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봄을 믿어야 해요
최대환 지음 / 파람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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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현재 천주교 의정부교구에 소속, 봉직 중이신 최대환 신부님입니다. 언제나 계절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고, 깊은 밤 후 아침이 다시 찾아오듯 사방천지를 환히 밝히며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믿음이 약한 우리들은 혹한 중 과연 신춘을 다시 맞을 수 있을지 불신을 가득 품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봄은 반드시 돌아오며, 봄을 다시 맞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진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기 마련이지요."(p25) 이 구절은 체스터튼이 창조한 캐릭터 브라운 신부의 말이라며 저자 최 신부님이 인용하는데 브라운 신부는 명탐정으로 유명하며 이 외에도 주옥 같은 명언을 여럿 남긴, 추리물 팬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매력덩어리죠. 제가 기억하는 그의 명언은 "당신은 이성을 비난했는데, 그것은 아주 천박한 신학입니다(진지한 성직자라면 결코 이성을 매도하지 않는다는 뜻)."라며 가짜 신부 노릇을 한 대도 플랑보의 정체를 드러내며 한 말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나오는 프로스페로는 위트 있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과거의 아픈 경험 때문에 깊은 원한을 품음직도 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마음에서 우러나온 용서만이 자신의 삶에 참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 현명하게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최 신부님은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에서 "용서야말로 궁극의 해법"이라는 오랜 진리와 결론을 다시 확인합니다. 잘 알려진 주제의식이긴 하나 역시 고전을 읽는 독자가 선제적으로 이런 공감을 지니고 있어야 해당 명대사가 눈에 더 잘 띄일 것입니다.

종교학자들은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라는 구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p20). 사실, 원시 종교와 고등종교라는 명명법을 너무 쉽게 구사하면, 그것은 무속 신앙 종사자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형식적으로는 대형교회나 성당, 사찰 등에 등록되었지만, 영혼과 내세에의 깊은 성찰 없이 그저 현세에서의 기복을 구하는 데 그친다면, 그런 이들은 결코 고등종교 신도라 불릴 자격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해당 종교에서는 "묵상"의 습관화를 강조하곤 하죠. 저자는 이를 두고 "머무름의 체험 기회(p21)"라 부릅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어느 누구라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문다"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찰나의 통과만 일삼는 우리의 행태가 내면에 남기는 흔적이라곤 고작 "공허와 불안, 허무감"일 뿐입니다.

p77에는 베토벤의 서한 몇 구절이 인용됩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여기서 es는 별 뜻 없는 비인칭에 가깝고, 영어로 옮기면 Must it be?이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 그래야만 한다! 대체 베토벤은 무엇이 그래야만 한다고 외치는 걸까요? 그런 음악적 천재의 귀와 눈에 무엇이 보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플라톤이 궁극의 이상을 간파하고 세속의 둔재들에게 "이데아"를 설파했듯, 베토벤도 "그래야만 하는 그 무엇"을 혼자 발견하고는, 약해지는 자신의 의지를 다잡으려 저리 외친 듯도 보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결단이 모여서 다져진 신앙인의 삶 안에서, 주님과의 만남은 필연"이라 정리합니다. 만해 한용운에게 "님"은 불법(佛法)과 조국이었듯, 베토벤에게 있어 "주님"은 음악의 완성과 인생의 진리 터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들 모두도, 각자의 생에서 소중히 간직하고 성취하고 싶은 자신만의 주님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 여부와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유가에서는 "위인지학이 아니라 위기지학"을 강조합니다. 남 보라고 행하는 효행이나 공부, 독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알차게 다지고 가꾸는 수행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p93 이하에서 "단식의 참된 의미"에 대해 논합니다. 마침 요즘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사순 주간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사야 예언자가 단식의 의미를 사회적 차원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외쳤다"면서, 종교에서 강조하는 덕행이나 수련은 결코 개인적 만족의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남 보란 듯이 단식과 고행을 행한 일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이라 비판하며 그들의 위선을 호되게 질타했습니다.

p119에서 저자는 계속하여 신앙인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합니다.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사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이 청빈의 미덕을 강조하고 실천에 옮겼으며, 가톨릭은 내, 외부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물질적 타락과 부패를 경계하는 열렬한 움직임이 일어난 바 있었습니다. 이런 숭고한 운동은 무엇보다 내부의 모순과 불의에 각별한 경계를 두어야 하겠으며, 어떤 불순한 정치적 목적이나 위선적 행태에 악용되는 일이 결코 없어야만 그 본지를 달성할 수 있을 듯합니다. 표리부동한 인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운동의 목표는 역효과와 일탈로 엇나가기 일쑤 아니겠습니까.

사순 주간이니만치,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의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일화가 묵상의 소재를 더욱 우리 곁에 가깝게 가져다 주는 듯합니다. 서슬 퍼런 공권력이 자신들 같은 신흥 세력에 대해 높은 적대감을 갖고 한밤중에 몰려와 스승을 나포해 가는 공포의 순간, 제아무리 혈기 왕성한 이였다고 해도 감연히 저항하거나 떳떳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겁니다(복음서에 따라, 베드로가 한 군인의 귀를 잘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독자를 가슴 아프게 하는 대목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닫고 통회와 부끄러움이 담긴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의 약함, 불신, 비겁함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기에, 신앙인들이 두고두고 읽으며 자신을 추스르는 교본으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성모의 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이렇게 시작하는 성가가 있을 정도로 가롤릭에서는 5월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합니다. 저자는 p228에서 프란츠 베르펠의 <벨라뎃다의 노래>를 인용하는데, 이분은 2차 대전 말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스페인 국경의 루르드를 찾아 그 유명한 성모 발현의 기적을 떠올리며 여태 거리가 멀었던 신앙에 대해 눈을 뜨는 체험을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시대의 어둠과 천박함을 이기는 가장 큰 힘!".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사악한 유혹과 나 자신의 탐욕 때문에 온갖 불순하고 위험한 충동 앞에 굴복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타락에 빠집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에, 정작 나의 영혼과 정신만큼은 더럽고 차가운 흙탕물 안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도 없겠습니다. 신은 그를 끝 없이 갈구하고 만나려는 굶주리고 가난한 영혼 앞에 좁은 문을 열어 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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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행복
김미원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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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아갈 만하다." 석가모니는 네 개의 큰 괴로움에 대해 말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어남"이었습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건 괴로움이라 할 만하지만, 만인의 축복을 받고 세상에 나오는 과정인 "태어남"이 왜 괴로움이어야 하는지는 정말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은 태어날 때부터 불확실성의 연속입니다. 모든 것이 우연한 확률에 의해 좌우되기에 우리는 근원에서부터 불안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근원적으로 불안을 떨칠 수가 없기에 우리는 삶에 대해 자칫 절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 만하다." 독자인 저는 이렇게 이 책의 결론을 해석했습니다.

p22에는 "늙음의 초라함"애 대해 작가님의 긴 상념이 등장합니다. 예이츠, 마르케스, 그리고 괴테의 의도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그렇지 싶습니다. 파우스트는 무슨 큰 욕심이 있었거나 결정적인 영적 타락을 겪어서가 아니라, "타인이 내 늙음을 보는 게 두려워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게 작가님 말입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많은 지식을 쌓고 교양을 완성한 분이, 고작 "젊음이 주는 쾌락"이 탐 나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요. 그의 동기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 할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p22에 인용되는 예이츠의 <비잔티움의 항해> 일부가 있는데, 이 시의 서두가 바로 어느 미국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인 "노인을 위한 나라(가 전혀 아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사실은 저도 요즘 "양치질을 했나? 방금 쓰레기를 버리고 왔나?" 같은 게 깜빡깜빡할 때가 있었는데요. 이 책에도 p45에 작가님의 모친께서 기억이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고 하신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정신의 기능이 감퇴하는 경향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건 또 아닙니다. 작가님은 바로 뒤 페이지에 "이번 생일 용돈을 슬쩍 안 드리고 넘어가려 한 딸의 계산을 정확히 알아채고 지적하는 엄마의 놀라운 계산 능력"에 감탄합니다. 이렇게 손익을 정확히 계량하는 분이 설마 치매이겠는가 이거죠. 쓴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 안심이 되고,... 이게 바로 자녀의 심리이고 안도입니다. 우리 독자 모두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공감할 수 있는 대목 아니겠습니까.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헤어스타일도, 얼굴도, 표정도 변한다(p106)."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바로 "늙어서"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데, "내가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정확히 사실을 전달하는" 사진은 나의 육신과 겉모습이 얼마나 늙었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사진에 찍힌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수잔 손택의 명언으로 책 p108에 나옵니다. 같은 페이지에는 16년 동안 단골로 지내 온 사진관의 아저씨가 페암에 걸려 마침내 가게 문을 닫게 된 사연도 나옵니다. 사멸해 가는 모든 것의 슬픈 운명을 어쩌면 파수꾼처럼 지켜 온 사진사, 그도 자신의 노쇠와 사망이라는 필연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독자로서 참 슬퍼지더군요. 책에는 몇 년 전 타계한 명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스토커>라는 영화의 줄거리 일부가 소개도 되는데, 참 특이한 내용이라서 나중에 따로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지 책 곳곳에는 깊은 묵상의 결과일 듯한 여러 심오한 깨달음의 문장이라든가 성경 구절의 인용도 나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데 백 년이라는 세월을 쏟습니다만 마지막 7일, 즉 홍수가 실제 닥치기 직전 7일 동안은 적지 않은 회의에 싸이기도 했겠다는 말씀(p118)을 하시네요. 백 년도 참고 그 노고를 기울였는데 고작 7일을 못 참겠나 싶지만, 인간이란 본래 다 된 죽에 주저않고 콧물을 빠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숙함과 인내, 침착함, 감정을 통제하는 이성이 두루 필요합니다.

p177에는 원초적 욕구 충족을 위해 언제든 동기까지 배신할 수 있는 인간의 이기심을 꼬집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한 구절이 나옵니다. 작가님은 탈북민을 위해 봉사도 하신다는데, ㅎㅎ 탈북 청소년이라고 하면 으레 못 먹고 못 입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거칠어진 피부 등을 떠올리겠으나 김 작가님이 만난 청소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답니다. 그런가 하면, 음식을 권하는 작가님한테 저들은 살 찔 것 같다며 사양하더랍니다. 여기서 우리 독자들이 좀 느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작가님 말은, 탈북자 하면 이러려니 하던 선입견이 자신의 내면에도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확인하는 스스로가 몹시 부끄럽더라는 겁니다. 독자로서 저는, 채 그런 느낌(부끄러움)도 갖지 못하고 "그 청소년들 (탈북자면서) 별나네" 비슷하게 여겼을 뿐이었습니다(처음에는 말이죠). 아니 왜, 탈북 청소년들은 다이어트에 신경 쓰면 안 되겠습니까? 별날 게 애초에 뭐가 있습니까? 작가님따라 저도, 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네요. 무슨 권리로, 제가 그들에게 선입견을 갖는다는 건지 원. 에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지난 시대 특정 세대에서 필독서로 꼽혔으나 오늘날의 우리가 읽어도 훌륭한 고전임은 변함 없는 사실입니다. 그 책에 보면, 저도 기억이 나는데 "위선보다는 위악이 낫다"는 말이 나오죠. 작가님은 p201에서 "그 말에 반대하지만, 주인공 니나 부슈만의 (그) 냉소가 좋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고 하시네요. 그리고는 작가님의 지인인 S라는 분에 대한 개인적 회고가 이어집니다. 어쩌면 루이제 린저도, 자신의 주변에 S님 같은 지인이 있어 캐릭터의 창조에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영혼에는 커다란 난로가 있다."로 시작되는 가상의 상황에서 던지는 질문은 바로 고흐 자신이 쓴 서간문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대 불우하게 살다 치열한 삶을 마감한 고흐를 우리는 주저 없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가 혹 지금 내 곁에 살고 있는, 소외되고 광인 취급 받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작가님처럼, 우리 스스로가 별 의심 없이 쏟아내곤 하는 고상한 감정의 인위적 폭발에 대해, 그 진정성이 사실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의 매 순간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적립될수록), 우리가 존재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도 쉽게 청산될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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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나로 삽니다 - 15인의 여성 작가들이 말하는 특별한 마흔의 이야기
리 우드러프 외 지음, 린지 미드 엮음, 김현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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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책이 국내 작가분이 쓰신 글 모음인 줄 알았습니다. 한국에도 이제 그런 분들, 혹은 저런 자신 넘치는 말을 책 제목으로 달 자격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메건 다움 등 여러 외국 분들이 쓰신 글들의 엮음이라 약간은 실망감도 들었었습니다. 물론 그런 실망감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이 시대를 같이사는(아마도 훨씬 치열하게 사는) 다른 분들의 좋은 가르침을 "외국의 배경과 함께" 경청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싹 바뀌게 마련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깔때기를 타고 내려가듯 점점 그 폭이 좁아진다(p109)." 외국에도 깔때기가 있긴 하겠구나 같은 생각도 들었고, 무엇을 하든 그 개인의 선택으로 내버려 둘 뿐 뒤에서 흠잡기 같은 건 안 하겠거니 싶은 외국이라 여겼는데, 사람 사는 모습이 (슬프게도) 다들 비슷하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39세에 여배우가 되었다! 장하고 축하 받을 일이지만, 혹시 남자였다면 39세에 배우가 된 게 좀 더 당연시되지 않았을까요? 과년한 딸이 있으면 빨리 시집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사실 한국에서만 유효한 건 아니라서 나이 든 여성에게 얼마나 더 가파르게 어드밴티지가 줄어드는지의 사정은 외국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점 다시 실감했습니다. 더 팍팍한 환경에서 매일매일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응원을 (미약하나마) 보내게 됩니다.

"나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퇴행을 해서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해결해 주었으면 했다(p207)." 누구나 한 번은 겪어 봤을 느낌이고 처해 봤을 환경입니다.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옵니다. "나는 원래 엄청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무엇인가에 압도당하면 정신을 잃는 특징이 있다." 그렇죠. 필자 줄리 클램 씨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책임감 감수성의 정도는 다를망정.

"복부에 총을 맞으면 언제나 죽어요. 배를 절단할 수는 없잖아요(p95)." 우리는 이 이유가 잘못 지적되었음을 잘 압니다. 아이는 제레미아의 슬픈 편지를 읽고 나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죠. 아 그나마, 상처 입은 부위는 (엄청 아프겠지만) 거기만 도려냄으로써 전체의 괴상을 면할 수는 있는가 보다. 역시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한 철없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나마 어린 감성과 지성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결론입니다. 어른들 역시 그런 상황이 닥치면 고작 저 정도의 위안 외에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을 터입니다. 육신의 치명상이 아닌 감정의 그것을 마주한다 해도 말입니다.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확실히 소셜 미디어는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습니다. 임신 중독증 진단을 받은 데다, "여태 겪은 중 가장 폭군 같은 상사를 만나 고생하는(p210)" 남편을 보고 한계 상황에 다다른 줄리는 악플로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풀 생각을 하는데 게다가 보험금 지급 거부 결정까지 받아드네요. 우리들 대부분에게도 생이란 이처럼 난관과 짜증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원래 이런 것이었고 이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언제라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단을 가져야 해(p260)." 페미니즘의 시대라고 합니다만 어떤 혜택이 거저 찾아온 게 아닙니다. 여성들에게는 누리게 될 이런저런 자유와 권리보다 의무의 부담이 훨씬 늘어났고,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할 저 위의 적층은 여전히 높은 장벽을 허물 생각을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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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신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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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정상적인 교회가 있기나 해?(p15)"

참 공교롭게도, 이 소설을 읽은 동안 유명 방송인에 관련된 뉴스가 나와 인터넷을 시끄럽게 했습니다. 그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났었는데 또 비슷한 일이 터진 거죠. 대체로 방송인들은 반듯한 외모에 차분하고 지적인 말투를 지녔기에 물정 모르는 사람에게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여성들의 경우  괜히 재벌가의 일등 신붓감으로 꼽히는 게 아니죠. 상당수는 성공한 삶을 꾸려나가기도 하고 말입니다.

반면, 행여 이런 실수라도 하면 온갖 비난과 조롱이 다 퍼부어집니다. 그 중에는 당사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도 있겠으나, 그 수위를 한참 벗어난 야만적인 마녀사냥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건 대부분, 어리석은 대중들이 평소에 그들에 대해 품고 있던 열등감에 기인합니다. 열등감의 도를 넘어선 표출은, 사실 그 발화자의 생과 자존감이 적정 수준 이하였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나친 건 모자람만 같지 못하다"는 옛 말도 있죠.

그건 그렇고,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종교란 건 있기 마련이고, 이 종교는 우리들 비루한 존재의 필멸의 삶을 근원에서부터 위로해 줍니다. 그러라고 고안된 게 종교입니다. 아무리 축복 받은 삶도 원 없이 모든 걸 누릴 수는 없고, 아니 원 없이 모든 걸 누린 삶이라면 그런 이유 때문에 80, 90에서 중단되는 게 더 아깝습니다 결핍으로 이어진 삶이라면 뭣도 뭣도 끝내 못 해 보고 죽어서 더 안타깝습니다. 이러니 내세에서의 무엇을 갈구하는 종교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애초에 없었다면 뭐 만들어라도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 누구는 자신의 신을 위해 살고, 또 다른 누구도 그의 신을 위해 사는 겁니다. 사실은 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뤄지지 못한 애틋한 욕구)"이죠. 에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상황은 그저 픽션의 산물이겠습니다만 어째 배경과 전개, 심지어 이름마저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누구누구와 무엇무엇"을 연상시킵니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라는 말도 있지만, 어쩌면 지면이 아닌 현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상상이 더 지독하고 더 창의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소설로 읽어도 재미있고, 혹시 뭔가 밝혀지지 않았거나 차마 밝힐 수 없었던 실제 사정의 소설화라고 가정해도 흥미진진합니다만, 다 읽은 후에는 카타르시스라기보다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대체 우리가 모르고 지나친 "엄연한 현실"은 얼마나 더 무서운 진실을 감추고 있었던 건지...하는 그런 두려움 때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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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배워야 합니다 - 평범한 일상을 바꾸는 마법의 세로토닌 테라피!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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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자기계발서를 저술한 분으로 보통 평가 받는 이시형 의학 박사님의 새 책이네요. 박사님은 항상 "세로토닌"의 중요성을 설파해 오신 일종의 전도사이시지만, 이 새 책에서는 한층 강화된 이론적 배경과 (일종의) 임상례들이 더 곁들여져 독자들을 재미있게 이끕니다. 선생의 책은 언제나 어려운 이야기를 최대한 쉽고 실생활에서 물씬 공감되는 표현으로 우리 독자들을 끌어들인다는 게 최대의 강점 같습니다.

일상을 따분해하고, 불만을 떨칠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불편, 이런 것은 그 사람의 물질적, 사회적 성공이나 척도와 무관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보험왕"으로 널리 알려진 어떤 여인에게 옛 연인이 다가와 "그런데, 너 행복해 보이질 않는다?"고 말을 거는 걸 봤습니다. 물론 그 여성 캐릭터에게는 다른 실질적인 고민이 있었지만, 이런 걸 떠나 아무리 세속적으로 가진 게 많아도 그 내면이 불행하기란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박사님은 우리 독자들에게 "제발 의식적으로라도, 좀 배워서라도 행복해져라!"를 설파하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야간 근무를 하기에 잠이 늘 모자라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늘 비관적으로 보는 자신이 뭔가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세상을 비판적, 부정적으로 보면서 그 과정 속에 비틀린 쾌감을 느끼는 인간 부류보다는, 그리 행하고 느끼는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자각이라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신을 그저 객관화하여 주시할 수만 있어도, 그런 여유만 가져도 이미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바로 그 지점에서 마련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없이 자주 화가 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분들(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가 이런 증상을 공유하며,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야말로 이 박사님의 책을 좀 읽어서 도움을 바로 받을 만한 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어떤 자연적인 타고난 조건이나, 종교적, 도덕적 깨달음을 통한 게 아니라,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는다는 게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행복감을 돈으로 환산한다거나, 장부에 적어가며 득실을 기록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그렇게 공리적으로 실천적으로 행복을 얻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 갖는 것입니다. 내가 당장 배가 고픈데, 천연과 인공 물질을 가려 가며 섭취하겠습니까? 게다가 혹 인공 물질이라 한들 그것이 딱히 인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행복은, 그게 혹 가능하다면 노력을 해서 얻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어떤 매뉴얼이 존재해서 필요할 때마다 인위적으로 섭취하는 게 가능하다면, 불행한 사람에게 응급 처방으로 베풀어 당장 슬퍼서 죽을 것 같은 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자가 처방까지 가능하다면 그효용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행복해 질 수 없거나 조건이 나쁘다면, 공부를 통해서건 훈련을 해서건 스스로, 자조(自助)하여 행복해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교훈이고 결론이며 쓰임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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