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아티스트로 산다는 것 - 청춘의 화가, 그들의 그림 같은 삶
YAP 지음 / 다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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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으로, 예술, 혹은 그를 만드는 예술인들이란 우리 사회에서 근린공원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여깁니다. 곁에 없다고 해서 당장 목숨의 유지가 곤란한 건 아니지만, 없어도 살기야 얼마든지 살겠지만, 만약 없다면 삶이 참 피폐하지 않겠습니까. 광범위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서울 혹은 수도권을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아들 하는 거고, 집값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 되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예술인들의 삶이란, 예술이 한국 사회에서 대접 받는 만큼 (종전에 비해) 향상된 바가 사실 거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대중 앞에 많이 노출되고 미디어를 통해 인정 받은 극소수의 아티스트들은 사정이 크게 다르겠으나, 많은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실제 공헌도, 성취도, 잠재력에 무관하게 사회에서 거의 일률적으로 푸대접받는 게 현실입니다. 작년 9월 이낙연 더불어당 대표가 김수로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현장(공연계)의 고충을 대변하여 전하는 말을 담은 뉴스를 읽은 적 있습니다. 사실 사무직, 생산직 노동자들의 아픔이나 애로라면 이를 제도적으로 대표하는 어떤 조직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사정이 낫습니다. 아티스트들은 온갖 어려움과 인식 부족 앞에 맨몸으로, 개인으로, 내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저자 명의인 "YAP"은 young artist power의 약칭이라고 합니다(p7). 강병섭, 고스, 권태훈, 김동욱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이 책에 실린 여러 꼭지의 글들을 써 이뤄진 책이더군요. 각 꼭지 말미에는 필자의 인스타그램 ID가 적혔기 때문에 관심 있는 분들은 웹상에서 다시, 깊이 있게, 작품으로, 이분들을 만나볼 수 있을 듯합니다.

책 앞부분 중에는 고스라는 분의 글을 관심 깊게 읽게 되었습니다. 미술의 본산지는 누가 뭐래도 프랑스겠죠. 피카소도 스페인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그 재능을 인정 받고 파리로 건너와 여러 아티스트들과 교분을 나눈 끝에 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죠. 통속 소설가 시드니 셸던의 작품 <게임의 여왕>을 보면 주인공이 아들을 프랑스로 보내고서 그 예술을 향한 집착을 끊기 위해 모략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설적으로 예술가로서 대성하려면 아무래도 그 본고장에 가서 보고 배워야 한다는 점 다시 확인이 가능했죠. 뭐 원효 대사의 해골물 일화에도 나오듯 진정 뜻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불가능하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쉽지 않죠.

고스 님은 프랑스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아마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대화가 많다, 대화가 많다... 사실 저도 어려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유치원에서 미술 배울 때 "비 오는 건 이렇게 이렇게 그려야지!"라는 채근을 받고 좌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쌤이 시키는 대로 그려 놓고보니 그럴싸하긴 합디다만 이런 주입식(미술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다니!) 교육 하에서 무슨 (창의력이 그 본질인) 예술이 싹트겠습니까? 지금도 저는 제 중요한 재능 하나가, 나쁜 교육 시스템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는 아쉬움을 거둘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미술은, 그 표현의 방식과 아이디어의 구체화를 놓고 마스터와 학생 사이에 끝 없는 토론이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서 그는 4차원 형상을 2차원 평면 위에 표현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가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 소양이 없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었죠. 우리나라처럼 천편일률적인 테크닉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거나, 해외의 트렌드를 어설프게 모방하고선 선생이나 학생이나 기만적인 에고를 달래는 식이 되어서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나올 수가 없죠. 예술가는커녕 간판쟁이들도 키우기 힘들다고나 할까요.

빅터 조 님은 강원도 영월 출신인가 봅니다. "어려서부터 씨름 선수는 유독 경상도 출신이 많은 게..."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특정 세대는 민속씨름(프로 씨름)이 인기 스포츠였던 환경에서 자랐기에 씨름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쳐도, 그 선수들이 경상도 출신이 많다는 점까지는 모를 수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이 참 독특하게 여겨졌네요. 사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천하장사를 지낸 장지영 씨, 또 한참 후의 박광덕 씨, 이런 사람들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죠. 다만 경상도의 왼씨름 방식이 해방 후에 표준으로 굳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게 최근 판명되고 있습니다. 여튼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있어도 그런 자질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이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박훈님의 이야기도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느꼈던 다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꼭 무슨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어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많이 탔다거나 이상하게도 음침한 공간에 필이 꽂힌 적이 많았다거나 하면 이런 성향이 생깁니다. 다크한 감정을 끝없이 표현할 공간, 기회라도 생기면 그나마 다행이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지금은 이케아에서 일한다는 필자 박훈님이, 뭐 직장에서도 크게 인정 받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겠지만(그러고 있으시겠지만) 언젠가는 전업 예술가로서만 사회에서 인정 받고 돈도 많이 버시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장은혜씨는 "근 20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신" 분이네요. 여튼 아직 젊다면 젊으신 나이이며, 예술혼이란 물리적 연령으로 측정할 건 아니겠으니... 대부분 이쪽 계통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졸업 후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더 오래" 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다시 공부를 계속한다거나,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으시고 현재 그러고 계신 그 열정, 충분히 공감합니다. "미친 듯이 투잡 쓰리잡 뛰어 독일 유학 갈 돈을 모았다." 그리고 한국의 직장도 계속, 종사하다가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고... 이 역시 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의 행보와도 비슷하죠(그는 딱 한 번에 자발적으로,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만둔 게 다르지만). 역시 준비의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직장 다니면서 고뇌했던 그 시간들도 다 준비의 자양분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필자 중 정진 님의 지인이 한 이야기는 참 묘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데, 너는 돈을 남한테 주고 전시를?" 이게 정확하게 평균적인 한국인(저 포함)들이 예술인들을 보는 시선의 수준입니다. 물론 예술가가 현실적인 수입을 (올려도) 올리는 건 전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시를 통해 (잠재적) 구매자와 소통을 한 이후가 됩니다만 말입니다. 몇 달 전에 코로나 재난지원금 1500만원 지급으로 논란이 된 어느 분 아드님의 문제도 있었지만, 또 그분의 예술적 성취도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여튼 이만큼이나 한국 예술인들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하나의 반증입니다. 필자께서는 무역회사를 한때 다니기도 한 분이고, "나의 경계"에 대해 어떤 실존적 고민을 한 분이기도 해서 이 부분 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노채영 님도 (본문에 나오듯이) 한 5년 정도 회사를 다닌 분입니다. 이 책에는 이처럼, 전업 예술가가 되고 싶어도 그리 되기 힘든 많은 (현실) 아티스트들의 솔직한 회고, 고뇌가 잔뜩 풀어져 있어 좋았습니다. 승무원으로도 근무하시고,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진로는 확고했었다"고 하시는 분이라 더욱 그렇더군요. "일은,전업 작가로 버티기 위해서 하는 거다." 이렇게 일과 일 사이의 경계가 험난하니, 예술가가 자연히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실 고뇌하는 어느 영혼에게 적어도 그 고뇌의 시간만큼은 영원처럼 깁니다만, 성취 후 그 여유와 쾌감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촌음처럼 또 짧습니다.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적 소양도 없지만, 남이 한 일의 가치와 그에 담긴 노고를 평가할 만큼은 우리 모두가 좀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는 필자들의 작품이, 컬러 백상지에 선명한 사진으로 담겨 이를 감상하는 재미, 보람 또한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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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준비교육 20강 - 삶이 행복해지는 죽음이해, 돌봄에 대한 가르침
김옥라 외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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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후 지존의 자리에 올랐으나 죽음 앞에 무력함을 깨닫고 동남동녀를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들었습니다. 허나 그 시도는 무위로 끝났고 그의 제국은 2세 호해의 손에 들어간 후 오래지 않아 무너졌는데 이는 아마도 진시황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대비가 매우 부실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는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고대 제왕의 죽음도 이러할진대, 우리들 평범한 소시민의 경우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깔끔하고 대범하며 합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우리들 인생이 얼마나 보람되었으며 알찬 유산을 남기는지가 결정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통 대학교 학부 과정 강좌는 16강 정도가 한 학기를 구성합니다. 사실 "개론" 수준이라 해도 16강 정도로 과연 마스터가 가능할지는 언제나 의문이었습니다만, 이 역시 가르치는 분과 배우는 이의 마음가짐, 열의, 재능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강"으로 이뤄진 이 책은 어떠할까요? 저는 처음에 책을 받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체제나 구성, 내용이 마치 학창 시절 열독한 교과서와도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려운 책은 아닐까?" 솔직히 그런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 혹은 제목에 끌려 책을 펴 든 독자가 염두에 둔 토픽 자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게 과연 만만한 과제입니까? 천하를 통일한 자마저도 끝내 정복하지 못하고, 혹은 성숙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서 패배한 대상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한다면서, 간단한 충고 몇 마디로 대신하려 들었다면 이는 죽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고 영접하려는 이들(그 시기에 차이는 있을망정)이라면, 이 정도 "교과서"는 수능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열독 정독하고 마음 속에 새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고테라피란 무엇입니까? 물론 이 용어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많은 다른 쓰임새들이 있겠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그 창안자인 오스트리아의 빅토르 프랑클(책에서의 표기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입장을 충실히 따릅니다. 이분은 정신분석학의 태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보다 약 반 세기 뒤의 인물인데, 역시 제국 시절, 혹은 그 직후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의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 행해지는 심리치료의 이론적 바탕 대부분은 이분의 업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로고테라피에서 "로고"는 물론 의미라는 뜻(p64)입니다.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말씀, 로고스와 어원이 같기도 합니다. p60에서 인용되는 프랭클은 "죽음은 인생의 3대 비극이지만, 결단코 죽음은 삶의 비극에만 그치지 않고,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고, 나아가 삶을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인생은 그 끝이 있고 무한정이 아니기에, 우리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더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주어진 시간의 귀함을 깨닫습니다. 끝도 없는 무한의 시간 안에서라면 인간은 그저 말초적 쾌락에 몰두하며 전혀 자신을 객관하거나 의미를 탐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인을 배려하려 들지도 않고 함께 세상을 개선하려는 시도도 전무하겠으며 모두들 그저 하등동물처럼 제 본능에만 충실할 것입니다. 죽음은 이처럼, 인생과 존재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의 동기와 유인을 제공해 줍니다.

"로고테라피는 그저 치료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진정한 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다른 치료 행위와 달리) 그저 깨어진 균형을 회복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균형까지 깨뜨려 새로운 불균형까지 만들어 냄으로써 치료와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한다.(p65)" 책의 이 문장을 잘 읽어 보십시오. 죽음을 상상하면 한 없는 불안과 슬픔이 몰려와서 이 책을 펼쳐 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 "정신의 균형, 안정이 깨어져 치료가 필요한" 분들일 겁니다.

그런데, "죽음준비교육"은 그런 분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죽음 같은 건 아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젊은이들, 혹은 현재 아무런 고통과 불편과 궁핍을 겪지 않기에 지극히 마음이 안정된 분들에게도, 오히려 이 책은 더 강력한 효용과 수요를 가집니다. 이런 분들은, 인생에서 여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곤궁(사람에 따라서 이런 위험이 아예 면제된, 축복 받은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혹은 죽음에의 위협(이것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등을 비로소 겪을 때, 처음으로 정신적 안정이 깨어지며 극도의 불안정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백신도 건강할 때에서야 맞을 수 있듯이, 이런 분들일수록 오히려 평소에 죽음을 "정석에 맞추어" 대비해야 저런 갑작스러운 위험에 닥쳐서도 순조롭고 지혜롭게 극복해 낼 수 있겠습니다. 태평스럽게, 현재의 편안함과 안일함에 매몰되는 것도 여튼 균형이며,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균형은 빨리 깨뜨려버려야 참된 마음의 평화, 올바르고 단단한 (새로운)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거죠.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아빠는 지금 먼 여행을 떠나셨단다(p112)." 아직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무섭고도 아득한 미스테리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와 즐겁게 놀아 주던, 정서적으로 깊이 의존하던 어떤 거인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게, 그 어른의 부재라는 현실 자체도 견디기 어렵지만, "돌이킬 수 없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는" 속성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이런 속성을 지닌 죽음이라는 게 너무도 두렵습니다. 이 책 6강에서는 이처럼 어린이들이 마주해야 할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해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비 교육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p122에 나오는 J. William Worden의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세 가지 방법이 나오는데 또래들과 함께허는 집단 활동, 상담, 부모의 개입 등입니다. 이 중에는 미술(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방식이 포함됩니다.

"죽음 교육은 그 속성상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인 접근이 유용하다.(p142)" 이 문장은 물론 미국의 중학생들을 염두에 주로 둔 진술이지만, 어차피 죽음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해도 별 차이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교사(지도자)에게 배워야 하겠으며, 어차피 올바른 죽음관을 배양받고 습득하는 방식이 종합적이고 전체적이라야 하기에 이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 학습자들도 이를 배울 때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학습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부 기능이나 국지적 지식을 배울 때와는 자세가 달라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과연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을까요? 이보다는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아직 삶의 기쁨도 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대체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던 경험을 먼저 떠올려 볼 만합니다. 난감한 건, 사실 우리 어른들도 이런 전문가들의 체계적 지식 앞에서, 그저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만 아직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음"의 정확한 개념이 뭔지 모른다는 점은 어린이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나의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는 데에서 새롭고 참된 배움이 시작할 수 있죠.

이런 이치는 죽음이라고 다를 바 없어서, 기존의 피상적인 지식을 넘어서 우선 그 개념부터를 정확히 다시 이해하는 게 첫걸음입니다. p155에는 미국 법학도들의 필독서인 "블랙 법률 사전"의 정의가 인용됩니다. 우리도 1993년에 처음으로 의협에서 뇌사를 사망판정기준으로 삼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만 아직까지 그때로부터 큰 진전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늙음"에 대한 현명한 대처도 가능한데, p166 이하에 "에이징"에 대한 아주 유용한 정의, 대응 방법이 나옵니다.

p183 이하의 10강에서는 호스피스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호스피스 포함 요양병원은 요즘에서야 인식이 크게 확산되어, 부양해야 할 부모님을 "어디 갖다버리는 것" 정도로 부정적으로 여기던 단계에서 크게 현재는 벗어난 상태입니다. p194 이하에 자세히 나오지만 호스피스는 본디 완화치료 자체를 직접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책에서는 아예, "호스피스는 치료 개념이 아예 아니며, 따라서 병원보다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활동"에 초점을 둘 것을 제안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호스피스는 "완화치료"와 병행되는 경우가 많겠으나, 치료 자체는 아니므로 의료, 의학상의 개념과는 (원칙적으로) 별개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고 효과적인 호스피스가 이뤄질 수 있죠. p142의 문장 "죽음준비교육은 다(多)학문적이다"를 다시 한 번 새길 일입니다.

p263에는 서머싯 몸의 유명한 <사마라에서의 약속>에서 죽음의 신에 대한 우화가 인용됩니다. 이 우화는 2017년 1월 1일 한국의 KBS에서도 방영된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 4의 한 에피소드에도 나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정진홍의 저서 중 "살아 있는 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문장도 인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 우화는 죽음의 불가피성, 필연성의 부각 외에도, 죽음의 "일상성"을 일깨우기 위한 의도로도 인용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게 죽음이며, 삶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음이란 사실만 흔쾌히 받아들여도, 죽음 때문에 공포에 떨 이유는 상당히 줄어들겠습니다.

p266에는 "하나님 컴플렉스"가 나옵니다. 죽음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면, 이처럼 삶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한 인식, 행동, 그리고 나쁜 결과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책데는 다양한 영화에서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진 빌런들이 예시되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온 캐릭터들 말고도 이런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는 픽션상의 인물, 실제 역사의 악당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라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이해 가능하죠. 책에는 "죽음의 뒷면이 삶이요, 삶의 앞면이 죽음이다" 같은 문장도 있으며, 도원선사의 발언(p240)을 통해 삶과 죽음을 기(氣)의 응집 여부에 따라 구별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삶으로 접근하므로 어떤 특정 종교 베이스에서 출발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은 깔끔히 접어도 좋겠네요.

p300 이하에는 "애도 상담"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애도는 영어로 condolescences라고 하는데, -s라는 복수 접미사가 붙은 저 모습만 봐도 애도의 효과가 각별한 노력, 성의,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mourning. grieving, lamentation 등 다양한 단어도 등장하는데 이들 각각의 의미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도 책을 통해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이 가장 흔히 접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lamentation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310에는 저 위 p122에서(그 외에도 많습니다) 인용된 워든 박사의 다른 업적, 즉 과업이론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용서"는 결코 현실 도피의 값싼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용서도 죄 지은 자가 준비가 되었을 때에나 가능하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용서는 그리 쉽게 행해지는 정신작용, 행위가 아니며, 이 대목에서 필자(공저자분들 중 박순 원장입니다)는 제임스 뉴튼 폴링 박사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 무작정 잊으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외친 캐서린 후트의 시를 재인용합니다 맞는 말이죠. 가해자가 멀쩡히, 회개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데 무슨 피해자가 눈물을 떨구며 뒤에 숨어서 가해자를 용서하겠습니까. p328에는 "강요된 용서보다는 새로운 이야기의 재구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p364 이하에서는 장례와 기타 포괄적인 의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반성적 극복이 나옵니다. 이미 유교적 폐습과 가치관이 극복된지 오래지만, 개중에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관습 중에 남아 음습한 악영향을 지속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개인들이 주관적으로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의식만 각성한다고 될 일은 아니며, 사회적으로 반복 시행되는 리추얼과 루틴 중 개인의 각성, 극복, 재생 등을 방해하는 건 혹시 없는지 마땅히 돌아볼 일입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서 죽음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긴 하나 이는 다분히 자기기만적인 주문입니다. 그보다는, 그 속성을 이성적으로, 또 성숙한 감정으로 직시했을 때 "의외로,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었음"을 바르게 깨닫는 게 더 중요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소중하며, 죽음을 비통하지 않고 행복하게, 성숙하게 끌어안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 죽은 것이라는 점에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동의한다면, 오히려 남은 삶의 날 하루하루가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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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답게 나답게
안셀름 그륀.안드레아 라슨 지음, 안미라 옮김 / 챕터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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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영성". 공저자 중 한 분인 안셀름 그륀에게 붙은 호칭 중 하나입니다. 두 분의 공저자들 중 다른 한 분은 안드레아 라슨이며, 수도사인 그륀 박사의 여동생의 딸, 즉 외조카입니다.

나답다는 건 무엇일까요? 또, 너답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궁극 과제를 오직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겠으며, 참다운 나를 찾은 사람은 이미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분이 가톨릭 수도사이니 가톨릭적인 세계관에 합당한 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특히 가톨릭에서 성직자는 평신도, 나아가 일반인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분이 규정하고 제시하는 "나다움, 너다움"의 해답은 결코 특정 종교의 (제한된) 이상상에만 부합하는 게 아닙니다.

조카인 안드레아 라슨은 외삼촌에게 묻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남동생은 자전거 타기에 빠져 있습니다. (중략) 아시다피시 저는 달리기를 좋아한답니다.(하략)"(p45) 이 말을 하면서 안드레아 라슨은 "우리는 이처럼,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의 영혼을 또한 공유하기도 합니다."라며, 어느 순간은 이런 모습, 또 어느 순간은 저런 모습을 띠는 우리들이, 과연 어떤 양태의 참모습을 지니는 건지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집니다.

독자인 저는 이 대목이 몹시도 흥미롭더군요. 보통 자전거타기라든가, 혹은 이런저런 취미활동을 누리는 이들이, 물론 동질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긴 하지만, 그를 넘어 영혼의 빛깔까지 서로 같다고 여기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내 영혼이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함 자체를 갖지 않는 게 보통일 겁니다. 안드레아 라슨은 이미 그 어머니와 함께 몇 권의 저술 활동에 참여할 만큼 성숙한 어른입니다만, 또 이미 아이들의 부모가 된 처지(p109)입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는 마치 어린이처럼 천진무구한 어투를 보입니다. "삼촌, 이건 뭐라고 부르나요? 또 저건 뭐죠?" 질문이 끊이지 않으며 정원을 노니는 꼬마와도 같습니다.

이 와중에 그녀가 심각하게 묻는 건, 궁금해하는 건, "역할의 의의"입니다. 내가 이런 처지에도 놓여 보고, 저런 상황에도 처할 수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일시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처지가 바뀌어 봄으로 해서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 공감도 해 보고, 전에는 채 보지 못하던 어떤 지평까지 엿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넓혀진 인식이나 깨달음 중 어떤 것이 나다운 것이며, 어떤 것을 영혼에 과연 덧입혀 옳은지, 그녀는 오랜 수도사 생활을 거친 외삼촌에게 진지하게 답을 구하는 중입니다.

p108에서 조카는 다시 "자아"에 대해 묻습니다. 물론 타 종교인 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논합니다만 여튼 이분들은 비교적 자신에게 가깝거나 평생을 서원한 종교의 틀 안에서 해답을 찾는 게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이에 대해 외삼촌은 성경 복음서를 인용하며 답을 제안하는데, 원문에서 예수 역시 매우 간략하게 답을 주었듯, 그 역시 짧으면서도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라는 것이며, 이는 루카의 복음서가 그 출전입니다.

영성의 삶은, 예를 들면 매일 하루를 고된 육체 노동에 시달리다 저녁이면 귀가하여 지쳐 잠드는 노동자의 삶과 다를까요? 그륀 박사의 결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종이 제 할 일을 애써 마쳐도 주인은, 혹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애써 칭찬하지 않습니다. 영성으로 가득하여 날마다 고상한 주제로 묵상에 잠기는 사람은 남의 칭찬을 받아야 할까요? 이 역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연의 영성으로 돌아가 청정 상태에 들어가는 건 그저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자연스러울 뿐입니다. 이를 두고 "칭찬과 평판"을 기대함은, 마치 예수가 복음서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 맹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의, 어떤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거죠.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이를 일부 계승한 기독교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을 논한다는 점, 우리도 고교 교과 과정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조카인 안드레아 라슨은 이 중 내면의 사랑이 반드시 내면에만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표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 머무르지만 않고 반드시 그 외적인 발현을 동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히 수도원 안에서의 청순한 사랑 형태만 지켜야 하는 상황과 모순되지는 않냐고 묻는 듯합니다. 또한 안드레아 라슨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기도 한 만큼, 부부가 서로에게 품는 사랑은 어떤 양태가 이상적인지에 대해서도 묻습니다.

수도사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만약 흔들린다면, 이것은 이른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후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다는 지족선사의 일화와 다를 바가 없죠. 그륀 박사는 이에 대해 그 충동의 존재를 구태여 부인하지 않으며, 그러나 이는 "신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데 하나의 영감을 제공할 뿐"이라고 합니다(p154).

우리는 누구나 일상에 치여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러면서도 물욕과 애욕을 놓지 않고 세속의 게임에서 작은 포인트라도 하나 더 따는 방식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마저 느낍니다. 그러나 성직자의 청신(淸新)한 삶은, 이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어린이의 무구한 마음으로 복귀해야만 천국과 평화로 가는 입구가 열릴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성인(成人)이 된 사람은 없고, 어린 시절을 다 겪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하고 공통된 초심에의 회귀가 세상에서 가장어려운 과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날마다 나의 양심이 다친 바 없는지 자성하고, 참다운 내 모습이 과연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끊임 없이 살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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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사탕 대소동 반짝반짝 빛나는 아홉살 가치동화 1
최은영 지음, 이현정 그림 / 니케주니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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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동화"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나요? 책표지에 이 말이 나와 있었지만 처음에 저는 그저 예사로 넘겼더랬는데 다 읽고 나서 약간 한 방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독후감 말미에 따로 말하겠습니다.

사실 책을 처음부터 꼼꼼히 읽었다면 그런 느낌은 안 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pp.4~7에는 최은영 작가의 "작가의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작가께서는 이 동화의 창작 의도, 결말(결론?)이 어디로 갈지 미리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순순히 책장만 잘 남겼어도 "당황스러운 기분"은 피해갈 수 있었죠. 음... 그래도, 소설이나 동화나 영화를 볼 때 "반전(일종의)의 충격"은 대체로 유쾌한 편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잘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인공은 신하라는 이름의 아이인데, 이 아이는 좀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선생님 상대로 별 거리낌없이 하고 싶은 말도 하는 편입니다. 그런 성격 덕분에 얻는 바가 많은가. 앞으로 더 살아 봐야 알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꽤 결과가 좋은 편입니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주인공 신하의 적극적이고 (어찌보면) 좀 막무가내인 성격, 스타일이었습니다.

신하의 반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칭찬 사탕"이라는 인센티브를 유지하는데, 다른 친구들보다 잘한 게 있으면 칭찬의 의미에서 사탕을 주는 식입니다. 사탕 하나가 대단할 건 없지만(치의과적 이유 때문에 요즘 부모들은 오히려 꺼리기도 하죠), 일종의 상징적 의의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서로 받으려고 난리입니다. 이런 게 통하려면 선생님이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거나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아마 나이도 젊고 그런 만큼 다소 경험이 부족하신 면도 적지는 않지 않을까, 저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이유는 뒤에서 제 나름대로 써 보겠습니다).

지호와 재현이는 사내아이들인데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신하가 이니셔티브를 취했기에 같이 청소를 한 얘네들도 덩달아(?) 사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하는 더욱 으쓱해하며, 사실 이처럼 또래들 사이에 받는 인정, 일종의 리더십 획득이 이런 행동, 성격의 주된 동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전쟁 직후도 아니고 사탕 한 알이 큰 인센티브는 아니겠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음... 본래 사촌, 그 중에서도 고종사촌인 아린이는 평소부터 그리 신하한테 호의적인 편이 아닙니다.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고모가 원래 자기 오빠네 식구한테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닌 건지(?), 혹은 아린이가 본래 잘난 점이 많아서 주위 사람들 흠이 제 눈에 잘 들어오는 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 아린이가 신하의 기분 좋은 일에 대해 딴지를 걸고 들어오기를 아주 즐긴다는 거죠. 이 일 말고도 말입니다.

"뭘 잘 한 게 있는데 칭찬사탕을 줘?"
"청소."
"청소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그런다고 칭찬사탕을 줘? 너희 선생님은 너무 기분파 아냐?" (p22)

어떻습니까? 만약에 아린이가 아니라 그 엄마, 즉 신하의 고모가 이런 말을 했다면 또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이인데 구태여 듣는 신하 기분 망치게 이런 트집을 잡는다? 거 참 애 성격 한번 특이하다... 이런 생각이 누구나 들 만합니다. 헌데, 솔직히 말해서 더 당혹스러운 건, 저 아린이의 말이 (사실) 옳다는 겁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웃죠. 어른들이 긴장하는 건 애들이 저처럼 맞는 말을 할 때입니다. 그 생각이, 어른인 우리들의 마음 속에 미처 떠오르지 않았을 때 우리는 더 당황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 이야기 속에서 (구태여 따지자면 아마도) 빌런에 가까울 아린이가 이런 말을 하니, 성인 독자들은 마음에 긴장이 생깁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권위(authority)는 결국 올바른 것으로 판명이 나야 한다. 이제 담임 선생님의 처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정당성을 획득할까?"

음. 그 전에, 아린이의 항의, 의문 제기가 신하의 클래스 안에서 어떤 공명, 공감을 얻기나 할지도 아직 의문입니다. 이 말다툼(축에도 끼지 못하지만)은 그저 집 안에서의 작은 소동으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한편 신하네 반에는 현수라는 아이가 새로 전학옵니다. 전학생이 최초라고 하는군요. 현수가 모 고깃집 아들이라고 하니까 이 반은 곧바로 선망의 웅성거림이 웨이브를 그립니다. 고깃집 아들이 그 정도로 부러움의 대상인가? 저희 때 분위기라면 좀 상상하기 어려운데 뭐 요즘은 그런가 봅니다. 먹고 싶을 때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그렇다는 걸까요, 아님 (동화 중에 나오는 대로) 동네에서 특별히 잘나가는 음식점이고 그 결과 현수네 집이 상당히 잘 살 것 같다는 추론 때문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이제 거액의 권리금을 주고 갓 입주한 곳이라면? 그 장사의 성패 역시 불확실합니다. ㅎㅎ

여튼, 현수는 이상하게도 선생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습니다. 눈이 나빠서 앞자리에 앉는 건 그렇다쳐도, 왜 급식 시간에 남들보다 먼저 배식을 받는 걸까요? 이건 따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책 후반에 이유가 나오므로 여기서는 내용 누설을 삼가겠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서, 확실히 아린이는 신하보다, 혹은 또래 아이들보다 좀 똑똑하고 사리에 밝은 것 같습니다. 똑똑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런 애들은 어려서나 커서나 어디 가서 부당한 손해는 보지 않습니다. 뭐 대개 그렇더라고요. 아래 대화를 보십시오.

"너희 선생님이 현수 고모쯤 되는 거지. 그래서 현수의 고모인 너희 선생님(아닙니다!)이 현수를 특별 대우해 주는 거야."
"야, 그렇다고 너희 엄마가 나한테 특별 대우해 주는 게 뭐 있냐?"

ㅎㅎ 확실히 아이답게, 신하는 아린이의 논리적 비약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평소에 자신한테 특별히 잘 해 주는 것도 없는 고모에 대한 억울함을 표현합니다. 물론 즉각, 똑똑한 아린이에 의해 반박당합니다.

"우리 엄마는 선생님이 아니잖아!"

그 다음 신하의 말이 웃깁니다. 하긴 고모(즉 아린이 엄마)는 보험회사에 다니니, 나한테 뭘 잘해주고 말것도 없다는 것. 이 대목에서 독자는 피식 웃음을 짓게 되는데... 여튼 근거가 있건 없건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곧잘 관철시키는 재주가 있는 걸 보면, 아린이는 아마 엄마의 피를 이어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특정 직업군에 대한 비하의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잘하시는 분들이야 억대 연봉 받고 잘나가시죠.

음... 여튼, 삼국유사에도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 격언이 나오는 대로, 우리 민족은 뭇 대중이 마음을 모아 소리치면 결국은 그게 통하는 식으로 항상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 결국 이 이야기에서...

(내용 누설 주의)
선생님이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개선을 약속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작은 학급에서 웬만하면 권위가 유지되게 하는 것도 중요한데, 여기서 사탕의 배분이나 현수에 대한 배려가 과연 "공정이라는 가치의 위반"에까지 다다른 건지는 의문입니다. 형식적인 과업의 완수가 아니라 열성을 다한 행동이라면 사탕을 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요즘 브레이브걸스가 역주행에 성공하여 탑티어로 다시 태어난 것도 "평소에 남들 외면하곤 하는 군부대 위문 공연 등에 정성을 다하여 임하는 성실한 태도"가 하나의 중요 이유가 되었다는 점도 떠올려 보면 말입니다.

여튼 공정이라는 가치는 중요합니다. 또, 본문 중에도 나오듯이, 이 공정이라는 가치는 그저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또한, 선생님이라고 해도 가치의 설정이나 그 내용에 대한 합의는 학생들과 함께 이뤄 나가야 한다는 점은 깊이 새길 만합니다. 동화 속뿐 아니라 현실에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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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동 204호 아파트 교회 - 도시 목회의 대안 아파트 교회 개척 이야기
이동복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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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동복 목사님은 현재 인천 청라 좋은밭교회 담임목사로 재직중인 분입니다(책 앞날개). 게시된 경력을 보니 수영로 교회 부목사 사항도 있는데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아주 가깝게 위치한,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꼽히던(현재도 같습니다) 곳이라서 반가웠습니다.

책 제목에서도 우리가 눈치챌 수 있듯 저자께서는 "현장 목회에 탁월한 교회 개척자(p4. 앙현표 총신대 교수의 추천사 중)"이십니다. "개척"이란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긴 하나 이를 (어느 분야가 되었건 간에) 실천에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교회의 개척은, 과거와는 달리 한국에 반(反) 개신교 풍조가 상당히 퍼진 작금에 있어서는 더욱 힘든 과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특정 종교를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그 중에는 교회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사항도 있는 만큼 목회자의 사명감 고양과 자질 향상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간판도 없고, 새벽기도회도 없고, (심지어) 전도도 없는, 아파트 103동 204호 교회를, 인근도 아닌 부산, 강릉 등지에서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추천사인 p5 이한수 명예교수의 말 중에서 인용했습니다. 비(非) 개신교 신자 중 해당 종교에 대해 대뜸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극성스러운 전도"이겠습니다. 물론 요즘은 꼭 그렇지는 않으며, 비정상이라 할 만큼 열을 올리는 전도는 종파 불문 종교 불문의 일반적인(그래서 우려스러운) 현상이 되었습니다.

여튼, 어떤 교회가 전도도 없이, 그처럼 알음알음으로 주목 받고, 외부에서조차 절로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된 비결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다시, 책 추천사 같은 페이지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자면, "말씀 앞에 자신의 온갖 우상들을 내려놓고, 깨지고 부서지면서 새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저자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가능"했다는 게 이 명예교수님의 평가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떡, 뛰어내릴 것, 세상의 부귀영화(p44)." 저자는 이를 다시 다른 말로 바꿉니다. "정욕, 권세, 돈" 복음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며,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를 대심문관의 에피소드로 변형하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에서 "과연 신의 영감을 받아 쓰인 이야기"라며 무신론자인 이반의 입을 빌려 격찬하고 있습니다. 책의 다음 페이지에서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는 말이 나오니다.

독자인 저는 예전에 찰스 셸던의 소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기란 참 쉽습니다. 남들 듣기 그럴싸한 아름다운 격언, 근엄한 충고를 남한테 폼 잡고 떠드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매 순간, 내 머리 속에(가슴이 아닌) 기억된 예수의 이런저런 가르침을 기준 삼아, 내가 맞닥뜨린 모든 상황에다 그대로 대입해 보고 정말 실천에까지 옮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 셸던의 소설은 문자 그대로 그런 상황을 상정하고 픽션화한 작품이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저는 아직도 이 가르침을, 가장 낮고 작은 스케일에서조차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분명 그게 바른 길이요 선택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는 사도라고도 불리며, 원래는 경건함이나 성스러움, 심지어 지혜로움과도 별반 상관 없는 삶을 살던, 지극히 평범한 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소명을 주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든 이가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제자로서 사는 삶"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로만 가톨릭이 세상을 덮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다.(p64)" 여기서 저자께서 말하는 종교개혁이란 아마도 후스와 위클리프가 일으킨 선구적인 움직임까지 모두 포함하는 맥락일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유럽을 온통 로마 교황의 권위가 뒤덮고 짓누를 시절이었겠으니요. 저자의 말은 이어집니다. "지금은 자유주의 신학이 세상을 덮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교개혁으로 돌아가기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은 물론 숭엄한 움직임이었고 그 결과도 찬란히 맺었으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최종의 목적지("땅끝")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 목회와 교회 개척의 달인이시라고 합니다만 저자에게도 엄연히 시련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단 한 번의 주춤거림과 넘어짐 없이 쾌속 급행 질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참으로 진솔한 고백과 그로부터의 깨달음이 이어지기에 더욱 큰 진정성과 설득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말씀은 리얼 판타지이다."

"복음이 우리를, 말씀이신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우리를 교만케 하고 면죄부 역할을 했다. 마치 산돌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벽돌에 역청을 만들어 우리 이름을 내려는 바벨탑을 닮았다.(p105)" 우리는 죄악이라는 결과에 빠진 우리 자신에 충격을 받고 자기연민에 곧잘 빠집니다. 그럴 때마다 무엇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며 눈물을 떨구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나 이런 뉘우침의 순간에마저 우리는 남 탓, 상황 탓, 사탄의 탓을 일삼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한 건 엄연히 우리의 욕정, 탐욕, 오만이었으며, 이 순간의 사탄의 대변인, 육화 노릇을 우리들 자신이 저질렀는데 대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 작자들이 16세기 유럽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거짓 눈물과 기도로 양심의 짐을 그때그때 덜려 잔꾀를 부리는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저자는 아주 솔직한 분입니다. 목사님이시면서도 송도에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때, 노후대책도 겸하여 어디가 과연 가격이 잘 오를 유망한 곳인지를 물색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 되면 나의 하나님은 송도의 32평 아파트가 아니었을까?(p128)" 살면서 한 번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의 윗자리에 물질과 황금을 둔 적 없는 인물이 모세 이래 과연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도 부끄럼 없이 내면화한 철의 규율로 제네바를 다스린 장 칼뱅 정도 아니었을까요? 이 책은 이처럼 목사이신 저자께서 너무도 솔직히 자신의 지난 여정, 오류와 불신과 욕심으로 적잖이 점철된 이력을 털어 놓고 계셔서 더욱 감동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게바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을 가리키는 헬라어이며(p150), 게바는 아람어인데 아람어는 당시 서아시아 일대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작동했습니다. 게바는 바울에게서 큰 책망을 받았는데, 본심은 (폐쇄적인) 유대인으로 살면서 그 "외식"만을 그리스도인으로 꾸민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같은 페이지). 배드로가 대체 누구였습니까? 제자 중 으뜸가는 이였으며, 반면 바울은 오히려 초기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로마 당국에 넘기는, 그리스도의 길과 정반대 대척점에 서 온, "유대인 중의 유대인(p152)"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마저도 미진한 면이 있어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으니, 하물며 가장 부족하고 가장 죄 속에 크게 빠져 영혼을 더럽히는 우리들이, 올바른 길을 찾고 복음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오히려 선민 의식에 빠져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니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파트 6에는 성도들의 간증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참 별 일이 다 있어서, 어떤 심방은 한 번 요청하는 데 천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책에는 "이걸 예수 굿이라고 하는거야"라는 말도 나오는데, 예수깨서 직접 보시기라도 했다면 "내 아버지의 집을 돈놀이로 더럽혔다!"며 불호령을 내리셨을 법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지 백 년이 훨씬 넘었으나, 오히려 토속의 못된 풍속과 접합하여 이처럼 병든 행태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게 굿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욥은 한때 남부러울 바 없이 윤택한(세상의 기준에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영혼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온갖 악운이 그에게 닥쳐 옵니다. 사탄의 장난과도 같은 매일이 이어졌으나, 욥은 이 모두가 주님의 역사라 여기고 절대적으로 섭리 앞에 겸손하며 순명하는데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남들 누리는 복락을 고루 누리며 살게 해 달라고 빌어대는 비천한 단계를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참된 길이 무엇인지, 이를 한눈에 직시하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는 사실이 알고 보면 더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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