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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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전 읽었던 멋진 신세계를 독서모임에서 다시 읽었다. 혼자 읽을 때와 같이 읽을 때는 그 느끼는 바가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읽기를 하고 굳이 불편을 감수하고 독서 토론과 독서 클럽을 조직하는 것일게다.

 

멋진 신세계는 올더시 헉슬리가 1932년에 쓴 미래 세계를 예언하듯 그린 소설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로 읽어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묘사와 장면들이 여기 저기 많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본 사회와 인물들이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 매트릭스 안에서 살며 진실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네오(키아누 리브스)일행을 잡으려는 스미스 군단-생김도 똑같고 역할도 똑같은 스미스들을 우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볼 수 있다.

 

멋진 신세계에는 여러 계급이 있다. 제일 지적인 일을 담당하는 알파와 베타, 육체 노동과 잡일 담당하는 감마와 델타, 사회의 하층 계급으로 가장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앱실론. 알파 계급의 경우 생김이 다양하지만 하위로 갈수록 생김의 종류가 단순하다. 그래서 앱실론 계급은 수 만명의 사람(과연 사람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이 단지 서너 종류의 외모만을 갖고 있고 생김에 차별이 없어서 매트릭스의 스미스처럼 보는 것만으로는 구별을 할 수 없다. 매트릭스에서처럼 개체는 인공 부화로 태어나 부모가 없고 개인적 인연이 없다. 모든 교육은 국가가 계획하에 시행된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통제되어-심지어 아름다움까지도-불안과 불안정이 없다. 이것이 신세계이다.

 

몇 년전 베스트셀러였던 기억전달자(The Giver)에서 모든 불안과 불확실성이 제거되어 평안과 편안만이 존재하는 세상 역시 멋진 신세계에 존재하는 세계이다. 전쟁, 기아, 고통, 불행, 이별, 슬픔, 눈물이 없어진 세상에서 이것들은 오직 기억전달자로 선정된 사람만이 세대를 거쳐 기록도 영상도 아닌 기억만으로 전달되고 남겨지고 있다.

멋진 신세계에는 기억전달자가 아닌 포드님(하느님과 같은)이라고 불려지는 통제관이 바로 그 역할이다. 그는 과거를 알고 문학을 알고 과학을 알지만 오직 그만 가지고 있고 신세계는 이것이 배제된 사람의 역할과 감각과 순간의 즐거움만이 존재한다. 신세계에는 "오늘 누려도 되는 즐거음을 내일로 미루지마라"라는 말이 지배한다. 항상 욕망을 충족한다. 그래서 욕망과 욕구가 없다.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 기시감을 느낀다. 어디서 본 것이고 어디서 들은 것이다. 제목은 멋진 신세계이지만 작품 내용은 하나도 신세계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언뜻보면 소재와 주제의 재탕 삼탕같아서 실망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시감의 원류는 바로 이 '멋진 신세계'다. 이 소설은 1932년에 나왔다. 지금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봐온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컨텐츠들은 실은 멋진 신세계가 그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전혀 아니다. 영화 매트릭스, 가타카, 블레이드러너, 아일랜드 등 인간 복제, 편리와 편안, 고뇌가 없는 세상 등 전부 신세계에서 다룬 아이템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본다면 그 당시에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써내려갔을까하는 생각에 그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신세계는 이런 사회이다.

 "사회적인 불안정이 없으면 비극을 생산할 길이 없으니까요.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P333)

 

신세계의 포드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신세계에 행복은 없다. 다만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행복과 즐거움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일상이 늘 똑같이 편안할 때 행복을 늘 느끼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때는 어제보다 더 즐거울 때, 어제 고통과 번뇌가 찾아들었는데 오늘 그것이 사라졌을 때 힘든 노동을 인내하고 잠시의 휴식을 가질 때 우리는 보통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즉, 반드시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인간은 바닥이 있어야 고점이 있고 고통이 있어야 행복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거다. 그래서 지금 내가 행복하더라도 남을 돌아볼 줄 알고 겸손할 줄 아는 것이고 반대로 지금 내가 불행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뒤따를 행복을 기대하며 희망을 가지며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꼭 고통과 불행과 인내가 있어야만 하나? 신세계처럼 늘 즐거움만 있으면 안되나? 신세계의 세계관을 굳이 삐딱하게 봐야할까?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항상 즐거운 것이 곧 행복아닐까?

 

책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약간의 신체적 결함을 가진 신세계 사람 버나드, 정신적으로 과잉스러운 신세계 사람 헬름홀츠, 신세계가 아닌 보호구역에서 살았던 야만인 존.

버나드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으로 자유과 생각을 하곤 했던 인물이지만 결국 신세계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세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을 선택했다.

존은 세익스피어를 이미 읽어버린 야만인(신세계 기준으로)으로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하고 죄악을 원하며 '사실상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며 스스로 고통의 삶을 선택하여 결국 자살을 택했다.

헬름홀츠는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알파와 달리 정신적 과잉을 가지게 되어 자유과 번뇌를 아는 알파 계급으로 그는 100% 고통의 삶 혹은 신세계에 적응하는 삶 대신 신세계가 지배하는 아일랜드로의 유배를 스스로 선택하여 비록 지루하고 즐거움이 없더라도 시와 과학을 연구하는 것을 삶을 선택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나는 헬름홀츠의 삶을 선택할 것 같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태어나고 신세계에서만 살았더라면 과연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통제관 포드가 멋지다고 역설한 신세계의 삶이 이론적으로 완벽해 보이고 설핏 혹하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는 '멋진 신세계'에서 멋진 삶을 살고있는 버나드와 레니나와 헨리 포스터가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내 나름으로 멋진 삶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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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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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지도사 수업를 가르치던 천원석 선생에게서 장영희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그의 수필을 접해볼 기회조차 없었던 건 당연지사.

 

천원석 선생은 그의 삶과 수필이 참으로 정수라고 하며 꼭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였는데, 요즘 내가 수필쓰기에 관심이 생기다 보니 이 책도 이제야 읽어볼 요량이 생겼다.

 

나는 본디 서사를 좋아하고 감성과 서정을 노래하는 것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여 주로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이고 상대적으로 시와 수필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무릇 글이라 함은 스토리가 있어야지, 잘 짜여진 플롯이 있고 다양한 인물과 배경이 있어야지, 내 느낌 달랑 한줄 내 생각 두어 장 갈긴 것은 글이라기 보단 낙서장에 갈긴 내 일기 정도로 치부했다고나 할까.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장영희 교수는 1952년에 태어났고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목발과 휠체어를 벗으로 삼아 살았던 서강대 영문과 교수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2009년에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낫다. 그는 장왕록이라는 우리나라 영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 아버지였는데 장영희 교수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 역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수필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많이 나온다.

장영희씨는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그야말고 청렴하고 성실하게 학생들을 사랑하며 존경받는 스승으로 삶을 살았던 듯 보여진다.

 

그의 수필은, 하루 글 한 편을 쓰고 있는 나에게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과서에서 읽은 것이 내가 읽은 수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비로소 수필을 그것도 한 사람이 쓴 수필집을 온전히 재미를 갖고 감동으로 읽어낸 것은 처음이다. 그처럼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은 가슴에 울리는 바가 크다.

 

결코 유려하거나 필체가 뛰어난 문필가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수필 각 한 편 한 편이 솔직하고 담백해서 화려하지 않아도 마치 단편소설을 읽는 양 재미가 있고 감동도 있다. 영문학자라 그런가 영미문학이나 소설가들의 명언도 많이 알아서 군데 군데 끼워넣은 격언, 명언, 명사들의 비유와 은유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딱 맞아떨어져서 결코 '~체'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어떤 수필은 온전히 자신의 느낌만으로, 또 어떤 수필은 적절한 에피소드를 잘 엮어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내는 것으로, 또 어느 것은 최근 일어났던 사회 현상이 사건 들을 가지고 한 편의 멋진 일상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 놓았다. 결코 현학적이지 않고 언뜻 보면 누구나 이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이 쉽게 보이는 글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이리 쉽게 보이는 글 한편도 써 내려면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고뇌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한지를. 요즘 하루 한 편 짧은 글, 일주일에 한 편의 긴 글을 써보면서 온전한 글 한편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의 고통, 그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꾸 쓰다보면 장영희처럼 쓸 수 있을까?

 

진정 수필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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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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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는 조선과 일본사이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에 태어났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해에 그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주는 듯했다.

 

백범의 원래 이름은 김창암이었다. 열일곱 살에 과거를 보러 갔는데 백주대낮에 너무도 공공연히 벌어지는 시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교리에 끌려 동학에 입당하게 되는데 그 때 김창수라고 개명을 하였다. 그의 나이 37세 되던 1912년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마침내 김구(金九)라고 개명을 다시 하고 백정 범부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김구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기원을 담아 백범(白凡)으로 호를 정하였다.

 

백범은 과거 시험을 포기한 대신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을 배우게 된다. 아버지가 빌려준 <마의상법>을 갖고 거울로 자신의 상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히는 방식으로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관상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이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 밖에 없었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상서 중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백범은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하였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찾아 나선 길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그 길, 바로 일제의 억압과 압정에 맞서 우리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나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문지기의 길이었다.

 

사실, 그의 일생을 개인사로만 본다면 그가 본 관상 대로 그의 얼굴은 천격, 빈격, 흉격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학 시절, 뛰어난 리더십으로 아기 접주의 위치에도 올랐지만 같은 동학당 동료의 배신으로 동학당의 공격은 실패를 하였고 구월산으로 몽금포로 도망 생활을 했다. 두 번 씩이나 파혼을 당하였으며 인천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안정된 정착 생활은 거의 하지 못했고 만주로 공주로 황해도 안악으로 역마살 가득한 이동 생활을 했으며 또다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수차례 당하며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기미년 3.1만세 이후 상해로 망명해 나라 없는 설움을 독립운동으로 풀려 했으나 허명에 움직이는 운동가와 독립운동의 겉옷만 입은 공산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처절히 고군분투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반짝 희망이 보이는 듯 했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추적 속에서 장사로 광저우로 충칭으로 늘 쫓겨 다니며 밥을 굶기도 하며 가족도 제대로 같이 화목하게 살아보지도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렇게 원하던 독립은 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룬 독립이 아니고 도둑맞은 듯 몰래 온 독립이었고 그 독립도 완전한 것이 아닌 남북으로 갈라진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 조국을 위해서 3.8선을 베고 쓰러질 각오도 서슴지 않았던 그가 남과 북이 각각 다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 계속된 노력을 하다 19496월 우리 군인 안두희의 총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쫓기는 신세, 감옥살이, 가족과 헤어진 홀로 생활, 마지막 비극적 죽음까지, 백범은 관상처럼 어렵고 흉하고 끊임없는 고난의 살았다. 이를 보면 백범은 관상학에 소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그의 고난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선택이었다. 마을에서 추앙받고 영민한 젊은이로 인정받고 훌륭한 교육자로 존경받았던 백범이 고난의 삶을 택하지 않고 고향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고 후학 양성에 힘쓰며 생활했다면 소소한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으면서 해방 후에는 이름 꽤나 얻는 삶을 살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삶은 백범이 생각한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니었다.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능력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백범은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처럼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이 아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과거에 비해 현대 사회는 선택지가 더 많아서 선택을 하는데 장애를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그 때마다 우리는 몸에 이로운 것과 그 이로움이 즉각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선택을 하고는 한다. 의로운 것에 대한 선택은 점차 줄어가고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놓는 선택은 어렵고 힘든 세상이다. 그런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 선택을 누구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나 백범의 생애를 보면서 남아있는 인생의 선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벼랑 끝의 손을 놓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하는 선택이 내 한 몸 이로운 선택만은 아니기를 오늘도 다짐 하나 가슴 속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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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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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읽었나보다. 사랑을 하고 그 결과물로 얻은 아이들이 벌써 성인이 된 지금은 사랑의 첫 순간을 떠올리며 이유를 되새기기에 내 기억력을 이미 퇴화해버렸고 감정의 촉수도 세월에 너무 무뎌버렸다. 유익하긴 하나 심장이 떨리지 않는 심리학 서적같다. 25살적 작품이라는 이유로 별3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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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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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기로 안나 카레니나는 매번 1등이었다. 서울대 선정 필독 문학에서든 BBC 선정 학생들이 꼭 읽어야할 책에서든 하버드에서 선정 필독서 목록에서든, 언젠가 본 문학관련 블로거의 감명 깊게 읽은 세계 문학리스트에서조차 안나 카레니나는 거의 1등이거나 매번 TOP 3에는 올라와 있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도 너무도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 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첫 문장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보다 적을 것이다. 많은 매체에서 인용되고 소개되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큼 보편적 사실과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안나 카레니나이지만 사실 많은 주연급 등장인물의 출연 비중은 어느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비등비등하다. 주요 인물과 그들이 꾸리는 가정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알렉세이

알렉세이와 중매결혼을 하고 세료쥐아라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있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있는 안나는 크게 행복하지도 크게 불행하지도 않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빠 스티바의 외도에 이혼을 하려는 올캐 다리야를 위로하고 설득하러 가는 길,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젊고 자신만만한 브론스키 백작과 급격히 사랑에 빠지고 몰래 만남까지 하게 된다. 무미건조한 알렉세이는 명예를 중시하고 책임감은 강하지만 매력이 없는 남자로 브론스키와 나누던 달콤한 사랑의 묘미를 알게 된 안나는 남편의 코가 미워 보이기 시작한다. 부부관계의 위기가 시작됐고 결국 안나는 알렉세이의 집을 나오고 브론스키와 살지만, 아들 세료쥐아 때문에 안나는 이혼을 결심하지 못하고 브론스키와 불안한 사랑을 영위한다. 안나와의 흔들리는 사랑과 사교계의 외면으로 지쳐가는 브론스키, 갈등은 시작되었다. 외도한 오빠의 올캐의 이혼을 막기 위해 앞장섰던 안나, 이제는 그녀가 이혼을 결심해야 하는 처지인 것은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스티바(스테판)와 다리야(돌리)

안나의 설득으로 돌리는 이혼을 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 충실한 가정생활을 다짐한 스테판은 여전히 가정보다는 바깥 생활에 중점을 두고 사교에 힘쓰며 더 많은 급료를 쫓는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 이들은 아이를 또 낳지만 거의 혼자서 4명이나 되는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힘쓰며 집안 살림까지 신경 써야 하는 돌리는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안나를 사람들이 부정한 여자하게 바라볼 때 그녀를 연민하고 동정한다. 하지만 위로 차 안나를 방문했을 때 돌리는 사랑받는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행복감과 반짝거림에 자신의 처지-꽃다운 시절은 육아로 다 보내고 지치고 늙은 겉모습만 남은-에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동시에, 아름답고 빛나지만 어딘지 모를 불안과 초조를 갖고 사는 안나의 모습에 사랑을 선택한 안나가 과연 행복한지 의문을 갖게 되고 비로소 돌리는 아이와 남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레빈과 키티

브론스키의 화려한 용모와 언변에 끌린 어린 키티는 그와 결혼을 꿈꾸며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키티의 예상과는 다르게 브론스키는 이미 안나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모멸감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키티는 몸과 마음이 허약해진다. 위로와 치유를 위해 떠난 여행에서 키티는 바세니카라는 여인을 통하여 봉사와 희생이 주는 참의미를 깨닫게 되고 이로 인해 내적 성장을 얻는다. 고향에서 은둔자적 생활을 하던 레빈은 농업과 러시아 농민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각자 성장을 한 후 다시 만난 레빈과 키티는 결혼을 하고 새 생명의 탄생까지 경험하면서 서로를 신뢰하는 부부생활을 해나간다.

 

주요 인물과 대략의 줄거리만 본다면 1부에서 8부까지 각 3권 약 2000페이지나 되는 분량에 궁금증이 인다. 사람의 인생이 혼자만의 생각과 생활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 이 책에서는 위에 언급된 주요 인물들 외에도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있다. 정치가, 행정가, 학자, 농민, 귀족,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1870년대 러시아 시대의 생각을 두루 두루 소설을 통해서 대화와 서술로 묘사되었다. 소설의 막대한 분량은 이 주변 인물들과 함께 주요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고뇌, 의식의 흐름들로 채워져 있다. 이 모든 것을 대작가 톨스토이는 단 하나의 우연도 없이 단 한명의 캐릭터도 겹치지 않고 개성있게 다 취급하고 있다. 인물에 대한 애정과 시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아니라면 실로 작가의 천재성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1870년 당시 톨스토이의 행적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에서 레빈이 바로 톨스토이 본인인 듯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전 러시아는 유럽 선진 사조와 내부 왕조의 부패, 노동자/농민 계급의 삶의 고단함으로 변화의 잠재성이 꿈틀대던 시기였고 톨스토이는 그것을 감지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러시아 산업 기반의 토대인 농업의 발전을 시도했고 농업의 근간이 농민들을 이해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레빈처럼 직접 뛰어들어 계몽을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대 후반부터 종교와 신앙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는데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소설 속 레빈과 흡사하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고민과 생각의 변화를 레빈을 통해서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톨스토이는 소설의 제목을 레빈이 아닌 안나 카레니나라고 지었을까? 무뚝뚝한 30대 남자보다 매혹적인 여인이어야 책이 잘 팔릴 것 같아서? 바람난 여자에 대한 상징성으로? 안나는 알렉세이와 안정적이지만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은 결혼 생활을 했다. 브론스키에게서 가슴 떨림을 알게 된 후 안나는 어느 정도 충동적으로 불안한 사랑을 선택한다. 하지만 안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 행복해지지 않았다. 브론스키와도 늘 아들을 그리워하며 곁에 있는 딸은 외면한 채 멀리 있는 행복만을 추구하였다. 이렇듯 흔들리는 인생과 그 인생에서 늘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인간을 투영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150여년전 소설이지만 오늘 읽어도 지금 내 이웃의 이야기인 것 같고 1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공감을 받을 작품이다. 물론 필독서 리스트와 감명리스트에서도 여전히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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