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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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아줌마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고 나서 나한테 괜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목숨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 P66

그제서야 나는 아줌마의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불행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날 때도 된 것이었다. 사는 동안 겪는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 P81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과 머리이며, 그래서 그것들은 아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심장이 멎으면 사람은 더이상 살 수 없게 되고, 뇌가 풀려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사람은 더이상 제힘으로 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된다. - P101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멀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대,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 P103

마약을 얻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마약 주사를 맞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녀석들은 단박에 공짜로 주사를 놓아준다. 자기 혼자 불행해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내게 첫 주사를 놔주고 싶어하는 녀석들은 숱하게 많았지만, 내가 뭐 남 좋자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내겐 로자 아줌마만으로도 벅찼다. 나는 나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모든 것들 다해본 다음에나 그 행복이란 놈을 만나볼 생각이다. - P104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라는 말처럼 얄퍅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메카에까지 다녀왔다. - P112

하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뭐가 됐을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다 하밀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삼천을 따라 프랑스에 왔는데, 할아버지가 아직 어릴 때 삼촌이 돌아가셨지만 스스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요사이에야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P126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이다. 그곳에 태양과 광대와 개들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 - P127

할아버지도 이제 너무 늙어서, 알라신을 생각해줄 처지가 아니잖아요. 알라신이 할아버지를 생각해줘야 해요. - P158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P178

"선생님, 내 오랜 겅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 P271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라리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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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4-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앞의 생』은 저도 감명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쓴 작가 로맹 가리에 얽힌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제가 직접 만든 영상도 있으니, 재미삼아 한번 구경해 보세요~
https://youtu.be/vKy0n0XDJ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