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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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고온은 시간의 속도를 늦췄다. 나무들은 낮잠을 자고 바람은 멈춰 있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땅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땅이 숨 쉬는 소리는 숙면 중에 나는 진한 소리였다. 대지는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 P15

그녀는 혼자 부엌에 숨어서 눈을 감고 여주 껍질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종기 같은 것들이 잔뜩 돋아 험준하게 기복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도 이런 촉감이 아닐까 추측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도 하나하나 수많은 종기가 감춰져 있었다. 종기는 단단하고 완고하고 건조하게 밤낮으로 조금씩 성장한다. 어떤 약물로도 치료되지 않고 끊임없이 악화되기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스체터처럼 자신의 안과 밖을 뒤집을 수 있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면, 자신은 추한 종기가 잔뜩 돋아나 있는 괴물일 것 같았다. - P66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 P76

하지만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식탁 위 솥에 담긴 죽을 일가족 아홉 식구가 다 먹고 나면, 먼저 아찬에게 방금 먹은 죽이 묽었는지 진했는지 묻고, 이어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다섯 딸에게 묻고 다시 두 아들에게 물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중간‘이 있었다. 한 가닥 줄로 이 ‘중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함과 묽음 사이는 한 가닥 줄이다. 어떤 외부의 힘도 이 줄을 곧게 펼 수 없다. 줄은 왜곡되어 선회하면서 수많은 굴곡과 모퉁이를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듭을 형성한다. 모든 굴곡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그 그림자가 보호처를 제공하므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죽이 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진했다고 할 수 있고, 진했다고 말한 사람은 더 진하기를 갈망할 지 모른다. - P77

거울을 보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반년 전에 염색하고 파마한 머리칼은 웨이브가 죽고 색깔도 바랬다.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눈꺼풀이 처지고 주름도 깊었다. 얼굴에 밤낮으로 지진이 일어나 이렇게 깊은 주름과균열이 생긴 것 같다. - P112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돌아갈 것이다.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머리로생각할 필요도 없다. 두 발이 가는 길을 알 것이고 도착하면 열쇠를 찾을 필요도 없이 문이 열릴 것이며,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등불이 켜져 있을 것이고, 더운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며, 침대와 이불이 잇을 것이다.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테지만 음식은 다 식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입들이 전자레인지가 되어 차가운 음식들은 금세 따스해질 것이다. - P125

화훼 농가에서는 국화밭에 전구를 추가로 설치하고 있었다. 전기 선로에 이상이 생겨 수천수백 개의 전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전부 국화밭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 P159

그 남자들 눈빛 속의 호수가 그녀의 몸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린 시절 검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개는 진흙탕 속을 뒹굴고 그녀는 개를 끌어당기다가 덩달아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여름날의 빗물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진흙탕에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개는 몸을 뒤집고 사람은 마구 뛰고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몸이 즐거움에 완전히 점령되어 더럽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영화 속 남자들은 그녀에게 따스한 진흙탕에 젖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 P236

아주 먼 곳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연기와 더위, 습기를 실어다 타운 하우스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너의 얼굴과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귀와 수염 자국이 남아 있는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뇌에서? 목구멍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오는 것일까?
가끔은 말이 바람으로부터 오기도 하지. - P286

너는 펜과 키보드로 소설을 썼지만 너희 엄마는 입으로 소설을 썼다. 입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인물을 첨가하여 소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허황된 소문일수록 더 잘 믿게 되는 법이다. 소문의 바이러스는 침을 통해 전파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옮는다. 그런 소문은 추풍나무도 듣고 양어장의 물고기들도 듣게 된다. 베틀후추도 듣고 국화도. 마지막으로 떠돌아다니는 귀신들도 듣게 된다. 바람이 불면 소문은 바람에 말려 모든 사람의 귓가로 전파되는 거다. - P288

뚱뚱한 주인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용징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귀신을 본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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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이로움에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로 귀신을 본 것 같았다. 시골 들판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귀신을 보진 못한 것 같았다. 처음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입을 막아 날카로운 비명을 억제했다. 귀신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꼭 이럴 것 같았다. - P318

엄마가 그를 때릴 때면 주먹은 칼이 되고 발길질은 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매섭고 흉악한 것은 역시 입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불처럼 뜨거웠다. - P338

샤오촨을 잡아 둔 데는 목적이 있었다. 외부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게 되고 서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의를 갖춘 말은 농구 골대에 마구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절대 정확하게 던지지 않고 누구도 핵심에 다가가지 않으며 골을 넣지 않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공허한 대꾸는 상처를 주지 않았다. 날씨를 얘기하고 일출과 일몰을 얘기하고 낙엽과 바람, 비를 얘기했다. 중원절을 얘기하고 귀신을 얘기하고 닭갈비를 얘기했다. 감사를 얘기하고 예의를 얘기했다. 요컨대 서로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의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은 언어의 예절을 이용하여 서로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구도 강가에 닳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는 것이다. 자신이 외로운 섬이 될까 두려워 거미가 거미줄을 토하듯이 액체 상태의 말을 분출하여 공기 중에서 가는 실을 만들고, 섬유 상태의 가는 실로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 P363

그는 누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누나의 어깨에는 도처에 지뢰가 있었다. 어디든지 누르면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폭발했다. - P408

천텐홍은 자신이 외부인이라 전장에 개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말다툼을 할 줄도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기름기가 없는 사람이고, 차가운 몸은 불을 만나도 금세 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햇다. 그와 T는 말다툼을 전혀 하지 않았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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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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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랬다. 서점 신간 코너에 가면 분노에 휩싸였다. 지인이 책을 냈다고 하면 관심 없는 척하면서 내용을 몰래 살폈다. 그 책에 신통한 데가 없으면 그때서야 겨우 안심했다. 결국 나무의 소중함 운운은 그냥 핑곗거리였다.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작가라는 거룩한 영예를, 다른 녀석이 제값을 치르지 않고 길에서 주웠다고 여겨서 부린 트립잡기였다. 정의감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다. 그 흉한 감정은 내 책이 나온 뒤에야 겨우 사라졌다. - P54

자, 이제 조금 더 어려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스스로 성인이라고 느낀다며, 성인이 된 날은 언제인가? 만 19세가 된 그날이었나? 아니라면 언제인가? 왜 그날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살펴야 하고, ‘어른‘이란 무엇인지 자신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게 어른인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게 어른인지, 세상의 씁쓸한 면을 알아차리면 어른이 되는 것인지,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당신의 답이 당신의 개성이다. 개성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국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과 견해-인생관, 세계관-를 쌓는 일이다. - P119

삶이라는 추상명사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삶의 부분집합이다. 내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곧 나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 P125

그 시간 내내맹렬하게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근무시간‘동안 내가 주로 하는 일은 그냥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거나, 창밖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방 안을 돌아다니며 머리카락을 줍거나 하는 일이다. 실제로 키보드에 손가락을 대고 한 글자라도 끼적이는 순간은 근무시간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 P270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도 받는데, 나도 영감의 존재를 믿기는 한다.그런데 영감을 불러일으키려면 먼저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고 본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뇌에 일정 시간 이상 압박을 줘야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목욕을 할 때 비로소 뒤늦게 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 P270

그러나 독선이 없었더라면 글을 쓰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더라도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금세 무너졌버렸을 것이다. 쉽게 세상과 화해했을 것이다. 세상과 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글 따위에 매달리게 된다. - P282

책을 쓰는 과정은 사람의 사고를 성장시킨다. 페이스북에 올릴 게시물을 쓰는 일과 책 집필은 다르다. 한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쓰려면 집중력과 인내력이 필요하고, 다방면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생긴다. 저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를 종합적으로 살피게 되며, 자기가 던지려는 메시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비판할지를 예상하고, 그에 대한 재반박을 준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주장이나 자기 자신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런 성장과 변화를 의미한다. - P27

창작의 욕망을 억지로 누르면 어떻게 될까. 나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공허감이 바로 그 결과라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 사회는 어느 연령대, 어느 세대를 봐도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객관적인 조건이 나쁘지 않은데도 공허함을 토로하는 젊은이도 있고, 중년에 이르러 허무함을 못 견대겠다며 뒤늦게 일탈하는 이도 있다. 그런 정체성 위기는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이 만들어내는 일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온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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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자. 공들여서 하자. 빨리 시작하자. 당신은 본능을 채우지 못해 굶주려 있는 상태다.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책 쓰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는 당장 착수하라고 권하고 싶다. - P40

형편없는 책을 발표해서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무서워서 책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께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책을 쓰지 않고 계속 후회하며 사는 것. 둘째,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것. 셋째, 멋진 책을 쓰고 후회하지 않는 것. - P60

글쓰기는 학문이 아니라 기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서 초보 작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얻을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기예‘의 뜻풀이는 이렇다.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길고닦은 기술이나 재주.‘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넘어지고 그르면서 한참 시간을 들여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악기 연주나 춤, 수영, 리듬체조, 목공 같은 일이다. ... 기예를 익히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잇다. 우선 초반에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고 자빠지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 집어 든 색소폰을 멋지게 불었다든가 발레교습소에 가자마자 그랑주테 동작을 해냈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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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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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고른 에세이들도 좋았고, 혼자 읽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P11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P31

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몫 - P51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았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몫 - P75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몫 - P79

그녀에게 그런 방문들은 뜻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 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일 년 - P88

다희를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일 년 - P102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일 년 - P115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건 그저 자신의 환경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기남은 낯선 그곳에 앉은 채 자신이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남은 아홉 살 아이의 마음이 되었다. 아홉 살 아이처럼 두려워졌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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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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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에 감동을 받긴 쉽지 않다. 여기도 마찬가지. 소문에 비해 감동은 비례하지 않았다. 작가의 담담한 문체 조금은 밋밋한 표현이 쓸데없는 포장을 하지 않은 과자같다. 별것 아닌 7개의 작은 것도 서사를 담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에는 감탄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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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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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 P39

어떤 말은 혀를 통해 입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의식을 붙들어 매고 돌이킬 수 없는 힘을 가진다. 자욱해진 물안개 너머로 가파른 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고 댐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도담은 기이한 압력에 짓눌리는 기분이었고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고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물안개가 두 사람을 집어삼겼다. 가까이 서 있는데도 서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P59

도담의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 올랐다. 암기하고 문제를 풀고 집중할 때만큼은 잠시라도 나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을까. 아이들은 도담을 보고 수군거렸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오히려 성적이 오를 수 있어? 선생들조차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 비극을 겪은 사람이 충분히 망가지지 않으면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 P85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 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 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 P99

"실제 삶에서 우리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극 중 등장 인물은 존재 이유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나는 이야기가 좋아." - P109

평소 예지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랑 예찬론자였다. 도담으 예지가 그렇게 사랑을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직 사랑에 충분히 당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 P135

그러나 안전거리를 둔다고 이별이 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자신에게 밀려드는 후회의 감정이었다. 승주는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알았다. 문제는 거리가 아니었음을. 지금 승주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조차도.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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