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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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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그간 한반도 내의 웅혼한 기상과 민족 정기 그 정맥, 그리고 정직한 민족혼의 표출과 유장한 서사혼의 구현, 이런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종의 일관성과 경향을 드러내어 왔습니다. <태백산맥>,<한강>은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자 그 영혼의 구현태인 한반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루는 두 척수적 지명을 동, 서로 각각 하나씩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구요(조 선생께서 직접 언급하신 적은 없으나, 독자에게 그런 총체적 시사를 주기에는 충분하죠), <아리랑>은 그 동서의 척수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했으리라 여겨지는 영혼이, 자신의 지난 사연과 격정, 앞으로의 예시적 진로와 비전을 장쾌하게 부르짖는 서사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결코 다작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는 선생이 그간의 이력에서 뽑아낸 작품들이란 이처럼 무게감 있고 상징적 중핵을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이루는 거대 이정표들이어서, 향후 어떤 작품을 쓰시든 그 중압감이란 실로 대단하실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독자가 소박한 생각으로 더듬어 보아도, 일단 물리적으로 작명과 소재로 쓸 지명이 부족하다는 게 첫째 이유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과연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자신의 등과 가슴에 아로새긴 사연의 비계판 어느 한 결무늬는 남북으로건 동서로건 대륙 중국을 향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태백산맥은 낭림산맥, 함경산맥과 더불어 백두대간의 뻐대를 이루는데, 우리가 잘 알듯이 그 가장 북쪽의 지향은 2744m의 백두산이요, 이는 중국이 그 국경으로부터 우리와 공유하는 거대 자연 지형지물입니다. 우리 민족 뿐 아니라, 중국인,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북경대생 송재형이 잘 알고 있을 분야인 청 제국의 경영 주역 만주족 들이 공히 신성하게 여겨온 곳입니다. 중국 동북(둥베이) 지방에 다녀 온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장백산맥은 거대한 밀림 지대를 이룹니다. 밀림지대는 압록-두만강의 길고도 긴 동서 축을 따라 광활히 펼쳐지다가, 바로 달리는 북쪽 방향을 만나 또 거대한 벌판을 빚어내죠. 황량하면서도 그 위에 터잡고 사는 숱한 겨레(만주족, 한족, 그 예전의 거란, 보다 북서로 향해 몽골족 등등)의 기질과 외모, 혼의 개성을 형성한 곳입니다. 이러니 이 지역은, 남의 사정에 오롯한 이역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민족이 그 애틋하고 절절한 사연을 공유하는 역사적, 정서적 텃밭이기도 합니다. 


조정래 선생은, 배포 좋고 통 크게도 혼자서 배달 겨레의 대표 터전을 당신의 작품 소재로 알뜰하게 다 써버린 다음, 우리 옛 선조의 거칠 것 없는 기상대로 시선을 중국으로 향합니다. 그곳이 과연 중국이 배타적 귀속을 논할 수 있는 곳일지는 모르겠지만, 조 선생은 여러 복합적 계획을 가슴에 품고 대뜸 항공편으로 인천발 대륙행의 비행기를 잡아 타, 천연덕스럽게도 한글 외에 어떤 표음, 표의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명함 한 장 외에 그저 자신의 빼어난 기술과 지식만을 지닌 채 알몸으로(?) 황해를 건넌 성형 전문의 서하원의 시선을 빌려, 어떤 양해를 구함 없이 중국의 오늘을 흰 자 검은 동자 교대로 굴려 가며 응시합니다. 


우리 속된 독자의 선입견으로는, 이번에야말로 최남선(한때 조선 최고의 준재로 칭송 받았으나 그 의지의 유약함으로 가장 치욕적인 친일의 주홍 글씨를 달았던)이나 단재 신채호 선생, 혹은 만화가 김산 선생처럼, 불꽃 같은 민족혼의 시선을 만주 지역(중국인들이 신경증적으로 "둥베이"라 부르는 그곳)으로 향할 줄 알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중국 영역 안에서 "정글'이 분포하는 곳은가장 직접적으로는 이곳 백두산 밀림 지대이기도 하고, 이를 넘어서면 서남 방향으로 아득히 달려 가야 그 비슷한 지형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선생은 만주를 건너 뛰고, 바로 대륙의 한복판, 옛 중원의 심장부였던 북경, 그 남쪽(이라고 간단히 말하나, 이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고속철의 종단 시간으로 알 수 있듯, 이 둘은 멀고도 먼 거리를 서로 격하고 있습니다)으로 장강의 초입을 이루는 상하이, 이 두 핵심 지역을 오가며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시간적 배경 역시, 우리 독자가 지금 현재 살아 숨쉬고 있는 현재입니다. "역사"의 요소는 송재형이 간간히 상기 시키는 단편의 에피소드에서 간접으로 연상할 뿐, 조 선생이 다루고 있는 주 무대는 한국의 사업가, 학생, 전문직 종사자, 예술가, 심지어 음성적 영역에 머무는 지하경제의 일원 군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우리와 감각과 이해를 공유하는 바로 지금의 현대인들입니다. 이 점 역시 어설픈 독자의 선입견을 배반하는 부분이죠. 


이런 대담한 비약을 이룬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 해답을 찾기란, 여태의 어느 대서사시 못지 않은 길고 긴 분량의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딱떨어지는 해로 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 선생은 비록 한 눈에 담기 어려운, 진지하고 숭고한 외피와 세부 내용을 엄밀히 고안했을망정 그 핵심과 지향은 비교적 명쾌한 답을 독자들에 제시해 왔으며, 그 성과는 우리 모두의 공명을 예외 없이 불러 오는 쪽이었습니다. 문제가 비록 심각하고 진지했다뿐, 그 답의 진로는 대강의 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이번 작품, 그의 작품 세계의 진로 예측(올해 일흔의 연세시나, 앞으로 우리 곁에 반 세기는 족히 더 머무셔서 계속 머리와 가슴을 일깨워 주실 겨레의 스승으로 남아 주시길 넉넉히 기대하기에) 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룰 이 작품은, 설정과 출발점, 그리고 그 역점의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기대를 즐겁게 배반하는 한 획기였습니다. 


이 신나고 재미있고, 한편으로 증권 소식지의 그것만큼이나 토픽이 다양히 삽입되고, 그 세속적이고 가벼우면서도 마침내 정로를 향해 회귀하는 대 장편 소설을 끝까지 감상했을 제 동료 독자분들, 혹시 선생님의 전작을 빠짐없이 섭렵한 층에 그 중 가려 이 질문을 삼가 묻자면, 어떠셨어요, 과연 이 소설이, <태백산맥>, <한강>, 그리고 <아리랑>을 쓰신 그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처럼 느껴지시던가요? 선생의 작품은 그 이전의 숙연한 텍스트에서도 언제나 잘 읽히는 경향이었습니다. 담은 메시지야 한 개인의 한 길 속을 백 번이고 반동하며 그 곳곳을 울리는 심오함을 담았지만, 만약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국인이 행여 읽더라도 (한국어의 독해에 어려움이 없는 이상) 그저 이야기만으로 읽어도 일단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이정표적 장편과 종전의 민족혼 서사시의 공통점이라면, 일단 이 천의무봉의 가독성, 서사성이 일단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 외의 요소에서는, 선생의 내면과 세계관, 미래를 향한 예지(이는 과거에의 통찰과 직결되는 쌍생아 관계죠)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나 싶게, 일흔의 연세(가 그저 속된 독자에게 부르는 선입견)이 무색하게, 새롭고 참신한 각종의 에피소드와 거대 줄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치 황석영의 <장길산>과 <머나먼 쑹바강>의 시선과 주제 의식이, 박범신의 <불의 나라>와 김홍신의 <인간시장>의 내러티브를 만난 것만 같았어요. 우리가 익히 알던 바로 그 조선생님인데, 일흔의 연세에 오히려 새로운 활력을 구하신 새로운 이야기꾼 조정래를 다시 만난 듯한 신선함과 활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제 생각에, 우리 겨레 일쳔 년 미래, 전 세계 시민 일만 년 미래를 좌우할 중국 민족의 대 약진의 조짐이 그에게 끼친 영감과 영향이 너무도 강했던 이유가 있지 않았나 봅니다. 소설의 주 무대에 결국 자연지리적 의미의 정글은 없습니다. 대신, 지난 시절 치욕의 한 세기를 겪었던 중국인의 자존이 비로소 그 활개를 펴는 순간, 이 실용적이고 상업혼 가득한 민족이 제 오랜 터전을 무대로 펼치는 자본주의의 거대 물결이 빚는 온갖 파장이, 말 그대로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정글을 연출하고 있다는 그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글에는 온갖 낲선 병해와 생태적 라이벌 생명체들이, 기존의 정착자들을 향해 비수를 품고 그 패권 교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민족 문학의 대부격인 조 선생은 이런 각별한 시대 흐름에 특별히 주목하여, 이번의 미래 지향적 장편을 통해 동ㅅ히대 겨레의 집단 경각을 시도한 것입니다. 선생의 내공과 달관은, 어깨에 완전히 힘을 뺀 채 서사된 이런 쉽고 유장한 내러티브가 새로이 구축된 것을 보아도 그 엿봄이 가능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영감 받을지는 우리 독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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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와 미카의 비밀 시크릿 시리즈
제시카 소런슨 지음, 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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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어덜트라는 장르가 최근에 미 독서계의 새로운 층위를 세분했다고 하죠? 이 제시카 소런슨의 작품은 아마 그 뉴 어덜트의 효시로 꼽힐 작품이 아닌가 해요. 달달하고 아삭아삭한, 아직 10대의 풋풋한 기운을 채 떨치지 않은 어린 20대 둘의 사랑을, 감각적이고 평이한 문체로 졸졸 써 내려간 러브 스토리입니다.

혹시 책 제목만 접한 분들 중에, 엘라는 물론 미카까지도 뭔가 여성향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진 분 없으셨나요? 음..... 두 주인공 미카와 엘라를 나란히 붙여 읽으면, "미카엘라"라는 완전한 여자 이름이 되는 점에서도 그렇구요,소설에 물론 폭력이나 탈선, 비행의 묘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순정의 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한 열렬한 시선을 교환하는 중에 아무 다른 생각, 즉 곁눈질, 바람핌, 양다리 같은 크고작은 배신 행위가 일절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은 비록 뉴어덜트의 장르에 속한다고는 하나, 뭔가 진한 순정으로만 가득한 고풍의 로맨스소설 공식을 충실히 따르며, 주로 "착한" 독자들의 기호를 집중적으로 만족시키는 것 같습니다! 즉, 읽어 나가기에 변칙이나 폭주가 없는, 담담하고 착한 내러티브가 연속되어, 예를 들어 현재 그저 착한 사랑만을 충실히 이어나가는 연인들이 돌려 보고 공감하기에 더 없이 좋은 그런 소설 같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미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강직하고 굳센 한 예언자의 이름이고, 영미 관습상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남성용 퍼스트네임입니다.

주인공들의 성격이나 환경 설정 역시 그래요. 여주 엘라는 이 후미진 동네에서 못 말리는 정의파, 행동파였고, 그 늘씬하고 잘 빠진 몸매에 예쁜 얼굴까지 갖춘 외모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에게나 또래들에게나 터프걸의 이미지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콱 각인되다시피한 왈가닥이었다고 "설정"됩니다. "설정"되었다고 한 건, 이 권에서 그 구체적인 묘사가 없고, 과거 회상의 계정 속에서만 어렴풋이 재생되고 있어서입니다. 우리는 현재. 완전히 범생이 대학생 이미지와 외관으로 변신에 성공한 엘라를 볼 뿐, 그녀의 터프걸로서의 과거 행적은 그저 전언, 회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게 이 소설의 눈에 띄는 특징이죠. 현재의 매력적인 그녀를 제시하되, 현재의 모습으로는 상상이 안 가는 과거를 간간히 알려 주며 현재 모습과 대비시킴으로써, 여주로서의 그녀 매력을 최고조로 부각하는 방법을 작가는 쓰고 있습니다.

여주 엘라가 완벽한 변신을 겪는 동기는 어머니의 자살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지만, 엘라는 나약한 정신의 아버지, 성치 못한 정신의 어머니, 그리고 성별만 남자일 뿐 여성인 자신의 영혼과 거의 판박이라 할 수 있는 내면을 지닌 오빠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건전하기는커녕 정상적인 가정 수준에도 다소 못 미치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셈입니다. 이런 중에, 그녀에게 거의 평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사건까지 터집니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녀는 고향을 떠나 엉뚱하게도 라스베가스 소재의 대학, UNLV로 진학하게 됩니다(실제로 있는 대학인데요, 그렇게 명문은 아니고, 소재 지역 분위기 따라 주로 호텔 관광업 인력 배출에 특화된 기관입니다). 대학 기숙사에서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진짜 모범생" 라일라를 만나, 어찌 보면 그녀를 롤 모델로 한 듯한 변신에 성공합니다. 기숙사 생활 해 본 분들은 알지만, 둘 중의 하나는 청소 등 가사일 유사의 잡무를 잘 해 줘야 생활이 편한데요. 엘라는 어려서부터 가사일을 완전 내팽개치다시피 한 엄마 밑에서 컸던지라, 라일라에게는 더없이 편한 룸메가 됩니다. 그렇다고 천성이 왈가닥인 엘라가, 라일라 같은 약해빠진 아이의 "시녀 역할" 같은 걸 맡았을 리야 없고요, 아마도 다른 일상에서는 언제나 그녀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해서 상황을 리드해 갔으리라 짐작합니다. 근성 있으면서도 (대학 진학 후로는) 흐트러짐 없이 모범생으로 제 역할을 잘 해온 엘라가, 짜잔한 뒤치다꺼리는 또 알아서 척척해 주니, 둘이 잘 맞을 수밖에 없죠. 마음이 맞는 라일라 같은 룸메를 만난 덕에, 처음부터 변신 의지가 확고했던 엘라는 첫 학기를 잘 보내고 고향에 돌아오게 됩니다. 아직 자신의 차가 없는 엘라는, 바로 룸메인 라일라의 메르세데스(우리가 흔히 벤츠라고 부르는 차종)을 타고, 망설임과 불안감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한 채 다소 심란한 귀향길에 오르는 거죠.

고향에서 같이 지내던 시절, 엘라와 미카는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지내던 아저씨를 한 분 둔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아버지가 온전한 노릇을 못 했던 (나중에 밝혀지지만 미카가 더 심한 경우입니다)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마치 로렌스 신부를 따르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둘은 이 맘씨 좋은 아저씨를 무척이나 따릅니다. 이 아저씨가 뼈암 4기의 중태인지라, 미카는 마음이 급해서, 그 넓은 미국 곳곳의 "엘라"들을 검색해서, 느닷 "그 사건" 이후 종적이 묘연한 엘라를 찾아 나섭니다. 친구 에단의 도움으로 간신히 유타 주 모 대학에 재학 중인 엘라를 발견하게 되고, 사진상으로 보아 완전한 변신을 해 버린 그녀의 모습에 미카는 더 충격을 받게 됩니다.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아 내어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기는데, 확인 여부는 애타게도 미지수로 남아 있죠.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날, 엘라는 라일라와 함께 호화 독일 승용차편으로 귀향하는 중이었습니다.

미카야 마음 어느 한 구석으로부터도 엘라를 지운 적 없지만, 엘라는 고향과의 결별 당시의 상처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너무 컸던 탓에, 스스로를 배신까지 해 가며 미카를 잊으려 애씁니다. 묘한 것은, 그 한창 나이의 불 같은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성(이든 혹은 동성-그녀의 활달하고 터프한 성향을 감안하면 동성 파트너를 물색했을 법도 했는데요)을 찾는 노력은 또 일절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는커녕, 엘라는 자신의 빼어난 그림 솜씨를 발휘해서, 미카의 그 멋진 자태를 화폭에 담아 기숙사의 벽에 걸기까지 했다는 거죠. 라일라는 대체 이 정감과 열정, 연정으로 가득한 선과 색으로 표현된 미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제 그녀는, 잠시 후 도달할 엘라의 고향에서, 섹시미 가득한 "동네 팝스타" 미카를 실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누가 뭐래도 미카와 엘라는 자칭타칭 공인 커플이었지만, 정말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라서 그런지, 여태 둘은 한번도 같이 밤을 지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자유분방한(이라기보다 거의 방치된) 가정 출신이라, 잔뜩 술에 취한 체 미카는 엘라의 방으로 창을 통해 기어들어와 그 날씬한 몸을 꼭 끌어 안고 잔 적은 여러 차례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결정적 선을 넘은 적은 없는데, 이에는 엘라의 괄괄한 성미와 나름 분별력이 큰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남자들이야 미카 아니라 누구래도, 그런 경우 제 본능을 절제하는 예가 없으니까 말이죠. 아무튼,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있고, 좋아하고, 딴 마음 먹지 않는 의리파들인데다, 미국 어디다 내 놓아도 빠질 것 없는 선남선녀인데도, 둘은 여태 그 나이까지 선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그들이, 순전히 엘라의 사정으로 반 년 동안 서로 생사 여부도 확인 못 하다, 이제 극적인 상봉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의 흥미진진한 사정은 직접 책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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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미루지 마라 - 하버드대 긍정심리학 보고서
탈 벤 샤하르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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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벤-샤하르 박사는 하버드 대학 교수이고, 요즘 우리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긍정심리학"의 대표 주자입니다. 긍정심리학이라면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2월 초에 접했던 <문제는 무기력이다>에서도 그토록이나 강조되던 게resilience, 회복 탄력성이라는 개념이었죠. 종전의 심리학이 단지 기계적 환원론에 의지하거나, 프로이트식 무의식의 탐구와 성적(性的) 충동에의 천착에 치우친 바 있었다면, 비교적 최근의 트렌드인 긍정심리학은 단지 학문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의 영역에까지 큰 도움과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저는 박경숙 박사님의 <문제는 무기력이다>가, 단지 심리학의 이런 저런 양태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 데서 그치지 않고, 읽는 독자의 심장을 두근거림으로 쾅쾅 뛰게 했다는 점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은 대단히 치밀한 논리와 엄정한 과학성, 그리고 여타 학문에의 거대한 기여를 가능하게 하는 대단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학문입니다. 당장 경영학(그 중에서도 주로 조직행위론)이 그 큰 수혜를 입은 바 있고, 의학은 심리학의 도움 덕에 영역을 곱절로 늘린 바 있죠. 최근에는 경제학에서조차, 유태인 출신 천재 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공적으로 "행동경제학"이라는 신 분야가 개척된 바 있습니다. 역시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라는 유익한 워크북을 통해, 우리는 심리학과 결합한 기초 학문(흔히 실용성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져 온)들이 어떤 방법으로 놀랍게 우리의 감정과 결의, 실천과 성과의 면에서 크게 도움을 줘 왔는지 새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긍정심리학입니다. 긍정적인 마음 자세의 중요성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긍정의 마음가짐으로!" 어느 자기계발서나, 또 어느 회사의 멤버십 트레이닝의 코스에서나, 이 긍정의 마음을 강조합니다. 긍정의 애티튜드를 가질 때, 기왕에 잘 되던 일이 더 잘 될 수 있습니다. "저 일은 내 힘으로 성취가 가능해!" 같은,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어린이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초장에 잘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프로젝트가 어느 순간 그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 나감을 발견하곤 합니다. 야근이 지옥이라고 여기는 대리는, 남보다 일찍 실직의 지옥에 한 발을 들일 수 있습니다. 야근은 나의 실력 발휘를 위한 절호의 찬스라고 스스로에 신념을 부과할 수 있는 대리는, 자신이 품었던 긍정의 비전으로 소중한 커리어를 채워 나갈 수 있습니다.


긍정심리학과 리더십 강의의 대명사처럼,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에서 인식되던, 세계적 준재 탈 벤-샤하르 박사의 책이니만치, 비록 350페이지에 다소 못 미치는 슬림한 분량이라도 그 내용은 어렵고 까다로운 개념 체계로 가득할 것만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사이트에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느껴 왔던 생각이, 이분 음성도 나긋나긋하고 매너도 그지 없이 부드럽지만(그의 강연 동영상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연예인 기질 가득히 세련된 그의 미소를 보십시오), 대중 강연 아닌 그의 본수업은 다시 없이 까탈스러울 것만 같았습니다. 본디 천재 교수님들의 강의는, 나이도 어리면서 머리는 당신보다 둔하게 돌아가는 학생들을 결코 곱게 보지 않겠다는 듯, 깐깐하고 호된 게 일반적입니다. 당신께 배우는 학문과 지혜 확장의 미덕보다, 자신감의 상실에서 오는 손해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설 정도입니다.


이 책은 어떠했는가?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비록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요소적 지원을 끌어대고 있기는 하나, 내용은 마치 (다소 거리가 멀다고도 할  분야의) 오쇼 라즈니쉬나, 자기 계발 분야의 대부 잭 켄필드, 아니면 호아킴 데 포사다의 쉽고 친근한 내러티브와 별 차별을 못 느낄 만큼, 쉽고 친근하며 재미 있는 101가지의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벌써부터 알고 있던 잘 알려진 이야기도 있고, 벤- 샤하르 박사가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특별히 창작한 것 아닌지 생각되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기계발서의 일반적 패턴을 별 비판 의식 없이 답습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약간 일기도 했습니다만, 평범함 속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고 무기력이 안긴 상처로부터 회복을 잘 해내는 것이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된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린이의 겸손한 마음으로, 세계에서 강의 젤루 잘 하시는 교수님 세 분 중 하나라는 평을 듣는 이 천재의, 정성들인 책을 꼼꼼히 읽어 나갔습니다.


교수님은 40대를 이미 넘긴 중년이지만, 그 강의하는 모습의 활력이라든가 평상시 프로필의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교차하는 얼굴선들이, 아직도 여전히 젊은 활력을 유지하고 계심을 보는 이들에게 짐작하게 합니다. 유튜브에서 그간 많이 만나 본 이 전설적인 강연자의 솜씨를, 이제 책과 활자 매체로 다시 맛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The Pursuit of Perfect(한국어 제목 완벽의 추구; 위즈덤하우스)>, <Happier(해피어; 위즈덤하우스)>, <Even Happier(국내 미출간)> 같은 책으로 그의 긍정 스피릿 넘치는 자상한 말건넴을 경험한 독자들은, 이제 이 책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 왜 이의 선택과 실천에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다시금 쾌감 어린 추동력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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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2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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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은 프랑스 국민 공회의 출범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국민의회와 입법 의회 시기까지만 해도, 왕정과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부정되거나 끊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프랑스에는 왕정이 부여할 수 있는 사회 안정, 질서, 권위에 대한 향수, 향수를 넘어선 현실적 요구가 엄연히 존재했기에, 루이 왕정은 곧바로 붕괴 소멸되기보다 일종의 상징으로서 존속할 가능성이 더 많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무려 100년을 앞서 크롬웰의 공화정을 겪기도 한 영국은, 이미 그런 식으로 역사의 성장통을 다소 타협적인 방법으로 넘기고 있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개성과 자부심, 그리고 섬나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 강한 프랑스인들이라고는 하나, 수백 년 간 모셔 오던 왕가를 하루 아침에, 백정이 가축 도살하듯 폐기하기엔 물리적인 문제마저 따르는 형편이었습니다. 국가의 위신, 문명국의 체면 유지에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루이 일가의 결정적인 패착인 바렌 사건으로 인해 일거에 물거품이 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왕실 혈통을 이어 받은 이들의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로부터 50년 후, 프로이센의 왕은 연방 의회가 그에게 부여하려 했던 "독일인의 황제" 호칭을 결연한 어조로 부인한 바 있습니다. "짐은 돼지의 왕관 따위는 갖지 않겠노라!" 카페-부르봉의 오랜 연원을 지닌 역사의 왕좌를, 귀족도 아닌 제 3신분의 폭도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은, 루이와,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후손 마리 두 사람 모두에게, 감내할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겁니다. 생명과 재산도 문제지만, 그런 식으로 치욕스럽게 왕위를 유지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외국의 무력이라도 빌려 정당한 권위를 수복하려는 생각밖에 없었을 테고, 신이 준 왕위 자체보다 자신의 신민에게 보다 충실한 직분을 요구했던, 그리고 이제 막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식 속에 싹틔우고 있었던 프랑스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결정적인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왕이 곧 국가의 반역자다!"" 2대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짐이 곧 국가"라고 한 왕까지 있었는데요. 이제 불과 백 년도 안 되어서 세상이 이만큼이나 바뀐 것입니다. 딱히 루이 - 마리 부부가 어리석고 타락한 위인이라서기보다, 시대의 대세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던 이유가 컸습니다.


아무튼 왕을 단두대에서 죽인 후, 프랑스는 퇴로를 차단한 채 공화정을 향한 걸음을 힘차게 내딛습니다. 1800년 전 로마에 공화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귀족의 과두정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프랑스는 이만큼이나 거대해진 국가를, 국민의 총의를 모아 운영해 나가야 하는 초유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믿을 건 인간의 선의와 이성, 그리고 성숙한 국민의식 뿐이었는데, 그나마 그간의 야만적인 격동 속에서 많이 흐려지고 탁해진 상태입니다.


혼란을 이용한 악덕이 횡행하고, 파벌 싸움이 끊일 날이 없자, 로베스피에르라는 법률가 출신의 독재자가 드디어 전권을 잡고 공포 정치를 시행합니다. 설득과 토론이 그 가치를 상실하자, 남은 것은 무력을 통한 공포의 지배 말고는 없습니다. 레인 오브 테러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의 국민 공회 정부로부터 비롯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현대사에서 문화 혁명의 광기와도 비슷했습니다. 아무리 대의가 옳아도, 그를 실행하는 방법이 옳지 못 할 때, 어떤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똑똑히 보여 주는 비극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 역시 사방에 적을 만든 업보로, 기요탱의 도끼 날 아래 스러지고 맙니다.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 그러나 모두의 피가 빨린 후에 사람은 없고 혁명만 남아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프랑스로부터의 혁명 수출을 두려워한 외국 군주국들의 동맹이 형성되어, 프랑스는 내부로부터의 분열에 외침의 위협까지 겪게 됩니다. 자체 분파 싸움으로 존속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외국의 군사 공격까지 받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국가를 구한 건 민중의 힘이었습니다. 강해진 국민군은 비록 지휘관이 무능하여 지리멸렬일 것 같았지만, 위기 의식으로 한층 고조된 국민군의 사기는 이를 극복해 내었습니다. 괴테도 회고하듯 "그때 그곳에서 세계의 역사가 바뀐" 발미의 전투는, 프랑스가 나폴레옹을 맞이할 시간적 여유를 줍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협의 하에, 실권자가 합의체 형식으로 국가 대사를 처리하는 총재정부를 도입합니다. 마치 고대 로마가 공화정의 난맥상 끝에 트로이카 체제를 도입한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말만 많았지 되는 일이 없었고, 총재정부의 무능을 풍자하는 문학적 장르가 따로 생길 만큼, 이 정부는 국민의 기대를 정면으로 저버렸습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애써 추스린 공화정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자, 포도탄의 능란한 발포로 순식간에 상황을 제압한 나폴레옹은 드디어 시대의 총아로 부상합니다, 그에게는 혁명의 숭고한 대의와 아울러, 무질서를 질서로 변모시킬 기하하적, 공학적 수완이 있었던 겁니다. 막스 갈로의 장엄한 서사는 여기서 막을 내립니다. 이의 후편은 이 책을 프리퀄로 만든 <나폴레옹>에서 더 읽어 보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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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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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갈로의 필치로 접하는 프랑스 대혁명의 상세한 역사는 실로 흥미롭습니다. 


그는 프랑스 전체로부터 사랑 받는 산문가이자 역사가입니다. 우리 나라 독자들도 <나폴레옹> 5부작을 읽고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는 모국인 프랑스의 역사를 주된 서술의 제재로 취하되, 유럽 각국의 다른 역사에도 날카롭고 종합적인 시선을 주어 특유의 운문적이고 간결한 필치로 장엄한 묘사를 펼칩니다.


이 책은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지만, 다 읽어 내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문장은 대체로 한 문단에 긴 문장 여럿을 배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페이지에 여백이 많이 남는 편이라고 할까요. 압축적이고 시적인 하나의 문장이, 문단 전체를 차지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이는 우리가, 소설 <나폴레옹>을 읽을 때에도 많이 느꼈던 점입니다. 빼어난 역사가들 중에는 팩트 사항을 길게 자세히 적는 이도 있고, 짧고 압축적이지만 단어 하나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심오한 문장을 즐겨 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막스 갈로는 후자에 가까운데요. 다만 쓰는 단어들이 비교적 평이해서 읽는 이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는 보통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부터 시작, 브뤼메르의 쿠데타가 마무리되는 통령 정부의 출범에서 끝납니다. 부르봉 왕조가 붕괴된 후, 프랑스에는 국민의회, 입법의회, 국민공회, 총재정부, 통령정부가 차례로 들어섭니다. 국가라고 하면 그저 왕,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 받았다는 왕이 다스리는 정체, 국체가 유일한 줄로만 알았던 당시 사람들은,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저처럼 그 이름도 다채로운 정부가 여럿 들어섰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웠을 텝니다. 한국에서는 군사 독재자가 무력으로 찬탈한 정권을 두고 "제 5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지만, "국(國)"의 모습이 "왕국","왕정"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건 그 자체가 긍지요 환희입니다. 하물며 "공화국"이 1, 2도 아닌 제 5까지 갔다는 건, 자유와 주체, 민주주의를 영혼으로부터 떨칠 수 없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을 환기하는 단어입니다. 독재자는 한국 뿐 아니라 저 멀리 프랑스의 인민들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있는 셈이죠.


막스 갈로는 이 제 1권에서, 국민공회의 출범 바로 직전, 루이 16세의 처형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국민 공회와 공포 정치, 그리고 나폴레옹의 전면 대두는 다음 권의 주제입니다.


막스 갈로의 저작이 보이는 가장 큰 미덕은,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은 균형 잡힌 필치로 다양한 역사를 응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역사학자들은, 자신만의 개성과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여태 그 누구도 제기하지 않은 관점과 틀을 짜 내어 역사를 프레이밍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스 갈로는 언제나 그의 책에서 표준적이고 무난하면서도, 학계에서 저간에 성취한 여러 업적과 다양한 관점을 자신의 한 권에 녹여 내듯 안정적인 관점과 패러다임으로 역사를 씁니다. 보통 역사라고 하면 건조한 논증과 인용으로 페이지가 가득 메워지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막스 갈로는 소설에서 보는 듯한 평면적 내러티브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프롤로그에서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혹시 지난 시절, MBC TV에서 제작 방영한 <제 4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보신 적 있을까요? 이 드라마의 시작은, 충격적이게도 12.12 쿠데타 사건을 그 시작으로 삼습니다. 해당 시기의 정권은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으로 이미 막을 내렸지만, 헌정사적으로는 전두환의 대두와 함께 공식적으로 그 종결을 맞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 결말을 대뜸 서두에 제시하는 방법은, 영화 <아마데우스> 등에도 보듯 서사의 시계열을 비트는 일종의 미학적 충격, 교훈적 의도에서의 종지부 도치 등의 효과를 노리고 시도되는 게 보통이죠. 이 책은 그런 맥락에서, 왕 루이의 최후를 프롤로그에 갑자기 배열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혁명의 충격파를 급작스럽게 맛보게 하는 효과를 노립니다. 프랑스 혁명은 사실 그 전례를 찾기 힘든 드라마틱한 사건이었기에, 이런 인위적인 재배치가 그닥 필요 없기도 하지만, 막스 갈로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의 반응을 예상하기에 앞서, 저술자인 자신이 먼저 그 극적 흥분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런 (그로서는 대단히 드문) 파격을 구사한 것 아닌가 짐작합니다.


막스 갈로는 다양한 사료로부터 인용을 하되, 주로 인물들의 편지나 개인적 회고를 즐겨 인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소설을 빼닮은 그의 글에 배치할 때 마치 대사처럼 활용하곤 합니다. 그의 이런 기법은 우선 인물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고, 소설적 재구성에 있어 대사를 인위적으로 지어내는 부담을 덜 뿐 아니라 사실에 충실하게 극을 재현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루이 15세는 이미 늙어 나라를 경영할 활력을 이미 잃고 있으며, 후계자는 그 자질이나 인성 면에서 믿음이 가지 않는 인물입니다. 왕실을 둘러싼 이런 불안한 분위기는, 오스트리아 대사가 본국에 보낸 서간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대사의 생생한 표현을 그대로 끌어 오는 방식으로, 갈로는 후계자 루이의 인간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퀼로트(바지조차 입지 못 한 자), 제 3신분(시예즈의 표현대로, 모든 것이어야 하나 아무것도 아닌 자)의 부당한 처지와 대우를 상세히 공초하고, 이런 정의의 입장으로부터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이 전복되었다는 식의 서술, 교훈적 서사, 선과 악을 가르는 공리적 관점은 역시 우리가 익히 봐 오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적 관점에 대해, 혁명 세력의 과도한 자기 합리화가 부른 역사 왜곡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게 일어 왔습니다. 멀리는 츠바이크의 평전도 다소 그런 분위기였으며, 최근에는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저술이, 시대의 거부할 수 없는 파고 앞에 부당한 누명을 쓰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왕가를 다소 동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죠. 막스 갈로는 이런 다양한 시선의 교차 와중에, 절묘한 스탠스로 균형을 잡고 모든 파트의 입장을 퓨전으로 영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혁명 세력, 시대의 정의와 유리한 파고를 거침 없이 이용하는 전위의 움직임도 남김 없이 잡고 있으며, 동시에 (비록 무능했을망정)고상하고 품위 있는 왕족들이 야만적인 대중 앞에서 맞이해야 했던 최후를 가감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 맨 앞에 보면, 루이 15세에게 칼을 휘두르다 가벼운 상처를 입힌 광인의, 사지 절단식 사형이 등장합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 모발 모두가 갑자기 희어지는 초자연적 경험을 맞았다고 하는데요, 이 책 맨 뒤에 나오는 앙트와네트 왕비 역시, 그 시련과 모욕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혁명은 마치 설원에 낭자한 핏방울의 흔적처럼, 그렇게 사회와 인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성장을 꾀하는 잔인한 진화의 총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가 정의인가, 누가 죽어 마땅한 반동이었는가, 이런 질문은 장엄한 역사의 전개 앞에 무의미하게까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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