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신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20년간의 처절한 삶의 기록
설운영 지음 / 센세이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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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조현병"이란 말을 씁니다만 예전에는 "정신분열증"이란 말을 사용했었죠. 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일조하기 위해 가능하면 순화된 용어를 쓰는 게 중요하긴 합니다만 사실 조현병이란 말은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형태소를 분석해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튼 어떤 사람에게건 그 식구가 몸이 아프다는 건 참 견딜 수 없는 비극입니다. 이런 비극은 또 참 갑작스럽게 닥칩니다. 몸이 아픈 것도 돌보기가 어려운데 마음이 아프다면, 또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가 있다면 정말로 당사자와 가족이 힘 듭니다.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던 그 병은 도둑처럼 스며들었다(p31)." "아이는 얼굴이 백설같이 희고 인형같이 예뻤다(p35)." "투정하는 둘째 아이와는 달리 늘 양보하고 배려 있고 잘 웃는 아이였다(같은 페이지)." 이런 아드님을 슬하에 첫 자녀로 둔 부모는 참으로 복 받은 분들입니다. 아기들이라고 다 순하고 영리한 게 아니라, 속 썩이고 말 안 듣고 정신 없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여튼 이랬던 아이가,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온 조현병"에 의해 영혼을 도둑맞았다면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보통 가정 같으면 이런 크나큰 시련을 맞고 머지않아 풍비박산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 이런저런 사고를 친다 등등 해서 얼마나 속을 썩고 아픔을 겪습니까만 이만큼이나 큰 시련을 겪는 부모 입장이라면 감히 상상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저는 난치병에 걸린 아들을 치료하는 부모의 이야기인 <로렌조 오일>이란 영화를 본 적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저자께서는 대체 조현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연구를 하신 결과 세로토닌, 도파민 등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아 생기는 병이라는 점을 배우셨다고 나옵니다. 후.... 따지고 보면 그 복잡한 인체에서 특정 호르몬, 물질 분비, 대사가 자칫 조금만 지장이 생겨도 이런 몹쓸 병이 찾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말라키아 수도사가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이야말로 기적 중에 기적이로다." 라고 되니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 몸의 장기, 체액 등이 그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곳에 제대로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부모님 입장에서는, 평소에 이상 행동을 하고 셩격이 드세고 자기 욕심만 부리고 하던 애가 병을 일으켰다 해도 아 성격이 그러니 이런 병도 자기 스트레스를 못 이겨 걸리는구나 하며 뭔가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실제로 제 주위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나 얌전하고 착한 아들이 정말 느닷없이 마음이 아픈 병으로 고생을 하니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참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네요.

"아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날밤 아내는 밤새 꺼이꺼이 울었다.(p40)" 이 문장은 어느 교회를 찾아가서 목사님과 상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대목 바로 뒤에 나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그저 교회의 영업만을 계산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이들도 많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런 목사님을 만나셨다는 사실 자체도 어찌 보면 행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이런 남의 고통과 불행을 두고 은근히 즐기는, 남의 말 하기 좋아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상상도 못할 저질의 인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부분은 남이 자신을 공감 능력 가득한 사람으로 봐 주기를 원하는 가공할 위선자들이죠. 그런 사람도 자기 자신의 고생, 억울함을 이야기할 때는 닭똥 같은 눈물을 짐짓 연극적으로 떨구면서 자기만의 감상과 도취감에 빠져듭니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서 비교적 먼 거리에 있다면 그 역시 행운이라면 행운입니다.

위에서 제가 "조현병은 (그런 용어를 도입한 사회공리적 목적이 무엇이고 얼마나 크건 무관하게) 말이 너무 어렵다"고 했는데 이 책 p72에 보면 그 용어 개정의 취지가 설명됩니다. "조율되지 않은 현악기처럼 정신의 음색이 고르지 않다"는 뜻이라고 저자는 설명하시는데 그 뒤에 또 추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총체적으로 망가져서 도덕감과 윤리의식까지 마비된 비인간적인 사람"을 연상시키는 게 구 용어 "정신분열증"이었다고 합니다. 정작 이런 사람은 따로 있고, 단지 특정 호르몬 분비가 원활하지 않을 뿐 남에게 해를 전혀 안 끼치는 사람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모순된 현실이죠. 사실 한국에는 별반 지식과 소양도 없으면서 자칭 의학 전문가 행세를 하며 가당치도 않은 우월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신분열증"이란 말은, 의사도 아니면서 의사 흉내를 내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단죄하는 어설픈 사이비 전문가들에게나 불어야 할 병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장애인을 두고 비교적 최근에 "챌린지드 맨"이란 용어를 씁니다(p98). 그 이전의 디스에이블드나, 핸디캡트 같은 말이 좋지 않은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이죠. 이 "챌린지"라는 말은 물론 우리가 다 알고 있듯 "도전"이라는 뜻입니다. 남들이 운 좋게 피해간 시련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고, 그 도전을 현재 이겨 내는 중인 사람이라는 뜻이니 참으로 적절합니다. 사람들이 참 자기 일에나 온전히 신경 쓰면 될 텐데 구태여 "저 집에는 아이가 왜 집에만 있냐"며 이상한 시선을 보내기도 하죠. 그래서 저자님과 그의 가족들도 이사를 갔고, 아드님의 체형을 보다 멋지게 만들기 위해 보디빌딩을 시작했는데 이게 효과가 좋더랍니다. 역시 마음이 우울할 때 이를 다잡고 극복하는 방법 중 운동만 한 게 또 없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시련은 사실 한두번 강한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극복이 되는 게 아니죠. 아이 역시 쪽지를 남기며 "교회 위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한 적이 있으며 저자님과 그 아내분 역시 같이 세상을 떠야겠다는 마음을 품은 게 여러 번이라고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후 나같으면 벌써 세상을 떴을지도 모른다고 쉽게 말하곤 하는데, 이런 말이 그만큼 저분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뜻으로 자기 딴에는 합리화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역시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의도가 다분한 언사입니다. 그런 말 쉽게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가장 지독한 천벌이 머리에 떨어지길 바랍니다.

"회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회복이 있다. 회복은 인간(人間)에게 있었다." 이 말은 p125에 나오는데 역시 "인간"이란 한자어의 중의성을 되씹게 해 주는 문장입니다. "인간"의 첫째 의미는 개별적인 사람을 뜻하는데, 그게 알고 보니 "사람(의) 사이"였다는 게 놀랍죠.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이기에, 역시 사람의 병도 상처도 사람 사이에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닐지...

저자는 예전에 어떤 50대 아주머니가 20대 아들을 파출소(당시 용어이겠습니다)에 데리고 오면서 "증세가 너무 심해서 집에 데리고 있지 못하겠다"며 하소연하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청년은 당시 해맑게 웃으면서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는데, 그때 저자는 "왜 정신병은, 똑똑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가?"하고 의문을 가지셨다는군요. 그런데 사실 운동 많이 하는 사람이 다치기도 자주 하듯, 정신을 많이 쓰는 사람이 정신에 타격을 받기도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이 업보처럼 이겨내야 할 도전인데, 간혹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사이코패스처럼 남을 이용만 하며 살살 빠져나가는 근성이 몸에 밴 것도 본 적 있습니다. 물론 멍청한 인간도 그것도 머리랍시고 그 나름 머리를 써 가며 온갖 못된 짓을 하며 못된 인성을 증명하는 것도 부지기수로 봅니다. 인생은 참 이래서도 어렵고 저래서도 어렵습니다.

"한 번도 정신이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돌을 던져라(p155)." 그런데 애초에 정신이 한 번도 안 아파 본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 감사하며 절대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이 뭔가 정신에 단단히 결함이 있기에 easy victim을 찾아서 막 목소리를 높이는 거죠. 우리 나라에는 이렇게 좀 근본적으로 정신이 비뚤어지고 남 탓을 습관적으로 하면서 매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말은 이런 사람들한테나 갖다 붙여야 마땅한데도 말이죠. 한국처럼 나쁜 환경에서 소중한 자녀를 온갖 불리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함께하시는 용감한 부모님들께 박수를 보내며, 병 자체보다 남 일에 주제넘게 끼어들며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인간들 때문에 더 힘들어하실 가족들께 저부터라도 대신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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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고 발칙하게
원진주 지음 / 미래와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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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송이건 간에 프로그램 말미에는 그 방송 제작에 기여한 이들의 이름이 죽 나옵니다. 이를 두고 크레딧 롤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우리 시청자들 중 이런 명단을 유심히 지켜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 같습니다. 때로는 별스러운 마음이 들어 눈여겨 챙기려고 해도(?) 하도 빨리 지나가는 통에, 이 롤을 꾸민 분도 역시 방송국 직원이실 텐데 너무 성의 없는, 혹은 너무 수줍거나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저자는 방송국 구성작가라고 하시네요. 구성작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이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이 직종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방송국 일은 참 편하지 않을까, 선망하던 연예인 얼굴도 실컷 구경하고 정말 재미있는 직업이겠다 착각하던 분들은 이 저자분의 표현 한 단어에 아마 흠칫 놀랄 수도 있겠습니다. "정글." 방송국은 정글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한국 사회가 짧은 시간 안에 엄청 풍요로워졌습니다만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지금 간신히 지켜 온 자리를 유지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또, 영위하고 있는 직업도 갈수록 더 창의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요구하기에 어떤 노련미로 승부하는 것도 점점 더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 갑니다. 어떤 직장이라도 마찬가지이며, 일도 일이지만 사람 상대하는 일도 정말 피곤합니다. 일보다 사람하고 부대끼는 과정이 더 피곤하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숙직실에서 잔다, 과거에는 사실 직급이 높아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지금은 이른바 워라밸이라고 해서 야근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조입니다. 야근을 당연히 여기는 직장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닙니다. p30에는 저자가 숙직실에서 잘 때, 어느 PD와 겪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저자분이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작가분의 고충도 고충이겠으나, 이런 작가분과 일하는 PD분의 입장도 장난 아니겠다 싶은 게 독자로서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교사 일도 그렇고 사실 우리 나라 직장은 메인 업무, 보조 업무, 원칙적으로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업무가 뒤섞여 어떤 선이 참으로 불분명하다는 게 아주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p20에는 이 "구성작가"라는 일이, 메인 업무 말고도 자잘하게 챙겨야 할 일이 아주 많으며, 잘 살펴 보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이런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네요. "작가가 아니라 '잡가'다.(p21)" "출연진의 아침 기상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면?(p23)" 혹은 그날 비가 오기라도 한다면? 일정은 모두 취소되며 이런 일까지 일일이 체크하는 게 구성작가의 일 중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작가가 되었나?" 그런데 사실 어지간히 일류직장이 아니고서야 한국에서 이런 잡무를 거부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비교할 대상이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택배 기사 화물 분류 문제도 현장에서 당연시되던 게 지나치게 과중해서 살고 죽는 이슈로까지 번지니까 이번에 저렇게 해결되었다고 하죠.

일을 하다 보면 고소장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ㅎㅎ 한국이야 워낙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나라이니 이 정도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죠. 그런데 이 책 저자분이 받은 고소장은 그런 게 아니라 말하자면 고용자 측에서 날아온 것입니다. 시청률 저하 때문에 해고가 되었는데(그러니까, 날아온 건 해고장[?]이 먼저였던...), 저자분을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이 단합하여 투쟁한 결과 해결이 되었고 단 사측에서 이 사실 자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 걸 종용했으나 외부에 결국 누출이 되었고, 이걸 놓고 "명예훼손"으로 다시 고소장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사태까지 잘 해결하고 "우리 작가들도 칼 한 번 뽑으면 제대로 썬다"고 하시는데 본래 약자들도 힘을 합치면 무서운 법이기는 하죠.

요즘 부쩍 "아픈 손가락"이란 말이 자주 들리던데 저도 얼마 전에 설거지 하다가 계란 껍질에 오른손 엄지 손톱 밑을 찔려서 고생좀 했습니다. 물론 그런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고, 저자는 자신에게 아픈 손가락이 "엄마"라고 하시네요. 아마 어렸을 때 이혼을 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낳아 주신 분을 아픈 손가락이라 부른다는 건, 아마 뒤에 참 아픈 사연이 깔려 있지 않을까 짐작이 되는데 학창 시절을 참 힘들게 보내셨다고 뒤에 나옵니다. 역시 이 책 작가님의 남다른 근성, 끈기, 의지 같은 게 그런 시련이 다 자양분이 되었던 게 아닌가 짐작하지만, 일이 잘 되고 난 후이거나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후라야 남들한테 그런 속 편한 소리도 나오기 마련이죠.

자연인은 MBN에서 론칭한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이 히트를 치자 경쟁 종편, 또 지상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포멧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p179에는 어느 자연인(?) 할머니를 섭외해야 하는데 이장님한테까지 전화를 했건만 끝까지 실패했다고 하시네요. 그러다가 피붓과 전문의를 통해 간신히 통화에 성공했는데... 사실 사회 생활 하다보면 의외의 인맥이 있어서 내가 못 해 낼 일에 도움을 주곤 합니다. 인맥이라는 게 그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젊고 패기넘치는 저자의 좌충우돌 도전기 같지만 방송 관계 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에는 학교에서 학과 문제 풀듯이 어떤 정해진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즉흥적으로 임기응변으로 닥치는 대로 해 내야 합니다. 이렇게 비포장도로에서 어찌하건 간에 목적지까지 운전해 내는 게 사회생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으로 일에 임해야, 조직에서 욕 안 먹고 자리를 지켜 내며 마침내 나만의 보람도 뿌듯하게 찾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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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내려놓기 연습
최경선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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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일상에서, 혹은 직장에서 피곤하게 만드는 건 그 대부분이 사소한 감정 싸움에서 기인합니다. 정작 물질적 이해관계에서 유발되는 갈등은 이에 비하면 오히려 쿨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 싶을 만큼입니다. 이런 갈등 구조는 아마 사회에 따라 제각각인 모습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라면 감정만 어떻게 스스로 잘 다스리고, 혹은 서로가 타인의 그것을 (순전히 전략적 이유에서라도) 배려해 준다면 괜한 역량이나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도리어 큰소리를 치며 상대방을 비난하는 유형(p72)이 우리 주변에도 보면 꼭 있습니다.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도 보면 바람 핀 남편(아내)이 잘못을 추궁하는 상대방에게 오히려 화를 내며 사람을 그리 못 믿냐고 역으로 따집니다. 이걸 두고 무슨 영리한(아주 못된) 전수로 보기보다, 자기도 미안해서 저러는 거 아니겠냐고 이해를 하라는 훈수, 충고도 간혹 보이는데 이 역시 한국에서만 발견되곤 하는 이상한 반응 양식일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누구나 자기 방어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게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냐"며 역으로 상대방에게 일종의 어리광을 부리는 심리라는 쪽으로도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바람직하지 않으며, 책에서 권하는 진짜 처방은 "본인의 따스한 감정을 부인하지 말고 인정하라. 상대를 비난하면 그 상대 역시 당신을 비난하기 위해 속으로 칼을 갈며, 이래서는 문제가 해결되질 않는다."입니다. 또 어떤 상황에 대해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이 나오는 자체가, 우리들이 과거의 어떤 체험 때문에 감정에 부정적인 꼬리표가 달려서인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때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나의 인간적이고 따스한 감정이 제 출구를 찾아 나오게 돕자는 겁니다. 그럼 과거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된다는 거죠.

솔직히 타인과 어떤 갈등을 빚을 때는 누구나 살벌해집니다. 이때 인간적이거나 어떤 "따스한" 마음을 먹으면 그게 악질의 상대방을 만났을 때는 다 약점으로 전이됩니다. 악질 역시도 핑계를 대며 "당신이 나에게 나쁘게 할 줄 알고 나도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한테도 나의 따스한 감정과 인간적 양심을 노출하며 자연스럽게 대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 책 저자께서 "자연스러운 감정을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게 나 자신을 위한 힐링"이라는 취지로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고 싶네요.

"화 내는 습관은 병이다. 습관은 힘이 아주 강하여 한 개인을 성공으로도, 혹은 파멸로도 이끌 수 있다(p51)." 저자는 전철 안 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이 역시 습관"이라 말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직장 혹은 학교로 향하며 이후에 전개될 일정 때문에 압박감이나 스트레스를 느껴 그러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이며, 관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 어차피 이런저런 접촉에서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화를 내고 벌컥 감정부터 폭발시키는 어떤 "버릇"을 내 몸에서 마음에서 잘라내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직장 동료, 시댁 어른들, 혹은 자신의 부모와 빚는 여러 갈등들도 차마 못 치를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 속으로 낳은 자녀가 이제 머리가 굵고 자신만의 의견, 철학을 가졌을 때 나와 빚게 되는 갈등, 이거 역시 정말 못 할 짓입니다. 도대체 얘가 왜 내 말을 이렇게 안 들을까? 누구 자식인데 이처럼이나 부모 말을 거스를까? 다른 경우와는 달리 자녀는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기만 하는 상대이기에 갈등의 타격이 몇 배는 더합니다. 이때에는, 혹시 내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느꼈던 서운함과 상처, 미움 등을, 이번에는 내가 나의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건 아닌지 먼저 돌이켜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보고 몇날 밤을 우셨다고 하는데 저도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한편으로, 대개 부모님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므로 자녀들도 그저 자기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역지사지한 후 무슨 말을 해도 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혹 돌아가시고 나면 무엇보다 후회감과 자책 때문에 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 이는 부모님이라기보다 오히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에, 공적인 부분에 감정을 대입(이입)하는 걸 그리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감정이 없으면 일에 열정이 안 실리는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업무 하나하나에 감정을 넣는 사람이 일처리에서 잔실수도 잘 안 합니다. 그런데 특히 p143에서 저자는 "어떤 결정권을 가진 자가, 기회만 오면 사사로운 감정을 대입하며 모든 조직을 혼돈에 빠뜨리는 경우"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거는 사실 조직 부적응자의 파탄적 행태인데, 공과 사가 전혀 구분 안 되며 자신의 능력이나 적성을 전혀 객관화하지 못한 채 오로지 자신의 감정적 상처 보호, 주관적 자부심 고양 등만을 최우선 순위로 놓는 미숙한 사람의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럴 때 "거절은 똑부러지게 그 사람의 눈을 보고 하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는 부정한 청탁에 절대 간여하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과거에는 이런 일에 안 엮이기 어려웠으나, 사회 분위기가 어지간히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요즘은 개인이 결단 내리기가 보다 용이한 분위기입니다.

저자는 책 여러 군데에서 "잘못된 습관"을 고칠 것을 주문합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돠풀이하는 많은 행태들은 꼭 그럴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 행태들을 반복하는 게 몸에 익어서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습관 중 쓸데없이 감정을 소비허거나, 화풀이 등으로 불건전하고 비건설적인 쾌감만 일시적으로 얻는 게 많다면? 우리의 성과나 성취는 날이 갈수록 퇴보하고 내 마음과 정력은 회복 불능으로 손상될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보다 성숙히 관리하고 무익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게 "창의력"을 향상시키는 데에까지 도움이 되리라고 합니다.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창의적이기까지 하다는 제안, 우리 모두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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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 쇼퍼 - 읽고 싶어지는 한 줄의 비밀
박용삼 지음 / 원앤원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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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여러 복잡한 사정과 정보가 얽혀 돌아가기에 무엇이 곁가지이고 무엇이 본질인지 외부인이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저널리스트들이 뽑는 헤드라인들과 기사들은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사건의 핵심"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게 소명이며, 우리들도 혹시 직장에서 문서 작업 같은 걸 할 때 요령 있는 글쓰기가 필요하다면, 이런 기술이랄까 노하우를 익혀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일리지는 몹시 이중적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항공사들은 그 소멸시효가 길게 잡히지만 대신 쓸 수 있는 경우가 제한되어 있다는 건 단점으로 꼽힙니다. 저자는 "통신사 마일리지는 씹힐 일 없고, 빵집 마일리지는 터질 일 없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p108). 남성들은 대개 주유소 마일리지에 "목숨 걸고" 요즘처럼 외식, 숙박 쿠폰을 정부에서 나눠 주는 시기에는 실적 채우려고 별 긴요할 것도 없는 소비를 하는데 뭐 다 이런 행태를 노리고서 각종 이벤트들이 애초에 고안된 것이겠습니다. 책에 인용된 예문은 재작년 어느날 한겨레 기사인데, 일반 시민 입장에서 가장 큰 불편을 느낄 만한 포인트를 잘 짚어 우리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게 쓰인 듯합니다.

"박싱데이"는 성탄절 다음날 이웃들과 이런저런 나눔을 위한 "박싱"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 기사(중앙일보)에서 다뤄지는 손흥민의 약간 부진한 활약상은 "손이 묶인" 것으로 표현(p61)되는데 물론 우리 한국인들에게만 잘 통할 듯한 동음이의 말장난입니다. 저자는 언제부터 토트넘이 우리 국민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지명이 되었는지를 살짝 짚는데 해당 기사뿐 아니라 그 더 넓은 배경 사정을 두루 짚으면 더 입체적인 독해가 될 듯도 합니다.

농경 산업 위주의 경제 체제에서 사람들은 대개 토지에 결박된 생활 방식을 영유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농노"라는 계급이 있었고, 근세 이후의 조선에서도 법제상으로는 자유로웠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토지를 떠난 생활이 불가능한 빈농들이 많았으며 외거 노비 등은 아예 법적으로도 종속된 신분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제약이 결국 한계 상황에 달한 농민들을 "화전민"으로 내몰았는데, 2019년 7월 10일의 중앙일보 기사(p42)는 일자리를 아마도 곧 잃게 될 택시기사 등에 대해 이런 우려와 동정의 시선을 보냅니다. 화전민은 비록 준 도망자의 신분이지만 척박하나마 일궈 먹고 살 산지라는 땅이 있었는데, 일자리를 완전히 잃은 택시기사는 그나마 갈 곳이 없겠죠.

책에서는 적기 조례의 예를 들며 규제 때문에 혁신이 막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만 어느 분의 말마따나 "사람이 먼저"이지 않을까요? 또 영국 자동차 산업은 반드시 "적기 조례"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닌데 요즘 미디어에서 역사를 너무 단순화하여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도 합니다. 기술이 발달하면 그에 걸맞게 일자리가 새로 창출되겠지만, 이는 대부분 젊은 세대의 몫일 뿐 "현대판 화전민"일 택시 기사 등을 위해서는 아마 합당한 대체 일자리 등이 마련되기 힘들 겁니다. 물론 과학기술의 진보 자체는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요. 여튼 이런 논의는 기계적인 논리에 따르거나, 근거 없는 막연한 낙관론에 기댈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나가는 상가의 이런저런 코너에는 "권리금"이란 게 붙는데 일종의 영업권 거래입니다. 약사를 어느 점포에 입점시키고 싶을 때 "이 건물 4~5층을 세브란스 출신의 의사가 통으로 임차했다"고 한 뒤, 배우인지 의사인지 모를 어떤 이가 안심시키러 등장도 합니다(p30의 한겨레 기사). 이 모든 진행이 권리금 사기를 위한 쇼였는데 이런 장르의 영화를 케이퍼 무비라고도 하죠. 영화에선 악당을 속이기 위해 완벽한 세팅을 해 두고 수없이 많은 조단역들이 바람을 잡는 과정이 통쾌하게 전개되지만, 현실에서 이런 사기에 속아나는 건 힘 없는 서민들입니다. "의적 사기꾼"은 그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능할 뿐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어느 영화의 명대사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우리 사회의 몰상식한 부분을 날카롭게 꼬집었기에 많은 이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었습니다. 책 p216의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재난지원금 "기부"에 얽힌 이런저런 논란과 함께 저 "명대사"를 엮었는데, 왜 일방의 호의가 (달갑지 않은) 타인의 권리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저자의 느낌이 재미있게 적혔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젊고 잘생겼으며 스마트한 엘리트 출신으로 프랑스판 제3의 길을 선언하여 한때 국민적 기대를 모았습니다만 현재는 꽤 고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만약 양극화 이슈가 거리 시위로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촉발된다면 청담동의 일부 샵 등이 타겟이 될까요? 시위가 꽤나 빈발하던 한국의 현대사였으나 여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국민의식 수준이 프랑스보다 높다는 방증도 되고, 계급, 계층 구조가 프랑스의 그것과는 달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푸케는 프랑스 역사에서 아주 유명했던 어느 군주의 재무장관 이름이기도 하죠. 노란조끼 시위대는 자신들의 명분에 스스로 먹칠을 했다(p242)는 게 저자의 총평입니다.

한국형 뉴딜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그저께에도 문 대통령이 전남 신안을 방문해 대규모 풍력 단지 조성을 약속했는데 이런 최고권력자의 행보가 이뤄지고 뉴스를 타면 해당 종목들의 가격이 증시에서 거의 반드시 들썩거립니다. 경제 정책이란, 참여자들의 어떤 의욕을 북돋우고 심리만 진작시킨다 해도 그 나름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만 심리적 들뜸만으로 실물이 생산되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사장의 시선이 피운 꽃은 생화인가 조화인가(p280)" 역시 경제에는 펀더멘털이 중요함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신문을 읽을 때에는 일단 표면적으로 제시된 팩트와 정보도 요령 있게 추려야겠으나 그 행간도 빠지지 않고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또 이 책 저자가 보여 주는 모범처럼 독자로서 나만의 생각이나 상념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어떤 정신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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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
이명찬 지음 / 서울셀렉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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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국과 일본의 위상이 역전되고, 오히려 한국에 선진국적 요소랄까 배울 점이 더 늘어나며, 반대로 일본은 침체한 사회 분위기에 발전과 혁신의 요소가 더 줄어들었다는 지적이 부쩍 늘어난 걸 감지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소위 "국뽕"의 위험이 있다고도 하지만, 명백한 팩트상으로 우리가 앞지른 건 그것대로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현황을 분명히 체크해야, 반대로 여전히 뒤처진 부분이 어느 지점이며 어떻게 해야 마저 역전이 가능할지 대책을 더 명확히 마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행어가 한 사회와 시대를 관통할 때는, 그게 그저 변덕스러운 유행의 결과만은 아니고 분명히 어떤 시대정신 같은 걸 대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네 분수를 알아!"라는 핀잔이 자주 들린다고 하는데(p88), 물론 자신의 한계와 역량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연한 흰소리나 허풍을 떨지 않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남 보기도 싫고, 무엇보다 실상의 자신보다 부풀려 말하는 게 습관이 되면 참된 자존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체면을 사리기 위해 거짓말을 떠들고 다녀도, 진짜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본인은 적어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수를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의 다짐이 아니라, 남을 핀잔주기 위해 "분수를 알 것!"을 외치는 게 사회적 습관이 되었다면? 이는 그만큼 "분수를 모르다가 큰코 다친 일"이 잦았다는 뜻도 됩니다. 사회의 활기가 줄어들고, 진행하던 일이 잘 안 풀리고, 사업이 실패하며, 혁신의 기풍이 드물어지면 그런 결과가 나오겠죠. 반대로 30~40년 전 일본 사회에 돈이 잘 돌고 해외에 수출이 원활하여 국부의 증진이 쉬웠던 시기에는 아무도 타인에 대고 "네 분수를 알라!"고 쉽게 소리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분수 같은 것 걱정 않고 의욕 있게 자신의 일만 추진해도 성공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거죠.

한국은 어떨까요? 일본에 비해 아직은 에너지가 넘치고 자기 일에 몰입하며 땀흘리고 신명을 바치는 분위기가 더 우세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갑질"이 많고, 남의 의욕을 꺾는 모욕적 언사가 어디에나 팽배한 건 (모르긴 해도) 일본에 못지 않은 듯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자신들 사회의 분위기를 두고 "국운이 쇠퇴해서"라고 하는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지금은 국운이 융성하고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라 만족하던 때가 있었나요?

1980년대가 살기 좋았고 금리도 높아서 목돈 만들기 쉬웠으며 웬만해선 사업이 망하지 않았다고들 회고하지만 각종 시위가 그토록 빈발하고 범죄율도 높았던 걸 보면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는 (민주화 이슈를 제외하고서라도)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렇다고 지금을 모두가 행복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겪은 중 최악이라며 불평하는 이들도 매우 많습니다. 이런 건 일본과 같은 잣대를 대어 비교 분석할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 "일본인들의 입으로 털어놓는" 심각한 침체에 대한 여러 발언은 한국인 독자 입장에서 매우 흥미로우며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듯합니다.

"일본은 우경화되었고, 한국은 민주화되었다(p96)." 우경화와 민주화가 단일한 평면에서 비교될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의 우경화는 이미 1980년대 혹은 그 이전 미키마 유시오의 자살 때부터 부각이 되었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신사 참배나 교과서 왜곡 사태가 기점이었고 유시민의 책 초판에도 따로 한 챕터를 통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경화는 그를 넘어, 한국에 대한증오가 중심이 된 "혐한" 풍조가 또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그 전만 해도 점잖은 사람들은 설령 우파라고 해도 노골적인 감정 표현을 자제했었으니 말입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환상의 호흡(?)을 이룬 각료 중에 고노 외무 장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노 요헤이의 아들이며, 고노 요헤이는 일본의 책임을 일정 부분 인정한 고노 담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그 부친과 아들의 정치적 성향이 참 대조를 이룬 셈인데 이는 아베 신조의 부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베 신타로 씨는 온화한 인상에 대체로, 혹은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책에서는 "세대 교체와 더불어 진행된 우경화"의 한 상징으로 파악하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독자로서 가장 가슴 아프게 읽은 대목은, "일본인들이 지금은 저 고노 담화를 일종의 실수로 간주한다(p99)"는 문장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과가 실수"라고 강변하는 저들의 태도는 참으로 비양심적이고 유치한 작태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일본 일각에서 일고 있었던 온건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들과 협력을 강화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와 협력을 이끌어낼 생각보다는, 그저 우리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비둘기파가 자생할 틈을 오히려 좁힌 게 아닌가 싶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사과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어야지, 강요해서 받아낸 사과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왜 사과를 해야하는지 더 치밀하고 차분하게 팩트 위주로 접근할 필요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이미 이성적이고 관용적으로 상대를 대하자는 분위기는 양국 모두에서 물 건너간 듯합니다. 우리가 엄연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을 제외한 국제사회에서 보다 호의적인 여론을 못 끌어낸 것도 문제입니다. "일본의 금권력, 로비실력"이 광범위하다는 예도 드는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는 작년 이맘때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한국의 네티즌들을 포함해 모두의 여론이 대체로 한심하다는 쪽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일본에서는 과학이, 정치와 관료에 묻혀 버렸다"고 요약하는데 이 말이야말로 왜 일본이 민간 레벨에서의 투명성과 정의감, 활력 등이 부족한 채 갈수록 죽은 사회가 되어가는지 잘 요약하여 보여 주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관존민비"란 말이 있었는데 비단 한국사회의 문제만은 아니고 동아시아 3국이 고루 지닌 병폐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도리어 관(官)의 권위가 너무 떨어져서 일부 문제인데, 여튼 민간이 공적 섹터를 압도해 나가는 이런 점만큼은 한국이 좋은 모범으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을 분명 앞서가는 대목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한국은 대부분의 문서 작업, 의사 소통, 일상의 결제 등이 전산으로 이뤄지는 반면 일본은 마치 1980년대에 사회가 아직 머무는 양 모든 것이 물리적 페이퍼 위주입니다. 한국은 불과 십 분도 안 되어 "재난지원금"이 카드로 지급되지만, 일본은 본인 확인도 수동으로 거치고 계좌의 확인도 번거롭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결제에 있어 현금 의존율이 높다는 건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한국에서 결제에 현금을 선호하는 건 일부 비 프랜차이즈 점포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건, 한국인들 상당수가 이 점을 인식하고 있고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막연히 우리가 최고라는 식이 아니라, 왜 앞서고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앞으로도 우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고전의 말이 괜히 유효한 게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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