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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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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권에서 그 실험 과정의 세세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한 채, 베르베르는 다비드-오로르-나탈리아 들의 이후 성공담으로 시원스레 치닫습니다. 한 세기(아니, 두 세기인가요?) 전 자기 나라가 배출한 세계적 지성 쥘 베른이 강박적으로 디테일에 집착한 걸 고려하면(어찌나 그 정도가 심했는지, 베른의 세부 묘사의 대부분은 160여년 지난 지금도 거뜬히 타당성을 유지할 만큼이죠), 이 재기넘치는 프랑스인은 미션의 자체완결성보다는, 그를 접하는 대중의 엔터테인먼트적 효용을 더 중시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 어찌 보면 이 책이 주장하는 초시대적 가이아의 항존성과는 묘한 역설적 대비를 보이구요. 만약 오로르들이 그처럼 "대충대충"의 직업 마인드를 지녔다면, 아마 대단히 운이 좋거나 초월적 존재의 개입(deus ex machina)이 없는 이상에는 그런 기막힌 업적("제3인류의 창조")를 이루기가 어렵겠다는 점 말씀 드리고 싶네요. 하찮은 실험이라도 목숨을 걸다시피한 집요함과 정밀성이 결여되면, 백이면 백 실패하는 게 냉정한 현실입니다.


수시로 잘도 결정적 국면에 끼어들며, (스포일러라서 말할 수는 없으나) 중반부에서 반칙성 무대 출연을 하기에 이르는 가이아의 경우, 대단히 특이한 개성을 지닌 의식체입니다. 가이아가 신이 아님은 이미 제가 앞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고, 자신도 거의 투정 어린 한 대사에서 이를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귀를 열고 뇌를 작동시키면서도 듣지 못해.." 어쩌구) 신은 아니지만 그 엄청난 사이즈 때문에 타 생명체에 끼칠 영향 범위가 지대한 그녀(일단 여성이라고 하죠. 가이아는 본디 신화 체계에서  gender가 여성인 신이었고, 이 책에서도 그 주제가 인류의 살 길이 여성성의 증가에 있다는데 말입니다)는, 눈과 귀와 (결정적으로 중요한) 손과 팔이 없는 불구의(?) 존재지만, 신체 세부 부위에 대해 대단히 미세한 범위로 튜닝 조작이 가능한가 봅니다. 그녀가 소설 곳곳에서 일으키는 자연재해(의 응보)야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남극 특정 지점에서 특정 대상(그녀가 "미니 인류"라고 부르는 우리 종의 몇몇 인사)를 향해 정확한 크레바스를 유발할 수 있을까요? (역자 이세옥 선생은 "동티"라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우리 인류 중 누구라도, 간질간질 괴롭히는 모기 한 마리의 뺨을 향해, 정확히 터럭 한 올만 곤두세워서 그 싸대기를 후려 칠 능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소설에서 가이아가 여러 번 선뵈는 묘기는 딱 그 수준입니다. 그런 서커스 자질의 보유자이긴 하나, 그렇다고 신은 아닙니다. 신은 고사하고, "저들 인간이 설마 나에게 모종의 복수심에서 저런 짓(석유 시추를 위한 굴착, 지하 핵실험)을 할까?" 하는 소심함마저 내비치는 게 가이아입니다. 우리하고는 세계와 자연을 바라보는 스케일부터가 다르므로, 가령 종의 개체 중 20%를 그저 경고 차원에서 쓸어버리고도 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구약성서의 신은 그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 2권의 초반부에서 가장 시니컬하니 멋진 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굴바하르 모카담 장군입니다. 그의 손윗누이는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었으나, "차도르를 입지 못하게 하는" 샤 팔라비("팔레비"가 정확하겠습니다만)의 압제에 맞서 저항의 선두에 나섭니다. 모크 장군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고작 "늙은이들에게 어린 신붓감을 대어 주는 행위의 합리화나, 술이나 배꼽춤을 단속하여 줄이는 일에 정력을 쏟는 신세"로 자신을 희화화합니다. 모크 장군의 말을 빌리면, "누님은 이제 그 쓴 차도를 벗을 자유가 없게 된 채, 일개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하여 매형과 매일 부부싸움이나 하는 처지"로 떨어졌죠.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샤 팔레비를 축출할 무렵 대학생이었다면 지금 이 여성이 몇 살이란 뜻입니까? 아무리 상대적 시간의 배경이라고는 하나 구체적 타당성이 결여된 창작의 방종이라는 비판을 들어 마땅합니다. 여튼 페미니즘과 정치적 진보 사조의 모순적 충돌은, 이 책 1권에서도 오로르의 모친과 한 모슬렘 여성 사이의 난투극으로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바 있죠.


베르베르는 소설 곳곳에서, 이른바 진보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서슴지 않고 드러냅니다. 미 제국주의의 착취와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대대적 환영을 안고 등장한 이란 이슬람 혁명이지만(호메이니는 바로 프랑스 정부가 마련해 준 망명처에서 고국의 혁명을 원격 지원했습니다. 프랑스의 톨레랑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죠), 그 혁명의 과실은 가장 날카롭고 위협적인 비수로 바뀌어 오늘날의 서구 문명 일반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현실은 이 2권에서 "800여기의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기지"로 묘사되어, 이슬람 근본주의의 villain적 스탠스를 의심 없이 분명히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악마의 시":를 쓴 살만 루시디처럼 베르베르도 아야툴라의 심판 대상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살만 루시디는 "예언자"에 대한 직접 모독의 서술을 썼고, 인종적 배경상 미움을 살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으며, 이슬람 율법의 사형 선고가 그리 단순한 절차에 따라 집행, 적용이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1권에서 신종 독감 백신 구입을 위한 예산의 방만한 적용으로 고위 공직자들이 탄핵 대상이 되는 대목이 잠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은, 바로 이 2권에서의 전폭적 장면 전환을 위한 복선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재앙적 전염병이 전 지구를 휩쓸었다고 해도, 어찌 그리 단시일에 글로벌한 무정부상태가 빚어질 수 있을까, 또 그 은폐된 과학 기지에서, 다비드 들이 그처럼 쉽게 인간적 품위와 절제를 잃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에일리언 2편에서, 리플리의 무리가 여아, 고양이,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려드는 그 씬을 연상케 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에서 악력이 센 나탈리아는 영화 X-men 2(2003)에서 레이디 데쓰스트라이크(켈리 후 분)를 떠올리는 바 강합니다(신장은 비록 큰 차이가 나지만).


테헤란발 핵무기의 궁극적 겨냥이 이스라엘이 아닌, 바로 수니파 총본산인 리야드를 겨냥하고 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억측이 아닙니다. 시야가 좁은 근본주의자들은, 궁극의 적이 아닌 눈 앞의 원수를 더 못견뎌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통찰은 옳습니다만, 그렇다고 이슬람을 싸잡아 테러러스트, 세계 평화의 적으로 몰고, 반대로 서구 민주주의, 반전체주의의 협력 대상으로 유태인을 설정함은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UN 사무총장이 지나치게 정치적 비중이 커진 점도 현실감이 떨어지고, EU라는 국제 정치 단위는 실종되어 보이질 않으며, 러시아와 중국을 그저 이슬람 후원 세력으로 묘사하는 점도 타당성이 결여되었습니다. 설사 "외계인 시나리오"가 사기로 드러나더라도, 국제 정치계나 대중의 여론이 그런 방향으로 선회하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독감에 걸려 몰살하는 아야툴라 페라지 들의 운명이 대단히 코믹했던 건 분명합니다.


이 책은 1부의 마무리라고 합니다. 아직 완결된 소설이 아니므로, 제 2부(한국판으로는 3권, 4권)의 속간을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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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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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3"이란, 보통은, 미지의, "너"와 "나"가 아닌 낯선 존재를 지칭합니다. 아직 그를 향한 구체적인 관계맺음이 이뤄지지 않은, 그 타인성조차도 정도가 불확실한 대상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제목에서의 "제3"이란 수식어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주인공들(다비드, 오로르, 그리고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 심지어 이란 대통령 자파르 등)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에게는, 이 제3인류는 말그대로 "당혹스러운 제 3자성"을 지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공들의 시선으로 작품을 여행하는 것이므로, 에마슈라는 "미래의 희망(2권 이후에서는 그 반전이 암시됩니다만)"이 제 3자일 수 없습니다. 이 선량하고 유능한 미니어처들에 대해 마치 자식과 같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되고, 때로는 그 창조주들의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처신들을 향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낼 정도로 정을 갖게 되는 건 저만의 경험이 아니지 싶습니다.


작디작은 모습으로 미래의 지구 운명을 책임지게 되는 "제3인류"가 한쪽 지점에 놓인 반면, 저 멀리 심층의 구석에는 거대한 사이즈를 한 또다른 인격체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종래 일종의 신으로 착각(....)해 왔던 가이아가 그것입니다. 베르베르가 상정한 가이아는, 종래 일부 과학저술가들이 즐겨 논하던 바로 그 인격체적 사고와 감정, 호흡 특성을 지닌, 대단히 "인간적인" 가이아의 모습을 그대로 따 왔습니다. 가이아는 분명 인간(이른바 "제1인류")의 창조주이기는 하나, 원초의 생명을 빚은 신적 존재는 아닙니다. 그 역시 우연의 물리 작용으로 자신의 형체를 갖게 되었고, 어떤 까닭인지는 모르나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이 가이아는 지난 내력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며, 아픔을 느끼고 자기 보존의 본능이 있으나, 시각과 청각을 지니지 못합니다. 반면, 하찮은 미물인 우리 인류[제2인류]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존재 근원의 의문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형태로 떠올리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 거죽에 기생하는 뭇 생명체를 두고는 냉소와 자비의 심기를 동시에 띨 줄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존재적 의문을 갖지 않는 모습도 특이한데요, 이로써 우리는 그가 신이 아님을 확인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what I am의 근원적 속성을 지님을 추론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전자 쪽의 결론이 합당한 듯합니다).


총명하고 창의적이나, 튀는 개성과 독특한 기질로 무난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두 젊은 지성이 있는데, 다비드와 오로르가 그들입니다. 이 중 다비드는, 놀랍게도, 한 세대 전(이라고는 하나,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에서의 시간 진행은 "상대적"입니다),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의 저자 에드몽 웰즈[헉!]의 증손자입니다(이러니 벌써 물리적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 설정이죠. 하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의 부친은 용감하게도 남극의 극한 지점을 찾던 중, 뜻밖의 과학적 발견(이런 발견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그건 이미 "과학적" 발견에 국한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변의 우려처럼, 학계와 미디어, 이 개명한 시대의 검증력은, 엄연한 진실과 실증을 두고 무지와 편견, 혹은 교활한 이해관계의 변수에 압도될 만만한 수준이 결코 아니구요[뒤에 나오는 "더 결정적인 증거"의 발굴 아닌, 최초의 그 발견만으로도 쓰나미와 같은 파장을 몰고 올 것입니다]. 베르베르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세계관을 이 대목에서 노출하는데, 단언하지만 이는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책에는 억울하게 사기꾼으로 몰린 과학자의 사례로 파울 캄메러(오로르 캐머러의 증조부라고 합니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건 맞습니다만, 그의 주장이 명백한 진리였음에도 모종의 음모에 의해 오명, 누명을 쓰고 죽은 건 아닙니다. 베르베르의 이 부분 서술은, 어느 정도 토마스 쿤의 이른바 "패러다임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획득형질(라마르크의)론이 시대의 더께를 떨고 다시 이론의 중심으로 부상하려면, 아직 먼 세월과 검증의 지원을 기다려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미 라마르크의 오류의 낙인을, 다윈의 입장에 진리의 공증을 해 준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일부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가까운 장래에 극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고 하는군요. 이 책에서는 상어 따위의 단성 생식 사례 등 충격적인 팩트를, <상대적이고...>로부터의 재인용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베스트셀러가 많은 작가, 상상력과 지식이 풍부한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흐뭇한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간만에 열린책들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 두툼한 책을 곁에 끌어다 놓고, 이 책 저 책 왔다갔다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죠.


p99에 보면, 우리 현생 인류(이른바 제 2인류)의 그 모든 메저먼트 수치에 10을 곱한 수를 지닌 거인들(제 1인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17m의 키를 가진, 우리 인류와 비슷한 신체 구조를 지닌 거인의 몸무게가, 우리 인류 성인의 평균 몸무게 70kg에 10을 곱한 수치, 0.7t밖에 나가지 않을까요? 책에도 나오듯, 17m면 건물 한 채의 높이입니다. 황소 한 마리 몸무게도 평균 500kg입니다. 구조가 닮음꼴이라는 가정 아래, 길이가 10배이면 넓이는 그의 제곱인 100배, 부피나 몸무게는 그의 세제곱으로 커지는 게 원칙이죠. 다만 유기체의 여러 특성상, 몸무게가 세제곱으로 불어나지는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700kg은 너무 작은 수치입니다. 추정하건대 티라노사우루스의 경우 10t을 보통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타 척추동물에 비해 그닥 날렵한 구조는 아니므로, 대략 7t 정도는 생각해야 얼추 균형이 맞겠습니다. 2권에 보면 13cm의 키를 가진 에마슈가 700g의 몸무게라고 하므로(베르베르도 스스로 모순을 인정한 셈입니다), 최소한 체중에 있어서는 100배수의 원칙이 적용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모럴로부터 자유로운 세계관을 지닌 여러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실상 오로르의 경우는, 늙은 여교수 크리스틴과 일종의 "스폰싱" 관계를 맺은 셈인데, 독자로서 이런 주인공의 입장에 선뜻 제한적 동조라도 해 주기가 몹시 꺼려지더군요. 아직 소설이 미완결이니만큼, 이 캐릭터적 복선이 향후 어떤 구실을 할지는 지켜 봐야 할 일입니다. 실물의 신장이 프랑스인치고 평균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 베르베르가, 이처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단신의" 다비드라는 성격의 주인공을 빚어낸 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프랑스인 대통령 스타니슬라스 드루앵이 미 대통령 프랭크와의 통화에서 그의 과학적 지식이 결코 상대에 못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든가, 오로지 금기 위반에 대한 쾌감을 위해 불륜, 코카인 흡입, 난교에 탐닉하는 모습을 그린 점도 좋았습니다. 베르베르가 그처럼 故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닌 줄은 이 작품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읽으면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더군요.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의 기능을 대단히 멋지게 해낸 우화임에 분명합니다.


아프리카의 피그미 부족과 서아시아의 쿠르드 족, 그 기구한 운명에 대해 <상대적...>의 어카운트를 통해 제법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잠비크의 독재자가 바추카포를 이용해 코끼리 사냥을 즐기는 행태, 서남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반인도적이라 할 만한 원목 남벌 행위, 이 모든 게 가이아론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재해석이 이뤄짐은 이 소설의 분명한 성취 중 하나입니다. 소설은 재미 뿐 아니라 일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음을 독자가 스스로 느껴야 그게 성공인 법인데, 이 점에서 베르베르는 지금껏 그래 왔듯 대단히 "잘하고" 있습니다.


p78 에 보면 PACS을 "시민연대협약"으로 옮기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용어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지만, 이미 국내 학계에서 이리 쓰는 걸로 굳어 버렸으므로 역자 이세욱 선생도 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특히 짐 모리슨의 "디 엔드"가 배경에서 하는 기능을 상세한 역주로 해설 받을 수 있는 체험이란, 우리 독자가 다른 분에게서 쉽게 기대할 수 없는 보람이겠습니다.


p 356
체중 관리를 해도 → 해도

p427
찬찬이 →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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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강의 - 중국 최초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과 그의 제국 이야기
왕리췬 지음, 홍순도 외 옮김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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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평전"이 아니라 진시황 "강의"입니다. "평전"이리고 해도 진(秦)나라의 전사(全史 혹은 前史)가 포함될 필요는 있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가, 그의 통일 이전에는 어떤 상태에 중원(넓은 의미에서의)이 놓여 있었는가, 이를 개략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위대성, 역사적 의의, 한계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총 6부, 43강 체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43장이 아니라 43강인 것은 이 책이 강의체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고, 그런 까닭에 각 강(講)의 내용은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다기보다, 전 강의 끝과 후 강의 시작이 맞물려 있습니다. 마치 일일연속극의 진행 기법, 궁금할 만한 대목에서 끊고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하는 수법과 유사합니다.


왕리췬(王立群)의 강의를 케이블을 통해 자주 보는 편입니다. 꼬 장꼬장하니 곱씹는듯 말투에, 한번 터졌다 하면 그 기세로 달의 분화구라도 찌를 듯 열혈의 달변을 토해내는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죠. 그의 강의는 학자의 그것이라기보다 변사의 연기처럼, 아니면 明淸代 능란한 광대의 재주처럼, 이것일까 저것일까 확신이 잘 안 서는 대목에서 확실한 제스처로 자기편을 향해 확 잡아끄는 마력을 발산합니다. 유명한 정치인의 어록이나 연설 녹취록을 보면, (시쳇말로) 음성지원이 이뤄지는듯 박력 있는 템포와 흡인력으로, 청중이 아닌 (그저)독자를 매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제가 왕 교수(허난대학 문학원 소속입니다)의 실제 강의 솜씨를 보았던 경험에 기반한 후광효과일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을 보면 확실히 그는 글과 말의 어떤 매개로든 의사 소통 자체에 능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왕리췬의 이 책이 그 저 대중적 흥미만을 유발하는 얄팍한 2, 3차 편집문헌류가 아닐까 생각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왕리췬의 학문적 천착이 그리 진지하거나 폭이 넓지 않고, 대중과의 교감에 보다 치우친 편이라는 주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방송 강의를 듣고, 이제 진시황 편을 다룬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그리 쉽게 진단할 수 없는 만만찮은 내공, 단순히 특정 교수직에 오래 머무른 데서 오는 부대효과 이상의 학자적 자질을 갖춘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분이라 해도, 스스로 애호하는 정해진 내러티브(대체로 이런 것들은 대중, 아마츄어가 소화하기에 달콤합니다)의 우렁찬, 혹은 매력적인 낭송에 강할 뿐, 논리적 엄정성이나 과학적 신빙성은 다소 결여한 분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왕리췬은 이 "강의" 시리즈를 기획할 때, 명품 고전, 고급지식의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의 말투, 또 대중(독자)의 반응을 미리 점치고 한 수 앞서 질러 주는 이야기의 가지치기 솜씨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또한 신중하기도 합니다. 이 책(강의)만 해도, 전국책, 사기(사기 중에서도 본기, 열전, 세가 등을 두루 오가며, 그의 이동[異同]을 모두 논하고 있습니다),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회남자, 그리고 명대의 잡기, 청대의 고증학 문헌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죠. 시원찮은 데마고그라면 책 한두 권의 논지를 그 빈약한 두뇌에 임시 이식하여, 다 닳고 해질 때까지 우려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류는 크로스레퍼런스의 필요함을 이해하고, 또 그 번거로운 작업의 정수를 자기 것으로 소화할 능력이 되죠. 왕리췬은 자기 주장을 어느 대목에서건 분명히 펴고 있지만, 일방적인 비약이나 돌출적인 강변이 아닌, 치밀한 논리와 검증을 토대로 설득력 있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학계의 의견이 갈리지 않는 부분에선, 기록들이 살짝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들을 대조 교차시켜, 교육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대중이 수용하기에 가장 무난한 견해를 잘 편집, 정리하여 알려 줍니다. 예컨대 합종책의 마스터마인드 소진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사기열전의 소진편과 전국책의 서로 미세하게 엇갈리는 부분을 교차 전재하며, 글 속에서 화석화한 캐릭터가 아닌, 생생히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일세의 모사꾼 소진의 진 면모를 전달합니다. 장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기 등 역사서의 기록만 보면, 장의를 발분시키기 위한 소진의 의도, 그리고 이를 이해하면서도 결국 秦의 천하를 위해 자신만의 그랜드플랜, 즉 연횡책을 추진했던 그의 비전과 심산이 잘 납득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시원시원한 왕리췬의 변설은, 이 모든 난점을 특유의 호쾌한 웅변을 통해 극복하게 도와 주더군요.


진시황 이야기를 하는 중에 왜 이렇게 서론이 긴 걸까요? 장양왕(자초), 여불위나 조비, 노애의 이야기라 해도, 본격적인 시황의 스토리에서는 다 서곡일 뿐입니다. 만약 이게 "평전"의 포맷이라면, 아마 예사의 플로팅과 확고한 지식 코르푸스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로 변죽만 울리다가 주저앉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러나 이 책의 포맷은 앞서 지적한 대로 "강의"입니다. 학술적 정보만 정연히 전달하는 문헌과는 달리, "강의"는 듣는 청중의 입체적, 싫용적 이해를 주된 목적으로 합니다. 왜 시황의 통일이 그토록 중대한 의미를 지녔는가? 서북 변방에 자리한 秦의 통일이 그토록 의의를 지니는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앞선 시대(소위 先秦期)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강의의 빼어난 점은, 진시황의 출생의 비밀을 단지 통속적 흥미의 차원으로 격하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의 통일은, 나머지 육국의 아픔과 눈물을 그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영정(시황)이 조나라 장사치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면, 진은 통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조정, 혹은 여정!)의 즉위로 망국을 맞이했다는 소립니다. 대단한 반전이 아닐까요?


이 책의 첫 강 제목을 보십시오. "진시황 암살 프로젝트"입니다. 마치 TV 사극에서, 시간적 순서를 다소 셔플링하여, 가장 극적인 이벤트를 맨 앞에 대뜸 배치하는 파격 수법과도 유사합니다. 암살이라는 그 소재도 충격이지만,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자객들이 그처럼이나 끊임 없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몰려들었다는 그 사실도 놀랍습니다. 시황 정은 비록 본인의 암살은 면했지만, (책의 이후 파트에서 보듯) 환관 조고(하필 조씨일까요?)의 전횡, 미숙한 후계자들의 파국적 시정 등으로 그 잔혹한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그처럼이나 힘들여 세운 제국의 창업이, 그처럼 짧은 시간에 붕괴할 수 있었을까요? 왕리친은 이 현상을 패자부활의 신원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이른바 출생의 비밀, 또 연이은 암살 시도("프로젝트"라 불릴 만했습니다)에 대해 긴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는, 강압과 무력으로 이룬 통일 제국에 대한 불승복의 한을 표출하는 패잔 육국의 원혼을 달래며, 진정한 중화 제국의 내이션 빌딩이 한 단계 후 한 고조 유방의 대업에서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그는 이 과정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아, 영정은 분명 영정일 뿐 여정이 아님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강의의 포맷이라는 점 감안하더라도, 예컨대 대기(大期)의 자구를 해석하는 중 10개월설과 12개월설을 논하는 부분은 다소 난잡했습니다. 더 간이한 설명으로 전달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12개월설은 차라리 여불위부친설의 입장을 반박하는 쪽인데, 왜 그런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제가 알기로 秦의 객경을 지낸 범저는, 이름을 范睢(범수)로 쓰는 게 더 정통입니다. 다만 이 글자가 현재 중국에서는 물수리 저(雎)로 아주 바뀌어 버렸습니다. 쓰기는 물수리 저로 쓰는데(눈목目 변이냐, 버금 차且변이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읽기로는 격식상 sui, 즉 우리식으로 말하면 물이름 수로 읽는 것으로 압니다(단, 네이버 중국어 사전을 찾아 보면 "범저"에 가깝["판-치에"]다고는 하나, 제가 알기로 이는 대중의 오독이고, 학술적 입장에서는 sui로 발음하는 게 통례입니다). 이런 입장을 떠나서, 한국의 고전 애호가들에 더 익숙한 "범수"라는 독음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장양왕의 초명을 "이인"이라고 하는데, 한자가 전혀 나와 있지 않아 혼란을 준 점도 다소 눈살이 찌푸려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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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 정본에 충실한 복원
범립본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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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이토록 대중적인 고전이 아직도 그 저자 확정의 문제, 혹은 비평적 본문 정렬의 문제에서조차 많은 의심과 동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당혹감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과 불건전의 파동은, 단단하고 명확한 어떤 박학다식한 전문가의 시원시원한 분석과 개설을 통해 반작용마냥 탄력을 받아 상쾌히 해소되 는 것만 같았습니다. 왜 고전은 권위자의 손을 거친 저서로 읽어야 하는가, 텍스트의 기초적 확정 작업이 그리고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고전의 해의(解義)에는 어째서 그 몇 배 분량의 서브텍스트, 혹은 하이퍼텍스트적 배경 지식이 소요되는가, 이런 여러 질문들이 책 한 권의 독해를 통해, 모두 쓸려나가듯 해소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시 중에 명심보감은 여러 권의 번역서, 해석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학덕 높은 대권위자, 노장 교수님의 엄정한 필치로 고풍스러운 주석과 훈계가 가득 담긴 것들도 있고, 반면 그야말로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쉽고 캐주얼한 소프트 리더에 가까운 책도 여럿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 신간이 나올 무렵, 다른 출판사에서도 휴대에 편한 버전으로 아주 작은 책을 시중에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요즘 같은 패스트푸드의 범람, 할로윈의 광란, 생각없는 원나잇의 불장난이 젊은 세대의 일상적 코드로 자리잡은 시대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고전 텍스트, 수신의 경전이 이처럼 출간 붐을 이루는 모습은 일견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 사회의 한 축이 극단적 퇴폐와 향락의 폭주로 다음 세대의 정신과 영혼이 퇴폐 몰락하는 결과를 막기 위해 이처럼 애를 쓰는 모습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가 되기도 합니다.

책 한 권에 원문, 해석, 본문비평,

심지어 타 고전의 인용과 해설까지 다 들어 있는 백화점격 해설서입니다.


이 제, 그 많은 명심보감 중에 왜 신동준의 책이어야 하는지를 좀 언급하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명심보감은 그 내용 해설에 있어 엄숙주의를 고집하다면 한계도 없을 만큼 경직된 텍스트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주돈이, 양정(정이 정호), 그리고 주희의 강직하고 교의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기란 무리입니다. 신동준의 해설은,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일상과 도덕률에 적용하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을 만큼, 완화하고 현대화하며 본의를 훼손하지 않는 의미에서 절충화한 흔적이 뚜렷한, 실제 처세에 적용 가능한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엄정한 지식 체계라고 하나, 실제 생활에 써먹지를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신동준의 시야와 세계관은,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이력과 체험이 충분히 반영된 덕에, 문자 속에서 죽지 않은 생활인과 치세경영자의 시각과 애티튜드가 잘 녹아  있다는 장점이뚜렷합니다.


다 음으로, 실용의 미덕으로 텍스트 해석의 엄정성을 타협,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 책의 탁월함이 있습니다. 수신의 교과서를 읽고 바르게 사는 법만 배우면 되지, 자구의 정확을 미주알고주알 따져서 뭐하느냐는 항변도 상상 가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천만에요! 공자는 물경 2400년 전에 생몰을 거친 위인인데,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텍스트의 정확성을 보증할 개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두고 그의 말로 착각하거나, 그의 본의를 두고 시대의 변천과 풍화작용 탓에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한다면, 그런 공부는 차라리 안하느니만도 못하죠. 위인의 말과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숱한 기록 중에 무엇이 그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일이 더 선행되어야 할 작업입니다.


신 동준은 문헌의 고증학적 확정 작업에 대단히 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어느 판본을 두고 이러이러한 표현이 나왔으며, 다른 판본에서는 文言이 이만큼이나 차이난다며 대조를 거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추리소설만큼 흥미롭더군요. 인문 공부의 본체가 여기 있지 않나 생각될 만큼요. 물론 그 과정을 거쳐 도출된 도덕적 명제의 전개와 해설 역시 깊이가 넘칩니다. 논증과 분석을 위해 도덕 강의를 희생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마 지막으로 이 책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왜냐구요? 명심보감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다른 경사자집 수십 권을 읽는 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행렬이 너무도 유쾌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죠. 읽으면서 느끼는 지적 쾌강은, 아라비안 나이트나 돈 키호테의 피카레스크 내러티브를 좇는 듯 흥겹고 풍성했습니다. 제가 말한 이 세 가지의 장점은, 시중에 나온 다른 명심보감 판본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이 책만의 장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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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 - 라캉과 함께 한 헤겔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형일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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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선 출판사 인간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유독 특수에 가까운 주목과 경탄의 대상이 되며, 철학자라기보다 록스타의 광휘에 값하는 시장가치를 향유하는 지젝이라고는 하나, 그 생산하는 글의 소화가 프링글스의 섭취나 코크의 음용처럼 간이한 작업일 수는 없고, 더군다나 그의 "리즈 시절" 풋풋함과 생경함, "덜 익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의 출간이란, 여간 큰 마음을 먹지 않고는 감행할 수 없는 작업일 텝니다. 지젝의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대 철학의 이단적 기린아 그 미미한(?) 시작이 어떠하였는지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문헌을, 이처럼 한국어판으로 읽을 수 있게 됨은 차라리 특권에 가깝습니다.


지 젝의 리즈 시절 그 족적을 엿볼수 있는 이 책은, 젊은 시절에도 뚜렷이 드러났던 그 특유의 독설, 비유, (간간히 드러나는) 독선과 과장, 재치, 그러나 이 모두를 관통하는 일관된 풍의 사항 장악 능력, 메타적 총괄과 비틀기, 낯설게하기의 현란한 테크닉, 전혀 다른 두 현상의 귀결적 일치, 일견 얼척없어 보이는 퓨전과 수렴의 레시피 시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엄하고 숭고한 위상과 아우라의 그 거인("유럽 철학이 그라는 샘물로 모여 들고, 이후의 모든 흐름이 그로부터 발원한")과, 무의식과 언어의 미심쩍은 중매인, 나쁘게 말해 포스트모던의 도살자인 자크 라캉과의 전혀 내키지 않을(헤겔 입장에서 그럴다는 거죠. 라캉은 아마 대환영이었을 겁니다. 프로이트에게마저 희극배우의 코스츔을 입힌 게 그이니까요) 앙상블, 랑데뷰를 논문 한 편, 아니 이정도로 두툼한 책 한 권에서 "주선"하고 있는 게 그입니다. 라캉이 생전에 이 재간꾼을 보았으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요(헤겔의 if 대입은 아예 상상하지 말기로 합시다. 국가를 이성의 최고 발현채(소위 "인륜")로 삼은 그 엄숙주의자에게 걸렸으면 지젝은 아마 아드리아의 검푸른 심연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젝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훤히 밝은 박식형 지성입니다. 이 내용을 한번 보세요.


지 젝은 정말 발칙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근본 없는 풍기 문란, 반달리즘의 폭거가 아닌, "알 거 다 아는 처지에서의 짐짓 광대짓"이므로, 도통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아닌 말로, 한다하는 포스트모던 진영의 논객들도 이 지젝에 대한 호불호가 극으로 갈립니다. 진영에 따라 깨가루가 되게 까이는 게 이 지젝입니다. 그런데, 그 각처의 백화제방식 입장, 입장 입장, 혹은 담론, 담론, 담론들도, 결국은 헤겔로 표상되는 이 이성지상주의, 엄숙주의, 관념론의 래디컬, 교조적 교주를, 유효하고 인문적인(?) 방법으로 전복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니, 요런 지젝의 발칙하고 눈에 거슬리나, 결론과 파장 면에서 "이쁜 짓"이 되고 마는 이런 발랄한 개그를 용인하고, 나아가 동경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실 지젝의 장난은 정말 재능이 뚝뚝 넘쳐 흐르는, 재롱이 예술로 승화한 케이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quid pro quo를 두고 "오인"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좀 아리송했는데, 바로 다음의 역주(왼쪽 페이지 아래를 보세요)에서, 그 상세한 해설이 이뤄집니다.

주형일 박사님의 명쾌한 해설이 아니었으면 책 독해도 어려웠고,

소중한 지식을 얻을 기회도 놓쳤을 겁니다.


저 는 책 제목만을 보고 과연 무엇이 전개될지 책을 받아볼때까지 예측을 전혀 못했습니다. 잘 디자인된 표지를 보고, 그제서야 아하! 했습니다(인간사랑 출판사의 창의인가요, 아님 원서가 저리 되어 있었나요? ).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는게, 히스테리 환자가 숭고한 거여, 이게 아니라, 역대 존재했던 그 많은 환자들 중에, 가장 숭고한 자("le plus sublime des hysteriques")가 바로 그 헤겔 대왕님이다. 저자는 이 소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숭엄한 철학의 大帝를 고작 히스테리 환자로 끌어 내리는 데에, 우리의 자끄 라캉이 도구로 활용되고 있구요. 참 민망한 일입니다.


그 간 지젝의 담론을 익히 읽고 친숙해진 독자라면, 이 까마득한 시초의 저작을 읽고서 이후의 과정과 발전을 역으로 더듬어 보세요. "아하, 이 사람의 재롱도 시기에 따라 이런 이런 변천을 거쳐 커가는 거였구나." 싶을 겁니다. 저는 또, 이 책을 헤겔 연구가들에게 권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 그는 너무도 어렵고, 때로는 히스테리컬 마인드의 집요함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담론의 장벽으로 꽁꽁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피카소가 12세 때 렘브란트처럼 붓을 놀릴 수 있었다고 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 대해 알 것 다 아는 자가 풀어주는 한마당 아니리입니다. 때로는 패러디를 통해, 정전의 진의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진지한 연구에 지치고 때로는 장벽을 절감하던 이에게, 에너지 음료처럼 청량감을 제공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단, 그런 분이라면 과용 과음은 금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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