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고온은 시간의 속도를 늦췄다. 나무들은 낮잠을 자고 바람은 멈춰 있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땅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땅이 숨 쉬는 소리는 숙면 중에 나는 진한 소리였다. 대지는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 P15
그녀는 혼자 부엌에 숨어서 눈을 감고 여주 껍질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종기 같은 것들이 잔뜩 돋아 험준하게 기복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도 이런 촉감이 아닐까 추측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도 하나하나 수많은 종기가 감춰져 있었다. 종기는 단단하고 완고하고 건조하게 밤낮으로 조금씩 성장한다. 어떤 약물로도 치료되지 않고 끊임없이 악화되기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스체터처럼 자신의 안과 밖을 뒤집을 수 있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면, 자신은 추한 종기가 잔뜩 돋아나 있는 괴물일 것 같았다. - P66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 P76
하지만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식탁 위 솥에 담긴 죽을 일가족 아홉 식구가 다 먹고 나면, 먼저 아찬에게 방금 먹은 죽이 묽었는지 진했는지 묻고, 이어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다섯 딸에게 묻고 다시 두 아들에게 물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중간‘이 있었다. 한 가닥 줄로 이 ‘중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함과 묽음 사이는 한 가닥 줄이다. 어떤 외부의 힘도 이 줄을 곧게 펼 수 없다. 줄은 왜곡되어 선회하면서 수많은 굴곡과 모퉁이를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듭을 형성한다. 모든 굴곡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그 그림자가 보호처를 제공하므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죽이 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진했다고 할 수 있고, 진했다고 말한 사람은 더 진하기를 갈망할 지 모른다. - P77
거울을 보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반년 전에 염색하고 파마한 머리칼은 웨이브가 죽고 색깔도 바랬다.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눈꺼풀이 처지고 주름도 깊었다. 얼굴에 밤낮으로 지진이 일어나 이렇게 깊은 주름과균열이 생긴 것 같다. - P112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돌아갈 것이다.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머리로생각할 필요도 없다. 두 발이 가는 길을 알 것이고 도착하면 열쇠를 찾을 필요도 없이 문이 열릴 것이며,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등불이 켜져 있을 것이고, 더운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며, 침대와 이불이 잇을 것이다.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테지만 음식은 다 식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입들이 전자레인지가 되어 차가운 음식들은 금세 따스해질 것이다. - P125
화훼 농가에서는 국화밭에 전구를 추가로 설치하고 있었다. 전기 선로에 이상이 생겨 수천수백 개의 전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전부 국화밭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 P159
그 남자들 눈빛 속의 호수가 그녀의 몸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린 시절 검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개는 진흙탕 속을 뒹굴고 그녀는 개를 끌어당기다가 덩달아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여름날의 빗물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진흙탕에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개는 몸을 뒤집고 사람은 마구 뛰고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몸이 즐거움에 완전히 점령되어 더럽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영화 속 남자들은 그녀에게 따스한 진흙탕에 젖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 P236
아주 먼 곳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연기와 더위, 습기를 실어다 타운 하우스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너의 얼굴과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귀와 수염 자국이 남아 있는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뇌에서? 목구멍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오는 것일까? 가끔은 말이 바람으로부터 오기도 하지. - P286
너는 펜과 키보드로 소설을 썼지만 너희 엄마는 입으로 소설을 썼다. 입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인물을 첨가하여 소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허황된 소문일수록 더 잘 믿게 되는 법이다. 소문의 바이러스는 침을 통해 전파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옮는다. 그런 소문은 추풍나무도 듣고 양어장의 물고기들도 듣게 된다. 베틀후추도 듣고 국화도. 마지막으로 떠돌아다니는 귀신들도 듣게 된다. 바람이 불면 소문은 바람에 말려 모든 사람의 귓가로 전파되는 거다. - P288
뚱뚱한 주인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용징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귀신을 본 것 같네." . . . 이런 경이로움에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로 귀신을 본 것 같았다. 시골 들판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귀신을 보진 못한 것 같았다. 처음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입을 막아 날카로운 비명을 억제했다. 귀신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꼭 이럴 것 같았다. - P318
엄마가 그를 때릴 때면 주먹은 칼이 되고 발길질은 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매섭고 흉악한 것은 역시 입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불처럼 뜨거웠다. - P338
샤오촨을 잡아 둔 데는 목적이 있었다. 외부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게 되고 서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의를 갖춘 말은 농구 골대에 마구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절대 정확하게 던지지 않고 누구도 핵심에 다가가지 않으며 골을 넣지 않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공허한 대꾸는 상처를 주지 않았다. 날씨를 얘기하고 일출과 일몰을 얘기하고 낙엽과 바람, 비를 얘기했다. 중원절을 얘기하고 귀신을 얘기하고 닭갈비를 얘기했다. 감사를 얘기하고 예의를 얘기했다. 요컨대 서로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의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은 언어의 예절을 이용하여 서로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구도 강가에 닳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는 것이다. 자신이 외로운 섬이 될까 두려워 거미가 거미줄을 토하듯이 액체 상태의 말을 분출하여 공기 중에서 가는 실을 만들고, 섬유 상태의 가는 실로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 P363
그는 누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누나의 어깨에는 도처에 지뢰가 있었다. 어디든지 누르면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폭발했다. - P408
천텐홍은 자신이 외부인이라 전장에 개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말다툼을 할 줄도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기름기가 없는 사람이고, 차가운 몸은 불을 만나도 금세 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햇다. 그와 T는 말다툼을 전혀 하지 않았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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