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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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상징체계를 전복할 힘이 없는 개인이 스티그마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주어진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P20

근대는 공간을 압축하고, 거리를 말소하며, 장소를 파괴한다. - P21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 P26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P31

노예는 한번도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죽었을 때도 아무런 의례를 거치지 않고, 다만 "그 장소에서 치워진다." - P35

권력이란 ‘우리‘를 만드는 능력이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 P39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실종자의 예에서 보았듯이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의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 P57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 P62

문화적 지식이나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특볋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아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 P65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 P73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 P83

얼굴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내부나 표면이 아니라, 만남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퍼져 있다. - P87

사람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의미가 가면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속에서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또한 이 역할들 속에서이다. - P88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 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할 때, 한마다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 P90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이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104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 P116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131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 P144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 P159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굴욕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쿨하다‘와 ‘찌질하다‘이다. - P160

우정은 차별성의 인정이다. 우정이란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어느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 P174

우정은 일종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정을 나누려면 먼저 증여자가 되어야 한다. - P182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P217

어미가 병이 깊으면 약이나 침으로 치료하는 데 그쳐야 하며, 자기 몸을 손상시키면서까지 고치려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 불효라고 주장하였다. - P224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 P226

어떤 생명체가 사람이냐 아니냐는 그 생명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개입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 P249

윤리학의 과제는 당사자들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토론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P265

도덕적 발화가 효력을 갖는 것은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발화자와 동일한 도덕적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믿을 때에한해서이기 때문이다. - P273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 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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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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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고온은 시간의 속도를 늦췄다. 나무들은 낮잠을 자고 바람은 멈춰 있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땅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땅이 숨 쉬는 소리는 숙면 중에 나는 진한 소리였다. 대지는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 P15

그녀는 혼자 부엌에 숨어서 눈을 감고 여주 껍질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종기 같은 것들이 잔뜩 돋아 험준하게 기복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도 이런 촉감이 아닐까 추측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도 하나하나 수많은 종기가 감춰져 있었다. 종기는 단단하고 완고하고 건조하게 밤낮으로 조금씩 성장한다. 어떤 약물로도 치료되지 않고 끊임없이 악화되기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스체터처럼 자신의 안과 밖을 뒤집을 수 있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면, 자신은 추한 종기가 잔뜩 돋아나 있는 괴물일 것 같았다. - P66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 P76

하지만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식탁 위 솥에 담긴 죽을 일가족 아홉 식구가 다 먹고 나면, 먼저 아찬에게 방금 먹은 죽이 묽었는지 진했는지 묻고, 이어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다섯 딸에게 묻고 다시 두 아들에게 물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중간‘이 있었다. 한 가닥 줄로 이 ‘중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함과 묽음 사이는 한 가닥 줄이다. 어떤 외부의 힘도 이 줄을 곧게 펼 수 없다. 줄은 왜곡되어 선회하면서 수많은 굴곡과 모퉁이를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듭을 형성한다. 모든 굴곡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그 그림자가 보호처를 제공하므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죽이 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진했다고 할 수 있고, 진했다고 말한 사람은 더 진하기를 갈망할 지 모른다. - P77

거울을 보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반년 전에 염색하고 파마한 머리칼은 웨이브가 죽고 색깔도 바랬다.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눈꺼풀이 처지고 주름도 깊었다. 얼굴에 밤낮으로 지진이 일어나 이렇게 깊은 주름과균열이 생긴 것 같다. - P112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돌아갈 것이다.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머리로생각할 필요도 없다. 두 발이 가는 길을 알 것이고 도착하면 열쇠를 찾을 필요도 없이 문이 열릴 것이며,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등불이 켜져 있을 것이고, 더운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며, 침대와 이불이 잇을 것이다.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테지만 음식은 다 식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입들이 전자레인지가 되어 차가운 음식들은 금세 따스해질 것이다. - P125

화훼 농가에서는 국화밭에 전구를 추가로 설치하고 있었다. 전기 선로에 이상이 생겨 수천수백 개의 전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전부 국화밭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 P159

그 남자들 눈빛 속의 호수가 그녀의 몸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린 시절 검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개는 진흙탕 속을 뒹굴고 그녀는 개를 끌어당기다가 덩달아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여름날의 빗물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진흙탕에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개는 몸을 뒤집고 사람은 마구 뛰고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몸이 즐거움에 완전히 점령되어 더럽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영화 속 남자들은 그녀에게 따스한 진흙탕에 젖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 P236

아주 먼 곳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연기와 더위, 습기를 실어다 타운 하우스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너의 얼굴과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귀와 수염 자국이 남아 있는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뇌에서? 목구멍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오는 것일까?
가끔은 말이 바람으로부터 오기도 하지. - P286

너는 펜과 키보드로 소설을 썼지만 너희 엄마는 입으로 소설을 썼다. 입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인물을 첨가하여 소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허황된 소문일수록 더 잘 믿게 되는 법이다. 소문의 바이러스는 침을 통해 전파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옮는다. 그런 소문은 추풍나무도 듣고 양어장의 물고기들도 듣게 된다. 베틀후추도 듣고 국화도. 마지막으로 떠돌아다니는 귀신들도 듣게 된다. 바람이 불면 소문은 바람에 말려 모든 사람의 귓가로 전파되는 거다. - P288

뚱뚱한 주인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용징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귀신을 본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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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이로움에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로 귀신을 본 것 같았다. 시골 들판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귀신을 보진 못한 것 같았다. 처음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입을 막아 날카로운 비명을 억제했다. 귀신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꼭 이럴 것 같았다. - P318

엄마가 그를 때릴 때면 주먹은 칼이 되고 발길질은 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매섭고 흉악한 것은 역시 입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불처럼 뜨거웠다. - P338

샤오촨을 잡아 둔 데는 목적이 있었다. 외부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게 되고 서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의를 갖춘 말은 농구 골대에 마구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절대 정확하게 던지지 않고 누구도 핵심에 다가가지 않으며 골을 넣지 않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공허한 대꾸는 상처를 주지 않았다. 날씨를 얘기하고 일출과 일몰을 얘기하고 낙엽과 바람, 비를 얘기했다. 중원절을 얘기하고 귀신을 얘기하고 닭갈비를 얘기했다. 감사를 얘기하고 예의를 얘기했다. 요컨대 서로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의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은 언어의 예절을 이용하여 서로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구도 강가에 닳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는 것이다. 자신이 외로운 섬이 될까 두려워 거미가 거미줄을 토하듯이 액체 상태의 말을 분출하여 공기 중에서 가는 실을 만들고, 섬유 상태의 가는 실로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 P363

그는 누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누나의 어깨에는 도처에 지뢰가 있었다. 어디든지 누르면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폭발했다. - P408

천텐홍은 자신이 외부인이라 전장에 개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말다툼을 할 줄도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기름기가 없는 사람이고, 차가운 몸은 불을 만나도 금세 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햇다. 그와 T는 말다툼을 전혀 하지 않았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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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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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랬다. 서점 신간 코너에 가면 분노에 휩싸였다. 지인이 책을 냈다고 하면 관심 없는 척하면서 내용을 몰래 살폈다. 그 책에 신통한 데가 없으면 그때서야 겨우 안심했다. 결국 나무의 소중함 운운은 그냥 핑곗거리였다.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작가라는 거룩한 영예를, 다른 녀석이 제값을 치르지 않고 길에서 주웠다고 여겨서 부린 트립잡기였다. 정의감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다. 그 흉한 감정은 내 책이 나온 뒤에야 겨우 사라졌다. - P54

자, 이제 조금 더 어려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스스로 성인이라고 느낀다며, 성인이 된 날은 언제인가? 만 19세가 된 그날이었나? 아니라면 언제인가? 왜 그날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살펴야 하고, ‘어른‘이란 무엇인지 자신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게 어른인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게 어른인지, 세상의 씁쓸한 면을 알아차리면 어른이 되는 것인지,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당신의 답이 당신의 개성이다. 개성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국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과 견해-인생관, 세계관-를 쌓는 일이다. - P119

삶이라는 추상명사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삶의 부분집합이다. 내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곧 나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 P125

그 시간 내내맹렬하게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근무시간‘동안 내가 주로 하는 일은 그냥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거나, 창밖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방 안을 돌아다니며 머리카락을 줍거나 하는 일이다. 실제로 키보드에 손가락을 대고 한 글자라도 끼적이는 순간은 근무시간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 P270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도 받는데, 나도 영감의 존재를 믿기는 한다.그런데 영감을 불러일으키려면 먼저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고 본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뇌에 일정 시간 이상 압박을 줘야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목욕을 할 때 비로소 뒤늦게 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 P270

그러나 독선이 없었더라면 글을 쓰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더라도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금세 무너졌버렸을 것이다. 쉽게 세상과 화해했을 것이다. 세상과 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글 따위에 매달리게 된다. - P282

책을 쓰는 과정은 사람의 사고를 성장시킨다. 페이스북에 올릴 게시물을 쓰는 일과 책 집필은 다르다. 한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쓰려면 집중력과 인내력이 필요하고, 다방면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생긴다. 저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를 종합적으로 살피게 되며, 자기가 던지려는 메시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비판할지를 예상하고, 그에 대한 재반박을 준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주장이나 자기 자신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런 성장과 변화를 의미한다. - P27

창작의 욕망을 억지로 누르면 어떻게 될까. 나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공허감이 바로 그 결과라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 사회는 어느 연령대, 어느 세대를 봐도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객관적인 조건이 나쁘지 않은데도 공허함을 토로하는 젊은이도 있고, 중년에 이르러 허무함을 못 견대겠다며 뒤늦게 일탈하는 이도 있다. 그런 정체성 위기는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이 만들어내는 일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온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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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자. 공들여서 하자. 빨리 시작하자. 당신은 본능을 채우지 못해 굶주려 있는 상태다.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책 쓰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는 당장 착수하라고 권하고 싶다. - P40

형편없는 책을 발표해서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무서워서 책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께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책을 쓰지 않고 계속 후회하며 사는 것. 둘째,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것. 셋째, 멋진 책을 쓰고 후회하지 않는 것. - P60

글쓰기는 학문이 아니라 기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서 초보 작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얻을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기예‘의 뜻풀이는 이렇다.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길고닦은 기술이나 재주.‘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넘어지고 그르면서 한참 시간을 들여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악기 연주나 춤, 수영, 리듬체조, 목공 같은 일이다. ... 기예를 익히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잇다. 우선 초반에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고 자빠지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 집어 든 색소폰을 멋지게 불었다든가 발레교습소에 가자마자 그랑주테 동작을 해냈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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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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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고른 에세이들도 좋았고, 혼자 읽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P11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P31

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몫 - P51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았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몫 - P75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몫 - P79

그녀에게 그런 방문들은 뜻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 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일 년 - P88

다희를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일 년 - P102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일 년 - P115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건 그저 자신의 환경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기남은 낯선 그곳에 앉은 채 자신이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남은 아홉 살 아이의 마음이 되었다. 아홉 살 아이처럼 두려워졌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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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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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에 감동을 받긴 쉽지 않다. 여기도 마찬가지. 소문에 비해 감동은 비례하지 않았다. 작가의 담담한 문체 조금은 밋밋한 표현이 쓸데없는 포장을 하지 않은 과자같다. 별것 아닌 7개의 작은 것도 서사를 담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에는 감탄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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