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곤충은 없다 - 플라스틱 먹는 애벌레부터 별을 사랑한 쇠똥구리 까지 우리가 몰랐던 곤충의 모든 것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EBS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 주어가 "곤충"으로 바뀌었을 때 아마 많은 분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거나 펄쩍 뛰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장 바퀴벌레만 해도, 그의 "악함, 혐오스러움"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같기에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이는 우리 인간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익숙한 느낌대로 계속 가길 원하지, 설령 반증이 드러난다 한들 종래의 생각이 바뀌길 원치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흥미진진한 과학 교양서입니다.

"교미를 끝내면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실 많은 동물들에게 있어 성적 교합 행위는 대체로 "슬픕니다." 그 교합이 오래 가지도 않고 대체로는 이 고달픈 릴레이 경주를 끝내는 마지막 바톤 터치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손 번식을 위한 과정에서 그토록 큰 쾌감을 느낄 뿐 아니라, 자손 번식과 무관하게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축복 받은 존재입니다. 때로 이 성적 본능을 제대로 통제 못 해 큰 곤경을 겪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무분별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여튼 "내 아이의 아빠는 내가 고른다"는 이 사마귀의 재미있는 행태를 보면서, 생명체의 진화와 투쟁 이면에 놓인 궁극의 원리가 과연 무엇일지 깊이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도 생태계가 암컷만으로 채워지자 알아서 성별을 바꾸는 개체가 등장합니다만 도대체 번식이라는 게 한쪽 성만으로도 한편에서 가능하다는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대체로 유전자 배합의 다양성을 기하기 위해 양성 생식이 생겨났다고 알려졌지만, 단성 생식이 저처럼 편리한데 과연 이 과정, 그 힘든 과정이 어떻게 생겨나기나 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수벌의 고환은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순간 '폭발'한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 비슷한 기제가 작동했다면 아마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끔찍한 사건들 중 상당수는 아예 상상의 단계에서도 배제되었을 텐데요.

저자께서 여성이셔서 그런지는 모르나, 주도권을 주로 암컷이 장악하는 곤충들의 세계에 대해 특별한 열정과 의미 부여가 잇다르는 대목이 많이 보입니다. 과학자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 남성 독자들도 뭐 겸손히 따를 뿐입니다 ㅎㅎ

해리 포터 시리즈를 지어낸 조앤 K 롤링 여사의 통찰력에 대해선 언제나 감탄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여사의 창작 사전 작업의 밀도도 참 만만치 않은 것이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토를 펄럭이며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디멘터"는 암풀룩스 데멘토르라는 말벌의 학명에서 따온 것이며, 그 행태도 서로 굉장히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퀴벌레의 천적이 세상에 어디 좀 없냐며 만날 불평이지만, 바로 이 말벌이 바퀴벌레에게는 명왕과도 같습니다. 이 말벌이 자신의 "호구"를 사냥하는 모습은 대단히 잔인하고 냉철하기에, 우리는 생전 처음으로 바퀴벌레에게 동정심이 들기까지 합니다.

개미가 농사를 짓는다는 말은 상식으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개미가 "축산업을 영위한다"는 말도 처음 배우게 되었습니다. 진딧물은 자기 방어 능력이 부족한데, 개미는 이 진딧물로부터 일정 이익을 얻으므로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보디 가드 노릇을 자청합니다. 물론 공짜 경호만 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구역으로 옮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물어뜯는 등 이기적인 폭력도 행사하는군요. 그렇다고 개미가 최강자라는 건 아니고, 이들 개미의 지나친 번식도 곰이 나타나 적절히 제한함으로써 식물계 역시 착취를 방지당합니다. 자연계의 신비와 조화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곤충으로 초밥을 먹는다?"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으며 영화 <빠삐용> 등에서 보듯 사람이 그저 극한상황에 몰릴 때에나 벌레를 주워 먹기 마련이지만 알고 보면 벌레들은 단백질 덩어리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먹어라." 발명왕 에디슨의 시대에도 미국 중산층의 가정에서조차 바퀴벌레가 그렇게 들끓어서 테이블 보에 은박을 입혀 전기를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지난 세기 영국의 학자 홀트는 "더러운 벌레로 골치를 썩일 게 아니라, 노동자와 빈곤층은 자신의 집에 들끓는 벌레를 요리해 먹으라"는 충고를 했다는군요. 물론 대중이 격분할 만한 말이지만, 저자는 "아마도 수백 년이 흐른 후 사람들은 결국 홀트가 옳았음을 인정할 것"이라 합니다. 곤충 요리는 레시피에 따라 지상에 일찍이 없던 맛까지 지녔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긴, 요즘 웰빙으로 주목 받는 잡곡류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상민들의 식탁에나 오른 품목이었죠. 흰쌀밥이 이처럼 푸대접 받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구더기로 상처를 낫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미신이나 근거 없는 민간 요법, 혹은 픽션 속의 가짜가  아니라 이 책 p205에서 그 원리가 자세히 설명된, 엄연히 효능 높은 하나의 요법이기까지 합니다. <람보 2>를 보면 베트남 군과 소련군이 구더기가 창궐하는 웅덩이에 람보를 빠뜨려 고통과 굴욕을 주는 장면이 있지만, 저자는 사실 구더기는 인간에게 엄청난 효용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구더기는 결핵균의 증식을 막기도 하며, 사실 낚시꾼들에게는 벌써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이런 착하디착한 구더기를 놓고 무조건 침을 뱉거나 혐오감을 표시하는 우리들이야말로 배은망덕한 종족 아니겠습니까. 아니 구더기가 뭐 어때서요? 착하기만 하구만.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종이 생기기까지는 수십만 세대는 아니라도 수천 세대는 지나야 한다." 곤충은 우리 인류보다 훨씬 앞서 지표를 누비던 대 선배들이며, 나중에 출현한 우리와 얼마든지 풍요로운 공생 방법까지 제공하는 믿음직한 존재입니다. 쓸데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살충제나 찍찍 뿌려대는 인간은 반면 다른 종을 말살하는 아주 이기적인 종자들입니다. 곤충에 대해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부터 벌써 더 풍요롭게 가꿔 갈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라"라는 이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아일랜드계의 어느 부녀가 억센 생명력과 열정으로 가꾸던 그 농장의 이름과 같습니다. 이 장편 논픽션을 읽으면서 저는 내내 그 대하소설의 주인공 스칼렛이 떠올랐는데요. 차이점이 있다면 스칼렛의 부친은 다정한 인성(적어도 자기 딸한테는), 합리적인 세계관과 성실한 태도로 그 딸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함은 저지르지 않았던 반면, 이 논픽션의 저자이자 주인공의 부친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외에도, 스칼렛과 달리 이 작의 주인공에게는 모친과 오빠들이 있었죠)

대뜸 그 고전 장편이 떠올랐을 만큼 이 책은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고전이 역경과 위기 속에서도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흐뭇한 사연인 반면, 이 책에 담긴 사연은 여튼 해피 엔딩이긴 하나 내내 어둡고 무거우며 끔찍한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의 배경이 무슨 백 수십 년 전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라는 점, 더군다나 세계 최선진국인 미국의 한 지방이라는 점도 놀라움을 더합니다.

장애인 헬렌 켈러의 경우 신체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곤경에 처한 분이었지만 가정 환경은 유복했고 가족들도 대체로 상식적인 위인(그 이상이었죠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이 저자, 주인공만큼 불우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한 사람의 인생 성패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 재능에 달렸다 해도 이분만큼 환경이 나빴다면 도무지 방법이 없을 듯도 합니다. 여튼 이분은 그 모든 역경을 딛고 최후의 승자가 되어 이런 멋진 책을 우리 독자들에게 선사했으며, 그 자체가 위대한 업적이라 할 만합니다.

모르몬 교 신도들은 그 출발 시점에선 이단 취급을 받았으나 현재는 버젓이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 존경을 받는 집단입니다. 가깝게는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사업가 밋 롬니가 있었고, 불과 며칠 전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난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 교수는 한국에 모르몬 선교사로 체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개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벽촌에 머물며 근본주의적 삶을 고집한 분이 있었고, 보편적 삶의 원리를 거부한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 부모(특히 그의 모친, 즉 저자의 할머니), 자녀 등 모든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본인은 결코 그리 여기지 않겠으나 제3자 입장에서는 다른 판단의 여지가 없을 듯).

외골수 신념으로 세상을 살려 하니 그들 가족에게 남은 일거리란 험한 노동밖에 없을 테죠. 부친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데, 이를 두고 그는 "중앙 정부의 독재, 압제를 거부하는 자유인의 결단"이라며 의미 부여합니다. 이 역시 전혀 뜬금없는 스탠스는 아니어서, 본디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앙 정부에 대한 반항을 계기로 삼아 세워진 나라이고, 시민들의 자율적 삶이 권리 장전에 헌법적 권리로 보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삶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는데, 다만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양심에 과연 어긋나지 않는 결단인지 그 시민이 정직하게 성찰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죠.

이 가족의 삶은 비참합니다. 오빠 중 하나인 션은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하다(그 부친의 책임이 크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칩니다. 기묘한 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외견상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인다는 건데, (당시 아직 사리 분별을 하기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쳤어야 할 게 저리 멀쩡히 보인다면 안 보이는 부분(내장 기관이나 정신)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을까 하는 걱정(정확한 판단)을 이 소녀, 주인공, 저자가 이미 하고 있다는 점이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도 션은 아끼는 여동생 타라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 번도 부족해서 션은 한참 후 위험한 기계를 다루다 또 팔을 크게 다칩니다. 본인뿐 아니라 그 여동생도, 혛육이 이런 사고를 자주 겪어 육체적 정신적 모두 정상인 삶이 어렵게 되면 그걸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갈 만하지 않습니까. 모친도 이런 사람과 살다 보니 건전한 판단을 못 합니다. 딸(이 책 저자)이 지금 몇 살인지도 모르고 독립해서 나가 살라고 하다가 이제 겨우 열 여섯이라는 걸 일러 주자 "그랬구나, 내일 당장 안 나가도 좋아."라고 말합니다. 종교도 좋고 다 좋은데 사람이 일상을 살아나갈 때 최소한의 맑은 정신은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경제적 곤궁은 둘째 치고라도) 과연 어떻게 정상적 삶이 가능할지 참 읽는 내내 마음이 막막해졌습니다.

이 책의 배경이 무슨 에이브러햄 링컨이 통나무집에 살 무렵도 아니고 20세기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독자로서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여튼 타라는, 자신의 삶에 가로놓은 그 숱한 장애를 오로지 배움에의 열정으로 헤쳐 나갑니다. 말이 쉽지 이런 환경에서 뭘 배우려고 해도 제대로 책이 읽어나지겠습니까. 제가 관심 깊게 본 건, 이 어린 소녀 타라가 과연 뛰어난 지능을 가지기는 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이런 책도 쓰고, 지성의 전당인 대학(그것도 명문)에서 자기 자리를 굳힐 만큼 성공한 인생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특히 "고등 대수학" 등에서 고전했다는 말로 보아 그리 엄청난 지능을 갖고 태어난 편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즉 탁월한 머리라는 무기도 없이 나쁜 환경에서 이만큼 왔기에 더 위대한 성취가 되는 거겠죠.

경제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그 과정에서 터득한 강인한 의지, 자신만의 지혜 등이 부산물로 따라올 수 있기에(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마냥 불리한 여건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살뜰히 돌봐 줘야 할 부모가 뭔가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졌기에, 정서적으로 베풀어야 할 보호를 등한히하고, 나아가 남들 다 받는 교육마저 부실하게 받게 한다면 그 밑에서 자라나는 애가 정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비뚤어지고 왜곡된 인성은 물론, 사리 판단을 합리적으로 할 수 없기에 자신의 과제도 제대로 해결 못 합니다.

미국은 개인주의적 삶이 지배적인 데다 광대한 영토에 남 일 신경 안 쓰는 분위기라서 이런 비극적인 가정(에서의 위대한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좁은 땅에 남들 눈치 보고 살며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사람 취급을 받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실 타라 웨스트오버 박사님 같은 비극적인 출발점을 맞이하는 인생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이 어린 소녀 시절, 배움이 얼마나 간절히 목말랐겠습니까. 그런 분이 만약 한국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 줄세우기 풍조 같은 걸 겪었다면 아마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다며 환희에 찼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교육 풍조가 마냥 좋다는 게 아니라, 우리는 혹 배부른 푸념에 젖어 더 중요한 걸 잊고 있지나 않는지 반성을 할 일입니다.

책 속에는 대체로 보편적 지혜와 상식, 인류 공통이 동의할 만한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 타라 웨스트오버는 이 점을 알고 그 희미한 불빛을 제대로 좇았기에 지옥으로부터 광명의 세계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발 부모님 감사한 줄, 내가 처한 환경에 감사한 줄 알고 주어진 여건을 소중히 활용하며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무섭고도 치열한 책을 읽으며 독자로서 제게 남은 감상은 그것뿐이더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 이코노미스트 세계경제대전망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래를 예측하는 건 언제나 어렵습니다. 미래를 제법 잘 예측하는 사람은 큰 돈을 벌기도 합니다. 사회에서 올리는 수입은 성원들이 그의 능력과 기여에 대해 베푸는 평가의 척도이기도 하니, 미래를 잘 예측하는 일은 그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편안하게 해 주는 아주 중요한 과업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예측이라 함은 우리가 아무의 말이나 믿지 않고, 여태 공신력 있게 세상을 바라보고 정확한 진단을 해 온 전문가 집단에서 나온 말들을 믿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큰 공신력을 지닌 미디어 중 하나가 영국의 주간 이코노미스트일 것입니다. 잡지의 역사도 오래되었고 필진의 무게와 설득력도 여전히 대단합니다. 세상사를 가벼히 논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라도 용납이 안 되겠으나 특히 경제 문제를 따질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달려 있으므로 각별히 신중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경제 이슈 분석에는 경제 본연의 영역뿐 아니라 정치, 사회, 가까운 역사 정보까지 총동원되며, 경제 영역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경제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는 게 (그게 바람직하든 아니든 간에) 언제나 정치였지 않았습니까.

2020년은 새해 벽두부터 중요한, 위험한 국지적 충돌로 장식되었습니다. 이 책은 2020년을 전망하지만, 사실 책이 쓰여지고 출판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대부분의 아티클들은 꽤 오래 전에 자작성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많은 글들은 여전히 흥미로우며, 아직도 열 한 달 이상 남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서 유용합니다. 어떤 글은 그 실현 여부를 바짝 앞두고도 있기에, 과연 이 글이 "지면상의 성지글"이 될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게 다 독자로서의 특권입니다. 필자들은 조마조마하겠지만 말입니다.

"출판되기까지 꽤 긴 시간..." 운운했습니다만 마치 전혀 아니라는 듯이, 이 책 p91이하에서 다루는 이슈는 바로 잉글랜드 은행을 새로 이끌 총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은 우리 식으로(사실은 일본식으로) "영란은행"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아주 유서 깊은 기관인데요. 바로 십수 일 전에 이와 관련된 뉴스가 전파를 타기도 했기에 이 책의 해당 분석글이 더욱 큰 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카니의 통치는 끝났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저널리즘 기사투는 대단히 문학적(?)이며 때로는 과장이 섞여 있습니다. 사십여 년 전 닉슨이 특별검사를 해임했을 때에도 "학살'이란 표현이 즐겨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사건은 그리 불리기도 하죠. 카니 총재의 행보나 스타일도 여튼 전횡이라 일컬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글의 필자는 그 나름 복잡한 소회를 피력하는군요. 여튼 어디서나 브렉시트가 문제입니다. 이제 해결의 갈피를 잡아 갑니다만 말이죠.

수십 년 전부터 중국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느니, 사실 지난 수천 년 간 누려 오던 자리를 되찾을 뿐이라느니 하는 말이 유행했지만 어떻게 된 게 최근의 그들 행보는 갈수록 전망이 나빠집니다. 언제까지 그들은 "이름 뿐인 금융 중심지(이 책의 표현입니다)"인 상해를 목표 지점에 올려 놓을까요? 이 글에서는 말미에 뜻밖에도 축구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코노미스트 같은 점잖은 매체에서 다루기에 가벼운 소재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축구 이야기가 결국은 정치 이야기이고 경제 이야기더군요. 이 책 나오고 나서 얼마 후에 히딩크가 대표팀에서 짤리기도 했기에 더욱 시의성이 높습니다.

이 책은 바로 지금 사서 읽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꼭 지금이 새해 벽두라서가 아닙니다. 대만의 총통 선거 이슈, 홍콩의 시위, 페르시아 만의 위기 등등이 마치 사전에 조율이라도 한 양 지금 연달아 핫 이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하필 지금 읽는 독자는 "와 과연 이코노미스트라서 이슈가 될 만한 일들을 잘도 엮었구나."하고 감탄할 만도 한데(TV만 틀면 그 뉴스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사실 이는 우연의 일치이지 이코노미스트의 필진이 탁월한 데에만 기대는 건 아닙니다(그건 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하지 않을지...). 하긴 모르죠. 내공 깊은 필진이라 정말로 적중을 시키고 있는 중일지도요. 여튼 이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특히나 신년 정초에 한번쯤 차분하게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분명.

책 말미에 실린 간단한 세계 전망에는 한국 이야기도 나오는데, 한국의 4월 총선에 대해 제법 대담한 예측도 꺼냅니다. 보통 이런 데서 하는 이야기는 두루뭉술 펼쳐지기 마련인데 이 책의 태도는 그 기준보다는 훨씬 직설적입니다. 오랜 명성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가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건 가장 큰 무례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것이 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최상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아 이 거친 세상, 때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열심히 부대끼며 사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건 바로 "죽음"이라는 운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이란 무서운 관문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운명이며 이를 피해갈 방법은 전혀 없죠. 그런데 우리가 품위 있게 이 비참한 운명을 접대하고 잘 정리할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달관입니다. 그리고 그 달관이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는 여유를 갖고 이 죽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웃음은 경우에 따라 매우 잘 어울립니다. 이 유쾌한 소설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때는 살짝 엉덩이가 처지긴 했어도 전체적으로 괜찮은 몸매였는데(p175)." 한창 때의 여성은 마치 초원을 활짝 아름답게 수 놓는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구를 밝히는 미의 결정체이구나 싶게끔요. 한창 때 여인의 환한 미소를 보면 세상 근심 걱정이 다 없어집니다. 체형은 마치 터질 듯 부풀어오르면서도 절묘한 균형을 잡아 보는 사람이 다 흐뭇합니다. 거친 세상에서 먹을 것을 마련해 오는 수고는 남성들이 대개 도맡습니다만, 세상 살 맛을 제공해 주는 건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삼라 만상의 존재 이유를 구성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성도 어느 새 전성기가 지나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어 냉혹한 죽음을 언젠가는 맞아야 합니다.

"아우야, 바위는 산의 일부였을 적을 기억하는 법이야(p338)." 우리 모두는 기억을 갖고 삽니다. 그 기억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위기를 맞았을 때 중요한 참고 자료를 제공하기도 하며, 힘든 순간이 닥쳤을 때 이를 이겨낼 감정적인 힘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어떤 기억은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합니다. 그런 유쾌한 기억은 죽음 앞에 섰을 때조차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를 제공합니다.

미겔 엔젤 역시 그런 기억에 기대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의 일원입니다. 그는 하필, 가장 기쁜 순간을 기념해야 할 자신의 생일에 존속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습니다. 우리도 흔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라든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크루스"는 스페인어로 십자가라는 뜻인데, 저들 문화권의 중요한 원천이었던 기독교에서는 "누구나 다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가르침을 공유합니다. 그 십자가는 결코 자신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는다고도 가르칩니다. 만약 그 범위를 넘는다고 느낀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웃음"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얼마 전 등장한 트럼프하라는 정치인이 두 나라 사이에 쌓은 장벽. 그 장벽의 이편과 저편에서 갖가지 양태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작가도 그렇고,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도 국경의 이편저편을 넘나들며 갖가지 양상으로 삶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가장 축복받은 인생은 그의 주변 인물들이 조용한 박수를 쳐 주며 그가 모은 재산의 다과에 무관하게 언제나 응원을 보내 주는, 그런 흐뭇한 장노년이 아닐까 싶습니다. 빅 엔젤은 정말 인생 제대로 산 분입니다. 그에게 설령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었건 간에,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잔잔한 웃음을 주고 꺼지지 않는 햇살을 비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향해 미소를 띄울 때, 우리 자신들도 아마 언젠가는 찾아올 우리들의 죽음을 놓고 아마 보다 편한 마음이 되어 있을 줄 압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 -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보 로토의 ‘다르게 보기’의 과학
보 로토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르게 보는 노력은 그 자체로 위함하고, 적어도 부담이 됩니다. 회사에서도 남들이 예스를 외칠 때 홀로 노를 말하는 이는 경계, 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죠. 하지만 요즘은 일상에서조차 혁신을 강조하는 세상입니다. 루틴에 젖으면 언제 도태될지 모르며, 그걸 떠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작은 행복이라도 찾으려면 다르게 보기를 습관으로 길들일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신경과학자 보 로토 교수의 이 책은, 대체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이 어느 정도까지나 우리 자신의 것인지, 혹은 그저 길들여지는 과정일 뿐인지 우리 독자들에게 근본적인 반성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변화하며, 뇌는 어떤 식으로건 이를 해석하고 정보를 정리해야만 합니다. 쉼 없이 어떤 판단을 행하는 우리이지만 그 기초가 되는 정보는 "눈으로 본다"고 여기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 생각과 다른 판단을 말하면 "그거 내 눈으로 분명히 본 거거든?"이라며 길길이 뛰기도 합니다. 본인은 본인 눈으로 본 명백한 "팩트"를 부정당하는 게 참을 수 없습니다. 사실은 야얄팍한 자존에 상처를 입었을 뿐인데도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양 "정의(착각입니다)"의 분노를 쏟아냅니다. 그리고,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어지러워집니다. 이성과 논리에 의해 세상사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말입니다.

"러브 스토리"는 그저 에릭 시걸의 픽션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회색질의 대뇌 피질(명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내세우던 모토이기도 하죠), 그리고 시상은 우리가 사물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라 성격 규정합니다(p113).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하여 세상 자체가 끊임 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성격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피질과 시상(세포) 역시 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며 그 의존, 상호 관계를 진화시켰음을 주장합니다.

과연 사랑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 세상이 날이면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가꿔지는 원동력임이 분명한 듯합니다. 물론 과학으로 증명될 만한 명제는 아니지만, 과학자의 날카로운 통찰이 아니겠습니까.

편향과 가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주관적 뿌리(p240)는 어찌 보면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로로든 이미 뇌 속에 익숙하게 자리한 것을 근거도 없이 진리로 규정하고, 그 반대의 것을 그르다며 폭주를 일삼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객관은 그런 우리 마음 속의 불건전한 요동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미약한 신경 더미들이 채 따라잡기도 전에 그 모습을 바꿉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정에서 긴장을 풀고 종래의 확증 편향 속에 나태하게 빠져든다면 아마 판단의 착오는 임계를 넘어 위험 수위에 치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건 아마도 파멸의 결과뿐이겠습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필요 없는 정보를 걸러 내며 생존을 위해 유익한 예측을 해야 하는(p337) 과제는 사실 진화의 기본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려면 "의식적 사고"가 필요하며(p167) 그런 사고는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이 책은 참으로 멋진 표현들을 담습니다. 진화는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특히 사람처럼 뇌 부분을 별나게 진화시킨 종이 한사코 기피하려 든 건 바로 "불확실성"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며, 우리는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처럼이나 탁월한 지성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의식적 사고가 어떻게 가능한지. 답은 "그 불확실성 속으로 결코 두려움 없이 밀고 들어가는" 선택과 결단에 있습니다. 마치 우리 전통 속담처럼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 법"이니 말입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을까요, 아니면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까요? 뉴턴 같은 과학자도 결정된 미래를 그저 수학적으로 계산해 낼 뿐이라며 암울한 결론을 암시한 바 있습니다. 반대로, 미래가 자유의지에 따라 설령 바꿀 수 있더라도 우리의 의지가 기여하는 바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저자는 그저 의지만으로 미래가 바뀌는 건 아니라며 정직한 확률을 말해 줍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진실과 객관을 발견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있고, 그것은 아름답다고도 일러 줍니다. 이 책은 과학책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유력한 가설 하나도 일러 줍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이 거친 세상에서 하루를 버티며 생명의 불꽃을 틔우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니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