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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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쉬지 않고 꾸준히 노를 저어 나갔고, 속도를 잘 유지한 데다 이따금씩 조류가 소용돌이치는 곳을 제외하고는 수면이 잔잔했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힘의 삼분의 일가량을 조류에 떠맡기도 있었다. 차츰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이 시간에 저어 나오려고 했던 거리보다 휠씬 더 멀리까지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2

"할아버지는 내게 자명종 같아요."소년이 말했다.
"내 나이가 자명종인 거지. 한데 늙은이는 왜 그렇게 일직 잠에서 깨는 걸까? 하루를 좀 더 길게 보내고 싶어서일까?" 노인이 대꾸했다. - P25

노인이 말을 걸자 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새는 너무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제대로 낚시줄을 살펴볼 겨를도 없어 보였다. 가냘픈 발가락으로 낚시줄을 꽉 움켜잡고 있는 동안 아래위로 흔들거렸다.
"줄은 튼튼해. 아주 단단하다고. 간밤에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그렇게 지쳐서야 되겠니." 노인이 새에게 말했다. "새들은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새들을 노리고 바다까지 날아오는 매들이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해 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머지않아 매들에 대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실컷 푹 쉬어라, 작은 새야 그러곤 뭍으로 날아가 인간이나 다른 새나 고기처럼 네 행운을 잡으려무나." 그가 말했다. - P56

"하지만 난 저놈을 꼭 죽이고 말 테야. 아무리 크고 아무리 멋진 놈이라도 말이지." 그가 다시 말했다.
하긴 그건 옳지 않은 일이긴 해,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난 녀석에게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참고 견뎌 낼 수 있는지 보여 줘야겠어.
"나는 그 아이한테 내가 별난 늙은이라고 말했지. 지금이야 말로 그 말을 입증해 보일 때야."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그는 그런 입증을 수천 번이나 해 보였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금 또다시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순간이었고, 그것을 입증할 때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 P67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은 없고, 지금 이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 P104

노인은 고물 쪽에 누워서 키를 잡고 하늘에 휜한 불빛이 비쳐 오기만을 기다렸다. 고기는 반밖에 남지 않았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운이 있으면, 어쩌면 앞쪽 반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겠지. 내게도 조금쯤은 운이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럴리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멀리까지 나왔을 때 너는 이미 운수를 망쳐 버리고 만 거야.
"바보 같은 생각은 이제 그만하시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키나 잡아. 이제부터라도 행운이 찾아올지 어떻게 알아."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 P118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 P121

"바다는 엄청나게 넓고 배는 작으니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테지." 노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노인이 물었다. - P125

늙어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있어서는 안 돼,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걸. 잊지 말고 저 다랑어가 상하기 전에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아무리 먹기 싫더라도 아침에는 꼭 먹어야 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하고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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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 코드: 더 비기닝
빌 게이츠 지음, 안진환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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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가 책을 많이 읽어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 P27

부모님은 우리에게 주제를 정해 주고 발표하라고 하진 않았지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남매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일상을 공유하는 저녁 시간이 펼쳐졌다. 그런 대화를 통해 나는 어른들의 삶과 그들이 속한 더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 P66

독서를 통해 나는 온갖 종류의 것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한 가지 답을 찾으면 더 많은 질문이 떠오르기도 하고, 깊이 파고들수록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눈에 아무리 멋져 보여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87

레이크사이드의 선생님들은 나에게 관점 변경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즉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라. 그것이 바로 세상이 발전하는 방법이다. 이는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의 나에게 본질적으로 낙관적인 메시지였다. - P206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그 시점부터 그 사람의 뜻을 받들며, 평소 그가 지향하던 바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의 장점을 찾아 삶의 지표로 삼았다고 말이다. - P257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격언은 진부하지만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 P285

그 이전까지 나는 회사가 모두 효율적으로 운영되며 직원들은 모두 동기를 부여받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경영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협력한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가 인간의 모든 약점과 실패를 수반하는 인간 조직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 P405

성공 스토리는 종종 사람들을 틀에 박힌 캐릭터로 축소시킨다. 소년 천재, 천재적인 엔지니어, 인습 타파적인 디자이너, 역설적인 거물....... 내 경우에는 내 성격과 경력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일련의 독톡한 환경(대부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 P481

부유한 미국에서, 그것도 백인 남성에게 유리한 사회에서 백인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일종의 출생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운도 따랐다. - P482

호기심은 진공 상태에서 충족될 수 없다. - P48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앞날에 집중하면서 살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수년 후에나 이뤄질, 어쩌면 아예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획기적인 도약을 모색하는 일에 쓰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과거를 돌아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기억들을 하나씩 꿰맞춰 나가는 과정은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른이 되어 깨달은 경이로운 한 가지는 세월과 배움을 모두 걷어 내고 보면 나라는 존재의 많은 부분이 이미 처음부터 갖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모로 나는 여전히 할머니 댁의 식탁에 앉아 할머니가 패를 돌리길 기다리던 여덟 살짜리 아이와 같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길 열망하는 어린 아이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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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발명 -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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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 친구처럼 뭔가를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힘이다. - P23

조선인 전범 149명 중 90퍼센트는 포로감시원이었다. - P32

인간은 애절할 정도로 정의를 갈구하지만 분별력을 갖기는 힘들다. - P32

이 짧은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가. 완전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흉내와 허망. 왜 좀 더 잘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친구야! 아우야!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가져라. 나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나의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 P48

무지가 얼마나 쉽게 억압으로 이어지고 삶을 잃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한다. - P54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서라도 세계에 대한 앎이 바뀌어야 한다.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알았던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다행히 어떤 앎은 지도다. 새로운 앎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야 가능성이 태어난다. - P56

나는 복 피디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사고 이후 처음으로 새가 날아간 쪽을 향해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 몸만 생각하던 에너지의 방향과 흐름이 바뀌었다. 에너지가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일수록 바깥을 바라보는 힘-내가 그토록 절실하게 의지하던 힘, 나를 수차례 살려준 힘-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들은 무거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밀게 돕는다.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한다. 나는 나이면서 나 자신 너머, 내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바깥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 P71

살 수 있었던 세계보다 더 작은 세계의 한 부분으로 맞춰 살려면 좁은 틀에 자신을 억지로 구겨 넣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꽤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 결과는 좋지 않다. 억지로 맞추는 데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자신이 진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게리 퍼거슨도 회복은 "현실을 작게 만들고 싶은 욕구룰 내려놓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표현을 쓴다. 어쨋든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은 내 가슴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입 밖으로 나가기만 기다리던 말들이었다. - P74

희망은 정말 묘한 것이라서 희망을 가진다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된다. 유족들은 차마 겪어내기 힘든 일을 겪었지만 슬픈 자아의 일부분은 눈물겨운 희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이 슬픈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유족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만 말한다. "유족이 되면 그렇게 돼버려요." - P89

삶에 형태를 부여할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어떻게 발견할까? 이 문제는 이제 내게는 싱거울 정도로 쉬워졌다. 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내게는 새 책에 대한 기대가 새 삶에 대한 기대, 곧 내 목소리와 합쳐질 새 목소리에 대한 기대나 같았다. 작가들은 나에게 새 ‘눈‘와 새 ‘목소리‘를 준다. - P95

오늘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한때는 내 눈에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너무나 눈부시게 살아 있고 너무나 빛이 나지만 그 깃털과 몸통은 너무나 부드럽지만 너무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랑하는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생의 소원이다. - P102

그에게 새의 날갯짓 소리는 소유의 기쁨보다 더한 행복을 준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런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으로 진짜 기쁨을 누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시인 예이츠는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떠올린 생각이다"라고 했는데 서 선장의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다. - P111

"응, 나는 해냈어. 몸을 던져봤어. 그다음부터 많은 게 변했지." - P113

나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무엇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좋고 아름다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 P116

나의 새로운 목소리가 나의 오래된 목소리를 이기길 바란다. - P121

가장 큰 두려움은 마음이 만들어낸 두려움이고 대체로 가장 큰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 - P134

삶의 의미는 삶을 가치 있게 사는 데 있고, 우리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렇게 자아를 실현하면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엣 돌고래를 기다리는 기다리는 것이 나에게는 나다운 것이고 행복이고 자아실현이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기쁜 일을 기다리는 것이 나다운 것이고 나의 자아실현이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기쁜 일이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이 또한 나의 자아실현이다. - P150

영원한 행복은 없지만 영원한 기쁨은 있다. - P169

우리 시대는 같은 꿈을 꾸는 것에 대해선 극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어떻게 에너지를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겠는가?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따라 사는 데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살 때 나는 어디에 힘을 써야 할지 모르는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 자신을 겨우 신뢰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이야기의 초대라고 표현해왔다. 이제는 이 이야기의 초대에 따라 길을 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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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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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칸토레크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P17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엄폐부에서도 나는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엄폐물이 없는 전쟁터에서 열 시간 동안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다. 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것이다. - P85

우리들은 사나운 맹수로 변했다.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니라 초토화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우리들은 인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우리 뒤에서 철모를 쓴 채 두 손을 들고 쫓아오는데 그 순간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 P95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죄다 잃어버렸다. 쫓기는 우리의 시선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가 누군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속임수와 위험한 마술을 써서 달리고 또 달리며 그저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 P97

오늘날 우리는 여행객처럼 청춘의 풍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들에 의해 불타 버린 상태에 있다. 우리는 장사꾼처럼 차이점들을 알고 있고, 도살자처럼 필연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낼 수 없는데도, 끔찍할 정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과연 살고 있는 걸까? - P102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 P114

우리 가족은 그리 애정이 넘친 적이 없었다. 힘들여 일해야 하고, 걱정거리가 많은 가난한 집에는 그런 게 흔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잘 알지 못한다. 어차피 알고 있는 내용을 뻔질나게 표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얘야>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어느 누가 말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 P129

이들은 나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이들에게는 걱정, 목표, 소망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그들과 똑같이 파악할 수 없다. 때때로 나는 그들 중의 한 명과 작은 음식점에 앉아,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나의 유일한 낙임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려고 한다. 그들은 물론 내 말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말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러한 것이다. 이들은 내 말에 공감하지만 늘 단지 절반밖에 공감하지 않는다. 이들의 나머지 절반은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다. 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분산되어 있으니, 아무도 온몸으로 나의 말에 공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 자신도 나의 의견을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P136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런 것들 앞에 서 있다. 마치 법정 앞에 선 피고처럼.
낙담한 채 기가 꺾여 있다.
말들, 말들, 말들, 그 말들은 나의 폐부를 찌르지 못한다.
천천히 나는 그 책들을 다시 책꽂이의 빈 곳에 꽂아 넣는다. 끝났다.
조용히 나는 방에서 나간다. - P140

오직 삶만은 죽음의 위협에 맞서 계속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삶은 우리에게 본능이라는 무기를 주기 위해 우리를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 명료하고 의식적인 사고를 할 때 우리를 덮치는 공포로부터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삶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둔탁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고독의 심연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삶은 우리 마음속에 동료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삶은 우리가 야수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밀려드는 허무의 공격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극도로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닫혀 있는 가혹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가 어떤 사건이 불꽃을 던져 줄 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놀랍게도 무겁고도 끔찍한 동경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 P214

다들 평화와 휴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모두들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가 다시 무산된다면 이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토록 평화에 대한 희망이 간절하다. 만약 이들의 희망을 앗아 간다면 이들은 폭발하고 말 것이다. 평화가 오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 P228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한 세대가 자라고 있는데, 이들은 사실 여기 전선에서 몇 년 세월을 우리와 함께 보냈지만 이들에게는 침대와 직업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에 돌아가면 옛 직업에 복귀해서 진쟁 따위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뒤에는 예전의 우리와 비슷한 한 세대가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 서먹서먹한 이 세대는 우리를 옆으로 밀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인간이 되었다. 하여튼 우리는 커 나가서, 몇몇은 적응해서 살아가고, 다른 몇몇은 순응해서 살아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이럭저럭 세월이 흘러가고, 결국에는 우리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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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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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우울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습지의 사랑> 중에서 - P45

모든 가족들이 이럴까? 증오 없이 사랑만 하는 가족 따위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건 다 가식이다. 적당한 가식이 세상을 유지시킨다는 걸 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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