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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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으로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있었다. - P44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 P49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그 웃음에 문득 전염되어 내 마음이 밝아지면, 내 밝아진 얼굴에 안심한 인선의 눈이 더 환해졌다.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 P51

멀리서부터 얼음이 갈라지듯 다가오는 편두통의 전조 - P68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 P75

우리 입과 코에서 흰 김이 흘러나왔다. 눈송이들이 콧잔등과 입술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따뜻한 얼굴을 가졌으므로 그 눈송이들은 곧 녹았고, 그 젖은 자리 위로 다시 새로운 눈송이가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 P83

노인의 두 발이 눈 덮인 땅으로 완전히 내려서길 기다려 기사가 뒷문을 닫는다. 함박눈을 맞으며 허리를 굽힌 채 걷는 노인의 모습이 차창 너머로 멀어진다. 그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꺾고 돌아본다.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나의 혈육도 지인도 아니다. 잠시 나란히 서 있었을 뿐인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작별을 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는가? - P122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손깍지 낀 그녀의 두 손이 풀렸다가 다시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 P159

밤새 끓으며 타는 죽처럼 그렇게우린 함께 튀고 흘러내렸어.
도와주라, 나 구해주렌. 속삭이다 잠든 얼굴에 손을 뻗었다가 물에 빠진 사람같이 젖은 뺨이 만져지면 엄마를 등지고 누워 생각했어.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을 내가 구해. - P313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얼어서 날리고, 점퍼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 몸에 꽃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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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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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쓴다면 작품 속 <무구>나 <하늘 높이 아름답게>처럼 쓰고 싶다. 땅에 발을 딛은 우리 곁에 있을법한 그들의 이야기 혹은 내 이야기. 젊은 작가의 소설을 주로 보다 찾은 연륜 있는 작가의 작품. 마치 흐르는 시냇물 속에 박혔다가 마침내 햇빛을 받아 영롱한 빛을 내는 최상급의 보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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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특별 한정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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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쇼쿄의 미소 - P27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쫓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쇼코의 미소 - P37

직장에 나간 엄마 대신 나를 업어 키운 그였다. 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효도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더 등을 돌리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 P40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P128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P128

나는 언니의 말에 동의했다.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 것이었다.

-한지와 영주 - P143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헤어롤을 마는 살마도 필요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남편도 있다. 여자는 세상을 살며 그처럼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깨끗한 샘물같은 그에게 더러운 욕탕이 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세상에 소용없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세상의 그 많은 소용 있는 사람들이 행한 일을 모두가 진실로 세상에 소용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카엘라 - P254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미카엘라 - P266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보무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미카엘라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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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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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묻다, 내가 어쩌다든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부터 이 지경이었다고, 삼십 년이 넘고 사십 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비틀린 내시와 상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나는 진즉에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 P40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실버들 천만사 중에서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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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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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의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 4 - P365

"뭐니뭐니 혀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어서 따라가는 거 아니겄어? 부모 자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린 배 채우주는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 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토지 6 - P33

"학문을 잘못하면 병이 들 수도 있을 거요. 자기 자신을 찾다 찾다 보면 좁쌀이 되니까요."

-토지 7 - P100

"민족의식이란 가지가지 낯판대기를 지닌 요물이야. 악도 되고 선도 되고 야심의 간판도 되고 약자를 희생시키는 찬송가도 되고......피정복자에게 있어서 민족의식이란 항쟁을 촉구하는 것이 될 테지만 정복자에게 있어서의 민족의식이란 정복욕을 고무하는 것이 되니 말씀이야.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 혹은 충성심,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인간 최고의 도덕이면서 참으로 진실이 아닌 괴물이거든. 집단의 생존본능이요 집단의 탄욕을 아름답게 꾸며대는 허위, 어디 민족이나 집단뿐일까? 일가에서 개인은 어떻고? 결국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투쟁아니겠나?"

_토지 12 - P87

어두운 현실과 찬란한 삶을 마주하여 저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저 투쟁의 차비를 차리는 윤국이도 서희에게 외로움을 재촉했다. 남편의 존재,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출옥하게 될 김길상은 실감할 수 없게 멀기만 하였고, 얻는 과정에서 잃어가는 과정을, 아니 얻었기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과정을 서희는 시시각각 느낀다. 팽창에서 위축의 과정으로 들어선 육체적 자각과 더불어. 그 무섭고 끈질겼던 집념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를 악물며 열 손톱이 닳아빠져도 기필코 탈환하리라 맹서하였던 평사리의 옛집, 추억은 살아서 구석구석에, 능소화가 피던 울타리며 버들잎이 떨어지던 연당이며 흔적은 도처에 산재해 있건만 거궁한 집은 때때로 낡은 상여 틀같이 느껴진다. 황량하고 공허하게 넋이 떠난 시체와도 같이, 햇빛이 눈부신 들판도 그렇했다.

-토지 13 - P131

‘잘해주면 얕보고 못하면 원망한다. 내 눈의 누물은 며칠 동안 버릇없는 웃음이 될 것이며 불만의 얼굴, 거역의 몸짓이 될 것이다.

-토지 13 - P133

"실상 사람 사는 이치가 그리 어렵운 것도 아닐 긴데, 많은 것도 아닐 긴데 걸으면 되는 거 아니까?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그런데 와들 앉아서 그리 숨들이 가쁠고? 죽은 성님은 좀체 말을 안 했다. 안 했지마는 성님은 몸으로 늘 말해주었제. 그라고 말귀가 어둡고 못 알아들어도, 그러려니. 나는 갑갑하지 않았인께."
언덕을 하나 넘는다.
"초목이나 꽃 같은 거는 항상 거기 있었인께...... 흙도 항상 내 발밑에 있었인께.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니었던 기라. 흥!"

-토지 13 - P323

무거운 잿빛 구름이 정수리를 내리누르는데 영팔노인은 근심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찬란한 명리의 정상에서도 인생은 후외스러운 것, 그러나 영팔노인에겐 후회가 없을 것만 같다. 나 먼저 가려고 남을 떠밀며 가는 숱한 사람들 속에, 와 이라노, 와 이리 떠미노 하며 걸어왔을 바보 같은 생애에서 얻은 것은 삼간두옥, 잃지 않았던 것은 자식들과 어리석은 노처뿐이지만 술수와 음모와 기만과 간지로 쌓아올린 허울 같은 곳에 간신히 몸 붙인 외로운 사람에 비하면 또박또박 연륜을 새긴 한 그루 실한 나무. 생명을 짓이기지는 아니하였으되, 후회가 없을 것 같은 그 청정함 때문이겠다.

-토지 13 - P325

"악을 두고 강자라 하신다면 역사가 그들 편에 선 게 아니지요. 상부상조의 묵약 내지 질서에 대해 인간이 반역한 거지요. 그러나 강약이 선악과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뺏고 빼앗기는 상태에서 본다면 강자는 악이요 약자는 선이겠으나 이룩하고 다스리는 상태에서 본다면 강자가 선일 수 있고 이룩하고 다스리는 것을 저해하는 기생충 같은 약자는 분명 악일 것입니다.

-토지 13 - P387

"그러나 네놈보다 열 배 백배 언변 좋은 유식쟁이들, 고릿적부터 우리는 그것들 종밖에 될 수 없었인께. 나라든 백성이든 팔고 사는 것은 그놈들 소관이었인께. 왜놈을 몰아내자는 마당에서 모도 협심해야 한다는 거를 모르지는 않지만 휘둘리지는 말아야, 약은 쥐가 밤눈 어둡다는 말도 안 있더나. 약은 놈 둔한 놈, 유식한 놈 무식한 놈 다 있어야, 양념을 쳐야 국도 되고 김치도 된다."

-토지 14 - P37

"... 주의 주장은 행동의 규범이다. 행동 없이 일본을 극복할 수는 없다. 선의의 사람들, 선의의 사람들이 도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선의의 사람이란 꿈꾸는 사람이다. 실길만 찾는 사람, 상대는 강자요 나는 약자이니 체념하자는 사람, 왜놈한테 빌붙어 이득을 얻고자 하는 놈, 그들과 꿈꾸는, 깨어 있는 선의의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실제 아무것도 없다."

-토지 14 - P148

사람들이 미친 듯 달려가는 건 당연하겠지요. 노예의 낙인보다 확실하고 종의 문서보다 무서운 것이 그 임금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토지 14 - P242

환국이 송영광에 관한 말을 했을 때, 신분에 대한 절망도 극복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유로워지느냐고 길상은 말했었다. 그러나 길상은 영광의 말을 들은 적도,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환국이보다 휠씬 진하게 그의 갈등을 느꼈었다. 말로는 그랬지만 영광이 혼자 극복한다고 될 일 아니며 끝내 혼자서 극복이 되는 일도 아니다. 사람 모두가, 역사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김개주도 김환도, 역사의 산물이며 그 오랜 역사를 극복하려다 간 사람이다.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다. 강자는 극복되어야 한다. 약자의 누물을 거두기 위하여 평등하기 위하여. 강국도 극복되어야 한다. 약소국의 참상을 씻기 위하여, 국각와 국가가 평등하기 위하여. 일본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 길상에게 서회와 두 아들은 끝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도랑이 있고 장벽이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극복되지 않는 대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목마름이요 적요함이지만 그가 가는 길에 그들은 길상의 약점이기도 하다.

-토지 15 - P297

세월이 비정한가 망각이 비정한가. 어느 쪽일까?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잃어가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도 잃어가며 살아간다. 잃은 것의 시체가 추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잃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토지 17 - P194

세 늙은이는 신명을 내가며,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든다. 모처럼 그들에게 생활이 살아나 꽃이 되는 것 같았다. 한 곁에 밀려나서 마치 방 안에 놓인 장롱과도 같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 눈치볼 며느리 딸도 없고마치 자유천지에서 벗과 노니는 것처럼, 우물가에서 지저귀던 옛날이 돌아온 것같이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부엌 안에서 맴돈다.

-토지 17 - P386

밖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내용으로 보면 다 같이 생산고 위주의 유물론 아니겠어? 다만 어떻게 관리하고 분배하느냐의 차이지. 나는 언젠가 그것이 벽에 부닥칠 것이란 생각이다. 만 가지가 다 이자를 먹고 살아야지 원금을 찢어먹는다면 결국 파탄할밖에 없지. 가령 땅이 원금이라면 그해 나는 농작물은 이자다 그 말일세. 더 비근한 예를 들자면 머릿속에 든 지식은 원금이요 취직하여 받아먹는 월급은 이자다 그 말이야. 만사 이치를 그 자로 재면 모든 게 합리적이지.

-토지 18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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