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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
김서정 지음 / 책고래 / 2025년 3월
평점 :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는 어린이의 정서 함양과 발달(만)을 위한 책들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기획, 제작, 출판됩니다. 한국도 요즘은 우수한 어린이 책이 많이 나오지만 아직도 아쉬운 점들이 있는데, 그래서 김서정 선생님 같은 전문가의 손으로 해외 우수 어린이 도서들이 특히 번역될 필요가 절실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어린이 책 번역은 막연히 쉽겠거니 하는 선입견을 받기 쉬운 게 또한 현실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김서정 선생님이 p14에서 특히 설명하는 것처럼 그림책의 경우 그림의 고유한 문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무심히 지나치거나 의미를 곡해하기 쉬워도 전문가의 눈에는 이미 심심상인(心心相印)의 경지처럼 사소한 표현에서도 메시지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외국 그림책을 번역할 때에는 번역가가 일러스트 안에 작가가 분명히 심어 놓은 메시지까지를 모두 캐치하고 텍스트의 번역에 이를 담아야 하는데, 아동 컨텐츠 번역가는 그래서 문학, 넌픽션, 회화에 두루 소양을 갖춰야 기획의 당초 목표가 달성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제목이 "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이긴 하지만 저는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p77 같은 곳을 보십시오. 여기서 저자는 성공하는 어린이 책 공통 요소 10개 사항을 자신의 관점과 경험에 의해 추출하시는데, 후~~ 읽고 소비하기는 쉬워도 어린이 책이라는 게 제대로 만들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작업인가, 나아가 여태 내가 제대로 어린이 책을 읽어 온 게 맞나 하는 회의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책 자체가 평소에 어린이 책 출판 과정 일반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연구를 거친 독자라야, 저자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라는 책이 쉽다고? 과연?"이라며 메타 질문을 한 번 더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피터 래빗 프랜차이즈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논의가 p89 이하에 나옵니다.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책 저자 김서정 선생님 같은 최고의 전문가라 해도, 이론상으로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이 있었거나 대단히 열성적인 어머니가 아니고서야 그 성함까지는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996년 한국프뢰벨에서 나왔던 <피터 래빗 이야기>는 아직도 이 고전을 놓고서 한국어 번역본의 결정판으로 꼽히는데, 김서정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셨던 신지식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마 아동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분이라면 그 존함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아동문학의 문외한이지만) 독자인 저만 해도 신지식 선생님의 창작 동화(아주 다작을 하신 분입니다)를 읽고 자란 세대입니다. 신지식 선생님은 5년 전 향년 90세로 타계하셨습니다. 아무튼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이 이뤄지기 위해 어떤 노력이 기울어져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독자인 저는 예를 들어 p93의 ④ 같은 지적을 몇 번이고 읽고 그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대목은 가뜩이나 잘된 번역으로 꼽히는 저 한국어판에 대해, 공역자였던 저자께서 스스로를 반성하며 치밀하게 서술한 곳이라서 매우매우 유익합니다. 지금 김서정쌤의 이 책에 버릴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나 특히나 압권이라 부를 만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And then he ate some radishes.라는 원문을, 공역자들은 "싱싱한 무도 조금 맛보았지요."라고 옮겼는데, 이제와서 보면 부연(이 자체는 경우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순화, 오역된 부분이 보인다는 겸손한 말씀입니다. 싱싱하다 뭐다 하는 부연은, 이 대목 원저자의 의도를 생각할 때 불필요하게 옆으로 퍼지면서, 행동의 일직선 방향성과 박자를 방해할 뿐이라는 저자의 자성을 읽으며 저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런 지적은, 우리들 일반인이 무슨 아동문학 번역이란 분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지 않아도, 영문학을 원어 그대로 감상하거나 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포인트인 것입니다.
"싱싱함"이 불필요한 번역인 줄은 알겠으나, 단, 왜 ate가 부정확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스스로 지적(자성)만 하시고 이 책 중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독자인 제가 주관적으로 짐작하여 몇 마디를 이 후기 중에 적어 볼까 합니다. 무를 조금 맛보았다는 건 낱개를 먹고 그 일부를 남겼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상황은, 아마도 무가 쌓여 있고, 그 중에 몇은 완전히 먹어치웠다는 데 가깝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1개의 2/10만 먹고 남긴 것과, 10개 중 2개를 싹 먹어치운 건 다르겠지요. some이란 단어가 한국어로 변용되며 끼칠 수 있는 오해의 양상은 다양합니다. 단, 저자께서 이 파트에서 지적하시는 다른 중요한 오류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동화는 기술 서적이 아니기에 기본적인 심상을 해치지 않는다면 한국말의 흐름을 살리는 범위에서 용인할 만한 문장입니다(라는 건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린이 책 번역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방법론과 예시가 많기에 쉽고 가볍게 읽히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꼭 아동문학 관련이 아니라도, 무엇이 영문학 일반의 바른 감상과 독해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독자라면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는 멋지고 유익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