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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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변 와중에는 항상 결정적 순간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 간발의 사건이 반대 방향을 틀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을 쉴 새 없이 떠올려가며 판국을 복기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재미있을 뿐더러 오히려 진지한 반성, 성찰, 모색의 건설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제목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는 38년의 간극이 있습니다. 왜 나라가 흔들릴 만큼의 큰 국난을 겪고 나서도 또 한 번의 큰 시련을 다시 치러야 했을까? 이 38년의 기간 동안에는 광해군의 즉위, 북인 정권의 수립, 북인 정권과 광해군 사이의 자체 갈등, 서인이 주동이 된 소위 "반정", 이괄의 난, 그리고 호란 등이 이어집니다. 정명섭 선생의 이 책에는 한편으로 치밀한 분석과 반추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당시 긴박한 사건을 소설처럼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분석은 분석대로 치밀하고, 소설처럼 재구성된 장면은 그것대로 긴박감이 넘칩니다.

갑작스럽게 터진 왜란 때문에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장정이란 장정은 모조리 국토 방어와 인명 보호를 위해 쓰여야 했기에 많은 소년들이 병장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책 1장에는 어린 병사들의 사연이 짧은 소설처럼 삽입되었는데 마치 한국전 당시 소년병 징집도 연상됩니다. 작가도 이 점을 의식한 듯 그런 언급을 하고 지나갑니다. 이 "아동대"는 과연 어떻게 대우받았을까.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년병들은 정말 유감스럽지만 총알받이 이상이 아닙니다. 책에는 "군량도 충분하지 못하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윤근수의 진언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당시 군량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지만(그랬겠죠), 그보다는 인도애적 고려가 더 우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참 꼼꼼한 게, "부디 그들이 무사히 고햐향에 돌아갈 수 있었기를" 기원하네요. 소집해제(?)가 끝이 아니라 사실 이 점이 진짜 중요하죠.

여진족은 오랜 동안 명과 조선의 골칫거리였는데 책에는 "멧돼지 가죽"이란 이름이 붙었던 누르하치가 이 견제 시스템을 어떻게 깨고 나왔는지 설명이 자세합니다. 정명섭 저자의 책은 표준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자신만의 관점에서 "진짜 궁금해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잡고 나서 재미있게 문제를 파고들어간다는 점이 뛰어납니다. 교과서 등에서 수동적으로 접한 이슈들이 그의 책에서는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또 상식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풀립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광해군은 오랜 동안 폭군, 심지어 암군의 이미지로 인식되다가, 참 엉뚱하게도 일제 강점기에 들어 비로소 "비운의 개혁 군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몇몇 교수 등의 선창에 의해 아예 절대 선 비슷하게 과장되는 경향까지 있지만 말입니다. 정명섭은 이런 대중의 착각, 선입견에 영합하지 않고, "그는 폭군, 암군으로 이해될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도 따로 있다"고 아주 또렷하게 선을 긋습니다. 어설픈 양비론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에 의한 폭주를 경계하는 이런 신중한 태도가 그의 책들에 무게감과 신뢰도를 더하는 겁니다.

무엇이 그럼 높이 평가되어야 할 대목인가? 후금과의 충돌이 명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점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다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사태를 관망하는 게 조선으로서는 현명한 태도였고, 다만 이를 넘어 무슨 광해군이 장차 후금에서 대륙을 다 차지하는 미래까지 내다보았다는 건 터무니없는 우상화입니다. 당시 조선에 무슨 전폭적인 참전, 나아가 대명 원조까지 할 국력이 있었겠습니까.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북인은 그럼 과연 실리 외교를 펼쳤을까요? 그렇기는커녕 정반대였습니다. 서인과 적대한 건 맞으나 이는 학문 지향성, 내정 방침, 그리고 궁내 문제(인목대비, 영창대군 처리 문제) 등을 놓고 벌인 대립이었을 뿐, 오로지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사는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은 북인들이 무슨 실리 외교를 주장했겠습니까. 저자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무모한 반응이, 무엇은 절대로 옳고 무엇은 절대로 그르다는 식의 극한론입니다.

인조가 잘못한 건 본래 타고난 인간됨 자체가 용렬한 근본적 한계가 있었겠으나(돌머리한테는 뭘 가르쳐도 못 알아먹는 법이죠) 자신을 옹립한 반정 공신들 사이의 다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고, 참 한심하지만 명나라로부터의 승인도 못 얻어내었다는 실책이 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는 뭔 생각인지 자신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광해군을 끝까지 버리지 않거나, 혹은 이를 기화로 조선, 인조에게서 뭘 뜯어먹으려 들었습니다. 소탐대실이란 이런 걸 두고 이름이죠.

이 책에도 나오지만 광해군이 저지른 가장 멍청한 짓은, 가뜩이나 피폐한 민생을 돌보지 않고 경복궁 재건 공역에 또다시 일반 백성을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란 복구를 위한 실리 정책"의 이미지하고는 정반대되는 사실이죠. 인조는 이런 것, 또 백성을 등쳐먹는 탐관오리 등을 징벌함으로써 마치 포퓰리스트처럼 일단은 민심을 달래려고 들었습니다만 근본적인 방책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왕만 바뀌었을 뿐 바뀌지 않은 조선" 저는 결국 이 글귀가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한다고 생각되네요. 광해군 체제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를 대체하고 들어선 인조 정권이 더 무능했던 게 비극이었죠. 서인은 사실 이후 북학파도 그 속에서 나오곤 했지만 오히려 유연하고 실용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런 서인도 결국 경직된 숭명 외교를 고집했던 게 안타깝고, 이건 조선 사회를 이끈 유교 사대부 자체의 한계입니다.

인조 반정은 사실 아주 어설픈 쿠데타였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광해군은 그 결정적인 밤에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각이 "이전까지 허위 고발이 자주 들어왔기에 경계심이 해이해졌다"는 식의, 이른바 거짓말쟁이 양치기 비유(혹은 주나라의 폭군 유왕과 포사 설화도 있죠)로 설명하지만, 독자인 제 생각으로는 그냥 자포자기 상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책 p122에 보면 "북문 혹은 자하문이라 불리는 창의문에서 북소문으로 진격..."이란 대목이 있는데, 북소문=자하문=창의문이고 북대문은 숙정문이라고 해서 따로 있습니다. 착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 역사는 과거에 대한 지양 또는 지향이라는 흐름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며 그 전후관계를 살피는 시도들은 많았으나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는 틈, 사이의 시간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는 아직 널리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38년》에서는 이러한 ‘틈의 역사’에 주목했다.." 사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사건 자체가 긴박하게 흐르는 그 내러티브에, 소설이든 역사서에서든 매료되게 마련인데 정명섭의 책은 이런 독자의 니즈를 언제나 만족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에 치우쳐 진지한 접근을 희생한 게 또 아니라는 건 앞에서도 거듭 말했고요. 아주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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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경제 대전망
이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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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른바 소규모 개방경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부존자원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대외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생존 전략을 또한 그쪽으로 잡아야만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대 비교경제연구센터, 그리고 경제추격연구소에서 이 시리즈를 오래 펴내는 건 의미심장하고 적절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같은 나라의 경제가 "고립"될 수 없고 필연적으로 타국의 경제 체제와 "비교" 분석되어야 하며, 또 거셴크론의 오랜 명제처럼 선발주자를 추격하여야 할(이른바 "후발자의 이익")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남방정책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만 확실히 양면성이 있는 이슈입니다. 정무섭 동아대 교수는 특히 그저 저임금에 매혹되어 무분별하게 베트남 등지에 진출하는 기업에게는 별다른 기회가 없으리라고 단언합니다. "저임금 제조 가치 사슬을 확보해 일시적인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이 아니라... 양국 모두가 고부가가치 창출을 통한" 윈윈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의 지적은 몇 번이고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중국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뱅크런 사태가 일어난다느니, 외환 부족 때문에 한국 현지 지점에 비상령이 떨어졌다느니 하는 뉴스가 쏟아지는 판입니다. 이치훈 박사는 확실히 중국 부동산 가격이 미중 무역 전쟁 이슈에 좌우되는 면이 있기는 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일단 저축률이 높고(이게 분명한 장점 중 하나죠), 당국의 대응 능력이 아직은 효력을 발휘하는 시점이라는 것도 강조합니다. "중국 경제에 밀접하게 기대는 우리로서는 중국의 위기가 곧 우리의 위기"라는 천편일률적인 주장도 바보스럽지만, 그렇다고 마냥 중국의 위기를 즐길 형편도 우리로서는 아닙니다. 차분히 관망하되 행동에 옮길 타이밍이다 싶으면 지체 없이 액션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양평섭 박사는 "새로운 중국 활용법을 찾아라"고 조언합니다. "회색 코뿔소"라는 건 분명 상존하는 위협인데도 당사자들이 애써 무시하는 변수를 가리키죠. 중국은 기회이기도 하고 짜증나는 위험 변수인데 우리는 사실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애써 왜곡하여 좋은 쪽으로만 받아들이기 일쑤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든 진단이, 바로 양 박사의 "앞으로 2, 3년이 골든 타임이며 이 미중 분쟁이 바로 우리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미중 분쟁이 길어지면 우리 경제가 병든다는 식의, 방송에서 세뇌 주입하는 근거 없는 주문에 길들여진 두뇌로는 결코 사대주의 종속 경제의 처지를 못 벗어날 것입니다.

김호원 서울대 교수는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최근작을 인용하며 국가적 위기의 열두 가지 요인 중 세 가지를 특히 지적합니다. 위기에 대한 국민적 합의, 정직한 자기 평가,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능력 등입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정부 정책 당국자들이 보다 정직하게 현황을 파악하고 정책 실패 사항은 그것대로 허심탄회하게 인정한 후 대책 수립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모든 게 다 잘 되었다는 식이어서는 현재의 곤란을 타파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또한 근거 없는 반(反)기업 정서를 극복하고 모든 기업가들이 신명 나는 기업가 정신으로 혁신에 나서는 게 가능한 분위기를 만들자고도 합니다. 모두 올바른 제언입니다.

문우식 서울대 교수는 "저성장으로 인해 우리가 금리를 급격히 낮추게 되면 자본 유출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한국처럼 대외적으로 개방된 경제 체제에서는 어느 한 가지 처방이 지속적으로 효과를 지닐 수 없고, 급변하는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그때그때 기민하게 대응을 해야 합니다. 특히 그는 "장기 금리는 미래의 경기 예측을 반영하는 지표일 뿐 한은이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식의 경직된 태도, 전통적인 스탠스는 현재의 상황을 헤쳐나갈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장종회 매경 부장은 금리 인하를 두고 "태풍의 눈"이라 규정합니다. 한은이 2018년 10월까지 머뭇거리는 사이 미국은 여덟 차례나 금리를 인상했고, 이런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거의 1200조에 달하는 시중 부동 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전망입니다(p328). 7년 전만 해도 부동산 폭락을 예언하며 당장 집을 팔아 치우라는 주문이 유행했습니다. 또 "빚 내어 집 사라"는 당시 정부의 정책이 비웃음거리가 되었죠. 헌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를 두고 여러 설명이 시도되었으나 말끔한 해명이 거의 없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해당 파트를 읽고 어느 정도 설명의 윤곽을 얻었습니다. 왜 집값이 안 내려가는지, 왜 주택 수요가 줄지 않는지. 일부 어처구니 없는 주장처럼 무슨 "미국에서 자본이 들어와 강남 주택을 사들인다"는 식의 유언비어 말고 말이죠.

온기운 교수는 대체로 유가가 안정세를 유지하리라는 전망을 내놓습니다. 지난여름에 드디어 이란과 트럼프가 대판 붙을 것 같이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현재 이란에 민생고로 인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는 보도뿐 딱히 국제 긴장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파트에서 그는 최근 정부가 내놓은 3차 기본계획의 얼개를 소개하는데 탈원전과 재셍에너지 중시 기조가 엄중한 현실에 비추어 어떻게 수정 집행되어야 하는지 여러 유익한 대안과 분석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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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디자인 - 공유경제의 시대,미래 디자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김영세 지음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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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말할 때 "디자인"은 우리가 아는 좁은 의미 외에도 "계획, 의도, 큰 설계"라는 뜻이 따로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 덕분에 유명해진 어느 대사 "OOO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할 때의 그런 의미입니다. 속된 선입견으로 디자인이라고 하면 그저 잘된 제품의 마무리 장식 같은 뜻 이상이 아니며, 이 때문에 "디자인이 좋다"는 말은 그 속에 "품질은 별로다"란 뜻을 은근 감추는 식으로 곡해되거나 통용되기도 합니다. 저자 김영세 소장님의 "빅 디자인" 이론은 이런 우리의 천박한 선입견을 사정 없이 깨부숩니다. 제가 읽고 나서 얻은 결론은 "디자인은 뒷마무리, 치장 정도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기능과 퀄리티를 미리 담은 그릇이고, 나아가 모든 것이다."였습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모바일 시대 혁신의 아이콘에 속합니다. 이들은 차량을 대량 보유하거나 호텔 체인을 가진 업    체가 아닙니다. 많은 물량과 시설로 승부하는 거대 자본의 생존 방식은 이미 지난 세기의 유물에 불과합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는 야심 가득한 젊은 창업자가 그저 아이디어, 컨셉 하나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고 대승을 거둔, 혁신과 창의, 그리고 빅 디자인의 시대에 멋진 모범 사례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기존의 발상에 구애받지 말고 솔직한 감성으로 모든 사물을 재해석하라"는 충고를 던집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남의 소유물을 임차해 다른 이들에게 빌려 줄 생각을 품는 건 봉이 김선달의 도둑질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지혜입니다.

실리콘 밸리는 1980년대부터 혁신의 전초 기지로 여겨져 왔습니다만 거의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모든 개혁과 도약의 온상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두고 "디자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의 도래라 규정합니다.(p42)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까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엡스타인 단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트레이드를 위해서는 내가 필요한 선수가 누구인지 생각하기에 앞서, 다른 구단이 필요로 하는 선수가 누구일지를 먼저 떠올려 보라." 동양식으로 말하면 역지사지입니다. 저자는 비행기에서 겪은 사소한 불편까지도 승객 보편의 불편함으로 차원을 넓혀 생각하여 시장을 놀라게 한 디자인 안(案)을 도출한 분입니다. 시장과 고객의 니즈가 무엇인지만을 자나깨나 생각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두뇌 사이의 격차가, 4차 산업 혁명을 앞둔 이런 세상에서 더욱 크게 벌어지리라는 점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책에서는 지멘스 CEO 조 케저의 말을 옮겨, "4차 산업혁명은 단지 산업이나 기술에 대한 게 아니라 사회에 관한 것(p29)"이라 선언합니다. 앞선 1, 2, 3차의 산업 혁명이 생산 섹터, 공급자 사이드에서 크나큰 혁신이 일어난 후 그 파급 효과가 소비 섹터에까지 미친 것이라면, 다가올 4차 산업 혁명은 반대라는 겁니다. 회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새로 생각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생각의 틀과 삶의 틀을 함께 바꾸는 "빅디자인"의 초석이라는 뜻이죠.

저자 김영세 소장님은 해외 유수의 권위 있는 상이란 상은 다 휩쓴 분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분은, 혹시 삶에서 실패나 좌절 같은 건 한 번도 겪지 않고 평탄한 꽃길만 걸으셨을까요? 이에 대해 그는 마이클 조던의 명언을 인용하여 답합니다. "수많은 슛의 실패가  수많은 슛의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p127) 이는 마치 토머스 에디슨이 남긴 유명한 고백,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와도 비슷합니다.

안트러프러너십(p130)이란 무엇인가. 우리말로는 보통 "기업가 정신"으로 옮겨지는데 사실 이 단어는 그 이상의 무엇을 담았습니다. 성공이란 어떻게 보면 동기 부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못하면 죽고 만다는 절박감을 갖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긴 선상에서 큰 그림으로 본 인생을 보다 알차게 꾸리기 위해" 조금은 여유를 갖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과제, 혹은 환경을 보면 더 좋은 컨셉트가 떠오를 수도 있고 그게 바로 빅 디자인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면 스몰 디자인밖에 안 나오고 이는 곧 졸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티냉자스"란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러시아는 한때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던 엄청난 강대국이었지만 현재의 위상은 매우 초라합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아마 러시아 정도는 은근 깔고 보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책에도 나오듯이) 전체 국내총생산 규모는 우리와 비슷한 나라인 러시아에 대해 갖는 그런 자신감은 과연 근거가 있을까요? 저자가 말하는 근거는 바로 "티냉자스"입니다. TV. 냉장고, 자동차, 스마트폰을 잘 만드는 나라가 바로 선진국의 척도라는 건데, 생각해 보면 이 네 분야에서 모두 강한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전자 제품 하면 일본이었고 일본은 이 시기 마치 전 세계 돈을 다 빨아들이는 하마와도 같았습니다. 현재 TV 시장은 한국의 두 기업이 세계를 반분하다시피합니다. 자동차 역시 여러 어려움이 있긴 하나 꽤 선전하는 편이며 스마트폰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혹자는 소프트웨어에 약하다며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지만 최근의 애플은 "혁신에 꽤나 지쳐하는" 모습입니다.

세계 시장을 제패하는 히트 상품은 물론 품질도 품질이지만 디자인의 탁월함이 반드시 어필되어야 합니다. 무기를 잘 만드는 러시아, 자원 부국인 사우디 등이 비록 국부 전체는 대단한 수준일지 모르나 죽어도 한국을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혹은 사우디에는 과연 김영세 같은 디자이너가 있을까요? 우수한 엔지니어는 수학 잘 가르치고 공학 교육이 보편적인 인도 등지에서 다수 배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수한 디자이너는 선진국에서만 나옵니다. 오늘 뉴스에 보면 중국이 대외적으로 발표만 못 할 뿐 심각한 경제난과 외화 부족에 시달린다는 징후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저가품과 모방 제품은 대규모 자본을 인위적으로 투입하여 만들 수 있어도, 정말 퀄리티 있는 히트작은 쉽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저자가 말하는 빅디자인은 첫째 기존의 사고를 과감히 허무는 도전 정신과 창의성, 둘째 매사를 여유와 긍정의 마음가짐으로 볼 줄 아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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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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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재미있습니다. 리안 모리아티 여사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베스트셀러이고 니콜 키드먼 같은 명배우 캐스팅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질 만큼 화제작이지만(케이블에서도 자주 틀어 줍니다) 특히 우리 한국 독자들한테 큰 관심을 받는 건 따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식 각박한 삶이 개개인의 영혼에 남긴 상처는 아마 21세기 지구촌 어디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평온의 집". 이제는 지긋이 나이 들어 웬만해서는 "여성"으로 대접받기보다.... 그저 노부인 정도로 누구한테나 받아들여지는 정도지만, 프랜시스는 여전히 활기 차고 새침하고 매력적인 "정신"을 지는, 고급은 아니라도 그 나름 스타일리시한 차를 직접 몰고 다니는 전직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작가는 대개 상처 입은 타인들, 특히 "독자"들을 잘 어루만져 주는 기술이 탁월할 것 같지만 여기서 프랜시스는 반대입니다. 자신이 누구한테 좀 힐링을 받아야 할 상황이죠, 그래서 그녀가 찾은 곳이 바로 "평온의 집"입니다.

별것 아닌 듯해도 나중에 벌어질 큰 사달의 꼬투리가 되는, 사소한 듯해도 사소하지 않은 충돌과 불편이 꼭 보면 있습니다. 이 책의 전작이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입니다. 사소했었는데 나중에 확 커져 버린 거짓말, 아무것도 아닌 듯했으나 결국 이후에 큰 재앙으로 번진 그 어떤 불편, 충돌... 리안 모리아티의 모든 장편은 부분이 전체를 슬쩍 암시하고, 전체는 다 읽고 나서 돌아보면 그 어느 한 사건, 장면으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그 지점이 이 모든 소동과 비극의 시작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것.

한때 불륜 소재로 큰 인기를 끈 <사랑과 전쟁>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었었는데 저는 모리아티 여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등장인물들의 대화, 성격, 갈등 양상 등이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긴 중년 여성의 수다, 허세, 다툼 등은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서로 닮은 모습이긴 하죠. <섹스 앤 더 시티>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모리아티 여사의 작품들은 큰 사건의 줄기에서 소소하게 가지를 치는 에피소드와 대화 같은 게 깨알 같은 재미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 친구, 이웃, 이제는 소원해진 동창,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 그리고 "퍼펙트 스트레인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합니다. 때로는 무례하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애교를 부리고, 때로는 서로 챙길 걸 챙기고 우아하게 빠집니다. 그러다가 터무니없이 엉겨붙기도 하는데 사실 이분의 작품에서 요런 대목이 참 일품입니다. 물론 둔한 우리 독자들이 눈치를 채건 말건 진짜 사건의 큰 줄기는 배후에서 수면 아래에서 도도하게 흘러가다 뜻밖의 지점에서 머리를 확 내밉니다. 사실 작가는 이 모든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했으니 "뜻밖"은 전혀 아니지만 말입니다.

낯선 곳에 일단 들어가는 것, 입문의 지점이 일단 어렵긴 합니다. 들어가는 단계를 일단 통과하면 다음부터는 별 문제 없이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난제는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어렵습니다. 우리들 현대인 대부분은 자신의 영역을 어느 정도 굳혀 놓고 일상을 영위하므로 대부분의 생활에서 큰 불편을 못 느끼며, 능력에 아예 부치는 일이야 멀찌감치 떨어진 세상일 뿐입니다.

힐링을 받으러 찾은 장소에서 프랜시스는 대뜸 이해 불가인 불편과 조우합니다. 그 불편은 우연히 마주친 교란이라 여기기엔 조금 복잡하고 예외적이며, 혹시 의도적으로 마련된 "불친절", 혹은 "거부"가 아닐지 의심까지 될 만큼입니다. 아마도 비슷한 체험을 공유하게 될 다른 젊은(상대적으로)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이 방금 겪은 불편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남의 덕을 봤다는 만족감도 들 수 있고 이제 지긋한 나이인 프랜시스는 금방 자신의 감정을 성숙하게 추스릴 줄도 알죠. 헌데 심상찮았던 예감은 결국 존재 증명을 하고, 일은 희한하게 꼬입니다. 애초에 짜증 크게 내고 발길을 돌리는 만도 못했던 건지.

거절을 하는 방법, 우아하게 누군가와 "손절"하는 기술도 현대 사회를 사는 중요한 노하우, 아니 예의, 매너 중 하나입니다. 그저 당장 편해지는 부수적인 노련함이 아니라, 어쩌면 이게 본질일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랜시스, 어쩌면 리안 모리아티의 약한 페르소나일 수도 있는 이 부인은 그때 방향을 바로 돌렸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 역시 잘나갈 때는 남들을 기분 좋게 내려다 볼 수도 있었고 마음껏 과장된 에고를 남들에게 강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배려를 받기보다 베푸는 지점에 더 신경을 써야 하며, 그래도 여전히 삶의 이런저런 지점이 팍팍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조심하며 살아도 뜻밖의 재앙은 닥쳐 옵니다. 우리 독자는 이 난감한 상황을 프랜시스라는 인물을 통해 대신 치러 내지만, 우리가 저 상황에 실제로 떨어졌다 쳤을 때 과연 흥미진진한 소설과 함께 예습한 내용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여튼 결론은 "모리아티의 소설은 참 재미있다"입니다. 각자 취향에 따라 스릴러로 읽든 막장 드라마로 즐기든, 아니면 인생 독본으로 진지하게 "공부하든" 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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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12가지 충격 실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이지윤 옮김 / 갤리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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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법원은 살인에 대해 "한 명 인간의 목숨은 전 우주보다 무겁고 소중한 것"이라 판시하며 이러한 목숨을 앗는 행위는 어떤 명분, 핑계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낸 적 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법원, 법체계도 살인에 대해 대개는 극형을 선고하지만, 다만 사형 자체가 야만적이라는 이유에서 살인범의 목숨을 뺏는 처사만은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살인자에게 사형으로 응답한다면 원시적인 동해보복(同害報復)에 다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이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건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허나, 그런 판결을 내리기까지 판사도 얼마나 많은 연구와 고뇌를 거쳤을까요? 이 책은 얼핏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무죄 선고"에 대해 다룹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X" 독일은 어지간히 선진국이고 시민 의식이 깨어 있는 나라입니다만 아직도 전근대적인 "쓸모" 관념에 여성을 옭아매는 낡은 관행, 심지어 범죄적 인식이 이처럼 드러나기도 하나 봅니다. 영미권에서는 "배터드 우먼 신드롬"이라 해서 특히 남편에게 구타 당하는 여인이 순간적으로 과잉방어를 했다거나 할 경우에 폭 넓게 정상 참작을 해 주는 법리가 있습니다. 범죄자로 몰려 재판정에 선 여인, 그리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카타리나. "배심원" 카타리나는 어느새 자격을 의심 받는 처지가 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피고인인 여성에게 완전한 동질감,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죄"밖에 없고, 이 때문에 그녀는 자격 박탈을 넘어 어느새 "죄인(과연 죄인인지도 의문이지만)"과 동일시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 배심원의 "자격"을 논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리 심각한 건 아닙니다." 이 책에는 유독, 엄연한 범죄이고 위법이지만 "심각한 건 아니라"고 둘러대는 정황이 자주 나옵니다. "그 정도는 참고 살아야지" 따지고 보면 이런 정황은 대개 다수에 의한 폭력적 동화 노력에 가깝습니다. 독일 헌법은 유명한 학자 R 스멘트에 의하면 "동화적 통합"을 지향한다고 하는데, 설득과 동의가 없는 통합은 그저 나치 식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 의사를 침해하는 그 모든 압박은 따지고 보면 심각한 겁니다. 심각하지 않은 게 어디 있습니까? 슐레징거 변호사가 기발한 착안을 하여 의뢰인의 무죄를 증명한 사건에서, 알고 보면 "심각한 건데 심각하지 않게들 본" 그 무엇으로부터 결국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네요." 많은 이들이 이런 고민을 할 때에는 대개 현실적 이익 몇 가지 옵션을 놓고 고민하는 겁니다. 이롭긴 한데 썩 끌리지 않는 선택도 있죠. 이때 영화에서는 보통 그런 충고가 나옵니다. "(이로운 일 말고) 올바른 일을 하시오." 설령 나중에 결과가 (나한테 큰 이익을 못 주었기 때문에) 후회되더라도, 결국 난 올바른 일을 했다며 뿌듯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나는 정당방위라고 확신했는데, 알고 보니 착각인 경우를 오상방위라고 하며 요즘 모 법대 교수님의 과거 일화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더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여기서 "착각한 정당방위" 개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판사의 선고 중에 나옵니다. "당신은 복수와 정의의 실현을 혼동했던 겁니다. 당신은 복수가 곧 정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비열한 동기의 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요런 법리를 악용하여, "나는 너에게 가해를 했지만 너는 복수를 해서는 안 돼." 같은, 아주 야비하고 유아스러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응보가 또 준비되어 있죠. 물론 법질서 안에서 행해져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같은 행위로 두 번 처벌 받아서는 안 된다."는 법리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나 독일 법제상으로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 하며, 영미에서는 좀 다른 범위를 잡아 "이중 위험의 금지"라고 일컫습니다. 예전에 애슐리 저드, 토미 리 존스 주연의 영화 <더블 크라임>에서 이 주제를 다뤘죠. 슈트렐리츠는 "그저 잡범"으로 석방됩니다만 과연 변호사 말 대로 운이 좋았을 뿐일까요? 독자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는 일반의 상식으로 틀림 없이 유죄인 피의자, 피고인 들의 예가 12가지 나옵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안 되는 거죠. 무죄가 나온 이유는, 1) 살인자가 알고 보니 아니었거나, 2) 도대체 이런 경우도 "살인"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의문 때문입니다. 살인자로 취급 받아서 안 될 사람이 살인자로 몰려 극형을 받을 뻔한 사건들에서 가장 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정황만 보고 대충 범인으로 몬 뒤 편한 희생자(easy victim)로 몰아간 경찰(실제로 독일 경찰은 선진국인데도 무책임하기로 악명 높습니다. 가 본 분들은 알죠), 그리고 대중 심리에 휩싸여 마녀 사냥에 동참한 우리들 일반인의 잘못입니다. 12가지 이야기를 읽어 보면, 정말로 그런 격언이 떠오릅니다. "장난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죠?"

"그가 살인자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나요? 함부로 타인을 단죄하는 당신이 바로 범죄자에 가깝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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