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
이명찬 지음 / 서울셀렉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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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국과 일본의 위상이 역전되고, 오히려 한국에 선진국적 요소랄까 배울 점이 더 늘어나며, 반대로 일본은 침체한 사회 분위기에 발전과 혁신의 요소가 더 줄어들었다는 지적이 부쩍 늘어난 걸 감지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소위 "국뽕"의 위험이 있다고도 하지만, 명백한 팩트상으로 우리가 앞지른 건 그것대로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현황을 분명히 체크해야, 반대로 여전히 뒤처진 부분이 어느 지점이며 어떻게 해야 마저 역전이 가능할지 대책을 더 명확히 마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행어가 한 사회와 시대를 관통할 때는, 그게 그저 변덕스러운 유행의 결과만은 아니고 분명히 어떤 시대정신 같은 걸 대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네 분수를 알아!"라는 핀잔이 자주 들린다고 하는데(p88), 물론 자신의 한계와 역량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연한 흰소리나 허풍을 떨지 않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남 보기도 싫고, 무엇보다 실상의 자신보다 부풀려 말하는 게 습관이 되면 참된 자존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체면을 사리기 위해 거짓말을 떠들고 다녀도, 진짜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본인은 적어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수를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의 다짐이 아니라, 남을 핀잔주기 위해 "분수를 알 것!"을 외치는 게 사회적 습관이 되었다면? 이는 그만큼 "분수를 모르다가 큰코 다친 일"이 잦았다는 뜻도 됩니다. 사회의 활기가 줄어들고, 진행하던 일이 잘 안 풀리고, 사업이 실패하며, 혁신의 기풍이 드물어지면 그런 결과가 나오겠죠. 반대로 30~40년 전 일본 사회에 돈이 잘 돌고 해외에 수출이 원활하여 국부의 증진이 쉬웠던 시기에는 아무도 타인에 대고 "네 분수를 알라!"고 쉽게 소리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분수 같은 것 걱정 않고 의욕 있게 자신의 일만 추진해도 성공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거죠.

한국은 어떨까요? 일본에 비해 아직은 에너지가 넘치고 자기 일에 몰입하며 땀흘리고 신명을 바치는 분위기가 더 우세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갑질"이 많고, 남의 의욕을 꺾는 모욕적 언사가 어디에나 팽배한 건 (모르긴 해도) 일본에 못지 않은 듯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자신들 사회의 분위기를 두고 "국운이 쇠퇴해서"라고 하는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지금은 국운이 융성하고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라 만족하던 때가 있었나요?

1980년대가 살기 좋았고 금리도 높아서 목돈 만들기 쉬웠으며 웬만해선 사업이 망하지 않았다고들 회고하지만 각종 시위가 그토록 빈발하고 범죄율도 높았던 걸 보면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는 (민주화 이슈를 제외하고서라도)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렇다고 지금을 모두가 행복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겪은 중 최악이라며 불평하는 이들도 매우 많습니다. 이런 건 일본과 같은 잣대를 대어 비교 분석할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 "일본인들의 입으로 털어놓는" 심각한 침체에 대한 여러 발언은 한국인 독자 입장에서 매우 흥미로우며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듯합니다.

"일본은 우경화되었고, 한국은 민주화되었다(p96)." 우경화와 민주화가 단일한 평면에서 비교될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의 우경화는 이미 1980년대 혹은 그 이전 미키마 유시오의 자살 때부터 부각이 되었습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신사 참배나 교과서 왜곡 사태가 기점이었고 유시민의 책 초판에도 따로 한 챕터를 통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경화는 그를 넘어, 한국에 대한증오가 중심이 된 "혐한" 풍조가 또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그 전만 해도 점잖은 사람들은 설령 우파라고 해도 노골적인 감정 표현을 자제했었으니 말입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환상의 호흡(?)을 이룬 각료 중에 고노 외무 장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노 요헤이의 아들이며, 고노 요헤이는 일본의 책임을 일정 부분 인정한 고노 담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그 부친과 아들의 정치적 성향이 참 대조를 이룬 셈인데 이는 아베 신조의 부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베 신타로 씨는 온화한 인상에 대체로, 혹은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책에서는 "세대 교체와 더불어 진행된 우경화"의 한 상징으로 파악하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독자로서 가장 가슴 아프게 읽은 대목은, "일본인들이 지금은 저 고노 담화를 일종의 실수로 간주한다(p99)"는 문장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과가 실수"라고 강변하는 저들의 태도는 참으로 비양심적이고 유치한 작태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일본 일각에서 일고 있었던 온건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들과 협력을 강화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와 협력을 이끌어낼 생각보다는, 그저 우리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비둘기파가 자생할 틈을 오히려 좁힌 게 아닌가 싶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사과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어야지, 강요해서 받아낸 사과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왜 사과를 해야하는지 더 치밀하고 차분하게 팩트 위주로 접근할 필요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이미 이성적이고 관용적으로 상대를 대하자는 분위기는 양국 모두에서 물 건너간 듯합니다. 우리가 엄연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을 제외한 국제사회에서 보다 호의적인 여론을 못 끌어낸 것도 문제입니다. "일본의 금권력, 로비실력"이 광범위하다는 예도 드는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는 작년 이맘때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한국의 네티즌들을 포함해 모두의 여론이 대체로 한심하다는 쪽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일본에서는 과학이, 정치와 관료에 묻혀 버렸다"고 요약하는데 이 말이야말로 왜 일본이 민간 레벨에서의 투명성과 정의감, 활력 등이 부족한 채 갈수록 죽은 사회가 되어가는지 잘 요약하여 보여 주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관존민비"란 말이 있었는데 비단 한국사회의 문제만은 아니고 동아시아 3국이 고루 지닌 병폐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도리어 관(官)의 권위가 너무 떨어져서 일부 문제인데, 여튼 민간이 공적 섹터를 압도해 나가는 이런 점만큼은 한국이 좋은 모범으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을 분명 앞서가는 대목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한국은 대부분의 문서 작업, 의사 소통, 일상의 결제 등이 전산으로 이뤄지는 반면 일본은 마치 1980년대에 사회가 아직 머무는 양 모든 것이 물리적 페이퍼 위주입니다. 한국은 불과 십 분도 안 되어 "재난지원금"이 카드로 지급되지만, 일본은 본인 확인도 수동으로 거치고 계좌의 확인도 번거롭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결제에 있어 현금 의존율이 높다는 건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한국에서 결제에 현금을 선호하는 건 일부 비 프랜차이즈 점포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건, 한국인들 상당수가 이 점을 인식하고 있고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막연히 우리가 최고라는 식이 아니라, 왜 앞서고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앞으로도 우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고전의 말이 괜히 유효한 게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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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라면 유대인처럼 - 유대 5천 년, ‘탈무드 유머 에센스!’
박정례 편역 / 스마트비즈니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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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느 다른 동물 못지 않게 각박한 생존 경쟁에 시달립니다. 자연으로부터의 거센 도전에도 응전해야 하며,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 지어낸 사회라는 틀 안에서도 주어진 저마다의 역할을 해 내고 동시에 조직 내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과제를 떠맡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인간은 작은 여유를 찾고 낭만을 즐기며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며, 그런 활동이나 사고, 감정 표현은 "유머"라는 형식 안에 집약됩니다.

유대인 하면 대개 근엄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들의 지혜 보고라 불리는 탈무드 안에도 많은 유머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유머를 빚어낸 건, 아마도 타 종족의 질시와 견제 속에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려 든 그 치열한 노력 속에서 더 절실하게 반대의 여유가 필요해서였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잘 정리된 유머 중에는 약간의 슬픔, 애잔함, 역설, 혹은 자신을 시니컬하게 성찰한 씁쓸한 교훈 같은 것도 엿보입니다. 어떤 건 몇 번을 거듭해 읽고 그 숨은 뜻을 새겨 봐야 비로소 뜻이 와 닿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맛있는 음식(p63)"을 만드는 레시피는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이 돌 하나면 가장 맛있는 수프가 완성된다"며 가정 주부에게 건네 줍니다. 짐짓 맛을 보며 감자가 필요하다고 하자, 호기심이 구경 온 어느 부인이 집에 가서 가져오죠. 그 다음에는 야채, 그 다음에는 소금,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각자 조금씩 손을 보탠 재료가 들어가고, 즐거운 대화가 오가며 화목한 분위기가 조성되니 그 정체 모를 수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오병이어 이야기도 결국은 "나눔으로써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강조했다는 설도 있고, 물리적 영양보다는 모두가 함께 감정을 공유하는 훈훈한 분위기 자체가 음식의 맛을 최대로 돋운다는 결론이겠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듯, 수다를 떨고 이런저런 불편한 감정을 떨쳐 내면 자연히 배도 고프게 마련이지 않을지요.

"'당신이 내게 낫을 빌려 주지 않았는데, 내가 말을 당신에게 빌려 주겠소?' - 이것은 복수다. '당신이 내게 낫을 빌려 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을 빌려 주겠소.' - 이것은 증오다." 이 유머(p79)의 펀치라인은 마지막 줄입니다. 말을 빌려 줌으로 해서 이 사람은 상대방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고 명분을 갖추게 됩니다. 그는 상대에 대해 마음 놓고 나쁜 평판을 퍼뜨릴 수도 있고, 마음으로부터 확신하는 어떤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복수는 이런 근원적 증오에 비하면 일차원적 행동이며 위험성도 독소도 덜합니다.

"재산의 1/4을 주면 나를 존경하겠는가? - 대등하지 않은데 왜 그래야 합니까? - 그럼 절반을 주면? - 이미 대등한데 뭐하러 존경하겠습니까? - 그럼 전부를 주면? - 그때쯤 되면 나는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웃자고 만든 이야기겠으나 이것만큼 인간의 자기 중심성, 이기적인 본성을 잘 드러낸 표현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은 못해서 무시하고, 잘난 사람한테는 당연하다는 듯 시기와 질투를 일삼고... 이 유머의 진짜 교훈은, 타인과 이웃과 세상의 부조리함, 비이성적 감정적 반응을 그저 당연하게 여기고 반응하자는 것일 듯합니다. <사기열전>에도 모수가 평원군더러 염량세태에 상심하지 말라고 충언하는 대목이 있죠.

양치기 소년의 일화는 평소에 신뢰를 쌓자는 것이겠는데. 이 책에 실린 것은 좀 다른 버전(p142)입니다. 어른들이 의심하자 소년은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칩니다. "이렇게 천천히 오시니 제가 혼자 늑대를 쫓다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는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는데, 소년도 결사적으로 소리를 쳤을 뿐 아니라 어른들도 목숨을 걸고 쫓아와 달려들어 큰 피해를 "진짜로" 막았습니다. 반면 "책임감이 강하고 평소에 어른들에게 모의 훈련도 안 시킨" 정직한 양치기는 오히려 도와 주는 사람도 없어 혼자 사투를 벌이다 크게 다쳤다는.... 히틀러도 얘기한 바처럼 "거짓말을 할 바에는 아예 큰 거짓말을 하라."는 씁쓸한 교훈의 타당성이 여기서도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성실한 사람은 혼자 짐을 지다 허리가 부러집니다.

p219에는 미인을 얻기 위해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행동에 나서다 후궁을 호위하는 내시에게 들켜 목숨을 잃은 뻔한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왕은 오히려 청년의 담대함과 솔직함을 칭찬하고 큰 상을 내리는데, 죄를 저지른 자에게 원칙대로 형벌을 집행하려 했던 내시는 왕에게 크게 실망하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 역시 후궁을 취하려 든 게 아니라.... 궁을 나와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사촌이 땅이라도 사야 위장병을 고친다"라는데, 예전에 읽었던 <패러독스 이솝우화>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바로 위의 이야기도 그렇구요).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삽니다만, 그 고마움은 그 당연하다는 듯 여겨 온 편의가 사라져 봐야 비로소 절감합니다. p96에는 닭 등 가축을 집에 들였다 내 몬 후 그 평온과 질서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은 이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말 하루라도 인터넷이 끊기고 그 불편을 절감해 봐야 고마움을 아는 거죠.

촌철살인의 유머 속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진실, 혹은 알았다고 착각했지만 그 오의를 깨닫지 못하던 여러 귀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책 p117에는 "유일하게 자살하는 동물이 인간"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유일하게 유머의 가치를 아는 동물"도 인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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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는다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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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 승전국답지 않게 사회가 불경기와 좌절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파시즘이 발호하고 현실의 권력까지 거머쥔 나라가 이탈리아였습니다. 유럽 사회가 앓기 시작한 새로운 병을 그 나름 격렬하게 먼저 앓고 먼저 "괴상한" 처방을 내놓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처방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었고, 이를 세계에 처음으로 증명하다시피하며 온갖 망신도 당하고 사회가 큰 홍역을 치러 냈지만 여튼 이탈리아는 남들보다 앞서(?)갔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시간이 지난 지금은 직접 민주주의를 일부나마 실험 중인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를 일입니다.

이 연작 소설의 주인공인 소피아는 1978년생입니다. 이탈리아는 따지고 보면 1871년 통일된 이래(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도)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절을 못 이뤄낸 나라일 텐데, 소피아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합니다. 뭔가 어디서건 불안하고 다툼이 잦으며 좌건 우건 참 열정적으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합니다. 소피아는 나이 열여섯에 자살을 기도하는데 성향이 너무도 다른 두 부모 사이에서 격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어서였습니다. 마치 소피아는, 장년기를 지났으면서도 여전히 정서와 진로와 정체감이 흔들리는 이탈리아를 의인화한 듯도 보입니다.

"난 엄마와 똑같았어. 그리고 난 엄마와 같은 여자가 되는 걸 배우고 있었어.(p31)" 여자에게 있어 그 어머니는 언제나 롤모델이며 경원의 대상이며 불길한 앞날이고 발목 잡는 운명이며 원수 같은 친구입니다. 이탈리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지만 의외로 그 나라 사람들은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그들이 반도라는 터전 밖으로 활발히 나간 건 고대 로마 시절이 유일하지 싶습니다.

소피아는 또래 남자애들과 함께 해적 놀이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는 보편적인 이탈리아 어린이들의 정서라기보다 그 무렵 유행했던 영화의 소재가 해적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미국 대중 문화와 긴밀히 교류하며 자국 영화사보다는 미국 헐리웃 영화사에 더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서부극 장르에서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으며 해적 장르에서도 테렌스 힐(이름은 이렇지만 이탈리아인입니다) 주연의 이름난 흥행작들이 있습니다. 꼬마 이름이 오스카라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고모 마르타는 거의 밀라노를 떠나 본 적이 없는 토박이입니다. 올케(즉 소피아의 엄마)인 로사나처럼 격정적이기도 하며, 소피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소피아 같은 불안정한 아이의 삶을 자신이 미리 살기라도 하듯(독자의 눈에는 그리도 보입니다), 이런저런 방황을 합니다. 이미 죽음이 예견되지만 자유를 향해 필사의 도주극을 벌이는 <대탈주>의 스티브 매퀸(p86)처럼 마르타는 자신의 일상 루틴에 흠뻑 젖어 무아지경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유난히도 이 작품들에는 마치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처럼 맥락에 따라 갖가지 미국 상업 영화들이 자주 언급되며 아득한 추억을 환기합니다.

"무정부 상태가 언제 올까" 19세기 독일이나 프랑스, 혹은 멀리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진보진영의 주류로 자리했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도 큰 세를 얻었습니다. p166에서 크로포트킨 책이 언급되는 것도 아마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반면 1960년대 후반 프랑스(마르타가 마치 유학생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에서는 온갖 사상의 혼동 속에 치기어린 마오이즘이 일각에서 한때 큰 호응을 얻기도 했죠(영화 <몽상가들>에 나오듯).  이 부근에서 서사는 마치 2인칭 시점처럼 펼쳐집니다. 때로는 누가 지금 누구의 삶을 언제 살고 있는지도 서로 헷갈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무정부는절대 자유이며 일체의 억압이 제거된 정직한 이상향입니다.

미스터 바탈리아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3세(p255)입니다. 이탈리야계 이민자들은 미국 현대사에서 갖가지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기에 애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소피아는 거의 내내 밀라노에서 성장하지만 그녀와 그 친구들, 친지들은 한쪽 시선이 항상 미국을 향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미국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그러면서도 격렬히, 열정적으로 이탈리아이고 싶어하는 모순된 감정이 이 연작들 중 소피아를 통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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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럽지만 왠지 귀여운 생물도감 - 생물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깜짝 반전 매력!
로 지음, 가와사키 사토시 외 그림, 이유라 옮김, 사네요시 다쓰오 감수 / 키즈프렌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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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려서부터 각종 생물, 즉 동식물을 두루 책 한 권으로 살펴볼 수 있는 각종 도감류들을 많이 접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의 포맷이 꼭 아니라 해도, 즉 유튜브 같은 비디오 플랫폼을 통해서도 각종 동식물의 생태를 학습, 혹은 그냥 재미로 구경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6SEj6I-vKEL9tL5aAHHyZg 이 주소로 들어가면 "로"라는 일본 분이 운영하는 채널이 있는데 구독자가 25만 5천명에 달하는 큰 곳이더군요. 여기서 갖가지 징그러운 동물, ㅎㅎ 신기하게 생긴 녀석들을 자세히 살피고 어린 독자들에게 더 친근한 방법으로 소개해 줍니다. 사실 저희가 어렸을 때에도 솜씨 좋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활약했던 터라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매우 실감나게, 멋진 솜씨로 지면에 옮겨 비주얼 어필을 했습니다만 아무리 붓 끝의 솜씨가 좋아도 동영상에는 미칠 바가 못 되죠.

이 책에는 모두 70종이 넘는, 정말 신기하고 기괴하게 생긴 동물들이 나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사람은 깔끔하고 흠이 덜 난 매끈한 외관을 지닌 편이 아름답다고들 여기지만, 이들 동물들은 아마 갖가지 기묘한 주름, 뒤틀림, 혹은 독특한 냄새 등을 지녀야 자기 종 안에서 주목을 받을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괴이한 외양을 갖추어야 생존에 더 유리할 수도 있겠죠.

요즘은 어린이 책에 곰벌레 같은, 육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동물이 부쩍 자주 등장합니다. 저는 작년 11월에 <아르마딜로와 산토끼②>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소설에도 눈에 안 보이는 대벌레가 나와서 우리 인간처럼 덩치 큰 동물들과 친구로 어울리며 대화도 나누는 판타지가 나옵니다. 이를 확대해서 본 모습이 책에 나오는데 뭐 그냥 안 보고 그런 애가 있더라는 정도로 넘어가는 게 좋았다는 후회가 들 만큼 애가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ㅎㅎ 하지만 이는 어른인 제 생각일 뿐이고, 저희 때와는 달리 눈에 안 보이는 작은 생명체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질 만한 어린이들은 이런 괴기한 모습을 보고도 좀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죠? 책에는 QR 코드가 따로 나와서 앱을 써서 찍으면 자동으로 해당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배려합니다. 유튜브 채널이 먼저고 북 버전이 이렇게 뒤에 나온 거라서 동영상 (도감)이 사실 메인입니다.

열두줄극락조는 영어 이름으로도 그대로입니다. 우리말 이름이 영어를 직역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아이는 징그럽다기보다는 우아합니다. 블로브피시는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자바 허트처럼 생겼는데 생겼다기보다는 생기다 만 애 같습니다. 바다달팽이는 달팽이라기보다 어떤 예술가가 젤리를 소재로 삼아 인위적으로 만든 조각 같기도 하고 아이들이 갖고 노는 슬라임처럼도 보입니다.

생긴 것만 보면 정말 희한합니다. 어떤 동물은 너무도 아름다운 곡선과 색채를 지녔기에 자연이 아닌 인공물 같으며, 어떤 동물은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에 나오는 갖가지 미술품이나 영화 <프레데터>에 나오는 빌런과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각자의 이유로 절실한 투쟁 끝에 그런 모양으로 진화했거늘, 우리 인간이 그 모습을 두고 편협한 느낌이나 즉흥적인 인상을 함부로 논할 게 아닙니다. 이런 도감을 통해 아이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뭘 판단하기보다, 자연의 신비 앞에 보다 겸손해지고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중한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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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병맛 챌린지
마들렌북 편집부 지음 / 마들렌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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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끔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병맛" 넘치는 행동을 해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는 말도 있지만, 천성이 자유로운데 이처럼이나 각종 속박과 제약에 시달리니, 가끔이라도 한 번쯤은 반대편으로 핸들을 확 꺾기도 해야 사람이 제정신이 유지될지도 모릅니다. "워라밸"이란 말도 있지만, 병맛이라고 하면 워크보다는 라이프에 원래 그 함량이 더 듬뿍 담겨야 제맛인 것도 같네요. 라이프에 병맛의 농도가 진해지면 진해질수록 사는 게 사는 것 같을 수도 있고요.

책 맨처음에 제안되는 챌린지는 "책꽂이에서 아직 읽지 않은 책 꺼내읽기"입니다. 이것은 병맛 넘치는 행동(도전)이라기보다, 원래 같으면 "미뤄둔 숙제 마저하기"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책 꺼내 읽는 정도를 놓고 "일"이라고는 못하겠으니 이것은 워크보다는 라이프 쪽입니다. 이걸 병맛 챌린지로 처음 시도하는 건 두 가지 장점이 있겠는데, 허나는 같은 숙제(?)라도 숙제가 이닌 마구하는 일탈 정도로 생각하면 오히려 책장이 잘 넘어간다는 겁니다. 또다른 이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튀는 병맛 챌린지를 맨 첫날에 하면 너무 부담이 되어서 나머지 일정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죠. 고립된 탄광 등에서 구조된 사람이 급하게 음식을 섭취하면 안 되듯, 병맛 챌린지도 서서히 그 강도를 높여 가야 일상 자체가 완전히 맛이 가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을 듯합니다.ㅋ

p34에는 또 "아무 책이나 장르 무관 하루 한 페이지 독서하기"라고 해서 책 관련 미션이 나옵니다. 이 역시 챌린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온건합니다. 또 저는 은연 중 얍삽하게 이런 마일드한 챌린지만 골라서 도전하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갖가지 과격한(?) 병맛 챌린지 제안을 보면, 역시 병맛도 아무나 풍기는 게 아니구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듯 과격한 병맛 챌린지를 시도할 줄 알아야 인생에 진짜 자유가 생기겠구나 싶기만 합니다. 사실 루틴의 노예로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별로 없으니 말이죠.

p59에는 "불의를 외면하기" 미션이 제안됩니다. 예를 들면 전철에서 자리 양보 안 하는 젊은이에게 눈치를 준다거나 하는 게 "불의를 외면 안 하는 정의로운 행동"이라면, 저는 거의 매일 불의를 외면해 왔던 셈입니다. 그러니 병맛은 본인만 모르고 있었을 뿐 나의 일상에 언제나 원치 않는 동반자로서 함깨 했던! 매일매일에 거의 병맛 양념이 빠지지 않았던 나의 인생! 새삼 뭘 챌린지하고 뭐하고 할 것도 없었던! ㅠ

p73에는 "헤어진 연인에게 맨정신에 연락해보기"가 있습니다. 이거는 맨정신뿐 아니라 술김에 해도 여전히 병맛이겠으며, 아니 음주라는 극한 병맛짓이 결들여져 아예 병맛의 완성을 보여 줄 것 같습니다. ㅎㅎ 맨정신에 이걸 하라니 챌린지 한 번에 평판을 종칠 수도 없고... 근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이런 걸 해야 어쩌면 이 책을 펼쳐 들고 챌린지를 하는 보람이 있는 거겠고... 아무튼 이거는 진짜 겁이 나서 못하겠으니 좀 순한 맛으로 더 골라 보겠습니다.

p170에는 애인과 내기해서 꿀밤 때리기가 나오는데 현재 없으므로 이것도 역시 제겐 불가능합니다. 드라마 <셜록>에 보면 마그누센이라는 방송사 사주가 왓슨의 눈두덩에 딱밤 치는 장면이 있는데 물론 서로 모르는 사이이므로 엄청난 모욕입니다. 그런데 사정을 모르면 다 큰 어른들, 아니 중늙은이들이 저러고 놀고 있으므로 되게 웃긴 병맛짓입니다. 애인 말고 친구하고 저기 탑골 공원 같은 데 가서 저러고 놀면 진짜 완성도 높은 챌린지가 될 것 같습니다.

인스타에다 나흘 치 미션을 올렸습니다. 아직 좀 서투른데 감정을 정리하고 나서 한 달쯤 뒤 다시 새로운 병맛 챌린지를 해 볼 생각입니다. 예쁘고 귀여운 이 책이 많이 도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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