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강의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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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은 한국적인 인문을 개척하여 우리 독자들에게 삶의 새로운 의의를 일깨운 분입니다. 열림원에서 나온 이 책도 생전 그의 주옥 같은 문장과 심오한 통찰을 잘 전달하는 멋진 글들로 채워졌습니다. 

요즘은 통섭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이어령 선생은 2006년 인문주간 학술제 개회식 기조강연에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문이과의 구분에 집착하는 한국식 교육제도의 병폐를 꼬집습니다. 머리 겔만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서 "쿼크"라는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며 우리는 언제 이런 화려한 경계넘나듦의 인재가 출현하겠냐며 관계자들의 맹성을 촉구합니다(p80).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공감을 주축으로 설계되어 있다며 만약 공감능력을 잃으면 자폐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지적도 있는데 선생의 시선은 이처럼 학문 간의 장벽을 완전히 허무는 경지입니다.  

선생은 본인부터가 기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지성이었고 1980년대에도 최루탄 냄새와 워드프로세서 사이에서 글을 쓴다던 유명한 수상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p115 같은 곳에서 이제 화성론의 시대가 갔다며 학생운동은 파괴할 대상이 비로소 없어질 때 그 꼰대들과 같이 죽을 수 있다는 냉철한 충고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은 그 행동이 달라야 하며, 창의력과 재미있는 사고방식이 컨텐츠에 꼭 포함되어야 그게 죽지 않는 정신이라고 선진화포럼 특강에서 젊은이들에게 일침을 놓습니다. 

요즘 한국인들만큼 책 안 읽고 학력이 떨어진 세대가 있겠냐며 엄청난 독서가이기도 한 선생은 젊은이들의 지식 습득 노력 부족을 질타합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네트워크 역량(p171)만큼은 또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건 간에 20대 젊은이들이 거침없이 품는 야망과 미래 비전이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이게 없는 나라는 죽게 마련이라고 선생은 말합니다. 네트워크를 통해 중지(衆智)를 모으고 집단지성의 꽃을 피우는 나라라야 세계를 향해 웅비할 수 있다고 선생은 젊은이들을 일깨웁니다.  

1988년 하계올림픽 때 개회식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의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과정에 선생의 역할이 컸다고 하며 실제로 KBS 등에서 생중계를 할 때 선생이 출연하여 이 의미를 직접 해설했다고 들었습니다. p226을 보면 6.25, 일제의 수탈 등을 겪으며 사방에 고아가 넘쳐나던 한국의 참상을 알던 세계인들이 바로 이 장면을 보며 눈물지었다고 선생은 회고합니다. 이때 외국인들은 대체 누구 아이디어냐며 선생을 칭찬했는데 선생은 우리 조상들로부터 받은 영감이었다고 응수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후 올림픽 개회식에는 반드시 어린이가 등장했는데 다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라고 하네요. 

대학은 필록테테스의 외로운 섬, 그 섬에서 창의력 가득한 사람이 자신만의 상상을 키우며 마침내 거대한 세계 하나를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선생은 강조합니다(p275). 선생은 자신이 명문대를 나오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노력과 모색의 비중이 훨씬 컸다며 학생들에게 남다른 모험심을 키우고 남들이 가 보지 않은 길을 걸어 볼 것을 권유합니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른 글자가 되기도 하는 한글의 창의력을 배워야 21세기에 알맞은 인재가 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p238을 보면 왜 훈민"정음(正音)"인지 선생만의 독특한 해석론이 나옵니다. 다른 표음문자들은 실제 언중이 발음하는 바를 귀납적(歸納的)으로 종합하여 만든 것임에 반해, 한글은 처음부터 조음 기관의 구조를 연구하여 그로부터 어떤 필연을 연역하여 만들었으니 일시 방편이 아니라 정음(正音)이라는 것입니다. 음성학적으로 이 견해가 과연 빈틈없이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문적으로는 감동이 밀려오며 한국인으로서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역시 천재가 노력까지 행하면 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먼 훗날 혹시 한국이 세계 앞에 웅비하며 그 뜻을 떨칠 날이 온다면 선상에서 사르트르나 하버마스 못지 않게 위대한 학자로 인정받으실 수 있겠다고, 이 책을 읽은 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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