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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현의 친절한 사회과학 - 고전 20권 쉽게 읽기
임수현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5월
평점 :
임수현 선생님의 "친절한" 시리즈 두번째 권이 드디어 나왔네요. 작년('22) 2월달에 <친절한 인문학>이 발간되어 저도 읽고 리뷰를 올렸더랬습니다. 그저 친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내용도 정확하며, 아직도 사회과학이 어려운 독자들에게 개념을 쉽게 잡아줄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심화한 수준의 독서, 공부를 도와 줄 길라잡이 노릇도 해 줍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그 위에 높은 탑을 쌓을 수 있듯, 쉬우면서도 정확한 책으로 첫걸음을 떼어야 독자에게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 최고 명문대를 졸업하시고 대기업연구원, 국회정책비서관, 지상파 방송인, 인기 유튜버 등 다채로운 경력까지 쌓은 사기캐 임쌤의 책이라서인지 이번 책도 최고였습니다.
사회과학 고전 명저 20선이 어떤 책으로 시작할지 궁금했는데 올해 탄생 300주년이기도 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첫 테이프를 끊은 건 아주 놀랍지는 않았으나, 배달앱 이야기부터 꺼내시는 그 서두를 읽고서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체 배달앱하고 국부론이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임쌤은 정말 기발하게 이야기를 이어가시는데,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제때 따박따박 받아먹을 수 있는 건 음식점 사장님들이나 라이더, 혹은 배달의민족 창업자인 김봉진 대표가 이타적이라서, 배고픈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타심, 박애주의로 무장한 분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과도 같은 분들이죠. 하지만 그런 분들은 소수일 뿐이며 사회 구성원 다수가 그런 착한 마음을 갖기를 당장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개개인의 이기심이 우리 모두의 이익이다(p24)." 각자에게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보장하는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만 하면, 라이더나 식당 주인, 앱 중개사업자, 시켜먹는 우리들 모두 윈-윈이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이기심이 의외로 모두의 풍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결론 말고도 <국부론>에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주장이 많았습니다. 중상주의가 주장하던 금 축적론에 반대하여, 금을 잔뜩 쌓아놓은 나라가 부자가 아니라, 쓸모있는 상품과 서비스가 활발하게 사회에 유통되는 나라가 부자라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이런 주장이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도 같았겠습니다. 개인이야 저축이 많으면 좋겠지만 위정자는 그런 식으로 국가 거시경제를 운용하면 안 되며 국민들이 실제로 누리는 효용을 극대화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는 거죠.
임쌤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내용도 바로잡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 만능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도 온화하고 침착한 품성의 소유자였는데 이런 분들의 특징이 어느 한 가지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만 기대어 모든 것을 재단하려 들지 않는다는 거죠. 시장은 물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기제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회와 국가가 올바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외에 <도덕감정론>도 저술했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감의 동물이기에 공동체가 이기심의 정글로 타락하도록 방치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정치 이념은 그것이 아무리 완전무결한 체계를 지녔어도 현실에서 올바로 작동해야만 가치가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선험적 가정적 당위론을 연역적으로 전개한 게 아니라, 반대로 미국이라는 신생국에서 제법 효율적으로 굴러가는 그들식의 민주주의에 대해 귀납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토크빌은 이미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그 교훈을 충분히 성찰할 수 있었던 세대에 속하며, 자유와 평등은 기대처럼 동시에 얻어지거나 유지되기가 매우 힘들다는 걸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한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회적 습속, 법과 제도, 그 다음에 환경적 요인이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는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임쌤은 특히 환경적 요인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통념에 드 토크빌이 합리적으로 반박했던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어리석은 동물이어서 분위기에 휩쓸려 이성을 잃고 바람직하지 못한 실수를 종종 저지릅니다. 군중 심리라는 게 그만큼 무서운데 이 와중에 누군가는 이익을 취한 후 숨으며 행동에 참여한 다수는 엉뚱한 혐의를 쓰고 대신 불이익을 받기도 합니다. 인터넷상에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정보가 난립하는 요즘,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는 두 세기를 앞서간 한 사회과학자의 통찰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증명합니다. 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꿈의 재료는 그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할 뿐이니 예지몽 같은 것은 설 공간이 없다(p103)"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에 대한 욕구를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의미부여할 것인가. 만약 경제적 풍요가 신의 계시라면, 그 추구 방법이 지나치게 비도덕적이거나, 그 추구 동기가 탐욕에만 기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칼뱅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스위스와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은 이런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했고 막스 베버는 이를 정확히 포착하여 그의 명저 속에 풀어냈습니다. 20세기 들어 나온 여러 자계서들은 경제활동을 유도하는 욕망에 대해 아무 제한선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점이, 이른바 프로테스탄티즘 기반 자본주의 정신과 오늘날의 자기계발사상 사이의 차이점 같습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개인의 이기심이나 폭력성향이 집단 레벨로 올라오면 성질 자체를 달리하여 심각해진다는 진리를 체계화했습니다. 집단 폭력이 정당하다는 게 아니라, 개인의 폭력과 이기심을 다룰 때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책에서는 19세기 말 미서전쟁, 이른바 the splendid little war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이없게도 반제국주의라는 명분을 걸고 얼마나 위선적인 행태를 보였는지에 대해 비판합니다. 니부어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윤리적 전제를 유지하면서도 혁명을 위한 몸부림 자체는 그대로 남겨 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집단 레벨에서 발동되는 폭력은 고유의 논리에 대해 절제된 방식으로 행사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케인즈는 시장 기구의 작동이 그 본성상 언제나 원활하게 작동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정부가 수시로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새고전학파(new classical)에 의해 이론적 허점을 많이 지적당했습니다. 임쌤은 특히 케인즈가 경제의 정적인(static) 측면만 중시하다가 동적(dynamic)인 측면을 놓친 오류가 있다고 정리합니다. 그런데 케인즈도 생전에 그런 취지의 비판들에 대해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라며 퉁명스럽게 반박한 적 있습니다.
문명과 야만의 우열을 가를 수 없다고 한 레비스트로스는 현대에 들어서도 제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사상가에게 큰 영향력을 남겼습니다. 신비스러운 성격마저 지닌 마셜 맥루언의 이론은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를 구분하며 현대 미디어학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임쌤은 우리들이 자신만의 주관을 유지하며 미디어로부터 적정 거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핵심과 요지뿐 아니라 고전들의 표준적 해석까지 알기 쉽게 풀어 주는 책을 읽다 보니 명저 20권 내용이 머리 속에 살아 숨쉬는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