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중재법규 1 세계중재법규총서 1
법무부 엮음 / 법무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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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중국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소송으로 가기보다 중재가 유리하다고 합니다. 물론 소송도 중재도 모두 불리할 경우가 많겠으나, 왜 중재 제도를 거론하는지 연원을 따져 보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민사에서는 관습법보다 성문법이 우선하지만, 상사 관계에서는 둘이 대등한 효력을 지닙니다. 중재의 경우 상법과 관습법이 동일한 순위로 적용되는데, 관습에 대해 해당 분야에 정통한 상인들만큼 잘 아는 이들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죠. 해당 분야를 잘 안다고 해도 상인이 곧 직업법관이 될 수는 없기에, 예로부터 법원은 노련한 상인을 초빙하여 분쟁을 전문적, 중립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취해 왔습니다.

중재는 ADR이라고도 부르는데, 중재가 곧 ADR은 아니며 원칙적으로 ADR에는 중재 말고도 여러 제도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상사뿐 아니라 요즘은 민사에서도 ADR이 강조되는 추세이며, 다만 헌법에 보장된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훼손되어서는 안 되기에, 이 ADR은 어디까지나 보충적으로 개입해야만 하겠습니다. ADR이 강조되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한데, 소송은 기간이 오래 걸리고(수년 전부터 집중 심리제가 일부에서 도입되었다고는 하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며 근원적인 해결 수단이 되기 어렵기 때문(설령 논리적으로 선명한 판결이 났다고 해도 원한이 남는다거나)입니다.

헌법에서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건, 어느 나라이건 자격을 갖춘 법관이라 함은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고 사태를 폭 넓고 객관적으로 볼 자질을 갖췄으리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과연 그러할까요? 그저 또 한 명의, 생각이 꽉 막힌 관료라든가, 심지어 청나라 시절의 관료보다도 재량이 더 협소한, 공산당의 상부 지령에 전적으로 기속될 뿐인 꼭두각시에 지나지는 않을지, 그 실체가 어떠하든 세계는 아직 그들에 대해 신뢰를 갖췄다고 보기 힘듭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 무역 관련으로 분쟁이 일어나면, 재판보다는 중재 쪽으로 가라고 권유를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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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처가 한눈에 보이는 2009 업계지도 - Business Graphic book
이데일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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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계서 중에는 지나치게 한우물만 파고 드는 일중독형 성공 유형만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의 권유를 담은 책도 꽤 많이 나옵니다. 그거 "안티 자계서"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영어의 anti- 라는 접두사는 무엇에 반대한다거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기만 하는 게 아니고, "역발상을 통해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도 지닐 때가 많습니다(예: 안티히어로는 히어로에게 딴지를 거는 인물이 아니라, 종래 히어로의 미덕과 반대의 성향을 노출하며 결국 같은 고지에 오르는 유형을 일컫죠).

자기계발이라는 게 결국 본인이 스스로 자긍을 느끼고 행복감에 충만해지자는 게 목적이므로, 이런 책들도 충분히 독자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느 정도는 사회에서 두루 객관적으로 인정 받는 성공이라야지 너무 주관적인 가치에 치우친다면 그것도 곤란하겠죠. 최소한 공인된 직업을 갖고 경제 활동에는 참여하는 단계라야 "주관적" 성공이라는 작은 의의라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는 남한테 인정 받고 돈도 많이 벌면서 든든한 인맥도 챙기고 싶어하는 게 솔직한 욕구이겠으므로, 그런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내용이 담길 필요도 있겠고요.

이 책은 여튼 그런 점에서 볼 때, 조금은 독특한 가치를 추구하는 주장을 담았습니다. 너무 일에만 중독될 필요가 뭐 있을까? 가끔은 실속과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나만의 여유와 한가로움을 느끼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게 건강을 위해서나 일 쪽의 재충전을 위해서나 더 바람직하고 절실하지 않을까? 일에 지치고 물린 상당수의 독자들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는 주장과 권유이긴 하죠. 물론 아직은 이런 태도에 대해 경계하는 쪽이 더 우세합니다. 그렇게 스스로에 관대해지기만 해서 실직자 신세나 되지 않을까? 남들 눈빠지게 열심히 일 할 때 자신만 논다면 이 치열한 경쟁에서 결국 낙오되지 않을까? 사람에 따라 마인드셋의 스펙트럼 스팟은 진정 판이한 배열이라,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충고가 적실할 수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그저 낙천적이고 풍류를 즐기는 삶만 즐겨 온 우리 겨레가, 바짝 정신을 곤두세우고 이처럼 민활해진 패턴으로 바뀐 건 실로 극적인 변화입니다. 아마 세계 어디서도 유례가 없을 테며, 다만 마음 한구석엔 뭔가 잃어버린 듯 아쉬움이 남기도 하기에, 이처럼 그 반대지향의 트렌드가 마이너한 지류를 이루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에는 일본이나 우리나 "그저 한우물만 파"는 게 직장인의 미덕이었습니다. 곁눈질이나 좌고우면은 무능하면서도 교활한 인물의 한계와 특성으로만 여겨졌죠. 이런 확고한 합의가 경제 섹터 각 영역의 주류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평생 직장"이라는 신화가 CEO들의 철학이나 피용인들의 기대 속에 불변의 원칙으로 자리매김한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 그런 암묵적 도그마가 깨진 후로는, 어떤 조직인이건 자신의 능력을 본인이 알아서 계발하여, 험난하고도 변화무쌍한 격류 속에서 스스로의 재치와 감각으로 살아남는 게 당연한 룰처럼 여겨지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현실의 대세가 꼭 개인의 선택 지침을 마련하는 유일한 팩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녀의 견해는, 사람은 본디 한눈팔게끔 성격이나 본성이 정해져 있고, 하나에만 몰입하게 (후천적으로) 세팅된 뇌는 결국 당사자를 불행한 운명으로 몰아가게 마련이라며 자신만의 지론을 들려 주는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앞서 지적했듯 지금은 시대가 개인더러 "한우물만 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인으로 추락할 수 있음"을 경고할 뿐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한눈좀 팔고 살아!"를 권하는 양상이라고까지 하는군요.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람의 적성이나 센스를 다면으로 계발하고 소중히 가꾸라는 뜻이지, 이것도 대충, 저것도 대충 건드리다 말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제대로 한눈팔아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수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는데, 이 책에서는 어느 피규어 수집가의 예를 들며, 선명한 취미와 관심사를 잘 가꾸되, 인접 분야에까지 전문 지식을 넓혀, 그저 방만한 딴청이나 비생산적인 시간 낭비, 혹은 자기만족적인 현실 도피에 그치지 않고, "돈 되는 경제 활동"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노는 게 일도 되는" 경지야말로 모든 이가 열망하는 바일 텐데, 그게 "제대로 한눈팔기"에서 일견 미미해 보이는 출발점을 마련한다는 게 흥미롭죠. 요즘 하는 말로 "덕업일치"의 단계입니다(덕은 한자로 德이 아니라[뭘 그렇게까지 고차원의 함의가], "덕후(=오타쿠)"의 앞글자입니다).

한눈을 팔면서 다른 두 가지 부대적인 효용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람의 개성이 유연해지는 겁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까지 확장하는데요. 사람이 언제나 제2의 가능성, 옳다고 여긴 원칙에 대한 정면 배반의 예외도 마음 한 구석에 두는 타입이라야 백년 해로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한우물만 파는 유형은 이제 직장에서 짤릴 위험도 크고, 짤리고 난 뒤 딴 일도 못하고, 심지어 늙어가면서(황혼에 파탄을 맞는 경우가 얼마나 잦은가요) 배우자와 말도 안 통하는 최악의 상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또하나 한눈팔기의 장점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의 자연스런 움직임이기에 크리에이티브의 새로운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시켜서 하는 일과 좋아서 하는 일 사이에, 성과의 질은 자연히 차이가 큽니다. CEO들이 애사심 함양에 공을 들이는 것도 다 이런 (계산적)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한눈팔기의 또다른, 가외의 기쁨이라면, 한우물파기가 본질적으로 고독한 몰입인 반면, 이런 활동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끼리 모여 즐거움과 성취감을 몇 배로 높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덕후질은 동아리를 만들어 이어가는 모습이 잦은데요. 자칫 고립된 개인의 취미에 그칠 수 있는 게 오히려 사회성도 키우고 연대의식이나 관계 발전 스킬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혹 경제 활동에까지 이런 활력과 아이디어를 이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동아리에서의 다양한 정보 취득이라든가, 혹은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얻는 색다른 영감 같은 건 결코 혼자서는 얻어내지 못할, 소중한 자원의 소스이기도 합니다. 한눈팔기란, 결국 연대와 소통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니, 직장에서 일차원 활동만 하는 이가 어떻게 이런 멋진 기회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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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 부의 탄생, 부의 현재, 부의 미래
하노 벡.우르반 바허.마르코 헤으만 지음, 강영옥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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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는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자서전을 읽을 때,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를 두고 주위(선발 사업가들 그룹이나 고위 관료 그룹)에서 "그 사람이 인플레가 뭔지나 알겠어?"라고 비웃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 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남들 하는 대로 사업이라고 벌여 동분서주하지만, 거시 경제의 큰 흐름이나 자본주의 구조의 기저를 손톱만큼이나 이해하고 설치겠냐는 조소였죠.

이에 대해서는 대강 이렇게 대응을 할 수 있겠습니다. 1) 미시(개인 사업은 아무리 규모가 커도 어디까지나 미시입니다)와 거시는 작동 원리가 꽤나 다르며, 2)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목숨 거는 열의로 사업을 하는 이라면 아주 바보로 태어난 게 아닌 이상 뭔가 통찰력 같은 게 생깁니다. 그게 탁상공론식 겉치레(소화 안 된 겉도는 지식)보다 훨씬 효용이 높을 때가 많죠. 물론 가장 골치 아픈 유형이라면, 배움도 없고 그렇다고 실물의 흐름도 모르면서 머리까지 나쁜, 몇 마디 주워들은 구호로 거친 현실을 마구 재단하려 드는 용감한 이들입니다.

아무큰 요즘은 일본식 줄임말인 "인플레"를 잘 쓰지 않고 원어 그대로를 더 널리 사용하는 듯합니다. 제가 서평 앞에 저 일화를 꺼낸 이유는, 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자본주의 경제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 업보 같은 것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자본주의를 채택한 어느 나라의 거시경제건, 경기의 사이클이라는 게 반드시 있습니다. 잘나갈 때는 어느 목에서 점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건 높은 매상고를 올리고, 이들이 다시 다른 섹터에서 통 크게 소비를 하면 그 돈이 또 돌고돌아 다른 이들의 가계를 살찌우고..... 이게 세칭 "경기가 좋다, 활황이다"라고들 부르는 전형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다가, 경제 전체에서 새로이 생산된 물자, 서비스의 가치는 그럭저럭인데, 이를 적절히만 대표해야 할 종이돈만 엄청 불어나서 많은 이들의 눈을 속였다는 인식("내가 알고 보니 그리 부자가 아니었어!")이 확산하면, 소위 "거품"이란 게 뻥 터집니다. 거품도 아주 없을 수는 없어서 그저 필요약 정도로만 기능하면, 관리 가능한 수준에서만 커졌다 줄었다 하면, 그건 정상적인 생리 작용의 일부라서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진즉에 부피가 줄었어야 할 것이 맘대로 덩치를 키우고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돌연사하면, 걔만 죽은 게 아니라 그 위에 올라탔던(돈도 없으면서 펑펑 써대었던) 상당수의 경제 주체, 대중들이 함께 죽습니다. 이런 게 공황입니다. 따라서 버블과 공황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즐긴 대가를 나중에서야 혹독히 치르는 거죠.

이 책의 제목과 주제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 때문에 물가가 살인적으로 올라서 국민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런 걸 지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장바구니 물가 수준에 비해 소득의 오름세가 너무 더뎌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곳곳에서 들리고, 이 책에서도 김동환 소장님 같은 분이 (심지어 작년 촛불집회는 정치적 성격보다 민생고의 절규라고 봐야 한다면서)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세 분 전문가가 거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 대중의 불만과 좌절은 물가고 때문이 아니라, 벌이가 시원찮은 데서 연유한 부분이 더 큽니다.

그게 그게 아니냐는 반론은 경제를 모르는 소치인 게, 각각의 경우 처방이 다르기 때문이죠. 다른 정도가 아니라 180도 반대 방향입니다. 물가가 쓸데없이 높기만 하다면 지금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물가는 적정 수준인데, 다만 지갑이 텅텅 비어서 문제라면, (의미심장하게도) 정부는 금리를 더 낮춰 시중에 돈을 더 돌게 해야 합니다. 전자는 허리띠를 졸라 긴축을 하자는 거고, 후자는 여력이 있으니 당장 빚을 좀 내서 실탄을 보충한 후, 신나게 번 뒤(그럴 전망이 있다는 뜻) 나중에 갚자는 거죠. 후자를 무작정 죄악시하는 시각은 역시 경제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김동환 소장님은 "생일 하루 잘 먹자고 사흘 굶을 생각이냐"고도 하시는데, 그냥 당장의 지출만 줄이고 궁상 떨다가는 평생 가난하게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취지입니다.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어느 수준, 어느 정도 역량을 가졌는지 냉철하게 진단하여, 주제파악 후 긴축, 긴축 모드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적 경기 팽창 모드에 편승해서 돈 좀 벌어 볼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란 전제 하에 모든 논의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소박하게 "인플레이션"이지만, 내용은 차라리 "한국과 세계의 경제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거시경제 이슈 전반을 모두 망라한다 할 만큼 광범위합니다.

주제가 광범위하면 "거, 말은 듣긴 좋지만 하나마나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나는 거 아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중에 그런 책도 많죠(아니면 정반대로, 특정 정파의 정강 정책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선전물, 경제 서적의 탈을 쓴 정치 서적도 있습니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류는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과감한 것 아닌가, 본래 경제 현상이라는 게 이처럼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말로도 표현 가능한 주제였나, 새삼 놀랄 만큼, 세 분 전문가 모두 시원시원하게 막 지르십니다. 막 지르는 식으로 논의를 끌고 가면 재미도 나고 논지가 바로바로 이해 되는 장점은 있는데, 깊이가 없거나 편향된 결론만 잔뜩 얻고 끝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책은 (고수들답게) 상당수 이슈나 현황에 대해 합의를 공유하는 세 전문가들의 토론이지만, 반대로 의견이 갈릴 때는 대립 지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주 솔직한 책"입니다. 대개가 토론, 대담 형식이라, 독자는 어느 한 가지 결론에만 오도, 고착될 염려가 적습니다. 곰곰히 숙고하면 세 분 중 어느 전문가의 결론이 옳을지, 논점에 따라 개별적으로 알찬 깨달음이 자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무작정 긍정하거나 반대로 거부하게도 되고, 아예 뭐가 뭔지 몰라 판단을 못하기가 십상이죠. 그러나 서로 미묘하게, 혹은 판이하게 다른 세 아이템을 같이 대조하면, 각각의 장단점이 잘 파악되어 무엇을 취사선택할지 판단이 빨리 섭니다.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에서도, 세 분 고수는 같은 현상, 결론, 논리를 두고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독자에게 풀어 줍니다. 그래서, 설령 한 분의 입장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다른 분의 다른 버전으로 다시 듣고 나면 앞 분의 논의까지 덩달아 납득됩니다. 앞으로, 난해한 주제를 다루는 경제 서적은 모두 이런 포맷을 취한다면, 독자들에게 꽤 유익한 공부가 될 것도 같네요. (헛된 기대이겠습니다만)

1장은 자산시장에 대한 전망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작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고공행진이고, 아파트값도 (전체는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 라곤 하나, 그래도 꽤 추세적입니다. 전엔 다들 이게 일시적이라고 봤는데 너무 오래갑니다. 지난시절과는 패턴이 다르긴 하나, 여튼 호황은 호황입니다. 많은 전문가분들 위신이 크게 상할 만큼) 투기과열지구 지정이 이어질만큼 심상치 않습니다. 그럼 고수들 이야기를 들어 봐야죠. 이거 큰 재앙으로 이어질 거품으로 치닫는 거냐. 아님 미래를 낙관해도 된다는 어떤 시그널이냐. 물론 후자 쪽으로 치달을 나이브한 이는 일반인 중에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신중하게 처신하되, 어느 수준까지 신중할지를 판단 잘 해야 한단 거죠. 아파트 버블 터질 거라고, 박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거라고 그렇게들 지적이 나올 때, 현장에서는 다들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론에만 매달릴 뿐 시장의 형편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라고요. 이게 작년 이맘때 분위기였어요.

김한진 박사는 (좀 많이) 신중하자는 입장에 기웁니다. 이 1장에서뿐 아니라 책 전체를 통틀어 이 입장이 꽤 일관되어 있습니다.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 2008년 위기는 양적 완화를 위해 미봉되었을 뿐,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타인에게 전가한 부담, 해악은 아직 덜 해소되었다. 이런 판에 다시 통화를 팽창하거나 방만하게 시스템을 관리하면 다시 부실이 폭발할 수 있다." (책의 표현은 아니고 독자인 저 나름대로 요약, 리프레이즈한 겁니다) 반면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미 부채와 위험 요소는, 놀라울 만큼 효과가 컸던 연준의 핸들링으로 다 녹았다(녹았다는 건 영어식 표현이지만, 우리말로 저리 직역해도 그 뜻이 잘 전달됩니다. 본래 경제 정책은 경로 곳곳에 포진한 폭탄을 해체하고, 독성 물질을 옅은 농도로 잘 녹여 내는 수완이 그 본질이죠)"는 전제 하에, 이제 성장을 위해, 경제 주제의 지갑을 두둑이 채우기 위해 과감한 행보를 디디야 할 때라는 쪽입니다. 세 분 중 김일구 센터장이 가장 알기 쉽게, 또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사회자 격인[실제로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도 있습니다] 김동환 소장이 책 중 좌담에서 개입도 하더군요)

"이러다 일본 된다." 이 진단은 보수 언론, 심지어 대중 사이에서도 폭 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편이죠. 그런데 이 책 대담자 세 분 중, 적어도 두 분은 이 말에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특히 김일구 센터장 같은 분은 여러 근거를 들어가며, 결코 한국은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이 특수할 뿐이지" 다른 각국의 경제, 특히 조건이 여러 모로 다른 한국은 다른 길을 걸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죠. 제가 가장 속이 후련했던 건, 이 일본의 사례를 일반화할 게 아니라, 기존 경제학 교과서에서 써 오던 "저축의 역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기존의 개념틀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이면 그로 환원하면 충분하다는 건 어느 학문에서나 공통된 상식입니다. 번거롭게 매번 새 말을 만들어낼 게 아니라 말이죠. 또, "일본화"의 프레임은 결국 거기서 빠져 나올 답이 없다는 점에서 건설적이지 못한 논의입니다. 허나 "저축의 역설"은 경제학자들이 고안해 둔 이론적 해법과 관료들이 실제 운용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적 처방이 이미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김동환 소장 같은 분은 이 대목에서, "작년 촛불집회를 보라. 우리 국민들이 이처럼 역동적인데 과연 침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말까지 합니다. 이는 예전 학장 시절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수업 시간에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요(생각해 보니 맥락도 큰 찬이가 안 나네요).

"소득과 성장이 일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업은 높은 실적을 거두어도 그 과실은 개별 경제주체, 가계의 소득으로 적정하게 분배, 파급되질 않는다." 근데 이 논의는, 근래 다분히 정치적 논쟁으로 타락한 소위 낙수효과(트리틀다운 이펙트) 이슈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이 책 세 분 대담자 중 한 분인 김일구 센터장님이 우파 쪽에 치우치지 않았냐고도 하던데, 지금 바로 위에 인용한 이 말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다만 김 센터장께선 "국가대표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밀어줘야 한다"는 논지는 자주 강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 김 소장님(김동환)과 김 박사님(김한진. 세 분이 모두 김씨라서 책 읽으면서 처음엔 구분이 좀 어렵더군요)이 동맹을 이뤄 반대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이런 개인 성향을 파악하면서 읽어야 책이 더 재미납니다.

김 센터장께선 그러나 성장과 소득의 (거의 필연적인) 분리까지 논지를 확장시키시는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대목은 좀 의아스럽더군요. 교과서 이야기도 하시지만 거시경제학의 가장 뼈대를 이루는 도그마 중 하나가 "국민 소득 삼면 등가의 원칙"입니다. 경제 구조의 개별 특성에 따라 경로가 길고 짧고, 시간이 덜 걸리고 더 걸리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은 생산국민소득이 분배, 소비 국면에서까지 일치, 균형을 찾아간다는 게 교과서의 가르침이죠. 물론 현실의 사정이 그새 변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원 설마!), 언제나 모범생처럼 근본 명제의 적용과 원용을 강조, 선호하시는 센터장께서 유독 이 대목에서만은 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시지 않나 해서입니다. 다른 이슈를 설명하실 때 너무 사이다처럼 후련한(그러면서도 엄정하고 명쾌하게 교과서적인) 해명을 해 주셨기에 제가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생산에서 기여하는 비중은 또 적습니다. 그 말은 자영업자들이 대개 현장에서 돈 많이 못 벌고 고전한다는 뜻도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자기 책임 하에 개별적으로 뛸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효율적으로 쏟을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제언도 합니다. 상당히 과격하지만, 자영업이 점차 특정 프랜차이즈들로 통합되어 가는 양상이, 어느 정도는 이런 진단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점주들은 본사와의 갑을 관계 대립상을 그리 부각하지 않고, 정부 쪽에 불만을 토로하는 쪽으로 바뀌더군요. 이 논의는 과거 영세농이 너무 많아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이슈와도 유비 관계가 성립합니다. 잘못 다뤘다가는 큰일나죠.

김한진 박사님은 그럼 (정치적으로) 개혁 성향(소위)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김 박사님은 자유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편이더군요. 정부는 최소한으로 개입을 억제하고, 경제의 작은 지류에까지 속속 파고들어 전체적으로 놀랄 만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장(market)"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기라는 입장입니다. 책에는 심지어 공기업을 대폭 민영화하고, 정부는 새로운 공기업을 만들어서 유능한 젊은 인력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라는 제언까지 나옵니다. 듣기엔 큰 기대를 부풀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만(국지적으로 타당하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많은 난관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공기업 노조측에서 과연 가만있겠습니까? 또, 어떤 기준으로 무슨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런 "특혜"를 줄 것인지를 놓고, 끝도 없는 분란이 일겠지요.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 세계는, 2008년 대재앙이 남긴 몹쓸 폐단을 과연 말끔히 쓸어내고 나서 새출발을 다짐하는 중인가?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3월경에 서평도 쓴 <트럼프 시대 호황....>에서 이미 한 입장을 광폭으로 전개하고도 있었습니다. 오바마를 지지하거나 높이 평가하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그가 위기 수습을 멀끔하게 해 놓았다는 데 대해선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인 트럼프가, 이제 확장 정책, 과감한 인플레이션 자극을 통해 호황기를 한번 열어보자고 나서는 건, 전임 오바마가 일군 성과를 그도 긍정한다는 실토밖에 안 됩니다(역설적이죠). 소규모 개방 경제로서 대외 요인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엮일 수밖에 없는 우리(이 책에도 나오듯 소위 베타가 큰)로서는, 이 국면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영리한 실속을 챙길 건지, 아니면 이른바 "재정 건전화, 충실"이란 매력 없는 옛 숙제에 계속 매달릴 건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해야겠습니다. 세 분 전문가가 호방하게, 솔직하게, 기탄 없이 심중을 털어 놓는 토론을 구경하며, 독자도 함께 각성하고 공부하는 바가 많았네요. 말미에 실린 "트럼프라는 현실"은, 정치적 선호나 프레임이 깔리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현실에 밀착한 쾌도난마식 설명이 너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 한마디로,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보약보다 영양가 높은, 교과서보다 더 공부가 되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읽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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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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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비대칭성 이슈는 경제학자들을 꽤 오래 괴롭혀온 난제 중 하나입니다. 신고전학파가 그 이른 시절 "완전 균형, 완전 청산"을 (감히) 주장할 때부터, 왜 그럼 현실에서는 그 깔끔하고 아름다운 지복점을 찾기 어려운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지엽말단의 예외나 일시적 교란으로 취급되고 말았을 뿐, 아름다운 경제학 이론의 대(大)체계에 근본적인 회의를 부르지는 못할 요인 정도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의 쾌거 이후로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 현상이 그저 일시적 예외가 아닌, 이론의 정합성을 근본에서 무너뜨릴 수 있는 상수 자격으로 더 심각하고 진지한 조명을 받게 되었죠. 더 중요한 상황 변화는, 이른바 인터넷 혁명을 계기로 일뱐 대중들도 엘리트들 못지 않게 중요 정보에의 광폭 노출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정책 결정에까지 제법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입장을 견지해 온 그가 "유로 화의 근본 위기"를 들고나온 건 시의적절할 뿐 아니라 학자적 양심과 지평에 비추어 일관되고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단일 유럽의 통화인 유료는 그 태생 시점에서는 많은 축복을 받고 시작했습니다. 진보 진영은 생산요소 중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실업률 0의 달성에다 상품 가격의 균등화까지 머지 않은 미래에 이뤄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보수 진영 역시 싼 값에 노동력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을 다분히 품었고요. 예전 노 대통령은 단일 통화 출범 즈음(그의 대통령 취임보다 훨씬 앞선 시점의 일)을 회고하며 "사람 사는 세상이 이게 올바른 모습 아니겠는가."라는 코멘트도 한 적 있습니다. 이랬던 유로화가, 재작년의 브렉시트 파동, (그 훨씬 이전)그리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아일랜드 등의 불확실한 경제 전망 때문에 그 존재의 근본에까지 회의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겁니다.

유로의 장래에 대해 냉소적인 건 삼십 년 전에는 대개 보수 진영과 유대 자본 측이었습니다. 세계는 달러를 기축통화 삼아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데 왜 "인위적으로" 새로운 장치, 제도를 비싼 비용을 들어 만들어내는가, 그를 부양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추가 비용이 투입되겠는가, 취지는 좋아도 각국의 경제력이 천양지차인데 어떻게 부실과 거품이 끼지 않겠는가 등등이었지요. 스티글리츠 교수의 입장은 (자칫 잘못보면 결론은 비슷한 듯 해도)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요약하면 "유로는 초심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좌초 위기를 맞은 것이다" 정도입니다.

저자 스티글리츠 교수는 우선 유로화의 운용에 결정적 입김을 끼치는 "최종 보스"인 트로이카를 맹비난합니다. 여기서 트로이카라 하면(꼭 스티글리츠 교수뿐 아니라 다른 맥락, 입장, 진영에서도 쓰이는 말이지만), IMF, 유럽중앙은행(ECB), EU 집행위원회를 가리킵니다(p30). 이 책은 "폐쇄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이미 정보의 비대칭성이 상당 부부 극복된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과거의) 그림자, 환각에만 빠져 있는(이상은 독자인 저의 요약입니다) 저들 엘리트 트로이카의 과오로 유로는 고사 직전이다"라는 메시지를, 500여 페이지 분량 내내 강조, 증명, 확장, 전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도 1998년 당시 마찬가지였지만 이들 "트로이카"가 위기 국가에 찾아와서 도와준답시고 돈보따리를 들고 와서 내리는 처방이란 매우 단순하고, 효험이 의심스러울 만큼) 획일적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라." 한 마디뿐입니다. 첫째도 긴축, 둘쩨도 긴축만을 강조하는 이 단일 처방은 그간 많은 진보진영, 리버럴 경제학자들의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다만 한국은 워낙 모범생 국가라서, IMF가 내리는 처방(이라기보다 지시, 명령)을 한치의 망설임, 어긋남도 없이 실천, 복종했고 유격훈련 코스나 마치듯 졸업장을 따 냈습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트로이카(유럽 안 국가라면)의 이런 (가짜)만병통치약에 대해, "그 나라의 기층 민중, 서민, 중산층이 겪어야 할 엄청난 고통을 전혀 '비용'으로 계상(計上)하지 않은, 잔인하기 이를데없는 방안"으로 신랄히 비판합니다. 노엄 촘스키(물론 그 천재 언어학자 말입니다)도 그의 저서에서 비슷한 비판을 한 적 있는데, "이들 강자의 대변인들은 약하고 가난한 나라에 가서는 살인적인 고금리(우리도 당시 그랬습니다)로 서민을 괴롭히고, 자기네 나라에서는 제로 금리 정책을 강권한다." 같은 대목이 나오죠. 이 지점에서 두 석학은 견해를 공유하는 셈입니다. 


긴축은 왜 나쁜가? 저자의 분석은 선명하고 설득력이 높습니다. 씀씀이를 줄이라니 (가뜩이나 침체된) 투자심리는 자본을 다른 나라로 유출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씀씀이가 줄면 사람이라고 어디 더 많이 고용하겠습니까? 단순 노동력이건 고급 인재건 해외로 유출되기 십상이니 그 나라 안의 생산품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추락합니다. 실제로 트로이카는 그리스 위기 당시 "국민들이 해외(독일 같은 곳)로 나가 돈을 벌어와서 국가 부채를 갚으라"고 명시적으로 주문했습니다. 마치 1970, 80년대에 한국 노동자들이 중동에 파견되어 땀흘려 번 돈을 고국에 송금하던 현상, 혹은 월남전 당시 파병 군인(급여의 상당 부분은 정부 수중에 들어갔습니다)이나 서독 파견 광부, 간호부(당시 용어)들의 사례와 비슷하죠. 기층 국민의 고통과 수고는 대변 차변의 기장 요소로써 싹 무시한 발상이라야 이런 처방을 거침없이 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잔인하고 비정하며, "반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의 장부에서 보기만 한다면 그저 합리적이고, "흑자"인 발상이겠지만 말입니다.

역주에도 나옵니다만 저자는 논의의 근본 틀을 "수렴이나 발산이냐"의 이분법으로 일단 단순화합니다. 유로라는 통화, 유럽 연합이라는 단일 정치 단위(의 지향)는 "수렴'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한 지역 안의 자원과 노력과 의지가 사방팔방으로 분산, 휘발하는 상황은 어느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만을 낳습니다. 통일은 획일화, 억압의 기제가 아니라, 모두의 노력과 정성을 보다 효과적인 방향으로 조직화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다름이 있는 곳에 불화, 전쟁이 언제나 발생했던 만큼, 유럽은 (두 차례의 끔찍한 전쟁을 겪고 나서) 더 이상의 다름과 분열을 조장하기보다, "하나의 가치로 수렴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각국의 경제상황은 천차만별이었음을 집행부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일 통화 사용이라는 강력한 조치로, 이 "다름"은 "모두가 넉넉하게 잘 살게 되는 지복점"으로 점차 수렴해갈 것임을 그들은 확신했던 겁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책 중에도 나오지만) 이 단일 통화 유로라는 장치가 많은 결함을 안고 있음을 당시부터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 그들의 성공을 응원했고(여기서, 싸늘하고 이기적인 유대 자본의 심성과는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이죠), 이 흥미론운 실험 귀추를 주목했습니다. 이제 이 두꺼운 책은, 거대한 실험의 중간 평가 보고서이자 동시에 저자 본인의 (학문적) 입장에 대한 임시 결산 마니페스토이기도 한 것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보급판 서문(원 서문이 있고 보급판 서문이 따로 있습니다)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우리들 중 그 누가 트럼프 같은 위인이 미국 대통령직에 오를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던가?" 보급판과 하드커버판의 출간 시점이 1년 정도 차이 나니, 이 (추가) 서문은 그 사이의 시대적 격변에 대한 임시 보론(補論) 구실(혹은, 호외[號外] 노릇?)도 하는 것입니다. 책은 대석학이 쓴 책치고는 마치 신문 칼럼 읽히듯 쉽게 내용이 파악되고, 영어권 독자들(원서를 읽는 층)을 위한 배려이긴 하나 예컨대 SECULAR 같은 단어도 "경제학 용어로서, 어느 경제 구조에 만성적으로 배어 든 속성을 가리킴" 같은 설명을 저자 본인이 해 놓고도 있을 만큼 친절합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처럼 현행 표준 외국어 표기법에 충실한 번역도 깔끔한 편집의 미덕을 자랑하고(다른 책은 "알렉시스" 같은 오류를 종종 노출합니다), 적절히 개입하는 역주는 혹 스티글리츠 교수의 평소 지론이나 이 책 자체의 지향에 덜 밝은 독자들이 행여 샛길로 빠지지 않게 적정 지점에서 주의를 환기합니다. 정확한 동시에 친절한 본문이라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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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가 사랑을 노래하다
황병익 지음 / 산지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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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왜 고전이냐면, 시대를 초월해서 독자들에게 무한 공감을 안겨 주는 강한 자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모든 고전을 익히 읽고, 이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하여 독자에게 전달할 능력까지 가진 저자가 자신만의 감성으로 우리에게 뽀송뽀송 알기 쉽게 이야기 해 주면 엄청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닐까요?

이 책은 참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재미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근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존재했던 그 많은 고전에서 로맨스만 추려 내어 엑기스만 전달해 주시니, 고전 요약만 해 주셔도 읽는 재미가 쏠쏠할 텐데, 그것도 가장 오랜 테마, 공감의 이슈인 사랑의 갖가지 양태만 모아 놓은 책, 말 그대로 페이지 터너죠, 제 2권이 없는 게 아쉬울 만큼요. 유익하다는 건 뭔가, 하루키류의 달달한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어서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는 뭐 그렇다고 하죠. 이 책에는 워튼의 <순수의 시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나와 있습니다. 로맨스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며, 우리는 고전 공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대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아직 오지 않은 가장 좋은 사랑"이 무슨 상관일까요? 여기서 작가는, 반면교사적 의미에서 "사랑의 극단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도 결국은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인격의 한 발현입니다. 표도르 카라마조프 같은 광적인, 야성의 격정을 가진 인간한테 걸리면(나이가 어리든 늙었든), 정상인은 대단히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가장 나중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저 달콤한 여정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가장 모진 역경과 쓰디쓴 좌절을 인간(그것도 아직 모든 게 미숙한 어린 나이의)에게 톡톡히 안기는, 독한 처방약입니다. 이 이야기를 놀랍게도 한 교수는 이 고전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해 주고 있습니다. 카라마조프쉬나!


제가 개인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명작이 있죠. 바로 이책 첨에 나오는 투르게니예프의 <첫사랑>입니다.연상의 여인 지나이다를 좋아하는 주인공 소년의 사랑이 너무도 강렬히 묘사되어 있어, 이 작품에 관한 한 저는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남자들의 가슴에는 그녀들의 무덤이 있다." 연애는 연애 많이 해 본 분한테 강의를 들어도 들어야 합니다. 하물며 고전에 밝은 분이라면? 답은 그저 하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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