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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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인 에어를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아마도 대학을 갓 졸업한 후였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20대의 처녀가 상당히 두꺼운 제인 에어를 읽어낼 수 있었던 힘은 로맨스때문이었다. 동화책과 할리퀸에서 많이 읽었던 어려운 처지의 처녀가 역경을 딛고 부자인 남자와 결국은 해피엔드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순정만화와 사춘기 시절 하이틴 로맨스를 교과서보다 더 많이 읽어냈던 나는 20대 중반에 읽은 제인 에어도 그런 맥락에서 읽었다. 감동적인 해피엔딩의 연애소설로 기억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고전으로 제인 에어를 추천하였고 단 한 번도 원망을 들은 적이 없다.

제인 에어를 처음 읽었던 나이만큼의 세월이 지난 후 제인 에어를 다시 읽게 되었다. 나는 제인 에어를 아주 잘 쓰인 로맨스 소설로 여기고 있던 터라 줄거리를 다 아는데 또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세상도 흉흉하니 가벼운 연애 소설로 마음을 몰캉하게 하고 싶기도 해서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2권 분량의 완역본을 찬찬히 읽게 되었다.

, 우리는 고전이라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읽지도 않고서 읽었다고 착각하거나 읽었음에도 기억을 못하는 것이 고전이라고 했던가! 20대 처녀였던 내가 만난 제인 에어와 지금 다시 만난 제인 에어는 내가 든 나이만큼이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같은 작품 같은 인물이 많이 다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로맨스를 그리기 위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갖다 쓰고 돈 많은 중년의 남자 주인공을 만들어 낸 줄 알았는데, 제인 에어라는 여성이 어떻게 성숙하고 성장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 시절의 우울을 배경으로 깔았고 돈 많은 중년의 남자를 조연으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눈에 띄었다. 과거와 현재에 내가 느낀 독후의 차이는 그 만큼 내가 성숙했다는 증거이겠지만, 왜 처음 제인 에어를 만났을 때 이 성숙된 감상을 가지지 못했는지 왜 세월이 흘러서야 푹 고아낸 사골 국물 같은 깊이가 나와야 한 건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낀 성찰과 감상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이번에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깨달은 두 가지 고전의 법칙이 있다.

첫째, 주인공은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떠나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떠나야 고전이 된다.

제인 에어는 자신을 키워준 리드부인의 저택을 떠났고 유년기를 보낸 로우드 학교를 떠났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집을 떠났다. 오디세우스가 문학작품에서 가출(?)의 시작을 알렸고 같은 그리스의 영향권아래에 있던 오이디푸스도 그러했다. 동양권에서는 서유기의 손오공이 삼장법사와 길을 떠났고 우리나라에선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울분에 못 이겨 집을 떠났다.

경계 안에 머물게 하는 울타리는 안전하지만 역경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아픔과 성장은 역경을 동반하는 것. 그래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떠나고 있다. 엄마를 찾아 삼만 리나 되는 길을 떠나고(엄마 찾아 삼만 리), 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따라 섬으로 떠나고(그리스인 조르바), 떠날 구실이 마땅치 않으면 비행기 사고라도 내서 섬에 표류하게 만들며(파리 대왕), 이즈마엘처럼 배 타고 멀리 바다로 떠나보내지(모비 딕) 못한다면 작은 배라도 만들어 매일매일 주인공을 바다로 내몰곤 한다(노인과 바다). 삶도 고전이 되려면 일단 떠나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이 많아야 한다. 스토리만으로는 고전이 될 수 없다.

내가 20대에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로맨스만 기억했던 이유는 줄거리만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같은 출판사의 같은 텍스트를 읽었다. 그때의 나는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은 건너뛰고 대화와 줄거리만을 쫓았다. 그러다보니 제인 에어가 어떤 생각의 지도를 어떻게 그렸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으니 제인 에어의 생각을 따라 책을 읽어 나갔다. 어떤 순간과 상황에 맞부딪힐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떤 결심을 하였나에 더 관심을 두었다. 제인은 소설의 처음과 결말에 사고가 변화하였다. 여러 개의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그녀의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진 탓일 게다.

인생 속의 상황이라는 것이 소설이든 실제이든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태어나고 친구를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이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느냐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숙제이다.

고전에서는 독백과 생각의 흐름이 많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작품의 반 이상의 주인공 알료샤의 독백과 생각이거나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의 대화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철학이 있고 가치관이 있으며 질문이 있고 해답이 있다. 이것은 순전히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독자들은 책을 읽고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작품인지 전혀 파악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알료샤의 독백과 조시마 장로의 생각과 그 둘의 대화를 곱씹어 읽으려니 고전을 읽는 것이 품이 상당히 드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또한 웬만한 철학책에 맞먹는 이해와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만 그렇겠는가? 현재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작품들의 대다수가 생각과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정신과 가치관과 철학을 향유하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고전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작품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나 세월이 몇 십, 몇 백 년이 흐른 지금에나 원형은 같다. 인간의 삶과 고민은 형태를 달리할 뿐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근원은 거의 같기 때문인데,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제인 에어는 어린 시절 헬렌 번즈라는 친구를 잃고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스스로 고난을 찾아 떠났다.

"나는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갈망했다. 나는 자유를 원해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 소리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를 그치고 좀 더 겸손한 탄원을 했다. 변화와 자극을 달라고 기원했다. 그 간절한 애원마저 막연한 공간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게 새로운 고생살이를 하도록 해주소서!"(152)


새로운 고생살이를 찾아 떠난 제인은 손필드 저택에서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였다. 이러는 동안 제인은 스스로 단단해져 가며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갔다. 로체스터의 비밀을 알게 되고 손필드 저택을 떠나 옆구리를 할퀴는 기아까지 경험하면서, 제인은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하게 되고 성숙된 인간으로서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생명은 모두 요구와 고통과 책임을 그냥 지닌 채로 아직도 나의 것이었다. 지워진 짐은 날라야 했다. 욕구는 충족되어져야 하고, 고난은 견디어야 하고 책임은 다해야 했다. 나는 출발했다." (P175)

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고 삶의 나침반을 가다듬은 제인 에어. 제인 에어를 다시 읽으면서 심장을 간질이는 로맨스뿐만 아리나 내 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인생 훈련법을 또 하나 배우게 되었다. 이래서 고전은 읽는 나의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나는 어디로 떠나야 할까? 어떤 방향을 기준점삼아 출발을 해야 할까? 고전을 덮으면서 내 의문은 더 늘어만 간다. 답은 떠나야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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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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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벼무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찰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조선 양반들의 냉대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책 더미 속에서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의 고통과 고뇌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발행된 2005년에 내가 왜 이 책을 외면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책 표지의 뒷짐 진 선비가 고리타분해 보였거나, ‘책만 보는 바보’라는 제목에 공연한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15년 전의 내가 그저 책을 멀리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아는 귀한 보석 같은 내용을 나만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가 15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낭패감마저 느껴진다.


궁궐 공부와 답사를 위해서 창덕궁 궐내 각사에 있는 ‘규장각’과 그에 딸린 부속 건물인 ‘검서청’에 간 적이 여러 번이다. ‘규장각’과 ‘검서청’을 공부하기 위해서 참고로 한 자료에는 “‘검서청’은 규장각에 딸린 부속 건물로 규장각의 관리인 ‘검서관’들이 야근할 때 주로 이용한 곳입니다.”라고 설명이 되어있었다. 그리곤 덧붙여져 있었다. “규장각 검서관으로는 잘 아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있었습니다.”

굳이 그 참고 자료가 아니더라도 나는 진즉부터 박제가와 유득공이야 유명한 저서인 <북학의>와 <발해고>덕문에 이름을 알렸다고 하지만 이덕무는 왜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북학의>와 <발해고>는 들어보았지만 이덕무의 저서나 업적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만 보는 바보>로 인해서 간밤에 쌓인 눈이 다음 날의 눈부신 햇살에 이른 아침부터 사르르 녹듯이 내가 가진 의문점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였던 이덕무는 정조 임금님을 보필하여 수많은 정책의 산실이자 보고(寶庫)였던 규장각을 규장각이게끔 만든 장본인 중 한 사람이었다. 역사 속에서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은 꼭 전쟁에서 적군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어떤 물건이나 유산을 창조해야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제 자리에서 제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해내는 것, 지름길을 찾지 않고 능력껏 임무를 완수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충분히 잘 굴러갈 수 있다. 이런 단순한 진리에 요령을 피우기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간혹 빠지기도 하고 수레가 넘어지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도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엄중한 신분 체제 아래에서 서자로 태어나 ‘창고 속의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이 세상에 쓰일 데가 없다’는 것에 좌절을 느끼던 이덕무. 책과 벗들과 함께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니 그 쓰임을 다하는 날이 왔다. 임금이 바뀌었고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도서관이 생겼으며 비록 정기적인 녹봉을 받지는 못하지만 검서관이라는 관직도 하사받았다. 책만 보고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이덕무는 늘 가슴 아래가 묵직한 청춘을 보냈지만 마침내 마침맞는 보직을 하사받아 스스로가 빚어낸 삶이 희미한 빛을 내게 되었다.

<책만 보는 바보>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당연히 ‘책’과 관련된 것이고 둘째는 이덕무의 벗과 스승에 대한 것이며 마지막 셋째가 규장각과 검서관으로서의 이야기이다.


이덕무는 일곱 살 즈음에도 밖에서 놀기보다 책과 함께 노니는 것을 더 즐겼다. 그런 그였으니 책과 함께 하는 순간에 작은 그의 서재(청장 서옥)는 더 이상 작은 곳이 아니라 푸른백로(청장)가 맘껏 날갯짓을 할 수 있는 드높은 창공이었을 것이다. 이덕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책도 질투할 만큼 이덕무가 더 사랑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벗 들이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 내 가슴이 가장 흔들렸던 부분도 바로 이덕무의 벗들 때문이었다. 그저 국사 책에서 한 줄의 딱딱한 글자로만 접했던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홍대용, 박지원은 역사 속 죽은 인물이 아니었다. 이덕무와 함께 다가온 그들은 나에게도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고 친구였으며 스승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박제가에게 특히 더 마음이 갔다. 기골이 장대했던 박제가는 서자로서 비뚤어진 세상을 원망하고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양반들에게 분노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받기도 하고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박제가는 그렇지만 표현하지 않은 가슴속 따스함을 가진 사내였다.


얼벼무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찰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조선 양반들의 냉대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책 더미 속에서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의 고통과 고뇌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원래 나는 메이저보다 마이너에게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다. <책만 보는 바보>에 나오는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대개다 조선의 마이너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 한마디, 마음 한구석,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흔들었다. 왜 이덕무와 그의 마이너 한 벗들을 2005년부터 사귀지 못하였나 하는 안타까움이 이 벗들을 대하면 대할수록 깊어지고 있었다.책, 벗, 공부법, 세상을 바라보는 법 - <책만 보는 바보>를 읽고 느낀 점도 수십 가지이고 나눌 말도 몇 십여 가지이지만 가끔은 말은 아낄 때 더 빛이 나는 법. <책만 보는 바보>의 마무리는 ‘벗’에 대한 박제가의 생각으로 하고자 한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121쪽)

두 살, 일곱 살, 아홉 살 그리고 열세 살 어린 벗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눈 이덕무와 친구들- 백동수, 유득공, 박제가 그리고 이서구. 위의 박제가의 말처럼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진정한 벗이 생각나는 이 밤, 잘 못하는 소주 한 잔 기울이고픈 머언 고향의 친구들이 저절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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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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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는 1999년경부터 2002년 중반까지 박완서 작가가 이곳저곳에서 발표했던 에세이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펴낸 산문집이다. <두부>가 발간된 것은 2002년 10월인데 이때는 작가가 칠순하고도 2년이 된 해였다.


박완서의 산문을 보면 작가에게 평생 그리움을 안겨주었던 고향 개성 박적골과 평생 책임과 숙제처럼 남겨졌던 6.25전쟁이 없는 적이 없다. <두부>에서도 그렇다. 5부로 구성된 <두부>의 2부인 아치울 통신은 박완서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과 가장 비슷한 산과 들을 품은 곳, 아치울로 이사 가서 사는 일상을 꽃과 나무와 새들의 이야기와 함께 담아내었다. 아치울 통신이라고는 하지만 5할은 아치울에 투영된 고향의 그리움이 곳곳에 배여있다. 3부 이야기의 고향은 늘 작가가 그리워 한 고향 박적골 이야기가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백반 집의 공깃밥과 김치처럼 얹져져 있다.


1부와 4부는 결이 좀 다르다. 노년의 자유라는 주제로 글이 모아진 1부는 칠순 즈음이 된 작가가 나이 듦과 노년의 시간에 대하여 때로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작가는 노년의 시간을 시간 속의 미아가 된 것 같다며 두려워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세상을 가볍게 보아 넘겨도 되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며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한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나이 듦이기에 노련한 작가마저 노년의 시간과 자유에 대해서는 노련하지 않게 청춘을 대하는 20세 젊은이처럼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글 속에서 느껴진다.


단출하나 3개의 에피소드로 된 4부에서는 작가를 사로잡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 명은 김윤식 평론가이고 다른 한 명은 박수근 화가이며 마지막 한 명은 이영학 설치미술가이다. 이름만 알았던 김윤식에 대하여 소소하나마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 수 있었고 박완서 작가의 처녀작 <나목>을 통해 이미 알았던 박수근 화가의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산문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으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영학이라는 설치미술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두부>를 통해 알았다.


박완서가 글을 잘 쓰는 소설가임은 대한민국에서 책 좀 읽어보았다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를 일컬어 한국 문학의 대표, 상징, 대모라고 해도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데에 반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박완서의 소설을 2편 밖에 읽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재미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의 소설이 엄청나게 재미있다, 박진감 있게 흥미진진하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내 문학적 이해와 공감이 아직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와 흥미를 떠나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박완서는 '글을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쓴다'라는 것이다. 그의 산문을 읽다 보면 감정의 표현과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의 묘사와 상황에 대한 비유와 은유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내고 저런 묘사를 그려낼 수 있는지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당연히 알고 있던 것들을 비유와 은유로 끌어내어 작가가 쓰고자 하는 상황을 독자가 바로 글을 읽는 그 순간 바로 내 일처럼 느끼고 공감하게끔 하는데 이런 작가의 능력에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는 표현밖에 하지 못해서 참담한 마음뿐이다.


박완서의 책, 특히 산문집을 읽으면서 줄을 치며 읽는 부분이 많은데 그 줄친 부분이라는 것이 헤세의 <데미안>처럼 철학적 사유를 위해 두고두고 읽으려고 그은 밑줄이라기보다는 '한국어'를 이보다 더 이상 맛깔나게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우리 말의 아름다운 표현 때문에 그은 밑줄인 경우가 더 많다. 박완서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의 상황에서 가장 영롱하게 빛나는 명사를 골라 또 그 영롱한 명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동사와 형용사를 찾아내고 배치하여 한국의 정서를 가슴에 안고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의 글을 읽는다면 입으로 탄성이 절로 나고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을 만큼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 이번 책 <두부>도 나에게는 그런 책이었는데 책을 읽다가 표현이 너무 찬란하고 처절해서 줄을 긋다가 긋다가 온통 줄을 그어 댄 통에 나는 중간쯤 가다가 그만 줄 긋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두부>의 1부 노년의 시간에서는 시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세월에 대한 느낌을 쓴 것들이 많았는데 나도 어느덧 중년이 되고 나이 듦을 몸으로 마음으로 절절히 체험할 때이다 보니 그 어느 글보다 가슴에 와닿고 줄 칠 부분이 많았다.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힌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 (p136-137)



어느 늦은 가을 해 질 녘, 서쪽 하늘의 불타는 듯한 저녁노을을 보고 '처절하게 붉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내 표현이 성에 차지 않았었다. 그런데 박완서의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하고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하다'라는 언어 사용의 적절성을 보고 박 작가를 통해 국어의 아름다움과 글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집착에 매여 있기에 내 저녁의 노을이 아름다운 줄 아직 알지 못하겠다. 아니, 눈으로만 아름다움을 알되 가슴으로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겠다. 아직은 조금 더 치열한 중년을 보내고자 한다. 그러고 난후 이십 년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날 때쯤이면 나도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의 진정한 아름다움의 이치를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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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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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ㄴㄹ

내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옥살이하는 그도, 재판받는 그도 아닌, 한모의 두부를 향해 고개 숙인 그, 입술 주변에 허연 두부파편을 붙인, 적나라하게 초라해진 그였다. - P29

젊은이는 고분고분 두부를 받아먹으면서 먹물처럼 계속해서 어둠을 풀어내고 있었다. - P31

그런 날이 오기전에 그가 먼저 세상을 떴고, 그가 땅에 묻힐 때 그 옆에 내 자리까지 잡아놓고 나니, 내 여생은 6.25같은 국난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눈 팔 것도 샐 구멍도 없이 막힌 길이나 다름없었다. 나느 그 빠져나갈 길 없는 정해진 통로에 문득문득 공포를 느꼈다. 그건 죽음의 공포하고는 또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따분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이렇게 메마르고 삭막해도 되는 것일까. - P41

노망이란 무엇일까?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을 돌이킬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착란,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을 안 변하는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고통스러운 망상, 죽음이 보이는 시점에서 어린시절로 돌아가려는 퇴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 P43

건강한 육신에도 얼마든지 망령된 생각이 깃들이는데 나이와는 상관없이 상상력이 자유롭고 또 그걸 곧장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졋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 P47

나처럼 오랫동안 변치 않은 고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만도 얼마나 큰 복인가. 그리고 그건 나에게 맞는 복이었다. 만약 내가 고향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면 그날이 바로 마음속에 있는 내 고향, 이상화된 농경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상실하는 날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어떻게 변했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보아버리면 다시는 안 보았을때로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일단 글을 깨치고 나면 문맹산태가 되는것이 불가능하듯 말이다. - P51

병을 앓고 있다고 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병다운 고통이나 자각증상이 거의 없는 대신 남이 눈치채지 않도록 고이 간직해야 하는 부담감이 소유의 불편과 맞먹기 때문이다. - P53

처음 그 병의 진단을 받고 선뜻 믿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 벌써 성인병이라니. 하는 아직 젊은 마음 때문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어차피 노년의 문지방이란 누구나 그렇게 떠다밀리듯이 넘게 되어 있는 게 아닐까. - P55

대개 성인병의 내방을 받는 것은, 제 몸 안 돌보고 길러낸 자식들이 제각기 거들먹거리며 부모 슬하를 떠나갈 무렵이다. 애면글면 돌보고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없어진 허탈감을 메워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몸이 그 존재를 드러낸다. - P56

나는 이제 소주 한잔에 삼겹살 한점을 먹고 싶어도 그 전에 내 몸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아부까지 해야 한다. - P56

옛날사람이면 늙은이보다도 더 오래된 사람이 아닌가. 나는 현란하게 흥청대는 첨단의 소비문화 한가운데서 미아가 된 것처럼 우두망찰했다. 그때 그 미아의 느낌은 공간적인 게 아니라 시간적인 거여서 어딜봐도 귀로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하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 P68

실루엣만으로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게 바로 피붙이의 징그러움이다. 달려가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냐고 다짜고짜 때리기부터 한다.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내 새끼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타들어가던 애간장이 스르르 녹게 된다... 최고의 엑스터시도 육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걸 어이하리 - P75

담장 밖 시냇가에 황금갑옷을 입은 듯 장엄하게 물들엇던 은행나무가 엊그저께 아침에 보니 마지막 잎새도 안 남기고 황량하게 옷을 벗어던져 내가 본 찬란한 영광이 꿈인 듯 허전하더니, 살구나무는 천천히 질 모양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낙엽은 은행나무처럼 찬란하지 않은 소박한 누런색이지만, 가지 끝의 잎들은 부끄럼 타듯이 살짝 붉다. - P78

차가 긴 강변북로를 벗어나 구리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진지한 가로수가 나타났다. 평소 무자비할 정도로 뭉턱뭉턱 전지한 가로수를 꼴 보기 싫어했는데 하나같이 박수근이 그린 겨울나무들이 거기 나와 서 있는 것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 P97

잎과 꽃과 열매까지 포함해야 나무의 전체가 되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것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목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없다는 게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게 거침없이 당당하고 늠름해 보엿다. 나무의 맨몸의 아름다움에 배하면 꽃이나 잎은 한낱 가식이나 방편에 지나지않은 것처럼 부질없게 여겨졌다. 사람도 만일 일생 쓰고 살던 위선이나 허위를 떨어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을까. - P98

흙의 에센스가 바로 이런 거다 싶은 강한 냉이맛이 수액처럼 고루 펴지면서 마치 내가 한그루 나무가 된 양 싱그러워지는 걸 느꼈다. - P106

기상이변이란 바로 하늘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하늘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원초적인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도 없다. 덮어두엇던 죄의식까지 불러내기 때문이다. - P116

한결 성기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굵은 빗줄기는 마치 은빛 회초리처럼 대지를 향해 강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19

가을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 대총봉이나 내장산처럼 자지러지는 단풍은 아니었지만 산정에만 드문드문 보이던 황갈색이 어느 틈에 중턱까지 퍼졌다. 봄은 기를 쓰고 올라가더니 가을은 이렇게 신속하게 내려오고 있다. - P132

내 안에는 아직도 내 힘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떨림이 남아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모진 세상, 미지의 운명 앞에 이리도 알몸인듯 시린가. - P134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 P136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랫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 P137

소설은 허가맡은 거짓말 - P202

늙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산천이나 초목처럼 저절로 우아하게 늙고 싶지만 내리막길을 저절로 품위잇게 내려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나이가 좋다. 마음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안하고 싶은 건 안할 수 있어서도 좋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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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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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아는, 하지만 이름은 모르는, 도서관에서 몇 번 스치다가 서로의 얼굴이 익숙해진 그냥 아는 사람이 적극 추천하였다. 굉장히 감명깊게 읽었어요. 한번 읽어보세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헌신으로 어렵게 대학을 마쳤습니다. 탁월한 수업태도와 성적으로 석박사를 취득하고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은행장 출신의 아버지를 둔 양가집 규수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어여쁜 딸도 하나 낳았습니다. 1,2차 세계 대전이라는 불안한 세계 정세 속에서도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여 수많은 논문을 제출하였고 책도 몇 번 출간하였습니다. 동료 교수의 시기와 질투로 강단에 서는 것에 애로가 많았지만 끈기와 인내로 잘 극복하였습니다. 평범한 사람인지라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옆길로 새기도 했지만 대학의 정년보장 교수직을 무사히 마치고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습니다.


줄거리를 쓰고보니 스토너씨의 삶은 통속적인 기준으로 볼때 전혀 소설감이 아니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가난한 집 아들의 성공기 혹은 일대기쪽이 더 가까울 수도. 그래서일까? <스토너>는 1965년 존 윌리엄스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의 삶이 가진 평범성과 일반성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토너씨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는 1965년 즈음 미국을 비롯한 세상의 시대상황은 용광로 속 불꽃이었고 땅 속 마그마를 곧 내뿜으려는 활화산이었다. 스토너씨는 50년동안 책 속에 잠들어있다가 2015년 어느 날 세상과 다시 조우했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씨를 만나고자 한다.


20세기에 왜 스토너씨는 사람들에게 잊혀졌고 21세기에는 무엇때문에 사람들에게 소환되고 기억되어질까?




- 스토너는 대학에 입학해서 생활비와 숙식비를 버느라 알바와 공부를 병행했다. 부족한 실력에 조바심이 일었지만 공부시간은 늘 모자랐다. 그가 일하는 시간 역시 고용주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만큼 늘어갔기(p17) 때문이었다.


-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앞두고 친구들이 입대를 결정할 때 스토너는 그때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지만입대를 않고 남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p55)


- 친구가 많지 않았던 스토너의 대학에 로맥스라는 새로운 교수가 부임해왔다. 스토너는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은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p133)


- 영문학과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한 스토너는 학문에서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때문에 너무 고민한 나머지 이제는 그 고민이 습관이 되어 구부정한 어깨만큼이나 그의 일부가 되었다(p158)


- 교수로서 아버지로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인생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스토너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고 알고있던 것들이 머리에서 싹 비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한 상태,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 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p251)


- 스토너는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없이 열정을 주었다.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p353)


- 세월은 흘러 스토너도 은퇴할 때가 되었다. 이른 은퇴를 권유하는 고든에게 스토너는 대답했다.시간이 생겨도 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걸세. 그런 걸 배운적이 없으니까.(p355)


- 생의 끄트머리에서 스토너는 남들 눈에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고 사랑을 원했으며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꾸었다.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스토너는 자신에게 물었다.넌 무엇을 기대했나?(p387)




세속에서 말하는 영웅의 삶도 아닌 스토너씨.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 교수님일 수도 있으며, 어제 회의실에서 크게 깨지고 저녁에 술 한잔 같이 기울인 상사일 수도 동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스토너씨는 오늘 회사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매 순간순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있는 바로 나 일수도 있다.


책의 초반에는 흔하디 흔한 모습에 '이게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오래동안 꺼내보지 않은 일기장'을 들춰보는 듯 호기심과 익숙함이 교차되었지만 어느덧 중반을 지나다보면 호기심은 공감으로, 익숙함은 친근감으로 바뀌어 내처 소설을 계속해서 읽고 있는 나를 별견하게 된다.


스토너씨가 겪은 일상, 스토너씨가 품던 고민은 현재 내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 같던 스토너씨의 인생은 책의 후반을 달려갈수록 별 것이 되었다. 지금 사람들이 스토너씨에게 끌리는 것은 내가 별 것일 수 있다는 위로와 공감덕분이리라.


생의 끄트머리에서 스토너씨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씨를 보내면서 나도 나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리고 무엇을 기대할거냐?



해답을 찾으려 독서를 하지만, 독서는 끊임없이 질문만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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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09-2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비슷한가봐요......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도 물론 존재하지만 인간 자체의 본연의 모습들을 서로 바라볼때 마음속의 큰 위로와 위안을 받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

올 초에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 겠네요 ^^
리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