 없고 가격이 매우 비싸다고 합니다. 한국처럼 가성비 나오는 도시락세트나 간식이 당연히 캘거리(올림픽까지 개최한)에도 있겠거니 생각하면 곤란하겠습니다. 이 책은 저자께서 자신의 직접 경험 위주로 쓰셔서인지, 책에 군더더기가 없고(예쁜 사진은 많습니다), 아이 단기 유학에 관심 있을 부모들이 딱 관심 있을 만한 이야기가 책 서두부터 척척 나와서 그게 좋았습니다. 도시락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이 안 키우고 그냥 캘거리가 궁금해서 책을 펴든 독자라면 "웬 도시락?"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동반 조기유학에 관심 두고 있다면 대뜸 여기부터 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책 중반 후인 p115에도 또 도시락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가 이 점이 특별히 힘드셨나 해서 좀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년 유학이 효과가 있다는 것인가? 이 대답도 책 초반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나옵니다. 아이는 초1, 초2 때 배운 언어습관을 평생 끌고 간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매우 행복해하는 모습이 엄마 입장에서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캘거리 등 캐나다 일대의 사회 분위기가 미국이나 한국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죠? 또 왜 초1, 초2가 좋냐면, 더 어리면 커서 기억이 안 나고 엄마 손이 많이 간다고 합니다. 더 크면? 아무래도 언어 학습 효과가 잘 안 날 수도 있지만 저자 말씀으로는 초등 고학년들(물론 한국인)도 많이 보이고 다들 행복해해서 그것만으로도 좋지 않겠냐고 하네요. 또 무작정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애를 캘거리에만 던져 놓으면 영어가 줄줄 되는 게 아니고 일단 현지에서의 테스트부터 거쳐야 제 나이에 맞는 학년에 배치된다고 합니다. 저자분 자녀의 경우 파닉스를 떼고 AR 1점 레벨의 리더를 읽는 수준(딱 그 나이 정도입니다)이었다고 하니 참고하세요. 

다녀온 분들은 알겠지만 대체로 캐나다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캘거리 인들이 친절하다 해도, 아이들 사이에 한국 애 한 명 툭 던져 놓으면 그냥 교우관계가 해결이 되는 게 아닙니다. p110 이하에 나오는 대로 엄마가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캐나다 하면 또 국기(國技)가 거의 하키이다시피한 나라이며 미국 NHL에 캐나다 팀이 일곱이나 됩니다. 에드먼턴 어학 연수 다녀온 이들이라면 웨인 그레츠키가뛰었던 명문 오일러스를 당연히 알 것입니다. p128에 보면 여학생들도 하키를 즐기는 현지 상황이 나옵니다. 

저자의 아름다운 추억, 아기 유학에 대한 정보가 많은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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