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상술 - 긴자의 장사꾼 후지다 덴의 가르침
후지다 덴 지음, 이경미 옮김 / 지니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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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외부의 강력한 정치, 군사 집단에 핍박받으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산업계, 금융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뚜렷한 민족 정체성을 자녀들에게 치밀한 교육을 통해 전수하기 때문에 의사, 변호사 등 사회 주요 직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고 가끔 큰 인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부(富), 경제계의 이니셔티브를 결코 놓지 않는 그들만의 생존, 번영 비결은 바로 뛰어난 상술에서 나옵니다.

p36을 보면 유대인들은 은행 예금도 선호하지 않고 집에 현금으로 보관하는 걸 선호한다고 합니다. 자산 보유 형태로 현금을 선택하면 그에는 이자를 비롯하여 어떤 보상도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현금을 구태여 고집하는가? 책의 설명에 의하면, 은행 이자라고 해 봐야 물가 상승률을 어차피 못 따라가며, 예금은 내가 이만한 자산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어, 죽을 때 정부로부터 세금이 부과되는, 하나의 좋은 타겟이 될 뿐이라는 겁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으나, 현금을 든든히 보유하면 뜻밖의 좋은 투자처가 나타났을 때 재빨리 그에 투입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주식 투자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포트폴리오에서 일정 부분을 반드시 현금으로 떼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상속세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이 있어 불편한 이들도 있겠으나 정작 이 책을 쓴 고 후지다 덴[藤田 田] 대표는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한 마이더스의 손이었으며 타계 후 엄청난 유산을 남겨서 많은 상속세원을 과세 당국에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니 비난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후지다 덴은 일본의 사업가였으므로 유대인을 종족 배경에서 옹호할 이유는 없습니다. 본인도 성공한 사업가로서, 그들 유대인들을 객관화해 볼 때 이러이러한 탁월한 점이 있더라는 주장을 지금 이 책을 통해 전개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은 논밭에서 열심히 일하기 위해 든든한 새참을 뱃속에 꾹꾹 욱여넣었습니다.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식사였겠는데, 유대인들은 이와 반대로 먹기 위해 일한다고 할 만큼 성대한 정찬을 즐긴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차피 일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그런 분들도 있지만), 한국에서 관행적으로 하는 표현대로 "다 먹고 살자고들 하는 일"인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으니 맛있는 먹거리로 자신에게 상을 줄 필요도 있고, 이렇게 선순환이 이뤄져야 일 자체의 퀄리티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대체로 주변의 메인스트림 종족에게 백안시되는 편이었는데, 가끔 그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여 기를 죽여 놓을 필요도 있었다는 것입니다(p141).

유대인들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냉혈 합리주의의 민족일 듯해도 의외로 감정적입니다. 그런데 위기에 처해서도 삶을 강렬하게 이어가려는 의지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이런 elan vital 같은 게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법정을 이용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으므로 자기들끼리 싸움이 생기면 랍비(rabbi)의 중재를 청했고, 따라서 랍비에게는 로마 가톨릭의 신부나 마찬가지로 대단히 중요한, 그리고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요구될 만합니다. 그러나 p177을 보면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 랍비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어차피 그들도 사람"이라며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랍비가 똑똑하고 지식이 많다 해도 그 정도일 뿐이며 마치 집에 하수구가 막혔을 때 기술자를 불러 해결하는 그 이상이 아닌 듯합니다. 하수구 기술자의 기술도 따지고보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랍비의 지혜, 지식도 그 선에서만 존중된다 생각하니 쿨해 보이기도 합니다.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나라가 유럽 중부에 있습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나라는 유대인들에게 국적을 목돈에 판매하고, 대신 아주 낮은 세금만을 받기 때문에 누진세, 종소세 등에 학을 뗀 사업가들에게 큰 인기라고 합니다. 세계 사람들을 갖고노는 게 유대인인데, 리히텐슈타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않고 놀고먹으면서 그 유대인을 등쳐먹으니 놀랍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세상에는 돈 벌 거리, 풍요롭게 살 수단이 얼마든지 있고, 가난한 건 개인이 머리를 쓰지 않고 어리석어서라는 저자의 일갈(p195)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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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화폐전쟁 - 달러 패권 100년의 사이클과 위안화의 도전
조경엽 지음 / 미래의창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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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 사이에 바야흐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사일이 날고 대포가 불을 뿜는 전쟁이 아니라 산업, 무역, 환율, 관세 부과를 두고 일어나는 일종의 냉전입니다. 미국이 먼저 관세 부과라는 펀치를 날렸고 중국도 이에 맞대응했으며 이런 대립이 서로에게 손해라는 걸 확인한 후에는 90일 간의 유예에 합의했습니다만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2016년 SDR(특별인출권)에 중국의 위안화가 편입되었을 때 당시에는 대단한 뉴스인 듯 강조되었습니다만, 저자 조경엽 소장은 최고의 금융전문가답게 (해당 국가의 경제력에 비해) 그 편입 비중이 낮게 책정되었음을 들어 위안화가 "홀대"받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던 바 있습니다. 이어 p8에서 저자는 리브라프로젝트(뒤 p179도 참조. 리브라 프로젝트는 현재 좌초했습니다)에서도, 심지어 싱가포르달러까지 초청되었으나 위안은 아예 배제된 사실을 지적하며, 중국이라는 제조업 대국이 여전히 국제상류사회에서 상석에 앉기 힘든 현실을 짚습니다. 미국 중심으로 질서가 꽉 짜인 현실의 벽이 이처럼 높습니다.

한편으로 중국은 엄청난 인구를 보유했고 세계의 공장 역할을 자청하며 점점 역량을 키우는 중입니다. 또 "미국의 빅테크, 플랫폼이 여전히 진출하지 못하는(p9)"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며, 올해 초 딥시크의 성공으로 세계의 자본이 중국 IT산업의 잠재력을 알아보아 급격히 몰려드는 중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추세가 가속화하면 중국의 위안이 달러를 제치기까지는 힘들더라도, 상당 영역을 미국으로부터 뺏어와 위안의 기축통화권 안에 편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중국에서는 거지도 디지털페이로 적선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도 1990년대부터 자영업자들에게 포스망을 보급하여 비(非)현금거래가 꽤나 널리 보급된 나라지만 아예 백지에서 시작하여 갈아엎을 시스템도 없이 디지털 시스템부터 깐 중국의 실정과는 효율 면에서 비교가 안 됩니다. p28에도 나오듯이 마윈이 세계적인 기업가가 된 건 중국 안에서는 최초로 에스크로를 도입하여 사기의 위험을 줄였기 때입니다. 이런 건 더 이른 시기에 한국의 여러 이커머스 회사들도 다 했던 건데, 중국은 나라가 사이즈가 다르다 보니 같은 성과를 내도 그 결과가 이렇게나 차이가 납니다. 작은 나라에 태어난 걸 한스럽게 생각할 밖에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러시아는 미국한테 온갖 제재를 다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SWIFT망에서의 퇴출인데, 다른 나라 같으면 큰 타격을 받겠지만 러시아는 워낙 자원이 많다 보니 싼값에 인도, 중국 등에 내다팔아 재원을 조달하여 어렵사리 위기를 넘겼습니다. 당시에도 서방 언론에서 대체결제망 창설, 보급이라는 역효과를 걱정했었는데, p101을 보면 이미 중국이 2015년에 만들어 놓은 CIPS의 특징을 기존 SWIFT와 저자 조 소장님이 대조 정리한 표가 있습니다. 여기를 꼼꼼하게 읽어야, 조 소장님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진짜 주제를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카잔에서 브릭스 총회가 열렸을 때 푸틴이 미국 보라는 듯 브릭스 통화(見樣)를 꺼내들고 얼마든지 달러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그걸 허용할 리가 없고 사실 지금은 미국 일극 체제에 맞서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을 뿐 둘의 사이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20세기 같은 공산진영에 속했을 때에도 양국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몇 번 넘겼습니다. 한편 이른바 브릭스플러스라고 해서 인도는 묘하게 미국의 반대 진영에도 한 발을 걸치는데, p138에도 나오듯 이런 인도의 양다리 전략 때문에 미국의 인태 구상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트럼프가 며칠 전 하버드에 대해 외국인 학생의 비중을 줄일 것을 요구했는데 국가 기밀이나 첨단 기술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도 물론 경계해야겠으나 이렇게 세계를 향해 문을 닫아걸면 과연 장기적으로 미국에 이익이 될지 의문이죠. p194를 보면 미국의 첨단 지식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제도적 노력이 기울여지는지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1985년 플라자 합의에 준하는 어떤 조치가 트럼프에 의해 진행될 것이라고 스티븐 미란 같은 이가 마러라고 합의(p200) 같은 걸 띄우는데, 아무튼 미국도 기축통화국의 함정인 트리핀 딜레마로부터의 탈출에 무척 고심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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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 현대미술
데이비드 홉킨스 지음, 강선아 옮김 / 미진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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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 르네상스부터 예술인에게 창작의 자유가 본격 장려된 후 미술의 사조도 여러 번 큰 흐름을 바꾸었으나 최근의 흐름은 너무도 난해하여 일반인이 (창작은 고사하고) 그 감상, 향유에 과연 참여가 가능한지에조차 회의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이미 20세기 들어 미술은 극도의 추상화 내지 팝아트화의 길을 걸었고, 어떤 분은 "미술이 어려워진 게 아니라 대중이 엘리트화한 결과"라고도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움은 여전합니다. 그럴 때는 정확하고 친절한 안내자의 가르침, 도움이 필요합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데이비드 홉킨스 교수의 이 책은 원래 <옥스포드 미술사 1945-2000>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초판이 나왔었으며, 그 초판은 매튜 바니의 크리매스터 연작 중 한 이미지를 표지 디자인에 채용했었습니다. 지금 이 2판은 책 본문 p307에 설명이 나오는 것처럼, 헤더 캐실스라는 우리 시대 예술가가 린다 벵글리스라는 페미니스트 조각가에게 바치는 오마주가 표지를 장식합니다.

사실 p307의 설명이 아주 자세하지는 않아서 무슨 뜻인지 모를 독자들도 있을 텐데, 원래 (이 책에 나오는 대로) 1974년 린다 벵글리스가 본인을 모델로 하여 <아트 포럼>誌에 충격적인 작품을 게재한 적 있었습니다. 그걸, 남성 보디빌더이기도 한 헤더 캐실스가 이제는 자신을 직접 모델로 내세워 이렇게 패러디한 것압니다. 저 이미지를 보고 남성이 립스틱을 칠한 모습에 충격 받는 이들도 있겠지만, 2011년의 저 이미지는 오리지널 벵글리스의 50년 전 도발에 비하면 어린이 장난 수준입니다. 린다 벵글리스라고 구글 등에 검색해 보면 그 작품이 나올 것입니다. 이 책 앞표지의 저 다소 기괴한 작품은 그런 맥락을 알아야 감상이 제대로 이뤄집니다.

p11에 홉킨스 교수의 서문이 나옵니다. 왜 1945인가(초판부터 이 책은 주제의 초기점을 1945년으로 잡았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의 원폭 투하,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만행 이후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유명한 탄식 등을 거론하며 저자는 1945년 이후 우리는 인간성의 근원에 대한 재고, 문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을 갖게 되었음을 지적하죠. 예술가들도 야만에의 가담, 자진 공범화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창작이고 뭐고 일절 활동을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각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게 또한 타고난 본성이며 공동체에의 기여요 자아 실현이기도 하겠습니다.

이탈리아는 1943년 바돌리오 장군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 전범국 노릇을 했고, 프랑스는 1940년 단 6주만에 나치에 무릎을 꿇어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앞잡이 구실을 본의 아니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예술가들은 마르크스 혁명 사상으로 무장하여 기존의 무기력한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 이야기가 p23 이하에 레나토 구투소의 행적과 작품을 분석하며 나옵니다. 책에 보면 "프랑스에서는 원래 공적 의미가 있는 대형 회화 전통이 강한 나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국도 오윤, 신학철, 임옥상 같은 작가들이 이 맥락에서 함께 떠오르기도 하죠.

책은 모두 9개의 챕터로 이뤄집니다. 철물점에서 파는 흔한 변기를 갖다놓고 <분수>라며 전시한 마르셀 뒤샹의 혁명 후 현대미술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틀었는데 다만 그 유명한 오브제는 1917년에 관객들을 만났습니다. 이 책의 제2장에서 뒤샹이 남긴 유산을 집중 분석합니다. p91 이하에서 이른바 누보레알리즘 조류가 설명되는데, 이브 클랭, 다니엘 스포에리 등에게 뒤샹이 끼친 영향을 설명하는 대목이 참 잘 쓰였다는 게 개인적인 제 생각입니다. p180에서 이제는 "오브제의 죽음"을 선언하는 제6장은 독자의 시선을 추상미술 깊숙한 곳으로 조준하게 돕습니다. 추상을 넘어 아예 "개념"으로 이동하라는 건데, 여기서 인용된 다니엘 뷔랑의 사진 작품 <샌드위치>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느낌입니다.

제7장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챕터를 보면 특히 p254 패러다임으로서의 설치 파트에 유익한 설명이 많습니다. 설치는 현대 미술에 있어 예술가들이 관객과 소통하는 핵심 수단으로 부각되었는데, 리처드 윌슨, 데이미언 허스트 등의 이름과 사치(Saatchi) 갤러리 등이 중요 주제입니다. p255에 나오는 윌슨의 작품은 사치 갤러리 천장을 찍은 사진에 불과하지만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도 보여 유명합니다. 제9장에서는 뉴 밀레니엄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는데 2판에서 새로 추가된 내용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 관련한 예술 활동으로 주목받은 어셈블이라는 영국의 단체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권말에는 연표, 색인 등도 깔끔하게 첨가되어 독자의 편의를 더하는 최고의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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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행복을 부르는 풍수지리
이재원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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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이 풍수의 덕을 입어 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고 밝히며 후손들에게도 결코 도선(道仙) 대사의 가르침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알려집니다. 도원(桃園) 이재원 교수님이 쓰신 이 책은, 21세기 한국의 현실에 맞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풍수 지리가 무엇인지, 어디가 나의 행복과 건강을 부르는 신(新) 명당인지를, 많은 사진과 시원시원한 문장을 통해 가르쳐 줍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0을 보면 왜 어떤 마을은 비슷한 시기에 생겼는데도 부유해지고 번창하며, 어떤 마을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처음 그 터에 집을 짓고 들어선 가구(家口)가 길(吉)한 방법으로 짓고, 두번째 세번째로 들어건 집들이 그 상서(祥瑞)로운 방법을 따라 들어서면 부락 전체가 번영하며, 그렇지 못한 마을(처음 들어선 집이 좋지 못한 방식으로 자리하고, 이후의 집들도 줄줄이 따라함)은 가난해질수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래서 첫 주자가 어떤 모범을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아파트 풍수이며 p40 이하에 자세하게, 사진과 조감도와 함께 설명됩니다. "추위를 이겨내는 펭귄 무리처럼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는 형세, 동(棟)들이 배산(背山)하고 좌청룡우백호를 이루며, 용맥(龍脈)이 배산까지 하면 최고로 친다." 아파트가 좌청룡우백호의 형세를 이루는 전형적인 모습은 p18에 사진으로 설명됩니다. 책 중에 안산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는데, 이때의 안산은 경기도의 지명이 아니고 집터의 맞은편에 자리한 산을 가리키며 한자로는 책상 안(案) 자를 씁니다. 책 곳곳에서 안산의 예가 사진, 그림으로 설명되므로 읽다 보면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p41에 나오는 도곡동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였던 타워팰리스가 소재하는 행정동인데, 책에서 설명하는 아파트는 거기가 아니라 도곡렉슬이며, 만약 배산이 안 된 자리라고 해도 뒤에 다른 동(棟)이 배산 노릇을 해 주면 그걸로 대신할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 도곡렉슬에서는 411, 412, 304~306동이 풍수지리상 길(吉)한 동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쩌다 저 동네 근처만 가면 맨날 길을 잃어버려서 아파트 지도를 보고서야 제자리로 간신히 돌아오곤 했는데, 다음에 갈 기회가 있으면 동의 형세를 꼭 꼼꼼하게 살피고 저자의 설명을 더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p64에는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소재 써니밸리가 나옵니다. 저도 제가 실제 한 번이라도 가 본 아파트 중심으로 살펴 보게 되던데,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실제 아파트 사례를 위성지도와 함께 소개하며 구체적으로 뭐가 명당이라는 건지 독자가 눈으로 보고 바로 판단할 수 있게 돕는다는 점입니다. 여기 지곡동의 해당 아파트, 또 청덕동 휴먼시아가 좌청룡 우백호의 기운을 제대로 받아야 할 사업가, 공직자에게 유리한 입지라고도 합니다. 꼭 아파트가 아니라도, 예로부터 좌청룡우백호의 기운이 제대로 살아 있는 입지가 많은 고장이 경북 문경이라고들 했는데, p96을 보면 문경시 산북면, 호계면 등이 그 예로 소개됩니다.

길지(吉地)가 꼭 현재 잘사는 동네에만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기존 풍수지리서를 보면, 꼭 이미 잘사는 동네들만을 예시하여 결과론으로 다 커버하는 듯해서 아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렇지 않고, 꼭 현재의 부촌이 아니라도 풍수상으로 좋은 동네라면 꼼꼼하게 소개를 해 주는 점이 좋았습니다. 예를 들면 p119의 부산 기장읍 교리, 북구 만덕동, 사하구 신평동, 해운대 반송동 등의 예들이 그랬습니다.

이 책에서 또하나 제가 재미있게 본 포인트는 학교풍수였습니다. 애를 좋은 학교에 보내야 교육상으로도 좋고 뭔가 길한 기운도 받아올 것 같은데, 책 p167 이하에서는 전국 곳곳을 돌며 어떤 학교가 풍수상으로 좋은지 구체적으로, 학교 이름을 강조해가며 설명합니다. p257 이하에서는 전국의 명사찰들이 소개되는데, 사찰만큼 풍수상의 입지가 중요한 시설도 없다고 하죠. p29를 보면 "잘되고 부자 된 집은 함부로 팔지 말라"는 권고도 있는데,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이 참조하면 좋을 듯한 여러 흥미로운 가르침이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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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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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은 정정(政情)이 불안하여 비상조치, 긴급조치, 갑호을호 비상령 등 공권력이 동원되지 않는 날이 드물었을 정도였습니다. "설마 KCIA로 연행되는 건 아니겠지요?" 여기서 KCIA란 한국의 중앙정보를 가리키는 말인데, 5공 들어서 안기부로 이름이 바뀌고 싹 사라졌지만 미국의 CIA를 본떠 붙인 약칭이었습니다. 정권의 보위를 첫째 사명으로 삼던 기관의 장이 정작 대통령의 가슴을 총으로 쏘고 정권을 무너뜨렸으니 이만한 아이러니가 없겠는데, 일본에서는 자신들처럼 정치가 안정된 나라에서 한국 같은 곳을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낀 듯합니다. 이 저자처럼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낀 이들도 있었는데, 타자의 시선으로 기록한 당대 한국의 착잡한 현실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 p101을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발간된 잡지 <綠旗>가 언급됩니다. 한자 표기가 없기 때문에 제 리뷰를 좀 참조할 필요도 있겠네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을 보면 이 "녹기"라는 잡지가 자주 언급되며, 한반도에서 내선일체라든가 대동아전쟁(언필칭)의 당위성을 설파하던 인사들의 주장이 날것으로 담긴 저널이었으며, 주간이 모리타 요시오[森田 芳夫]였습니다. 이름은 예쁘지만(?) 그 하는 행동은 전혀 예쁘지 않았던 인물. 1970년대 강남의 깔끔한 신축 아파트에 여전히 거처를 마련하고 우유자적했다는 저자의 진술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다들 들겠습니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 들어서야 저작권 협약에 가입했으며 그전에는 책, 음반 등이 해적판으로 번역되거나 불법 복제되어 거리에 돌아다녔습니다. p63에서 저자가 회상하는 서울의 거리는 그야말로 요지경입니다. "도로는 넓어지다가 좁아지다가 하며..." 곳곳을 불법 점거하는 노점상이 좌판을 벌였으니 당연합니다. 불법 하꼬방도 짓고 장사를 태연히 합니다. 그걸 누구한테 팔아먹는 뻔뻔한 인간도 있습니다. 강남이 주거지로 각광받는 건 처음부터 계획 시가지였기에 보행이나 차량 통행 편의의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p111을 보면 한국의 잡지에 대한 저자의 총평이 나옵니다. 저도 책프에서 예전 한국 잡지를 리뷰해 왔기 때문에 이런 저자의 기술(記術)이 매우 반갑게 읽힙니다. 잠깐 인용해 보자면 "주간조선, 월간조선의 레이아웃은 주간아사이의 영향을 받았고, 선데이서울은 선데이마이니치를 모델로 삼았다. 한국문학은 분게이슌주를, 여성자신은 죠세이지신을 모방했다"라고 합니다. 뭐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저 여성자신이라는 잡지는 제목마저도 일본의 그것과 같습니다. 여성자신은 주부생활사라는 회사에서 발간했는데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삼아 꽤 오랫동안 나왔었습니다. 여튼 당시에는 정보에 목마른 독자들의 갈증을 꽤나 잘 해소해 주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 문화를 말로는 금기시한다면서 패션이나 건축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의 그것을 따라했다는 저자의 지적을 보며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책 후반부에는 하길종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옵니다. 하 감독이야 일찍 타계했으니 저자의 직접 회고가 될 수는 없고, 그 부인인 전채린씨에 대한 회고도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p243을 보면 전채린이 번역한 모리아크의 <Thérèse Desqueyroux>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무렵에는 프랑수아 모리악이 꽤 인기 있던 작가이긴 했었습니다. p190을 보면 "큰 문어"와 함께 다니던 중 기생관광에 대한 언급이 있어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1960년대 일본과 외교관계가 정상화되며 이 기생관광으로 벌어들인 돈도 무시못할 액수였겠습니다. 이처럼 고도성장기의 그늘에는 끔찍하고 개탄스러운 사정이 많았고 그래서 친일청산이 미진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은 거겠죠. p273을 보면 Terence Rattigan의 <Deep Blue Sea>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무대 공연 끝에 "이 공연을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바칩니다!"라고 외치는 후쿠다 쓰네아리의 외침은 처절한 반어로, 혹은 검열과 탄압의 총구 앞에서 지르는 필사적인 생존 비명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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