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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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아는 모부가 거쳐온 지난한 노동의 역사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란 노동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 어떤 어른들은 많이 일하는데도 조금 벌었다. - P39

강연은 정보 전달 이상의 기능을 해야 한다. 각자의 일로 분주했을 독자들이 집에서 발 뻗고 쉬는 대신 작가의 이야기를 등겠다고 교통체증도 감내하며 찾아온 자리다. 이 시공간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경험이어야 할 것이다. 슬아는 강연자로서의 자신을 반쯤은 공연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멋지게 입고 강연장에 간다. - P56

아우라는 강연자의 필수 덕목이다. 지나치게 긴장한 강연자는 아우라를 뿜을 수 없다. - P56

강연자는 주인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어떤 청중이 듣고 있느냐에 따라 강연이 다르게 흘러가기도 한다. 슬아는 청중과 함께 흔들리는 강연을 선호한다. 질의응답 시간을 길게 갖는다는 뜻이다. 일방적인 이야기는 한 시간 내로 마치고 질의응답에 삼십 분 이상 할애한다. - P57

웅이 입장에서 슬아는 괜찮은 보스다. 피고용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호하지 않게끔 요청한다. 웅이는 언제나 원하는 것이 분명한 상사를 선호해왔다. 그런 상사만이 정확한 지시를 할 줄 안다. - P277

"가족이라서 아빠랑 일하는 거 아니야. 아빠 같은 일끈이 의귀한 거 알고 있어요."
웅이가 잠자코 들으며 못 박는다. 그는 문득 호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르는 이 시절. 별다른 슬픔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 시절이 엉ㄴ제까지 계속될까? - P279

밤이 깊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수호신임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들은 종교의 근처를 배회한다. - P297

어쨌거나 그 책은 이제 철이의 인생과 조금 유관해졌다. 누구에게나 그런 책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알아보는 자에게는 다음 책과 또 다음 책이 초롱불처럼 나타난다. - P303

"아름다움은 중요한 가치야. 나는 아름다운 것이 좋아. 그치만 무엇이 아름다운 건지는 우리가 직접 정할 수 있어. 너는 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명하게 될 거야."
슬아와 아이는 글을 마저 읽는다.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 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슬아가 아직 탐구중인 그 일을 미래의 아이는 좀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 P307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은 너, 미운 너, 웃긴 너, 우는 너, 아픈 너, 질투 나는 너, 미안한 너, 축하받아 마땅한 너, 대단한 너, 이상한 너, 아름다운 너, 다만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인 너, 동물인 너, 죽은 너, 잊을 수 없는 너, 그런 너를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고 기억하는 나. 문학의 이유는 그 모든 타자들의 총합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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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보겠습니다 -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임은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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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 P111

잘못이라면 바로잡아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자성은 자성이 아닙니다. - P162

동료들이 힘껏 말하는 영역은 힘껏 말하는 분들이 워낙 많으니 그분들에게 맡기고, 저는 동료들이 애써 침묵하고 외면하는 문제를 말하려고 오랜 시간 버티고 있습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야만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주권자들이 우리를 믿도 우리에게 권한과 의무를 좀 더 맡겨주지 않을까 싶네요. - P169

‘세상은 물시계와 같구나, 사람들의 눈물이 차올라 넘쳐야 초침 하나가 겨우 움직이는구나, 사회가 함께 울어줄 때 비로소 역사가 한 발을 떼는구나‘ - P181

피해자인 유우성은 7년간 법정을 오가며 지옥을 헤매었는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안녕하고 무탈합니다. 검찰은 책임을 묻는 조직일 뿐 책임을 지는 조직이 아니니까요. - P201

저를 그렇게 비난한 검사들이 그대로 있는 검찰의 변화가 상전벽해와 가습니다. 놀랍기도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불의했던 시절 제가 불의에 가담하지 않았음에 인도합니다. - P204

가해자에게 사과를 권하지 않으면서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가해자들은 더욱 뻔뻔해지고, 피해자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옹졸함을 자책하게 되지요. 용서는 피해자의 의무가 아닌 권리이고, 사과는 가해자의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 P208

보수 언론은 검찰 수뇌부의 말을 속기사인양 그대로 받아쓰며 저를 매도하기에 급급했고, 진보 언론 역시 법령을 뒤져보는 수고를 게을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형사소송법, 검찰청법 등을 확인하고 제대로 취재했다면, "검사는 법에 따라 무죄 구형을 해야 하는 것이니, 백지 구형을 지시하고 검사의 이의 제기를 묵살했던 간부들을 중징계해야 한다"고 검찰을 비판했겠지요. 그러나 보수 언론은 황당했고, 진보 언론은 태만했습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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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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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 P67

멋진 조명 아래 있게 되면 이런 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 조명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물론 내가 잡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했던 일에는 워드 문서를 열고 재치 넘치고 세련된 <뉴요커> 스타일로 기사를 쓰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이 일을 하는 척만 하고 있었고 결국에는 그마저도 실패했다. - P94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P115

만약 무언가가 웃기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를 웃게 만드는지 확인하면 된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면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면 된다. 웃음만큼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좀 더 조용하고 주춤거림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 P116

경비원인 나는 유물 반환 문제에 특별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우리 중 누구도 석방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있는 것들을 붙들고 있는 감옥의 교도관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있다. - P123

때때로 우리에게는 멈춰 서서 무언가를 흠모할 명분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것을 허락한다. - P152

그들은 어머니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사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 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이런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다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 P152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 P166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 P206

양탄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수만 개의 매듭과 실이 마치 현재와 과거, 현실의 엄청난 밀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때는 이 네 귀퉁이 너머로 펼쳐졌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테일로 가득한, 모든 찬란하고 평범한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또한 내가 방금 이야기한 맘루크 역사의 밑그림이 엄청나게 빈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일강을 따라 수천 마일에 걸쳐 펼쳐진 땅에 존재했던 무한히 복잡했을 수천 년의 역사를 나는 고작 ‘이집트‘와 같은 작은 단어로 일컫는다. 양탄자를 내려다보자니 초월적인 질문들에 추상적인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더 많이 탐구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 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 P217

나는 이제 베테랑이 됐고 이 일이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나에게 맞는 리듬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날에 내가 맡은 일은 그저... 여느 직장의 일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이 상태가 나를 그리움과 후회로 가득 채운다. - P250

당신은 지금 세상의 축소판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 P322

가능하면 미술관이 조용한 아침에 오세요.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하고도, 심지어 경비원들하고도 말을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 눈을 크게 뜨고 끈기를 가지고 전체적인 존재감과 완전함뿐 아니라 상세한 디테일을 발견할 만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세요. 감각되는 것들을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거기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어쩌면 그 침묵과 정적 속에서 범상치 않은 것 혹은 예상치 못했던 것을 경험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 P323

예술품의 제작자, 문화, 의도된 의미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모두 알아내세요. 그것은 보통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방침을 바꿔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와 다름없이 오류투성이인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메트입니다. 여러분은 예술이 제기하는 가장 거대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생각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기대어 용감한 생각, 탐색하는 생각, 고통스러운 생각, 혹은 바보같을 수도 있는 생각들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맞는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 P323

메트에서 애정하는 작품이 어떤 것인지, 배울 점이 있는 작품은 무엇인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연료가 될 작품은 또 어느 것인지 살핀 다음 무엇인가를 품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품고 나간 것은 기존의 생각에 쉽게 들어맞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계속 마음에 남아 당신을 조금 변화시킬 것입니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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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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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과들이 이렇게 과학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진짜 위기에 빠지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때다. - P27

인문학에는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럴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 P28

인문학의 위기는 질문을 제때 수정하지 못한 데서 싹텄는지도 모른다. - P30

어느 대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직원 평균 연봉의 1,000배를 가져가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연봉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지 생산에 1,000배 더 기여해서가 아니다.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가 똑같은 작업을 하는 원청 소속 노동자의 절반 수준 시급을 받는 것은 중간착취와 불평등을 허용하는 제도 때문이지 생산 기여도가 낮아서가 아니다. 한계생산력분배이론의 오류는 신경세포의 작동 원리를 물리법칙 형식으로 만들어 신경세포와는 무관한 경제현상에 적용한 데서 생겼다. - P62

과학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철학자는 모른다는 말도 무언가 아는 것처럼 한다.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무엇보다 그런 면이 다르다. 나는 그게 인문학의 메력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증명한 사실만 책에 담아야 한다면 국립중앙도서관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P68

인간의 뇌는 작은 신도시가 아니라 오래된 대도시를 닮았다. 설계도에 따라 창조한 기계가 아니라 맹목적인 진화의 결과 나타난 기계이기 때문이다. - P84

뛰어난 인문학자는 물질의 증거 없이도 옳은 인식에 다가선다. 때로는 과학자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 P88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한다." - 에드워드 윌슨 - P88

그렇지만 나는 김지하 시인이 젊은 시절 썼던 시와 산문을 여전히 좋아한다. 그때 그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인생의 한
굽이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기회를 준 시인에게 지금도 감사한다. 1991년 이후 시인의 말과 글이 달라졌어도 상관없다. 그런 것은 듣지 않고 읽지 않으면 된다. - P91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휠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이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 P99

모든 생물의 DNA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게 뭐 그리 감동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왜 아닌지 되묻고 싶다.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로 ‘존재의 고독‘을 덜 느낀다. - P119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댜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옮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 P127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P133

우파는 진화라는 사실을 도덕으로 만들었다.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한다고 해서 다 아름답고 좋은 건 아니다. 생물은 어디서나 생존경쟁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존경쟁이 아름답거나 고귀하다고 하는 건 어리석다. 반면 좌파는 도덕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실을 무시했다. 자연선택과 진화는 특정한 방향이 없다. 인간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경쟁하며 인간에게도 보편적인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 좌파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사회를 재조직했다가 대형 참극을 저질렀다. - P134

옳다고 해서 뭐든 실행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P136

해밀턴의 이론은 맹자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보편적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는 이타 행동의 범위는, 가족에서 시작해서 이웃으로 넓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이 인정하는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라고 해서 훌륭한 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름답다. 우리 삶에는 도덕과 미학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 그대로 알면서 선과 미를 추구하자. 사실을 도덕으로 착각하지도 말고 도덕으로 사실을 덮지도 말자. - P154

과학자들은 흔히 호모 사피엔스가 찾아낸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로 원자론을 꼽는다. ‘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해낸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인었을까? 바로 그 발견을 이끌어낸 질문이다.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답을 찾응려면 크고 복잡한 세계를 작고 단순한 것으로 끝없이 쪼개야 한다. 과학의 역사는 환원주의 연구방법론의 위력을 결과로 증명했다. - P197

분석은 과학적 방법으로 하지만, 통섭은 언어로 해야 하기에 과학과 인문학이 모두 필요하다. 진리를 따라 과감하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어야 한다. - P201

나는 머리를 쥐어짜서 고전역학을 일부 ‘이해‘했다. 그러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냥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는 초인간적.초자연적 인격신의 존재를 믿고 경배하는 행동양식이 호모 사피엔스 군집에서 진화한 이유를 어쩌면 알 듯도 하다. - P227

과학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필요에 따라 과학을 배척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다. 무엇도 배척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아야 훌륭한 것 아니겠는가. - P236

‘자등명 법등명‘ 그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법(진리)을 등불로 삼는 것은 관습과 미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산다는 뜻이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라 했으니 석가모니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P238

인문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럴법한 이야기‘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인문학의 전통적인 언어로 바꾸어 보자.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같은 뜻이지만 이렇게 말하니 품격이 높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나는, 품격 있는 문장보다 뜻을 쉽고 명료하게 전하는 문장이 좋다. 취향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 P244

엔트로피 법칙을 안다고 해서 크게 좋을 건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분명 낫다. 특정한 종류의 오류와 불행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 P250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차제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 P256

중요한 건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다. 파인만의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바보‘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죽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였음을 알고 ‘바보‘를 면하는 게 ‘바보‘인 줄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낫다.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행복은 오래간다. - P291

누차 말했지만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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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연습 - 김승옥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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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 P220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 P221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 P223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 P224

마침내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았다. 그 소리도 마침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계속할 것 같았다. 그때 소리가 갑자기 힘을 잃으면서 꺾였고 길게 신음하며 사라졌다. - P242

나는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나는 우울한 유령들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벽에 걸린 하얀 옷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나는 담뱃재를 머리맡의 적당한 곳에 털었다. 내일 아침 걸레도 닦아내면 될 어는 곳에. - P243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바쁘다. 자랑스러워할 틈도 없이 바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나였다. 그만큼 여기는 생활한다는 것에 서투를 수 있다고나 할까? 바쁘다는 것도 서투르게 바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일인든지 설령 도둑질이라고 할지라도 서투르다는 것은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미끈하게 일을 처리해버린다는 건 우선 우리를 안심시켜준다. - P247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 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리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 P255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 P256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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